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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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래. 나도 죽는다!’ 아주 분명한 몸 감각으로 죽음의 느낌이 다가들 때 슬픔보다 간절함에 목이 멥니다. 제 목숨과 삶에 대해 지닐 수밖에 없는 근원적 그리움이 가슴을 적셔 옵니다. 더 살고 싶다는 안타까움이 아니라 송구함과 감사함으로 온 영혼이 젖어듭니다. 목숨도, 삶도 따뜻한 어머니 품에서 나오는 향 맑은 아픔이며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이 그리움으로 우울증 앓는 벗들과 마음을 나누어 왔습니다. 온 정성을 기울였으나 다만 한 올 바람으로 스쳐 가버린 인연도 있습니다. 어물어물 당황하며 맞았으나 평생 인연으로 함께 흘러가는 인연도 있습니다. 허망함과 뿌듯함이 수도 없이 교차합니다. 누군가는 허구한 날 슬픈 사람과 살다시피 하는데 그대는 슬프지 않은가,·······묻습니다. 물론 슬픕니다.·······그러나 그 슬픔,·······모두 사람의 것입니다. 올만해서 왔습니다. 갈만하면 가지 않겠습니까. 아, 그들이 채 가기도 전에 스러지는 사람이 드물지 않습니다. 허나 그들 또한 알지 못할 또 다른 인연으로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내릴 것입니다.

  하루 삼만 삼천 번씩 꿈을 꿉니다.·······우울증을 앓는 많은 이웃을 무애자재無碍自在의 땅으로 초대하는 꿈. 제 팔 뻗어 닿는 곳에 있는 사람들, 제 입 열어 들을 수 있는 곳에 있는 사람들, 그들만이라도 함께했으면 하는 꿈.·······부디 이 꿈이 예지몽豫知夢이 되어·······켜켜이 쟁여진 정한의 매듭을 푸는 실마리로 살아나기를 삼가 빕니다.(292-293쪽)


우울과 불안이 모질게 엉겨 붙어 있는 청년이 어느 날 상담 중에 문득 문맥을 끊고 간절한 눈빛으로 제게 말했습니다.


“쌤 아프지 마세요.”


제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쌤 아프시면 누가 고쳐요?”


제가 되물었습니다.


“누구? 너? 나?”


그가 돌연 무거워진 낯빛으로 대답했습니다.


“둘 다요.”


순간 제 온몸은 커다란 눈시울이 되어 붉게 젖어들고 말았습니다. 하마터면 그를 끌어안고 엉엉 울 뻔했습니다. 재빨리 노을을 거둬들이고 웃으며 말해주었습니다.


“쌤은 아파도 안 아파!”


이 말은 그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준 것입니다. 물론 이 말도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기는 합니다. 제가 본디 하려던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쌤은 늘 아파서 안 아파!”


늘 아팠던 장엄 스승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제게 그런 장엄이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 아닙니다. 장엄을 향한 숭고의 여정에서 무수히 실패한 자가 지니는 비애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가 다시 오면 이렇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네가 고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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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의 문서들은 대개 오랜 세월에 걸쳐 편집, 가필된 복합 저작물입니다. 시대와 상황, 그리고 손을 대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더하거나 덜어지고, 심지어 왜곡까지 되면서 오늘날의 최종(!) 텍스트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중용』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자사에 가탁된 최초 저자에서 주희까지 이르는 동안 숱한 손길이 이런저런 변형을 가한 것이지요. 그래서 문맥의 흐름이 부자연스럽기도 하고, 중복도 있고, 억지로 우겨넣은 것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전문가의 문헌비평이 세밀하게 밝혀낼 문제입니다. 저는 다만 제 삶과 인격 수준에서 그런 어기語氣와 내용을 가려보고 나름대로 독법을 선택하면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중용』을 읽기 시작할 때 텍스트 전체를 보고 그 구조를 살피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조심스레 가다 보면 그럴 때가 오려니 하고 있었는데 제16장에서 많이 망설이게 되더니 급기야 제17장부터는 뭔가 이상한 느낌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멈추고 유심히 『중용』 뒷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중용』 텍스트는 대략 16장 내지 20장을 경계로 하여 앞 뒤 내용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2장에서 시작한 전반부는 중용에 대하여, 후반부는 성誠에 대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1장은 이런 차이를 통합하기 위해 주희가 집어넣은 서론 또는 총론이 아닐까 합니다.

