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13장 본문입니다.


子曰 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 

자왈 두불원인 인지위도이원인 불가이위도. 

詩云 伐柯伐柯 其則不遠 執柯以伐柯 睨而視之 猶以爲遠 故君子以人治人 改而止. 

시운 벌가벌가 기즉불원 집가이벌가 예이시지 유이위원 고군자이인치인 개이지.

忠恕違道不遠 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 君子之道四 丘未能一焉.

충서위도불원 시제기이불원 역물시어인. 군자지도사 구미능일언. 

所求乎子 以事父 未能也 所求乎臣 以事君 未能也 所求乎弟 以事兄 未能也 所求乎 朋友 先施之 未能也.

소구호자 이사부 미능야 소구호신 이사군 미능야 소구호제 이사형 미능야 소구미호 붕우 선시지 미능야.

庸德之行 庸言之謹 有所不足 不敢不勉 有餘不敢盡. 

용덕지행 용언지근 유소부족 불감불면 유여불감진. 

言顧行 行顧言 君子胡不慥慥爾.

언고행 행고언 군자호부조조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도가 사람에게서 멀지 아니하니 사람이 도를 하면서 사람을 멀리하면 도를 한다고 할 수 없다. 『시경』에 이르기를 '도끼자루를 베네. 도끼자루를 베네. 그 법이 멀지 않네.'라 하니 도끼자루를 가지고 도끼자루를 베면서 곁눈질해 보며 오히려 그것을 멀게 여기나니, 그러므로 군자는 남의 처지에서 남을 다스리다가 고치면 그친다. 忠과 恕는 도에서 벗어남이 멀지 아니하니 자기에게 베풀어서 원하지 아니하는 것이면 또한 남에게 베풀지 아니한다. 군자의 도는 네 가지이니 나는 한 가지도 할 수 없다. 아들에게 구하는 것을 가지고 아버지 섬기는 것을 할 수 없으며, 신하에게 구하는 것을 가지고 임금 섬기는 것을 할 수 없으며, 동생에게 구하는 것을 가지고 형 섬기는 것을 할 수 없으며, 벗에게 구하는 것을 가지고 먼저 벗에게 베푸는 것을 할 수 없다. 평범한 덕을 행하는 것과 평범한 말을 삼가는 데에 모자람이 있으면 감히 힘쓰지 않음이 없고 남음이 있으면 감히 다하지 아니한다. 말은 행함을 돌아보고 행함은 말을 돌아보아서 서로 일치하도록 해야 하니 군자가 어찌 독실하지 아니하겠는가.”


2. 군자 위도爲道의 참 도량道場은 다름 아닌 사람입니다. 사람도 그냥 ‘평범한[용庸]’ 사람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과 사람의 관계 또한 사람입니다. 앞 장에서 말한 필부필부匹夫匹婦평범한 사람들의 성性을 바탕으로 하여 이제 찬찬히 사람과 사람 관계를 살펴 나아갑니다. 그리고 스스로 성찰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습니다.


우리가 익히 경험한 바, 이른바 대가들이 풀어놓은 중용은 지나치게 고답적이고 관념적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중용을 격리시키려는 저의를 가진 것처럼 온갖 현학으로 도배하고 있습니다. 허나 중용은 필부필부의 성이 발원지이고 거기서 부자, 군신, 형제, 친구 등과 같은 인간관계의 전형으로 자연스레 흘러 나아가는 것입니다.


중용이 어려운 것은 신비한 경지를 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남보다 나를 앞세우는 탐욕으로 가로막히기 때문입니다. 그 탐욕이 소통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 탐욕이 남을 ‘관통’하려고만 하지 남을 ‘흡수’하려고는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용은 남의 자리에 서 보는 것입니다. 남의 소리에 먼저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내가 요구할 바를 먼저 남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내 마음, 그러니까 충忠이 그대로 먼저 헤아린 남의 마음, 그러니까 서恕여야 중용입니다. 나와 남 사이에 그 누구도 ‘특별한’ 존재가 아니어야 중용입니다. 내게 필요한 꼭 그것만큼 남에게 필요한 꼭 그것이 서로 유쾌하게 오가야, 그러니까 거래去來해야 중용입니다.


