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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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울증은 우리의 숙명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무덤인 만큼이나 우리의 자궁입니다. 삶과 죽음의 교차점에서 우울증은 명징한 울림이 됩니다. 그것은 어둠과 어둠 사이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별입니다. 그것은 장엄한 빛의 커튼을 단도직입으로 찢고 엄습해 들어오는 어둠입니다. 100% 순도의 생명을 찰나에 망치는 죽음의 불순물입니다. 100% 순도의 죽음을 찰나에 깨뜨리는 생명의 순물질입니다. 이 도저한 역설을 알아차리고 삶의 물길로 터 내는 사람, 바로 그가 참사람입니다. 붓다이며 예수입니다. 아, 그런데 실은 그가 놀랍게도 다름 아닌 여성입니다.

  어둠이 점점 짙어지는 이 21세기 시공간에서 우리가 구태여 우울증을 말하고 여성을 말하는 까닭은 태고의 음성이었으나 오래토록 잊고 삶으로써 멸절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 최후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4대강이 죽어가듯 아이들이 죽어갑니다. 4대강을 살려야 국토가 살듯이 아이들을 살려야 우리 미래가 삽니다. 우리 미래인 아이들은 어머니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어머니, 그 가없는 여성성을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이렇게 숭고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두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법을 찾아 삶과 작별했다.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부러 곤드레만드레 취하는 사람, 잔인한 마지막 욕정에 취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여행 중 먹을 음식을 밤을 새워 정성스레 준비했고 아이들을 씻기고 짐을 꾸렸다. 새벽이 되자 바람에 말리려고 널어둔 아이들의 속옷이 철조망을 온통 뒤덮었다. 기저귀, 장난감, 쿠션, 그밖에 그녀들이 기억해낸 물건들, 아기들이 늘 필요로 하는 수백 가지 자잘한 물건들도 빠지지 않았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함께 사형을 당한다고 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


  죽음이 바로 코앞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절대 우울 한가운데서 어머니, 저 생명의 근원인 여성은 생사를 꿰뚫는, 그러나 뜻밖에도 평범하고 또 평범한 일상을 지속합니다. 이 간절함, 이 사무침, 그래서 오히려 소꿉놀이 같은 도저한 생명 감각.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309-311쪽)


어머니는 딸에게 말했습니다. 제대로 된 데서 치료를 받아야지, 동네 한의원에서 무슨·······, **대학병원으로 옮겨라. 어머니는 자신의 세계와 딸의 세계를 미분화 (단)일체 상태로 놓아둔 채 40여 년을 살아왔습니다. 딸은 단순 소비자였을 뿐 주체가 아니었습니다. 딸이 주체 선언을 하자 어머니는 그 부정否定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그 부정을 다시 부정하게 하려고 ‘제대로 된 데’를 지목한 것입니다. 딸은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습니다.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아니라 부정不定이라는 사실. 부정不定이 생명이라는 사실. 생명은 여성에게서 나온다는 사실. 여성을 복원하기 위해 딸은 혁명 중에 있습니다. 혁명을 통해 딸은 비로소 여성이 됩니다. 여성은 ‘어머니’가 됩니다. ‘어머니’가 딸을 해방할 것입니다. 딸은 그의 딸을 해방할 것입니다.


딸은 활짝 웃으며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상담실을 떠났습니다. 딸의 뒷모습에 겹치는 어머니와 ‘어머니’를 한동안 바라보았습니다. 문득 시 한 조각이 떠올랐습니다.


