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인 어제는 청계천에서 인왕산까지 14km가량 걸었다중간에 잠시 관훈동에 들러 '중용' 국시 먹은 시간 빼고는 줄곧 걸었다


1. 사기꾼이 가짜로 만들어놓은 냇물이건만 물고기가 살아 돌아다니니 세상에왜가리가 납시었다자연은 인간의 선악 문제와 아랑곳없이 무심히 생명 길을 열어간다천지불인의  맥락일 터이다.



2. 겸재가 뮤즈와 노닐던 인왕산 자락사람 눈길 닿지 않는 곳에 아리잠직한 아카시아가 피어 있다오월이구나인왕산 오월은 광주 오월을 알지 못한다인왕산과 광주 모두를 아는 인간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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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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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울증을 전 지구적 문제라고 전제할 경우 이는 비단 인간 생명의 차원에만 국한할 수 없는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미 인간의 지나친 진화와 번성이 몰고 온 지구 생태계 전반의 위기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이를테면 킬리만자로의 눈이 녹아내리고 있는 것과 인간의 우울증 사이엔 분명한 함수관계가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거침없는 진화를 통해 자연을 대상화, 타자화한 결과가 이제 부메랑이 되어 인간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입니다. 이 잔혹한 문명의 혜택을 독점, 향유하는 헤게모니 블록은 자기 단일성의 미망에 빠진 분열증 집단입니다. 그들은 나머지 인간 그리고 자연과 소통하기를 거절합니다.

  이 광포한 분열증에 대한 경고가 바로 우울증입니다. 왜냐하면 우울증은 반성 불능의 자기단일성에 집착하는 분열증 집단의 먹잇감에게 씌워진 굴레이기 때문입니다. 우울증은 이 먹잇감이 다른 존재, 즉 자기 포식자에 대한 공감, 배려, 보살핌으로 자신의 생명을 잠식해 들어가는 병입니다. 우울증 환자의 영혼은 고요히 흐르는 깊은 강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투명한 통찰력을 지녔으나 따스합니다. 그들의 감각은 눈부시나 각질이 말랑말랑합니다. 하여 이 잔인한 문명 안에서의 삶은 백전백패입니다. 이 슬프고도 장엄한 패배를 온 영혼에 지닌 존재들이 저 승리자들과 자연의 경계에 서 있습니다. 저들이 죽어가면서 자연을 향한 분열증 집단의 돌진을 막습니다. 그들은 우울증이라는 천형을 덮어쓰고 생명의 연속성, 연대성을 절규하고 있습니다. 분열증적 자기단일성으로 승리한 문명의 적자, 저 비정한 ‘1%’가 끝내 이 선한 영혼, ‘등경(등잔걸이)을 말 아래 두는’ 생명들을 주목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멸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울증은 인류의 파멸을 막기 위해 분열증 문명과 자연의 경계에 핀 슬프고도 아름다운 꽃입니다. 인류가 이 사실에 귀를 기울이고 총력을 기울여 생명의 연속성, 연대성을 복원한다면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을 오래토록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이 웅숭깊은 문명비판이 구원의 무지개로 뜨기를.(305-306쪽)


상담을 하다 보면 이른바 보호자, 특히 어머니가 치료를 가로막거나 망쳐놓는 일이 드물지 않게 있습니다. 그런 어머니는 상담하는 의사를 뒤에서 조종하려 듭니다. 자신이 아이를 병들게 했다는 각성은 없습니다. 도리어 의사를 통해 자신을 정당화함으로써 아이를 더 말 잘 듣는 기계로 만들겠다는 전략만 있을 뿐입니다.


어제도 한 어머니가 전화를 해왔습니다. 딸의 상태가 어떠냐고 건성으로 물은 뒤, 딸이 더욱 악화된 것 같다고 대뜸 속내를 드러냈습니다. 전혀 말이 안 되는 엉터리 소리를 해대며 덤빈다고 근거를 댔습니다. 딸이 하는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재차 못을 박았습니다. 필경 그 딸을 이런 방식으로 키웠을 것입니다.


