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6장 첫 번째 문단입니다.

 

故 至誠無息. 

고 지성무식. 

不息則久 久則徵 徵則愈遠 愈遠則博厚 博厚則高明.

불식즉구 구즉징 징즉유원 유원즉박후 박후즉고명.  

博厚所以載物也 高明所以覆物也 愈久所以成物也. 

박후소이재물야 고명소이복물야 유구소이성물야. 

博厚配地 高明配天 愈久無疆. 

박후배지 고명배천 유구무강. 

如此者 不見而章 不動而變 無爲而成.

여차자 불현이장 부동이변 무위이성.


그러므로 지극히 성실함은 쉼이 없다. 쉬지 아니하면 오래 지속되고 오래 지속되면 효험이 나타나고 효험이 나타나면 유원해지고 유원해지면 넓고 두터워지며 넓고 두터워지면 높고 밝아진다. 넓고 두터운 것은 물物을 싣는 것이고 높고 밝은 것은 물物을 덮는 것이며 유구한 것은 물物을 이루는 것이다. 넓고 두터운 것은 땅과 짝이 되고 높고 밝은 것은 하늘과 짝이 되며 유구함은 끝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나타내지 아니해도 빛나고 움직이지 않아도 변하며 작위가 없어도 이루어진다.

 

2. 실천 중용이 구체적으로 역사와 사회 속에서 그 신호와 에너지를 전달해 나아가는 과정을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온전히 적확하고 치열한 실천至誠은 다함이 없는 법입니다[무식無息], 중단하지 않는 법입니다[불식不息]. 늘 깨어 있으면서 시간과 함께 단련되어 갑니다[구久]. 물이 흐르기를 멈추면 썩는 것처럼 “이만하면 됐다” 하고 주저앉는 순간 기득권 의식이 독으로 자라납니다. 시간의 물결에 늘 씻기면서 실천은 더욱 더 퍼들퍼들 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살아 있는 상태를 지속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견디며 후패하지 않아야 살아 있는 깃발이 됩니다[징徵]. 다함없는 실천은 그 자체로 증거이자 징조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일으키는 힘이며 깨닫게 하는 신호입니다. 굳센 에너지가 되려면, 경쾌한 파동이 되려면 시간 속에 살아 펄럭여야만 합니다.

 

그 깃발이 펄럭여 아득히 먼 데까지 표지로 작용합니다[유원愈遠]. 그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지평선 저 멀리 있는 사람에게까지 푯대가 되어 나아갈 방향을 정해주고, 걸어갈 용기를 줍니다. 참 실천은 반드시 또 다른 실천을 낳는 법입니다.

 

그 실천의 아득한 파장은 점점 멀리 퍼져 나아가고 겹겹이 쟁여집니다[박후博厚]. 참된 소통은 생명의 시너지를 일으킵니다. 잠자던 생명의 감각이 눈부시게 살아납니다. 감각들의 공현共絃은 깊은 울림이 되어 서로를 감싸줍니다. 퍼지되 얄팍해지지 않고 깊어지되 편협해지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과 사회와 자연의 생명력을 드높이고, 그 평등한 연대성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고명高明]. 중용의 자랑은 중용 실천자의 덕이나 경지가 아니고 중용 실천으로 드러나는 대동 세상 그 자체입니다. 생명의 쌍방향 소통, 그 자체의 향기가 긍지입니다.

 

3. 이처럼 온전히 적확하고 치열한 실천[지성至誠]은 자신의 엄정한 조건 속에서 스스로를 강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꿉니다. 그렇게 바꾸어 낸 세상과 혼연일체가 되어 흘러갑니다. 애써 자랑하지 않아도 다 압니다. 구태여 힘주지 않아도 바꿀 수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조종하지 않아도 잘 되어갑니다.   



