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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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말은 서양 언어에 비해 시제어가 잘 발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컨대 과거, 과거완료, 대과거, 미래, 미래완료 등의 정교한 시간적 분절과 특성들을 우리말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다분히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시간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간을 정교하게 나누는 것은 사물이나 사태를 구획화compartmentalization하여 정량적定量的으로 사유하는 서구인들의 세계관을 반영합니다. 시간의 각 단위들에 객관적 경계를 설정하여 서로 넘나드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것이지요. 마치 코스요리와 같습니다.

  이에 비해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정성적定性的 감수성으로 지각합니다. 시간의 주관성에 주의합니다. 마치 한상차림 요리와 같습니다. 시간은 서로 다른 색채의 것들이 함께 어울려 흐르기도 하고, 가역적일 수도 있고, 격절이 생기기도 하고, 질적 특이성으로 고밀도가 되기도 하고, 텅 비기도 합니다. 이런 다양한 파동을 구획 안에 따로 가두는 것은 우리와 아주 낯선 방식입니다. 정성적 시간 감각은 장場적 감각입니다. 장적 감각은 전체성 안에서 한꺼번에 사태를 파악하는 관통 능력을 키워줍니다. 이런 감각과 능력은 구획, 격자에 길들여진 체계로는 담보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이런 차별성의 지점에서 우리는 ‘통짜상담’으로 열리는 ‘단박치료’의 길을 보는 것입니다.(196-197쪽)


아침나절 한의원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던 울음소리가 여적 남아 있다 배어나오는 듯합니다. 40대 초반 여성이 봉인되었던 시생대 기억을 더듬으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성적인 학대를 핵심으로 하여 존재의 경계선을 지워나간 학대의 삽화들이 끝도 없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의 몸 외적인 형체는 40대 초반을 가리키고 있지만 내밀한 몸, 그 감각은 성 학대를 당한 그 시점에서 성장을 멈추었습니다. 그의 마음 외적인 형체는 40대 초반을 가리키고 있지만 내밀한 마음, 그 감각은 성 학대를 당한 그 시점에서 성장을 멈추었습니다. 하여 그의 생명 시간은 기억의 연어가 되어 역류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 시간은 과거-현재-미래의 구획대로 흐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마음, 다시 무엇보다 상처 입은 마음 생명 시간은 웅크리고, 곤두박질하고, 주름지고, 튕겨나가고, 무찔러갑니다. 또박또박 흘러가면서 상처를 지워내는 시간 따위는 없습니다. 잊자 한다고 잊히는 과거 따위는 없습니다. 즐기면 마냥 행복한 현재 따위는 없습니다. 간절히 소망하면 오는 장밋빛 미래 따위는 없습니다. 포개지고 쪼개지며 부서지고 들러붙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뒤엉켜 흘러가는 것이 삶의 시간입니다.


마음 아픈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바로 이런 장場, 그것도 난장을 경험하는 순간들로 범벅이 됩니다. 40년 전이 오늘 아침으로 솟아오르고 오늘 아침이 40년 전으로 꺼져버립니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마음 치유란 이런 혼돈 속에 함께 앉아 있는 일입니다. 마음 치유란 이런 무질서 속에서 손잡는 일입니다. 함께 앉아 손잡는 일은 아픔의 시간을 구획 지어 양적 질서를 세우는 일이 아닙니다. 함께 앉아 손잡는 일은 아픔의 시간마다 다른 색조를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질적 결을 벼리는 일입니다.


치유의 시간은 아무리 잘라내도 통짜입니다. 치유의 시간은 아무리 늘여도 단박입니다. 이런 시간 감수성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를 낯설게 여기신다면 그대는 너무 많이 타인입니다. 어서 돌아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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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9장 본문입니다.


子曰 天下國家 可均也 爵祿 可辭也 白刃 可蹈也 中庸 不可能也.

자왈 천하국가 가균야 작록 가사야 백인 가도야 중용 불가능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천하나 국가도 고르게 할 수 있으며, 벼슬이나 녹도 사양할 수 있으며, 시퍼런 칼날도 디딜 수 있으나 중용은 할 수가 없다.”


2. 중용은 과연 최고의 덕입니다. 천하나 국가를 고르게 하는 위대한 정치력의 ‘특별함’으로도, 큰 벼슬이나 녹을 받을 만한 재목의 ‘특별함’으로도, 시퍼런 칼날을 디딜 수 있는 재능의 ‘특별함’으로도 접근이 불가능한 가치입니다. 


