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성(성) 회복 문제, 그 고갱이로서 여성우울증 문제가 우리 시대의 긴절한 현안으로 떠오르는 까닭에는 한 번 더 접힌 논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성이 모든 인간 생명의 근원이라는 사실에서 비롯합니다. 여성(성) 문제가 모성(성) 문제로 진화하는 지점이지요. 여성의 생명 자체와 그 생명 감각이 가장 치명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은 바로 여성이 잉태하고, 낳고, 키워내야 하는 미성숙기 생명이기 때문에 이 문제는 미래와 현재를 한꺼번에 쥐고 흔드는 중대한 사안입니다. 무엇보다 관건은 이들의 정신건강 여하입니다. 최근 들어 다양한 스펙트럼의 발달장애는 물론이고 어린이우울증, 청소년우울증 등이 그려내는 가파른 상승곡선은 깊은 우려를 자아내게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 사회의 청소년우울증 문제는 매우 심각한 국면을 맞고 있습니다.·······아이들이·······더 힘들어하는 게 있습니다. 자신의 상황을 호소할 때 어른, 특히 어머니가 보이는 반응입니다.

  “뭐, 우울증? 이마에 피도 안 마른 게, 무슨…. 공부나 열심히 해!”

  말해 봐야 소용없다는 절망감이 아이들을 더욱 큰 고통으로 몰아넣습니다. 제 때, 제대로 치료를 받아도 어려울 텐데 이렇게 마음의 고통 자체가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의 상처는 더욱 깊어지게 마련입니다. 어른들한테서 자신의 고통 자체를 부정당한 아이들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의지로 의사를 찾아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상황에 있을 때 아이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좌절감이 문제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출구를 찾지 못할 때 아이들은 자신을 놓아버립니다. 게임을 비롯한 중독이 아이들을 급습하는 게 바로 그 시점입니다. 이런 데도 어른들은 아이들의 중독만을 욕합니다. 중독은 일탈이기에 앞서 포기이고 절망입니다.·······

  이 문제를 대할 때 다만 입시제도 따위를 원인으로 지목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는 생명말살적인 남성가부장적 자본주의 문명 전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해결됩니다. 그 주의가 다름 아닌 여성(성), 더 분명하게 모성(성)의 복원이란 화두 들기입니다. 문명의 주체인 우리, 어른, 특히 어머니로서 여성 자신이, 병에서, 죽음에서, 깨어 일어나 아이들의 아픈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여성이 남성문명의 헤게모니에 매몰되어 스스로 여성(성)과 모성(성)을 놓치고 있는 현실을 직면해야 합니다. 여성이, 엄마가 우울증의 포로가 된 상황에서 어찌 아이들의 현실에 제대로 귀 기울일 수 있겠습니까. 엄마들은 자신이 피해자이자 가해자란 사실을 불에 덴 듯 각성해야 합니다. 지금 아이들이 우울증으로 죽어갑니다, 엄마를 살려주세요!(138-141쪽)


청소년 자살률이 세계1위인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모르지 않으면서 아무도 진지하게 입대지 않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고등학생 250명이 한꺼번에 침몰하는 배에 갇힌 채 죽어가는 광경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보았으면서 아무 것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이제 그만 하자며 입 다무는 우리가 오늘 대한민국 시민입니다. 자살이라 표현하지만 사회적인 타살이 분명합니다. 사고라고 우기지만 국가가 고의로 일으킨 사건이 맞습니다. 그래서 서로서로 침묵하는 것입니다. 추악하고 비겁한 카르텔입니다. 어른들은 이렇게 아이들을 죽여가고 있습니다. 어른들의 맨 앞줄에 엄마들이 서 있습니다. 엄마들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엄마들의 무지는 사회가, 국가가 만들어낸 어둠의 일부입니다. 사회국가적 어둠 속에서 제 새끼들을 죽일 때 엄마들은 스스로를 또한 죽이고 있습니다. 엄마들의 자살 역시 사회국가적 타살임은 물론입니다. 엄마들을 살려야 합니다. “엄마가 살아야 나라가 삽니다.” 허름해 보이는, 심지어 우스워 보이는 이 말 한 마디가 정녕코 수천만의 생사를 가릅니다.


