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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도덕을 말하다 - 좋은 삶을 향한 공공철학 논쟁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 옮김, 김선욱 해제 / 와이즈베리 / 2016년 4월
평점 :
일시품절
오월엔 공휴일이 많다. 게다가 올해는 정부가 내수경기 회복을 위해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있는 주말 사이에 낀 5월 6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해 4일을 연이어 쉴 수 있다. 빨간 날만 오매불망 기다리는 현대인들에게 4일 연휴는 감지덕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번 연휴는 나흘간의 '휴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마이클 샌델의 새 책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를 읽는데 마침 공휴일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왈저가 염두에 둔 그러한 종류의 공동체를 느낄 수 있는 표현 한 가지가 바로 공휴일 제도다. 그는 현대적인 휴가와 대조해 공휴일 제도(public holiday)를 살펴보았다. 휴가가 개인적인 행사로서 책무를 떨쳐내고 일상적인 장소에서 "벗어나는" 시간인 반면, 공휴일은 우리가 함께 축하하거나 기념하는 시적인(때로는 종교적이고 때로는 공민적인) 행사다.
그는 "휴가(vacation)"라는 말의 역사를 되새기며 우리가 공동의 생활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지 보여준다. "고대 로마에서는 종교적인 제전이나 주요한 경기가 없는 날을 디에스 바칸테스(dies vacantes), 즉 '비어 있는 날'이라고 불렀다. 이와 대조적으로 공휴일은 충만한 날이었다. 책무와 축하가 충만한 날로서, 음식과 가무를 즐기고 의식과 연극을 준비하는 등 할 일이 많았다. 당시는 장엄한 의식과 흥청거림을 공유한다는 사회적 재화를 생산할 정도로 무르익은 시대였다. 누가 그러한 시절을 저버리려 하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충만감을 상실했다. 이제 우리가 갈망하는 시간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스스로 채울 수 있는 비어 있는 날일 뿐이다." (pp.261-2)
이 책은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이 그동안 미국 사회의 공공생활을 움직이는 도덕적 딜레마와 정치적 딜레마를 탐구해 쓴 31편의 평론을 모은 것이다. 미국 정치의 전통을 조망하는 1부, 소수집단우대정책, 낙태, 동성애, 배아줄기세포 연구, 오염 배출권, 대통령의 거짓말, 범죄자 처벌 등 최근 20년 동안 논쟁거리가 되었던 이슈들에 대해 정치철학적으로 접근하는 2부, 오늘날 두드러지는 자유주의 정치이론에 대해 연구한 3부로 나뉜다.
위의 인용은 3부 '공동체와 좋은 삶' 중 '공동체 구성원 자격과 분배 정의'라는 글에 나온다. 정치철학자 마이클 왈저는 공휴일이 종교적, 공민적 의무의 색채가 짙은 반면 휴가는 그러한 종교적, 공민적 의무에서 벗어나는 의미가 강하다고 설명하며, '공휴일보다 휴가에 가치를 두는 공동체는 모종의 충만이 부족할 뿐 아니라, 공동체가 그러한 공휴일을 제공하는 데 필요한 소속감을 유지하지 않기 마련'이라고 설명한다. 즉, 공동체가 공휴일을 통해 그날이 기리고자 하는 의미나 가치를 되새기지 않고 각자 알아서 휴가를 즐기는 데 만족한다면 공휴일의 의미는 퇴색되고 공동체의 결속 또한 약해지리라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당연시하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관념이나 사회 제도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국가 복권사업, 공공 영역의 브랜드화, 스포츠 비즈니스, 능력 장학금 등 사회적으로 수차례 제기된 문제들이 대부분 큰 정부와 작은 정부, 집권과 분권,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성장과 분배 같은 전통적인 논쟁에서 파생된 것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목표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자유와 그러한 '동질감을 느끼는 공동적 삶에 대한 참여자로서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고 싶은' 공동체적 열망 사이의 갈등이라고 지적한다.
이 책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올해 미국 대선에 대한 특별 기고문이다. 저자는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킨 샌더스와 사실상 공화당 대선 후보로 결정된 트럼프가 이념적 차이는 있을지언정 미국 대중에게 호소하는 지점은 같다고 본다. 오늘날 미국 국민들이 생각하는 미국 사회의 최대 문제는 불평등이다. 이들이 불만을 품는 대상 또한 거대한 자본과 타협해 불평등을 해소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 기득권층 전체이지 민주당이나 공화당 어느 한쪽이 아니다. 이에 대해 힐러리 클린턴이 안온하게 대처하는 동안 샌더스는 대형은행 해체, 금권정치 타파, 금융 투기에 대한 세금, 국공립 대학 등록금 무상화, 전 국민 단일 의료보험 시스템 같은 급진적인 개혁안을 내놓아 민주당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트럼프는 불법 체류자 강제 추방을 의제화해 이민자로 인해 일자리와 임금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는 근로계층 유권자들을 사로잡았다.
저자는 샌더스와 트럼프 지지자 간에 이념적 유사성은 없지만 무엇이 옳고 어떤 세상이 공정하고 정의로운가에 대한 도덕적 관념은 비슷하다고 본다(이건 한국 정치 상황도 다르지 않을 듯하다). 또한 정치와 도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이념 논쟁이나 효율성과 형평성 같은 경제 논쟁에 치우쳐 있는 오늘날의 정치 담론의 실상은 좋은 삶, 좋은 공동체에 관한 도덕적 담론이라고 설명한다.
공휴일은 일 년 중 하루라도 그날의 의미를 생각해보자는 공적인 약속이지 그냥 하루 쉬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공휴일을 한낱 '빨간 날'로 여기는 건 오늘날 공동체적 결속이 약해졌다는 방증이다. 한국의 경우 사람들이 공휴일을 휴가 대신으로 여기는 걸 단순히 공동체적 결속 탓만 할 수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근로자 1인당 연간 근로시간이 2057시간으로 OECD 국가 3위를 기록할 정도니 공휴일에라도 미처 누리지 못한 휴가를 즐길 수밖에. 그나마도 어린이날이다 어버이날이다 해서 가족들 챙기고 의무를 다하면서 흘려보내니, 한국인들 참 애처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