중용의 이 도저한 ‘평범함’은 인간 생명의 전 면모를 통해 드러나는 통합가치입니다. 참된 소통의 흐름에 자신을 싣는 유연한 느낌, 소통을 꿰뚫어 보는 슬기, 꿋꿋이 소통을 실천하는 옹골참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오히려 ‘특별함’이 더 쉽습니다. 애써 통합할 것 없이 갈라놓으면 그뿐이기 때문이지요.


사실 중용실천의 전제 조건을 살펴보면 “이걸 어찌 평범하다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도리어 관념적이지 않느냐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허나 핵심은 무엇이 평범한가 하는 추상적 문제에 있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누리기를 바라는 권력, 돈, 종교가 특별한 가치로 이미 자리매김 되어 있는 현실 세상이 대동大同을 거절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결국 평범하지 않은 것을 평범하다 하는 요청적인 어려움은 바로 그 사이비 ‘특별함’ 때문에 생긴 난제인 셈이지요. 세상이 꼬인 것입니다. 가치가 뒤바뀐 것입니다. 이래서 중용은 혁파입니다. 혁파이기 때문에 공자의 입에서 “할 수가 없다[불가능야不可能也]”라는 탄식이 흘러나온 것입니다.


3. 요즘 우리사회 돌아가는 모양이 꼭 그와 같습니다. 특별한 사람들은 입만 열면 원칙, 정의, 개혁을 말합니다. 원칙을 어기고, 정의를 무너뜨리며, 수구로 일관하는 사람일수록 엄숙하거나 환히 웃는 표정을 지으며 천연덕스럽게 그런 거짓말을 합니다. 매우 쉽기 때문입니다. 여태껏 그렇게 부정선거 해서 헌법기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바다에 빠뜨려 아이들 죽여 놓고 눈물 따로 웃음 따로 팔아서 정국 수습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업인들한테 검은 돈 받아서 곳간도 불렸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면 자신감에 차서 내키는 대로 말하고 닥치는 대로 행동해도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우리사회에서 이제 누가 꾀한다 해도 혁파로서 중용은 아득한 것이 되었습니다. 평범함의 통합가치를 구현해낼 수 있는 희망이 가뭇없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평범함의 통합성은 못난 사람의 오지랖으로, 특별함의 분열성은 잘난 사람의 덕목으로 고착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최근 몇 년 사이에, 상당한 정도의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고위 공직자가 되기 위한 필수 요건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습니다. 범죄행위가 무용담이 되는 세상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정상적인 삶은 무능의 표지일 따름입니다. 웬만해서는 이 모멸을 견뎌내기 쉽지 않습니다. 무슨 수를 쓰든 무능의 굴레를 벗어나야 하기에 튀는 길을 찾습니다. 튀는 방법 중에 범죄가 포함될 뿐입니다. 튀면 뜹니다. 뜨면 모든 것이 ‘용서’됩니다. ‘용서’의 타락으로 대한민국은 범죄자지도체제를 확립합니다.


범죄보다 더 ‘파렴치하고 무서운’ 무능의 큰칼을 쓴 평범한 사람들, 그러면 어찌 살아야 할까요? 튀려는 유혹을 떨쳐내고 정상적인,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려면 어찌 해야 할까요? 여기에 무슨 기적이나 비법이 있을 리 없습니다. 삶의 이치를 헤아리면 고요 속에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악한 정치가 죄를 지은 대로 가게 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덕을 쌓은 대로 가지 못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덕은 무엇일까요, 이 대한민국에서? 수탈당하여 바닥을 보고야 만 약자의 인식론적이고 실천적인 특권, 그러니까 낮디낮은 생명연대가 바로 덕입니다. 약자는 누운 자리에서 서로의 눈을 맞춥니다. 약자는 누운 자리에서 서로의 손을 잡습니다. 그 마음으로, 그 몸으로 서로를 일으켜갑니다. 그 일으킴으로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갈 것입니다. 지금 안산에, 팽목에, 광화문에, 그리고 또 강정에, 밀양에, 소녀상 옆에 그들이 누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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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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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말은 관사나 전치사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관사나 전치사는 각 단어의 개별성, 독립성, 자율성, 차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언어체계의 소산입니다. 그 언어체계는 다시 사람과 사물의 개별성, 독립성, 자율성, 차이성에 터 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사나 전치사가 발달한 서구 언어는 이른바 ‘존재 중심 세계관’을 반영하며, 그렇지 않은 우리말은 이른바 ‘관계 중심 세계관’을 반영합니다.