 

4. 대한민국의 현임 대통령은 이른바 유체이탈 어법으로 자신이 여느 사람과 전혀 다른 차원에 있는 존재임을 과시합니다. 이를테면 ‘교주’ 리더십입니다. 이는 주권자인 국민과 소통해야 할 민주공화국의 대통령과는 거리가 먼, 자신을 높이고 국민을 얕잡아 보는 시대착오적인 태도입니다. 그런 대통령의 정치적 실천이 어떻게 적확하고 치열할 수 있겠습니까? 원론만 꺼내 놓고 사라지는데. 어떻게 다함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 정도면 됐다고 늘 자랑하는데. 어떻게 깃발이 될 수 있겠습니까?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지 않는데. 어떻게 또 다른 소통을 낳겠습니까? 백성이 울고 있음에도 혼자 웃으며 다니는데. 어떻게 생명의 시너지가 일어나겠습니까? 생떼 같은 아이들 250명을 죽이고도 못 본 체 하는데. 어떻게 평등한 생명 연대가 일어나겠습니까? 저토록 강고하게 국민을 아랫것 취급 하는데.


중용은 자기 엄정성無息에서 출발하여 평등한 생명 연대高明로 나아가는 유기적 통합의 흐름 속에 있습니다. 자기에게 관대함으로써 남을 억압하게 되는 정치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온전히 자신을 채워 온전히 자신을 비우는 군자 나기가 이 땅에서는 그렇게 어려운 걸까요? 평범한 시민의 작은 촛불 하나를 큰 가치로 받들 줄 아는 통치자 나기가 이 땅에서는 그렇게 어려운 걸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11-12쪽)


  ·······신경성 폭력은 시스템에 이질적인 부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적인 폭력,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우울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증후이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활동과잉에서 과잉은 면역학적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22쪽)


한병철은 신경증 또는 신경성 질환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을 대표적인 예로 꼽았습니다. 그런데 ‘신경증’의 개념은 진단 체계가 없어져 미국정신의학협회의 DSM에서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세계보건기구의 ICD는 ‘신경증적’이라는 개념을 협의로 사용(F40-49)하고 있지만 여기에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등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소진증후군은 1974년 미국의 한 심리학자가 만든 용어로 세계보건기구의 ICD나 미국정신의학협회의 DSM에서 인정하는 공식용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한병철의 이런 용어 사용과 이런 질병들이 21세기 초의 병리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는 판단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요?


한병철이 이 책을 쓰면서 인용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 사회적 담론을 생산하는 사람들입니다. 미루어보건대 한병철이 직접 의학이나 면역학의 영역으로 들어가 철학하듯 탐구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가 미주에서 말한 대로 사회적 담론과 생물학적 담론 사이의 상호작용(74쪽), 좀 더 정확히는 사회적 담론의 프레임으로 생물학적 내러티브를 재구성한 결과들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이런 넘나듦은 언제 어디서도 일어납니다. 불가피하고 불가결합니다. 문제는 넘나드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촘촘하지 못하거나 전경을 드러내지 못하는 통찰입니다. 한병철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을 면역학적 부정성 아닌 긍정성 과잉으로 인한 질병의 대표로 꼽은 근거에 관해 생각해보면 대뜸 성기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네 질병 사이에 어떤 연관성에 터한 것도 아니고 엄격한 기준에 따라 제한적으로 열거한 것도 아닙니다. 설명하기 맞춤한 것들을 챙겨 뽑아들었다는 느낌입니다. 하필 양극성장애 아닌 우울장애를, 하필 발달장애에 속하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를, 하필 자기애성 성격장애 아닌 경계성 성격장애를, 하필 엉성한 개념의 소진증후군을 특히 긍정성 과잉으로 인한 질병의 대표로 삼은 토대가 그다지 탄탄해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쉽게 단순하게 사유하는 게 아닌가, 불현듯 의구심이 생깁니다.