  恩

  그이는 지금 잠들었을까 폐지 수레 끌고 건널목에 서 있던 노란 가방을 멘 소년이 건널목을 뛰다 넘어지는 순간 믿을 수 없이 빠르게 소년을 일으켜 안던 안녕을 확인하자 이내 굼뜬 노파로 돌아가 소년에게 천천히 밤빛 양갱을 건네던 노쇠하고 남루한 그 손앞에 주춤거리던 소년은

  뒤늦게 달려온 아이 엄마가 노파의 손을 쳐내며 아이를 안을 때 울음을 터뜨린 소년에겐 말하기 어려운 어떤 미안함이 있는 듯했고 소년에게 답하듯 그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름 가득한 손을 아래위로 끄덕이며 괜찮다 네가 괜찮으니 나는 괜찮다 깨끗한 아이에게 더러운 노파가 건네려던 밤빛 양갱 같은

  밤의 빛

  이름 붙이기 어려운 연약한 고귀함이 밤의 빛 속에 떠 있다


_<om의 녹턴> 일부(김선우 『녹턴』에서)



졸저 『안녕, 우울증』에 자성과 보결의 의미를 담아 75편의 리뷰를 적었습니다. 넉 달 보름의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우리사회의 어떤 겉모습은 바뀌었다 하겠지만 핵심 실재는 요지부동인 채로입니다. 세월호사건 진실은 표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기억은 지워지고 있습니다. 공동체는 공동체성을 급격히 잃어가고 있습니다.


시시각각 어둠을 향해 미끄러져 들어가는 생명 앞에서 펼쳐지는 도저한 부정不定의 모성을 황급히 소환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밤의 빛 속에 떠 있는’ ‘연약한 고귀함’이 더없이 그립습니다. ‘남루한 그 손앞에’ ‘깨끗한 아이’의 운명이 놓여 있습니다. ‘뒤늦게 달려온 아이 엄마’의 쳐내는 손은 공동체 대한민국을 망가뜨리는 분열의 흉기입니다. ‘네가 괜찮으니 나는 괜찮다’는 ‘더러운 노파’가 깊은 우울증에 잠긴 우리의 구원입니다. 어머니입니다. _()_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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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0장 다섯 번째 본문입니다. 


凡事豫則立 不豫則廢. 言前定則不跲 事前定則不困 行前定則不疚 道前定則不窮.

범사예즉립 불예즉폐. 언전정즉불급 사전정즉불곤 행전정즉불구 도전정즉불궁.


무릇 모든 일은 미리 준비되면 이루어지고 미리 준비되지 않으면 어그러진다. 말이 미리 정해져 있으면 착오가 생기지 않고 일이 미리 정해져 있으면 곤란하지 않게 되며 행동하는 것이 미리 정해져 있으면 탈이 없게 되고 방법이 미리 정해져 있으면 궁하지 않게 된다.  

 

2. 이 문단 또한 조금 부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앞에서 아홉 가지 다스림의 원칙에 대해 장황하게 말하다가 느닷없이 예豫와 전정前定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편집자가 흩어져 있는 문서 조각fragment을 조합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불협화음이 아닐까 합니다. 칼 같은 문헌비평에 의거 빼버려도 무방하겠지만, 이 경우 전후 문맥을 고려하여 자연스러움을 보완해주는 방향으로 해석하면 크게 무리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 수신修身문제를 계속해서 말하였고, 이 문단 바로 뒤에서는 성誠 문제를 언급합니다. 대략 이런 연결의 지도리로 예와 전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리’ 준비하고 정한다는 말은 사회적 실천의 핵심으로 사적 실천을 놓는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미리’ 준비하고 정한다는 말은 단순히 시간적인 앞섬, 예비적 단계를 지시하지 않습니다. 개인 개인의 내면적 성찰과 꼿꼿한 발걸음 없이 사회적 외양만을 갖추고서는 참된 중용이라 할 수 없다는 뜻을 가지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의미 내함은 수신과 한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은 다음 문단의 성과 잡는 것이지요. 

