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3장 본문입니다.

 

其次 致曲. 曲能有誠. 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唯天下至誠 爲能化.

기차 치곡. 곡능유성. 성즉형 형즉저 저즉명 명즉동 동즉변 변즉화. 유천하지성 위능화.


그 다음은 한 부분을 이루는 것이다. 한 부분에 지극하면 성誠이 있을 수 있다. 정성스러우면 나타나고 나타나면 드러나며 드러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움직이고 움직이면 변하고 변하면 화化한다. 오직 천하의 정성스러움만이 화化할 수 있다.

 

2. 여태까지 기초적 본문 읽기는 이기동 역譯을 따랐지만 구체적 내용에서는 명사적 독법을 대부분 따르지 않고 제 나름의 이해를 펼쳐 왔습니다. 이 장에서는 처음부터 아예 번역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바로 치곡致曲 문제입니다. 주희가 곡曲을 '모퉁이'라고 했다는군요.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이기동은 ‘한 부분’으로 읽어 치곡을 ‘한 부분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지극한 성誠이 어려울 때는 차선으로 한 부분부터 시작한다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이 또한 주희 식 명사적 독법입니다. 저는 곡을 “곡진하게 (행)하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퉁이든 한 부분이든 그 것을 명사로 읽으면 치곡능유성致曲能有誠이 아니고  곡능유성曲能有誠이라 한 본문을 설명하기 궁합니다. 그리고 본문 맨 앞에 있는 기차其次를 보면 이 장이 바로 앞장인 제22장과 문맥상 연결해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앞 장의 키워드 중 하나인 진盡은 여기의 곡曲이고, 화육化育은 여기의 화化입니다. 

 

3. 곡진하다는 말은 자세하고 간곡하다는 뜻이므로 자연스럽게 성誠과 연속성을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곡능유성曲能有誠인 것이지요. 성에 진정성을, 간절함, 섬세함을 부여한 또 다른 표현이 바로 곡입니다. 곡으로 표현된 성은 치밀한 과정을 밟아 지성至誠으로 나아갑니다.

 

곡진하게 성의 실천을 통해 중용적 삶의 얼개를 그리는[형形] 것이 첫 번째 과정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삶을 중용의 도에 정향定向하는 일일 것입니다. 선택하고 선언하고 약속하는 순간들이 모여서 그 방향과 테두리를 잡아 갈 것입니다.

 

그 윤곽에 내용을 채워 확연하게 드러내는[저著] 과정이 그 다음입니다. 드러낸다는 말은 자랑한다거나, 무기로 삼는다는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실천의 열매들이 무르익고 쟁여져서 자연스럽게 밖으로 넘쳐나는 현상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 삶을 통해 도리를 명쾌하게 꿰뚫는[명明] 과정이 세 번째 과정입니다. 단순한 지적 깨달음이 아니라 실천에서 오는 이른바 증득證得입니다. 몸으로 아는 것이지요. 그런 행지行知로써 세상사는 이치를 밝히는 일은 다만 개인의 삶을 넘어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되어야 하는 중용의 위상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과정은 거침없이 대동을 향해 움직이는[동動] 단계입니다. 밝히는[명明] 목적은 일으켜 세우기 위함입니다.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중용이 구가하는 사회 동원력이 바로 동 한 글자에 실려 있습니다. 중용은 결코 책상머리 놀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바꾸는[변變] 다섯 번째 과정으로 진입합니다. 움직이되, 나아가되 혁파가 없다면 무의미합니다. 승자와 강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악한 체제를 무너뜨리는 구체적인 힘으로 나타나지 않는 중용은 중용이 아닙니다. 특별하고, 잘난 소수가 백성 위에 군림하는 세상을 뒤흔드는 함성으로 들리지 않는 중용은 중용이 아닙니다.

 

마침내 대동으로 질적 전환하는 화化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저 순舜이 이룩한 세상, 온 생명이 평등하게 상호 소통함으로써 함께 자유롭고 더불어 평화로운 누리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런 세상의 꿈을 간직한 곡진한 발걸음 하나하나가 어둠을 뚫는 촛불이 되어 중용천지를 만들어 갑니다.

