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15장 본문입니다.


君子之道 辟如行遠必自邇 辟如登高必自卑. 詩曰 妻子好合 如鼓瑟琴 兄弟旣翕 和樂且耽 宜爾室家 樂爾帑. 子曰 父母其順矣乎.

군자지도 비여행원필자이 비여등고필자비. 시왈 처자호합 여고슬금 형제기흡 화락차탐 의이실가 낙이처노. 자왈 부모기순의호.


군자의 도는 비유컨대 먼 길 가는 일도 가까운 데서 시작하고 높은 곳 오르는 일도 낮은 데서 시작하는 것과 같다. 『시경』에 이르기를 “처자가 화합하니 거문고 타는 듯하네. 형제가 어울리니 익히 즐겁구나. 온 가정이 기쁘고 온 가족이 즐겁도다.”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가 아마 (중용의 이치를) 따랐을 게다.”


2. 군자의 도, 즉 중용은 마법도 신비도 아닙니다. 마치 지금 여기서 내디디는 첫 발자국에서 시작하여 꾸준히 가다 보면 어느덧 천리 밖에 당도하듯, 낮은 자락에서 출발하여 땀 흘리며 오르다 보면 아득한 산꼭대기에 다다르듯, 그렇게 중용은 실천되는 것입니다.


중용은 과정입니다. 중용은 굽이굽이 흐르는 강입니다. 너절해 보이는 일상사 갈래 갈래마다 스며드는 빛줄기입니다. 문득 깨닫는 인식론적 격절 경험으로는 중용을 말할 자격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저자를 떠난 면벽 용맹정진으로는 어림없는 게 중용 실천입니다.


평범한 가정의 처자, 형제가 이루는 소통에서 하루하루 중용을 찾을 수 없다면 아무리 고귀한 가치인들 무슨 의미가 있을 것입니까?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일구어내는 사소한 행복의 고갱이 속에 중용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중용이 아닙니다.


3. 공자께서 또 한 번 정곡을 찌르십니다. “가정이 평화로운 것을 보니 아마도 그 부모가 중용의 이치를 따른 모양이로구나!” 부모의 일상적 실천이 길이 되고 강이 되어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 전체의 평화가 이룩되는 도리를 천명한 만고의 명언입니다.


허다한 고수들이 순順을 안락함, 순조로움 등으로 이해했지만 우리는 그 견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리 읽으면 부모의 안락함과 순조로움이 결과적 상태가 됩니다. 그것은 이 장 전체 문맥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앞 장과 비교해도 자연스러운 흐름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여기 부모는 제14장 부부와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중용 실천의 발원지이자 모든 사회, 국가, 나아가 전 인류의 요람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부모의 순 역시 동사입니다. 중용의 도리를 ‘따른’ 원인적 실천입니다. 이렇게 읽어야 본 장의 앞부분 비유 문장과 뒷부분 인용 문장이 유기적으로 연결됩니다.


4. 중용 실천의 발원지가 부부/부모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음미하겠습니다. 한 개인이 아닌 두 사람, 그것도 평등한 여성과 남성, 더군다나 부부/부모가 빚어내는 ‘관통과 흡수’가 중용의 요체라는 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귀중한 통찰은 바로 중용 자체가 공동체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중용은 그러므로 개인적 덕목이라는 굴레를 벗어야 합니다. 개별적 명상과 웰 빙의 감옥에서 놓여나야 합니다. 사회적 실천 개념으로 제자리를 찾아야 제대로 된 중용 길이 열립니다. 


사회는 다름 아닌 부모형제, 그러니까 가족에서 출발합니다. 가족의 중용으로써 사회국가의 중용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치는 이러하거니와 현실은 어떤가요. 한 해에 100편 이상 제작되는 드라마의 주요 갈등 유발 요인은 가족 간의 무조건적인 사랑, 아니 반인륜적 애착, 그러니까 반중용입니다. 자식이라면, 부모라면 범죄를 저질러도 싸고도는 맹목적 애지중지가 지겹도록 변주되는 것이 대한민국 드라마의 핵심이자 대한민국의 핵심입니다. 가족 사랑이 세상의 요람이듯 가족 집착이 세상의 무덤입니다.