저는 그 어머니에게 또박또박 냉정하게 말해주었습니다. 따님은 분명히 좋아지고 있습니다. 결코 악화된 것이 아닙니다. 따님의 말은 엉터리가 아닙니다. 설혹 엉터리라 해도 그 말을 할 수 있게 놓아두셔야만 합니다. 어머니께서 차후 해주실 일은 그 어떤 평가도 간섭도 하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시는 것 하나뿐입니다.


그 어머니는 단절적으로 성공하려고 자기중심의 삶을 살아온 전형입니다. 현재 그가 누리는 부가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이 과정에는 반드시 희생양이 필요합니다. 마침 여리고 감수성 풍부한 딸이 있었습니다. 손쉽게 그 딸은 연속성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 딸은 자기 자신을 퍼내 남에게 주며 거듭거듭 비어갔습니다.


비고 또 비어 마침내 텅 빈 순간 아프디아픈 깨달음이 들이닥쳤습니다. 우울증입니다. 자신의 우울증을 알아차리고 치료를 시작하면서 그 딸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이도 병들어 있는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그 딸은 아픈 마음을 이끌고 병의 물길을 막아서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도 아이도 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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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0장 세 번째 문단입니다.


天下之達道五 所以行之者三. 

천하지달도오 소이행지자삼. 

曰 君臣也 父子也 夫婦也 兄弟也 朋友之交也 五者天下之達道也.

왈 군신야 부자야 부부야 형제야 붕우지교야 오자천하지달도야. 

知仁勇三者 天下之達德也 所以行之者一也. 

지인용삼지 천하지달덕야 소이행지자일야. 

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一也.

혹생이지지 혹학이지지 혹곤이지지 급기지지일야. 

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而行之 及其成功一也.

혹안이행지 혹이이행지 혹면강이행지 급기성공일야.


천하의 달도는 다섯 가지가 있고 이를 행하는 소이는 세 가지가 있다. 군신, 부자, 부부, 형제, 붕우의 사귐이라고 하는 것 다섯 가지가 천하의 달도이다. 지, 인, 용 세 가지는 천하의 달덕이니 이를 행하는 소이는 한 가지이다. 혹 나면서 알며 혹 배워서 알고 혹 고심해서 알지만 안다는 점에서 보면 같은 것이다. 혹 편안하게 행하며 혹 이롭게 여겨서 행하며 혹 애쓰고 억지로 힘써서 행하지만 그 공을 이루는 점에서 보면 같은 것이다.

 

2. 세상에 두루 통하는 보편적 가치로서 도가 펼쳐지는 인간관계는 가족에서 출발하여 가까운 이웃을 거쳐 사회정치적인 큰 지평까지 아우릅니다. 각각 나타나는 양상은 다르지만 근본에서 일치하는 것이므로 상대적으로 커 보이는 정치적 인간관계의 이치 또한 “평범함[용庸]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중中].”

 

이러한 도리를 바로 알아[지知] 어질고[인仁] 날래게[용勇] 실천하는 것이 세상에 두루 통하는 보편적인 덕입니다. 세 가지를 따로 나누어 각각 덕이라 이름 하는 것, 그리고 다시 둘로 나누어 지와 행을 논하는 것이 오래된 명사적 독법 전통이지만 중용의 실천적 맥락을 놓치는 안일한 해석입니다.

