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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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말은 영어처럼 관계대명사 같은 것을 써서 복합 문장을 길게 만들기 어렵습니다. 억지로 그렇게 하면 길이가 늘어난다기보다는 뚱뚱해진다는 느낌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특징은 우리말이 논리적이고 지성적인 분위기가 아닌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에 힘을 실어줍니다.

  그리고 가치가 다른 자음이나 모음을 교체함으로써 다른 느낌이 나게 하는 음상音相 또한 우리말의 그런 특징을 잘 나타내줍니다. ‘졸졸’과 ‘쫄쫄’, ‘줄줄’의 미묘한 차이를 다른 언어 사용자가 간파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나아가 ‘짜릿하다’와 ‘쩌릿하다’처럼 심지어 반대에 가까운 느낌까지 나타나면 절묘함은 극치에 다다릅니다.

  이렇게 우리말이 지니는 직관과 감성 우위적인 분위기는 우리의 현실 삶의 양식과 직결된 것입니다. 한과 흥이 어우러진 정념이 시공을 꿰뚫는 우리의 공통된 생활 정조입니다. 중국인의 눈에 비친 저 옛날 ‘음주와 가무’의 상징이 오늘날에도 엄청난 소주 소비와 불야성을 이루는 노래방 문화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직관과 감성을 통한 난장亂場 식 소통에 능한 우리에게 서구적인 논리, 분석, 그리고 지성으로 접근하는 주지주의 상담 방식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성과 이성에 터 잡은 의지적 행위를 앞세워 ‘다그치는’ 분위기는 누가 뭐래도 낯섭니다. 우리는 정념을 정념으로 결 잡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차려야 그야말로 생태적 상담치료가 가능합니다.(193-194쪽)


흔히 사람들은, 심지어 의사조차도 마음의 병 앓는 이들이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야단칩니다. 아픈 이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잘못이 있으므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마음의 병 앓는 사람들이 거의 예외 없이 빠져드는 반추rumination 사고는 주체가 특정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일으키는 사고가 아닙니다. 어두운 감정과 그 느낌을 소환하고 유지하고 강화하는 기계적·자동적 촉매 반응입니다. 실제로는 사고 아닌 감정의 점화 작용입니다. 이를 사고 작용이라고 전제하고 대뜸 이성적·논리적으로 교정하려 드는 것은 치유가 아닙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에 있는 그대로 정서적 지지부터 보내는 것이 치유의 첫 걸음입니다. 정서적 지지는 감정이나 느낌 차원의 인정, 그러니까 공감empathy입니다. 공감을 전제로 이성은 성찰의 이성이 됩니다. 성찰의 이성으로 화쟁을 빚어갑니다. 화쟁의 훈습으로 성찰은 이성을 발효시킵니다. 발효된 이성은 전체로서 진실, 그 비대칭의 대칭성을 증득합니다. 비대칭의 대칭성을 증득한 이성은 스스로를 깨뜨리고 넘어갑니다. 그 너머는 또 다시 감성의 대지가 펼쳐집니다. 그 광활한 감성으로 걸림 없이無碍 매이지 않고不羈 살아가는 길에 아픈 사람이 발 디디면 치유는 삼가 스스로 물러납니다. 이것이 치유의 일생이자 그 수사학입니다.


스스로 생각이 지나치게 번다하고, 방대하며, 광범위하다고 자책하는 사람에게 조분조분 물어보면 실제 상황은 많이 다릅니다. 버전만 바꾼 같은 생각을 되풀이하면서 번다하거나 방대하다고 여깁니다. 휴먼스케일을 벗어난 허황한 생각을 하면서 광범위하다고 여깁니다. 나름대로 방어를 하거나 증상을 악화시키는 병리 반응이어서 파편 형태로 출몰하므로 상호관계 규명이나 체계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관념의 공시성과 실천의 통시성을 유기적으로 고려하지 못하므로 휴먼스킬을 확보하지 못하고 무력감에 시달립니다. 이럴 때도 치유는 아픈 사람이 겪고 있는 상황을 십분 공감하면서 곁을 지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나서서 정리해 가르치고 야단치면서 지시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답을 제시하려 덤비지 말고 반드시 진솔하게 질문해야 합니다. 아픈 사람한테 질문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신뢰를 표하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 스스로 결을 감지하고 손끝으로 휴먼스킬을 더듬어갈 때 치유는 삼가 스스로 물러납니다. 이것이 치유의 품이자 그 예학입니다.


“We think too much and feel too little.” 찰리 채플린의 말입니다. 생각이 너무 많은 것은 아픈 사람이 아니라 고치려고 섣불리 덤비는 사람입니다. 이성적 생각보다 함께하는 느낌이 고수의 치유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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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6장 본문입니다.

