처음에는 응? 했는데 읽으면서 응! 이랬다. 이런 솔직한글 정말좋다.






사람과 연애할 때 굳이 내가 아니어도 상관 없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나는 폭발한다.

내가 아니어도 됐다면 나와 시간을 보내지 말았어야지?

나를 대체물로 거기에 있도록 한 사람에게 나는 살의를 느낀다. - P28

사랑이라는 감정은 좋은 것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정치에 관해 말하는 법에 관해 말하든 분노나 용서에 관해 말하든 사랑을 빠뜨린 적이 없다. 사랑이 결여된 인간은 정치도 법도 분노도 용서도 올바르게 행할 수 없다. 사랑으로 그것을 다룰 때 인간은 이 세계에 인간의 존엄을 해치지 않는 정치와 법을 세우고 분노와 용서가 인간을 장악하지 않을 수 있도록 계도한다. 이것이 내가 이해한 마사 누스바움의 주장이다(사실상 호소에 가깝다). 나는 그 사랑 때문에 마사 누스바움의 모든 저작을 사랑한다. 그러나 인간은 사랑이 결여된 채로 이 세계를 건설하고 통치한다. 사랑 말고 다른 많은 것이 이 세계를 장악하는 데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 P63

사랑을 품은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 거의 매번 지고 만다. 사실이 그렇다. 사랑이 결여된 세계는 사랑하는 사람을 고통 속에 살아가게 내버려둔다. 사랑이 결여된 세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방치되어 무능력한 존재로 낙오한다. - P64

낙오자는 사랑을 품은 채로 병든다. 먼저 마음이 병들고 병든 마음이 몸을 무기력한 상태로 전락시킨다. 랑하는 사람은 너무 많이 반성한다. 사랑하는 자신과 사랑이 없는 세계를 반성하면서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진단한다. 하지만 세계를 바꿀 힘은 있기도 하지만 없기도 하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힘이 넘친다. 사랑이 없는 사람의 정력적인 얼굴과 힘찬 걸음걸이를 우리는 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인가. 사랑하기 때문에 병들고 무기력한 사람이다. - P64

사는 동안에 단 한 번도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매일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매일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행복하게 죽고 싶다. 행복하게 죽고 싶어서 매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더 이상 살아가지 않기로 숙고하여 신념을 가지고 결정했을 때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죽을 수 있는지 매일 상상한다. - P91

지금 당장 나에게 안전하고 행복하게 죽음을 선택 할 수 있는 방편이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면 더이상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텐데, 안심하고 살아갈 텐데. 매일 다른 내일을 만들 텐데. 매일 다른 용기를 가질 텐데. 매일 다른 사랑을 낳을 텐데. - P91

자력으로 내 몸을 건사할 수 있을 때까지만 살아 있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내 죽음은 내가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삶이, 인생이, 이 사회가, 내가 간절히 원한다고 하여 그 원함에 응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내가 실패한 방식을 통해 알게 된, 그리하여 그다음엔 실패하지 않을 수 있을 방식으로 나를 죽여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슬프거나 무섭지는 않다. 나는 스스로 죽는 것보다 죽지 못하고 타의에 의해 계속해서 살아있는 것이 더 무섭다. - P100

사랑하지 않으면 편리할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간단히 무시할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모른 척할 수 있 다. 사랑하지 않으면 회피할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무책임할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변명할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거짓말할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금세 말을 바꿀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재빨리 모습을 바꿀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더 빨리 갈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더 많이 가질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버릴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모를 수 있다. 모르는 것은 사랑하지 않으면 폭력이 된다. 아는 것은 사랑하지 않으면 허영이 된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으므로 이 모든 일을 알지 못한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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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5-29 1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00쪽의 글 - ˝자력으로 내 몸을 건사할 수 있을 때까지만 살아 있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저도 이런 생각을 해요. 누군가에게 의지해 살아야만 되는 시점이 오면 삶이 더 이상 행복할 것 같지 않아요. 자식이든 남편이든 저로 인해 힘드는 것도 싫고요. 장수 시대가 갖는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되어요.
마사 누스바움, 저도 그의 저작을 읽은 적이 있어요. 풍부한 학식이 느껴지더군요.^^

새파랑 2023-05-29 15:51   좋아요 1 | URL
이런 생각을 많이들 하나봅니다. 저도 그런 생각 가끔씩 합니다 ㅋ 저도 마사 누스바움 읽어보고 싶습니다~!!
 