한병철에게 이런 틈이 생기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서구의 한복판에서 세계의 통시적 맥락과 공시적 지평을 구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21세기를 동질적 긍정성의 과잉 시대로 읽는 것에는 그 자체 타당성 여부와는 별개로 중대한 논점을 누락시킬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21세기의 이런 변화는 무엇보다 민주주의와 공화정이 인류의 당위로 자리 잡은 20세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와 공화정은 타자적·이질적 부정성, 그 폭력을 물리치려는 저항의 산물입니다. 그 저항은 서구를 중심으로 일어나 서구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꽃이 피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입니다. 서구의 민주주의와 공화정은 인류가 주체로서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제도임과 동시에 기층민중과 식민지를 대상화함으로써 이룩한 피의 제도입니다. 21세기는 신자유주의와 신식민지 전략을 통해 민주주의와 공화정의 어두움을 스마트하게 가리고 가짜 동질성과 가짜 긍정성을 보편화하고 있습니다. 21세기 동질성은 이질성의 가면입니다. 21세기 긍정성은 부정성의 가면입니다. 시스템적 폭력,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은 위장된 것입니다. 신식민지의 변방에 서면 사유가 어렵고 복잡해집니다.


오늘 518입니다. 광주를 피로 물들여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여전히 오리발을 내밀며 호의호식하고 있습니다. 그 자는 일해재단 만들어 기업가들을 협박해서 불법으로 축재했습니다. 청문회 나와서 말했습니다. 강요한 적 없다. 자발적으로 돈 주더라. 그 말을 곧이들은 사람 없습니다.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의 동질성·긍정성은 과연 곧이들을 수 있을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제25장 본문입니다.

 

誠者 自誠也 而道 自道也. 誠者 物之終始. 不誠 無物. 是故 君子 誠之爲貴. 誠者 非自成己而已也 所以成物也. 成己 仁也 成物 知也 性之德也 合內外之道也. 故時措之宜也.

성자 자성야 이도 자도야. 성자 물지종시. 불성 무물. 시고 군자 성지위귀. 성자 비자성기이이야 소이성물야. 성기 인야 성물 지야 성지덕야 합내외지도야. 고시조지의야.


성誠은 자기 자신을 이루는 것이고 도道는 자기를 인도하는 것이다. 성誠은 물物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하는 원동력이다. 성誠하지 아니 하면 물物이 없다. 이 때문에 군자는 물物을 귀하게 여긴다. 성誠은 스스로 자기를 완성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물物을 완성하는 수단이 된다. 자기를 완성하는 것은 인仁이고 물物을 완성하는 것은 지知이니 성性의 덕이며 안과 밖을 합하는 도이다. 그러므로 때에 맞게 조처하는 마땅함이다.

 

2. 적확하고도 치열한 실천[성誠]은 내면의 힘에서 나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용의 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소통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즐겁고 행복해서 관통하고 흡수하는 것입니다. 남한테 내세울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에게 겸손하게 청하여 함께 그 기쁨을 나눌 일입니다.

 

3. 적확하고도 치열한 실천은 사건[물物]을 일으키고 마무리합니다. 그 실천이 없다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진정으로 상호 소통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실천은 그 사건들의 생명주기와 함께 합니다. 사건의 주체와 사건 그 자체는 불가분 일체입니다.

 

그러므로 적확하고도 치열한 실천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이루어 가는 일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생태적 소통의 사건을 이루어 가는 일입니다. 사회와 자연과 절연된 개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입니다. 인간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입니다.

 

4. 자기 자신을 이루어 가는 일은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인仁] 가능합니다. 자기 자신은 스스로가 규정하는 게 아닙니다. 타인에게 부름 받아 규정됩니다. 그의 사랑을 받아 이루어집니다.

 

사건을 이루어 가는 일은 사건의 흐름과 방향을 알아차려야[지知] 가능합니다. 이 알아차림은 실천에서 나오는 증득證得의 지혜입니다. 함께 흘러감으로 생겨난 슬기로움입니다.

 

사랑하는 것과 알아차리는 일은 본질[성性]에서 통합됩니다, 그러니까 합내외合內外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은 소통의 서정이며 알아차림은 소통의 지성입니다.

 

5. 소통은 생명입니다. 생명은 시간입니다. 그 때 그 때 알 맞는 영양과 보살핌이 마땅히 있어야[시조지의時措之宜] 생명은 유지되고 확산됩니다. 생명은 다만 은총인 것이 아니고 정성스럽게 가꾸어야 할 인연인 것입니다.