아동기와 청소년기에 있는 두 딸을 둔 중년 여성이 있습니다. 그는 상담 중에 자기가 딸들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몹시 아파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심한 죄책감을 여러 차례 호소했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볼 때 상처 입힌 엄마의 마음으로만 보지 말고 상처 입은 아이들의 마음으로도 보라고 조언했습니다. 다음 주에 그가 와서 조언대로 했더니 아이들에게서 그 시절의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여전히 죄책감이 심했느냐고 제가 물었습니다. 그가 뽀얗게 웃으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습니다. 죄책감은 대부분 진정한 성찰에서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근거 없이 들어와 굳어진 기준으로 가한 비판에 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처 입은 아이들 속에서 상처 입은 자신을 발견하자 그는 두 번째 큰 눈물을 쏟아내었습니다. “둘째 아이가 어렸을 때처럼 재워달라기에 자장가를 부르고 다독거려주었습니다. 다음 순간 둘째 아이가 그 조그만 손으로 제 등을 다독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목하 그 아이들은 서로 다독거리면서 함께 치유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그의 친정어머니한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전형적인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야!’ 어머니였습니다. 자애로운 모성 어법의 행간에 폭력과 억압이 쏴아 소리를 내며 흘러갔습니다. 어머니는 그 짧은 시간에도 반복해서 돈과 체면 중심의 가부장 윤리를 설파하며 딸의 병을 인정하고 좋은 치료를 의뢰한다기보다 잘못을 교정해주기를 당부하는 속내를 드러내 보였습니다. 돈 걱정 때문에 치료 안 받겠다 하거든 연락 달라며 전화번호를 불러준 뒤, 재삼재사 부탁하는 말을 끝으로 어머니는 수화기를 내려놓았습니다. 그가 제게 온 곡절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던 통화였습니다. 통화를 끝낸 다음 한참 동안 그 음성과 말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문장들로 이어져 있지만 우리사회의 모순과 부조리가 무르녹아 있어 거대한 어둠과 절망을 가득 품은 말들이었습니다. 거꾸로, 이런 말들은 불의한 권력과 사악한 자본을 키워내 온 찰진 자양분이기도 했습니다. 문제가 깊을수록 각성은 멀어지고 중독의 유혹이 밀착해오는 현실 앞에서 무명의 의자는 그저 율연해질 따름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혹시 바리공주를 아십니까? 바리공주는 제주도를 제외한 우리나라 전역에서 전승되어 내려온 고대 무가 설화의 주인공입니다. 딸만 일곱인 왕의 일곱째 딸로 태어났다가 버려져서 그 이름이 ‘바리데기’입니다. 자신을 버린 아비가 죽을병에 걸리자 아비를 살리기 위해 바리공주는 다시 한 번 스스로 버려 저승길로 갑니다. 결국 생명수를 구해 와 아비를 살리고 나중에는 죽은 자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는 구세주가 되었답니다. 버려진 존재이지만 결국 버린 자까지 구원하는 바리공주의 가없는 보듬기. 이는 여성이 지니는 공존과 포용의 생명 감각이 평상시에는 삶의 풍요로, 위기에는 구원의 힘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리공주 이야기는 심청전, 춘향전, 박씨전, 옥단춘전 등 수많은 이야기로 모습을 바꾸어 전승되면서 우리 가슴의 밑바닥에 깊은 울림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리공주는 이 땅 모든 여성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된 것입니다.

  설화의 세계에서 실제 역사의 세계로 건너오면 거기에는 황진이가 있습니다. 황진이는 바리공주의 화신입니다. 황진이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기녀의 신분으로 봉건적 양반 사회의 온갖 질서를 가로질러, 자신을 버린 자들의 가치를 훌쩍 뛰어넘습니다. 황진이의 거침없는 도발과 자유혼. 이는 여성이 지니는 도도한 생명 감각이 시대의 질곡을 풀고 새로운 지평을 창조하는 예술적 상상력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황진이에 이르러 여성의 생명력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메시지가 한층 더 미학적이고 극적인 면을 더합니다.

