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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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이 쓴 [이병한의 아메리카 탐문]을 읽지 않았다면 이 책을 읽지 않았으리라. '자수성가'라는 말로 정리되는 책이라고 생각했으니.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쉽게 '라떼는~'을 말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된 사람들을 사회의 책임보다는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J.D.밴스. 솔직히 모르던 이름이었다. 모르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그 이름을 들었어도 관심이 없었다는 뜻인데, 세계 최강대국이라고 하는, 우리나라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미국의 부통령이 바로 이 사람이다.


그것도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있는 정부에서 그 다음의 자리인 부통령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니, 내게 호감을 줄 리가 없다. 그런 사람이 쓴 책을 읽을 일도 없다고 여겼고.


40세에 부통령이 된 사람이니 좋은 환경에서 출세가도를 달린 사람이겠거니 했다가, 이병한의 글을 읽고 아니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는데, 자신이 성장한 환경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 정말 '꼰대'라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나이 불문하고 그들은 환경에 매몰돼 자신을 돌보지 않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 자신은 그 소굴을 벗어났으니까. 그런 소굴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그들이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니까.


과연 그럴까? 이 책을 읽으면서 밴스 역시 사회, 국가에 책임을 묻기보다는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것을 이겨내고 지금의 자리에 올랐으니까. 비슷한 환경인데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실패하는 것을 사회나 국가에 미룰 수는 없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과연 밴스가 극도의 가난을 경험했던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그는 가난을 경험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가난한 생활을 했다는 말이 아니다. 그가 살던 곳은 미국에서도 가난한 마을이었고, 대다수의 가정이 불완전했고 폭력적이었으며, 많은 아이들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술이나 마약의 유혹에 빠져들었다.


그도 그럴 수 있었다. 그의 집안이 지닌 폭력성. 말보다는 몸으로 해결하려는 모습들. 수없이 이혼을 하고 마약에까지 손 대는 엄마. 아빠 없이 자란 밴스. 여기까지 그가 자란 환경을 보면 그 역시 폭력과 마약, 그리고 성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그는 빠져나왔는가? 아니 그는 이런 환경에서도 또다른 환경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사실 돈이 없어서 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다른 것을 지니지 못했다고는 할 수 없다. 물론 고급 음식점에 가지 못하고, 유기농 음식을 먹는 대신에 패스트푸드로 끼니를 때웠지만, 굶주림의 단계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에는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있었다. 또한 자신을 끝까지 보호해주려는 누나가 있었고. 이들이 다른 삶이 있음을 보여주었으니... 그에게는 진흙탕 같은 현실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공부를 하고 대학을 가는데, 대학에 가기 전 해병대에 입대에 학비를 마련하고, 어느 정도 성장을 한다. 대학에서도 공부에 집중에 약 2년만에 졸업하고 예일대 로스쿨에 입학한다.


미국에서도 명문이라고 할 수 있는, 유명 정치인들이 나온 예일대에 다니면서 연애를 하고, 자신의 삶을 다른 세계로 옮기게 되는데... 여기까지의 과정을 쓴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성공담이다. 이 성공담을 통해서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그런 환경을 벗어나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게 될까를 고민하는데...


개인이 중요함을 이야기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개인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혼자서 그런 환경을 벗어기는 무척 힘들다.


밴스 역시 할머니, 할아버지, 누나, 이모들이 있었고, 자신에게 모범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우연히, 정말 우리가 말하는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처럼 그는 운이 좋았다고 자신도 이야기한다. 여기에 그는 백인이다. 자신은 와스프(WASP)가 아니라고 하지만 백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미국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태어났다거나 라틴아메리카 출신이라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조건이라는 뜻이다. 이런 우연이 없었다면 그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알 수 없다.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해보자. 전적으로 자신을 받아들여 줄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자신에게 다른 삶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려운 환경에 그냥 빠져들기만 하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음을 깨닫게 되고 노력하려는 자세를 갖추게 될 것이다.


노력하라고, 이렇게 또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자신이 믿는, 자신을 전적으로 지지해주는 사람이 이야기한다면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개인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만 해서는 안 된다. 개인의 책임이 물론 크지만, 그러한 개인에게 다른 삶을 보여줄 수 있는 환경,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회와 국가는 그런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주변에 있게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공동체 아니겠는가?


즉 좋지 않은 공동체가 아니라 힘든 환경에서도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는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할 수 있다는, 충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 정보,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와 국가의 의무다.