 

6. 한 개인이 자기 생을 살면서 이루어내는 성취는 그 자체로 매우 귀한 것입니다. 이 성취를 꿈꾸지 않는 자 그 누구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성취는 사회적 기여와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가령 수많은 사람의 희생 위에 세워진 성취라면 그것은 결코 성취가 아닙니다. 탈취입니다. 가령 수많은 사람 덕분에 이룬 것이면서 자기 혼자 이룬 것인 양 독선을 피운다면 그것은 결코 성취가 아닙니다. 갈취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탈취와 갈취의 귀재들이 온갖 패악을 저지르는 아수라장입니다. 모든 분야의 정상에 서 있는 자들 가운데 이런 부류의 인간 아닌 경우가 드뭅니다. 무엇보다 빅 쓰리, 그러니까 정치·경제·종교를 쥐고 있는 자들은 단연 독보적 존재입니다. 이들이 형성한 카르텔은 대한민국 전체를 견고한 착취구조로 만들었습니다. 그 착취구조는 여러 층위와 구획의 방대한 체계를 만들어 공존의 가치를 철저히 박멸하고 있습니다. ‘대박’이라는 사행적·개인적 용어에 중독된 사람들이 너나없이 생각 없이 착취구조의 부역에 나서고 있는 판입니다. 그렇게 세월호를 잊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중동독감을 묻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역사를 비틀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의 피맺힌 한을 지워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바보인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바보 중에 군자 있습니다. 남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을 이루고 사회 흐름을 꿰뚫는 지혜로써 더불어 온 생명을 살아가는 군자는 결코 ‘대박’ 난, 그러니까 ‘뜬’ 사람이 아닙니다. 권력자도, 재벌도, 국민 멘토도 아닙니다. 평범한 다수의 시민과 시절인연을 맺으며 함께 흘러가는 거리의 사람입니다. 지배집단이 뭐라고 거들먹거리든 상관없이 이 나라를 지키는 것은 바로 이런 거리의 사람이란 사실, 슬프고도 장엄한 진리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제24장 본문입니다.

 

至誠之道 可以前知. 

지성지도 가이전지. 

國家將興 必有禎祥 國家將亡 必有妖孼 見乎芪龜 動乎體 禍福將至 善 必先知之 不善 必先知之. 

국가장흥  필유정상  국가장망  필유요얼 견호기구  동호사체 화복장지 선 필선지지 불선 필선지지. 

故 至誠 如神.

고 지성 여신.


지극히 성실한 사람은 앞일을 먼저 알 수 있다. 국가가 장차 흥하려 하면 반드시 상서로운 징조가 있으며 국가가 장차 망하려 하면 반드시 흉한 징조가 있어서 시초주역점와 거북거북점에서 나타나고 몸에서 움직여진다. 화와 복이 장차 이를 경우 좋은 것도 반드시 먼저 알며 좋지 않은 것도 반드시 먼저 안다. 그러므로 지극한 성실함은 신과 같다.

 

2. 온전히 적확한, 흐트러지지 않은 실천의 길을 가노라면 모름지기 예지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이 예지능력은 무슨 신비주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참된 소통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얻으면 그 흐름을 공감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 것입니다. 늘 백성과 더불어 호흡함으로써 그들의 일상을 꿰뚫고 있다면 오늘의 마음 씀, 몸놀림을 보고 내일을 아는 일 또한 일상적 수준에서 가능할 것입니다. 

 

백성의 선한 말, 바른 행동, 즐거운 노래, 행복한 웃음소리가 들리는데 어찌 나라가 망하겠습니까? 백성의 악한 말, 슬픈 노래, 고통스런 울음소리가 들리는데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겠습니까? 징조란 것도 신비한 무엇이 결코 아닙니다. 하얀 구렁이가 나타났네, 돌부처가 눈물을 흘렸네.......흥미롭기는 하나 그런 현상을 징조라 한다면 군자의 지성至誠으로 얻어지는 통찰력과는 실로 무관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대인의 복서卜筮 행위는 자기 성찰이라는 정갈한 바탕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자기 탐욕을 내려놓고 천지 이치에 귀 기울이는 행위를 다만 앞날을 예견하는 기술쯤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기 탐욕을 내려놓는다는 의미에서는 백성을 위해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요, 천지 이치에 귀 기울인다는 의미에서는 사태를 통합적으로 알아차리기 위해 마음을 챙긴다는 것입니다. 마음 비움과 마음 챙김의 역설적 일치에서 군자의 중용은 시대를 밝히는 빛이 됩니다.

