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이런 말을 해야 하나. 너무도 큰일이 일어났으나, 책임지는 사람은 없는, 진실은 저 멀리 사라지고, 언제 진실이 다가올지도 모르는, 그런 나날들.

 

서럽다.

 

진실이 묻혀 있는데, 돈을 따지기만 하는, 사람의 생명이 어찌 돈으로 환산될 수 있으며, 진실이 돈으로 계산될 수 있겠는가.

 

아직도 컴컴한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는 진실을 건져올려야 하는데, 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하고자 하지 않고, 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겐 족쇄를 채우고 있는 현실.

 

이성복 시집 "그 여름의 끝"을 읽다.

 

그 시에서 바다를 마주하고, 다시 서러움에 물들다. 바다는 이제 기쁨이 아니라, 희망이 아니라, 도전이 아니라 슬픔이고 서러움이다.

 

아직까지는. 언젠가 바다는 다시 희망이요 기쁨이고 또 도전이 되리라. 그렇게 되어야 하리라.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묻혀 있는 진실을 밝혀야 한다.

 

진실이 밝혀지는 날, 밀물처럼 다가왔던 서러움이, 나와 함께 했던 서러움이 사라지리라. 사라지게 되리라.

 

이 시집에 있는 '바다'라는 시... 어쩌면 지금 바다를 보며, 파도를 보며, 그것들이 모두 서러움임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4월의 바다.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 한, 4월의 바다는 나에게는 서러움의 바다, 슬픔의 바라로만 남을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다시 바다가 희망과 도전의 바다가 될 수 있기를...

 

     바다

 

서러움이 내게 말 걸었지요

나는 아무 대답도 안 했어요

 

서러움이 날 따라왔어요

나는 달아나지 않고

그렇게 우리는 먼 길을 갔어요

 

눈앞을 가린 소나무숲가에서

서러움이 숨고

한 순간 더 참고 나아가다

불현듯 나는 보았습니다

 

짙푸른 물굽이를 등지고

흰 물거품 입에 물고

서러움이, 서러움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엎어지고 무너지면서도 내게 손 흔들었습니다

 

이성복,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2003년 재판 12쇄.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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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4-17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긋기 이용하시면 시는 박스칸으로 들어가 집니다.^^

kinye91 2015-04-17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다음부터는 밑줄긋기를 이용해야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 - 세월호 추모시집
고은 외 지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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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으라"

 

이 기막힌 말, 살고 싶으면 가만히 있으라고... 움직이지 않아야 산다는 역설.

 

그러나 역설은 문학에서나 통하는 일. 현실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무릇 모든 생명은 움직여야 사는 법. 심장이 멈추면 죽고, 생각이 멈추면 죽음과 같고, 피가 멈추면 죽고, 우리의 움직임이 멈추면 우리는 죽는다.

 

생명은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 어떤 쪽으로든, 어떤 식으로든 움직여야 한다. 움직여야 산다. 이게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그래야 산다고. 현실과 상상이 넘나드는 세계였다. 세월호는.

 

남들은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저들은 움직이는 역설. 너는 멈추고, 나는 활동한다. 고로 나는 산다. 이것이다.

 

남을 멈추게 하고 나만 움직여야 한다. 그러니 너희들은 가만히 있으라. 억울함, 진상규명, 우리가 해준다. 그러니 너희들은 가만히 있으라.

 

정치, 경제, 우리가 한다. 우리가 알아서 한다. 너희들은 그냥 가만히 있으라. 너희들이 움직이면 나라가 위험하다. 나라가 멈춘다. 하니, 가만히 있으라.

 

만물이 생동하는 봄, 그 무엇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이 봄에, 가만히 있으란다. 모든 것을 남들의 손에 맡기란다. 남들의 말에만 따르란다.

 

뽀록뽀록 새순이 돋고, 꽃들이 피고, 바람이 생명의 움직임을 자극하는데, 하늘의 비도 이제는 움직이라고, 겨우내 멈춰있던 생명들을 재촉하는데, 유독 그 배 위에서만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아니 유독 그 배만이 아니다. 세월호라는 우리나라도 역시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그것은 너희들이 할 일이 아니라고. 오로지 우리들만이 할 수 있다고, 우리가 해주겠다고. 우리 말만 들으면 너희들은 살 수 있다고.

 

무슨 상상의 세계인가? 문학인가? 이런 허구가 난무하다니. 학창시절에 시를 너무도 잘 배워, 오로지 시에 관한 문제에서는 틀리지 않기 위해 모순어법, 역설법을 달달 외웠던 것이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가만 있으라고, 그래야 산다고...

 

현실은 그렇지 않았는데... 모두를 수장시켜 버리고 자신들은 살아나온, 자신들만 가만 있지 않았던, 그런 사람들...

 

세월호 1주기.

 

가만히 있으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라고, 우리나라라는 세월호 역시 우리를 가만히 있으라고 하지만,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는 점을 알려준, 꽃같은 생명들의 희생으로 움직여야만 산다는 것을 보여준, 그런 사건.