 

子曰 舜其大知也與. 舜 好問而好察邇言 隱惡而揚善 執其兩端 用其中於民 其斯以爲舜乎.

자왈 순기대지야여. 순 호문이호찰이언 은악이양선 집기양단 용기중어민 기사위이순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순(임금)은 크게 지혜로우시다. 순은 묻기를 좋아하시고 평범한 말을 살피기 좋아하시며, 악을 숨기고 선을 드러내시며, 그 두 끝을 붙잡아 그 가운데를 백성에게 쓰시니, 그 이로써 순이 되신 것이다.” 

 

2. 제4장에서 이른바 지혜로운 자는 지나쳐서 중용을 실천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른바 지혜로운 자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자의식을 지니고 있어 어리석은 자들과 분리합니다. 그렇게 갈라야 자신의 권위와 기득권이 수호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가 소인이고, 그 지혜는 소지小知입니다.

 

제6장은 군자의 표본으로 순임금을 제시합니다. 대뜸, 그가 대지大知를 실천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리 함으로써 세간의 이른바 지혜로운 자들이 소지임을 알게 하는 것이지요. 소지가 나와 남을 분리·차별하여 ‘홀로 주체성’을 확보한다면 대지는 나와 남을 하나로 묶어 ‘서로 주체성’을 펼칩니다. 홀로 주체일 때 남은 다루는 사물이지만 서로 주체일 때 남은 소통하는 인격입니다.

 

그래서 대지는 묻기를 좋아하고 평범한 말 살피기를 좋아합니다. 묻는다는 것은 듣는다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자기중심적 사고를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상실을 통해 오히려 참된 주체성을 획득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수동성으로 시작함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말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수동성이야말로 서로 주체를 이룩하는 상호능동성, 즉 소통을 낳는 모태입니다. 이 역설이 바로 중용의 요체입니다.

 

묻는다는 것은, 또한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묻는 자는 답하는 자 아래 섭니다.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기다립니다. 답하는 자를 중심에 놓고 자신은 변두리로 물러섭니다. 자신의 지혜는 답하는 자의 지혜에 ‘깃들’ 따름입니다. 입만 열면 백성을 가르치려 드는 우리사회의 권력자와 얼마나 상반된 모습인지요.

 

묻는 것은, 그리고 ‘보는’ 것과 다릅니다. 보는 것은 보는 자의 눈에 의존합니다. 기실 보고 싶은 것만 보지요. 무엇보다 밖으로 드러난 현상만을 파악할 수 있으니 소통은 불가합니다. 보는 자는 소통을 거절하는 자입니다. 보는 자는 보이는 사물 위에 섭니다. 고개를 세우고 팔짱을 낍니다. 보이는 사물을 변두리에 세우고 자신이 중심에 섭니다. 자신의 지혜로 보이는 사물을 제압합니다.

 

저는 한의사로서 우울증을 포함한 마음의 병을 상담/대화를 통해 치료하는 일을 합니다. 서양의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을 배운 사람들과 달리 한국 문화에 맞는 상담을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서양 이론에 따르면 의사와 환자는 분리되어야 마땅합니다. 의사는 고치는 주체이고 환자는 고침을 받는 대상일 뿐이지요. 의사가 환자의 말을 듣기는 하지만 사실은 말하기 위해, 즉 가르치기 위해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적 정서로 보면 의사는 듣기 위해 말을 해야 합니다. 환자를 중심에 세우고 의사는 거기에 깃들어야 합니다.

 

흔히 한의사는 척 보면 알아야 고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치 점쟁이처럼 ‘잘 보는’ 한의사를 “용하다.”고 합니다. 한의사 스스로도 대부분 망진望診사람의 몸 상태를 눈으로 살펴보고 병을 진단하는 방법을 우선으로 꼽습니다. 그러나 중용의 맥락에서 살피건대  묻는 것을 선두에 세우는 진단이 더 윗길입니다. 환자의 삶과 인격은 묻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드러난 병이나 고친다면 의사는 그저 기술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의사의 관심은 병을 넘어 사람 자체에 닿아야 합니다.

 

묻고, 답하는 말에 귀 기울여 듣는 자가 대지임을 안다면 의사는 더 이상 환자 위에 군림하지 않을 것입니다. 의사와 환자가 서로 주체로서 소통을 이룰 때 진정한 치유가 일어납니다. 이 때 비로소 치유연대가 결성됩니다. 이 치유연대를 사회 전체로 확대하면 그게 곧 대동大同 세상인 것이지요.