  이런 특성은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을 섞는다.’는 표현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서구인은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 말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일치를 확인하기 위해 말합니다. 차이를 확인하는 존재 중심 사회는 생명의 공통 기반이 전제되지 않으므로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일 뿐입니다. 둘 사이는 ‘계약’이 가로놓이고 쌍무적 이행을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이에 반해 일치를 확인하는 관계 중심 사회는 이것과 저것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두레’ 개념이 네트워크를 이루며 연속과 융화를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서구의 삶이 계약의 삶인 것은 상담에도 통용됩니다. 계약 당사자끼리 인격과 정서를 교류할 까닭이 없습니다. 서로 필요한 것만 주고받으면 그만이지요. 반면 우리의 삶은 두레의 삶입니다. 공감과 공유의 삶입니다. 각 부분은 서로 긴밀한 생명적 연결 관계에 있고, 다시 전체 속에서 통합된다는 사실이 공유하는 삶을 통해 증명됩니다. 상담도 그러합니다. 두레 치료가 일어납니다. 치료공동체가 자연스럽게 형성됩니다.(194-195쪽)


지난 주말 늦은 밤, 마흔 일곱 먹은 제자가 조증 상태를 걱정하며 황급히 상담을 요청해왔습니다. 일요일 늦은 아침 약속을 잡았습니다. 일요일 새벽 가능하면 더 빨리 뵙고 싶다는 문자가 날아들었습니다. 서둘러 빨래를 해서 널어놓고 한의원으로 향했습니다. 보자마자 그는 울음부터 터뜨렸습니다. 간단한 인사치레를 끝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이내 억억거리며 줄줄이 이야기를 토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이야기 가운데 참으로 가슴 아픈 것은 주위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었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를 이야기하며 울자 그들은 대략 이런 내용의 말을 건넸다고 합니다.


“왜 과거를 그리 집요하게 붙잡고 있니? 제발 내려놓고 행복한 삶을 선택해라.”


“너와 같은 상처가 없으면 아무도 널 이해할 수 없다는 거니?”


심지어 남편을 포함한 두어 사람은 이렇게까지 말했다고 합니다.


“왜 우니? 이게 울(어서 해결될) 일이니?”


물론 이들은 마음의 병을 상식적인 이해 수준에서 이해하고 그에 터하여 말했을 것입니다. 이런 반응에는 불연속선이 두 개 쳐져 있습니다. 하나는 무엇보다 아픈 사람과 이런 반응을 보인 사람들 사이의 것입니다. 아픈 사람의 감정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에 동참할 생각이 전혀 없는 절연반응인 것입니다. 이것은 차가운 이성을 토대로 거래하는 개별자가 보이는 기본적 태도입니다. 치유공동체는 이들에게 별나라 이야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픈 사람과 아픔 사이의 것입니다. 저들은 저들 자신이 아픈 사람에게 그리 대하듯 아픈 사람이 자신의 아픔을 단칼에 잘라내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들 하는데 왜 너만 못하느냐는 다그침입니다. 마음병은 아픈 사람이 붙잡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꼼짝 못하고 사로잡혀서 생기는 것입니다. 놓고 싶으면 놓을 수 있는 것 따위 때문에 대체 그 누구의 일상이 무너지며 목숨 줄이 끊어질 것입니까. 한 걸음만 물러서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이치에 무지하고도 서슴없이 아픈 사람을 공격해대는 이 비인간에서 우리 각자는 얼마나 자유로운가요.


다시 정색하고 곰씹어보겠습니다. 이런 반응을 보인 사람들 가운데 스무 해 넘게 살 섞으며 살아온 남편이 있습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남편인 것입니까. 이런 반응을 보인 사람들 가운데 인문학 공부를 함께한 선배, 심지어 선생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인문학도인 것입니까. 사실 이런 풍경은 이미 낯선 것이 아닙니다. 우리사회의 익숙한 민낯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모국어 감수성을 잃어버린 식민의 세월 속에서 마침내 인간다움의 감각까지 풍화되어버린 탓이 아닐까요?