밴스는 부통령이 되었다. 과연 그는 그런 환경과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을까? 미국에 대한 정보가 많이 부족한 내게는 그가 그런 정책을 펼치는지 알 수가 없지만, 트럼프라는 사람이 그런 정책을 펼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 그가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환경과 기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학교다. 의무교육이 거의 이루어지고 있는 세상이니, 학교에서 다른 삶을 경험할 기회를 충분히 주어야 한다. 교육개혁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고, 학교를 통해서 다른 삶을 만나고, 보게 되고 또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하며, 미래를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또한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가 자신만이 겪고 있는 일이 아님도 알게 될 것이고.


신뢰받는 교사들이 있다면 학생들의 삶에 좋은 영향을 줄 것이고, 또래 집단들을 통해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을 것이다. 밴스가 예일대 로스쿨에 들어가서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고 하는데, 그런 것을 명문이라고 하는 학교에서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 전, 의무교육을 받는 동안 모든 학생들이 경험할 수 있게 한다면, 좋지 않은 환경에서 지내고 있는 아이라도 다른 삶을 꿈꿀 수는 있을 것이다.


여기에 마을 환경을 개선하고, 위기 가정에서도 아이들이 마음을 줄 수 있는 대상을 찾을 수 있는 제도적 지원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는 잘 서술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다는 내용은 없다. 구체적인 대안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략 환경을 어떻게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아 아쉽다.


밴스가 말하듯이 지지해 줄 수 있는 사람, 다른 삶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람이 주변에 있어야 한다는 것 말고, 사회가 국가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서도 자신의 생각을 알려주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 미국 부통령이 된 지금, 그가 이 책에서 쓴 내용을 과연 실천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었을 텐데, 그 점이 없으니... 


자수성가한 사람, 진흙탕에서도 꽃을 피워낸 사람의 이야기로 읽기에는 좋지만... 그가 과연 자신처럼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이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정책을 펼치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런 정책을 펼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인데, 개인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사회 제도를 바꾸려는 모습을 밴스가 보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점에서 아쉬운 마음이 드는 책이다.


참고로 힐빌리는 가난한 마을 사람을 일컫는다고. 화이트 트래시 white trash 또는 레드 넥red neck이라고도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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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혼
새뮤얼 버틀러 지음, 한은경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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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혼. 영어로 nowhere를 거꾸로 쓴 제목이다. 없는 곳, 유토피아와 같은 뜻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소설을 읽어보면 그곳은 결코 유토피아는 아니다. 그렇다고 디스토피아라고 할 수 있을까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냥 현실과 다른 곳. 우리가 사는 모습과는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 정도로 보면 되겠다. 이 책이 1870년대에 쓰였다고 하니, 참 오래 된 책이기도 한데,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생각해도 될 듯하다는 생각도 든다.


[걸리버 여행기]와는 다른 점이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에레혼에 대해서 결코 긍정적인 생각을 지니지 않는다. 그곳에서 탈출했다는 것을 보아도 그렇고, 당시 종교적인 신념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들을 전도하겠다는 생각도 소설에서 드러나고 있으니..


물론 당시 종교가 우세하던 사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당시의 종교를 다른 존재들에게 강요하는 모습을 비판한다는 의미로 파악할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달라지니... 하지만 당시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서 이러한 소설을 썼을 테니...


우선 이 사회에서 커다란 범죄는 질병이다. 세상에 병에 걸리면 감옥에 가야 한다니... 그것도 횡령보다도 더 심한 범죄라고 하니... 질병을 사회에서 차단하는 시대의 모습이 담겨 있다고 해야겠다. 감옥과 병원이 하는 역할이 바로 '격리'에 있고, 이는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니 질병이 범죄가 된다는 소설의 설정은 이제 질병은 사회에서 격리되기 시작하는 사회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고, 횡령과 같은 경제적 범죄가 큰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은 당시 산업혁명으로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질병에 걸린 사람은 노동력을 상실할 테니, 이것은 산업혁명으로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 사회에서는 용납하기 힘듦을 소설을 통해서 생각하게 된다. 결국 범죄란 그 사회의 필요에 반하는 행위가 해당한다는 점... 


여기에 기계를 폐기한 사회가 바로 에레혼인데, 이렇게 기계를 파괴한 사회를 등장시키는 것은 사람들이 기계와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넘어 기계에 의존하는 사회로 가고 있다는 점, 이것이 인간의 자율성을 파괴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지금 현실에서 기계는 인공지능으로 대체가 되고, 이미 인간의 수준을 넘어섰다고 하는데, 이 소설에서 그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기계에 대한 구절... 이 문장은 현재도 유효하다.