  바리공주와 황진이를 결합한 전형이 21세기가 맞은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우리에게 전하는 이런 감동적 메시지는 여성이 버림받은, 버림받는, 버림받을 존재라는 칼 같은 진실에서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여성이 장구한 남성문명 체제 속에서 그 존재를 스스로 부정하는, 자기모독의 무의식을 지니도록 강요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뼈에 사무치게 인정하지 않는 한 모든 노력은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이 문명 속에서 여성은 그 자체로 우울증입니다. 이를 받아들여야 비로소 이 문명을 극복하는, 아니 보듬어 안고 비상하는 대승이 나올 것입니다. 바리공주도 황진이도 결코 신선놀음 한 게 아닙니다!(136-137쪽)


  “나이 스물여섯, 자살이 아름다워 보이는 나이.”

  어제까지 웃는 표정의 가면을 쓰고 있던 소녀들이 화면의 절벽 밖으로 발을 디뎌버렸다. 그녀들을 둘러싼 웃음의 외피가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그 안의 울음은 점점 더 낮게 잦아든다. 한때 그녀들의 이미지를 타전했던 매체들은 외친다. 그녀들을 세계 바깥으로 몰아낸 우울증을 치료하라! 우울증이 극단에 이르러 자살이라는 ‘행위로의 이행’이 이루어졌을 때, 그 사건에 기생하여 그것을 서사화하는 모든 매체들조차 치료의 미덕을 설교한다. 이것은 가장된 행복, 가장된 조증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관리술에 불과하다.

  현재 한국의 문화 향유자들이 즐겨 찾는 싸이월드의 미니 홈피나 각종 포털 사이트의 블로그에는 자신의 행복을 노출하려는 과장된 제스처가 넘쳐난다. 극단적인 이 조증mania은 집단적 광기mania와 다름없다. 명랑함과 조증은 나의 세계가 안전하다고 믿고 싶은 자아의 방어기제일 뿐이지 자아가 현실적으로 경험하고 지각하는 정서적 상태가 전혀 아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무기력한 수동성에 빠지지 않기 위한 관리의 제스처라 부를 만하다. 조증에 드리워진 우울증의 그림자.


허윤진 비평집 『5시 57분』에 실린 <춤추는 우울증>의 일부(128쪽)입니다. 우울증 치료라는 관리술을 엮음의 매개로 하는 조증과 우울증이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고 있는 사회 풍경을 정확히 묘파한 장면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충분히 암시되어 있습니다. 다만 글의 전체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어제까지 웃는 표정의 가면을 쓰고 있던 소녀들이 화면의 절벽 밖으로 발을 디뎌버”린 까닭이 무엇인지에 관한 언급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문제를 정색하고 제기해야만 합니다.


왜, 하필 스물여섯의 그녀들이란 말입니까? 그녀들은 그러면 어쩌다가 절벽 밖으로 발을 디뎌버렸단 말입니까?


사람을 조증, 그러니까 광기로 몰아가는 ‘투명사회’(한병철)의 지배 메커니즘은 그 몰아감에도 차별을 둡니다. ‘금 수저’를 모는 방법이 다르고 ‘흙 수저’를 모는 방법이 다릅니다. 수많은 종류의 ‘흙 수저’가 있으되 남성가부장적사회에서 그녀들은 당연히 ‘흙 수저’입니다. 아무리 ‘금 수저’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다시 그 안에서는 ‘흙 수저’입니다. 혹시 예외적으로 ‘금 수저’ 대우를 받는 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 경우는 남성화 또는 버금 남성화된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거의 대부분 그녀들은 바리데기일 따름입니다. 그녀들은 존재 “그 자체로 우울증입니다.” 절벽 밖으로 발을 디뎌버릴 수밖에 달리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그것은 안 될 일입니다. ‘투명사회’는 호들갑을 떨면서 그녀들의 덜미를 낚아채어 치료에 투입합니다. 수탈할 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 토건사업은 집요하게 되풀이되어야만 합니다. 조증으로 내몰리든 우울증으로 버려지든 그녀들에게는 근본적 차이가 없습니다. 목숨 다하는 그 순간까지 쌍끌이 수탈에 당하는 것이 운명입니다. 모진 운명의 사슬을 어찌하면 끊을 수 있을까요?