그 제자는 잠시 여행을 떠났습니다. 뭔가 챙겨가며 정리를 해보겠다고 하기에 애쓰지 말고 그냥 멍 때리다 오라 일러주었습니다. 뭐라도 감정이 일어나면 그렇다, 그렇다 느끼기만 하다 오라 당부했습니다. 마흔 일곱 살짜리 제자 곁에 다팔다팔 걸어가는 일곱 살짜리 상처 입은 그의 영혼을 보며 제 두 눈에 노을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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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8장 본문입니다.

 

子曰 回之爲人也 擇乎中庸 得一善則拳拳服膺而弗失之矣.

자왈 회지위인야 택호중용 득일선즉권권복응이불실지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회공자의 제자인 안회의 사람됨은 중용을 골라서 실천하는 것이니 하나의 착한 것이라도 얻으면 받들어 가슴에 꼭 붙잡고 잃어버리지 아니한다.”


2. 중용이 군자에게 주어진 자격증이 아니고 찰나마다 결단해야 하는 “고름[택擇]”의 문제임은 앞 장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더 거론할 일은 없으나 연상되는 불교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하고 넘어가지요.


한국 불교 논쟁사에서 가장 큰 이슈 중 하나가 이른바 돈점頓漸 논쟁입니다. 보조국사 이래 내려온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대해 성철선사가 돈오돈수頓悟頓修로써 이의 제기를 하면서 태풍처럼 일세를 몰아친 논쟁이었습니다. 단박에 깨치더라도 그 뒤 끊임없이 닦아야 한다는 전자에 대해 단박에 깨쳤는데 뭘 더 닦을 게 있겠느냐는 반론이 후자지요.


후일담이 여전합니다. 둘 다 맞다, 는 포용론이 있는가 하면 각기 다른 용처가 있다는 현실론도 있습니다. 문제 제기를 한 성철선사의 의도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결과, 논쟁이 과하게 전개되었다는 말도 들립니다. 어쨌거나 단박에 깨친 경험도 없고 성실히 닦은 세월도 없는 중생이 여기에 입 댈 처지는 아닙니다. 다만 깨친다는 것과 닦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 맥락에서 대칭구도를 이루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현실적으로 성찰하는 작업이 미흡한 논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즉 논쟁 자체에 가담하기에 앞서 논쟁의 전후 연관성을 살펴 중생에게 빛이 될 수 있는 현실 지평을 열어 놓지 않은 채 ‘그들만의’ 논쟁으로 깊어졌다는 말입니다. 중생제도와 절연된 논쟁이 어떤 의미에서 부처의 길인지 문득 의문을 품게 됩니다.


중생의 처지에서 보면 깨침의 높은 경지에 오른 분들이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회행위를 하는 것을 수긍하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어리석어서 그리 생각한다고 일축하면 더는 말을 하지 않겠지만, 깨치지 못한 중생도 안 하는 행동을 생불生佛들이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을 보면 도대체 깨침이 무엇은 열고 무엇은 닫는지 황당해지지요.


사회 동원력을 갖춘 큰 스님이 거대한 사회 부조리를 보고도 관념적 거대담론으로 호도하는 일은 또 어찌 이해해야 될까요? 세속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깨친 자의 길이라면 그 깨침으로 관여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런 이원론이 과연 선불교, 아니 붓다의 근본 철학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다수 중생들이 힘들게 사는 것이 다만 미망에 빠져 있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장場이 스님들과 전혀 다르다는 측면을 십분 고려해야 마땅합니다. 스님들한테 누가 와서 돈을 달랍니까, 새끼를 키워 달랍니까, 부모를 봉양하랍니까? 그런 고단한 삶에서 벗어난 산중 정진을 통해 얻은 깨침이, 닦음이 중생의 삶보다 어떤 의미에서 윗길일지 정말 한 생각 크게 돌이켜 성찰해야 한다고 봅니다. 설마 그 걸 몰라 그러겠냐고 되묻기에는 이른바 큰 스님들의 언행에 너무도 ‘어이 상실’인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날 중용을 논하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꼭 이와 같은 함정에 빠져 있기에 돈점논쟁을 예시하여 말씀드려 보았습니다. 음양이 어떻고, 조화가 어떻고·······. 고담준론이 하늘을 찌르더라도 삼시 세 끼 밥 먹어야 하고, 돈 있어야 아이 학교도 보내는 게 엄연한 현실 삶인데, 그 이야기에서 한사코 멀어지기만 하는 중용이 과연 참된 중용일 수 있겠습니까? 평범한 소시민이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내리는 선택이 모여 사회적 삶이 되고 문명이 되어 가는 법인데, 거기에 뿌리 닿지 않은 지혜를 어찌 중용이라 하겠습니까?