부부가 성을 나눌 때 일어나는 관통과 흡수는 동일한 원리로 부자, 형제, 친구, 군신 관계에 적용됩니다. 임금의 정치 행위가 부부의 성 행위보다 고급하다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자잘한 일상사에서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게 이루어지는 소통이 그대로 중용입니다. 사실은 그 사소함에 마음을 온통 담는 게 어려워 공자는 여기서도 “못하겠다.”고 사양합니다.


3. 자연스럽게, 그러므로 공자의 관심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 흐릅니다.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자신을 소통의 ‘서로 주체’로 세운다는 것입니다. 자신 속에 들어 있는 또 다른 자신과 마주섬으로써 자신의 그릇을 넓힌다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서 관통과 흡수를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서 모순을 통합하는 역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대동大同을 건설한다는 것입니다!


군자는 언제라도 자신의 어두움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웅얼거림에 귀 기울입니다. 군자는 천하를 위해 찰나마다 자신의 내면을 흔듭니다. 마치 나침반의 바늘처럼 흔들림으로써 깨어 있는 군자의 영혼은 정확하게 중용의 축을 가리킵니다.


이런 성찰은 남과의 소통에서 온 깨달음입니다. 거꾸로 남과의 소통은 이런 성찰을 통해 더 깊고 넓어집니다. 궁극은 천하무인天下無人세상에 남이란 없다, 그러니까 사물화 되는 존재가 없는 생명연대입니다. 그런 세상이 올 때까지 군자는 독실함을 생활 기조로 삼아 벗어나지 않습니다. 중용은 결코 자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4. 어떤 독실한 불교 신자가 큰스님께 말했습니다. “한 젊은 도반이 불심이 돈독함에도 교회 다니는 신혼의 아내 때문에 교회 나간다고 합니다.” 큰스님이 말했습니다. “아직 불교에 대한 확철대오廓徹大悟크고 철저하게 깨달음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가소로운 대화입니다. 적어도 제가 생각하는 큰스님이라면 “아마 불교에 대한 확철대오가 있어서 그럴 것입니다.” 라고 말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정체성은 너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어찌 대하는가, 가 곧 나입니다. 내가 대하는 네가 누구인가, 가 곧 나입니다.



이백오십이나 되는 생떼 같은 자식 잃은 부모더러 ‘세금도둑’이라 하는 자야말로 세금도둑입니다.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시민을 ‘종북’이라 하는 자야말로 종북입니다. 다 죽여 놓고, 진실을 은폐한 채, 부모더러 ‘본디 자리로 돌아가라.’ 하는 자야말로 본디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남만 보고 남을 규정하고, 나만 보고 나를 규정하는 저 ‘특별한’ 사이비 군자들이 세상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네가 있어 내가 있다는 진실을 아는 평범한 필부필부들이여, 부디 가만히 있지 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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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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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는 기본적으로 남성 중심 언어입니다. man이 남성이자 인간임에 반해 wo-man은 여성이자 제한적 수식어가 달린 부차적 인간쯤으로 상정된 것입니다. 중국인의 생각이 담긴 한자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혼인한 두 사람 사이를 부부夫婦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두 사람 사이를 남녀男女라고 합니다. 우리는 전자를 ‘가시(지어미)버시(지아비)’라고 합니다. 후자를 ‘연놈’이라고 합니다.

  이런 특징에서 우리의 세계관이 상대적으로 여성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17세기 후반 이후 성리학의 완고한 가부장주의가 우리 사회를 제압하기 이전에 여성의 지위는 다른 문명국가 그 어디와 비교해도 높았습니다. 비단 사회적 지위 문제에 국한시킬 일이 아닙니다. 우리 문화 전반에 깃든 여성성은 우리의 전통적 사고구조와 삶의 양식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비록 현재의 사회정치적 제도와 분위기가 여성성을 억압하고 있지만 장차 여성성은 우리 사회의 관건적 화두가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때 우리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공동체적 여성성은 놀라운 역동성을 발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성성 문제는 여태까지 다루었던 우리말의 생태학 전반이 흘러드는 바다 같은 위상을 가집니다.