 

4. 오늘 이 땅의 지배집단의 행태를 보면 자기 이익을 위한 일에만 곡진하고 국민을 위한 일에는 한사코 건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월호사건 때를 기억해보십시오. 국민 죽여 자신 살리는 짓거리만을 되풀이했습니다. 침몰하는 배에 갇혀 국민이 죽어갈 때 사진 찍고 라면 먹었습니다. 유족들이 울부짖을 때 조문 쇼, 눈물 쇼를 벌였습니다. 중동독감대란 때는 또 어떠했습니까. 건성 대처한 중동독감으로 국민이 죽어갈 때 감염 없다 발표한 뒤 마스크 썼습니다. 중동독감이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을 때 치료 경험 없이 준비 중일 뿐인 의료기관 찾아 현장지휘 쇼를 벌였습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 야합 때 급기야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피해자 어르신들의 고통과 분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10억 엔짜리 굴욕 외교의 최고책임자가 직접 표독한 표정으로 국민을 야단치며 윽박지르는 담화를 발표하였으니 말입니다. 그야말로 참담무인지경입니다.



현실 정치 한복판에다 윤리학을 던져 넣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치도 인간의 일인 한 최소한의 염치와 절제의 요구는 불가피합니다. 그 최소한의 염치와 절제 속에 담긴 곡진함만이라도 챙겼더라면 대한민국이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배집단이 챙긴 것은 정반대로 매판과 독재, 그리고 통속종교가 채워준 금고였습니다. 이제 다른 길이 없어 보입니다. 민중이 옹골차고 맑은 마음을 다시 일으켜 곡진함을 되찾음으로써 이 나라를 변하고 화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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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2장 본문입니다.

 

唯天下至誠 爲能盡其性. 能盡其性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則可以贊 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則可以與天地參矣.

유천하지성 위능진기성. 능진기성즉능진인지성 능진인지성즉능진물지성 능진물지성즉가이찬 천지지화육. 가이찬천지지화육즉가이여천지참의.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스러움만이 자기의 성性을 다할 수 있다. 자기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면 남의 성을 다할 수 있고 남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면 물物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며 물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면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다.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으면 천지와 하나가 될 수 있다.

 

2. 흔히 훌륭한 사람이 훌륭한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본성이 훌륭하면 그에 걸맞은 행위가 나온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세상에 어떤 사람은 본성이 훌륭하며 또 어떤 사람은 본성이 훌륭하지 않은가에 대한 선험적 구별을 전제해야 합니다. 저는 그런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설혹 있다 해도 누가 그것을 알겠습니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는 실천을 보고 나서입니다. 한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만큼 그 사람입니다. 자신이 실천한 만큼 그 사람입니다. 실천되지 않은 관념이나 지식이나 자세는 아직 그 사람이 아닙니다. 지극한 실천, 곧 지성至誠, 온 힘을 다한 선택만이 자기 본성을 나타낼 뿐입니다. 선택하지 않은, 실천하지 않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우겨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탐욕입니다. 탐욕을 거절하고, 견뎌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입니다. 그래야 중용의 이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입니다.

 

이렇게 실천의 자리에만 자신의 본성을 매겨 넣어야 타인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참 소통은 실천의 소통입니다. 실천으로 관통하고 실천으로 흡수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비로소 참 인식의 통합이 꽃피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타난 실천의 연대가 바로 사회적 본성입니다. 중용의 사회적 본질이 여기서 생겨납니다.

 

인간사회가 중용의 이치를 담는 최종적 그릇은 아닙니다. 인간 아닌 존재, 그것이 생명이든 아니든 우리와 함께 시공간을 지나는 모든 존재와 소통함으로써 중용은 생태학적 지평을 획득합니다. 이름 없는 풀 한 포기, 눈에 띄지 조차 않는 작은 벌레 한 마리, 돌 하나, 아니 물 한 방울까지 우리와 본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를 우리가 사랑하고, 배려하고, 보살핍니다. 그들 모두도 우리를 사랑하고, 배려하고, 보살핍니다.

 

세계가 온정으로 가득 차 있다는 유아적 허상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모든 존재가 서로 마주한 주체이며, 소통의 동등한 당사자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일방적 제압, 착취는 있을 수 없습니다. 더불어 새로워지고 자라야, 곧 화육化育해야 합니다. 서로 경이로움을 향해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함께 그 존재 가치를 맘껏 펼쳐야 합니다. 이 경지가 대동입니다. 우리가 천지와 하나 되는, 곧 여천지참與天地參하는 궁극의 차원입니다.