운명을 바꾸는 길은 그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합니다.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순응하거나 체념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운명을 바르게 문제 삼아서 옹골차게 대응한다는 말입니다. 운명을 제대로 “받아들여야 비로소·······극복하는, 아니 보듬어 안고 비상하는 대승이 나올 것입니다.” 인간이 홀로 존재하지 않듯 운명 또한 개인 단위로 분획되어 있지 않습니다. 운명공동체라는 진부한 표현에는 결코 빛바래지지 않는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바리데기로서 그녀들의 운명에 나를 야무지게 깃들게 하여 슬픔의 생명연대에 참여하는 길 말고 다른 길은 없습니다.


슬픔의 생명연대는 그러므로 두 가지 결단을 요구합니다. 하나는, 낮은 삶을 선택하고 그 ‘욕됨’을 견디는 것입니다. 높은 삶 그 자체로 죄악인 대한민국 오늘에서 낮은 삶을 의롭다 해야 하겠지만 저들이 ‘근본 없는 것들’이라 업신여기니 그 업신여김을 달게 받는다는 것입니다. 둘은, 삶의 모든 국면에서 여러 겹, 여러 결의 공유가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물질은 물론 지식과 문화까지 광범위한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 둘 모두를 일찍이 실행에 옮긴 분이 다름 아닌 원효입니다. 원효를 그 삶으로 이끈 분이 다름 아닌 요석입니다. 요석과 원효 이야기는 김선우의 장편소설 『발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필독(강신주의 해제는 췌언이므로 제외)서입니다. 김선우가 그려낸 7세기 원효와 요석의 아미타림에 영혼을 디디고 21세기 우리는 각자 원효와 요석이 되어 바리공동체 꿈을 꾸어야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역설·······

  남성의학·······형식논리에 기대어 병을·······적으로 취급하는·······의사는 전사戰士로서 악한 병마와 싸워 이겨야 하는 존재입니다. 전사에게는 말(언어)이 필요 없습니다. 남성의학의 주체가 말을 꺼리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을 꺼린다는 것은 은유를 꺼린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말은 은유이기 때문입니다. 은유를 꺼린다는 것은 역설을 꺼린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유의 절정은 역설이기 때문입니다. 역설은 형식논리의 무덤입니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은유에 능하다는 것입니다.·······은유에 능하다는 것은 역설을 향해 활짝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가 여성·······여성의학의 시공간입니다. 여성은 그 몸에, 마음에 삶에 역설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월경-임신-출산-육아-완경이 바로 그 역설입니다.

  월경이 왜 역설일까요? 출혈은 죽음을 의미하니 달마다 죽습니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주기적으로 죽음을 용인합니다. 여성은 삶과 죽음이 맞물리는 제의를 집전하는 제사장입니다. 임신이 왜 역설입니까? 텅 빈 제 몸 한가운데에 구토를 일으킬 만큼 낯선 다른 생명을 용인하여 채워 넣습니다. 여성은 비움과 채움이 맞물리는 제의를 집전하는 제사장입니다. 출산이 왜 역설입니까? 출산의 아픔은·······밀라레빠의 고통을 넘어섭니다.·······동시에 지고한 깨달음痛悟이자, 기쁨입니다. 아픔과 기쁨, 괴로움과 깨달음이 맞물리는 제의를 집전하는 제사장입니다. 육아가 왜 역설입니까? 어머니는 아기의 우주입니다.·······그 우주는 깨집니다.·······여성은 나와 남, 일치와 단절이 맞물리는 제의를 집전하는 제사장입니다. 완경이 왜 역설입니까? 달마다 죽던 일은 멈추었습니다.·······그러나 생명을 짓던 일 또한 멈추었습니다.·······다시 여성은 삶과 죽음이 맞물리는 제의를 집전하는 제사장입니다.