  상담이나 심리치료 문제에서도 서구의 주류적 방식은 근본적으로 남성적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모든 내용에서 이런 면모가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생태에 맞는 상담이나 심리치료 이론을 정립하고 임상적 실천을 하려면 반드시 우리가 내면 깊숙이 지닌 여성성을 확인하고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199-200쪽)


이 서재에서 두 번 박길주 선생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리뷰 『투명사회』(30)-<아름다움, 그 시간의 향기>(2015.6.5)에서 한 번, 페이퍼 <잔 두 개>(2016.3.30)에서 한 번. 45년의 격조를 건너 마침내 오늘(2016.4.29) 아침,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45년 전 그 기조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젊은 날 이미지와 다소 어긋나 보이는 노년어법이 무르녹아 있긴 했지만 이내 친근함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를테면 학생을 가르치던 카랑카랑한 선생님의 목소리에서 자녀를 키워낸 말랑말랑한 어머니의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던 셈입니다.


사실 제가 선생님을 이렇게 다시 만나 뵐 수 있었던 데는 두 여성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우선은 선생님의 딸입니다. 그가 어머니 페북에 숙명여자대학교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을 밝혀놓지 않았다면 제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어머니 페북에 어머니 사진을 올려놓지 않았다면 제가 확신 없이 포기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거의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그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페북 활동을 몇 달 동안 중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답이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페친의 면면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러니까 친인척으로 추정되는 한 여성을 발견하였습니다. 다행히도 그가 연락처를 알아내기에 유리한 공적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어렵지 않게 통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선생님께 여쭌 다음 마침내 전화번호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선생님의 며느리였습니다.


선생님께서 누군가의 어머니가 아니셨다면 이 만남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결국 제게 선생님이심은 누군가에게 어니이심의 손에 이끌려 더 큰 인연으로 자라갈 수 있게 된 셈입니다.


돌이켜보면 저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제 인생에서 결정적인 문 하나를 닫으신 분입니다. 닫음은 닫음대로 아픔의 길을 따라 깨달음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박길주 선생님은 제 인생에서 결정적인 문 하나를 열어주신 분입니다. 엶은 엶대로 통찰의 길을 따라 깨달음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아픔도 한 인연이며 통찰도 한 인연입니다. 어둠도 한 생명이며 빛도 한 생명입니다. 오늘 박길주 선생님의 목소리에 실려 삶의 깊은 결 하나를 다시 보듬습니다. 선생님에게서 어머니를 읽듯, 어머니에게서 선생님을 읽으니 실로 일심-화쟁-무애가 몸 느낌으로 스며들고 있습니다. 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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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2장 본문입니다.


君子之道 費而隱.

군자지도 비이은. 

夫婦之愚 可以與知焉 及其至也 雖聖人亦有所不知焉 夫婦之不肖 可以能行焉 及其至也 雖聖人亦有所不能焉 天地之大也 人猶有所憾.

부부지우 가이여지언 급기지야 수성인역유소부지언 부부지불초 가이능행언 급기지야 수성인역유소불능언 천지지대야 인유유소감.

故君子語大 天下莫能載焉 語小 天下莫能破焉.

고군자어대 천하막능재언 어소 천하막능파언.

詩云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 

시운 연비려천 어약우연 언기상하찰야. 

君子之道 造端乎夫婦 及其至也 察乎天地.

군자지도 조단호부부 급기지야 찰호천지.


군자의 도는 널리 쓰이면서 은밀하다. 일개 부부의 어리석은 수준에서도 알 수가 있지만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비록 성인이라도 또한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며, 일개 부부의 못난 수준에서도 행할 수 있지만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비록 성인이라도 또한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며, 천지가 아무리 커도 사람은 오히려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군자가 큰 것을 말하면 천하에 실을 수 있는 것이 없고, 작은 것을 말하면 천하에 쪼갤 수 있는 것이 없다. 『시경』에서 이르기를,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거늘 고기는 못에서 뛴다.” 하니, 그 위와 아래로 나타남을 말한 것이다. 군자의 도는 그 실마리가 부부 사이에서 만들어지지만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하늘과 땅에 나타난다.


2. “군자의 도는 널리 쓰이면서 은밀하다[군자지도 비이은君子之道 費而隱].” 『중용』을 최초로 읽었을 때 가장 감동 받았던 문장입니다. 사실 이 한 문장으로 중용은 끝입니다. 뒤에 따라오는 부연 설명은 사족에 지나지 않지요. 위대한 것과 사소한 것의 차별을 단박에 부수는 절창입니다. 명시적 질서와 암시적 흐름을, 거시 구조와 미시 운동을, 천지 거래와 부부 소통을 한 눈에 꿰뚫는 비수입니다. 대칭과 모순으로 이루어진 우주 이치를 역설로 통합하는 초절정고수의 일식一息입니다.