 

천지와 하나 되는 일은 초월명상이나 면벽참선에서 일어나는 신비 현상이 아닙니다. 지극한 실천의 부단한 확산, 치열한 선택의 무궁무진한 증폭을 통해 이루어지는 숭고의 과정이며 영성의 공유입니다. 숭고는 인간이 개체의 경계를 허물고 세계 전체를 향해 삶의 영역을 넓혀가는, 거꾸로 말하면 개체 밖의 삶과 가치를 널리 받아들이는 사유와 실천입니다. 영성은 숭고의 과정에서 얻어지는 광활함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천지와 하나 되려면 통속한 행복론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각자도생이 삶의 원리인 이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돈만이 ‘근본’인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회자되는 행복이란 결국 절대다수를 수탈해서 취하는 극소수 패거리의 향락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행복을 꿈꾼다는 것은 수탈체제에 부역하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숭고와 영성이 깃들 수 없습니다. 기존의 통속 인문학과 종교는 이미 여기에 휩쓸린 지 오래입니다. 천지와 하나 되는 일은 이런 향락적 행복을 거절하고 공공의 어젠다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고통 속에 함께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태여 참된 행복이라고 한다면 이 행복만을 우리는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 세상입니다.


3. 오늘 우리 대한민국 사회를 돌아보면 참담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더불어 새로워지고 자라 천지와 하나 되는 중용은커녕 끊임없이 후패하고 퇴행하는 정치로 말미암아 국민은 더욱 죽음과 고달픔, 그리고 두려움으로 내몰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세월호에 250명 아이들을 포함해 304명의 국민을 가두어 잔혹하게 살해하였던 바로 그 국가가 피의 행진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중동독감으로 불특정 다수의 국민을 살해하였고, 역사교과서 획일화 책동으로 역사를 살해하고 있으며,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다시 한 번 살해하려 하고 있습니다.



국가는 최근 몇 년 동안 언제나 그래왔듯 처음부터 끝까지 사태의 경과를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전략을 썼습니다. 사태의 경과를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핵심 전술은 ‘닥치고’ 하는 거짓말이었습니다. 거짓말 중 가장 큰 파괴력을 지닌 것이 바로 ‘대통령의 시간’이었습니다. ‘대통령의 시간’은 전혀 하자 없는 촘촘한 서사를 구성하는 것으로 발표·보도되는 바로 다음 찰나 치명적 부재를 공공연히 드러냈습니다. 사태의 경과 진실과 전혀 관련 없는 설정 임재臨在가 사태의 서사를 분산하고 해체했습니다. 세월호 서사도 중동독감 서사도 역사교과서 획일화 서사도 일본군 성노에 피해자 문제 서사도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서사가 붕괴된 사태로 말미암아 죽음은 확산되고 불안은 증폭되었습니다. 세월호 우울로 위축된 경기는 중동독감 공포 때문에 바닥을 쳤습니다. 연이은 악정은 바닥상태를 고착시켰습니다. 절대 다수의 인간적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극소수의 비인간적 향락은 세계 사치성소비시장을 견인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삶이 피폐로 적나라해질수록 더욱 비밀스러워지는 ‘대통령의 시간’은 철통 같이 보위되고 있습니다.


더불어 새로워지고 자라 천지와 하나 되는 중용은 못할망정 대놓고 소시오패스 행태를 보이는 것만이라도 삼갔으면 하는 최소한의 바람조차 물색없습니다. 우리가 이 나라 국민의 운명을 지고 살아야만 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대체 누구를 붙잡고 물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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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1장 본문입니다.

 

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

자성명 위지성 자명성 위지교. 성즉명의 명즉성의.


정성스러움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것을 성性의 작용이라 하고 밝음으로 말미암아 정성스러워지는 것을 교敎의 효과라 한다. 정성스러우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정성스러워진다.

 

2. 치열한 실천을 통해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은 생명의 타고난 본디 작용, 곧 성性입니다. 이치를 깨우쳐서 적확하게 실천하는 것은 교敎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둘은 결국 하나입니다. 실천할수록 명쾌하게 깨달아지고 꿰뚫어 알수록 옹골차게 실천하는 법입니다. 인식과 실천은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둘입니다. 아주 진부한 말이지만 한 순간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전통적인 해석이 성誠을 한사코 ‘정성스러움’, ‘성실함’으로 파악함으로써 내적 자세 정도로 묶어두는 흐름이 굳어졌습니다만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우리는 성을 철저히 동사적 의미로 읽습니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천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정성스러움, 성실함의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내포를 넘어 적확하고, 어김없는 실천의 뜻까지도 담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명明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밝음’이라 하든 ‘밝아진다.’라고 하든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측면이 드러나지 않는 해석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명은 선택과 결단에 의거한 인식 추구 행위입니다. 따라서 억압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그 어둠을 뚫고 올바른 인식을 지니는 것 자체가 이미 실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식은 쉽고 실천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허나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억압이 합리화된 사회일수록 인식의 전환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한 때 반독재 투쟁에서 전설적 실천가였던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의 환원을 통해 스러져 갔는지 우리는 수없이 목도한 바 있습니다. 올바른 인식은 그 자체로 벡터적 동력을 지니는 법입니다. 그들이 변절했다는 것은 그들의 인식이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바꿨다고 말합니다. 그 말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는 그렇게 말하는 자들이 지금 만들고 있는 우리사회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도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인식은 처음 것도 나중 것도 투철함에서든 방향 잡음에서든 관철함에서든 제대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둠을 뚫고 올바른 인식에 다다른 명을 이를테면 ‘시명始明’이라 할 때 성의 차원을 온전히 획득한 명을 이를테면 ‘본명本明’이라 한다면 그것이 곧 인식과 실천의 일치입니다. 여기서 명은 성의 또 다른 이름이 됩니다. 한결같은 실천 안에서 명은 명이자 성인 것입니다.