'기계에게 영향을 미치고 기계를 만든 것이 인간이듯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고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기계다. 인간은 현재의 다양한 고통을 겪거나 아니면 점차 인간이 만들어낸 창조물에 의해 스스로 대체되는 것을 보는 두 가지 길 가운데 선택해야 하며, 그러다가 들짐승이 인간과 비교가 되지 않듯 인간도 기계와 비교가 되지 않을 때가 온다.'(275쪽)


그래서 기계를 파괴한 사회가, 어떠한 기계를 사용하는 것도 범죄가 되는 사회가 바로 에레혼이다.


또한 소설에는 육식을 금지하는 내용과 채식까지도 금지한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결국 이것들을 지나치게 규제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고기를 금지한다고 해도 이것이 부자들에게는 별 소용이 없음을, 어치피 가난한 사람들은 이러한 규제가 없어도 고기를 먹지 못한다고, 빈부격차를 비판하고 있는 장면도 있다.


소설을 읽다보면 에레혼이 유토피아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설의 주인공은 에레혼을 동경하지 않는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은 다시 에레혼으로 가서 그들을 개종시키는 것, 노동력을 제공하는 존재로 데리고 오는 것 정도이니까.


그렇다고 디스토피아도 아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잘 살아가기 때문이다. 다만, 소설에서 미래란 과거와 현재가 품고 있는 상태라고 하니,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과거를 현재에 들여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의 미래가 유토피아를 향할지, 디스토피아를 향해 나아갈지 그것은 바로 현재에서 과거를 인식하고 현재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미래는 현재에 의존하고 현재는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묵인에 의해서만 살기 때문에 그 존재는 인간의 삶에 가득한 소소한 타협 중 하나에 불과하다) 과거에 의존하며, 과거는 변하지 않는다'(269쪽)고 소설에 표현된 말처럼.


이러한 소설과 같이 우리가 참조할 과거가 이미 있으니... 백 년도 전에 나온 소설. 이 소설에서 '기계, 교육, 먹을거리' 등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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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참 읽기 힘들다. 시라고 하기보다는 산문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시들이 길다. 길고 행이 나뉘어 있지 않은 시들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외국어가 왜 이리도 많이 나오는지... 외국어? 시집 제목이 '근무일지'인데... 노동하는 이야기일 텐데... 외국어라니?


  왜 외국어가 많이 나올까? 시집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이 시집에 나오는 사람은 노동자라고 하지만 정규직이 아니다. 비정규직이라도 한 직장에서 오래 일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 일 저 일을 찾아다니는 사람이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 하지 않으려 하는 일. 소위 3D업종이라고 하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 그것도 일정한 일이 주어지지 않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일해야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주체로 등장하니, 시가 짧을 수가 없다. 많은 것이 뒤엉켜 있는 작업장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 작업장 아닌가.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근근이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는 공간. 그들끼리도 소통이 잘 안 될 때가 있는데, 그러한 모습이 많은 외국어로 시집에 나타나고 있다.


이런 노동자들의 삶을 표현하는데 정제된 언어로 세련되게 표현할 수는 없다. 혼돈, 아니 어지러움, 무어라 하나로 정리할 수 없는 복잡함. 이것이 바로 이들 노동의 세계다.


일하려 하는 데도, 일하는 데도 이들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는다. 몸에 상처를 입히고, 손발이 잘려나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잃는다. 


시집 도처에서 그런 장면들이 펼쳐진다. 이게 지금 우리의 생활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이다. 우리가 편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그림자 노동, 아니 감춰진 노동 현장이다.


직접 이런 곳에서 노동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알 수 없는 노동의 현실. 그러한 막막함 속에서도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 어떻게든 일자리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이 시집에서 만날 수 있다. 그렇게 이 시집을 읽으면 우리가 보지 못했던 노동의 현실을 보게 되고, 우리가 이렇게 생활할 수 있게 되는 데는 이러한 노동들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시인은 이러한 노동자들의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편리 속에, 화려함 속에 감춰진 것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면서 이러한 노동자들에게 하는 듯한 말.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단 한 문장으로 말한다. '살아가십시오' 


시집에 나오는 '오함마 백씨 행장'에서 죽어간 백씨처럼 죽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시인은 백씨와 같은 노동자들의 현실을 '노랗던 바나나마저 검게 타버려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어요. 백두영씨가 그랬던 것처럼.'('오함마 백씨 행장' 중에서. 111쪽)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이 현실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안 된다. 노동자들이 이렇게 죽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 노동이 신성하다는 말을 하지는 않으련다. 다만,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요소가 바로 이러한 노동들 아니겠는가. 그 점을 명심한다면... 보이지 않는 노동(자)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까.