 

예전정豫前定은 끊임없는 실천의 닦음, 즉 수신의 자세를 다른 방향에서 본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매 순간 알아차리고 챙겨야 적확한, 곧 성誠인 사회적 실천, 즉 중용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의 의미 덩이들을 이런저런 측면에서 살핀 것이 수신, 예전정, 성으로 표현되었다고 이해하면 간편합니다. 물론 성은 그 자체로 중 또는 중용의 ‘본토’에 깊이 발 들여 놓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불연속성을 구태여 예리하게 구분할 실익은 관념 영역에서나 찾을 일입니다. 궁극적 실천영역에서는 상호 연속성이 그대로 힘이 됩니다.   

 

3. 예전정은 사회의 동향, 역사의 흐름을 읽고 참여하는 삶에서 일어나는 통찰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올바른 결과를 내기 위한 기계적 인과간계의 전제 조건으로 예전정을 거론하는 게 아닙니다. 예전정은 선택이며 결단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투명한 정신, 옹골찬 기상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에는 야합과 흥정이 설 땅이 없습니다.

 

국가의 현안 문제를 놓고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지배층의 야합과 흥정을 백성은 아프게 목도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장관도 언론도 재벌도 전혀 예전정이 안 된 상태에서 준동하고 있습니다. 하기는 오로지 모든 것을 사익추구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자들에게 무슨 자기성찰과 현실인식이 있겠습니까.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제 곳간을 채우기에 급급한 자들에게 예전정은 어수룩한 처세일 따름입니다.


참으로 예전정하려면 저 “높으신 분”들은 저자 거리로 나와야 합니다. ‘특별함’의 기득권과 편견을 타고 앉은 채 구름 위에서 이루어지는 인仁은 없습니다, 중용은 없습니다. 지도층입네 하며 자기기만 하는 자리에서 냉큼 내려와 필부필부의 현실과 호흡해야 합니다. 그들의 구체적인 소리를 경청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순舜임금의 실천인데 누가 감히 여기에 토를 달 것입니까.


4. 팽목항에도 안산 분향소에도 “높으신 분”께서 친히 다녀가셨습니다. 유족의 말도 들으셨고 정중히 조문도 하셨습니다. 물론 이 모두 설정이었습니다. 현장을 파악하고 민심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이미지 조작일 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부풀려 전시하였습니다. 전시된 체험은 삶의 일부가 되지 않았습니다. 삶의 바깥에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그 “높으신 분”의 약속은 휴지가 되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인문학자 한병철은 『투명사회』에서 체험Erlebnis과 경험Erfahrung을 구별했습니다. 체험은 존재하는 것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경험은 근원적 변화를 일으키도록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그야말로 현실에 몸 담그는 것입니다. 현실에 몸 담그는 것은 전시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조선의 왕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왕의 미복잠행은 적어도 전시 효과를 노리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체험 관광을 계속하고 있는 국가수장에게 국민은 언제까지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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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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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울증은 근본적으로 여성적 질환입니다. 남성중에서도 여성적 성격을 지닌 사람이 우울증에 더 잘 걸립니다. 남성이 우울증에 깊이 침륜되면 여성적으로 됩니다. 결국 여성우울증은 우울증 중의 우울증입니다. 그래서 여성우울증은 그 깊은 고통의 우물에서 희망과 미학과 가치, 그리고 준엄한 문명비판인 하늘의 뜻을 길어 올리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은 무엇입니까? 생명을 이치대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치대로 사는 생명은 서로 소통하여 공존하고, 함께 도약하여 경이로워집니다. 자기 모독에 휘감긴 우울증이 이런 하늘의 뜻을 담는다는 것은 언뜻 보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울증의 바로 이런 가혹한 특성이 하늘의 향기를 품고 있습니다. 자기를 버려서 버림의 악순환을 막는다는 역설. 누군가 자기를 버리면 공존과 경이의 세계가 가능할 때 과연 누가 자기를 버릴 수 있을까요? 슬픔을 제 생명 감각 속에 지닌 사람입니다. 슬픔을 살아낸 사람, 그래서 그 슬픔이 찬연한 것임을 깨친 사람입니다. 슬픔의 침전이 우울증이고, 그 가장 웅숭깊은 시공에 여성의 삶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우울증이 하늘의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여성과 우울증을 신비주의로 몰고 가려는 음모로 들리십니까? 그렇다면 이참에 그 신비주의를 한 번 체험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여성은 그렇다 치고(종종 있어 왔으니까) 우울증 신비주의, 솔깃하지 않으십니까? 미美 중의 미, 비애미의 절정을 맛볼 수 있는 영양가 넘치는 시도가 아닐까요?(307-308쪽)