엄청냐 흡입력과 재미 보장

이건 우리 탐험의 클라이맥스였다. 예수그리스도, 저들이 생각 하기에 세상의 모든 것이고 내가 생각하기에 세상의 모든 것을 망쳐버린 존재. 그리스도가 없다면 기독교도도 없을 테고, 기독교도가 없다면 반유대주의도 없을테고, 반유대주의가 없다면 히틀러 도 없을테고, 히틀러가 없다면 린드버그가 대통령이 되지 않았을 테고, 린드버그가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면……… - P172

"보통 사람들이 화를 내는 이유와 똑같아.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해서.." - P185

"유대인? 난 유대인 때문에 인생을 망쳤어요! 유대인 때문에 빌어먹을 다리를 잃어버렸어요! 당신 때문에 빌어먹을 다리를 잃어버린 거예요! 당신이 린드버그한테 찬성하는 반대하는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가서 린드버그와 싸우라고요? 우라질 난 멍청한 어린애니까 당연히 가서 싸워야죠. 그런데, 보세요. 이걸 보라고요. 염병할 삼촌, 난 빌어먹을 다리가 없다고요!" - P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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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5-26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FDR이 아닌 이상한 대통령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왠지 낯설
지가 않더라구요.

새파랑 2023-05-26 12:26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뭔가 허구가 아닌 사실같은 느낌도 좀 들었습니다 ㅋㅋ

미미 2023-05-26 2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미보장이라니 저도 읽어보고 싶어요ㅋㅋㅋ

새파랑 2023-05-27 12:23   좋아요 1 | URL
미미님 필립 로스 전작 하시죠 ^^
 

완전 내취향의 책. 사람의 마음이란 왜 그렇게 변하는걸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혼란스럽다 혼란스러워 ㅋ


나는 내가 골몰해 있는 문제를 남에게 털어놓는 일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성가심을 무릅쓰고 남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그럴 때면 쉴 새 없이 농담을 지껄여 대화에 활기를 불어넣음으로써 화제의 단조로움을 덜었다. 그러나 속마음을 내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P18

내가 어떤 것에도 구속받기 싫어하고, 그래서 나를 둘러싼 온갖 관계에 대해 항상 불안해하고, 어쩌다 새로운 관계라도 맺을라치면 괜한 두려움부터 앞서곤 하는 버릇도 역시 거기서 생겨난 것이다. - P18

나는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나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어떤 감정의 욕구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 욕구는 대개의 경우 채워질 수 없는 것이었고, 그럴때마다 나는 나의 호기심을 끌었던 대상으로부터 차례로 떨어져 나가곤 했다. - P19

이런 태도는 말하자면 만사에 대한 무관심이었고, 이런 무관심은 결국 죽음에 관한 사색으로 말미암아 더욱 굳어져 버렸다. 죽음에 관한 사색은 젊은 시절부터 나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문제에 관해 어쩌면 그렇게 무관심할 수 있는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 P19

사람의 감정이란 참으로 모호하고도 복잡한 것이다. 그것은 눈으로 붙잡을 수 없는 수많은 인상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쓰는 말은 언제나 조잡하고 또 너무 일반적이어서, 그런 감정을 뭐라고 지칭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감정을 어떤 것이라고 규정짓는 데에는 별 소용이 없다. - P27

그녀는 무엇보다 싫어하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엘레노르는 자신의 운명과 끊임없는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녀는 일거수일투족 을 통하여 자신이 처해 있는 계급에 반항하고 있었던 것이 다. 그러나 현실이 자기보다 강하고, 아무리 발버둥 쳐보았자 자신의 처지를 조금도 바꿀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무척이나 불행한 느낌을 억누를 수 없었다. - P31

나는 내가 세운 목표를 향해 가능한 한 빨리 나아가야 한다고, 마치 의무감처럼 느끼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기분에만 마음껏 젖어 있을 수가 없었다. 말만 꺼내면 성공은 문제없으리라는 생각에 하루라도 빨리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다. 그러다가도 내가 과연 엘레노르를 사랑하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를 끊임없이 사로잡았다. 나는 수많은 계획을 짜고, 그녀를 정복할 수 있는 갖가지 방법을 궁리했다. 한 번도 실행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성공하리라 확신하는 그 무경험의 자만심으로. - P34