가족의 유사품, 그러니까 온갖 종류의 패거리가 상하좌우로 포진해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어느 학교 출신이냐, 고향이 어디냐, 무슨 당이냐, 무슨 종교를 믿느냐·······. 이것은 고전적 패거리입니다. 요즘은 배우, 가수, 개그맨, 아나운서, 운동선수도 엄청난 패거리입니다. 이 모든 패거리의 원조는 아득히 올라가면 진골이고 근세로 내려오면 서인 노론입니다. 물론 이 둘은 본질이 같은 집단입니다. 그들이 바로 조선을 일제에 팔아먹은 친일파입니다. 이 친일파는 1400년이 지난 오늘 대한민국에서도 갑중 갑 패거리로 군림합니다. 이들이 세월호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이 중동독감대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이 역사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들이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다시 팔아먹었습니다. 이들은 중용의 공동체성 그 정확한 반대 지점에 서 있습니다.



결국 중용의 공동체적 실천은 평범한, 그래서 버려진 사람들의 낮은 연대, 슬픔의 연대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과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갔던 어르신들, 밀양 송전탑 할머니들, 강정마을 주민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그리고 세월호사건 유족들. 이름 없이, 소리 없이 이들 곁에 앉아 있는 씨알(본디 아래 아로 쓴 알)[민중民衆]. 멀리서 두 손 모으고 눈시울 붉히는 ‘소시민’들. 이들이 공동체 중용의 화신입니다. 이들로 말미암아 중용은 여전히 근본적radical입니다. 급진적radical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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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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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녹여냈다고 해서 그 다음 삶이 온통 기쁨이 된다면 그것은 치유가 아닙니다. 허황된 마법입니다. 병도 치료도 삶, 그 도저한 현실의 일부입니다. 현실 한 가운데서 병들고, 현실 한 가운데서 치료됩니다. 마침내 현실 한가운데서 살아가야 합니다.(214쪽)


마음병을 치료하는 것은 내면을 정화하는 것과 다릅니다. 격정을 풀어 평상심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정화의 맥락이 없지는 않으나 마음병 치료의 핵심은 도리어 삶의 타자적 조건에 유연하게 섞여들 수 있는 불순물 상태를 복원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본질상 상호작용인 운동입니다. 상호작용이란 서로 섞여들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서로 섞여들지 않는, 그래서 청정한 순물질의 마음을 경지로 여기는 가르침을 흔히 소승이라 하지만 이는 휴먼스케일 바깥 이야기이므로 당최 수레 자체가 아닙니다. 수레는 구름 아닌 땅 위에서 구르는 물건입니다. 땅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현실은 언제 어디서나 경계사건의 시공입니다. 경계사건은 불순물들이 일으키는 변화입니다. 변화가 치료입니다.


지난 4월 20일 『안녕, 우울증』리뷰58 <모국어 치유(2)>에서 말씀드렸던 ‘마흔네 살 싱그러운 처녀’의 결혼식이 30일 오후에 치러졌습니다. 그 동안 기억할 수조차 없을 만큼 많이 참석했고, 주례도 여러 번 섰지만, 결혼식에서 울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사랑했던 남자가 결혼식 직전 일방적으로 배신하고 파혼 선언을 해버려 엄청난 고통 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몸부림쳐야 했던 그의 곁에 제가 있었기에 남다른 감회가 든 것이었습니다. 참혹한 슬픔의 순간들이 아프게 되살아났습니다. 기나긴 발효기간 뒤 전개된 눈부신 사태가 감격스러웠습니다. 한의원 진료실에 앉아 그가 흘린 눈물, 자분자분 풀어놓던 이야기 속 그 어디에 이런 변화의 싹이 심어져 있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변화는 현실에서만 일어납니다. 현실에서 일어난 변화만이 참된 변화입니다. 참된 변화는 진실의 전체성, 그러니까 비대칭적 대칭성을 향해 부단히 나아갑니다. 비대칭적 대칭성의 진실은 슬픔 뒤에 기쁨을 일으키는 것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기쁨 뒤에 슬픔도 일으켜 건강한 감당이 일어나도록 이끕니다. 슬픔만 있는 현실이 없듯 기쁨만 있는 현실도 없기 때문입니다. 기나긴 슬픔의 날을 지나왔다고 해서 저 마흔네 살 아름다운 신부가 살아갈 날들에 기쁨만 깃들기 바라는 것은 그저 수사修辭로 머물러 족합니다. 슬픔이 밀려오면 인격을 다해 맞아들이고 인격을 다해 흘려보내는 그이기를 빌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벌써 그런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축하의 술잔을 오래 나눈 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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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4장 본문입니다.