이 말을 색즉시공色卽是空으로 바꾸면 세존의 깨침이 되고 소이불루疎而不漏로 바꾸면 노장의 통찰이 됩니다. 사상의 심오함이나 사유의 자재함에서 공맹孔孟유학 사상이 노석老釋노장과 불교 사상에 못 미친다는 말은 통속적 편견일 뿐입니다. 문명에 직접 발 담그지 않는 언어가 문명을 빚어가는 언어보다 영롱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회적 실천을 염두에 둔다면 세련미가 덜한 표현이 동원력 면에서는 더 우월할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중용』의 중용다움은 압도하되 제압하지 않는 ‘평범한’ 어기語氣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중용을 설파하는 언어 자체의 중용이 아닐까요? 어눌함에 실린 옹골참!


3. 사실 비費와 은隱의 대칭/모순구조를 파악한 것만으로도 『중용』은 우뚝 솟은 텍스트입니다.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이 이 영광의 빛 아래서 멈춰 섭니다. 그러나 세계가 대칭/모순구조로 이치를 삼는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세계는 결코 구조만이 아닙니다. 세계는 운동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운동을 위해 구조가 있는 것입니다. 세계의 운동은 찰나마다 대칭구조를 깨뜨림으로써 그 역동성을 유지 확산해 갑니다. 비와 은의 대칭/모순구조를 역설로 통합한다는 말이 바로 이 사실을 표현한 것입니다. 비와 은의 대칭/모순구조를 깨뜨림으로써만이 역설적 통합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즉 운동으로서의 세계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허다한 지성들이 구조의 신비에만 주목한 것이지요.


이런 오류는 앞서 말씀드린 바, 명사적 독법에 함몰된 교과서적 ‘먹물’들이 반성 없이 답습한 주석의 역사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동사적 독법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중용을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음”이라 읽는 마음결로 여기 “비이은費而隱”을 보면 역시 은을 동사로 읽으면서 그 방향으로 강조하게 됩니다. ‘은밀’이라는 명사도 아니고 그런 상태를 지시하는 형용사도 아닙니다. “드러내지 않는다.”, “감춘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단호한 결단이 전제되는 실천 그 자체입니다. 이렇게 읽어야 앞장의 둔세불현지이불회遯世不見知而不悔와 같은 맥락이 또렷이 드러납니다.


중용의 도가 실로 위대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군자는 그 최고의 덕을 실행에 옮기면서 그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권력으로 삼지 않습니다.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감춤으로써 ‘평범함’에 깃듭니다. 전 우주적 보편성을 가진, 그래서 편재遍在성을 지닌 위대한 덕이 사소한 일상으로 내려올 때 진정한 중용이 이루어집니다.


드러내지 않는다, 감춘다는 동사의 의미는 큰 덕을 작은 일의 수행에도 적용한다는 뜻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오래전에 본 영화 <간디>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중대한 국사를 논의하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양이 다리를 다쳤다며 들어오자 간디는 동일한 진지함을 유지한 채 양 한 마리를 치료하기 위해 아이와 함께 그 자리를 떠납니다. 조국의 독립과 양 한 마리 치료, 이 엄청난 비대칭의 대칭! 간디는 큰 일하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감춥니다. 그리 함으로써 위대함과 사소함의 대칭을 일거에 무너뜨립니다. 신약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작은 일에 충심을 다한 자가 큰일에도 충심을 다한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비이은費而隱을 명사적 독법으로 읽으면 실천적 의미가 명상 범주로 축소될 뿐만 아니라 올바른 방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동사적 독법으로 읽어야 개인과 사회 모두를 이끄는 실천덕목으로 방향을 잡고 나아가게 됩니다. 『중용』은 잘난 인간을 위한 처세훈을 설파하는 텍스트가 아닙니다. 참된 소통을 통해 평등의 원리를 구현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마그나 카르타입니다.


