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 백반집에서 저녁 먹으며 안주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천덕꾸러기 자식이 결국엔 부모 모신다는 말이 나왔다. 제 얘기부터 가까운 친척 얘기까지 두루 톺아보니 증거가 차고도 넘친다. 무슨 법칙이기야 하겠나만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동감 구조 안에 있음은 틀림없다. 그래서 굽은 나무 선산 지킨다는 옛말이 생겨났으리라.
가부장 사회에서 딸과 둘째 아들, 그리고 막내가 그 천덕꾸러기 우선순위에 놓인다. 딸은 여성이라 전원이 대상이고, 둘째 아들은 맏아들에 치여 대부분 소외되고, 막내는 딸만 낳다가 끄트머리에서 얻은 외아들이 아닌 한 대개 방치되었다. 이 일그러진 풍경은 망국과 식민지, 전쟁과 독재 시대를 거치며 신산하게 살아온 서민 사회에서 더욱 서러운 서사를 생산해 냈다. 너무나 익숙해서 정색하고 비판할 수도 없는 분위기가 똬리 틀었다.
사사로운 수다 넘어 공공 서사로 번져가도 맥락은 같다. 난 놈 든 놈이 나라를 말아먹고 있는 이 살풍경 한가운데서 “계속 어른거리는 죽은 사람 그림자”-노벨문학상 심사위원인 소설가 엘렌 맛손이 한강이 그린 세계를 소개하는 중에 쓴 표현이다-가 산 사람과 망해가는 나라를 지켜내는 광경을 나는 보았다, 윤석열이 탄핵 된 14일 밤 여의도에서.
10대부터 30대까지 여성은 이명박 촛불 세대에서 박근혜 4·16세대를 거쳐 윤석열 10·29세대로 이어지며 큰 흐름을 만들어낸 주체다. 같은 세대 남성과 극한 대조를 이루는 까닭으로 커뮤니티 문화를 꼽는 전문가 견해와 달리 그날 나는 홀로 온 10대를 유난히 자주 보았다. 홀로 왔다는 사실이 커뮤니티에 속하지 않았다는 직접 증거일 수는 없으나, 홀로 오기로 결단한 그 독립된 주체성에서 나는 “죽은 사람 그림자”를 하나하나 읽어냈다.
홀로 온 소녀가 쓰레기를 줍고 있다. 아무도 모르는 순간 그는 우리 신이었다.
죽은 사람이란 누구를 말함인가. 불의한 공권력이든 사악한 개인 폭력이든 그들에게 죽임당한 사람은 물론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 취급당하는 모두를 가리킨다. 여성, 노동자, 노인, 아동, 장애인, 성소수자, 호남인, ‘빨갱이’, 이주민, 난민···. 이 개념은 살해·수탈·오염되는 동물, 식물, 미생물, 바이러스, 물, 먼지, 대기까지 궁극으로 넓혀야 한다.
4·16 이후 내 화두는 “죽은 자와 산 자가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가?”였다. 식물 공부를 하면서 “비인간 생명과 인간 생명이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가?”로 번져갔다. 제국주의 공부를 하면서 “비생명과 생명이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가?”로 끝까지 나아갔다. 각각 지닌 경계가 차례로 사라지면서 산 자 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 생명 중심주의가 무너졌다. 선산 지키는 굽은 나무가 근원 시공에서 누군지 철저하게 또 처절하게 깨치게 되었다.
굽은 나무끼리 가꾸는 팡이실이가 선산을 지킨다. 패자 연대, 그러니까 못-난 자, 못-든 자들이 “어른거리는 그림자”와 함께 추는 춤이 나라를 지킨다. 아니!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못-난 자, 못-든 자들과 함께 추는 춤이 나라를 지킨다. 왜놈 제국 부역자에게 짓밟힌 나라 지키는 일에서 앵글로아메리카 제국에 짓밟힌 지구 지키는 일로 펼쳐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