 

아는 것도 실천입니다. 실천도 아는 것입니다. 실천 없는 지식은 처음부터 지식이 아닙니다. 깨달음 없는 실천은 처음부터 실천이 아닙니다. 적어도 중용을 논하는 자리에서는 지知는 행지行知이며 행行은 지행知行입니다. 실천 없는 명상적, 관념적 중용에는 중도 없고 용도 없습니다. 중용의 외양을 취하더라도 알아차림 없는 동작이라면 가치로서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처한 상황이 있는 까닭에  완벽하지 않은 수준에서 사회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이므로 지니는 현실적 한계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닦아야[수修]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수신修身입니다. 실천 자체를 부단히 최고의 경지로 밀어 올려야 하는 것입니다. 허나 최고의 경지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므로 자신의 실천이, 아니 자신 자체가 ‘평범하다’는 사실을 순간순간 확인하는 것이 수신의 핵심입니다.

 

결국 이 지점에서도 동사적 독법의 필요성이 나타납니다. 반복되는 “일야一也”는 “오직 그렇게 다함없이 닦아 나아가야 한다.”는 역동적 격려요 요청입니다.


3. 북아메리카 원주민 호피족은 연평균 강우량이 200mm 정도인 척박한 애리조나에서 농사를 지으며 삽니다. 비는 절대적 필요이므로 비가 오지 않으면 그들은 기우제를 지냅니다. 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100% 비가 내립니다. 그토록 영험한 까닭은 비가 내릴 때까지 계속해서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 동안 익히 들어온 ‘인디언 기우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행위에 대한 허무개그 식 비아냥거림이 들어 있는 한 이 이야기는 진실을 왜곡한 것입니다. 비가 올 것이라 믿는 긍정적인 마음과 인내를 제시하며 성공하는 삶의 비결을 말하는 자기계발류의 해석은 더욱 교묘하게 진실을 왜곡한 것입니다. 심지어 인식과 실천을 일치시키는 윤리적 의지로 읽는 것조차 진실에서 벗어난 것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비가 올 때까지 계속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개신교를 포함한 통속적 종교의 기도 관념을 투영한 왜곡된 해석일 뿐입니다. 그들은 먼저 진심으로 모든 조건에 감사하는 기도를 한답니다. 그 감사 대상에 끔찍한 가뭄이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입니다. 바로 여기가 여느 기도나 긍정심리학과 첫 번째 다른 점입니다.


그 다음, 그들은 여러 가지 감사의 조건 가운데 하나인 비를 고요히 ‘선택’한답니다. 바로 여기가 여느 기도나 긍정심리학과 두 번째 다른 점입니다. 이 선택은 필요에서 멈춰섭니다. 탐욕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 그들은 선택한 비를 온몸으로, 오감으로 느낀답니다. 바로 여기가 여느 기도나 긍정심리학과 세 번째 다른 점입니다. 이성으로 의지로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가 오는 드넓은 조건을 향하여 자신의 모든 생명감각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비굴하게 애걸하는 기도를 하지 않는답니다. 바로 여기가 여느 기도나 긍정심리학과 네 번째 다른 점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사사로운 이익의 추구가 아닙니다. 그들의 기도는 이웃과 민족 전체를 위한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과 아픈 사람, 그리고 약한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실로 참되고 착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기도가 어찌 당당하지 못할 것입니까. 이 당당한 기도가 어찌 인식과 실천을 하나 되게 하지 못 할 것입니까.


4. 세월호사건 이후 어느 시점부터인가 기도를 시작하여 이제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차고 어두운 바다에 버려진 이백 쉰 명의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기도함으로써 하루 일과를 시작합니다. 그 영혼들을 위해, 아니 그 영혼을 거룩한 영으로 모셔 그들에게 기도합니다. 그들이 이 실재 역사에 함께하기를, 그 함께함으로 말미암아 이 나라가 민주자주통일의 길로 나아가기를, 버려진 사람이 끝내 버린 자까지 구원해내는 대동 세상 오기를 간절히 빕니다. 이 기도가 앎과 삶을 하나로 이어주는 인력인 것을 느끼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새삼 정색하고 점검합니다. 죽임의 조건까지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필요를 넘어서지 않고 있는가? 아이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온 영혼으로, 오감으로 느끼고 있는가? 당당하게 두려움을 꿰뚫어 나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과 대답이 영글어가는 과정에서 중용은 중용이 되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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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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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모두가 우울증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울증은 그냥 없애기만 하면 되는 그런 질병이 아닙니다. 모든 병이 사실은 그렇거니와 우울증 역시 진실의 전령입니다. 우리 모두 무엇엔가 홀려 허깨비로서 삶을 살고 있으니 제발 좀 돌아보라고 외치는 ‘광야의 예언자’입니다. 썩은 가치에 매몰되어 잠자고 있는 영혼을 깨우는 가차 없는 혁명의 소리입니다.