 

3. 이렇게 지성至誠은 신과 같습니다. 중용 명상을 통해 신통력을 얻게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치열한 실천에서 증득證得되는 통찰력, 예지능력은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으로 권력, 재물, 명예를 취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중용으로 이룬 대동 세상에서는 평등한 쌍방향 소통이 있을 뿐이거늘 무슨 억압과 차별과 소외가 있을 것입니까? 혁명의 기득권과 전리품을 내려놓고 밀림으로 돌아간 체 게바라가 바로 지성의 화현이요 신입니다.

 


4. 전임 대통령이 “내가 해봐서 아는데·······” 어법으로 임기 내내 국민의 입길에 오르내린 바 있습니다. 안 해본 일이 없는, 그래서 전지전능한 국가수장이라는 자의식을 드러냈던 셈입니다. 허나 나라는 극히 어두운 곳으로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그가 자랑해마지 않는 토건 전문가로서, 국가 CEO로서 한 일이란 이른바 4대강사업과 자원외교로 혈세 낭비한 것뿐이었으니 말입니다.


현임 대통령은 유체이탈 어법과 해독불능의 신성 어법으로 입때껏 국민의 입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구름 위에 있는, 그래서 전지전능한 국가수장이라는 자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셈입니다. 허나 나라는 더욱 더 어두운 곳으로 굴러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가 자랑해마지 않는 아버지의 딸로서, 국가 자체로서 하는 일이란 제 국민 죽이는 일을 반복하는 것뿐이니 말입니다.


실천의 실재에서 얻은 예지능력이 국민과 함께 나누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군자의 도, 그러니까 중용일 수 없습니다. 함께 나누어지기는커녕 일방적으로 훈계하고 꾸짖는 제왕적 대통령과 그 수하들의 준동에서 드러나는 낙후와 남루. 대한민국의 이름은 몽매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제23장 본문입니다.

 

其次 致曲. 曲能有誠. 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唯天下至誠 爲能化.

기차 치곡. 곡능유성. 성즉형 형즉저 저즉명 명즉동 동즉변 변즉화. 유천하지성 위능화.


그 다음은 한 부분을 이루는 것이다. 한 부분에 지극하면 성誠이 있을 수 있다. 정성스러우면 나타나고 나타나면 드러나며 드러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움직이고 움직이면 변하고 변하면 화化한다. 오직 천하의 정성스러움만이 화化할 수 있다.

 

2. 여태까지 기초적 본문 읽기는 이기동 역譯을 따랐지만 구체적 내용에서는 명사적 독법을 대부분 따르지 않고 제 나름의 이해를 펼쳐 왔습니다. 이 장에서는 처음부터 아예 번역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바로 치곡致曲 문제입니다. 주희가 곡曲을 '모퉁이'라고 했다는군요.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이기동은 ‘한 부분’으로 읽어 치곡을 ‘한 부분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지극한 성誠이 어려울 때는 차선으로 한 부분부터 시작한다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이 또한 주희 식 명사적 독법입니다. 저는 곡을 “곡진하게 (행)하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퉁이든 한 부분이든 그 것을 명사로 읽으면 치곡능유성致曲能有誠이 아니고  곡능유성曲能有誠이라 한 본문을 설명하기 궁합니다. 그리고 본문 맨 앞에 있는 기차其次를 보면 이 장이 바로 앞장인 제22장과 문맥상 연결해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앞 장의 키워드 중 하나인 진盡은 여기의 곡曲이고, 화육化育은 여기의 화化입니다. 

