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이름들 - 제3회 박상륭상 수상작
안윤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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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절 가깝게 지냈으나 이제는 연락이 끊어져 소재도 알 수 없고 얼굴도 가물가물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존재는 이름으로만 남아서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만 보아도 애틋한 감정이 든다. 안윤의 소설 <남겨진 사람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 '윤'은 2006년 여름부터 2008년 여름까지 2년 간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에서 어학연수를 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8년이 지난 현재, 윤에게 그 시절과 관련해서 남은 것이라고는 당시 신세진 하숙집 주인 라리사의 이름 정도다. 그런 윤에게 어느 날 뜻밖의 연락이 온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라리사가 자신의 수양딸 나지라의 공책을 윤에게 유품으로 남겼다는 것이다. 공책을 전달받은 윤은 번역을 시작한다. 공책에는 아내가 식물인간인 부부의 입주 간병인으로 일한 나지라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라리사는 왜 이 노트를 윤에게 주었을까. 윤은 라리사와 나지라의 마음을 이해하려 애쓰며 계속해서 읽고 쓴다.


이 소설에서 인상적인 점은 라리사가 윤에게 준 나지라의 공책에 적힌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식물인간인 아내 카탸와 그의 남편 쿠르만, 이들을 돌보는 입주 간병인 나지라의 관계가 실제로 어떠했는지, 쿠르만과 나지라가 서로 좋아했는지 혹은 카탸가 그들을 질투했는지 아니면 격려했는지 등은 오로지 읽는 사람의 관점과 판단에 달려 있다. 윤은 공책에 적힌 내용의 진위 여부를 의심하면서도 번역을 멈추지 않는다. 진실을 알기 위한 번역 행위는 결국 윤에게 진실과 무관한 '어떤 효과'를 남긴다.


윤은 라리사가 왜 이런 이야기를 자신에게 전하고자 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라리사가 윤이 글을 쓰고 싶다고 했던 것을 잊지 않았고, 라리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사람의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윤에게 전하고 싶어했다는 것만은 가슴 깊이 알게 된다. 라리사에게 윤이 어떤 존재였는지, 수양딸의 유품을 남길 만큼 애틋했는지 아니면 그저 마지막이라서 기억에 더 남은 외국인 하숙생이었는지도 영영 알 길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내 이름을 안다는 것, 잊지 않고 기억해준다는 것은 그 자체로 보통의 인연이 아니다. 결국 이 소설은 인연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소설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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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일본책 - 서울대 박훈 교수의 전환 시대의 일본론
박훈 지음 / 어크로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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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일본에 관한 책을 열심히 찾아 읽었는데 요즘은 잘 읽지 않는다. 일본 외의 나라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상대적으로 일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탓도 있지만, 일본이 여러 면에서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과거와 달리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한국보다 앞서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달까(물론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앞서 있다. 대표적인 예가 성소수자, 장애인 문제...). 


이 책의 저자인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훈 교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일본을 경시하는 맨 마지막 나라가 돼야 한다."라고 말한다. 일본에 대한 호오와는 별개로, 일본에 대해서는 아무리 공부해도 지나치지 않다고도 덧붙인다. 한국이 경제적, 문화적으로 일본을 많이 따라잡았거나 어떤 면에서는 넘어섰다고 볼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은 여전히 세계 상위권의 경제 대국이며 한국보다 시장의 규모가 두 배 이상 크다. 정치적으로는 국방과 안보 면에 있어서 서로 협력할지 아니면 경계할지를 두고 항상 저울질을 하는 입장에 놓여 있기도 하다.


이 책은 친일 아니면 반일이라는 극단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최대한 객관적, 중립적인 입장에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볼 수 있도록 안내한다. 오래 전부터 일본인들을 '왜인'이라고 불렀고 이어령 선생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만큼, 한국인들 사이에는 일본 하면 '작다'라는 인상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본은 인구 면에서나 영토 면에서나 한국의 2배 이상으로 결코 무시할 만한 상대가 아니다. 일본은 섬나라인 만큼 해양 국가라는 인상이 있지만, 오히려 섬나라이기 때문에 타국을 신경 쓰지 않고 자국에 한정한 사고 방식을 오랫동안 견지해 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그래서 후쿠시마 원전오염수를 무신경하게 방류하는 걸까...?).


타산지석이라는 말도 있듯이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의 역사를 다시 인식할 수도 있다. 저자는 특히 조선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강조한다. 조선의 역사는 너무 대단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비하할 정도로 대단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알다시피 일본은 역사적으로 줄곧 한반도로부터 선진 문물을 전수받았는데, 어떤 지점에서 입장이 뒤바뀌고 국력의 격차가 생겼는지에 대해 반일 감정을 핑계로 공부하지 않으면 한국만 손해이고, 같은 역사를 되풀이할 위험이 있다. 그런 면에서 앞으로도 박훈 교수가 소개하는 '위험한 일본' 이야기를 계속 따라 가며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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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신랑 들이기
다와다 요코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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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와다 요코 하면 일본어와 독일어로 글을 쓰는 이중 언어 작가라는 인상이 강해서 다른 이력은 몰랐는데, 이번에 <개 신랑 들이기>를 읽고 1993년 아쿠타가와상 수상 작가인 걸 처음 알았다. 민음사에서 2022년에 출간한 소설집 <개 신랑 이야기>에는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개 신랑 이야기>와 <페르소나>라는 단편이 실려 있는데, 두 작품 모두 길이는 길지 않지만 형식과 내용 모두 상당히 충격적이고, 다와다 요코라는 비상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탐험하는 데 있어서 일종의 길잡이 내지는 나침반이 될 만하다.