나 혼자 있을 때의 내 속을 들 여다본 사람이라면 나를 더없이 냉혹하고 비정한 유혹자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녀 곁에 있는 나를 본 사람이라면 더 없이 순진하고 열렬한 연인으로 여겼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 두 개의 얼굴을 각각 나의 참모습으로 생각했을지 모르나, 실은 그 어느 것도 진정한 모습이 아니었다. 무릇 사람에게는 완벽한 조화가 있을 수 없다. 성실만으로 똘똘 뭉친 사람도 없고, 온통 악의만 가진 사람도 없는 법이다. - P35

"보다시피 저의 모든 것은 부인의 처분에 달려 있습니다. 제가 무슨 짓을 했기에 부인께서는 저를 고통에 빠뜨리면서 즐거워하시는 겁니까?" - P43

어제 일을 잊어주세요. 흥분에 휩싸였던 그 순간을 잊어주십시오. 그래서 전처럼 저를 맞아주세요. 제가 당신 을 사모하고 있다는 건 저 혼자서만 마음속에 간직해두어야 할 비밀이었어요. 그런데 괜한 흥분에 겨워 그 비밀을 털어 놓고 말았습니다. 저의 실수였어요. 부디 저의 실수를 용서 하시고, 어제 있었던 일은 모두 잊어주십시오. - P45

엘레노르, 제발 제 간청을 들어주세요. 당신도 어느 정도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오로지 당신만을 생각하고, 당신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통과 절망을 잊고 제가 아직도 한 가닥 삶의 행복과 희망을 느낀다면, 그건 다 당신 덕 택입니다. 이런 제가 당신 곁에 있고, 또한 저한테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 P46

사랑은 일종의 마술과 같은 것이어서 오랜 추억을 대신한다. 사랑은 마치 요술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하나의 과거를 만들어내어, 그것으로 우리를 감싼다. 사랑은 말하자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의 알지 못했던 사람과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듯한 느낌을 안겨주는 것이다. 사랑이란 한순간에 타오르는 하나의 불빛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것처럼 여겨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랑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얼마 안가서 그것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이 존재하고 있는 동안은 지나온 시간을 밝혀줄 뿐만 아니라 장차 다가올 시간 위에도 밝은 빛을 뿌려주는 것이다. - P51

우리가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당신은내사람이 될 수 있었을 것을! 당신을 그토록 찾아다녔으면서도 너무나 뒤늦게 만난 까닭에 이토록 고통에 시달려야 하 는 이 마음, 내 마음을 위해 조물주가 창조해준 유일한 생명체인 당신을 내 품에 껴안고 있었을 것을! - P53

그러나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해서 엄연한 사실 이 숨겨지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더구나 속에 감추어 진 채 놓여 있는 사실이란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되는 노릇이다. - P56

사랑을 시작하면서 그 관계가 영원할 것을 믿지 않는 남자가 있다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여자의 품 안에 안겨 있으면서도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장차 그 품 안에서 벗어날 때가 오리라고 미리부터 점치는 남자가 있다면, 그 또한 저주를 받을지어다! - P57

사랑의 매력이여, 어느 누가 그대를 그려낼 수 있으랴! - P58

"어떻게 되든 당신은 곧 떠나겠죠. 그러나 미리부터 그때를 생각하진 마세요. 그리고 나 때문에 걱정하지도 마세요. 하루 한 시간이 나에겐 아까워요. 당신이 떠날 때까지, 순간 순간이 나에겐 소중하고 필요해요. 아돌프, 나는 어쩌면 당신 품에 안겨서 죽을지 몰라요. 왠지 그런 예감이 들어요." - P63

그러나 최초의 일격이 가해졌다. 최초의 장벽이 무너졌다. 우리는 다 같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말들을 입 밖에 내고 말았던 것이다. 입을 닫을 수는 있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들을 다시 담을 수는 없는 노릇. 말하지 않은 채 오랫동안 간직할 수는 있지만, 일단 입 밖으로 나와버리면 결코 되풀이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법이다 - P67