소수의 잘난 인간들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허나 그들은 결코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위해 세상을 망치는 저 오만한 상위 1%의 제후적인 독선에 맞서는 견결한 저항전선이 바로 오늘의 중용입니다. 갑남을녀甲男乙女평범한 사람들의 겸손한 연대로 대동 세상을 일구는 평범무비의 소통이 바로 중용입니다. 그뿐입니다. 


4. 그런데 주목할 것은 부부와 성인을 대비시킨 점입니다. 군자와 소인을 대비시켰다면 아무도 그 자연스러움에 토를 달지 않겠지요. 하필 왜 부부일까요?

 

뜬금없어 보이지만 사실 필부필부匹夫匹婦평범한 사람들의 소통이 모든 인간관계 소통의 출발점입니다. 이는 너무나 보편적 진실이라서 오히려 늘 묻히고 말지만 적어도 부부 개념에 앞선 그 어떤 인간 생명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면 여기 부부 언급은 하등 의아할 게 없습니다.

 

물론 부부관계의 핵심은 사랑이고 다시 그 사랑의 핵심은 성적인sexual 것입니다. 단도직입으로 말하자면 성교야말로 인간 존재 자체와 소통의 발원이자 핵심입니다. 그래서 성sex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한자어 중 이 ‘성性’ 자 만큼 위대한 쓰임새도 없을 것입니다.

 

부부의 성은 이렇게 위대하지만 그 자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사실 성적인 수치심이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측면이 강하나 성교를 감춤/드러내지 않음의 문제로 파악하는 것은 좀 더 내밀한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곰곰 생각해 보면 존재와 소통의 시원을 일부러 드러낼 일은 아니지요.

 

다른 것도 매한가지 입니다. 숨 쉬는 것, 먹고 싸는 것, 잠자고 일어나는 것, 말하고 듣는 것, 이 모든 것이 거룩한 일임에 틀림없지만 아무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성교는 이들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므로  더 드러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를 권력, 돈, 지식처럼 드러낼 경우 아마도 인간 세상은  파국을 맞게 될 것입니다. 대놓고 성을 권력, 돈, 지식 문제와 결합한다면 가장 잔혹한 억압체계가 생겨날 것입니다. 아주 하찮게, 아주 조용히 말하지만 부부는, 부부의 성은 중용의 요체이자 뇌관입니다! 그래서 성인도 알 지 못하고 행하지 못하는 경지가 있다고 설파한 것입니다. 

 

5. 가만히 보면 이 장에 또 하나의 개념 전복顚覆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인과 군자의 구별입니다. 앞장에서와 달리 여기서는 군자 개념이 성인의 상위 개념입니다. 여기 군자는 중용의 완전성을 전제한 요청적인 개념이고 성인은 부부와 대비된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 전복은 자못 의미심장한 바 있습니다. 문장의 형식에 따라 내용을 보면 중용이 일개 부부, 즉 필부필부라도 알고 행할 수 있는 사소한 것부터 성인조차 알고 행하지 못하는 광대한 것까지 포괄한다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행간의 강조점은 이와 다르다고 봅니다. 

 

우리의 이런 이의제기를 뒷받침 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바로 천지지대야 인유유소감. 고군자어대 천하막능재언 어소 천하막능파언. 天地之大也 人猶有所憾. 故君子語大 天下莫能載焉 語小 天下莫能破焉. 부분입니다. 제12장 전체 문맥에서 보면 매끄럽지 못한, 불쑥 끼어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문장입니다.

 

군자의 언어를 천지가 감당하지 못한다는 내용인데 사실 중용의 실천적 측면, 실사구시 관점에서 보면 원리적으로 황당한 주장입니다. 마치 장자나 불경의 과장된 초거대담론적 수사를 보는 느낌이 들지요. 이런 이해가 잘못일 가능성을 십분 인정한 상태에서 우리 식 이해를 시도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지대야 인유유소감. 고군자어대 천하막능재언 어소 천하막능파언. 天地之大也 人猶有所憾. 故君子語大 天下莫能載焉 語小 天下莫能破焉. 부분을 양보 문장으로 봅니다. 즉,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중용의 이치를 그렇게 추상화, 신비화 할 까닭이 없다는 말을 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매가 날고 땅(못)에는 물고기가 뜁니다. 천지 일은 그냥 그러합니다. 중용 또한 천지간 일일 뿐입니다. 중용의 최고 경지가 신비 차원까지 올라가서 그런 게 아니고 부부의 성처럼 구태여 드러낼 일이 아닌, 그러나, 아니 그래서 정녕 숭고한 것이기 때문에 성인도 알지 못하고 행하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성인이라고 이 문제, 즉 성을 더 고상하게 알고 행할 리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중용 또한 이와 같습니다. 아니 바로 군자의 도는 필부필부의 성, 그 평범하고 사소한 소통으로 영원 회귀합니다.  


