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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혹시 바리공주를 아십니까? 바리공주는 제주도를 제외한 우리나라 전역에서 전승되어 내려온 고대 무가 설화의 주인공입니다. 딸만 일곱인 왕의 일곱째 딸로 태어났다가 버려져서 그 이름이 ‘바리데기’입니다. 자신을 버린 아비가 죽을병에 걸리자 아비를 살리기 위해 바리공주는 다시 한 번 스스로 버려 저승길로 갑니다. 결국 생명수를 구해 와 아비를 살리고 나중에는 죽은 자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는 구세주가 되었답니다. 버려진 존재이지만 결국 버린 자까지 구원하는 바리공주의 가없는 보듬기. 이는 여성이 지니는 공존과 포용의 생명 감각이 평상시에는 삶의 풍요로, 위기에는 구원의 힘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리공주 이야기는 심청전, 춘향전, 박씨전, 옥단춘전 등 수많은 이야기로 모습을 바꾸어 전승되면서 우리 가슴의 밑바닥에 깊은 울림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리공주는 이 땅 모든 여성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된 것입니다.
설화의 세계에서 실제 역사의 세계로 건너오면 거기에는 황진이가 있습니다. 황진이는 바리공주의 화신입니다. 황진이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기녀의 신분으로 봉건적 양반 사회의 온갖 질서를 가로질러, 자신을 버린 자들의 가치를 훌쩍 뛰어넘습니다. 황진이의 거침없는 도발과 자유혼. 이는 여성이 지니는 도도한 생명 감각이 시대의 질곡을 풀고 새로운 지평을 창조하는 예술적 상상력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황진이에 이르러 여성의 생명력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메시지가 한층 더 미학적이고 극적인 면을 더합니다.
바리공주와 황진이를 결합한 전형이 21세기가 맞은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우리에게 전하는 이런 감동적 메시지는 여성이 버림받은, 버림받는, 버림받을 존재라는 칼 같은 진실에서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여성이 장구한 남성문명 체제 속에서 그 존재를 스스로 부정하는, 자기모독의 무의식을 지니도록 강요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뼈에 사무치게 인정하지 않는 한 모든 노력은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이 문명 속에서 여성은 그 자체로 우울증입니다. 이를 받아들여야 비로소 이 문명을 극복하는, 아니 보듬어 안고 비상하는 대승이 나올 것입니다. 바리공주도 황진이도 결코 신선놀음 한 게 아닙니다!(136-137쪽)
“나이 스물여섯, 자살이 아름다워 보이는 나이.”
어제까지 웃는 표정의 가면을 쓰고 있던 소녀들이 화면의 절벽 밖으로 발을 디뎌버렸다. 그녀들을 둘러싼 웃음의 외피가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그 안의 울음은 점점 더 낮게 잦아든다. 한때 그녀들의 이미지를 타전했던 매체들은 외친다. 그녀들을 세계 바깥으로 몰아낸 우울증을 치료하라! 우울증이 극단에 이르러 자살이라는 ‘행위로의 이행’이 이루어졌을 때, 그 사건에 기생하여 그것을 서사화하는 모든 매체들조차 치료의 미덕을 설교한다. 이것은 가장된 행복, 가장된 조증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관리술에 불과하다.
현재 한국의 문화 향유자들이 즐겨 찾는 싸이월드의 미니 홈피나 각종 포털 사이트의 블로그에는 자신의 행복을 노출하려는 과장된 제스처가 넘쳐난다. 극단적인 이 조증mania은 집단적 광기mania와 다름없다. 명랑함과 조증은 나의 세계가 안전하다고 믿고 싶은 자아의 방어기제일 뿐이지 자아가 현실적으로 경험하고 지각하는 정서적 상태가 전혀 아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무기력한 수동성에 빠지지 않기 위한 관리의 제스처라 부를 만하다. 조증에 드리워진 우울증의 그림자.
허윤진 비평집 『5시 57분』에 실린 <춤추는 우울증>의 일부(128쪽)입니다. 우울증 치료라는 관리술을 엮음의 매개로 하는 조증과 우울증이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고 있는 사회 풍경을 정확히 묘파한 장면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충분히 암시되어 있습니다. 다만 글의 전체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어제까지 웃는 표정의 가면을 쓰고 있던 소녀들이 화면의 절벽 밖으로 발을 디뎌버”린 까닭이 무엇인지에 관한 언급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문제를 정색하고 제기해야만 합니다.
왜, 하필 스물여섯의 그녀들이란 말입니까? 그녀들은 그러면 어쩌다가 절벽 밖으로 발을 디뎌버렸단 말입니까?
사람을 조증, 그러니까 광기로 몰아가는 ‘투명사회’(한병철)의 지배 메커니즘은 그 몰아감에도 차별을 둡니다. ‘금 수저’를 모는 방법이 다르고 ‘흙 수저’를 모는 방법이 다릅니다. 수많은 종류의 ‘흙 수저’가 있으되 남성가부장적사회에서 그녀들은 당연히 ‘흙 수저’입니다. 아무리 ‘금 수저’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다시 그 안에서는 ‘흙 수저’입니다. 혹시 예외적으로 ‘금 수저’ 대우를 받는 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 경우는 남성화 또는 버금 남성화된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거의 대부분 그녀들은 바리데기일 따름입니다. 그녀들은 존재 “그 자체로 우울증입니다.” 절벽 밖으로 발을 디뎌버릴 수밖에 달리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그것은 안 될 일입니다. ‘투명사회’는 호들갑을 떨면서 그녀들의 덜미를 낚아채어 치료에 투입합니다. 수탈할 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 토건사업은 집요하게 되풀이되어야만 합니다. 조증으로 내몰리든 우울증으로 버려지든 그녀들에게는 근본적 차이가 없습니다. 목숨 다하는 그 순간까지 쌍끌이 수탈에 당하는 것이 운명입니다. 모진 운명의 사슬을 어찌하면 끊을 수 있을까요?
운명을 바꾸는 길은 그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합니다.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순응하거나 체념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운명을 바르게 문제 삼아서 옹골차게 대응한다는 말입니다. 운명을 제대로 “받아들여야 비로소·······극복하는, 아니 보듬어 안고 비상하는 대승이 나올 것입니다.” 인간이 홀로 존재하지 않듯 운명 또한 개인 단위로 분획되어 있지 않습니다. 운명공동체라는 진부한 표현에는 결코 빛바래지지 않는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바리데기로서 그녀들의 운명에 나를 야무지게 깃들게 하여 슬픔의 생명연대에 참여하는 길 말고 다른 길은 없습니다.
슬픔의 생명연대는 그러므로 두 가지 결단을 요구합니다. 하나는, 낮은 삶을 선택하고 그 ‘욕됨’을 견디는 것입니다. 높은 삶 그 자체로 죄악인 대한민국 오늘에서 낮은 삶을 의롭다 해야 하겠지만 저들이 ‘근본 없는 것들’이라 업신여기니 그 업신여김을 달게 받는다는 것입니다. 둘은, 삶의 모든 국면에서 여러 겹, 여러 결의 공유가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물질은 물론 지식과 문화까지 광범위한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 둘 모두를 일찍이 실행에 옮긴 분이 다름 아닌 원효입니다. 원효를 그 삶으로 이끈 분이 다름 아닌 요석입니다. 요석과 원효 이야기는 김선우의 장편소설 『발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필독(강신주의 해제는 췌언이므로 제외)서입니다. 김선우가 그려낸 7세기 원효와 요석의 아미타림에 영혼을 디디고 21세기 우리는 각자 원효와 요석이 되어 바리공동체 꿈을 꾸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