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성 학대는 전천후로 깔린 남성 문명의 전가의 보도입니다. 그 위험한 삶의 행로에서 여성은 기득권을 쥐고 있는 남성과 불리한 경쟁을 감수한 채 공부하고, 대학도 가고, 직업도 구해야 합니다. 어렵사리 취업하면 차茶 심부름에, 임금 차별은 기본이고, 승진에서도 소외됩니다. 가뭄에 콩 나듯 예외적인 스타 여성 직업인이 탄생하면 마치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온통 난리를 치며 떠드는 분위기가 사회를 제압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사회제도나 분위기 자체가 여성에게 외상trauma을 입히는 주체로 되어버린 셈입니다.·······사회우울증·······.
국가폭력으로까지 눈을 돌린다면 국가 자체가 우울증을 양산하는 상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가우울증·······!(153쪽)
사회든 국가든 이상향이 아닌 다음에야 구성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공동체인 Sollen의 측면과 불의한 소수 권력집단의 수탈체제인 Sein의 측면이 공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자 쪽으로 부단히 밀어가는 과정이 인간적 역사입니다. 후자 쪽으로 부단히 밀려가는 과정이 비인간적 퇴각입니다. 퇴각은 역사가 아닙니다. 역사이기를 멈춘 폭력입니다. 그 폭력이 전천후로 지배하는 사회·국가는 자체로 범죄입니다. 범죄인 사회·국가가 동원하는 수탈의 가장 흔한 방편이자 대상이자 결과가 질병입니다. 수탈의 포괄적 동력인 질병 가운데 가장 깊고 최종적인 것이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의 저인망이 노리는 제1범주가 다름 아닌 여성, 좀 더 정확히는 여성성입니다. 여성성의 수탈은 사회·국가의 공동체성을 근본적으로 붕괴시키는 자멸행위입니다.
여성성이 수탈체제의 근본적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과 공동체성 유지의 근본적 부양자인 까닭은 하나입니다. 여성성은 자기 개인보다 먼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전체에 마음을 쏟는 속성 또는 경향성입니다. 공동체 전체에 마음을 쏟으려면 자기 개인에게 몰입 또는 집중할 수 없습니다. 자기 개인에게 몰입 또는 집중할 수 없는 사람은 사회적 성공을 거두어 권력의 핵심으로 진입할 수 없습니다. 사회적 성공을 거두어 권력의 핵심으로 진입할 수 없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 지배의 속성 또는 경향성을 우리는 남성성이라 부릅니다. 남성성이 여성성을 수탈하는 방편이자 대상이자 결과가 우울증입니다. 이 우울증은 그러므로 본질상 사회우울증, 국가우울증입니다. 개인적이기만 한 우울증은 없습니다.
자기 개인보다 먼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전체에 마음을 쏟는 여성성의 다른 이름은 진보성입니다. 진보는 이데올로기적 성향 이전에 인문적 자세를 의미합니다. 진보는 편하게 홀로 사는 것 아닌 불편하더라도 함께 사는 것을 선택하는 실천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치를 따진다면 진보성의 다른 이름은 지도자성입니다. 공동체의 지도자는 늘 진보성, 그러니까 여성성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가 진보성을, 여성성을 포기하는 순간 공동체는 수탈체계로 영락합니다. 오늘 여기 대한민국의 막장 정치는 여성성을 전유한 채 남성성의 전형을 드러내는 분열적 협잡꾼이 자행하는 것입니다. 25일 아침 대중문화평론가 황진미가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 나오는 분이의 리더십 이야기를 한겨레신문에 썼습니다. 그 일부를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육룡이 나르샤>의 가상의 인물 분이(신세경)는 ‘육룡’ 중 유일한 여성이다. 그는 하층민 여성이지만, 역사적 대의를 각성한 혁명가이자 리더의 면모를 보여준다. 어릴 때부터 마을사람들에게 ‘분이 대장’으로 불리던 그는 혁명조직의 일원으로 정보팀을 이끌다가, 왕자의 난으로 조직이 와해되자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섬으로 가 공동체의 리더로 살다 죽는다. 분이와 이방원 사이에는 로맨스가 있지만,·······분이는 이방원이 처음 청혼하였을 때 거절한다. 신분의 격차에 황송해하는 것이 아니라, 귀족에 대한 계급적 적대감과 첩의 신분을 거부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당당히 밝힌다. 냉철한 분이에 비해 오히려 이방원이 감정적이다. 그는 신분차를 넘어설 수 없음에 괴로워하며, 먼저 정략결혼을 하면서도 분이의 감정을 계속 살폈다. 이후 둘은 혁명조직의 일원으로 동지애를 발휘할지언정, 더 이상의 로맨스를 발전시키지 않는다. 분이가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을 떠나려 하자, 이방원은 그동안 묻어두었던 연정을 투하하여 “결혼하자”는 말을 내뱉는다. 분이가 억류한 사람들만 풀어준다면 뭐든 하겠다고 순순히 답하자, 이방원은 자신과의 감정이 다른 사람들과의 신의보다 하찮음에 충격을 받는다. 분이에게도 이방원과의 감정이 하찮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일신이나 자존심보다 리더로서의 책임감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분이는 공동체를 책임지는 사회적 존재로서 놀라운 여성적 리더십을 보여준다.”(밑줄-인용자)
분이라는 캐릭터를 그려낸 이 텍스트가 “놀라운 여성주의”로 읽힌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사회가 이 상상력의 반대편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그런 리더십을 가진 자가 없습니다. 재빨리 이 이미지를 전유하는 자가 있을 뿐입니다. <명량>에서 그랬듯. 현실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리더가 없는, 그러니까 사적 이익을 위해 공동체를 패대기치는 남성적 리더가 통치하는 사회의 시민은 전체적으로 수탈당하는 여성의 지위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수탈당하는 여성의 지위에 놓인 시민은 너나없이 사회·국가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질곡의 현실은 중첩되어있습니다. 깨달음도 중첩적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여성우울증이란 화두를 들어 공동체성 회복이라는 대승적 깨달음을 얻기만 한다면 몇 겹이든 뚫어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