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 

군자소기위이행 불원호기외. 

素富貴行乎富貴 素貧賤行乎貧賤 素夷狄行乎夷狄 素患難行乎患難 君子無入而 不自得焉.

소부귀행호부귀 소빈천행호빈천 소이적행호이적 소환란행호환란 군자무입이 부자득언. 

在上位不陵下 在下位不援上 正己而不求於人則無怨. 

재상위불릉하 재하위불완상 정기이불구어인즉무원. 

上不怨天 下不尤人. 

상불원천 하불우인.

故君子居易以俟命 小人行險以僥幸. 

고군자거이이사명 소인행험이요행. 

子曰 射有似乎君子 失諸正鵠 反求諸其身.

자왈 사유사호군자 실제정곡 반구제기신.


군자는 그 자리를 바탕으로 하여 행하고 그 밖의 것은 원하지 않는다. 부귀에 처하여서는 부귀한 처지에서 행하며 빈천에 처하여서는 빈천한 처지에서 행하며 이적에 처하여서는 이적의 처지에서 행하며 환란에 처하여서는 환란을 당한 처지에서 행하니 군자는 어디를 들어가더라도 자득하지 아니함이 없다. 윗자리에 있어서는 아랫사람을 업신여기지 아니하고 아랫자리에 있어서는 윗사람에게 매달리지 아니하며 자기를 바르게 하고 남에게서 구하지 아니하면 원망할 것이 없다.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아래로는 남을 탓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는 쉬운 데 처하여 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한 것을 행하여 요행을 바란다. 공자께서는 “활쏘기는 군자와 비슷함이 있으니 정곡을 맞추지 못하면 돌이켜 자기의 몸에서 (원인을) 찾는다.”고 하셨다.


2. 앞 장에서 중용 도량이 사람이고, 그 사람은 평범한 상대방이고, 그런 상대방의 처지에 서서 자신을 성찰하는 자가 군자임을 말했다면 이 장은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바뀌더라도 자득自得하는 자가 군자이고, 그러려면 쉬운 데 처하여 명을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끝맺음은, 동일하게 반구제기신反求諸其身, 스스로를 살피는 것으로 기본 평행 구조를 살렸습니다.


사람과 삶의 양대 화두 가운데 하나가 ‘자기 단일성’ 문제입니다. 독립된 존재로 어떻게 자율성을 확보하며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이지요. 이 문제 또한 대칭적 가치가 마주하는 장場을 형성합니다. 불연속적 자율이라는 한 가치와 연속적 의존이라는 가치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두 가치는 어느 하나를 버리는 선택을 할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리 하면 병이 되지요. 연속적 의존을 버리면 분열병이 되고 불연속적 자율을 버리면 우울병이 됩니다. 분열병은 남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측면을 포기한 것이고 우울병은 그럼에도 인간은 홀로 가는 생명일 수밖에 없는 측면을 놓친 것입니다.


제13장은 분열병으로 가는 길을 경계했습니다. 남 없이 어찌 살 수 있느냐, 그러니 남 처지에 서 보라, 그리 말하고 있습니다. 제14장은 우울병으로 가는 길을 경계합니다. 남 탓, 환경 탓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자득함 없이는 참 사람이 아니다, 그리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지만 남이 있어 내가 되는 것입니다. 한 편, 남 없이 살 수는 없지만 남은 끝내 내가 아닙니다. 이 불가항력적 모순을 어찌하면 내 인격 속에, 내 삶 한가운데 공존시킬 것인가, 하는 고뇌가 다름 아닌 중용입니다. 이 중용은 물론 보편 가치입니다. 그러나 고뇌하는 주체가 처한 삶의 맥락과 지평에 따라 구체적으로 다른 역동성을 지닙니다.