  ·······우울증은 우울한 삶을 가리킵니다. 다양한 증상들은 각기 우울한 삶의 에피소드를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우울증은 우울한 삶을 혁파하라고 절규하는 영혼의 외침입니다. 우울증을 통해 슬픔에, 수치심에, 무기력에, 죄의식에 중독된 자신의 참혹한 모습을 직시할 수만 있다면 우울증이야말로 실로 찬란한 희망입니다.

  우울증이 축복이자 희망이 되어가는 도정에서 우리가 아프게 배우는 것은 다름 아닌 ‘현실성’입니다. 비현실이 현실을 비틀어버린 ‘비극’이 우울증이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볼 줄 아는 눈, 본 그대로를 살 줄 아는 몸, 산 그대로를 사랑할 줄 아는 마음, 이런 도저한 현실성에 깃드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울의 그림자와 아름답게 결별합니다.

  현실성의 요체는 생명의 한계성입니다. 완전한 생명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슬픕니다. 그 슬픔이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하지만 그 아픔이 우리를 간절하게, 사무치게 살도록 하는 힘입니다. 간절함을, 사무침을 각성하라고 간절하게, 사무치게 부르는 음성이 바로 우울증입니다. 불완전함을 보듬어 안고 죽음을 향해 가는, 그러나 꼭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아니 한 번이어서 지극히 아름다운 인생을 사랑한다면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벗이여, 지. 금. 여. 기. 가 비로소 참된 자기 인생을 찾을 수 있는 희망의 시공간입니다. 우울증이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그대의 삶을 고요히 돌아보십시오.(299-300쪽)




1


반쪽 빛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반쪽 어둠을 찾아 영접하는 것이다.


영혼은 본래부터 완전하였다.


2


영혼의 혈거


그 바닥엔


우주먼지로 지어진 밥상 하나


그 위엔


먼지의 밥 한 그릇 숟가락 두 개


바라보며 나누어 먹으며 가끔 입가를 닦아주며



_<소울메이트> 전문 (김선우의 『녹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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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0장 두 번째 문단입니다. 

 

故君子不可以不修身. 思修身 不可以不事親. 思事親 不可以不知人. 思知人 不可以不知天.

고군자불가이불수신. 사수신 불가이불사친. 사사친 불가이부지인. 사지인 불가이부지천.


그러므로 군자는 그 때문에 몸을 닦지 아니할 수 없다. 몸을 닦으려고 생각한다면 부모를 섬기지 않을 수 없다. 부모를 섬기려고 생각한다면 사람을 알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을 알려고 생각한다면 하늘을 알지 않을 수 없다.

 

2. 앞 문단에서 이미 신身을 실천이라 번역한 바 있습니다. 군자가 군자인 증거는 실천에 있습니다. 말과 명상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실천은 생득적인 것도 아니고, 한 번 하면 영구히 자격증이 부여되는 것도 아닙니다. 간단없이 닦아야[수修] 하는 것입니다. 삶의 조건은 그 때 그 때 다르기 때문이지요.

