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 인간 - 잘 안다고 착각하지만, 제대로 모르는 존재
황상민 지음 / 푸른숲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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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집에서는 말 잘 듣는 큰딸, 학교에서는 반장을 도맡아 하는 모범생으로 착하고 순종적인 생활을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겉모습일 뿐. 나의 실체(?)를 아는 사람들은 나에 대해 별나다, 독특하다, 엉뚱하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런 이중 생활이 스스로도 이상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면서 자연스럽게 심리학을 찾았고, 어느덧 제법 많은 양의 책을 섭렵했다. 그래도 여전히 나에 대해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이 있었는데, 올해초 벙커1 특강을 통해 황상민의 WPI를 알게 되고 '황상민의 집단상담소'를 애청하며 '나란 인간'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황상민의 집단상담소가 책으로 나왔다. 제목은 <나란 인간>. 공식적으로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하버드대학교 심리학 박사이며, 비공식적으로는 한국인의 마음을 정확히 꿰뚫는 심리학계의 셜록 홈즈 황상민 교수가 쓴 이 책은, 저자가 직접 개발한 성격유형검사, 일명 'WPI'를 활용해 대학로 벙커1에서 실시한 워크숍에서 나온 이야기를 모아 엮은 것이다. WPI는 한국인의 특성을 가장 잘 반영한 성격검사툴로, 사람을 로맨티스트, 휴머니스트, 아이디얼리스트, 리얼리스트, 에이전트, 이렇게 5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각각의 유형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먼저 로맨티스트는 남녀 간의 연애 감정처럼 깊고 감성적인 인간관계를 중시하고, 휴머니스트는 보다 넓은 범위의 사교활동과 권위를 중시한다. 아이디얼리스트는 개성적인 반면 현실성이 약하고, 리얼리스트는 현실적인 반면 개성이 약하다. 에이전트 또한 개성이 약하며 과제 완수를 무엇보다 중시한다.


 

WPI의 의의는 심리나 성격을 '사주팔자'처럼 타고나며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적 영향에 의해 개발되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보는 점이다. 기존의 심리나 성격검사는 과거의 트라우마나 부모의 교육, 가정환경 등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에 의해 인간의 심리와 성격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반면 WPI는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와 무관하게 현재 그 사람이 어떤 성격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즉 현실과 미래에 초점을 두는 점이 다르다. 생각해보면 점을 보든 심리 테스트를 하든 성격검사를 받든 간에 알고싶은 건 지금 내가 어떤 상태이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이지 과거에 어땠느냐가 아니다. WPI는 우리가 심리학을 비롯해 자신의 삶에 대한 연구의 관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바꾼다는 점이 좋다.



정식으로 WPI 테스트를 받지는 않았지만, 뒤에 실린 체크리스트로 보건대 나는 아이디얼리스트인 것 같다. 아이디얼리스트는 '세상에 대한 이해를 통해 자유를 느끼고 존재감을 얻는 종족'으로,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며', '자신만의 독특함과 새로움에 목숨 걸고 자기만의 길을 가려 한다'(p.137). 아이디얼리스트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아 뭐든 금방 배우지만, 타인에 대한 관심이 적고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지 못한다. 사람 만나기보다는 책 읽기를 더 좋아하고, 책도 다양한 분야의 책을 가리지 않고 잘 읽지만 일단 취향이 정해지면 깊이 빠져들고,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예술 같은, 요즘 사람들이 그다지 관심 없는 분야일수록 좋아하는 것이 아이디얼리스트라서였나 보다. 그래도 그나마 남들하고 어울려 사는 건 리얼리스트, 로맨티스트적인 성격이 다소 섞여있기 때문인 것 같은데, 사실 이런 리얼리스트, 로맨티스트적인 성격을 나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힘들더라도 좀 더 철저한 아이디얼리스트가 되고 싶은데...

 


그건 아이디얼리스트가 좋은 성격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여태껏 보지 못한 내 가능성의 끝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아이디얼리스트는 아이디얼리스트로서 받은 달란트를 써야' 한다(p.162). 로맨티스트인 사람이 마음껏 연애를 즐기고, 휴머니스트인 사람이 마음껏 사람을 만나고, 에이전트인 사람이 열심히 맡은 일을 해내듯이, 나도 아이디얼리스트로 태어난 이상 내 꿈을 펼치며, 내 별나고 독특한 취향을 마음껏 개발하고 발휘하며 살고 싶다. 황상민의 <나란 인간>은 이렇게 나도 몰랐던 나, 내가 만나고 싶었던 나를 알게 해준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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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못 사는 것도 재주 - 리스크 사회에서 약자들이 함께 살아남는 법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원 옮김 / 북뱅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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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수업 듣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 대학교 1학년 때 교양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실제로 했던 질문이다. 강의실 여기저기에서 손이 올라왔고, 그 중에는 친구들과 떨어져 호기롭게 그 과목을 수강한 나의 손도 있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교수님의 한 마디. "그렇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귀신인가요?" 아니다. 강의실에는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수님도 있고, 조교들도 있고, 이백 여명이 넘는 학생들도 있었다. 이들은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런데 왜 나를 포함한 수많은 학생들은 혼자서 강의를 듣는다고 생각했던 걸까? 