공자는 제후적인 가치와 맞서고 있는 사대부입니다. 신라 식으로 말하면 성골, 진골 아닌 육두품인 셈이지요. 제후적인 가치는 분열적입니다. 거기에 맞서지만 현실 벽에 자꾸 가로막히다 보니 공자는 부지불식간에 의존성이란 절망감에 휩싸이는 자신을 목도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자신을 단호히 세우기 위해 자득의 비수를 꺼내 든 것이지요. 과연 고수의 심리학입니다!


3. 그러면 그 자득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거이이사명居易以俟命, 쉬운 데 처하여 명을 기다리는 자세에서 옵니다. 적어도 공자의 대답은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제시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개량주의처럼 보이니까요. 아무튼 공자는 극단적 모험주의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말고’ 식으로 무리하게 일을 도모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극단적 혁명은 불가하다는 의중을 드러낸 셈입니다.


아마도 공자는 진정한 혁명, 즉 정곡正鵠을 맞추는 일은 반구제기신反求諸其身, 돌이켜 자신의 몸에서 찾아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길고 묘한 여운을 남기는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네 마음속에 있다.”는 예수의 말과 흡사한 울림을 줍니다.


보는 이의 처지에 따라 불멸의 이상을 천명한 것으로도, 사회 동원력을 지니지 못한 데서 오는 한계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역사상 완벽한 대동 세상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유한하고도 부분적인 성취는 어찌하든 매한가지인 셈입니다. 방법론적 선택에서 우열과 정오를 가릴 수는 없습니다. 그 때 그 때 각기 흐름을 타는 것이지요. 설혹 이 거이이사명居易以俟命만이 옳다 하더라도 무엇이 居易이고 무엇이 행험行險인지는 자신과 그 공동체가 처한 상황에 따라 결정해야 하는 구체적 문제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중용의 도가 부단한 성찰을 거쳐 나오는 내면의 힘 아니면 안 되는 실천임에 틀림없습니다. 모든 변혁 또한 다르지 않겠지요. 사회의 성공과 그 구성원의 인격적 성숙이 균형을 이루어야 진정한 성취라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혁명이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광경을 수없이 목도해왔습니다. 지극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런 논의는 항상 뒷문을 열어놓는 것입니다. 결코 끝나지 않는 이슈입니다.


4. 우리사회는, 우리 각자는 이제 어떤 처지에 있는 것일까요? 누구나 체감하다시피 대한민국은 국가가 앞장서서 모든 영역의 공공성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국민을 몰아가는 것이 정치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권력과 돈, 그리고 종교가 장악되어 있어 당분간 이 추세는 가속일로를 치달을 것입니다. 웰 빙, 힐링이라는 부드럽고 따뜻한 개념도 긍정주의 자기계발을 거쳐 멘토의 대박 몰이에 걸리면 꼼짝 없이 각자와 그 패거리만 살리는 쪽으로 휘말려들고 맙니다.



가난한 삶도 함께 나누던 풍경은 진즉 사라졌습니다. 흔들어서 떨어지는 사람은 아예 사람 취급 하지 않는 살풍경으로 변한지 오래입니다. 이치로 따지자면 “그러므로 혁명해야 한다.”인데 현실은 “그러므로 혁명은 물 건너갔다.”입니다. 권력과 돈, 그리고 종교를 장악한 자들은 대놓고 함부로 이런 풍조를 만들어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인간성이 이미 대기권을 이탈하였기 때문입니다. 몰이를 당하는 필부필부는 당연하지 않습니다. 기어이 여기에 맞서는 영적 의지를 세워야 합니다. 참된 삶의 전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 하지 않으면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가축으로서 도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러면 이 지옥 같은 상황에 맞서 영적 의지를 세우는, 그러니까 참된 삶의 전사가 되는 일은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말일까요?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답만큼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니까요. 평범한 사람 하나하나 유관순 열사 윤봉길 의사 되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습니다. 자기 삶의 몫을 각자 성실히 살려면 연대만이 길이라고 물색없이 역설을 들이댈 일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너만이라도 살아서 후일을 도모하라.”는 신파조 말을 흘릴 수도 없습니다. 난감무인지경입니다. 실마리 하나를 챙기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세월호사건과 중동독감대란을 무능을 가장한 전능으로 돌파한 통치세력이 마침내 이미지에 꼭 맞는 총리 하나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를 가리켜 한 언론인이 ‘후흑厚黑총리’라 했습니다(한겨레신문 2015년 6월 17일자). 후흑은 면후심흑面厚心黑으로 뻔뻔하고 음흉하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하여는 구태여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주의를 기울인 것은 본디 이 후흑의 개념은 청나라 말 이종오라는 사람이 밀려오는 외세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창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몫인 삶을 수탈자에게서 지켜내기 위해 갖추어야 할 건강한 덕목이 바로 후흑이라는 말입니다. 이 뜻을 우리 처지에 맞게 되새겨보겠습니다.