 

순임금은 대지로써 대동을 이룩했습니다. 대지의 길은 묻는 데서 시작됩니다. 경건하게 듣는 자가 대지의 기수입니다. 우리사회의 지배층은 지금 당장 눈 감고 입 다물어야 할 것입니다, 백성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하여. 


3. 임금 된 자가 백성 아래 서서 물으니 백성이 ‘평범한 말’로 답합니다. 저자거리에 흘러 다니는 ‘쌍스러운’ 언어를 날 것인 채로 드러내겠지요. 사는 게 어찌 고달픈지, 정치판을 얼마나 한심하게 여기는지, 어디가 아픈지, 물가는 얼마나 뛰는지, 자식 놈은 무슨 속을 썩이는지·······.

 

장삼이사張三李四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듣기 위해 물었고, 들은 다음에는 사회를 통합하는 대동의 정치를 펼쳐낸 것이 순舜이 한 일입니다. 국민이 주권자라고 선언하는 오늘날 권력자도 하지 않는 일을 전제군주가 했으니 가히 군자의 도요, 그래서 중용이라 일컬은 것입니다.

 

중용의 뜻이 여기서 다시 한 번 명백해집니다. ‘특별한’ 사람이 ‘평범함’에 깃들어 함께 ‘평범함’으로 통합되는 사건이 바로 순의 중용인 것입니다. 결국 ‘특별함’은 사라집니다. 순이 ‘평범함’에 승복하는데 누가 감히 스스로 높여 ‘특별하다’ 할 것입니까?

 

순, 스스로 ‘특별함’을 버린 마음의 흐름, 몸의 실천이 중용입니다. 중용은 선험적 전제로 존재하는being 어떤 실체가 아닙니다. 중용은 구체적 실천을 통해 바야흐로 형성되는becoming 운동입니다. 이럼에도 기라성 같은 주석가들은 중용을 만고불변의 실체적 진리로 규정하여 높은 곳에 모시는 일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중용을 현실과 단절하여 형이상학의 세계로 끌고 감으로써 오히려 명상적 시공간에 가두어버리는 우를 범한 것입니다. 중용은 명상의 대상이 아닙니다. 중용은 ‘웰 빙’의 포로가 아닙니다. 중용은 도저한 현실 삶의 울퉁불퉁한 길을 걷는 결단이며 용기입니다.

 

중용은 어지럽고 더러운 정치판을 혁파하는 에너지로 나타나야 합니다. 돈으로 인격을 사는 천민적 자본 판에 비수를 들이미는 기개로 드러나야 합니다. 인간의 구원·열반을 긍정심리학에게 내어준 종교집단에 채찍을 드는 의분으로 뿜어져 나와야 합니다.

 

중용의 언어는 예의 바르며 중용의 실천은 정중해야 한다는 통속 유교의 고정관념에서 중용을 해방하는 일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의 중용일 것입니다. 그 알량한 ‘싸가지론’에 묶인 중용은 주희와 그 아류로서 족합니다. 물론 이 나라는 여전히 노론의 텃밭이지만 인제부터 분명하게 달라져야 합니다. 


4. 본문비평textual critic의 직관에 따른다면 “악을 감추고 선을 드러내시며, 그 두 끝을 붙잡아 그 가운데를 백성에게 쓰시니” 라는 구절은 후대에 가필한 느낌을 줍니다. 두 가지가 마음에 걸립니다.

 

하나는 그 위상이 군더더기 같다는 것입니다. 그냥 “순은 크게 지혜로우시다. 순은 묻기를 좋아하시고 평범한 말을 살피기 좋아하시니, 그 이로써 순이 되신 것이다.” 하여 그야말로 질박 명쾌한 제시로 부족함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용이 후대의 통속적인 중용 이해에 터 잡은듯하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비유로써 가르치는 국민윤리 교과서 한 구절처럼 보이는군요. 격이 떨어지는 것도 그렇지만 내용 자체도 앞에 나온 “묻기를 좋아하시고·······” 하는 부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느낌 또한  확실히 있습니다.

 

5. 그러나 고증을 거치지 않은 이런 제 느낌을 뒤로 물리고 본문이 가지고 있는 뜻을 앞부분과 격 맞추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악을 감추고 선을 드러낸다는 것은 얼핏 보면 정확한 대비인 것처럼 보이지만 곰곰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선을 드러내는 것은 이의를 달기 어렵습니다. 헌데 악을 처리하는 것은 우리 윤리의식이나 법 감정과 어울리지 않지요. 악을 명백히 밝혀 제거하는 것이 선과의 대칭이라는 측면에서는 명쾌한 선택일 것입니다. 악을 제거하여 선한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인류가 오래 꿈꾸어 온 이상이 아니던가요?

