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생물학적으로 퇴화하고 인류의 목적이 사라지는 때가 언제인지 내다보는 예언을 한 오가논다족 추장 오렌 라이언스는 그 징조 중 하나로 아이들이 버려지고 무시될 것을 꼽았다.(폴 호컨 탄소라는 세계316) <엡스타인 아이들이 징조다>라는 글 들머리에서 한 말이다. 하나가 더 있다. “바람이 유례없이 세차게 불면서 울부짖을 것이다.” 나는 처음 읽을 때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아서다. 바로 다음 순간 나는 산불을 떠올렸다.

 

강릉원주대학교 생물학과 이규송 교수에 따르면 대형 산불이 일어나 중심부 온도가 1천도 이상 치솟으면 공기가 급격히 팽창해 강력한 상승기류가 형성되고, 공기가 빠져나간 지표면이 급속하고 강력한 국지 저기압 상태에 놓인다. 이때 주변 차가운 공기가 맹렬하게 빨려들어 예측 불가능한 돌풍을 일으킨다. 이로 말미암아 진화가 더 어려워져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상황은 악순환으로 치달린다. 오렌 라이언스가 영성으로 떠올린 바가 바로 이 장면 아니었을까?


산불은 이미 지구 차원 문제가 돼버렸다. 단순히 산림 피해에서 그치지 않고 생태계 전반을 심각하게 타격하는 거대 악조건이다. 인류가 자초한 기후 위기 결과요 원인이다. 이는 분명히 지구가 생물학적으로 퇴화하고 인류의 목적이 사라지는 때임을 알리는 울부짖음이다. 숲이 살해당하면서 토하는 피 울음이다. 이 피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니 않는 일이 죄다. 누구보다 이 문제를 통감한 천하 시인 김선우는 시 <지구라는 크라잉 룸>에서 이렇게 울었다.

 

...

오늘도 어김없이 지구 어디선가

죄없이 아이들이 죽고

...

죄없이 숲이 벌목되고

죄없이 작은 것들의 노래가 짓이겨져 파묻힌다

...

한때 아름다웠던 별

어디에 무릎 꿇어야 죄를 덜 수 있나?

...

지구라는 크라잉 룸

당신 안에서 우느라 당신의 울음을 미처 듣지 못했다

 

지구를 크라잉 룸으로 만든 범인은 인류다. 인류세(Athropocene)라는 이름이 그래서 붙었다. 틀렸다. ‘죄없이 죽은 아이들은 죄 없다. 죄없이 죽임당한 거북섬(아메리카) 선주민은 죄 없다. 인류세가 아니라 제국세(Imperialicene). 더 엄밀히 말하자면 제국-헤게모니-블록-. 더더욱 엄밀하게 말하자면 트럼프-머스크-엡스타인-. 인류세란 말은 죄 없는 사람들에게 자기 죄를 투사, 그러니까 뒤집어씌우는 앵글로아메리카 제국 자본가 범죄를 은폐한다.

 

현실에서는 제국에 머리 조아린 식민지 특권층 부역 세력이 더 야비하게 악랄하다. 최병성 초록별생명평화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산불은 산림청 소행이다; 산림청을 둘러싸고 있는 수백 개 산하·이익단체와 야합해 활엽수를 살해하고 소나무를 강제로 심어 산불을 유도한다. 온 국민에게 산불 예방을 계몽하며 자기 죄를 투사한다. 귀마가 숲이, 지구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리 만무다. 귀 밝은 자는 여기서도 풀 사람뿐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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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관 가는 일은 말할 나위조차 없고 아이팟이나 스마트폰으로 보는 일도 전혀 없다. 한의원 TV가 없어진 뒤부터는 지나치면서 드문드문 눈에 들여놓던 영화도 없어졌다. SNS 셀럽이 이따금 올리는 영화 이야기도 더러는 읽지만, 감상할 생각은 않는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본 적은 여태 없다. 이제 와서 이드거니 돌이켜보며 기억 몇을 떠올린다. 그 기억, 열 살에서 스무 살 무렵까지 띄엄띄엄 박혀 있는 에피소드들이 지니는 연속성을 찾아낸다: 영화 속 서사 또는 연기() 세계와 내 현실 세계 사이 격절()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점.

 

영화 속 타자 세계와 내 세계 사이 경계를 명확히 짓지 못해 그 극단으로 극화된 타자 세계로 빨려들어 허우적거리거나 그냥 내 세계를 송두리째 허무 속에 놓아버리거나 한다. 작위와 부작위가 다를 뿐, 이들은 전형 우울증세다. 진실을 모른 채 쌓인 습관이 망연히 오늘까지 이어졌다.