뻔뻔해야 한다는 말은 지나친 윤리적 엄숙주의를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윤리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통용되는 하나의 약속체계입니다. 어느 한쪽이 인간이기를 거절한 상태에서는 윤리가 설 수 없습니다. 매판독재분단세력이 이미 인간성을 거두어들인 마당에 염치와 싸가지를 말하는 것은 순수 아닌 순진입니다. 냉정한 득실 계산에 터한 ‘밀당’의 마인드가 전사의 필수품입니다.


음흉해야 한다는 말은 진정성에 터하여 현상과 본질을 일치시키려는 소박주의를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양두구육은 매판독재분단세력의 유구한 전술이자 그들 자체입니다. 그러나 수탈당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100% 당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진실이어서 뺨맞고 용서는 용서여서 뺨맞는다는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 되풀이해서 당하고 있습니다. 불투명성에 터하여 앙큼한 가면놀이를 할 줄 알아야 비로소 영적 의지를 세울 수 있습니다.


디 한 번 ‘후흑군자’ 되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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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3장 본문입니다.


子曰 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 

자왈 두불원인 인지위도이원인 불가이위도. 

詩云 伐柯伐柯 其則不遠 執柯以伐柯 睨而視之 猶以爲遠 故君子以人治人 改而止. 

시운 벌가벌가 기즉불원 집가이벌가 예이시지 유이위원 고군자이인치인 개이지.

忠恕違道不遠 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 君子之道四 丘未能一焉.

충서위도불원 시제기이불원 역물시어인. 군자지도사 구미능일언. 

所求乎子 以事父 未能也 所求乎臣 以事君 未能也 所求乎弟 以事兄 未能也 所求乎 朋友 先施之 未能也.

소구호자 이사부 미능야 소구호신 이사군 미능야 소구호제 이사형 미능야 소구미호 붕우 선시지 미능야.

庸德之行 庸言之謹 有所不足 不敢不勉 有餘不敢盡. 

용덕지행 용언지근 유소부족 불감불면 유여불감진. 

言顧行 行顧言 君子胡不慥慥爾.

언고행 행고언 군자호부조조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도가 사람에게서 멀지 아니하니 사람이 도를 하면서 사람을 멀리하면 도를 한다고 할 수 없다. 『시경』에 이르기를 '도끼자루를 베네. 도끼자루를 베네. 그 법이 멀지 않네.'라 하니 도끼자루를 가지고 도끼자루를 베면서 곁눈질해 보며 오히려 그것을 멀게 여기나니, 그러므로 군자는 남의 처지에서 남을 다스리다가 고치면 그친다. 忠과 恕는 도에서 벗어남이 멀지 아니하니 자기에게 베풀어서 원하지 아니하는 것이면 또한 남에게 베풀지 아니한다. 군자의 도는 네 가지이니 나는 한 가지도 할 수 없다. 아들에게 구하는 것을 가지고 아버지 섬기는 것을 할 수 없으며, 신하에게 구하는 것을 가지고 임금 섬기는 것을 할 수 없으며, 동생에게 구하는 것을 가지고 형 섬기는 것을 할 수 없으며, 벗에게 구하는 것을 가지고 먼저 벗에게 베푸는 것을 할 수 없다. 평범한 덕을 행하는 것과 평범한 말을 삼가는 데에 모자람이 있으면 감히 힘쓰지 않음이 없고 남음이 있으면 감히 다하지 아니한다. 말은 행함을 돌아보고 행함은 말을 돌아보아서 서로 일치하도록 해야 하니 군자가 어찌 독실하지 아니하겠는가.”