3. 안회는 사소한[일一] 선善, 즉 중용의 결단일지라도 소중히 여겨 삼가 받들어[권권拳拳] 가슴에 새겨서[복응服膺] 잃지 않았습니다. 한 일一 자를 ‘사소한’ 으로 읽은 것이 지나친 해석은 아닐 터. 이는 대뜸 중용의 ‘평범함’과 상통합니다.


이리 읽으면 안회의 완벽함을 찬양하는 독법에서 안회의 겸손함, 그리고 예의 ‘평범함’을 강조하는 쪽으로 선회하게 됩니다. 여태까지 우리가 견지한 중용 독법에서 보면 이게 더 어울리겠지요. 나아가 중용이 그 때 그 때의 결단, 선택에 따른 역동적 실천이라는 사실에 부합할 것입니다.




4. 그러면 대체 무엇은 작으며 무엇은 클까요? 우리의 구체적 현실에서 좀 더 결곡하게 따져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결정적 중요성을 지닌 주제입니다.


세월호사건, 이것으로 국가가 목숨을 앗은 사람은 304명입니다. 그 가운데 250명, 그러니까 대부분이 만 열일곱 살의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입니다. 이런 질문을 차례로 던져보겠습니다.


“만일 그 250명이 어른들이었다면 그렇게 죽였을까?”


“만일 그 250명이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또는 사립학교 또는 특목고 학생들이었다면 그렇게 죽였을까?”


“만일 그 250명이 전국의 고등학교에서 모인 대표 학생들이었다면 그렇게 죽였을까?”


구태여 답을 적시하지 않아도 대한민국의 상식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SNS에서 어떤 시민은 이렇게 단언하였습니다.


“그 중에 국회의원 아이 한 명만 있었어도 모두 살렸을 것이다.”


아이들이고, 더구나 지방도시 가난한 지역의 일반 고등학교 학생들이고, 더더구나 그 부모들 가운데 내로라하는 사람 하나 없으니 그들의 생명 가치를 ‘작은’ 것으로 여겼음이 분명합니다. 이 ‘작은’ 것을 희생시켜 ‘큰’ 것을, 그러니까 정권을 보위해야 한다는 계산이 섰으므로 실행하였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서울의 뜨르르한 어느 교회 목사는 대놓고 그런 취지로 설교하여 공분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 떨리게 떠올릴 수밖에 없는 또 다른 한 사건이 있습니다.


  “호송열차를 타고 방금 도착한 사람들이 가스실에 빽빽이 들어찬 뒤 죽임을 당했다. 특수부대는 매일같이 하는 끔찍한 일을 하고 있다. 얽히고설킨 시체들의 몸을 풀어 호스의 물로 씻기고는 화장터로 시체들을 운반한다. 그러나 맨 밑바닥에서 그들은 아직 살아 있는 소녀를 발견한다.·······

  의사가 불려오고 주사를 놓아 소녀를 소생시킨다.·······그 순간, 죽음의 시설을 담당하는 SS대원들 중 한 명인 무스펠트가 다가온다. 의사가 그를 한쪽으로 불러 사건을 설명한다. 무스펠트는 망설이다 결정한다. ‘안 된다. 소녀는 죽어야 한다. 나이가 좀 들었다면 일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녀는 좀 더 분별력이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침묵하도록 그녀를 설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겨우 열여섯 살이다.’ 결국 그녀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제 손으로 죽이지 않고 자신의 부하를 불러 소녀의 목덜미를 쳐서 죽인다.”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 국적의 유대인으로 나치의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람입니다. 위 내용은 그가 경험한 사실을 토대로 쓴 책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63-65쪽 일부를 인용한 것입니다. 두 번 죽임당하는 이 소녀 이야기는 참으로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에 휩싸이게 합니다. 이 감정은 같은 또래 소녀와 소년 250명의 죽음을 지켜보던 2014년 4월 16일, 그 때의 것과 그대로 포개집니다.


우리는 정색하며 다시 묻습니다.


“이 국가는 저 어린 국민 250명을 왜 죽였는가?”