모든 것이 그녀의 영혼을 욕되게 만들고 그녀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어떤 사람이 발길을 끊으면 그 녀는 멸시당한 것이라 생각했고, 또 어떤 사람이 자주 찾아 오면 그것은 그녀에게 무언가 비열한 흑심을 품고 있는 증 거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녀는, 홀로 있으면 괴로움에 몸을 떨었고, 사람들 속에 있게 되면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혔다. - P75

"아돌프, 당신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당신이 나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내가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 거라고요. 당신은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동정일 뿐이에요." - P88

"아돌프! 당신은 나에게 준 고통을 모르세요. 하지만 언젠가는 알겠죠. 나를 무덤 속에 떨어뜨려버린 그때, 스스로 그걸 알게 될 거예요." - P129

"하지만 제발 부탁인데, 앞날의 이야기는 하지마세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자신을 책망하지는 마세요. 당신은 나에게 너무 좋은 사람이었어요. 나는 불가능 한 일을 바라고 있었어요. 내게는 사랑이 인생의 전부였지만, 당신 인생의 전부가 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이제 며칠 만 더 나를 돌봐주세요." - P144

"자연은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는지 몰라요.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포기할 줄 알아야 하는데…………"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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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3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24 0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3-05-25 2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싶네요. 심리소설인가요?
동정도 사랑일 수 있는지 헷갈립니다.^^

새파랑 2023-05-25 23:49   좋아요 2 | URL
심리소설인거 같습니다~!! (해설에 그렇게 쓰여있습니다 ㅋ)
전 아주 좋았습니다. 밑줄도 많이 긋고 ~!! 저도 동정이 사랑은 아니지만, 사랑이 안된다면 동정이라도.. 라는 생각을 합니다 ㅋ
 

한번 읽을때는 잘 몰랐는데, 두번 읽으니까 완전 좋아졌다. 너무 좋았다.








<사랑>

출연자들이 사흘 동안 서로의 신상에 대해 알게 되는 거라곤 이름이 전부였다. 노정훈 씨, 이혜정 씨 그리고 다른 모든 출연자들도 캠프 애드벌룬 안에서 오직 한명의 개인으로만 존재했다. ‘사회적 조건에 종속된 사랑 이 진짜 사랑일까.‘ 선우는 공식 홈페이지의 기획 의도에 그런 말이 적혀 있었다고 기억했다. ‘조건에 얽매인 결혼 상대자로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 대 인간의 만남. 네이키드 상태에서 피어나는 진실한 사랑을 찾기 위해 기획되었다.‘ 유치하고 조악한 문장이었다. - P20

<사랑>

모든 게임에는 규칙이 있다. 러브 애드벌룬의 세계도 그랬다. 첫 번째 선택은 예선에 불과했을 뿐이고 결선은 그 다음이었다. 예선전을 통과한 남녀는 - 미래의 연인 후보를 향해 - 미리 적어낸 편지 형태의 자기소개서를 묵독으로 읽어야 했다. 그러면서 그/그녀를 둘러싼 외적인 환경을 그녀/그는 비로소 알게 된다. 이제 그들은 정말로 마지막 결정을 내려야 한다. 제각각의 결정이었다. 이 사람이 나와 어울리는지, 어울리지 않는지, 그럼 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방향으로 계속 걸어갈 것인지 아 니면 그냥 여기서 걸음을 멈출 것인지.
그건 좀 그러네요.
설이 중얼거리자, 잔인하죠, 라고 선우가 대답했다. - P21

<사랑>

두 사람은 모든 게 달랐어요. 그냥 다른 세계의 사람들처럼 보였어요.태어날 때도 자라는 동안에도 어른이 되어서 경험한 삶에도 접점과 교차점이 없는 사람들. 이런 두 사람이 사흘 만에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 을까요. 그게 경이롭고 끔찍하게 불가사의했어요! 선우의 느낌표가 환청처럼 귓가에 부서졌다. 두 사람 의 유튜브 영상에서 추천 수가 가장 많은 댓글은 다음과 같았다.