 

선으로 충만한 세상, 그러나 이것은 또 하나의 기만입니다. 영원히 논리적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인 가치입니다. 그 가치를 현실의 경세치용에 그대로 적용하면 독선이 됩니다. 선하기 때문에 악하게 되는 모순을 낳는 것입니다. 까닭은 자명합니다. 소통의 폐기!

 

순이 악을 제거하지 않고 다만 감추는 차원에 놓아둔 것은 영원한 실체로서 선이 없듯이 영원한 실체로서 악도 없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선악의 구분도 흘러가는 것입니다. 선이 이른바 ‘특별함’이 되지 않고 ‘평범함’이 되려면 악을 자신과 구분하여 떼어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순의 대지입니다.

 

백성에게 묻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마음으로 판단할 때, 그들의 고단한 삶이 빚어내는 악은 따스하고 너그럽게 ‘묻어주면’ 언제라도 선으로 꽃필  것임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순의 그 마음을 알고서는 ‘차마’ 악을 되풀이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최소한의 가능성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게 소통이고, 이게 대동이 아닌가 합니다.

 

좀 더 나아가 보지요. 상당히 많은 경우 악은 그 시대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버려진 가치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간적, 공시共時적 지평에서는 악으로 규정될지라도 시간적, 통시通時적 맥락에서는 선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유연하고 다양한 관점을 지닌 사람의 넉넉함, 너그러움이 또한 중용입니다. 

 

6. 두 끝을 붙잡아 그 가운데를 백성에게 썼다는 것은 대칭/대립하는 두 가치/견해를 시중時中으로 조절하여 원만한 소통, 거래를 이루게 했다는 뜻일 터이니 길게 재론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양비론兩非論의 비겁함은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양측의 단점 또는 악을 모두 비판하는 게 매우 정당해 보이지만 양비론은 두 가지 발톱을 숨기고 있습니다. 자신의 공평함을 과시함으로써 도덕성을 확보하고 현실에서 발을 뺄 수 있는 근거를 남기는 기회주의가 그 하나입니다. 더 나쁜 발톱은 바로 양쪽을 싸잡아 비판함으로써 실제로는 힘 있는 쪽을 돕는 효과를 낸다는 것이지요. 양비론의 눈속임은 이른바 산술적 가운데를 중용이라 오해하게 합니다.

 

제가 “두 끝을·······” 운운하는 이 부분을 의혹의 눈초리로 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순의 중용이라 보기보다는 후대 통속적 중용가의 양비론적 혐의가 짙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구절을 순의 수준에서 역동적으로 해석하면 그만이긴 하지요.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7. 요컨대 순의 중용은 특별함을 버리고 평범함을 함께 나누는 “평등”의 사회정치적 원리이자 실천입니다. 인간이 민주적 정치를 만들어가는 유구한 과정에서 꾼 숭고한 두 꿈, 자유와 평등 가운데 동아시아 생태학은 중용을 통해 평등을 공들여 키운 듯합니다.


고대에 이미 이런 육중한 지향이 나타난 것과는 판이하게 오늘날 동아시아 정치는 불평등 모델의 각축장 같은 느낌을 줍니다. 중국, 일본, 그리고 남·북한 모두 그 지배집단은 21세기 정치세력치고는 저급하기 짝이 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대한민국의 매판 지배집단은 식민지 상황을 그대로 다시 구현해냅니다. 그들은 불평등의 내외적 중첩구조 속으로 국민을 대놓고 밀어 넣습니다. 수탈은 가속화됩니다. 대한민국에서 『중용』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현실을 직시한다는 것입니다. 『중용』의 인문학은 평등의 정치학입니다.


평등의 정치학은 대한민국에서 특히 지난한 과제입니다. 대한민국 상위 10%의 소득 점유율은 OECD 국가 중 제2위입니다. 지하경제 상대 규모와 지배층 재산 해외 이탈 등 제반 불투명성을 고려하면 제1위임에 틀림없습니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노인층 빈곤율이 제1위라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 이 노인층이 매판정권의 절대 지지기반입니다. 세월호사건 유족한테 세금 퍼주려 담뱃값 올렸다는 주장이 바로 이들의 정치적 성향을 대변합니다. 이들은 나라를 팔아먹어도 매판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다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고령화 사회가 되어갈수록 평등의 정치학은 불가능한 꿈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래도 이들의 ‘신앙’은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프고 슬픈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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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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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구의 말은 나와 상대방 사이에 나의 행위를 배치함으로써 자신의 주체성과 상대방의 객체성을 명확히 합니다. 이런 거리두기를 통해 객체는 사물화 됩니다. 그러나 우리말은 나의 행위에 앞서 상대방을 세움으로써 상대방을 마주선 주체로 대접합니다. 이른바 서로주체성이지요.