6. 군자의 도는 널리 쓰이면서 은밀하다, 그러니까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듯하다, 는 말은 우리에게 날카로운 기억 하나를 내밀어 보입니다. 어디에도 없었는데 어디에나 있었던 듯, 전능함을 드러낸 우리 국가원수에 대한 기억 말입니다. 아이들이 시시각각 죽어가던 그 일곱 시간 동안 국가원수는 적어도 위기의 국민 앞에서는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완벽하게 몰살시켰습니다. 흔히 이 부재를 무능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단코 전능입니다. 능력 없어 못 살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죽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편재하는 신의 전능을 능가하는 초절정의 경지입니다. 부재와 전능의 역설, 그 신묘막측한 일치여!



이 신공에 넋을 놓고 있을 일, 아닙니다. 군자의 도, 그러니까 중용과 정확히 반대되는 패도 국가에 살고 있는 현실에 새삼 소스라치게 놀라 온 몸을 떨어야 합니다. 온 마음을 두들겨 깨워야 합니다. 평범한 필부필부의 사소한, 내밀한 소통을 일으키고 옮겨서 이 거대한 오만과 폭력을 종식시킬 차비를 해야 합니다. 천천히 서둘러야 합니다Festina le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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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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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말은 가락을 지니고 있으며, 그 가락은 3음보를 띱니다. 한 호흡에 세 번 나누어 읽는 것이 3음보입니다. 이것은 우리말의 전통적인 운율이 되었습니다. 3음보의 특징은 단연 유희성입니다. 즉 놀이로 세상과 삶을 인식하는 삶의 경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삶을 지나치게 엄숙한 무엇으로 자리매김하지 않는 인생관과 맞물려 있습니다. 우리의 옛이야기를 보면 산 넘으면 저 세상이고, 심지어 살아서 오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보편적으로 깃들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삶과 죽음을 이분법에서 해방하면 오히려 인생이 즐거워지며 짐스럽지 않게 되는 이치를 깨달은 것입니다.

  이런 인생관은 삶과 죽음을 절대 경계로 나누어 경직되게 의미를 부여하는 서구적 생사관, 즉 삶이 격절로 끝나고 나면 비가역의 시공인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고 생각하는 서구인들의 사고방식과 전혀 다릅니다. 서구인들처럼 생각하면 현생에 덜 집착할 것 같지만 문명을 보면 그들의 문명은 현생이 극대화하여 드러나고 있습니다. 웅대하고 화려한 대리석 건축물, 2000년이 지나도 물이 흐르는 석조 수로, 1만 개 이상의 인공 섬으로 이루어진 베네치아…. 그들이 현재의 삶을 얼마나 진지하고 치열하게 의식했는지 실로 감탄하게 합니다. 그들의 문명이 침략과 정복으로 점철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서구문명에서 자본주의가 생겨난 것은 참으로 자연스러운 이치라 하겠습니다.

  의학과 상담의 세계도 그러합니다. 병은 나쁜 것이고, 그래서 없애버려야 한다는 공격과 정복의 목적의지를 숨기지 않는 것이 서구 의학과 상담이론입니다. 그 엄숙주의가 외과 수술로, 분석과 평가와 교정의 상담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치료는 노동이 되고 과업이 되며 거룩한 전투가 됩니다. 기승전결이 분명한 자기 완결적 구조를 지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3음보는 끝없는 넘실거림에 몸을 내맡기는 놀이로서 상담과 치유를 인식하도록 이끕니다. 공격하지 않고 달랩니다. 정복하지 않고 보듬습니다. 완결하지 않고 여백을 남깁니다. 왜냐하면 삶도, 슬픔도, 치료도 모두 한바탕 놀이임을 알기 때문입니다.(198-199쪽)


우리의 통념은 일(노동) 뒤에 놀이(휴식)가 있다고 여깁니다. 마치 낮이 지나면 밤이 온다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본디 놀이와 놀이 사이에 일이 있습니다. 밤과 밤사이에 낮이 있습니다.