 

문제는 제16장부터 제20장까지입니다. 제 눈에는 제17장에서 제19장은 확실히 억지스러워 보입니다. 추정컨대 후대에 끼워 넣어진 듯합니다. 이 판단에 의거, 우리 읽기에서 제외하겠습니다. 문헌비평 지식을 전제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리는 결단이라 오류 가능성이 있지만 억지스러워 보이는 내용을 구태여 견강부회하거나, 동떨어진 상태 그대로 문맥과 상관없이 주절주절 떠드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보정할 기회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제16장도 느닷없이 귀신 이야기가 나와서 만만치 않게 낯설기는 합니다. 허나 앞서 읽은 대로 성미誠微를 중용의 다른 묘사로 읽으면 제16장이 『중용』 전반부와 제20장 이하 후반부를 잇는 지도리로 자리매김 되어 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제20장 내용도 뭔가 복잡하고 어수선합니다. 다섯, 셋, 아홉 등 숫자를 통한 열거 어법 모두가 공자의 오리지널 어록인지도 의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중복된 문장이 걸러지지 않은 것을 보면 후대의 편집 과정에서 뒤섞임이 일어났음에 거의 틀림없습니다. 성誠을 직접 언급하는 후반부부터 진정성이 있는 본문으로 보고 싶으나 큰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전반부를 성을 설명하기 위한 토대쯤으로 이해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냥 처음부터 진행합니다.  

 

2. 제20장 본문 첫 부분입니다.

 

哀公問政. 

애공문정. 

子曰 文武之政 布在方策 其人存則其政擧 其人亡則其政息. 

자왈 문무지정 포재방책 기인존즉기정거 기인망즉지정식.

人道敏政 地道敏樹 夫政也者蒲盧也. 

인도민정 지도민수 부정야자포로야.

故爲政在人 取人以身 修身以道 修道以仁.

고위정재인 취인이신 수신이도 수도이인. 

仁者人也 親親爲大 義者宜也 尊賢爲大 親親之殺 尊賢之等 禮所生也.

인자인야 친친위대 의자의야 존현위대 친친지쇄 존현지등 예소생야.

  

애공이 정치를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문왕과 무왕의 정치는 방책에 펼쳐져 있으니 그러한 사람이 존재하면 그러한 정치가 이루어지고 그러한 사람이 없으면 그러한 정치는 멈춘다. 사람의 도는 정치에 민감하고 땅의 도는 나무에 민감하다. 대저 정치라는 것은 창포나 갈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를 행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사람을 취하는 데는 몸으로써 하고 몸을 닦는 데는 도를 가지고 하며, 도를 닦는 데는 인仁을 가지고 한다. 仁이란 人이니 친족과 하나 됨이 으뜸이고 의義란 의宜이니 현명한 사람을 높이는 것이 으뜸이다. 친족과 하나 됨에 있어서의 순서와 현명한 사람을 높이는 데 있어서의 등급이 예가 생겨나는 바탕인 것이다.

 

3. 정치는 단순히 제도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습니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사람의 존부에 정치의 존부를 일치시킨 것입니다. 좋은 토양에서 나무가 잘 자라나듯 훌륭한 정치가의 손에서 바른 정치가 빚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치를 행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고위정재인故爲政在人].