  우리말이 상대방을 귀중하게 대접하는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부정의문에 대한 답변 방식이 영어와는 정 반대인 것을 아시지요? 영어는 질문자와 상관없이 자기 의사만 밝히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우리말은 질문자의 의중에 맞추어 대답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에만 있는 압존법(문장의 주체가 화자보다는 높지만 청자보다는 낮아 그 주체를 높이지 못하는 어법)도 그런 예라 할 수 있겠습니다. 비록 윗사람이라 하더라도 직접 말을 주고받는 상대방의 기준에 맞추어 존칭어를 쓰지 않는 것이니 말입니다.

  마주선 상대방에게 주의하고 그의 처지에 따라 말을 주고받는 이런 특징이야말로 우리말이 ‘하는’ 말보다는 ‘듣는’ 말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소통을 위한 대화는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귀를 기울이는 자세는 상대방을 대등한 주체로 인정하는 표지입니다. 진정한 대화와 소통은 평등한 서로주체의 상호작용입니다. 마음의 아픔으로 고통 받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열등한 대상으로 취급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내담자의 존재 자체가 병든 것도 아니므로 더욱 그러합니다. 상담자 또한 어딘가 결핍이 있는 불완전한 존재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상담치료는 그 어떤 치료 행위보다 상호적이어야 합니다. 평등한 소통이어야 합니다.(192-193쪽)


내면에는 청소년이 다글다글한 20대 중반 청년과 띄엄띄엄 여러 해째 상담하고 있습니다. 그는 제가 언제나 끝까지 믿을만한 (이를테면 신앙의 대상 쯤 되는) 사람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태까지 수많은 믿을만한 사람을 찾아 헤맸습니다. 찾았다 싶으면 그들을 좇아갔습니다. 뜨르르한 승려가 그 대표적인 추종 대상이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말해주었습니다.


“나를 믿지 마라. 그때그때 너와 제대로 소통이 되는지 확인해라. 그뿐이다.”


즉문즉설이라는 ‘사이다’ 이벤트로 마음 아픈 사람들을 홀리는 승려와 그것을 흉내 내는 인문학 장수들이 드물지 않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얼마나 깨달아 무엇을 얼마나 마음 아픈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지 저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보다 제가 문제 삼는 것은 저들이 늘 아픈 사람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가르치거나 야단치는 행태 자체입니다. 물론 치유도 넓게 보면 가르침입니다. 물론 아픈 사람도 잘못을 범할 수 있으므로 야단치는 일, 가능합니다. 하지만 가르치고 야단치는 자격과 권위를 대체 누가 부여한 것일까요? 장삼가사 걸친 승려면, 저서가 수두룩한 철학자면 객관적으로 자격과 권위가 주어지는 것일까요? 그 또한 그렇다 칩시다. 그 가르침으로, 그 야단침으로 아픈 사람은 과연 어찌 될까요?


저들 승려와 인문학 장수들을 거쳐 사람들이 제게 옵니다. 반대로 제가 모자라서 저를 떠나는 경우라도 결코 저들에게로 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를 거쳐 간 사람은 적어도 승려와 인문학 장수들한테 배우고 야단맞아 자신의 아픔이 치유되지는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떠나기 때문입니다. 저들과 저의 차이는 단 하나, 아픔의 실재에 대한 인식입니다. 저들은 마음 아픔을 마음 아픈 사람의 잘못으로 새깁니다. 저는 마음 아픔을 마음 아픈 사람과 다른 사람 사이의 어긋남으로 새깁니다. 저들은 그러므로 잘못한 사람을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야단칩니다. 저는 그러므로 사람 사이 어긋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쌍방향으로 흐르는 이야기를 만들어갑니다. 저들은 아픈 사람을 따돌린 채 저들 자신의 내러티브를 구성합니다. 저는 아픈 사람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내러티브를 구성하도록 돕습니다.


마치 제 자랑처럼 들리는 말들입니다. 자랑이 아닙니다. 자학의 험한 강을 건너 도달한 자성입니다. 의자醫者 이전에 저 또한 도상의 존재입니다. 아직도 많이 아픕니다. 아픈 채, 아픔의 시간을 아픈 사람과 함께 흐르며 지나가는 길동무일 뿐입니다. 저의 의학과 인문학에는 바로 이 시간성이 존재합니다. 시간성 속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이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 속에 기다림이 있습니다. 기다림 속에 너와 나의 평등한 만남이 있습니다. 평등한 만남 속에 진정한 치유 공동체가 있습니다. 진정한 치유공동체 속에서 시간성을 누락시킨 종교적 교설과 철학적 강론의 독버섯은 결코 자라날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저들 승려와 인문학 장수들이 훤화하며 대박을 내고 있는 동안 이 땅의 아픔, 그 심장에 놓인 세월호 가족들은 어떻게 더 잔혹하게 슬픔의 심연으로 빠져들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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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5장 본문입니다.