시집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다. 시인의 말처럼 '살아가십시오.', 그렇게 우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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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우주는 없다 - 우주 불평등 시대를 항해하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긴박한 질문들
최은정 지음 / 갈매나무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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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인류가 우주 개발을 한다면 책의 제목처럼 '모두를 위한 우주는 없다'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각 나라에서 우주 개발에 나서는 이유는 지구인이 함께 잘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주를 군사적으로 이용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으니, 인공지능이 군사와 결합이 되어 얼마나 파괴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 지금 현실에서 겪고 있는데, 이 인공지능과 비슷하게 우주에 있는 위성들도 군사적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하니, 모두를 위한 우주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쏘아 올린 위성들이 시한이 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거나 또는 파괴된 위성들을 회수하지 못해 지구 궤도에서 계속 떠돌고 다른 위성들과 부딪칠 가능성도 있는 상태라고 하니, 이것 역시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우주 쓰레기 문제도 심각한데... 이 우주 쓰레기가 위성과 충돌하면 또 다른 우주 쓰레기가 발생하고, 이는 연속적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한다.


이것뿐인가? 달에 있는 자원을 이용하는데, 지구인이라는 관점에서 모두에게 이로운 쪽으로 운용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달의 자원을 이용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는 각 나라들의 경쟁을 부추기게 되고 이것이 우주에서의 충돌뿐이 아니라 지구에서의 충돌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세상에 우주 개발이 무슨 선착순인 줄 아는지... 우주 개발이 선착순이라면 이것은 이미 불평등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이 우주 개발을 선점하고 있기에 이들은 한없이 유리한 위치에서 온갖 이익을 독점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선착순이 되지 않게 해야 하는데 과연 지금 그러하고 있는지...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데 나는 우주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큰 관심이 없었는데 그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으면서 그 경이로움에 감탄만 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우주 개발이 상당히 진척되었으며, 일론 머스크가 화성에 인류를 이주시키겠다고 하는 말이 단순한 호언장담이 아니라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달과 화성만 생각해 보자. 이를 근대에 접어들어 지구에서 일어났던 대항해시대에 비견할 수 있다고 한다. 다만 대항해시대는 특정 나라들이 다른 나라, 대륙을 착취해서 자신들의 부와 군사력을, 말 그대로 부국강병을 추구한 것이라면 지금 시대 우주 대항해시대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달과 화성뿐만 아니라 앞으로 태양계 너머로까지 인류가 나아가는 우주 대항해시대가 된다면 그것이 특정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 모두를 위해서, 또 단지 지구에서 살 수 없으니까 다른 행성을 개척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구와 우주에 있는 다른 행성들이 공존한다는 의미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우주를 바라보고, 우주로 나아가고자 하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구 궤도에 있는, 즉 가까운 우주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수많은 위성이 지구 저궤도에 떠 있다고 하는데, 이들 중에 상업적 목적으로 떠 있는 위성들이 더 많다고 하니, 그것도 미국의 위성들이지만, 그러한 상업적 이익이 아니라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 위성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여기에 대놓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않지만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는 위성들도 많다고 하니...


또한 우주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우주를 군사적인 목적에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해야 하는데... 각국이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서 국제적인 조약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또한 만들어져도 잘 지키지 않는 현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근대에 일어났던 대항해시대를 우주 시대에도 반복할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고, 저자는 그런 면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알아야 한다. 우주 개발이 어느 수준까지 와 있는지, 문제는 무엇인지 알아야 대처를 할 수 있다. 즉 문제를 알아야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


저자는 우주 개발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잘 알려주고 있는데 어려운 말보다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 설명해주고 있다.


특히 2부에서 이를 자세히 다루고 있는데, 2부에 나오는 장들의 제목만 봐도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우주 불평등 : 개발은 과연 모두에게 좋은가? 

  우주의 평화적 이용 : 다자간 공평한 공존은 가능한가? 

  우주상황인식 : 쏘아 올린 우주물체는 안전한가? 