 

이런 실천의 수련은 부모(친족)를 모시는 일에서 처음 사회적 위치를 획득합니다. 이는 단순히 효의 가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부모를 모시는 행위는 부모를 닮는 행위입니다. 부모를 닮아야 하는 까닭은 부모가 바로 사회적 실천의 발원지이기 때문입니다. 부모한테서 중용이 비롯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모시듯 이웃人을 알아 갑니다. 그 이웃은 부모한테서 시작된 생명 연대의 한 지평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안다는 것은 물론 인식의 차원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소통의 앎입니다. 삶을 공유하는 앎입니다. 함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앎입니다. 서로 대동大同의 원리를 깨우치는 앎입니다. 더불어 성찰함으로써 성취를 일궈내는 앎입니다. 결국 그 이웃은 남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천하무인天下無人!

 

이웃을 아는 것은 하늘 이치를 아는 것에 닿아 있습니다. 하늘 이치는 생명의 연대성이니 이것이 곧 인仁이요, 중용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미誠微(제16장)입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숭고한 하늘 이치란 것도 따지고 보면 이웃과 섞는 일상의 삶, 부모 섬기는 평범한 실천이 그 고갱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단도직입으로 요약하자면 실천으로서 내 몸의 움직임이 곧 하늘의 이치와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하늘의 이치는 다시 부모와 이웃에게 구체화되므로 어디 신비한, 아니 허황한 높은 데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 곁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용』은 『신약성서』와 포개집니다. 작은 이웃 한 사람에게 대하는 그 태도를 곧 하느님을 대하는 태도로 평가하겠다는 예수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결국 하늘은 우리 안에, 그것도 몸 안에 있습니다.


3. 하늘, 하면 높이 있는 것으로, 그러니까 수직적 무엇으로 생각하는 유구한 인습을 좇아 우리는 하늘 품은 사람, 하면 고매함을 떠올립니다. 그런 사람이 혹 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여태껏 우리가 말해온 중용의 차원에서 그 있음은 없음과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중용에서 말하는 하늘은 높이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굳이 그런 명사 어법으로 말한다면 옆에 있는 무엇입니다. 정확히 동사 어법으로 말한다면 옆으로 또 옆으로 무한히 번져감입니다. 이런 하늘을 품은 사람은 고매하지 않습니다. 옆 사람, 또 그 옆 사람과 어금버금합니다. 그 어금버금함으로 끊임없이 번져가는 영혼의 의지가 다를 뿐입니다. 그 다름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기존의 어휘가 없습니다. 단도직입으로 “중용하다”는 새 말을 쓰면 좋겠습니다.


이 “중용한”, 그러니까 하늘 품은 사람은 ‘정치경제학 비판’을 영성으로 지닌 사람입니다. 그는 살해 정치, 수탈 경제를 직시합니다. 자유와 평등의 경사傾斜 문제에 관여합니다. 버림받은 사람의 편에 섭니다. 약자의 손을 들어줍니다. 어둠 속에 함께 머무릅니다. 옹골차게 오지랖이 넓은 사람입니다. 하여 그가 빚어가는 하늘은 드넓음the Spaciousness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힌 자, 자기 곳간만 채우는 자, 자기 떨거지만 챙기는 자, 그러기 위해 남을 죽이는 자, 남의 것을 빼앗는 자, 거짓을 일삼는 자가 고매함을 가장하고 세상을 호령합니다. 매판독재분단고착 세력이 바로 그런 자들입니다. 대한민국이 바로 그런 세상입니다. 바로 그 매판독재분단고착 세력에 맞서서, 바로 그 대한민국을 자주민주통일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경계를 드넓음에로 허물어가는 치열한 사람이 진정 하늘 품은 사람입니다.


진정 하늘 품은 사람이 백범을 테러리스트라 하겠습니까. 진정 하늘 품은 사람이 강정마을에 미군기지 건설하는 것을 찬성하겠습니까. 진정 하늘 품은 사람이 쌍용자동차 노동자 해고가 정당하다 하겠습니까. 진정 하늘 품은 사람이 부정과 은폐와 조작으로만 굴러가는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겠습니까. 진정 하늘 품은 사람이 세월호사건, 이제는 지겹다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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