 

이 습관에서 케데헌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케데헌 서사 일부를 귀담아들었을 뿐 영화 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누군가 원효 사상까지 내세우며 케데헌 담론을 구성한 뒤에야 워메, 뭔 일이다냐?’하고 관심이 느지거니 움직였다. 때마침 딸이 아이팟에 담아 놓았으니 보라 해 봤다.

 

오만 년만에 보는 영화다. 워메, 참말로 뭔 일이다냐? 눈을 떼지 못한다. 내 어휘로 곱촘하게”, 한자 어휘로 섬세치밀하게 만들었음을 한눈에 알아본다. studium:punctum, pheno:geno가 서로 관통하고 흡수하며 유장하게 흘러간다. 세계가 주목하는 데는 그만한 며리가 있으렷다.

 

이 글에는 케데헌 이야기를 자세히 하려는 의도가 없다. 내가 50년 넘게 화두 삼아 온 원효를 잘못 읽는 사람이 많아 오해를 풀 생각에서 출발했다. 앞서 누군가로 표현했는데, 실은 김범진이라는 명상가다. 그가 쓴 케데헌에서 발견하는 한국의 사유들을 읽고 든 의문이 발단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그만이 아니라 대부분 원효를 매끄럽게이해한다. 전형이 일심(一心)을 그냥 한 마음으로, 화쟁(和諍) 목표를 화해로 이해하는 일이다. 지난 시절 권위주의 정권이 내세운 국론통일” “국민 화합과 뭐가 다르나. 그 정도라면 구태여 원효를 내걸고 얻는 날찍이 뭐 있나.

 

일심은 한 마음이 아니다; 대칭 운동하는 이문(二門) 사건을 같은 시공에서 경험하여 진실 전경으로 무한히 나아가는 삶이다. 화쟁 목표는 화해가 아니다; 일심을 향해 걸림 없이 살아가는 날카롭고도 동그란, 단단하고도 말랑한 역설 창조다. 하나든 화해든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립으로 보지 않고 더 높은 차원에서 하나로 바라보는”(위 책 128) 일을 사람들은 너무 쉽고 편하게 말한다. 더 높은 차원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심리 상태가 아닌 한 이는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에서 일()을 뜻할 수밖에 없다. 그 일은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무엇을 입에 담는 찰나 그 무엇은 이 세계 속에 도로 갇히고 만다. 결국 그 하나는 하나가 아니게 된다. 원효가 밝힌 일심이문(一心二門) 사상은 통속한 오해와 달리 하나를 지향하거나 결론으로 움켜쥐지 않는다. 이 또한 일원론이라는 극단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둘이 아니라고 해서 하나로 몰아버리는 짓은 인도유럽어를 구사하는 서구 단치(單値) 논리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진실 전경은 둘이 아니므로 하나도 아니다.”. 흔히 둘도 아니고/지만 하나도 아니다라고 읽는다. 아니다. 속 보깨는 이 진실에 닿지 못하면 원효는 영원히 오독된다.

 

케데헌은 그런 점에서 다른 모든 통속 담론을 뛰어넘는다. 루미가 진실 전경으로 들어오고 난 뒤에도 문양은 없어지지 않는다! 진실은 순수 투명한 일관(一貫)이 아니라는 뜻이다. 제작자가 다른 의도를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나, 적어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원효 실제 삶이 그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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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생물학적으로 퇴화하고 인류의 목적이 사라지는 때가 언제인지 내다보는 예언을 한 오가논다족 추장 오렌 라이언스는 그 징조 중 하나로 아이들이 버려지고 무시될 것을 꼽았다.(폴 호컨 탄소라는 세계316) 내가 이른바 엡스타인 파일을 처음 접했을 때 대뜸 떠올린 말이다. 나는 이 정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침묵과 음모론 경계에서 주의 기울이며 살피고 있다.

 

트위터, 특히 외국인 계정은 난리가 났다. 묘하게도 우리나라 극우 애들 트위터 계정 여럿이 매우 흥분해서 이 이야기를 계속 떠든다. 페이스북은 특별한 한두 경우를 빼곤 괴괴하다. 사실관계에 유념하면서도 세계 돌아가는 이야기 기민하게 전해주던 지식인 대부분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 재래식 언론도 대부분 무관심한 척한다. 희한한 일이다. 입대면 안 될 무슨 흑막이 있는지.

 

어제(213) 치 경향신문이 워싱턴 특파원 발로 비교적 긴 보도를 했으나 뭐 새로울 게 없다. 미성년자 성 착취라고 평평하게 언급됐을 뿐, 어떻게 얼마나 아이들이 버려지고 무시당했는지 더 깊은 내용은 암시된 바도 없다. 알려진 정보에 음모론도 섞였을 테고, 엡스타인 일방 계략에 당한 사례도 있을 테지만, 어떤 경우에든 아이들 문제를 이렇게 다루고 말아선 안 된다.