보고 또 봅니다. 사랑의 첫 순간에 대해 생각하면 저 는 항상 이 장면이 떠오릅니다. - P24

<사랑>

사랑이 고정불변한 틀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도 착각 아닌가요? 사랑은 감정인데 네모 통에 담으면 네모가 되고 원형 통에 담으면 또 원형이 되는 거죠. - P35

<사랑>

그러면 저 혼자도 할 수 있어요. 싱글 대디와 사춘기 아들이 좌충우돌 살아가는 얘기도 그림 괜찮을 겁니다. 그쪽이 더 감동적인 사랑일 수도 있어요. 설은 남자의 눈을 보았다. 퀭한 눈, 퀭해서 슬픈 눈이 었다. 누구나 자신의 방식으로, 이 사람은 이 사람의 방식으로 풍화를 견디는 중이었다. - P35

<이별>

정화가 외롭다는 말을 하려 한다는 걸 민영은 알았다. 나도 마을 사람들과 함께 얘기하고 싶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는 걸. 정화는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할줄 몰랐다.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면 비웃음을 담아 빈정거렸다. 민기는 정화의 속뜻을 매번 알아채질 못했다. 정화가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는다고 여겼다. 그리고 타인 앞에서 정화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 P56

<이별>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이죽거리는 정화의 말투를 닮았고, 소중한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여러 사람 앞에서만 체면을 차리는 민기의 성격도 닮았다. 평소에는 애써 감춰왔던 자신의 단점이 정화와 민기를 보고 있자면 너무나 또렷하게 느껴졌다. - P57

<이별>

정화와 민기의 다툼이 어린 시절 민영에게 얼마나 커다란 공포를 주었는지가 떠올라서였다. 공과금을 한 달 연체했다거나 드라마를 보며 의견이 달랐다거나. 아무것도 아닌 일도 정화와 민기의 대화를 거치면 큰 싸움으로 번지곤 했다. 민영은 자기 방에 들어갔고, 문에 귀를 댄 채 목소리를 훔쳐 들었다. 몸이 너무 떨려서 몸이 떨리는 소리가 문 바깥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떨림을 멈추려고 숨을 참게 되었고, 너무 오래 숨을 참아서 죽을 것 같았다. 이제 정화와 민기의 다툼은 민영에게 어떤 떨림도 일으키지 않았다. 민영은 노트북을 켜둔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화와 민기가 다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눈꺼풀이 점점 내려앉았다. 이 시끄러움 속에서도 졸음이 온다는 게 반가웠다. - P59

<이별>

"언니, 해볼래? 자기가 운전하면 멀미가 안 나."
"안 한 지 오래됐는데."
"그냥 해봐. 달걀 꺼내듯이."
그럴까? 라고 말하며 정화는 활짝 웃었다. 민영은 갓길에 차를 세웠다. 정화와 자리를 바꿨다. 차는 천천히 나아갔다. 잔뜩 긴장한 듯 정화는 운전대에 상체를 바짝 붙였다. 차가 크게 휘청였고 정화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웅덩이였다. 정화의 손이 떨려왔다. 민영은 비상등을 켰다. 한쪽 손을 정화의 손 위에 포갰다.
"걱정 마. 아무렇지도 않아."
민영은 민기에게 배운 말을 뱉었다. 정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손이 떨리지 않았다. - P69

<죽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몸과 마음이 생각보다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야. 몸은 의식에 따라 다르게 인지될 수 있는 고깃덩이에 불과해. - P76

<죽음>

나는 최대한 무심한 척, 담담한 척했다. 지금같이 과학이 발달한 세상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나는 이런 일로 호들갑을 떠는 사람이 아니라고, 연인의 죽은 남편이 살아 돌아온다고 해서 걱정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의 귀환은 기쁜 일이다. 그가 요절했을 때 아파했던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보라. 질투하고 토라질 게 아니라 이해하고 위로해야 한다. 지금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고 그녀 곁에 있는 사람은 나니까 내가 힘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정말 그녀 곁에 있는 사람이 나일까. 왜 그는 죽었지만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나는 살아 있지만 죽은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 P89

<죽음>

만약 그의 기억 역시 그대로 이어진다면 그를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냐고 졸탄은 물었다. 부활한 그가 목소리도 얼굴도 전과 다르지만, 아무도 모르는 모어와의 기억을 정확히 떠올릴 수 있고, 되살아난 스스로를 인지한다면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그건 다르죠. 몸이 다르면 존재도 달라지는 거니까.