 

子曰 道其不行矣夫.

자왈 도기불행의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도는 아마 행하여지지 아니할 것이다.”

 

2. 제4장에서는 현재 중용의 도가 행해지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 연유를 밝혔습니다. 여기서는 미래에도 중용의 도가 행해지지 아니할 것임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 예상은 다만 예상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탄식으로 슬픔으로 이어질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오호라, 도는 끝내 행해지지 아니할 것이로구나!”

 

공자의 예상은, 또한 시간 영역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춘추전국의 시공간을 관통하는 정치경제학비판입니다. 강자, 승자로서 정복만을 가치로 삼는 제후의 정치경제학을 향해 날리는 직격탄입니다. 인간의 상호적 삶을 거절하고 야차의 일방적 삶을 맹렬히 추구하는 ‘특별한’ 집단에게 날린 저주의 독설입니다.

 

3. 공자 이후 2500년, 오늘 여기 대한민국을 보십시오. 이 땅의 권력이, 재벌이, 통속 종교가 어떻게 도를 짓밟고 독식의 추한 미학에 골몰하고 있는가를 말입니다. 공자가 우리 앞에서 중용을 말한다면 “아마도[기其]” 대신 “반드시[필必]”이라고 고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식민지 체제를 대놓고 찬양하는 집권세력은 국민의 공포·불안을 볼모 잡고 거침없이 도불행道不行의 악정을 펼치고 있습니다. 정통성 문제가 제기되자 세월호사건을 일으켜 덮었습니다. 역사교과서 획일화 협잡과 일본군 성노예 희생자 문제 야합을 책동하고 있습니다. 괴물 매판자본인 재벌은 국민의 소박한 욕구를 탐욕으로 부추겨 거대한 수탈체계의 노예로 삼아버렸습니다. 돈이라는 단 하나의 가치, 그러니까 ‘대박’을 좇다가 결국 ‘쪽박’을 차고 마는 삶으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영성일랑 애 저녁에 말라버린 통속 종교는 백성의 무지를 약점으로 잡고 행복 장사판을 벌이고 있습니다. 정권과 재벌의 마름 노릇을 하며 신도를 삿된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들의 삼각동맹이 대한민국 도불행道不行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도구입니다.


도불행道不行의 체제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 어느 누구도 이 억압과 수탈, 그리고 사기의 직접적 대상이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내 아이가 세월호에 타지 않았다고 해서 세월호사건이 남의 일일 수는 없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은 심신상관적 타격, 사회경제적 손실이 구체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파고드는 것이 촘촘히 감지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대박’의 헛꿈 안 꾸고 건전하게 살아도 ‘대박’나는 극소수 사람들로 말미암아 양극화의 가파른 경사로를 따라 졸지에 하층민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우리 자신이 시시각각 확인되고 있습니다. 피땀 흘려 번 돈으로 내는 전기요금에는 세계적 재벌이 내야 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시가스 요금에는 독재자의 기념관 건립비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불교에서 해마다 걷히는 시주가 1조 5천억인데 이걸 들고 고위층 승려들이 도박판을 벌입니다. 나는 불교신자가 아니라고 하면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그 돈이 결국 어디로 흘러가겠습니까. 가장 공격적으로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는 개신교 대형교회 목사들이 저지르는 정치개입·교회세습·성폭행·횡령 등 각종 비리는 이미 새로울 것도 없는 사회문제입니다. 나는 개신교신자가 아니라고 하면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그 패악이 결국 어디로 흘러가겠습니까.


4. 『중용』의 심장을 겨누는 강호의 고수들은 더 이상 『중용』을 비현실적, 관념적, 형이상학적 담론의 준거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뜬구름에 태워 도를 이야기할 세상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 여기 펼쳐지는 구체적인 삶의 문제 앞에서 도를 말하고 행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도불행道不行의 현실을 외면한 중용의 실재란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허구입니다. 이 진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이른바 고수들은 저 삼각동맹의 부역자일 따름입니다.