한편, 제 방향을 잡은 인식, 그러니까 명 안에서 성은 제대로 된 성입니다. 방향 없는, 서사敍事 없는, 기승전결 없는 성은 성이 아닙니다. 성에는 감동이 있습니다. 경이로움이 있습니다. 장엄을 향한 숭고함이 있습니다. 이 속에서 성은 명의 또 다른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3. 우리사회 지배집단은 선거철만 되면 ‘민심이 천심天心’이란 사탕발림을 해댑니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곧 바로 ‘민심은 천심賤心’으로 떨어뜨려집니다. 이것이 바로 소인배의 인식이며 실천입니다. 국민을 천한 아랫것으로 인식하므로 그 국민을 향한 소인배의 실천은 시혜로 위장한 착취와 의도된 무능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전자는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서슴없이 하는 것입니다. 후자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고의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월호사건, 이것은 단군 이래 최고의 의도된 무능, 그러니까 부작위不作爲 전능이었습니다. 몰라서 못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왕좌왕하다가 사고 수습을 그르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다 알면서 냉철하게 계산하고 일부러 하지 않은 것입니다. 진실을 다 밝힌다면 모름지기 이 정권이 처음부터 기획하고 조작하고 은폐했다는 것이, 그러니까 무능을 가장한 전지전능이었음이 드러날는지도 모릅니다. 저들이 사건 이후 일관되게 보여주는 대응은 이를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잘못된 인식에 터하여 실천을 하지 않는 것이든 잘못된 인식에 딱 맞는 잘못된 실천을 하는 것이든 저들은 저들답게 저들이 할 짓을 하고 있습니다. 반중용 말입니다.



문제는 중용을, 명을, 성을 부둥켜안고 있는 사람들 곁을 차마 떠날 수 없어 주위에서 서성대는 사람들입니다. 권력이 하는 짓을 다 알면서도 두려운 나머지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자신의 일처럼 가슴 치고 눈물 흘리면서도 말 한 마디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가슴에 품은 실천이 언제 어떻게 몸으로 나타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그들에게, 그들을 위해 고요히 낮은 음성으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어둠 속에서 살며시 손을 내밀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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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담 2016-07-05 0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bari_che 2016-07-05 13:2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1. 제20장 일곱 번째 문단입니다.


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

성자천지도야 성지자인지도야. 

誠者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聖人也.

성자불면이중 불사이득 종용중도성인야. 

誠之者 擇善而固執 之者也. 

성지자 택선이고집 지자야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박학지 심문지 신사지 명변지 독행지. 

有弗學 學之 弗能弗措也. 有弗問 問之 弗知弗 措也. 

유불학 학지 불능불차야. 유불문 문지 부지부 조야.

有弗辨 辨之 弗明弗措也. 

유불변 변지 불명부조야. 

有弗行 行之 弗篤弗措也.

유불행 행지 부독부조야. 

人一能之己百之 人十能之己千之. 

인일능지기백지 인십능지기천지. 

果能此道矣 雖愚 必明 雖柔 必强.

과능차도의 수우 필명 수유 필강.


성誠은 하늘의 도이고 성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 성한 자는 힘쓰지 않아도 적중하고 생각하지 않아도 얻게 되며 저절로 도에 적중하니 성인이다. 성해지려고 하는 자는 선을 택해서 굳게 붙잡는 자이다.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고 명확히 분별하며 돈독하게 행한다.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운다면 능해지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묻는다면 알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하면 얻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분별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분별하면 밝히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행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행하면 독실하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남이 하나를 할 수 있으면 자기는 백을 하고 남이 열을 할 수 있으면 자기는 천을 한다. 과연 이 방법을 할 수 있으면 비록 어리석어도 반드시 밝아지며 비록 연약하더라도 반드시 강해진다.