물론 국가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아니, 사건 자체를 부정합니다. 단순 교통사고라고 우깁니다. 그러나 그 배는 국가보호장비로 등록된 배였습니다. 국정원의 지시 감독을 받았습니다. 명백한 국가의 판단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한 나치의 대답으로 우리 국가의 대답 일부를 대신합니다.


“안 된다. 소녀와 소년들은 죽어야 한다. 나이가 좀 들었다면 일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들은 좀 더 분별력이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그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침묵하도록 그들을 설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겨우 열일곱 살이다.”


이것이 죽인 이유라면 실로 엄청난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작은, 하찮은, 사소한 생명이어서 대놓고 죽였다는 표면적 판단의 심층에 오히려 더 큰, 위험한, 무거운 증거능력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국가가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는 데 어른 보다 이 아이들이 훨씬 더 감당하기 힘든 상대라는 판단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국가는 분명한 기억을 지니고 있습니다. ‘분별력이 없어’ 침묵하지 않았던 저 2008년 촛불소녀들 말입니다. 그 때 국가는 그 소녀들이 분별력이 없어 낭설에 휘둘리는 것이며 북한의 지령과 자금을 받아 움직였다고 마녀사냥을 자행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아침 세월호사건, 그 생사의 갈림길에 선 아이들도 ‘철없어서’ 나오지 못했다고 국가는 다시 뒤집어씌웠습니다(세월호청문회에서 해양경찰이 한 말). 그 때 죽이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마침 잘됐다는 식의 대응입니다. 물론 철없는 아이들이므로 침묵하지 않고 자기들이 한 짓을 증언·고발할 것이기 때문에 죽였다는 사실을 그렇게 은폐하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이 위대합니다. 이 아이들의 죽음이 위대한 것으로 길이 남으려면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진실마저 바다에 빠뜨리고서야 어찌 우리 어른이 ‘큰’ 사람일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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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7장 본문입니다.

 

子曰 人皆曰予知 驅而納諸網[罟]獲陷穽之中而莫之知抗[辟]也, 人皆曰予知 擇乎中庸而不能期月守也.

자왈 인개왈여지 구이납제망[고]획함정지중이막지지항[피]야. 인개왈여지 택호중용이불은기월수야.


이기동 역해 본문은 망網이 아니라 그물이란 뜻의 '고罟'이며, 항抗이 아니라 '피辟’뜻이 避와 같아 '피'로 읽어야 한다고 함. 본문 비평은 능력 밖이고 뜻에 큰 차이가 없으므로 번역은 이기동을 따름.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다 ‘나는 지혜롭다.’고 말하지만, 몰아서 그물이나 덫이나 함정에 넣어도 피할 줄을 알지 못하며, 사람들은 다 '나는 지혜롭다.'고 말하지만 중용을 골라서 한 달도 지킬 수 없다.”

 

2.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자의 지혜는 앞에서 말한 소지小知, 즉 내남을 구별하여 세상을 나누어야 직성이 풀리는 강자, 승자 부류의 기능적 지식을 뜻합니다. 권력, 돈, 종교(지식)를 독점하는 데 필요한 극단적 프로세스로 작동하는 지식이지요. 대부분 불공정한 경쟁을 통해 획득한 것입니다. 당연히 그 삶 또한 불공정한 틀 속에서 영위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스스로 정당하다고 굳게 믿습니다. 이를테면 확신범인 셈입니다.

 

그들의 확신은 너무나 완벽합니다. 그래서 그물, 덫, 함정으로 몰리는 일조차 강함과 이김의 기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이런 망상은 권력, 돈, 종교를 자신의 인격과 동일시하는 데서 극치를 이룹니다. 힘없고 돈 없고 종교 없으면 사람의 격도 없다고 생각하므로 그런 사람들을 ‘근본 없는 것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어렴풋이 이해할 수는 있을 듯합니다. 권력, 돈, 종교를 누릴 때 한껏 고양되는 자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세상이 ‘돈짝’만하게 보이고, 사람이 개미처럼 보이고·······.