 

3. 곡진하다는 말은 자세하고 간곡하다는 뜻이므로 자연스럽게 성誠과 연속성을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곡능유성曲能有誠인 것이지요. 성에 진정성을, 간절함, 섬세함을 부여한 또 다른 표현이 바로 곡입니다. 곡으로 표현된 성은 치밀한 과정을 밟아 지성至誠으로 나아갑니다.

 

곡진하게 성의 실천을 통해 중용적 삶의 얼개를 그리는[형形] 것이 첫 번째 과정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삶을 중용의 도에 정향定向하는 일일 것입니다. 선택하고 선언하고 약속하는 순간들이 모여서 그 방향과 테두리를 잡아 갈 것입니다.

 

그 윤곽에 내용을 채워 확연하게 드러내는[저著] 과정이 그 다음입니다. 드러낸다는 말은 자랑한다거나, 무기로 삼는다는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실천의 열매들이 무르익고 쟁여져서 자연스럽게 밖으로 넘쳐나는 현상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 삶을 통해 도리를 명쾌하게 꿰뚫는[명明] 과정이 세 번째 과정입니다. 단순한 지적 깨달음이 아니라 실천에서 오는 이른바 증득證得입니다. 몸으로 아는 것이지요. 그런 행지行知로써 세상사는 이치를 밝히는 일은 다만 개인의 삶을 넘어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되어야 하는 중용의 위상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과정은 거침없이 대동을 향해 움직이는[동動] 단계입니다. 밝히는[명明] 목적은 일으켜 세우기 위함입니다.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중용이 구가하는 사회 동원력이 바로 동 한 글자에 실려 있습니다. 중용은 결코 책상머리 놀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바꾸는[변變] 다섯 번째 과정으로 진입합니다. 움직이되, 나아가되 혁파가 없다면 무의미합니다. 승자와 강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악한 체제를 무너뜨리는 구체적인 힘으로 나타나지 않는 중용은 중용이 아닙니다. 특별하고, 잘난 소수가 백성 위에 군림하는 세상을 뒤흔드는 함성으로 들리지 않는 중용은 중용이 아닙니다.

 

마침내 대동으로 질적 전환하는 화化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저 순舜이 이룩한 세상, 온 생명이 평등하게 상호 소통함으로써 함께 자유롭고 더불어 평화로운 누리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런 세상의 꿈을 간직한 곡진한 발걸음 하나하나가 어둠을 뚫는 촛불이 되어 중용천지를 만들어 갑니다.

 

4. 오늘 이 땅의 지배집단의 행태를 보면 자기 이익을 위한 일에만 곡진하고 국민을 위한 일에는 한사코 건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월호사건 때를 기억해보십시오. 국민 죽여 자신 살리는 짓거리만을 되풀이했습니다. 침몰하는 배에 갇혀 국민이 죽어갈 때 사진 찍고 라면 먹었습니다. 유족들이 울부짖을 때 조문 쇼, 눈물 쇼를 벌였습니다. 중동독감대란 때는 또 어떠했습니까. 건성 대처한 중동독감으로 국민이 죽어갈 때 감염 없다 발표한 뒤 마스크 썼습니다. 중동독감이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을 때 치료 경험 없이 준비 중일 뿐인 의료기관 찾아 현장지휘 쇼를 벌였습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 야합 때 급기야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피해자 어르신들의 고통과 분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10억 엔짜리 굴욕 외교의 최고책임자가 직접 표독한 표정으로 국민을 야단치며 윽박지르는 담화를 발표하였으니 말입니다. 그야말로 참담무인지경입니다.



현실 정치 한복판에다 윤리학을 던져 넣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치도 인간의 일인 한 최소한의 염치와 절제의 요구는 불가피합니다. 그 최소한의 염치와 절제 속에 담긴 곡진함만이라도 챙겼더라면 대한민국이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배집단이 챙긴 것은 정반대로 매판과 독재, 그리고 통속종교가 채워준 금고였습니다. 이제 다른 길이 없어 보입니다. 민중이 옹골차고 맑은 마음을 다시 일으켜 곡진함을 되찾음으로써 이 나라를 변하고 화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