저는 출근을 걸어서 합니다. 이른바 미토콘드리아 운동법으로 30여 분을 빠르게 걸어 3km남짓 이동합니다. 오늘도 역시 용마산 자락의 길을 걸어서 왔습니다. 오다가 아침 운동 중인 동네 어르신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는 가끔 한의원에 와서 침 치료를 받는 몇몇 분이 계셨습니다. 두루 인사를 하고 지나쳐 오는데 뒤에서 누군가 저를 잘 모르는 분에게 설명하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아, 그 왜 오거리 침쟁이 있잖아!”


그렇습니다. 신식민지 대한민국에서 한의사는 침쟁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양’의대와 똑같이 6년 동안 공부하고 국가고시를 통해 보건복지부장관이 공인하는 면허를 받은 의료인임에도 한의사는 이런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내 경험을 우선순위에 두지 못하고 남의 경험을 우선순위에 두는 식민지의 자기부정이 빚은 우울증 어법입니다.


오전 내내 그 말이 귓가에서 윙윙거렸습니다. 물론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라 충격을 받았노라 호들갑을 떨 까닭일랑 없습니다. 다만 그 동안 인욕忍辱이라는 수동적 차원에 머물던 생각을 이제 능동적으로 흔들어볼 필요가 있겠다 싶었습니다. 욕됨을 그저 묵묵히 견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욕됨을 기꺼이 수용함으로써 도리어 망해가는 이 공동체를 되살릴 동력으로 만들 길을 찾는 것입니다.


욕된 삶을 살아온 사람만이 스스로 욕됨을 발효시켜 공존과 경이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욕됨을 발효시키면 거기서만 싹 터 수평으로 뻗어가는 연대의 줄기가 자라납니다. 키 없는 줄기가 서로 엮일 때 경이의 생명이 창조됩니다. 경이의 생명은 광활함으로 나아갑니다. 광활함에서 나는 너이며 너는 나입니다. 너와 나의 경계가 고스란히 사라질 때 비로소 홀가분하게 나는 나이며 너는 너입니다. 그 이상의 경지는 중독입니다.


오거리 침쟁이인 저는 오거리 침쟁이의 사회적 위상을 높일 생각이 없습니다. 침쟁이는 침쟁이인 대로 충실할 따름입니다. 마음병을 치료할 경우는 대부분 제가 한의사이기 때문에 찾아오는 분들이므로 거기에 맞게, 더 나아가 사회인문적 지평까지 열어 내용을 넓힙니다. 연대는 일방적 행위가 아닙니다. 각자의 슬픔이 나지막이 서로 관통하고 흡수함으로써 일어납니다. 슬픔의 연대는 나지막해서 높다랗습니다. 그것이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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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0장 네 번째 문단입니다.


子曰 好學近乎知 力行近乎仁 知恥近乎勇. 知斯三者 則知所以修身 知所以修身 則知所以治人 知所以治人 則知所以治天下國家矣.

자왈 호학근호지 역행근호인 지치근호용. 지사삼자 즉지소이수신 지소이수신 즉지소이치인 지소이치인 즉지소이치천하국가의.

凡爲天下國家 有九經 曰 修身也 尊賢也 親親也 敬大臣也 體群臣也 子庶民也 來百工也 柔遠人也 懷諸候也.