2. 군자 위도爲道의 참 도량道場은 다름 아닌 사람입니다. 사람도 그냥 ‘평범한[용庸]’ 사람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과 사람의 관계 또한 사람입니다. 앞 장에서 말한 필부필부匹夫匹婦평범한 사람들의 성性을 바탕으로 하여 이제 찬찬히 사람과 사람 관계를 살펴 나아갑니다. 그리고 스스로 성찰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습니다.


우리가 익히 경험한 바, 이른바 대가들이 풀어놓은 중용은 지나치게 고답적이고 관념적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중용을 격리시키려는 저의를 가진 것처럼 온갖 현학으로 도배하고 있습니다. 허나 중용은 필부필부의 성이 발원지이고 거기서 부자, 군신, 형제, 친구 등과 같은 인간관계의 전형으로 자연스레 흘러 나아가는 것입니다.


중용이 어려운 것은 신비한 경지를 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남보다 나를 앞세우는 탐욕으로 가로막히기 때문입니다. 그 탐욕이 소통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 탐욕이 남을 ‘관통’하려고만 하지 남을 ‘흡수’하려고는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용은 남의 자리에 서 보는 것입니다. 남의 소리에 먼저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내가 요구할 바를 먼저 남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내 마음, 그러니까 충忠이 그대로 먼저 헤아린 남의 마음, 그러니까 서恕여야 중용입니다. 나와 남 사이에 그 누구도 ‘특별한’ 존재가 아니어야 중용입니다. 내게 필요한 꼭 그것만큼 남에게 필요한 꼭 그것이 서로 유쾌하게 오가야, 그러니까 거래去來해야 중용입니다.


부부가 성을 나눌 때 일어나는 관통과 흡수는 동일한 원리로 부자, 형제, 친구, 군신 관계에 적용됩니다. 임금의 정치 행위가 부부의 성 행위보다 고급하다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자잘한 일상사에서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게 이루어지는 소통이 그대로 중용입니다. 사실은 그 사소함에 마음을 온통 담는 게 어려워 공자는 여기서도 “못하겠다.”고 사양합니다.


3. 자연스럽게, 그러므로 공자의 관심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 흐릅니다.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자신을 소통의 ‘서로 주체’로 세운다는 것입니다. 자신 속에 들어 있는 또 다른 자신과 마주섬으로써 자신의 그릇을 넓힌다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서 관통과 흡수를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서 모순을 통합하는 역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대동大同을 건설한다는 것입니다!


군자는 언제라도 자신의 어두움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웅얼거림에 귀 기울입니다. 군자는 천하를 위해 찰나마다 자신의 내면을 흔듭니다. 마치 나침반의 바늘처럼 흔들림으로써 깨어 있는 군자의 영혼은 정확하게 중용의 축을 가리킵니다.


이런 성찰은 남과의 소통에서 온 깨달음입니다. 거꾸로 남과의 소통은 이런 성찰을 통해 더 깊고 넓어집니다. 궁극은 천하무인天下無人세상에 남이란 없다, 그러니까 사물화 되는 존재가 없는 생명연대입니다. 그런 세상이 올 때까지 군자는 독실함을 생활 기조로 삼아 벗어나지 않습니다. 중용은 결코 자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4. 어떤 독실한 불교 신자가 큰스님께 말했습니다. “한 젊은 도반이 불심이 돈독함에도 교회 다니는 신혼의 아내 때문에 교회 나간다고 합니다.” 큰스님이 말했습니다. “아직 불교에 대한 확철대오廓徹大悟크고 철저하게 깨달음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가소로운 대화입니다. 적어도 제가 생각하는 큰스님이라면 “아마 불교에 대한 확철대오가 있어서 그럴 것입니다.” 라고 말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정체성은 너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어찌 대하는가, 가 곧 나입니다. 내가 대하는 네가 누구인가, 가 곧 나입니다.