먼저 실린 <페르소나>는 오랫동안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이 많이 반영된 듯 보인다. 주인공 미치코는 남동생 가즈오와 함께 독일에서 유학 중이다. 어느 날 독일 친구인 카타리나로부터 김성룡이라는 한국인 남성이 레나테라는 독일인 여성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미치코는 김성룡에게 쏟아지는 인종차별적 언사에 분노를 느낀다. 가즈오는 일본인과 한국인은 입장이 다르다며 미치코를 타이르는데, 미치코는 남자라는 이유로 누나인 자신을 아랫사람 대하듯 하는 가즈오에게 화가 난다.


<페르소나>가 1990년대 독일이 배경이라면, 이어지는 <개 신랑 들이기>는 1960년대 일본 도쿄가 배경이다. 전후 부동산 붐이 일어나 신도시 개발이 한창이던 때. 신도시와 떨어진 옛 동네에 사는 기타무라 미쓰코는 신도시 아파트 단지에 사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학원을 운영한다. 사람들은 나이가 적지 않은데도 결혼하지 않고 아이도 없는 미쓰코에 대해 온갖 상상을 하는데, 과연 이 상상들은 진실일까 허구일까. 


다와다 요코는 1960년 생이고 <페르소나>와 <개 신랑 들이기> 모두 1990년대 초반에 발표된 작품인데, 두 작품 모두 요즘 읽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형식과 내용이 참신하고 주제 의식 면에서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어서 놀라웠다. 과연 탈냉전 이전에 독일로 이주해 디아스포라 문제를 연구하고, 국경의 제약이 사라지기 이전부터 이중 언어 실험을 해온 선구자답다. 다와다 요코의 최근작들은 다소 어려운 감이 있어서 차라리 초기작부터 읽어볼까 하는 독자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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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걸려온 전화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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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감명 깊게 읽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전쟁을 겪는 두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를 총 3부에 걸쳐 서술한 대작인데, 에피소드 하나 하나가 워낙 강렬한 데다가 진실과 거짓말이 교차하는 서술 방식 때문에 혼란스러운 부분이 많았던 만큼 인상적이기도 했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어떻게 이런 소설을 썼는지 작가의 창작 방식이 궁금했는데,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짧은 소설 25편을 묶은 소설집 <잘못 걸려온 전화>를 읽으며 약간의 힌트를 얻었다.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은 대부분 길이가 매우 짧다. 어떤 소설은 소설이라기 보다는 산문이나 차라리 시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길이와 상관 없이 찰나의 어떤 장면이나 상황이 무척 강렬하게 서술 또는 묘사되어 있다. 가령 맨 처음에 실린 소설 <도끼>는 숙면을 취하고 아침에 일어난 여자가 밤새 자신의 옆에서 자고 있던 남편에게 이상이 생긴 걸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오직 한 인물의 대사로 전개되는 4쪽 짜리 소설이지만 몰입감과 결말의 충격은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방불케 한다.

표제작 <잘못 걸려온 전화>는 실직 이후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주인공이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타인의 과실로 인해 자신의 평온한 일상이 침해된 불쾌하고 불편한 상황이건만,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의 상황에 맞추어 예상 외의 반응을 보인다. 이런 식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할 만한 생각을 따르지 않는 전개가 이 소설집에는 여러 번 나온다. 이런 점 때문에 나를 포함한 많은 독자들이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특별하게 느꼈고,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단편으로 연마된 작가의 특기가 최대한 발휘된 작품이 아닌가 싶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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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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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자신이 오래 거주했거나 특별한 추억이 있는 공간을 배경으로 설정한 소설을 쓰는 건 멋진 일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운명과 분노>의 작가 로런 그로프는 12년 간 거주한 플로리다를 배경으로 쓴 단편 소설을 엮어 <플로리다>라는 소설집을 출간했다.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플로리다에서 태어나고 자랐거나, 다른 지역에서 거주하다가 플로리다로 이주해 왔거나, 타지에 있으면서 자신이 떠나온 플로리다를 그리워 한다.


각각의 소설에서 플로리다는 단순한 공간적 배경이 아니다. 알다시피 플로리다는 미국 남부에 위치해 일 년 내내 따뜻하고 여름에는 극도로 습한 지역이다. 길가에는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내는 팰머토 야자수가 심어져 있고, 뱀, 도마뱀, 악어 같은 열대 동물이 집 주변은 물론이고 실내에도 출몰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이러한 공간에서 산책을 하거나 캠핑을 하거나 집을 짓거나 가족을 만들며 다양한 일을 겪는다. 공간이 공간이다 보니 이들이 겪는 일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거나, 평범하게 보이지 않는다. 가령 독박 육아를 하는 엄마가 아이들을 혼내고 집 밖으로 나왔을 때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이 어두운 잡목림과 도마뱀이 기어 다니는 길바닥이라면, 그 감정이 훨씬 더 끔찍하지 않겠는가. 


로런 그로프가 여성 작가이고 여성의 삶에 관심이 많은 작가인 만큼, 여성이 주인공이고 여성의 다양한 삶을 보여주는 소설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유령과 공허>는 두 아들을 키우는 여성이 밤에 혼자서 산책을 하면서 느끼는 공허함과 절망감을 보여주고, <미드나이트 존>은 캠핑 도중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운 남편을 대신해 자식들을 지켜야 하는 여성의 막막함과 어려움을 그린다. <살바도르>는 몇 년 째 어머니를 간병하고 있는 헬레나가 오랜만에 휴가를 얻어 브라질의 낯선 도시에서 보내는 며칠을 담고 있는데, 이 또한 좀처럼 주목 받지 못하는 여성들의 삶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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