범위천하국가 유구경 왈 수신야 존현야 친친야 경대신야 체군신야 자서민야 내백공야 유원인야 회제후야.

修身則道立 尊賢則不惑 親親則諸父昆弟 不怨 敬大臣則不眩 體群臣則士之報禮重 子庶民則百姓勸 來百工則財用足 柔遠人則四方歸之 懷諸侯則天下畏之.

수신즉도립 존현즉불혹 친친즉제부곤제 불원 경대신즉불현 체군신즉사지보례중 자서민즉백성권 내백공즉재용족 유원인즉사방귀지 회제후즉사방외지.

齊明盛服 非禮不動 所以修身也 去讒遠色 賤貨而貴德 所以勸賢也 尊其位 重其祿 同其好惡 所以勸親親也 官盛任使 所以勸大臣也 忠信重祿 所以勸士也 時使薄斂 所以 勸百姓也 日省月試 餼禀(廩)稱事 所以勸百工也 送往迎來 嘉善而矜不能 所以柔遠人也 繼絶世 擧廢國 治亂持危 朝聘以時 厚往而薄來 所以懷諸侯也. 凡爲天下國家有九經 所以行之者一也. 

제명성복 비례부동 소이수신야 거참원색 천화이귀덕 소이권현야 존기위 중기록 동기호오 소이권친친야 관성임사 소이권대신야 충신중록 소이권사야 시사박렴 소이 권백성야 일성월시 기품(늠)칭사 소이권백공야 송왕영래 가선이금불능 소이유원인야 계절세 거폐국 치란지위 조빙이시 후왕이박래 소이회제후야. 범위천하국가유구경 소이행지자일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기를 좋아함은 지知에 가깝고 실천을 힘씀은 인仁에 가까우며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勇에 가깝다.” 이 세 가지를 알면 몸을 닦는 방법을 알며, 몸을 닦는 방법을 알면 남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며, 남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면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방법을 안다.

무릇 천하국가를 다스림에 아홉 가지 원칙이 있으니 몸을 닦음과, 어진 사람을 존경하는 것과, 친족과 하나가 되는 것과, 대신을 공경하는 것과, 여러 신하를 내 몸처럼 여기는 것과, 서민들을 자식처럼 여기는 것과, 백공들을 오게 하는 것과, 먼데 있는 사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과, 제후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것을 말한다.

몸을 닦으면 곧 방법이 생기고, 어진 사람을 존경하면 미혹되지 않으며, 친족과 하나가 되면 제부諸父와 형제가 원망하지 않고, 대신을 공경하면 현혹되지 않으며, 여러 신하들을 내 몸처럼 여기면 선비들의 보례報禮가 중후하게 되고, 서민들을 자식처럼 여기면 백성들이 분발하게 되며, 백공들을 오게 하면 재물을 쓰는 것이 풍족해지고, 먼데 있는 사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면 사방 사람들이 돌아오며, 제후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면 천하가 두려워하게 된다.

재계하고 깨끗이 하며 정복을 갖추어 입고서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것은 몸을 닦는 수단이고, 아첨하는 자를 제거하고 여색女色을 멀리하며 재물을 천하게 생각하고 덕德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현자賢者를 권면하는 수단이며, 그 지위를 높이고 그 녹祿을 무겁게 해주며 그 호오好惡를 같이 하는 것은 친족과 하나 됨을 권면하는 수단이고, 관직의 수가 많아져 지휘권을 맡기는 것은 대신을 권면하는 수단이며, 충심忠心으로 대하고 믿으며 녹을 많이 주는 것은 사士를 권면하는 수단이고, 부역을 때맞게 하고 세금 걷는 것을 줄이는 것은 백성을 권면하는 수단이며, 날로 살피고 달로 시험하여 보수를 일의 능력에 맞게 하는 것은 백공을 권면하는 수단이며, 가는 이를 보내고 오는 이를 맞이하며 착한 것을 칭찬하고 잘못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먼데 있는 사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수단이고, 끊어진 대를 이어주고 망하는 나라를 일으켜주며 어지러운 것을 다스리고 위태로운 것을 붙잡아주며 조회[조朝]와 초빙[빙聘]을 때에 맞게 하며, 보내는 것을 많이 하고 받는 것을 적게 하는 것은 제후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수단이다. 무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는 아홉 가지 원칙이 있으나 그것을 행하는 수단은 하나이다.