 

2. 길고 긴 제20장이 이제야 끝납니다. 처음에는, 울퉁불퉁하고 부자연스러워서 앞부분을 모조리 없애고 딱 이 문단만 가지고 제20장 공부를 하려고 했습니다. 사실 이 내용만으로도 성誠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다만 오랜 세월에 걸쳐 사회적 타당성을 획득해 가며 여러 의미 갈래를 거느려 온 텍스트라는 역사적 현실성을 인정해 수신修身을 지도리 삼아 중용과 성을 연결하는 문맥으로 이전 문단들을 자리매김 해 본 것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 자유나마 누릴 수 있는 세상이 고맙습니다. 조선시대 윤휴는 주희와 다른 해석을 했다 해서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임까지 당했으니 말입니다. 물론 지금 세상은 지금 세상대로 더 가혹한 질곡이 있지만 주희가 산 사람을 죽이지는 않으니 그 아니 다행입니까.

 

3.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성은 성실함, 정성스러움이라고 이해하기에 앞서 중용의 중中과 본질적으로 같은 뜻으로 새겨야 합니다. 제16장에서 살폈듯이 만물의 주체로서 도에서 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곧 체물이불가유體物而不可遺하고 치열하게 실천한다는 역동적 의미를 가지는 말입니다. 그래서 적확하다, 벗어나지 않는다, 어긋나지 않는다는 내포로서 중과 연속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완전한 성誠과 애쓰는 성지誠之를 구별합니다. 완전한 성이야 순舜 임금 같은 성인이나 할 수 있는 경지이니 현실적으로는 오로지 푯대요 깃발일 뿐입니다. 나머지 우리 모두는 찰나 마다 선을 택해서 굳게 붙잡아야 하는, 곧 택선이고집지擇善而固執之하는 노력 과정 자체로 살아갑니다. 늘 깨어서,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고 명확히 분별하며 돈독하게 행하는, 곧 박문지博學之 심문지審問之 신사지愼思之 명변지明辨之 독행지篤行之하는 순간순간을 무릎으로 지나갑니다.

 

안 하면 몰라도 하려 들면 하고자 하는 바가 이루어질 때까지 멈추지 않는 열정으로 남보다 더 분투하는 과정에서 우유愚柔가 명강明强으로 바뀝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과정 자체가 성입니다. 평범한 사람의 미련하고 어리석은 실천이 한 줄기 한 줄기 모여 중용의 강을 이루어 냅니다. 

 

중용은 존재가 아닙니다. 중용은 실천입니다. 중용은 결과가 아닙니다. 중용은 과정입니다. 중용은 완성이 아닙니다. 중용은 영원한 노력입니다. 중용은 특별한 자의 포효가 아닙니다. 중용은 평범한 자의 함성입니다. 바로 이런 중용의 모습을 돋을새김 한 표현이 성입니다.

 

4. 지금은 그도 쉰을 넘기고 유수한 대학의 교수로 있는 제자가 대학원 다닐 때 제게 들려준 이야기 한 토막이 떠오릅니다. 명문가 출신인 그의 지도교수가 자녀를 어떻게 호방하고 자유롭게 양육하는가를 간결하게 전해주었습니다. 가령 아이들에게 단 한 번도 공부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운운. 제가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하거나 못 해서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냐?”


제자가 답했습니다.


“에이, 선생님도·······그랬으면 제가 이 말씀 왜 드렸겠어요?”


제자가 당연히 여긴 부분과 제가 당연히 여긴 부분이 사뭇 달랐습니다. 하여 제가 다시 말했습니다.


“바로 그게 세습이야. 이른바 명문가에서 태어난 것만으로 그 아이들은 열린 공부 길 위에 이미 서 있는 거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사람의 아이들은 공부해라, 공부해라 골 백 번 잔소리해야 하고, 심지어 욕하고 때려야 공부 길로 겨우 들어서. 들어서서도 백배 천배 독하게 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어.”


물론 여기 공부와 중용은 전혀 다릅니다. 중용은 세습으로 다가갈 수 있는 통속한 소유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제3장에서 『중용』 스스로 인정하다시피 생존의 문제가 걸린 시간들을 어렵게 견뎌야 하는 사람일수록 중용을 선택하고 지속하는 일이 더욱 힘들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중용의 덕이 아무리 귀하다 하더라도 하루하루 가족 먹여 살리는 일에 목맬 수밖에 없는, 평범하기조차 어려운 사람이 시시각각 강요되는 극단을 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중용은 이들에게 독하고 또 독한 요구임에 틀림없습니다.