 

  

일본의 비평가이자 철학자 우치다 타츠루가 쓴 <혼자 못사는 것도 재주>를 읽으며 그 때 그 교수님의 질문이 떠올랐다. <나혼자 산다>라는 제목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있지만 세상에 '나혼자' 사는 사람은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 한) 한 명도 없다. 2000년대 중반부터 블로그에 올린 글을 결혼, 가족, 직장이라는 키워드로 엮은 이 책에서 저자 역시 현대사회의 문제는 스스로를 부양하는 능력을 갖추는 '자립'과 타인과 분리되어 사는 '고립'을 혼동하는 데에서 온다고 지적한다. 혼자 밥먹고 혼자 일하고 혼자 놀 수는 있어도 혼자서 사는 사람은 없다. 이를 착각하고 마치 혼자서 살 수 있는 양 타인을 무시하고 공동체의 힘을 간과한다면 더 큰 위기를 맞이할 것이라고 저자는 경고한다.  


 

인문사회 비평가의 글이라 어려울 줄 알았는데 블로그에 올린 글을 엮어서인지 의외로 읽기가 수월했다. 맨처음에 나오는 '남자는 어떻게 하면 넘어오는가?'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글이 그렇고(남자 마음의 급소를 지르는 법이 궁금하다면 반드시 읽어볼 것!), 일본의 패션잡지 '캔캠(CanCam)'의 인기 요인을 분석한 '인기 짱 일본'이라는 글도 그렇다. 저자에 따르면 캔캠은 '한 사람의 남자에게 사랑받는 전략'이 아닌 친구, 학교 선후배, 직장 상사 및 동료 등 '모두에게 조금씩 사랑받는 전략'을 제시해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한때 캔캠을 애독했던 독자로서(지금은 캔캠의 언니뻘인 아네캔을 애독중이다) 곰곰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예쁘지만 튀지 않고, 무난하지만 멋부린 스타일을 누가 싫어할까. 그런 애매모호함이 인기의 요인이었다니 신기하다.

 


마냥 읽기 쉬운 글만 있는 건 아니다. 캔캠의 인기 요인을 분석한 '인기 짱 일본'이라는 글만 해도 끝에는 '일본인은 '러블리'에 의해 리스크를 회피하고 있다'(p.46)며 일본의 대외전략을 비판하고, '주제를 알라'라는 글에서는 '1억3천만 명의 일본 국민을 '연봉'만을 기준으로 일원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다수자가 되었다'(p.196)며 일본 사회의 획일화된 분위기를 지적했다. 어디 그뿐인가. <젊은이는 왜 3년 만에 직장을 때려치우는가?>라는 책에 대해 '우리는 과연 일을 함으로써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가?'라는 기본적인 물음이 없고, '인간은 결국 돈을 원하는 거잖아요'라는 인간관이 '3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는 젊은이'를 재생산한다(p.82), 일할 의욕을 잃어가는 젊은이들에게는 ''구직 동기'와 '노동 동기'는 별개의 것'(p.101)이라고 비판하는 대목을 읽을 때에는 속이 다 시원했다.



가벼운 글에서도 이런 대단한 통찰과 꼿꼿한 정신이 느껴지는 점이 멋지다. 그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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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옷장의 비밀 - 美친 존재감의 심리
임윤선 지음 / 나비의활주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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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방에 행거를 설치했다. 그 전에는 5단짜리 수납장에 옷이며 양말, 속옷을 모두 넣고 코트나 점퍼, 자켓은 부모님 방에 딸린 드레스룸에 보관했는데, 옷 한 벌 찾으러 왔다갔다 하는 게 불편해 옷장을 사는 대신 공간을 덜 차지하고 값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행거를 설치한 것이다. 그런데 행거에 코트며 점퍼, 자켓, 셔츠, 블라우스, 원피스 등을 가지런히 걸어놓으니 내 옷 취향이 고스란히 보여 놀랐다. 코트와 점퍼, 자켓 색상은 절반 이상이 검은색. 나머지도 그레이, 네이비, 카키 같은 차분한 색 일색이다. 셔츠와 블라우스는 화이트 아니면 블루 계열이고, 원피스는 죄다 페이즐리 무늬. 나의 옷 취향은 대체 어떤 심리를 반영한 것일까?