 

2. 다섯 가지의 보편적인 도와 세 가지 보편적인 덕을 거쳐 아홉 가지 다스림의 원칙을 말하는 데까지 왔습니다. 길고 상세한 언급이 있으나 일일이 풀어 설명할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봉건시대 최상위 정치 지도자를 대상으로 강론한 듯도 한 느낌을 주는 내용이라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면 될 성질의 것으로 판단됩니다.

 

오히려 강조할 것은 수신修身으로 풀어서 수신으로 매듭지은 사실입니다.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일 또한 다함없이 실천의 결기를 닦는 평범한 일에서 비롯한다는 내용입니다. 부단히 깨어 있어 찰나 찰나를 챙기는 닦음, 그 미세한 통찰을 소홀히 하고서는 천하와 국가의 다스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3. 적어도 한 사회의 통치자 위치에 서는 꿈을 지닌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사적 실천에서 떳떳함을 기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사회의 어두움을 틈타 온갖 부조리에 발을 담그며 이득을 누려 왔다면 통치자 자리에 앉으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통치자 자리조차 이득의 하나로 여기는 판국이라 이런 말도 우습습니다만 사적 이익 추구 능력을 공적 통치 능력과 혼동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이런 혼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수신이란 말의 향기가 어느 순간 돌연, 개나 줘버릴 쓸모없는 것으로 “대놓고” 바뀐 것은 아무래도 이명박이란 희대의 인물이 대통령이 된 그 때가 아닌가 합니다. 전과14범이 민주주의를 표방한 나라의 선거를 통해 통치자가 된 순간 공화국은 범죄자의 개인 금고가 되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한 번 그렇게 망가지자 걷잡을 수 없이 수신의 기준은 허깨비가 되어버렸습니다. 웬만한 범법행위는 아예 자격요건으로 여겨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소시민의 입에서 “큰일 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대범한 소리가 흘러나오니 수신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듯합니다. 이런 추세에 힘입어 현재의 통치 집단은 ‘대놓고’에다 ‘함부로’를 더 얹어 대한민국 사회를 수신 묻지 않는 막장으로 쑤셔 박고 있습니다.



어린 국민 250명을 죽여 놓고 장례비용 아끼라는 깨알 같은 지시를 내린 대통령이 취임 후 2년 동안 무려 120여벌의 새 옷을 지어 입었습니다. 이 참담한 수신 불문의 나라에서 중용 운운 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 아닐는지요. 사회 변혁의 에너지로 전화되지 못하는 인문적 사유를 중언부언 떠들 게 아니라 단 한 마디라도 사실과 증거를 들고 거리로 뛰어나가야 하지 않을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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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인 어제는 청계천에서 인왕산까지 14km가량 걸었다중간에 잠시 관훈동에 들러 '중용' 국시 먹은 시간 빼고는 줄곧 걸었다


1. 사기꾼이 가짜로 만들어놓은 냇물이건만 물고기가 살아 돌아다니니 세상에왜가리가 납시었다자연은 인간의 선악 문제와 아랑곳없이 무심히 생명 길을 열어간다천지불인의  맥락일 터이다.



2. 겸재가 뮤즈와 노닐던 인왕산 자락사람 눈길 닿지 않는 곳에 아리잠직한 아카시아가 피어 있다오월이구나인왕산 오월은 광주 오월을 알지 못한다인왕산과 광주 모두를 아는 인간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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