중용이, 평범하기조차 어려운 사람에게 독하고 또 독한 요구라면, 분명 이들보다 더 용이하게, 더 수준 높게 중용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해야 이치상 맞습니다. 공자 당시로 돌아가 말한다면 공자 자신으로 대표되는 사대부 계층 지성집단을 먼저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각성하여 중용을 정치경제학 비판의 고갱이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중용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하였습니다. 권력에 편입되고 그 중심부로 들어가면 갈수록 다른 개념의 중용을 신봉하겠지만 오늘날에도 이런 지성집단은 반드시 존재하고 또 존재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당연히 힘과 돈을 장악하고 있는 제후 집단입니다. 정치경제의 현실은 명실상부 이들이 쥐락펴락하는 것이므로 공자가 한 평생 이들을 곡진히 계몽하고 설복시키는 일에 매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실패하였습니다. 이는 공자의 실패가 아닙니다. 인간 자체의 실패입니다. 공자에게서 『중용』이 발원된 지 이천오백 여 년, 여전히 제후의 가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여전히 이들은, 아니 이들이야말로 중용 실천의 의무 앞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 현실을 보면 스스로 각성한 지성집단은 나태하고 무기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는 오히려 날 세우고 떠들던 이른바 진보 지식인들이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들어오면서는 입을 닫음으로써 파렴치하게 부역하고 있습니다. 통치 집단과 재벌, 그리고 통속종교의 제후동맹은 날로 그 반중용적 매판독재분단고착 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제후의 가치는 갈수록 난공불락이 되어가고 공자의 수레바퀴는 길가에 방치되어 있는 형국입니다.


결국 우리 논의는 원점으로 돌아가고야 맙니다. 평범함조차 사치랄 저 민중, 미상불 불가촉천민the Untouchable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생존의, 생명의 낮은 연대를 형성하는 그 단 하나의 길 말고 달리 생각할 중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중용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중용 하도록 숙명 지우는 국가를 끌어안고 우리는 목숨 걸고 중용을 해야 합니다. 아, 참으로 독한 실천의 독한 중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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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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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사회를 서구와 모든 점에서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통일된 독일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아직까지도 냉전이 완전히 종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냉전이 사회의 일반적 의식을 근본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 역시 성과사회이고 그에 다른 사회적 폐해와 정신질환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적어도 그 점에서는 서구 사회와 전혀 다르지 않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6-7쪽)

 

『철학은 뿔이다』(북인더갭, 2016)라는 책이 있습니다. 헤겔주의자임을 자처하는 번역가이자 시인인 전대호가 쓴 책입니다. 제가 이 책을 집어 들었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가 김상봉을 어떻게 비판하였는지 알고 싶어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왜 하필 헤겔인지 알고 싶어서입니다. 처음 것은 나중에 다른 기회를 통해서 직접 리뷰 형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서는 왜 하필 헤겔인가, 하는 부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전대호는 자율과 책임을 이행하는 대화적 주체를 철학의 중심에 놓습니다. 그의 이런 철학과 일치하는 철학이 다름 아닌 헤겔입니다. 헤겔을 방편으로 삼아 그는 자신의 사유를 펼칩니다. 이것을 그는 ‘나는 나의 헤겔을 끌어들일 뿐이다. 다시 말해 나는 내 목소리를 낼 뿐이다.’라고 합니다. 제가 왜 하필 헤겔인가 하고 품은 의문은 그의 이 결정적 두 문장 사이에 있는 어긋남 또는 모순 때문입니다. 제 질문은 이것입니다.

 

“끌어들인 헤겔이 어떻게 내 목소리를 내는 나인가?”

 

이 땅의 잘못된 학문과 교육을 간파하고 이미 자신의 사유 근간을 확립했다는 그의 말에 터할 때, 스스로의 언어로 철학체계를 구축하면 되지 왜 구태여 ‘외부’로 나가 그것을 확인하고 돌아와서 헤겔을 방편으로 끌어들인다고 하고, 헤겔주의자라고까지 자처하는 것일까요? 전대호의 이런 말하기는 과연 그가 말한바 ‘제자리에서 말하기’가 맞는 것일까요? 그러면 헤겔은 누구를 방편으로 끌어들였으며 누구주의자였을까요?

 

조금 더 나아가겠습니다. 평범한 철학도가 자신의 사유를 전개할 때, 대가나 거장에 기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저는 다시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왜 하필 헤겔인가?”