 

 

나의 옷 취향이 반영하는 심리적 특성을 알아보기 위해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옷장의 비밀>이라는 책을 읽었다. 저자 임윤선은 한양대 교육대학원 예술치료교육학과 겸임교수, 한국예술치료교육학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고 있는 예술치료 전문가. 자타공인 패션광인 저자는 패션을 사람의 심리를 읽을 수 있는 매체로 활용할 수 있으며, 옷장 속의 옷을 훑어보고 인생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함으로써 심리를 치유하는 이른바 패션 테라피 또한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나처럼 늘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옷 위주로 입는 사람은 집단소속감이 강하고 무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내세우는 것을 회피한다고 한다. 이제보니 안에는 주로 내가 좋아하는 색상이나 무늬의 셔츠나 원피스 등을 입어도 겉은 검은색, 회색 같은 무채색 옷을 입어 가린 것이 내면의 열정을 숨겨온 나의 삶을 대변하는 것 같다. 이제부터라도 독립적인 자아를 키우기 위해 겉도 속도 내 취향의 옷, 나만의 개성이 드러나는 옷을 입어야겠다. 

 

  

무채색을 선호하는 것은 비단 나만의 성향이 아니라 한국인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성향이기도 하다. 개인보다 가족, 학교, 회사 등 집단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문화는 기왕이면 튀지 않고 집단에 묻힐 수 있는 무채색 의상을 선호하는 성향을 낳았다. 거리에 나가 보아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검은색, 회색 등 무채색 옷을 입고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가방, 구두 같은 소품과 자동차, 휴대폰 등 패션 외의 제품마저도 무채색을 선호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이는 조직의 규칙이라든가 다른 의상과 매치하기 쉽고 날씬해 보인다는 등의 장점 때문일 수도 있지만, 지나친 경우 화와 한을 억누르며 사는 우울증의 발현으로도 볼 수 있다. 다양한 색상과 스타일로 마음을 돌보는 것이 우울증 치료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니 참고해보면 어떨까.

 

 

책에는 패션 심리, 쇼핑 중독, 자존감, 패션 아트 테라피 등에 대한 설명 외에도 독자가 직접 해볼 수 있는 테스트가 다수 제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직접 실천할 수 있는 셀프 테라피 팁도 여러 개 나와 있는데, 그 중에서도 37~8쪽에 나와 있는 '패션 테라피'가 유용했다. 방법은 이렇다. 



'일단 옷장 문을 활짝 열고 옷장 속의 옷들을 쭉 훑어보도록 한다. 구체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약간의 재료가 필요하다. 도화지와 패션잡지, 그리고 펜과 풀, 가위 정도면 된다. 만약 지금 당장 시도하고 싶다면 임시방편으로 종이와 펜만 가지고도 할 수 있다. 옷장의 옷들을 보고 난 후 도화지나 종이를 반으로 접어 왼쪽에는 과거에 입은 옷을, 오른쪽에는 현재 입는 옷 스타일을 잡지에서 비슷한 것들로 골라 붙여본다. 잡지에서 골라 붙일 수 없는 상황이면 펜으로 청바지, 실크 블라우스, 꽃무늬 원피스 등으로 상세히 써보도록 한다. 양쪽 면이 모두 완성되면 서로 비교해서 과거와 현재 삶을, 입었던 옷을 통해 알아보고 생각하며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다. (p.38)



이밖에 쇼핑 팁, 헤어와 메이크업 노하우 등 패션에 관한 정보도 실려 있고, 별자리와 혈액형에 따른 추천 패션도 나와 있어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참고로 A형 사수자리인 나에게는 모던하면서도 여성스러운 스타일과 블랙, 다크브라운, 베이지, 카키 등의 색상이 어울린다고. A형은 페미닌한데 사수자리는 보이시하다고 하니 어느쪽을 따라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다양한 매력을 가진 것으로 믿고(^^) 쇼핑에 참고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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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껴쓰기로 연습하는 글쓰기 책
명로진 지음 / 퍼플카우콘텐츠그룹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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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때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경제학을 복수전공한 나는 취업할 때 이과 친구들이 참 부러웠다. 의약대나 공대 나온, 이른바 '기술' 있는 이과 친구들이 학부 졸업 전에 척척 취업에 ​성공하는 게 어찌나 좋아 보이던지.​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이 왜 ​이과 가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문과생도 기술이 있다고 생각한다. 문과생의 기술은 책 읽기와 글쓰기다. 이과생 중에 책 읽고 글쓰는 친구들이 드물게 ​있기는 하지만 문과생처럼 압도적으로 많지 않고 깊이나 섬세함도 다르다. 