그럼 심장 이식수술을 한 사람은요? 전신 성형을 한 사람은?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사고로 뇌에 손상이 생겨서 성격이 전혀 달라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른 사람인가요? 나를 나로 만드는 건 무엇일까요? - P95

<죽음>

졸탄을 들은 건 그즈음이다. 시간과 정신의 방에서 엄청난 소동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졸탄과 그의 와이프가 대판 싸웠다는 것이다. 부활까지 해서 부부 싸움이라니. 하지만 전후 사정을 들어보니 이해가 갔다. 졸탄의 와이프는 다시 죽길 원했는데 죽을 방도가 없었단다. 예전에는 면도날로 손목을 긋거나 테라스 밖으로 뛰어내리면 됐는데 홀로그램이 된 지금은 어떻게 자살해야 하나. 자살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철학적 문제인데 그 문제가 원천 봉쇄되어버린 것이다. 졸탄은 잘된 거 아니냐고 반문했다. 죽느냐 마느냐로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게 축복 아니냐고, 이제 셰익스피어나 카뮈는 그만 읽을 때가 됐다고 말이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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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5-15 0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 이별 죽음은 바로 사람이 사는 거군요 본래 소설이 사람 사는 이야기군요 두번 보니 더 좋아졌군요 새파랑 님 오늘 좋은 하루 보내세요


희선

새파랑 2023-05-15 09:26   좋아요 1 | URL
이 책 좋더라구요~!! 리뷰 잘 써봐야겠습니다. 희선님도 즐거운 한주 시작하세요~!!

페크pek0501 2023-05-15 15: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글이 좋네요. 잘 쓰는 작가 세 분이 썼나 봅니다. 이런 글은 필사하는 재미가 있지요.

새파랑 2023-05-15 22:50   좋아요 0 | URL
짧지만 임팩트가 있는 작품들이었습니다. 전 셋다 너무 좋았어요 ㅋ 여기 실린 작가분들 책을 찾아 읽으러고 합니다 ^^

시간의흐름 2023-06-02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아하는 데 이유가 없는 거다, 눈물 훔치고 갑니다. 새파랑님 :)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가면서도 안타까웠다.

요즘 밤에 나는 잠을 자거나 쾌락을 누리거나 고독을 즐기는 대신 카페 테라스에 앉아 밤새도록 절망에 빠진 지식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내가 행복을 누린 적이 있다고, 액면가 높은 동전 한 움큼이나 전후 마르크 한 다발하고 바꿀 수 있을 금화 같은, 절대 변하지 않기에 아무리 평가절하되어도 원래의 가치를 간직할 수 있 는 금화 같은 참되고 진실된 행복을 누린 적이 있다고 말하면 모두들 놀라워한다. - P133

그리고 어느 날 아침, 미헬이 감자 모종을 옮겨 심던 정원에서 마침내 나는 모두가 아는 비밀을 알게 되었다. 콘라드만은 끝까지 모르도록 동료들이 세심하게 지킨 그 비밀은 바로 소피가 리투아니아인 하사에게 강간당했다는 것이다. 그 하시는 이후 부상을 당해 후방으로 후송되었다. 그는 술에 취한 상태였고, 다음날 거실에서 서른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먹이며 용서를 구했다고 했다. 소피에게는 끔찍 했던 전날의 십오 분보다 그 순간이 더 역겨웠으리라. 이후 몇 주 동안 그녀는 그 기억에 괴로워했고,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 다. 나는 소피와 많이 친해진 뒤에도 그 불행한 사건에 대해 흐릿한 암시조차 입에 담을 용기를 갖지 못했다. 우리는 그 주제를 늘 밀쳐냈고, 하지만 그것은 늘 우리 사이에 버티고 있었다. - P143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게임을 이끌어간 것은 그녀였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걸었기 때문에 더욱 치열했다. 게다가 주의를 쏟아야 할 다른 일이 많아 신경이 분산된 나와 달리, 그녀는 오로지 나에게 집중했다. 나에겐 콘라드도 있었고, 전쟁도 있었으며, 그 이후로 버렸지만 그때까지는 어느 정도 야심도 있었다. 그녀에게는 이내, 마치 주변 사람 모두가 비극의 단역이 되어버린 것처럼, 오직 나만 혼자 존재했다. - P145