 

이 질문의 핵심은 왜 그의 ‘외부’가 하필 서양인가입니다. 동아시아 전통도 아니고, 이 땅의 전통도 아니니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가 옹호하는 근대성을 동아시아 전통이나 이 땅의 전통에서는 찾을 수 없어서였다면 이는 확실히 그의 실패일 것입니다. 그의 실패에는 다분히 그가 비판하는 ‘외부인 놀이’가 끼어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헤겔보다 천백여 년 앞서, 이 땅의 원효가 이미 근대성의 원리를 장쾌하게 펼쳐놓았다는 사실을 그는 몰랐습니다. 왜 몰랐을까요? 그다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아무리 보편적 과제가 있다 할지라도 그 해결의 출발점은 문제를 안고 있는 인간과 그 공동체의 구체적인, 그러니까 특수한 현실입니다. 전대호를 읽으며 일어났던 의문이 한병철을 읽을 때에도 일어날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한병철이 독일에서 독일어로 쓴 명쾌한 글을 한국인이 한국어로 번역한 것으로 읽을 때 다가오는 낯설음은 다만 언어의 문제가 아닙니다. 만일 이 책이 한국에서 한국어로 같은 시기에 첫 출판되었다면 한국 독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가 한국 사회가 서구 사회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냉전이 사회의식을 근본적으로 지배하지 않으며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의 사유 현실은 확실히 한국 아닌 서구, 독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지배하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거니와 종북 프레임이 이 사회를 전방위적으로 망치고 있는 현실이 어떻게 근본적이지 않은지 궁금합니다.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나라를 팔아먹어도 매판독재분단세력에게 표를 던지는지 궁금합니다. 식민지를 경험하고 신식민지 상황에 놓여 있는 준주변부 한국의 성과사회가 독일의 그것과 어떻게 같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무엇보다 세월호사건 뒤였다면 이 서문을 과연 어찌 썼을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저는 이미 한병철의 저작 『투명사회』, 『심리정치』리뷰 56편의 글을 적었습니다. 그의 글이 워낙 정확명징하기 때문에 독자에게 주는 행복감은 대단합니다. 『피로사회』또한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 번 리뷰는 제가 좀 대립각을 세우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가 질병, 특히 마음병을 논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문학자이고 저는 의자醫者입니다. 배타적 구획은 저 또한 반대하지만, 임상 현실에 처한 저로서는 인문학적 접근의 폐단이 범람하는 현실을 어물쩍 넘어갈 수 없습니다. 까칠한 자세로 시작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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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2016-05-12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대호가 `나는 나의 헤겔을 끌어들일 뿐이다`라고 말할 때, 방점은 `헤겔`보다 `나의`에 찍혀야 합니다. 전대호의 헤겔은 외부에 있는 객관적 헤겔이 아니라 전대호가 이해하고 소화한 헤겔입니다. 헤겔을 소에 비유하자면, 전대호의 헤겔이란 목장의 소나 정육점의 쇠고기가 아니라, 전대호가 이미 씹어서 삼키고 동화해서 이미 그의 몸이 된 헤겔입니다. 그런 헤겔을 방편으로 운용하는 것도 외부인 놀이일가요? 인용하신 두 문장 사이에 어긋남 혹은 모순이 있다는 평가를 저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bari_che 2016-05-12 14:22   좋아요 8 | URL
탁월한 비유입니다. 그 비유에 따릅니다. 쇠고기가 모두 소화되어 전대호의 몸이 되면 더 이상 소가 아닙니다. 헤겔이 모두 소화되어 전대호의 사상이 되면 더 이상 헤겔이 아닙니다. 그런데 전대호는 지금 헤겔을 여전히 붙잡고 있습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소화가 덜 된 것이라면 아직 내 목소리가 아닙니다. 소화가 다 되었음에도 헤겔을 붙들고 있다면 이는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생계의 문제입니다. 두 경우 모두 논전 아닌 실전에서 다루어야 합니다. 실전에서는 방점의 위치차가 무의미합니다. 막춤 못 추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나그네 2016-05-12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철학자들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이름난 선배를 들먹이는 이유는 뭘까요? 물론 그 선배의 권위에 기대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훨씬 더 중요한 이유는 그런 선배가 말하자면 이정표의 구실을 하기 때문입니다. 몹시 추상적인 철학의 세계를 탐험하다보면, 우선 철학자 본인이 자신의 자리를 확인할 필요가 절실해집니다. 그럴 때 이름난 선배들이 위치 확인용으로 매우 요긴합니다. 예컨대 나는 `헤겔과 칸트 사이의 중간쯤에 있다`라는 판단이 서면, 나 자신의 생각을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되죠. 자기 생각을 다른 철학자들에게 알리고 설명할 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잘 아는 이정표들을 기준으로 삼아서 설명을 풀어나가면 매우 효율적입니다. 더구나 수준이 깊어지면, 그렇게 이정표들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논의를 진행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요컨대 이름난 선배를 들먹이는 것은,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와 소통을 위해서, 그러니까 결국 사상을 위해서입니다. 아마 전대호가 헤겔을 언급하는 것도 똑같은 이유에서일 겁니다.

bari_che 2016-05-19 14:32   좋아요 10 | URL
논점이 비틀어져서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 논의를 더 계속해야 하나 의문이 들어 고민하다가 다시 추슬러 말씀드리겠습니다.