이백오십이나 되는 생떼 같은 자식 잃은 부모더러 ‘세금도둑’이라 하는 자야말로 세금도둑입니다.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시민을 ‘종북’이라 하는 자야말로 종북입니다. 다 죽여 놓고, 진실을 은폐한 채, 부모더러 ‘본디 자리로 돌아가라.’ 하는 자야말로 본디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남만 보고 남을 규정하고, 나만 보고 나를 규정하는 저 ‘특별한’ 사이비 군자들이 세상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네가 있어 내가 있다는 진실을 아는 평범한 필부필부들이여, 부디 가만히 있지 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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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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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는 기본적으로 남성 중심 언어입니다. man이 남성이자 인간임에 반해 wo-man은 여성이자 제한적 수식어가 달린 부차적 인간쯤으로 상정된 것입니다. 중국인의 생각이 담긴 한자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혼인한 두 사람 사이를 부부夫婦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두 사람 사이를 남녀男女라고 합니다. 우리는 전자를 ‘가시(지어미)버시(지아비)’라고 합니다. 후자를 ‘연놈’이라고 합니다.

  이런 특징에서 우리의 세계관이 상대적으로 여성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17세기 후반 이후 성리학의 완고한 가부장주의가 우리 사회를 제압하기 이전에 여성의 지위는 다른 문명국가 그 어디와 비교해도 높았습니다. 비단 사회적 지위 문제에 국한시킬 일이 아닙니다. 우리 문화 전반에 깃든 여성성은 우리의 전통적 사고구조와 삶의 양식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비록 현재의 사회정치적 제도와 분위기가 여성성을 억압하고 있지만 장차 여성성은 우리 사회의 관건적 화두가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때 우리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공동체적 여성성은 놀라운 역동성을 발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성성 문제는 여태까지 다루었던 우리말의 생태학 전반이 흘러드는 바다 같은 위상을 가집니다.

  상담이나 심리치료 문제에서도 서구의 주류적 방식은 근본적으로 남성적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모든 내용에서 이런 면모가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생태에 맞는 상담이나 심리치료 이론을 정립하고 임상적 실천을 하려면 반드시 우리가 내면 깊숙이 지닌 여성성을 확인하고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199-200쪽)


이 서재에서 두 번 박길주 선생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리뷰 『투명사회』(30)-<아름다움, 그 시간의 향기>(2015.6.5)에서 한 번, 페이퍼 <잔 두 개>(2016.3.30)에서 한 번. 45년의 격조를 건너 마침내 오늘(2016.4.29) 아침,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45년 전 그 기조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젊은 날 이미지와 다소 어긋나 보이는 노년어법이 무르녹아 있긴 했지만 이내 친근함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를테면 학생을 가르치던 카랑카랑한 선생님의 목소리에서 자녀를 키워낸 말랑말랑한 어머니의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던 셈입니다.


사실 제가 선생님을 이렇게 다시 만나 뵐 수 있었던 데는 두 여성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우선은 선생님의 딸입니다. 그가 어머니 페북에 숙명여자대학교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을 밝혀놓지 않았다면 제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어머니 페북에 어머니 사진을 올려놓지 않았다면 제가 확신 없이 포기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거의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그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페북 활동을 몇 달 동안 중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답이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페친의 면면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러니까 친인척으로 추정되는 한 여성을 발견하였습니다. 다행히도 그가 연락처를 알아내기에 유리한 공적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어렵지 않게 통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선생님께 여쭌 다음 마침내 전화번호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선생님의 며느리였습니다.


선생님께서 누군가의 어머니가 아니셨다면 이 만남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결국 제게 선생님이심은 누군가에게 어니이심의 손에 이끌려 더 큰 인연으로 자라갈 수 있게 된 셈입니다.


돌이켜보면 저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제 인생에서 결정적인 문 하나를 닫으신 분입니다. 닫음은 닫음대로 아픔의 길을 따라 깨달음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박길주 선생님은 제 인생에서 결정적인 문 하나를 열어주신 분입니다. 엶은 엶대로 통찰의 길을 따라 깨달음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아픔도 한 인연이며 통찰도 한 인연입니다. 어둠도 한 생명이며 빛도 한 생명입니다. 오늘 박길주 선생님의 목소리에 실려 삶의 깊은 결 하나를 다시 보듬습니다. 선생님에게서 어머니를 읽듯, 어머니에게서 선생님을 읽으니 실로 일심-화쟁-무애가 몸 느낌으로 스며들고 있습니다. 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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