『중용』은 명백히 현실 정치적 텍스트입니다. 현실 정치가 패도인 한, 『중용』은 준열한 정치비판입니다. 오늘 여기서 우리가 읽는 『중용』은 청년 실업 문제가 왜 생겼는지, 5만 원 권 지폐 발행이 왜 우리 경제에 독인지, 노인 자살률이 왜 세계 최고인지, 세월호 아이들이 왜 죽임을 당했는지·······질문의 비수를 입에 물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중용』은 다만 ‘이따위’ 고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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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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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안다는 우스개 아닌 우스개가 있습니다. 앞의 말, 즉 실사實辭가 아무리 중요해도 맨 나중에 배치되는 ‘이다’, ‘아니다’라는 허사 한 마디로 의미가 뒤바뀌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변적, 비본질적인 것이 중심적, 본질적인 것을 좌우하는 셈입니다. 대륙에서도 주변이고, 해양에서도 주변인 우리의 지정학적 특수성과 연결하면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지만, 실제 역사에서 우리가 경험한 주변부적 삶에서 이 어법의 기원을 찾는 일이 마냥 허황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두 중심 세계가 마주선 가장자리에서 거머쥔 ‘캐스팅 보트’의 역동적 감성이 지니는 절묘함을 안다면 우리말의 이런 특성을 문제 해결의 열쇠말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요컨대 나-중심을 끊임없이 버리면서 남-경계, 주변, 가장자리로 나아갈 때 진정한 경청,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집니다. 나를 규정하는 것은 중심인 내가 아니라 주변인 남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 남의 처지에서 보면 내가 주변이므로 이런 상호 관계가 소통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바탕이 됩니다. 실사를 움직이는 힘이 허사에 있다는 말은 이렇게 유력하고, 구성적이고, 가시적이고, 비범하고, 중요한 것들 중심으로 사고하는 패권주의를 거부한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무력하고, 무위無爲적이고, 비가시적이고, 평범하고, 하찮은 것들을 끌어안는 어머니의 시각을 담고 있다는 뜻을 지닙니다. 이것은 수천 년 맞-가장자리에서 살아온 우리에게 하늘이 내린 인식론적 축복입니다.(191-192쪽)


“악마는 프랑스에서 탄생했다는 말이 있다. 악마를 부르는 the other나 l'autre가 영국에서 나폴레옹을 부르는 말이기도 해서 그런 말이 나왔겠지만, 이 이전에 프랑스의 어떤 근성, 밑바닥까지 내려가 뿌리를 파려는 그 투지에 원인이 있다.”


얼마 전 황현산 선생이 트위터에 올린 글입니다. ‘명석하지 않으면 프랑스어가 아니다.’라는 말도 있거니와 사유란 언어를 통해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치고 보면 프랑스적 사유의 ‘근성, 밑바닥까지 내려가 뿌리를 파려는 그 투지’는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릅니다. 전공자가 아닌 제 일천한 독서 경험만으로 보더라도 프랑스적 사유는 확실히 그런 면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그 근성 또는 투지를 바라보는 황현산 선생의 시선이 액면 그대로 ‘악마’적이라는 평가를 담고 있지 않음은 분명합니다. 이 문제의 스펙트럼을 흔들어가며 조금 더 큰 맥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현대 프랑스적 사유의 대표 가운데 하나인 자크 라캉과 그 추종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심각하게 맞닥뜨린 것은 그 집요한 천착穿鑿, 천착주의라고 할만한, 아니 천착증이라 해야 할 지나친 후벼 파기와 뒤집기였습니다. 도저함 너머 철저함, 철저함 너머 허망함으로까지 질주하는 ‘근성과 투지’가 저 같은 범박한 독자에게는 휴먼스케일human scale을 가뭇없이 벗어난 것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휴먼스케일을 벗어난 사유는 휴먼스킬human skill로 구체화될 수 없습니다. 정말 그랬는가 알지 못하지만 이런 정도라면 자크 라캉은 자신의 사유로써 정신장애 환자를 실제로 치료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 ‘근성과 투지’는 임상적 관심을 사소한 것쯤으로 여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디디에 앙지외 이야기를 해보면 이 추정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디디에 앙지외의 『피부자아』를 번역한 사람이 권두에 쓴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 후 유명한 프랑스 여배우인 위게트 뒤플로가 자신을 박해한다는 망상에 시달린 끝에 그녀를 살해하려다 실패하고,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피해망상증 진단을 받고는 파리 생트-안느(Saint-Anne) 대학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여기서 그녀는 그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을 만난다. 자크 라캉과 디디에 앙지외, 정신분석학의 두 거목 사이의 기묘한 인연이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라캉은 그녀를 치료하기보다 그녀의 사례를 자기 논문에 이용하기 위해서 그녀로부터 정보를 수집하는 데 골몰했고, 그 결과 앙지외의 어머니에게 갈등과 적대감만을 남긴 채 1년간의 치료를 마치게 된다. 라캉이 ‘에메(Aimée)사례’로 이름붙인 이 사례는 그의 유명한 박사학위 논문인 「인격과의 관계 속에서 편집증적 정신증에 관하여」(1932)의 기초가 된다.