 

그러면 훌륭한 정치가인가 아닌가를 어떻게 판단할까요? 그의 실천, 곧 신身을 보고 압니다. 그 실천의 수련이 도리에 의거하는가를 보고 압니다. 그 도리의 수련이 어짐, 곧 인仁에 의거하는가 보고 압니다. 요컨대 어짐을 실천하는 사람이 훌륭한 정치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짐이란 무엇일까요? 인자인야仁者人也. 초 간단 답인데, 그게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질다는 것은 사람답다는 것이다, 어진 사람이야말로 사람이다, 대략 이런 뜻으로 읽어서 큰 무리가 없겠지만 아무래도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입니다. 이 느낌을 해소하는 일은 일단 뒤로 미루고 문맥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친족과 하나 됨이 으뜸이다, 곧 친친위대親親爲大라는 말이 인자인야의 이를테면 콘텐츠입니다. 물론 친족이란 말이 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마치 친족처럼”으로 읽으면 금방 괜찮아 집니다. 마치 친족처럼 사람과 사람 관계가 연속성, 일치성 속에 있는 것이 바로 어짐이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어짐이란 생명의 연대성입니다.

 

인자인야 친친위대仁者人也  親親爲大 뒤에 의義란 의宜이니 현명한 사람을 높이는 것이 으뜸이다, 곧 의자의야 존현위대義者宜也 尊賢爲大라는 말이 따라 나옵니다. 대구對句임에 틀림없지만 그 위상이 문제입니다. 의義를 인仁과 대등한 범주로 놓으면 인이란 가치로 훌륭한 정치가를 판단한다는 전체 논지가 어그러집니다. 그러므로 형식적 대구를 전체 뜻에 종속시켜 의를 좁은 의미의 인의 대칭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을 높이는 인간관계는 친친親親의 연속성과는 달리 불연속성을 전제해야 합니다. 현명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불일치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차이점을 설명하는 말이 바로 친친지쇄 존현지등親親之殺 尊賢之等입니다. 쇄殺는 차이가 없다는 뜻이고 등等은 차이가 있다는 뜻이니 확연히 구분됩니다.

 

결국 어짐仁은 생명의 수평적 연속성을, 옳음義은 수직적 불연속성을 담당합니다. 이 구별된 가치의 통합에서 예가 생깁니다[예소생야禮所生也]. 그러면 예禮가 인仁의 상위개념일까요? 아닙니다. 예는 인을 성찰적으로 살핀 인의 다른 이름입니다. 미분화적 인은 그저 친친지쇄親親之殺지만 분화적 성찰 이후 인은 존현지등尊賢之等이라는 의의 관점을 포괄하는데 바로 그것을 예라 이름 한다는 것입니다.

 

사물의 이치로 보면 인이 예의 근원입니다. 친親을 거치지 않은 현賢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연속성을 전제하지 않은 차등은 그 자체로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허나 역사적 사실로 보면 인은 이상태理想態이고 예는 현실태現實態일 것입니다. 불연속적 계층구조가 정치의 질서를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절대 평등의 이상은 현실 정치의 폭압과 착취를 막기 위한 가치적 영원회귀로서 작동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예에 발을 디디고 인을 추구하는 실천 과정이 바로 바른 정치인 것입니다. 문득 20세기 혁명의 전설 체 게바라의 말이 떠오릅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지니자!”


4. 바른 정치의 목표이자 기준인 어짐仁이 모든 인간이 “마치 친족처럼” “하나 되는” 생명의 연대성을 뜻한다면 그 구체적 방법은 무엇일까요? 개인적으로 파자破字해서 글자 뜻 새기는 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이 경우는 어쩐지 꼭 그래야 할 것만 같아 그리 해 보지요. 간결합니다. 인仁은 두二 사람人입니다. 둘이 모여 이루는 그 관계가 사람됨의 본령이라면 바로 그게 소통, 즉 관통과 흡수 아니겠습니까? 단도직입으로 말하자면 어짐이 곧 중용입니다! 서로 소통함으로써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어짐이라는 말입니다.

 

5. 그런데 본디 인人은 보편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동이東夷족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다는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다시 보면 인자인야仁者人也라는 말은 어짐이란 동이족의 가치 내지 품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공자 사상의 핵심인 인, 즉 중용이 동이족의 사회정치적 실천이자 이념이라는 말입니다.