  자신이 역설 속에 있고 또 역설을 창조하는 여성의 생명 감각으로 사람과 삶, 그리고 병을 보면 그 눈에 박멸해야 할 적이란 없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맞은편의 존재는 죽여야 한다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치졸한 유아기적 형식논리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서로 다른 진실이 말을 통해 은유로 화해하고 역설로 하나가 됩니다. 의사와 환자 사이, 건강과 병 사이의 대립적 구별은 사라집니다.·······(134-135쪽)


본디 안식년이란 고대 히브리 역법에서 7년 주기의 마지막 해로서, 땅을 갈지 않고 묵혀 두고, 가난한 자와 짐승들을 먹이고, 빚을 탕감해 주고, 종들을 해방시키는 사회적 휴식 제도였습니다. 이것이 현대 산업사회에 와서는 재충전의 기회를 갖도록 하기 위해 주는 1년 정도의 장기 휴가로 일반화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최근 들어 이 문제를 조금 더 깊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의사는 그다지 행복한 직업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든 병든 사람과 마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병든 사람은 그것이 몸이든 마음이든 아픔 속에 있기 때문에 날카롭고 급하며 심지어 이기적이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말이 앞서고 상대방의 말은 뒷전이기 쉽습니다. 가령 진료 받으러 와서 온갖 증상을 나열하고 난 뒤 반드시 붙이는 ‘이거, 왜 이래요?’ 라는 질문은 의사의 대답을 듣기 위한 진정한 질문이 아닙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아픈 거요? 얼른 고쳐요!’ 이런 말입니다. 통증의 진실을 알려서 참된 건강으로 인도하는 의사의 말을 미리 차단하는 전략이 담겨 있습니다. 통증이 소통을 제압하는 상황입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진료실 풍경입니다. 이 풍경 속에서 오랜 날들을 견디다 보면 어느 순간 수직으로 치솟는 단절감, 심지어 분노를 감지합니다. 얼핏 보면 환우들을 향한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소통의 부재에 있습니다. 그 소통의 부재는 모순만 노정되지 역설로 넘어가지 못하고 가로막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모순의 노정이란 ‘그렇다’와 ‘아니다’가 적대적으로 마주 볼 뿐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양자가 ‘그러나’를 사이에 두고 그저 존재적으로 공존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와 ‘아니다’가 ‘그러므로’를 매개로 하나의 생명장生命場으로 들어서는 것을 역설이라고 합니다. 역설은 관계를 맺은 상태입니다. 관계가 맺어져야 비로소 소통이 성립합니다. 의사가 환우와 함께 역설을 빚어내지 못하고 모순 속에 마주서 있기만 할 때, 그것을 더는 견뎌내기 힘들 때, 바로 이때, 안식년이 필요합니다!


‘그렇다’와 ‘아니다’ 이야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하겠습니다. 환우의 통증이 ‘그렇다’이고 의사의 치료가 ‘아니다’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환우의 통증은 부정되어야 할 나쁜 것이므로 주류 의학적 사고방식에서는 앞뒤가 바뀝니다. 주류의학은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순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때려 부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모순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실재의 모순은 노정된 채로 있습니다. ‘통증을 잡는 것이 병을 치료하는 것이다’라는 주류의학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오류입니다. 통증은 본질적으로 병을 알려주는 전령입니다. 없애야 할 무엇이 아니라 경청해야 할 무엇입니다. 경청은 ‘그렇구나!’입니다. ‘그럴만해서 그렇다’입니다. 나아가 통증은 일차적·자체적 치료행위입니다. 없애야 할 무엇이 아니라 응원해야 할 무엇입니다. ‘그래, 잘하고 있어! 도와줄게.’입니다. ‘그렇다’를 대뜸 부정해서 ‘아니다’로 만드는 것은 진정한 치료가 아닙니다. ‘그렇다’를 ‘그렇다’고 인정해줌으로써 스스로 본디 건강한 상태인 ‘아니다’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진정한 치료입니다. 모순의 노정을 ‘그러나’에 터하여 폭력으로 해체하는 주류의학은 부분이 전체를 지배하는 독재 의학입니다. 모순의 노정을 ‘그러므로’에 터하여 역설로 해결하는 의학이 진정한 의학입니다. 사실, 역설도 그리 탐탁한 표현은 아닙니다. 원효의 화쟁이 월등한 표현입니다. 더 월등한 표현은 [아래아 한]입니다. [아래아 한]의 진실은 이렇습니다.


