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0장 세 번째 문단입니다.
天下之達道五 所以行之者三.
천하지달도오 소이행지자삼.
曰 君臣也 父子也 夫婦也 兄弟也 朋友之交也 五者天下之達道也.
왈 군신야 부자야 부부야 형제야 붕우지교야 오자천하지달도야.
知仁勇三者 天下之達德也 所以行之者一也.
지인용삼지 천하지달덕야 소이행지자일야.
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一也.
혹생이지지 혹학이지지 혹곤이지지 급기지지일야.
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而行之 及其成功一也.
혹안이행지 혹이이행지 혹면강이행지 급기성공일야.
천하의 달도는 다섯 가지가 있고 이를 행하는 소이는 세 가지가 있다. 군신, 부자, 부부, 형제, 붕우의 사귐이라고 하는 것 다섯 가지가 천하의 달도이다. 지, 인, 용 세 가지는 천하의 달덕이니 이를 행하는 소이는 한 가지이다. 혹 나면서 알며 혹 배워서 알고 혹 고심해서 알지만 안다는 점에서 보면 같은 것이다. 혹 편안하게 행하며 혹 이롭게 여겨서 행하며 혹 애쓰고 억지로 힘써서 행하지만 그 공을 이루는 점에서 보면 같은 것이다.
2. 세상에 두루 통하는 보편적 가치로서 도가 펼쳐지는 인간관계는 가족에서 출발하여 가까운 이웃을 거쳐 사회정치적인 큰 지평까지 아우릅니다. 각각 나타나는 양상은 다르지만 근본에서 일치하는 것이므로 상대적으로 커 보이는 정치적 인간관계의 이치 또한 “평범함[용庸]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중中].”
이러한 도리를 바로 알아[지知] 어질고[인仁] 날래게[용勇] 실천하는 것이 세상에 두루 통하는 보편적인 덕입니다. 세 가지를 따로 나누어 각각 덕이라 이름 하는 것, 그리고 다시 둘로 나누어 지와 행을 논하는 것이 오래된 명사적 독법 전통이지만 중용의 실천적 맥락을 놓치는 안일한 해석입니다.
아는 것도 실천입니다. 실천도 아는 것입니다. 실천 없는 지식은 처음부터 지식이 아닙니다. 깨달음 없는 실천은 처음부터 실천이 아닙니다. 적어도 중용을 논하는 자리에서는 지知는 행지行知이며 행行은 지행知行입니다. 실천 없는 명상적, 관념적 중용에는 중도 없고 용도 없습니다. 중용의 외양을 취하더라도 알아차림 없는 동작이라면 가치로서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처한 상황이 있는 까닭에 완벽하지 않은 수준에서 사회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이므로 지니는 현실적 한계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닦아야[수修]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수신修身입니다. 실천 자체를 부단히 최고의 경지로 밀어 올려야 하는 것입니다. 허나 최고의 경지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므로 자신의 실천이, 아니 자신 자체가 ‘평범하다’는 사실을 순간순간 확인하는 것이 수신의 핵심입니다.
결국 이 지점에서도 동사적 독법의 필요성이 나타납니다. 반복되는 “일야一也”는 “오직 그렇게 다함없이 닦아 나아가야 한다.”는 역동적 격려요 요청입니다.
3. 북아메리카 원주민 호피족은 연평균 강우량이 200mm 정도인 척박한 애리조나에서 농사를 지으며 삽니다. 비는 절대적 필요이므로 비가 오지 않으면 그들은 기우제를 지냅니다. 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100% 비가 내립니다. 그토록 영험한 까닭은 비가 내릴 때까지 계속해서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 동안 익히 들어온 ‘인디언 기우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행위에 대한 허무개그 식 비아냥거림이 들어 있는 한 이 이야기는 진실을 왜곡한 것입니다. 비가 올 것이라 믿는 긍정적인 마음과 인내를 제시하며 성공하는 삶의 비결을 말하는 자기계발류의 해석은 더욱 교묘하게 진실을 왜곡한 것입니다. 심지어 인식과 실천을 일치시키는 윤리적 의지로 읽는 것조차 진실에서 벗어난 것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비가 올 때까지 계속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개신교를 포함한 통속적 종교의 기도 관념을 투영한 왜곡된 해석일 뿐입니다. 그들은 먼저 진심으로 모든 조건에 감사하는 기도를 한답니다. 그 감사 대상에 끔찍한 가뭄이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입니다. 바로 여기가 여느 기도나 긍정심리학과 첫 번째 다른 점입니다.
그 다음, 그들은 여러 가지 감사의 조건 가운데 하나인 비를 고요히 ‘선택’한답니다. 바로 여기가 여느 기도나 긍정심리학과 두 번째 다른 점입니다. 이 선택은 필요에서 멈춰섭니다. 탐욕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 그들은 선택한 비를 온몸으로, 오감으로 느낀답니다. 바로 여기가 여느 기도나 긍정심리학과 세 번째 다른 점입니다. 이성으로 의지로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가 오는 드넓은 조건을 향하여 자신의 모든 생명감각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비굴하게 애걸하는 기도를 하지 않는답니다. 바로 여기가 여느 기도나 긍정심리학과 네 번째 다른 점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사사로운 이익의 추구가 아닙니다. 그들의 기도는 이웃과 민족 전체를 위한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과 아픈 사람, 그리고 약한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실로 참되고 착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기도가 어찌 당당하지 못할 것입니까. 이 당당한 기도가 어찌 인식과 실천을 하나 되게 하지 못 할 것입니까.
4. 세월호사건 이후 어느 시점부터인가 기도를 시작하여 이제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차고 어두운 바다에 버려진 이백 쉰 명의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기도함으로써 하루 일과를 시작합니다. 그 영혼들을 위해, 아니 그 영혼을 거룩한 영으로 모셔 그들에게 기도합니다. 그들이 이 실재 역사에 함께하기를, 그 함께함으로 말미암아 이 나라가 민주자주통일의 길로 나아가기를, 버려진 사람이 끝내 버린 자까지 구원해내는 대동 세상 오기를 간절히 빕니다. 이 기도가 앎과 삶을 하나로 이어주는 인력인 것을 느끼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새삼 정색하고 점검합니다. 죽임의 조건까지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필요를 넘어서지 않고 있는가? 아이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온 영혼으로, 오감으로 느끼고 있는가? 당당하게 두려움을 꿰뚫어 나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과 대답이 영글어가는 과정에서 중용은 중용이 되어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