 

이리 말하면 대뜸 우파 민족주의를 떠올리시며 실소를 머금으실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저 또한 막무가내 민족을 주려 끼고 열 올리며 현실 부조리를 외면하는 우파, 아니 수구 민족주의 할 생각 조금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저는 인, 즉 중용이 오늘 이 땅에서 사회정치적 실천이자 이념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가 동이족임을 자랑하는 일이 얼마나 가소롭고 기막힌 자기기만인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입만 열면 공맹을 말하고 도리를 논하는 이 땅의 이른바 ‘주류’는 지금 일본과 미국에 자기 영혼의 정체성identity을 두고 끊임없이 매판의 세상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어찌 인을 안다고 할 것입니까? 이들이 어찌 중용을 실천한다고 할 것입니까? 이들이 어찌 동이족임을 자랑할 자격이 있다고 할 것입니까? 정녕 동이의 후예라면 평등한 상호소통을 회복하여 중용의 중용됨을 널리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정녕 동이의 후예라면 매판독재분단고착의 사슬을 끊고 자주와 민주, 그리고 통일의 기치를 높이 들어야 할 것입니다. 정녕 동이의 후예라면 지금 당장 세월호사건 진실 규명부터 분명하게 하여 참된 생명연대가 무엇인지 온 인류 앞에 실천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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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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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문명을 떠받치는 뼈대는 세 개가 있다고 말합니다. 식량공급체계, 상하수도체계가 그 둘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바로 보건의료체계입니다. 그렇다면 수천 년을 이어온 우리 문명은 이런 요건, 특히 보건의료 부분의 요건을 만족시켜 왔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그럼에도 제국주의 역사를 통해 이식된 서구식 보건의료체계의 핵심 주체 대다수와 일부 국민들은 한의학을 의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의학을 부정하는 그 분들은 ‘양’의사를 의사라고 부릅니다. 그 명칭은 서양의학이 보편의학이라는 자부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보편의학은 없습니다. 서양의학은 ‘어떤’ 의학일 따름입니다. 양약은 ‘어떤’ 약일 따름입니다. 그 분들의 확신은 서구 문명의 홀로 주체적 독선에 귀의한 데서 비롯하였습니다. 다른 문화권의 역사를 인류학이라 이름 한 것과 맥락이 같습니다. 그런 인지 도식에서 나온 이름이 보완, 대체의학입니다. 생각하면 참으로 오만한 표현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그들이 주체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인류학의 대상인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문명을 부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논리대로 따지자면 서양의학이 한의학의 보완, 대체의학인데도 말입니다.

  이렇게 전도된 식민지적 의식에 따라 자연스럽게 서양의학과 한의학은 상-하, 주류-비주류, 심지어 참-거짓 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국민보건의료체계 자체는 물론 시장 점유, 의료인 처우, 소비자 의식 등 모든 면에서 그렇습니다. 이 자학 현상은 우울증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울증 치료 하면 신경정신과 양의사와 프로작을 떠올립니다. 한의사와 사역산四逆散을 염두에 두는 사람은 거의,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우울증 환우들이 실제로 신경정신과에 가서 어떻게 심리상담 치료를 받는지, 항우울제가 어떤 진단 과정을 거쳐 처방되는지, 그 약이 효과가 없으면 어떤 의학 논리로 전방되는지, 얼마나 많은 환우들이 병의원과 상담소를 떠돌며 헤매는지 안다면 상황은 어떤 식으로든 달라질 것이 분명합니다.(255-256쪽)


독립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해주지만 실질적으로는 식민지 상태를 유지 온존시키는 제이차세계대전 이후 제국의 식민지주의 전략을 신식민지주의neocolonialism라 합니다. 이런 전략이 노리는 것은 자기착취의 위장된 본질입니다. 자기착취는 다시 자발성의 위장된 본질을 지닙니다. 신식민지주의 중첩적 질곡 아래 허우적대고 있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신식민지주의가 만들어낸 세계체계의 부조리 현상에 질병과 의학이 예외일 리 없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이 바로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은 자발적으로 자기 생명과 존엄을 부정하는 마음의 질병입니다. 물론 이 자기부정의 배후에는 결백한 어머니, 정의로운 민주공화국이 앉아 있습니다. 저들은 본디오 빌라도처럼 맑은 물에 두 손을 씻었습니다.