“그렇다. 그러므로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雪山無人

海無生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감성적 직관·······

  남성과 여성이 대립할 때 팽팽한 평행선을 달리는 까닭은 여성은 공감을 요구하고, 남성은 수긍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공감은 감성의 문제이고, 수긍은 이성의 문제입니다. 여성들끼리 수다문화가 형성될 수 있는 기반은 공감에 터 잡은 맞장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남성들끼리 계약문화가 형성될 수 있는 기반은 수긍에 터 잡은 맞바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감은 말의 내용이 지니는 울림에 대한 직관적 반응입니다. 수긍은 말의 내용이 지니는 타당성에 대한 이지적 반응입니다.······

  ·······감성적 직관으로 사람과 삶, 그리고 병을 느끼는 것은·······이성으로 판단하고 인과관계를 추적하는 일과는 다릅니다. 이성은 보는 감각이고, 직관은 듣는 감각입니다.·······들음으로 시작하는 의학은 겸손합니다. 환자와 따스한 공감, 평등한 소통, 나아가 일치와 통섭을 지향합니다. 눈물이 있고 환희가 있는 세계를 꿈꿉니다. 보고 판단하는 의학으로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이상입니다.

  이성적 판단은 분석과 평가라는 개념의 매개가 필요합니다. 이 개념의 매개 때문에 이성은 생명의 본령에 더듬거리며 접근해야 합니다. 쓱쓱 나아갈 수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거침없이 다가가지 못합니다. 결국 절대고수가 될 수 없습니다.·······절대고수는 자기가 하는 일에서 소외되는 법이 없습니다.(132-133쪽)


20대 중반의 청년 하나가 제법 오랜 기간 상담하러 옵니다. 물론 초기 몇 달을 제외하고는 오다 말기를 반복하며 시난고난 흘러온 세월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병적 이성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삶의 모든 부분을 갈기갈기 찢어놓습니다. 올 때마다 쏟아내는 폭포수 같은 말들은 거의 모두 자기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래서 얼마나 무가치한 인간인가에 대한 것들입니다. 그러는 한편 괴로움에 빠진 자기 자신을 무조건 받아들여줄 사람을 찾습니다. 정작 받아들여지면 거기에 공감하지 못하고 또 다른 사람을 찾습니다. 끊임없이 떠도는 것이 불가피합니다. 물론 그는 의사인 제 진단과 처방조차 깊이 공감하지 못합니다. 병적 이성에 갉아 먹혀 파리해진 이성으로 겨우 수긍만하다가 속절없이 놓치고 맙니다. 훈습의 가능성이 닿지 않는 긴 시간을 헤매다가 가뭄에 콩 나듯 찾아오기를 거듭합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는 ‘부모자아’가 내면화한 허구적 이성에 제압되어 자기 자신을 분석·비판하면서 괴로워하고 있을 것입니다. 안타깝습니다. 아픕니다.