·······앙지외는, 1949년에 정신분석가가 되기 위해 파리정신분석협회(Société Psychanalytique de Paris(SPP))에 소속되어 라캉의 분석 수련생이 된다. 라캉과 자신의 어머니와의 관계는 전혀 모른 채 말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게 되기 전부터 앙지외는 라캉과의 분석에 깊은 불만을 품었고, 라캉은 앙지외에게 자기와의 분석에서 일어난 일들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며, 불편했던 4년간의 분석을 마치게 된다. 앙지외는 라캉과의 분석이 끝나고 나서야 자기 어머니가 라캉의 환자였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 그리고·······반 라캉 운동에 몸담게 된다. 비록 앙지외의 반 라캉 운동은 정신분석에 대한 이론적, 임상적 견해의 차이로 비롯된 것이지만 둘 사이의 이런 악연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지 않았겠느냐는·······말들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어쨌든 앙지외는 구조주의, 언어학, 철학 등의 영역을 정신분석에 도입한 라캉주의 흐름과는 달리, 분석 받는 사람들 각각의 독특한 필요에 따라 해석의 기법과 분석 기법들을 변형하는, 실용적인 영미권의 정신분석이론들을 프랑스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앙지외는 심각한 내적 상처들로 고통 받는 그의 내담자들을 감싸주고, 공감하고,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탁월한 정신분석가였고, 임상심리학과 정신분석학에서 중대한 이론적 공헌을 남긴 사상가였다.·······그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훌륭하게 대신한 아버지와의 친밀하고도 따뜻한 관계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그의 개인적인 아픔을 승화시켜, 보다 환자의 입장에서 치료하는 적극적인 정신 분석가가 될 수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은 앙지외가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어린 시절의 피부자아 형성의 중요성을 본인 스스로 실증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11-13쪽, 밑줄은 인용자 강조)


삶의 단순한 삽화가 아닌 중대한 서사로 얽혀들어 있는 자크 라캉의 핵심적 면모와 대비되면서 디디에 앙지외의 삶의 맥락이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 글입니다. 디디에 앙지외의 삶의 맥락은 ‘실용’의 흐름 안에 있습니다. 그 실용의 흐름은 ‘구조주의, 언어학, 철학 등의 영역을 정신분석에 도입한 라캉주의 흐름’을 반대한 것입니다. 라캉주의 흐름을 반대한 이유는 실용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용적이지 않다는 것은 휴먼스케일을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휴먼스케일을 벗어난 까닭이 바로 자크 라캉의 천착증에 있습니다. 천착증은 프랑스 사유의 ‘중심의식’이 빚어낸 집착이며 강박입니다. 이 집착과 강박은 타인을 향한 공격과 지배로 번져갑니다. 자크 라캉이 디디에 앙지외와 그 어머니에게 그랬듯.


휴먼스케일을 벗어난 사유, 천착증을 불교적으로 번역하면 아라한입니다. 아라한은 소승적 깨달음의 극단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 깨달음의 극단이 주는 쾌락에 늘 머물러 있는 것을 지복으로 삼습니다. 그들은 중생의 고통에 관심이 없습니다. 있다 해도 구제의 실천을 하지 못합니다. 휴먼스킬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크 라캉이 그랬듯. 소승적 깨달음의 극단을 내려놓고 회향을 단행, 그러니까 휴먼스케일로 복귀하는 것이 보살입니다. 보살의 길은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한 대승적 되 깨달음의 길입니다. 대승적 되 깨달음이 바로 붓다입니다. 붓다는 휴먼스킬을 지니고 있습니다. 디디에 앙지외가 그랬듯.


붓다의 길이 허사의 길입니다. 허사의 길은 나-중심을 끊임없이 버리면서 남-경계, 주변, 가장자리로 나아가 진정한 경청,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지도록 합니다. 허사의 길은 유력하고, 구성적이고, 가시적이고, 비범하고, 중요한 것들 중심으로 사고하는 패권주의를 거부합니다. 허사의 길은 무력하고, 무위적이고, 비가시적이고, 평범하고, 하찮은 것들을 끌어안는 어머니의 시각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 대한민국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치유의식’을 지닙니다. 치유의식은 “어떤 근성, 밑바닥까지 내려가 뿌리를 파려는 그 투지”, 그 아라한의 천착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천착에 머무르는 아라한이야말로 ‘악마’의 실재입니다. 살해 국가의 중심, 그 실사를 무너뜨리기 위해 부단히 구원 공동체가 살아 숨 쉬는 변방, 그 허사를 일으키는 보살의 치유의식은 지금 슬픔과 고통의 땅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팽목항에. 동거차도에. 안산에. 광화문에. 밀양에. 강정에. 그리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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