이 잔혹한 풍경에 제국의 은총이 구원으로 등장합니다. 은총의 옥함 속에는 프로작과 토건 치료(정신분석, 인지행동치료 등), 그리고 폐쇄병동이 들어 있습니다. 자비가 더 너른 오지랖을 펼치면 그 마름들이 들고 나타나는 ‘인문치료’나 ‘즉문즉설’에도 대박의 기회가 열립니다. 가해자가 가호의 옷을 입고서 피해자의 마지막 피톨까지 착취해가는 형국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우울증을 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일이 그러므로 치료의 큰 시작입니다. 자발적 자기착취 체제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 없이 치료에 임하는 것은 신식민지주의 부역 행위입니다. 범죄 지식을 의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범죄 행동을 의료라 할 수 없습니다. 이 허위와 탐욕을 놓지 않아서 ‘선생님’ 대우를 받는 자들에게 화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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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6장 본문입니다.


子曰 鬼神之爲德 其盛矣乎.

자왈 귀신지위덕 기성의호.

視之而弗見 聽之而弗聞 體物而不可遺. 

시지이불견 청지이불문 체물이불가유. 

使天下之人齊明盛服 以承祭祀 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

사천하지인제명성복 이승제사 양양호여재기상 여재기좌우.

詩曰 神之格思 不可度思 矧可射思.

시왈 신지격사 불가탁사 신지사사. 

夫微之顯 誠之不可揜 如此夫.

부미지현 성지불가엄 여차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귀신의 덕 됨이 성하도다.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만물의 주체가 되어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다.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재계하고 깨끗이 하여 옷을 잘 차려입고서 제사를 받들도록 하고, 양양하게 그 위에 있는 것 같고 그 좌우에 있는 것 같다.” 『시경』에 이르기를 “신의 이름을 헤아릴 수 없거늘 하물며 싫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저 미미한 것의 나타남과 정성스러움을 가릴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도다.


2. 느닷없이 귀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 귀신은 특별한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냥 이해하는 그 귀신 이미지를 애써 벗겨낼 일 없다고 생각합니다. 움츠러들고 펼쳐지는 세계 운동으로 합리화하여 설명하는 주자 식 이해가 오히려 별나 보입니다. 그런 의미의 귀신이라면 거기에 무슨 덕이 있을 것이며, 거기다 대고 제사는 또 뭣 하러 지내는 것일까요?


오감에 잡히지는 않으면서 분명하고 적확하게 일어나는 사물의 운행을 인지할 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경외감을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인격적 이미지로 떠올리면 바로 그게 귀신이 됩니다. 인간 지식과 지혜로 감당 안 되는 우주의 이치가 신비 영역으로 ‘모셔지는’ 것은 공자 시절이나 지금이나 근본적으로 동일합니다. 거기에 경건함을 부여한다고 대뜸 미신 운운하는 짓이야말로 방자한 행태입니다. 물론 이는 뭐든지 귀신 역사役事라고 보는 신비주의 종교나 퇴마 신앙과는 다릅니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겸허함이 신인동형론신이나 신들에 대해 인간과 유사한 존재인 것처럼 말하는 신에 대한 하나의 관점 일반적으로 표현된 문화현상 수준에서 적절하게 머무르는 게 옳겠지요. 


3. 그러면 중용을 논하는 자리에서 귀신 이야기는 왜 나온 것일까요? 아마도 핵심은 맨 마지막 문장일 것입니다. 미미한 것의 나타남과 정성스러움을 가릴 수 없는 것이 중용의 요체인데 그런 이치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주는 현상이 바로 귀신이다, 이런 맥락입니다. 그것을 귀신 현상으로 묘사한 말이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만물의 주체가 되어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다[시지이불견 청지이불문 체물이불가유視之而弗見 聽之而弗聞 體物而不可遺].”입니다.


그러므로 “미미한 것의 나타남과 정성스러움을 가릴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의 뜻은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만물의 주체가 되어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다.”는 말의 뜻과 함께 이해되어야 합니다. 미미한 것의 나타남, 곧 미지현微之顯과 정성스러움을 가릴 수 없는 것, 곧 성지불가엄誠之不可揜이 대구對句라는 사실은 누가 봐도 자연스럽습니다. 미微: 성誠, 현顯: 불가엄不可揜,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드러나고 가릴/덮을 수 없는 것의 짝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미미함과 정성스러움의 짝입니다. 그 둘은 어떤 의미에서 짝일까요?