 

하지만 그 끝은 파멸입니다. 그 파멸은 소통을 거절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형벌입니다. 생명의 영속성은 더불어 살 때만, 관통과 흡수가 일어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 것에 의지해 ‘멀쩡한 사람 산 채로 포 뜨는’ 짓의 대가는 그물이고 덫이고 함정입니다.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것이 파멸을 면한 증거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잘 먹고 잘 사는 동안 생명의 진수를 몰랐으니 돌이킬 수 없는 형벌에 처해진 것이지요. 자신들이 누리는 그것만이 최고, 최상이라 착각한 대가로 존재의 숭고함에서 끝내 왕따 당한 것입니다. 대롱으로 본 하늘 밖에 흐드러진 별들이 얼마나 찬란한지 ‘지옥’에 가서 흘낏이나마 보고 나서야 땅을 치게 될 것입니다.

 

3. 어찌어찌 중용을 고르기는 했는데 한 달도 못 지키는 주제에 스스로 지혜롭다고 한답니다. 아, 물론 중용이 어렵다는 뜻도 되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지혜롭다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더 큰 무게를 지닙니다.

 

사실 이 문장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고른다[택擇]”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중용은 선택입니다. 선택이란 말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반드시 선택하지 않은 무엇이 있다는 사실이지요. 중용을 선택한 군자는 과연 무엇을 선택하지 않았을까요?

 

길게 얘기할 것 없겠지요.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면서 결국은 자신을 그물, 덫, 함정으로 몰아넣는 자들이 사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소통을 거절하는 삶, 독식하는 삶, 군림하는 삶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선택하지 않은 것을 견디는 일이 중용이며, 길이 견디는 사람이 군자입니다.

 

군자는 찰나마다 결단하는 용기를 요구 받습니다. 중용은 군자에게 어느 순간 주어진 자격증이 결코 아닙니다. 군자는 중용을 “지켜내야[수守]” 이루어지는 길고 긴 과정 자체입니다. 중용 없이 군자 없는 것이지 군자 없이 중용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선택한 삶을 지키는 만큼이 바로 그 사람됨입니다.

 

4. 소지小知의 끝이 파멸이란 사실과 선택한 대지大知를 지키는 것, 선택하지 않은 바를 견디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붙여놓은 까닭은 무엇일까요? 전자의 현실적 힘이 후자의 것을 늘 제압해 왔다는 우리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권력, 돈, 종교의 매혹에서 자유로운 자 그 누구이겠습니까? 얼마나 살겠다고 소통을 들먹이며, 생명의 연대성을 운위하느냐, 다 부질없다, 생각 안 해 본 사람이 그 누구이겠습니까?

 

그럴수록 중용은 가벼이 입에 담을 수 없는 부담으로 작용하고, 또 그럴수록 중용을 관념 세계로 밀어내는 경향은 짙어지고·······그렇습니다. 이쯤에서 공자의 인간적 고뇌가 물결이 되어 독자의 가슴에 전달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칼날 같은 답이 없는 상황에서 과연 무엇을 지표 삼아 내 삶을 선택할 것인가? 어떻게 그 선택을 지킬 것인가? 어떻게 선택하지 않은 것을 견딜 것인가?



5. 환갑 나이 된 한 남자 사람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으나 크게 성공했다 말할 수도 없고 온통 실패다 말할 수도 없는 어름에 놓여 있습니다. 부채 없는 30평대 아파트, 월급 500만 원 이상, 자동차 2000cc 급 중형차, 통장잔고 1억 이상, 해외여행 1년에 1회 이상 등을 기준으로 하는 한국의 중산층 기준에는 전혀 부합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주장에 떳떳할 것, 사회적인 약자를 도울 것, 부정과 불법에 저항할 것,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있을 것 등을 기준으로 하는 미국의 중산층 기준에는 그나마 부합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매주 일요일 아침 일어나 면도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망설입니다. 면도하면 자신과 가족의 경계 밖으로 나가 공적·사회정치적 삶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아마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으로 갈 것입니다. 면도하지 않으면 자신과 가족의 경계 안에서 사적·개인적 행복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그는 아마 뒷산에 잠시 올랐다가 아내와 딸을 데리고 조용한 음식점으로 갈 것입니다. 고민이랄 것도 없고 선택이랄 것도 없이 갈 길이 이미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군자든 소인이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저 딱 이런 남자 사람이 매번 고민하기 마련입니다. 그 고민은 매번 힘겹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선택이 의지의 소산이고, 그 의지는 숭고의 결을 따라야 하는 것을 잊지 않는 한, 그가 순간마다 하는 선택은 지지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인연 속에서 그는 그만의 군자이니 말입니다. 그의 인연 속에서 그는 그만의 중용을 실천할 것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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