 

사실 저 예언에서 쓴 무시란 표현은 어떤 단어를 그렇게 번역했는지 모르나, 정확히 번역했다면 오늘날 지구에서 아이들이 당하는 탈취와 살해 상황을 미루어 볼 때 매우 미지근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라면 무시되는 일은 버려지는 일에 이미 낮은 단계로 포함되지 않나. 문맥을 고려해 의미와 표현을 고쳐 아이들 문제를 인류 생멸이 걸린 현안으로 삼아야 한다.

 

아이들이 우리 미래다, 뭐 이런 차원이 아니다. 탈취와 살해를 당하는 모든 인간 부류 가운데 아이들만큼 참혹하고 참담한 경우란 없다. 그들에게는 목소리가 존재론적으로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상식으로 보더라도 여성이 그들 목소리가 되어주어야 할 텐데, 내 경험상 여성 자신보다 먼저, 또 위에”-당연히 이래야 한다- 아이들을 두는 페미니스트를 본 적이 없다.

 

여성으로서 남성에게 탈취와 살해를 당하는 일이 범주적 중요성을 지닌다는 사고를 벗어나야 대승 페미니즘을 일궈낸다. 어른으로 사는 일은 자신과 같거나 더 높은 우선순위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실천하는 일이다. 그 어른 삶은 여성만 가능하다. 남성이 그럴 수 있었다면 세상을 지금처럼 망치지 않았을 거다. 남성과 싸우느라 여성이 아이들을 놓은 결과가 여기 닥쳤다.

 

이제 카이로스에 다다랐다. 여성, 그리고 여성 심장을 지닌 극소수 남성 어른이 아이들을 담론과 실천 고스락에 올려야 할 때다. 인간이 인간 아이들 그느르지도 못하면서 동물권 어쩌고 숲 어쩌고 바다 어쩌고 심지어 지구 어쩌고 하는 짓은 얼마나 신둥부러진가. 피눈물 흘리며 울부짖는 아이들 앞에 어미로 서 있어야 인간 최소한이나마 되지 않겠는가. 내일이면 이미 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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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통계에 따르면 2021년부터 2023년 사이 내가 단행본 100권 가까운 분량 글을 서재에 올렸다고 한다. 이 기간에 나는 식물, 미생물, 제국주의를 한무릎공부 하면서 진심 다 해 증언했다. 제국주의 글을 올리니 초반부터 독자와 그 반응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거의 문이 닫힌 서재가 돼버리자 나도 글을 거의 올리지 않았다. 브런치로 무게 중심을 옮겼다. 그렇게 따지면 100권 훨씬 넘게 글을 썼다. 그 글에는 당연히 내가 걸은 숲과 물 이야기가 포함된다. 숲 이야기 가운데 서울 경계에 걸쳐 있는 600m 이상 높은 산 계곡 50개를 걸은 내용이 있다. 실은 계곡 둘이 거기서 빠졌다. 오늘 그 이야기를 씀으로써 지난 3강력한 시간대 마무리에 갈음한다.

 

이번에 걸은 북한산 마지막 골짜기 둘은 흔히 구기터널 계곡, 불광사 계곡이라 부르는 곳이다. 둘 다 깊고 크지 않으며 교통도 그리 편하지 않아 많이 찾지는 않는다. 구기터널 계곡으로 들어가 불광사 계곡으로 나오는 동안 만난 사람은 서넛에 지나지 않았다. 그 한적함 몇 제곱 반비례로 나는 두 계곡에 흠씬 매혹되었다. 사실 구기터널 계곡은 ’239월에 들어갔다가 도로 내려온 적이 있다. 그때 보고 반해 언제 다시 온다, 온다, 하다가 오늘에서야 왔다. 푸른빛이 거둬지고, 얼어서 물소리도 거의 나지 않으나 여전히 탱맑은 기운을 자아올려 준다. 굽이진 흐름 따라 올라가다가 홀연히 용이 승천하는 환상에 빙의된다. 이 골짜기 이름은 내게 이제부터 미르.



 

골짜기 노루막이에 이르러 앞뒤로 펼쳐진 풍경을 잠시 살핀다. 남으로는 가까이 백악산, 인왕산, 그리고 저 멀리 관악산까지. 북으로는 앵봉산, 노고산, 그리고 저 멀리 개명산까지. 따스한 물 한 모금 마시고 불광사 계곡으로 내려간다. 미르 골짜기와는 달리 너럭바위가 많고 그 위로 난 비탈진 길이 내 고소공포증을 초든다. 내려갈수록 선림봉 바위 절벽이 시선을 압도한다. 그 바위 절벽이 너무 잘생겨서 연거푸 탄성을 발한다. 마침내 그 잘생긴 바위 절벽이 낳은 잘생긴 폭포 향림이다. 통째로 얼어 붙어서 고요히 드러내는 희고도 파리우리한 빛이 신비하기까지 하다. 여름에 그 소리를 듣기 위하여 꼭 다시 와야겠다. 이 골짜기 이름은 내게 이제부터 향림이다.