우리는 이 대구가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만물의 주체가 되어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다[視之而弗見 聽之而弗聞 體物而不可遺].”는 문장의 역접 상태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보아도 보이지 않아 미미하지만 만물의 주체가 되어 하나도 빠뜨리지 않아 벗어남/어긋남이 없으니 내세우지 않아도 자연스레 나타나고 가려지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여기 성誠은 성실함, 정성스러움이라는 덕성이라기보다 벗어나지/어긋나지 않는다는 역동적, 실천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미微는 용庸이 되고 성誠은 중中이 됩니다. 중용中庸의 다른 묘사가 바로 성미誠微입니다!


드러내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권력화하지 않고, 이득을 챙기지 않고 겸손히 ‘평범한’ 소통을 이루는 일에서 늘 벗어나지 않음이 중용이고 성미입니다. 그 성미의 덕이 성盛하여 만인이 재계하고 깨끗이 하여 옷을 잘 차려입고서 제사로 받드니 도처에 그 대동의 기운이 깃드는[곧 양양호여재기상 여재기좌우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 것입니다.


4. 그렇습니다. 핵심은 귀신이 아닙니다. 드러나지 않는 올곧은 소통의 실천으로 대동세상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 바로 중용이다, 이게 핵심입니다. 그게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그 안목으로 보면 오늘 이 땅에 준동하는 ‘특별한’ 소인배의 작태란 참으로 가소로운 잡귀 놀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른 길 가도 자랑하지 않는 것이 중용, 그러니까 성미인데 대한민국의 ‘갑’들은 거꾸로 그른 길 가는 것을 대놓고 자랑합니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 4대강사업, 자원외교 따위 협잡을 회고록에 올려 떠벌이고, 강연하러 돌아다니는 전직 대통령이 그 전형입니다. 세월호사건, 중동독감대란, 역사교과서 획일화 협잡,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문제 야합을 벌이고도, 그래서 총선에 참패하고도 겸허와 민의를 이야기하는 현직 대통령이 그 모범입니다. 저들은 그것이 제 얼굴에 침 뱉기라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입니다. 안다면 모름지기 의로운 고난이라 신앙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최고 헌법기관이 이렇게 전형이 되어주고 모범을 보여주니 그 수하들은 파안대소하며 검찰에 출두하고 자식 잃어 울부짖는 부모 앞에서 득의만면 인증 샷 올리는 것입니다. 똘똘 뭉쳐 인면수심을 자랑하는 ‘갑’들의 반중용이 도를 넘고 있는 이 때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만물의 주체가 되어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 귀신일랑 다름 아닌 필부필부匹夫匹婦 장삼이사張三李四가 아닐는지요. 그 귀신들, 화산으로 폭발할 날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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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재된 억압은 그 무엇보다 감정을 은폐합니다. 이런 은폐체제는 두 가지 동력으로 굴러갑니다.

  하나는 감정을 신체 언어로 우회시키는 것입니다. 예컨대 ‘슬프다’는 감정을 ‘폐부를 찌른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만 우회가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에서 아랫사람, 특히 여성의 감정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작용했습니다. 물론 부정적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은 통속적 유교 사회의 지배 이익을 유지하고 확대재생산하는 정치적 도구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이보다 더 강력한 도구가 바로 문자입니다. 입말과 다른 글말을 사용하는 지배층의 소통 차단 전략이라고 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요. 민중의 감정을 생생한 입말로 표현한 것이 내구력을 갖춘 사회 동원력으로 나타나려면 입말과 일치하는 글말로 옮겨져야 합니다. 입말은 소문이지만 글말은 격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사실을 간파한 지배층이 입말과 글말을 철두철미하게 갈라놓았습니다. 조선 500년 역사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이 입말 글말 분리 통치사입니다. 구태여 조선에 국한한 이유는 입말 글말 일치를 이룬 세종의 혁명이 결국은 물거품이 되어버린 사실 때문입니다.