이런 이치대로 산다면 우리 삶은 진지할지라도 엄숙 떨지 않습니다. 이런 이치대로 산다면 우리 삶은 덧없을지라도 허망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치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탐욕과 불안, 그리고 어리석음의 포로가 됩니다. 이런 이치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일과 놀이는 각각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일은 전투적 강박으로 미끄러집니다. 놀이는 향락적 중독으로 미끄러집니다.


시방 인간이 봉착한 생멸의 문제는 일과 놀이의 순서를 뒤집어야 풀 수 있는 문제입니다. 놀이 혁명이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자본의 극한 토건, 공화제의 침몰, 지구 생태의 파괴, 이들 모두는 과잉된 일, 과잉된 일이 부른 과잉된 놀이가 원인입니다. 삶 전체를 놀이판으로 깔고 그 사이 사이에 일을 놓으면 일은 필경 놀이로 배어들 것입니다. 일이 놀이로 배어들면 인간은 마침내 존재론적 상처를 서로 달래고 보듬을 것입니다. 존재론적 상처를 서로 달래고 보듬을 때, 비로소 인간은 진정한 여백의 삶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주말 조증 상태를 걱정하며 찾아왔던 제자는 결국 강제로 병원에 격리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마음의 병을 지니고 치료 받으며 살아온 삶 전체 흐름을 살펴보면 주위 사람, 특히 가족이 병의 원인을 제공하고 악화시킨 다음, 급기야 강제격리라는 폭력적 치료(?)를 결정하는 모든 과정에 직접 개입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의 배우자는 저를 찾아와 가족의 이름으로, 보호자의 권리로 내린 결정을 통보하고 혼란 일으키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병의 본질과 치료의 정도를 의학적으로 곡진히 피력했으나 그는 자신의 인문학을 근거로 대며 낯빛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자리를 떴습니다. 몇 시간 뒤 그의 결정은 실행에 옮겨졌습니다.


서구정신의학과 어설픈 인문적 지식, 그리고 가부장적 남성문화가 합작 기획해낸 아프고 슬픈 의료서사입니다. 그들은 엄숙하고 단호했습니다. 병의 증상은 적이므로 없애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픈 사람은 처리 대상이므로 과정에 대한 질문은 필요 없고 결과만 좋으면 그만인 것이었습니다. 가족으로서 보호자로서 책임감을 충족시키는 것으로써 저들의 이성은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이 서사의 심연에는 그들이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가라앉아 있습니다.


지난 주말 늦은 밤부터 별안간 시작된 드라마 같은 실제 사건이 가파른 허망함으로 종결된 지금, 홀로 한의원에 앉아 깊은 상념에 잠깁니다. 삶의 이 날카로우면서도 무거운 풍경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요? 무디면서도 가벼운 삶으로 혁명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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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1장 본문입니다.


子曰 索隱行怪 後世有述焉 吾弗爲之矣. 君子遵道而行 半途而廢 吾弗能已矣. 君子依乎中庸 遯世不見知而不悔 唯聖者能之.

자왈 색은행괴 후세유술언 오불위지의. 군자준도이행 반서이폐 오불능이의. 군자의호중용 둔세불현지이불회 유성자능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은벽한 것을 찾고 괴이한 것을 행하는 일은 후세에 칭술함이 있지만 나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군자가 길을 따라서 가다가 길을 반쯤 가서 그만두기도 하지만 나는 그만둘 수 없다. 군자는 중용에 의지하므로 숨어서 세상에 알려지지 아니하여도 후회하지 아니하니 오직 성인만이 할 수 있다.”


2. 은벽한 것을 찾고 괴이한 것을 행하는 일은 세상에 알려지기 위해 ‘특별히’ 하는 행동입니다. 나아가 그런 행동들로 점철된 삶의 흐름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 권력과 부와 명예가 결합하겠지요. 이런 풍조를 일컬어 ‘뜬 사람 문화celebrity culture’라 합니다.