몇 주 동안 소피는 사랑에 빠진 여자가 상대에게 그 마음을 이해받지 못해서 미친듯이 화가 날 때 겪는 온갖 끔찍한 고통을 치러야 했다. 그런 뒤에는, 내가 바보이기 때문이라 생각하면서 그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에 짜증을 냈고, 결국에는 몽상적인 인간들의 상상력에나 맞을 상황에 지쳐버렸다. 그녀는 쇠칼이 몽상과 거리가 먼 것보다 더 심하게, 결코 몽상적이지 않은 인간이었다. - P147

소피의 사랑은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의 인생관이 정말로 정당한지 처음으로 의혹을 품게 했고, 그럼에도 그녀가 자신을 완전하게 내어줄수록 내 남자로서의 체면, 허영심은 더욱 견고해 졌다. 이 일의 희극적인 면은 소피가 나를 사랑하게 된 것이 바로 나의 냉정함과 거절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처음 이리저리 마주치던 때에 그녀 앞에서 내 눈이 번득였다면, 그때 내 눈에서 찾을 수 없어 죽도록 고통스러워했던 그 눈빛 탓에 그녀는 겁에 질려 날 밀어냈을 것이다. - P149

겁을 먹고 순종하는 프란츠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여자들을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더 멀어졌다. 소피가 거만하고 짜증스럽게 아주 사소한 친절만 베풀어도 프란츠가 마치 설탕을 받아먹는 강아지처럼 달려들던 모습을 떠올리면 아직도 연민이 느껴진다. - P166

"무서워하지 않는 건 나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하지만 행복하기만 하다면." 그녀는 첼로의 저음처럼 늘 나를 감동시키는 투박하면서 부드러운 원래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단 오분이라도 행복하다면 그건 신이 내려준 신호일 거예요 당신은 행복한가요? 에릭?" - P174

나는 감방의 죄수가 벽에 머리를 들이박듯이 그녀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 내 머리를 들이박았다. 나에게는 소피의 죽음보다 어떻게든 죽으려는 그녀의 고집이 더 끔찍했다. 나 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면 멋진 방도를 찾아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차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내 능력에 대해 나는 아무런 환상 도 품고 있지 않았다. 소피가 죽으면 지나간 나의 젊음도 청산될 것이 고, 이 고장과 나 사이에 놓인 마지막 다리도 끊어질 것이다. 마침내 나는 그동안 내가 지켜보았던 죽음을, 마치 그 죽음이 소피의 처형에 정당성을 부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차례로 떠올려보았다. 그런 다음 인간이라는 상품이 얼마나 하찮은 값밖에 갖지 못하는지 생각하면서, 바르너 방적공장 복도에서 차갑게 식은 어느 여자의 시체를 보았다 해도 별로 슬퍼하지 않았을 내가 쓸데없이 유난을 떨고 있다고 생각했다. - P223

그녀는 조금 가쁜 숨을 내쉬 었고, 나는 콘라드가 죽어갈 때 차라리 내 손으로 끝내주고 싶었듯이, 지금도 똑같다는 생각에 매달렸다. 나는 크리스마스 밤에 폭죽을 터뜨리며 무서워하는 어린애처럼 고개를 돌린 채로 방아쇠를 당겼다. 첫 발로 얼굴 한쪽이 날아갔고, 결국 그녀가 어떤 표정으로 죽음을 맞았는지 알 수 없었다. 두번째 총알로 모든 게 완수되었다. - P225

처음에는 소피가 이 임무를 나에게 맡긴 것이 사랑의 마지막 증거라고, 그 무엇보다 결정적인 증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나는 그녀가 원한 것은 복수였음을, 나를 회한에 빠트리려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계산은 정확했다. 아직까지도 나는 이따금 회한에 젖는다. 여자들을 상대하면 언제나 덫 에 걸려들게 된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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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2023-05-14 21: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문학동네 소설 작품을 자주 만나시는 것 같아요.
전 아픈 뒤로 책이 잘 안 읽혀지네요.ㅎ 휴식모드가 길어지니 집중이 잘 안됩니다.
천천히 리듬을 찾아야겠지요. 벌써 5월 절반이나 흘러갔네요.
이달에도 왕성한 독서 이어가시길 바랄게요. 새파랑님.^^

새파랑 2023-05-15 09:27   좋아요 2 | URL
제가 고전파라서 ㅋ

맞습니다. 아프거나 바쁘거나 고민이 많으면 잘 읽히더라구요 ㅜㅜ

빨리 리듬을 찾으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