외부에 나가 공부한 사람들이 그 현장에서 배운 내용과 감각으로 쓴 글을 여기 현장에서 배운 내용과 감각으로 읽을 때 드는 괴리감에 대한 언급이 이 이야기의 발단이었습니다. 전대호에 관한 언급은, 끌어들인 헤겔이 과연 전대호일 수 있는가, 그렇다고 할 때 왜 하필 헤겔인가를 물은 것입니다.

반론하신 분은 쇠고기 비유를 들어 나의 헤겔과 내 목소리 사이에는 어긋남 또는 모순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비유를 그대로 받아들여 논점을 더 명료히 했습니다. 소화 흡수가 끝난 쇠고기는 더 이상 소가 아니듯 소화 흡수가 끝난 헤겔은 더 이상 헤겔이 아닐 텐데 계속 헤겔을 붙잡고 있는 것은 사상 아닌 생계 때문이 아닌가, 다시 물었습니다.

반론하신 분은 제 질문의 구체적 문맥을 넘어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철학자들이 선배 대가에 기대는 것은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고, 동료 철학자들에게 더 잘 설명하려 함이라는 내용입니다. 이런 정도 내용이라면 이미 제가 인정한 바입니다. 이런 기댐을 제가 문제 삼은 것이 아닙니다. 소화 흡수가 다 끝나 내 목소리가 되었다, 그러니까 헤겔이 전대호가 되었다, 따라서 양자 사이 어긋남이 없다고 말했으면서 왜 계속 헤겔을 ‘이정표’ 삼는가를 물은 것입니다. 이정표가 필요한 것은 여행자가 길을 모를 때입니다. 말의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아직도 헤겔이라는 이정표가 필요한 전대호라면 그의 헤겔은 그의 목소리가 아닙니다. 외부 목소리입니다. 정말 헤겔이 전대호임에도 전대호가 여전히 헤겔 이름을 들먹인다면 그 헤겔이라는 이름은 전대호의 신분증명서이거나 훈장일 것입니다. 이것을 제가 생계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반론하신 분은, 그렇다고 할 때 그게 왜 하필 헤겔인가를 물은 것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제 문제의식은 거기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원효 이야기도 하고 한국 사회 특수성 이야기도 하면서 이 현장의 생명, 이 현장의 삶 문제를 풀기 위해 이 현장의 경험과 언어가 필요하다는 요지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추측건대 반론하신 분에게는 아직 이 문제가 절실하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논의는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반론하신 분의 응원은 전대호 본인에게 그다지 힘이 되지 못할 듯합니다.

끝으로, 반론하신 분이 말씀하신 ‘깊은 수준’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전대호의 책도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는, 끝내주는, 뻐근함의 깊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산골로 들어오길 잘한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는, 끝내주는, 뻐근함의 깊이에 계속 머무르는 산골에서 신선놀이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 공부깨나 한 사람이면 누구라도 할 것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교적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이들이 바로 아라한입니다. 아라한은 소승의 아이콘입니다. 대승의 길은 아라한의 깊은 산골에서 나와 사람의 마을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회향입니다. 모름지기 철학자라면 아라한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회향하는 보살, 참 붓다의 숙명을 기꺼이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철학을 공부함에서 마치려면 깊이에 빠져도 되지만, 철학함doing philosophy으로 나아가려면 ‘깊은 수준’의 ‘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휴먼스케일 안에서 휴먼스킬이 되어야 합니다. 세월호사건을 겪은 대한민국에서 철학함이란, 휴먼스킬 됨이란 막춤꾼 되기입니다. 아니 모자랍니다. 막싸움꾼 되기입니다. 저는 아픔과 죽음이 전방위로 들이닥치는 현장을 지키는 임상의입니다. 변방 한의사입니다. 온 영혼에 그득 담은 이 땅의 눈물을 빌어 간절히 기원합니다. 전대호가 부디 옹골찬 막싸움꾼 되기를!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