무슨 수를 쓰든 일단 ‘뜨면’ 만사형통인 세상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처음엔 연예계에서나 일어나던 일이었지만 지금은 어느 분야에서든 ‘떠야’ 행세하는 판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너나없이 자신을 띄우는 이미지 전시에 골몰합니다.


만들어진 이미지와 실제 내용의 괴리가 갈수록 심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심지어 그래야 마땅한, 그래서 더욱 조장되고 있습니다. ‘뜬’ 사람들이 하는 일은 사소한 것도 업적으로 부풀려지고 큰 허물조차 서둘러 덮여집니다.


이 시대정신은 막강한 권력으로 군림합니다. 무슨 짓으로든 일단 ‘뜨면’ 단박에 인간적인 품위까지 격상되는 기적(!)을 맛볼 수 있으니 거기에 어찌 사회적 힘이 붙지 않겠습니까? 어떤 젊은 연예인이, 자신이 귀족이라는 의미를 전제하고, 비연예인인 사람들을 ‘평민’이라 했다니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게 “드러나 세상에 알려진” ‘특별한’ 사람들의 시각입니다. 당연한 듯 보이지만 실은 “은벽하고 괴이한” 생각입니다. ‘특별한’ 전시성을 지닌 사람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뜰’ 수 있다는 것과 그렇게 ‘뜬’ 사람이 ‘뜨지’ 못한 사람보다 격이 높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재주가 덕을 제압하는 세상은 그 자체로 형벌입니다.


3. 군자의 한결같은 중용 실천은 맥락의 변화를 유연하게 살피면서 다함없이 이어집니다. 중용의 길을 따라가다가 반쯤에서 그만두는 것은 군자가 행할 바 아닙니다. 아무리 해봐도 ‘뜨지’ 않자 중용 실천을 그만두는 자는 사이비 군자입니다.


어차피 중용의 도는 ‘특별한’ 프로세스를 구사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습니다. 아니 당최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소통을 통한 평범함의 추구가 중용의 도라면 정작 세상에 알려지는 주체는 대동으로 바뀌는 사회 자신일 것입니다. 군자는 자신을 숨겨 대동 세상 자체를 드러내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앞 다투어 ‘세상에 알려지는 특별함’을 향해 내달리는 시대를 살면서 아무리 달려도 그 ‘특별함’에 이르지 못하는 절대다수의 사람이 참 주인인 세상을 꿈꾸며 군자는 표표히 무대 뒤로 몸을 숨깁니다. 그 결단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인입니다.


4. 광대무변한 우주 한 모퉁이 티끌 같은 존재라면 하찮지만 그것이 생명인 한 위대합니다. 위대한 생명은 그 자체로 이미 ‘뜬’ 기적입니다. 여기에 기획 전시를 더해 ‘띄우는’ 것은 탐욕이며 수탈입니다. 탐욕과 수탈을 정체성으로 삼은 자본주의 세상에 살면서 이른바 스타무의식을 지니지 않고 살기란 여간해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기적으로 태어나 꼭 한 생을 살다 가는 것인데 기왕이면 ‘떠서’ 권력·부·명예를 누리면 좋겠다, 싶지 않은 사람 그 누구이겠습니까.


평범한 사람들의 이런 꿈들은 사는 동안 그저 그렇게 일어났다가 그저 그렇게 스러집니다. 문제는 이미 ‘대박 난’ 사람들과 그 기득권의 보전·강화입니다. 체계와 규모의 이익을 누리면서 끝없이 덩치를 키워가는 것이 세습자본이라는 괴물입니다. 이 괴물은 권력과 종교를 거느리고 탐욕과 수탈을 부추겨 난공불락의 성채를 쌓고 있습니다.


세습자본의 이런 토건 가운데 그 추악함과 잔혹함에서 단연 빼어난 것이 대한민국 지배세력의 매판토건입니다. 나라를 팔고 백성을 파는 것도 모자라 대놓고 백성을 대량학살하기까지 합니다. 절묘한 기획과 연출로 산 사람들의 혼을 빼, 죽은 사람들에 대한 도리조차 다하지 못하게 가로막습니다. 조문을 ‘띄우고’ 눈물을 ‘띄워서’ 죽은 사람과 산 사람 모두를 거듭 거듭 바다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백성을 ‘빠뜨려’ 정권을 ‘띄우는’ 이 무도한 국가에서 중용은 과연 무엇이고, 군자는 과연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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