흔히 말합니다. 냉철한 이성과 불굴의 의지로 고통을 이겨낸다고. 그러나 그렇게 이겨내진 고통은 사실 별 것 아닙니다. 그 정도에 냉철한 이성과 불굴의 의지라는 표현을 쓴 것은 알량한 승자의 허세입니다. 냉철한 이성도 불굴의 의지도 작동할 수 없는 엄혹한 정서적 통증으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모독입니다. 여전히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조롱입니다. 냉철한 이성도 불굴의 의지도 모두 무력하게 만드는 정서적 통증이라는 것이 과연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들에게 되묻습니다. 냉철한 이성도 불굴의 의지도 모두 무력하게 만드는 암은 인정하면서 어찌 그런 우울증은 인정하지 않는가? 정서의 통증이 몸의 통증에 비해 그렇게 하찮은 것인가? 그렇다면 냉철한 이성과 불굴의 의지는 어디서 나오는 힘인가? 저 통속한 승자의 허구적 논리는 정서나 감성에 대한 무지와 무시에서 나온 것입니다.


저는 정서나 감성에 대한 독자적인 쓰임새를 정해두고 있습니다. 정서는 질병, 그러니까 고통으로 열려진 감정의 가능태를 말하며 감성은 건강, 그러니까 소통으로 열려진 감정의 가능태입니다. 둘의 실재가 달라서 그리 구분한 것이 아닙니다. 비대칭의 대칭으로 나타나는 사건을 언어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한 방편입니다. 하여 제 경우 감성적 통증이나 고통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서적 직관이나 공감이라는 표현도 쓰지 않습니다. 여기서 두 말의 공통 기반인 중용적 감정이라는 말을 이성과 의지에 마주 세워서 그것의 정체를 밝혀보겠습니다.


감정은 몸에서 일어난 최초의 마음 사건입니다. 반대로 마음에서 일어난 최초의 몸 사건입니다. 감정은 몸이자 마음입니다. 감정은 몸만도 아니고 마음만도 아닙니다. 변방의 마음입니다. 변방의 몸입니다. 마음 가운데 가장 단단하고 셉니다. 몸 가운데 가장 말랑말랑하고 여립니다. 감정을 거치지 않고 몸이 마음으로 가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감정을 거치지 않고 마음이 몸으로 가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런 진실을 놓칠 때 질병이 생깁니다. 감정의 상처가 상처의 본질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성도 의지도 상처 받지 않습니다. 이성과 의지가 흔들릴 때 상처받는 것은 이성과 의지 자체가 아니라 바로 감정입니다. 그 방향의 감정을 정서라고 이름 한 것입니다.


이 진실을 놓칠 때 치유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감정의 치유가 치유의 본질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성도 의지도 치유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성과 의지가 흔들릴 때 치유해야 하는 것은 이성과 의지 자체가 아니라 바로 감정입니다. 그 방향의 감정을 감성이라고 이름 한 것입니다.


정서의 통증이나 고통을 치유하려 할 때 요청되는 것은 냉철한 이성과 불굴의 의지가 아닙니다. 감성적 직관이나 공감입니다. 감성적 직관이나 공감으로 정서의 통증이나 고통이 치유되면 이성과 의지가 정상 작동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닙니다. 인간 생명이 자라온 역사의 과정이 그렇다고 말해줍니다. 인간 생명이 지니는 에너지의 역학관계 또한 그렇다고 말해줍니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선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정에서 넘어진 자, 감정을 짚고 일어섭니다. 정서적 통증으로 넘어진 자, 감성적 직관, 그러니까 공감을 짚고 일어섭니다. 같은 것이 같은 것을 치료합니다.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치료합니다. 바로 이것이 동종의학입니다. 아니 공현의학입니다.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치료되지 않는 위중한 질병에게 남은 단 하나의 길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울증은 바야흐로 우리에게 최후의 불치병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하루에 40명씩 자살하는 나라입니다. 냉철한 이성과 불굴의 의지를 지닌 자들은 오로지 돈과 권력에 눈멀어 있는 나라입니다. 이 대한민국에서 우울증을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그대, 넘어져서 아픈, 똑같아서 서러운, 예은이 이름만 떠올려도 왈칵 눈물 나는 사람입니다. 감성적 직관으로 일어섭니다. 공감으로 나아갑니다. 기대 없는 설렘으로 함께 갑니다. 그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