 

이렇게 해서 52개 골짜기를 걸었다. 마음 문에 걸어두었던 두 골짜기를 안으로 모셨으니 서울 산 모두에게 예를 다한 듯하다. 빛접은 발걸음으로 20년 전 드나들던 음식점에 든다. 뜨끈한 국물에 차끈한 소주가 찰떡궁합으로 어울려 몸·맘을 풀어준다. 한껏 흐벅진 심사에 싱겅싱겅한 실내 공기조차 느끼지 못한다. 알알한 상태로 나와 거리에 서서 하늘을 우러른다. 반쯤 이운 낯빛으로 달님이 물으신다. “그대 삶은 웬만한가?” 내가 대답한다. “제풀로 욕된 삶에 들었으니 열없지만 어숭그러하다 여깁니다.” 오늘 내 성공을 응그리진 못했지만 내일 우리 성취를 그느르고 있으니, 그저 째마리 삶만은 아닌 듯하다. 남은 날도 제국 생활양식 밀막으며 발맘발맘 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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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소문동 616번지. 이제는 영구히 없어진 지번이다. 내가 1010년을 산 곳인데 봉천동, 삼양동과 함께 서울에서 손꼽히던 산동네였다. 대학 졸업 직후 잠시 다시 들어가 재개발에 밀려 부서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폐허로 변할 때까지 버티다 하릴없이 떠나온 애증 어린 빈민가다. 오늘은 어찌어찌 흘러 여기를 걷는다.

 

대형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옛 모습은 전혀 없고 돈암초등학교와 북악산로를 기준 삼아 기억을 떠올리면 살던 곳이 대강 그려질 뿐이다. 거기서도 여섯 번이나 이사를 하였으나 고만고만한 데를 뱅뱅 돌았을 뿐이어서 그 동선만큼은 또렷이 기억한다. 기억은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들을 뚫지 못하고 나비물처럼 민틋이 흩어진다.

 

언틀먼틀한 산골짝 골목길 비탈과 계단 풍경이 맘에 새겨져 있지만 몸은 아스팔트 길 위에 있으니 알 수 없는 상실감으로 홀연 무참해진다. 갑자기 눈물방울이 열 지어 뛰어내린다. 얼른 하늘 한 번 쳐다보고 콘크리트 숲을 벗어나 진짜 숲으로 간다. 이 숲은 고향을 떠올리며 어린 시절 수시로 들고 났던 나지막한 산기슭이다.


산동네 올라가는 입구로, 막걸리집과 문구점 있던 곳이 이렇게 변했다


어린 날 소도였던 너럭바위


공동수도가 있고 장이 서던 너른마당을 지나 언덕을 올라가면 백악, 삼각산 마루가 우뚝 보이는 등성이가 나타난다. 백악산 줄기 가운데 하나로 서울 시내 풍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너럭바위 위에서 백일몽도 꾸고 설움도 달래고는 했다. 강원도 깊은 산과 달라 머루 다래 한 알 따 먹을 수조차 없었지만 쏠쏠한 위로였다.

 

어렸을 때 무서워 더는 들어가지 못한 건너편 숲으로 들어간다. 성북동 쪽으로 산책로를 다듬어 놓아 세월까지 쉬이 밟힌다. 끄트머리께를 돌아 나오던 어느 순간 입에서 느닷없이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언제나 다시 올지···.”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임을 알아차리자 아까 뛰어내렸던 그 눈물 후발대가 쏟아져 내려온다.

 

, 내가 늙는구나. 한 모라기 회한이 소슬하게 불어온다. 눈물을 훔치며 정색하고 숲을 응시한다; 늙어가는 소리를 강구어 들으며, 지난 5년 소롯이 바쳐 숲과 물, 그리고 제국을 공부한 나날에 이드거니 마음 둔다. 그러고 보니 그 공부가, 실은 여기서 출발했구나. 숱한 산모퉁이와 물굽이 돌아왔지만, 예가 바로 60년 소도구나.

 

언제나 다시 올지···.” 하지 않는다. “언제고 다시 오지.” 한다. 이름 하나 지니지 못한 나지막한 등성이 비탈이어서 이 숲은 내 장엄 지성소다. 내 인생을 똑 닮은 가장자리 골막한 숲으로 나는 언제고 다시 올 테다. 반제 전사 60년 동지와 건성드뭇한 머리숱 서로 쓰다듬으며 여생을 암차게 살아가련다. 지는 노을이 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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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2-07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시겠어요.서울은 워낙 재개발이 많이되서 옛모습을 간진한 동네가 몇곳 없을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