  우주영역인식 : 극단적 패권 다툼을 통제할 수 있는가'


이 제목들이 바로 문제다. 문제는 이미 제기되었다. 우리가 할 일은 답을 찾는 일이다. 어쩌면 답도 이미 나와 있는지 모른다. 아니, 나와 있다. 다만 그 답을 내어놓지 않으려 한다. 왜?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답대로 해도 저들이 답대로 하지 않으면 우리 손해라는 그런 신뢰의 부족.


하여 이 신뢰 부족을 줄이면서 답을 내놓으라고 할 수 있으려면 규약을 만들어 강제력을 지닐 필요가 있다. 권고로는 안 된다. 강제력이 있어야 한다. 지구 전체의 행복과 발전을 위해서 우주 개발에 대한 협정, 규약, 제도가 필요하다. 강제력이 있는.


하여 저자는 '국제 우주법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한다. 시급한 일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저자의 말, 가슴을 울린다. 명심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소수의 기업과 국가가 지배하는 우주인가? 인류 전체가 평등하게 꿈을 펼치는 우주인가? 우주 정의는 우리 모두를 위한 정의이며, 미래세대를 위한 선택이다. 속도보다 방향을, 소유보다 상호운용을, 독점보다 신뢰를, 그리고 안주하기보다 도전하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 (302쪽)


참고로 지금 우주로 쏘아 올린 위성의 분포를 보자. 


'지금까지 지구 궤도로 발사된 2만 2,000여 개의 인공위성은 미국이 61퍼센트로 단연코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러시아가 17퍼센트, 유럽이 7퍼센트, 중국이 6퍼센트, 일본이 1.5퍼센트, 한국이 0.2퍼센트를 차지한다.'(144쪽) 


과연 모두를 위한 우주인지 이 수치만 보아도 의구심이 들 것이다. 이 책의 제목대로 '모두를 위한 우주는 없다'가 되지 않게 하려면 우주 속의 지구라는 관점... 우리는 모두 지구에 살고 있는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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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라 칼만,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것들
마이라 칼만 지음, 진은영 옮김 / 윌북아트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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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도대체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는 때가 있다. 특히 힘들 때는 더더욱 그렇다. 그럴 때 이 그림을 보면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이라 칼만의 그림들, 그림에 딸린 아주 짧은 글들. 그런데 그림을 보고 있으면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도 많음을 알게 된다.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이 들 때, 주변을 살펴보자. 자, 내 곁에 있는 것들, 아주 작은 것들부터 큰 것들, 심지어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너무도 많은 것들이 내 주위에 있다. 이것들이 모두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이다.


칼만의 이 책에 나오는 그림들은 그 많은 것들을 보여준다. 자, 보라고, 당신이 갖고 있는 것이 이렇게나 많다고. 심지어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존재까지도, 그것이 좋다고 평가받든 그렇지 않든, 그런 것까지도 갖고 있다고.


하여 침대와 책들과 케이크들, 풍선, 양배추, 바이올린 등등을 갖고 있는 여인들의 그림이 이 책에 등장한다. 그림이 화려하다거나 섬세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 또 유명한 사람들과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을 그리고 있는 그림, 여기에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들도 사물들도 나오는데...


갖고 있음을 다른 말로 하면 관계맺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인간. 그래서 무언가와 연결되는 인간. 


홀로 있다고 느낄 때 이 그림을 보면 우리는 무엇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그것들과 관계맺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결코 홀로가 아님을, 늘 무언가와 연결된 삶을 살고 있음을. 그래서 외로워하지 말고 자신의 길을 가라고 하는 듯한 그림들.


칼만은 책의 시작을 이렇게 한다.


여자들은 무얼 가지고 있나?


집과 가족. / 그리고 아이들과 음식. / 친구 관계. / 일. / 세상의 일. / 그리고 인간다워지는 일. / 기억들. / 근심거리들과 / 슬픔들과 / 환희. / 그리고 사랑


남자들도 그렇긴 하지만, 그닥 / 비슷한 방식은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을 우리는 지니고 있다. 칼만은 남자들은 '비슷한 방식이 아니'게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모두 인간이 갖고 있는 것들이다. 다만, 그것들을 갖는 방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그래서 이 책에서는 남자들이 갖고 있는 그림들도 나온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갖고 있다. 이 갖고 있는 것을 통해 다른 사람, 또 다른 존재들과 연결이 된다.


결국 칼만의 이 그림은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 결코 홀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홀로라고 느낄 때, 세상에 자신만이 고립되어 있다는 마음이 들 때 칼만의 이 그림들을 보고 주변을 보면 나는 결코 홀로가 아님을, 나는 다른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읽으면서 또 보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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