  이렇듯 입말과 글말의 불일치는 우리가 감정 에너지를 왜곡 없이 드러내고 건강하게 수습하는 서사 능력의 공유 가능성을 원천봉쇄해 버렸습니다. 개인의 일상생활에서는 물론이고 사회적 차원에서 억압을 풀어내어 생명의 물길을 쉼 없이 흐르게 하는 일이 가로막히자 나타난 병리 현상이 화병, 즉 한국형 우울증입니다. 결국 화병은 매우 사회정치적 개념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우울증을 앓는 한국인은 사회정치적 억압을 개인의 인격과 삶으로 짊어진 희생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에서 우울증을 말하려면 서구적 지평을 넘어서는 고유한 문화목록어inventory가 필요합니다.(253-254쪽)


말로 표현하지 못한 마음의 상처는 몸에 각인됩니다. 내재화된 상처는 유발사건을 무의식 상태에서 재연하는 한편 관련된 신체의 감각을 마비시키거나 반대로 과민하게 만듭니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감정의 결들은 다양성을 잃고 상처감정 중심으로 단순하게 재편됩니다. 심각하게는 접히고 구겨진 감정이 흑백 스펙트럼에 사로잡힌 채 한평생 계속되기도 합니다.


치료란 그러므로 말의 복원입니다. 말을 복원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표현하도록 펼쳐놓는다는 것입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표현하려면 살아 숨 쉬는 입말을 구사해야 합니다. 살아 숨 쉬는 입말이 빚어내는 이야기는 서사를 남깁니다. 남겨진 서사는 글말을 통해 서사공동체를 이룹니다. 서사공동체는 소통으로 삶을 공유합니다. 진정으로 삶을 공유하는 서사공동체에는 마음병이 틈입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급격하게 서사공동체성을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소통을 앞장서서 가로막는 장본인이 권력의 중심입니다. 살아 숨 쉬지 않는 요령부득의 입말과 의미가 전도된 출처불명의 글말이 뒤죽박죽 섞인 언어를 공식으로 산포합니다. 자본과 종교는 그것을 과장하고 미화합니다. 거짓의 독을 먹은 시민이 그 앞에서 쓰러지고 있습니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울증 앓는 중년 여성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이를테면 독서중독 상태에 있었습니다. 주로 읽는 책은 비문학 인문 이론서였습니다. 접히고 구겨진 감정의 결을 되살리기 위해 잠시 그런 책을 내려놓고 문학, 특히 시를 읽어보라고 조언했습니다. 김선우, 문태준, 고영민 같은 시인을 추천해주었습니다. 그가 다시 찾아와 제게 시 한 편을 내밀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 아니 시어 하나에 영혼이 움찔거리는 경험을 했다고 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오줌을 누다

한 방울

오줌 방울의 느낌


물은 빠져나가니까

몸에 갇히지 않으니까

어디서든 기어코 흐르니까


가두는 자가 아니라

흐르고 빠져나가는

저 역할이 마음에 든다······· 중얼거리며


물로 태어나리라

처음은 비


입술로 스며 그대 몸속

어루만져 속속들이 살린 후

마침내 그대를 빠져나가는


김선우의 최근 시집 『녹턴』에 실린 <한 방울>이란 시입니다. 저 또한 과연 김선우다, 했습니다. 바로 뒤이어 그가 ‘아래’의 얼얼한 통증을 호소합니다. 그가 ‘아래’라고 표현한 것은 부끄러움 탓도 있지만 정확히 질 부위인지 항문 부위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성학대의 알아차림이 전해주는 몸 신호였습니다. 시의 울림이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저는 그에게 몸, 특히 그 부위와 대화하라 일러주었습니다. ‘알아차리지 못하고 방치해서 미안하다. 여태껏 견뎌주어서 고맙다. 이제 함께 이야기해보자.’ 말하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간곡히 질문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질문이야말로 말을 복원하는 일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서사공동체가 되어 스스로 치료를 완성해갑니다. 그의 길이 우리사회 아픈 사람 모두에게 이어지는 꿈을 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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