문제는 문과생들 스스로 이를 기술이라고 여기고 전문적으로 연습하거나 발전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처럼 사회대를 나오든, 경영대나 법대, 인문대를 나오든 간에 문과 출신이 사회에서 하는 일은 대개 문서를 읽고 글을 쓰는 것인데, 막상 현실에서 만나는 문과 출신 중에는 맞춤법도 잘 모르는 이들이 많다(물론 나도 부족함이 많다). 하루에 한 줄이라도 글을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글쓰기에 남보다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하물며 나처럼 앞으로 책 읽고 글 쓰는 일을 취미가 아닌 업으로 발전시키고 싶은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배우에서 작가로 변신한 명로진의 <베껴쓰기로 연습하는 글쓰기 책>은 최근에 읽은 글쓰기 책 중에 가장 좋았다.​ 저자가 직접 경험하고 실천하는 글쓰기 기술을 담고 있는 점이 좋고, 심산, 이철환, 한비야, 정혜윤 등 저자가 엄선한 작가들의 글을 베껴쓰기의 모범으로 제시한 점도 좋다. 저자가 소개하는 글쓰기 기술은 총 30개인데, 소설이나 시가 아닌 편지, 일기, 에세이, 블로그 포스팅 등 실용문을 쓸 때 필요한 팁 위주라서 실용적이고 어렵지 않아 누구나 지금 당장 글쓰기에 응용할 수 있다는 점 역시 마음에 든다. 여러 번 읽고 베껴쓰다보면 글쓰기 실력이 쑥쑥 향상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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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 천연균과 마르크스에서 찾은 진정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 정문주 옮김 / 더숲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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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의 저자 와타나베 이타루. 그는 일본의 오카야마라는 지방 도시에서도 역에서 전철로 두 시간 넘게 걸리는 산 속에서 '다루마리'라는 이름의 빵집을 운영하고 있다. 그의 빵집은 인공적으로 배양한 균대신 천연균으로 만들어 발효시킨 빵만 판다. 값도 비싸고 천연균 특유의 시큼한 맛도 나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일주일에 사흘은 휴무, 매년 한 달은 장기 휴가로 문을 닫는데도 말이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그가 시골빵집을 연 계기는 다름아닌 마르크스의 대표 저작 <자본론>이다. 대학 농학부 졸업 후 농산물 도매회사에 취직한 그는 온갖 부정과 비리를 목격하고 충격에 빠졌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는 <자본론>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자본론>을 읽으면서 그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의 원인을 파악했고, 자본가에게 잠식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 생산수단을 소유해 노동자가 되지 않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 방법으로 그는 빵을 택했고, 몇 년에 걸친 노력끝에 노동자와 자본가, 소비자, 환경이 공생할 수 있는 빵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처음엔 부패니 효모니 하는 이야기도 어렵고, <자본론>이라는 소재도 시대착오적인 것 같아 읽기를 주저하기도 했지만, 막상 읽어보니 설명이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고, 전부 저자의 체험에서 비롯된 이야기라서 생동감 있고 재미있었다. 무엇보다도 부패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인상적이었다. 현대 사회는 썩거나 부패한 것을 경멸한다. '정치가 썩었다' 라든가 '부패 경찰', '부패 조직' 같은 말의 뉘앙스가 좋지 않은 것만 봐도 그렇다. 반면 저자는 썩거나 부패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현상이며, 오히려 썩지 않고 부패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말한다. 유통기한이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썩지 않는 식빵, 제조일로부터 1,2년이 지나도 멀쩡한 라면이나 과자따위를 먹는 현대인에게는 충격적인 주장이다.

 

 

이제 폐기된 것이나 다름없는 <자본론>의 내용을 이데올로기가 아닌 삶의 원칙 내지는 철학으로 받아들인 점도 인상적이었다. 저자가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자, 자본가, 생산수단같은 개념을 자신의 삶에 적용시켜 스스로 노동자에서 자본가로 변신하고 생산수단을 소유하기 위해 노력한 과정은 오늘날의 노동자 및 프리랜서, 1인 기업가들에게도 의미있는 사례다. 저자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2011년 대지진 이후 기존의 사회 시스템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삶의 철학을 추구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어떤 모멘텀이 있어야 이런 변화가 가능할까?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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