 

그렇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 그들이 아무리 "가만히 있으라!"고 해도 우리는 "절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

 

그것이 우리가 살 길이다. 그 길을 세월호가 생명들을 통해 알려주었다. 절대로 가만히 있지 말라고.

 

세월호 추모시집인 이 시집을 읽으며 착잡했다. 마음이 아팠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내 생명을, 내 삶을 다른 사람의 말에 맡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게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일이고, 우리나라가 세월호가 되지 않게 하는 길이라고...

 

이 시집에 나온 한 편의 시. 제발 우리가 제대로 이름을 부를 수 있기를. 말 그대로 이름값을 하게 되기를. 공자의 말대로 제대로 이름을 붙이게 되기를...

 

부를 수 없는 것들이 많아졌다

    4월 16일 이후

                                            - 박찬세

 

 

선원을 선원이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선장을 선장이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사장을 사장이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해경을 해경이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장관을 장관이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총리를 총리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대통령을 대통령이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대한민국을 대한민국이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배를 배라고 부를 수 없게 되었다

 

바다를 바다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파도를 파도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 너희들을

 

꽃 같은 너희들의 이름을 부를 수 없게 되었다

 

고은 외 68인,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 실천문학사, 2014년 1판 2쇄. 77-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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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모두 실향민이다

 

이동순의 시 물의 노래를 읽다

일제강점기에, 전쟁으로, 난개발로, 댐으로

고향을 잃은 사람, 실향민들의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해져 눈물이 울컥하는데

그 시들과

첨탑 위 노동자들,

송전탑 반대하는 산 위 노인들,

구럼바위 앞 사람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바닷속을

깊게깊게 응시하던 팽목항 사람들,

그들과 함께 애달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함께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는 모두 실향민이다.

어미의 뱃속에서 나와 탯줄이 끊긴 순간

가정에서 학교로, 직장으로, 아이들 학교를 따라 가는 순간

자신의 사상을 잃고 시류에 영합하는 순간

자본에 휘둘려, 권력에 휘둘려 사람임을 잃는 순간

무엇을 잃었는지, 어떻게 떠나왔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살아가는 순간

우리는 모두 실향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랬더니

인간이 에덴에서 쫓겨나 천년왕국을 갈구할 때

사람들이 윤회의 굴레에 떨어져 해탈을 꿈꿀 때

이미 실향민이 되었다는 사실,

우리 모두는 이미 실향민인데, 저만은 아닌 양

좀더 약한 사람을 핍박하고 쫓아낼 때

그들은 영혼까지도 고향을 잃은 실향민이니

제 상실을 알지 못하고, 제 비참을 깨닫지 못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모두 실향민이라고 우리

함께 기대어야 한다고

외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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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 - 생태적 전환과 해방을 위한 기본소득 팸플릿 시리즈 (한티재) 2
하승수 지음 / 한티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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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책자다. 팜플렛이다.

 

세계 역사에서 팜플렛이 중요한 역할을 한 적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이런 작은 책자들이 더 큰 울림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내 경우에는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가 그랬고, 크로포트킨의 "청년에게 고함"이 그랬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할 책이 생겼다.

 

작지만 많은 내용을 담고 있고, 작지만 폭발력은 대단한 책. 바로 기본소득에 관한 책이다. 외국 사람이 쓴 "조건 없이 기본소득"도 읽을 만하고 생각할 것이 많았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쓴 이 책은 우리나라 현실에 더 가까워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집단이 많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찻잔 속의 태풍처럼, 아는 사람만 아는 정책이 되고 있다.

 

그만큼 새로운 정치집단이 제도 정치권으로 진입하기가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존의 언론들이 이러한 문제를 잘 다뤄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난관을 헤쳐나가는 방법이 바로 팜플렛이다. 작은 책자로 상대적으로 싼 가격으로 여러 사람에게 읽히는 일.

 

복잡한 수식을 제외하고, 난해한 이론을 빼고 간단명료하게 주장의 핵심을 전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영향력을 확보해가는 일이다.

 

요즘처럼 스마트폰이 발달한 시대, 전자매체의 영향으로 긴 글을 읽기 힘들어하는 시대에, 기본소득같이 사회를 바꿀 정책에 대해서 알리는 길은 짧고 명료하게 정리한 책을 내는 일.

 

그리고 여러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저렴한 가격이어야 하고, 전철이나 또는 다른 장소로 쉽게 들고 다니며 읽을 수 있는 크기여야 한다는 것.

 

이 책은 이런 점을 만족시키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명료하다. 주장이 확실하다.

 

확실하기에 설득력이 있다. 그냥 그럴 수 있을까가 아니라, 그럴 수 있다다. 한 번 해보자라고 주장한다.

 

충분히 가능하기에 시도하면 된다고, 간략하게나마 기본소득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복잡한 수치를 동원하지 않고도.

 

무엇보다 이 책에는 철학이 있다. 방향이 있다. 전망이 있다.

 

기본소득은 불평등이 심화되는 우리나라에서 불평등을 고쳐나갈 좋은 방법이며, 또 실업으로 인해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생존의 문제를 해결해주어 생활의 문제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기본소득이 시혜가 아니라 국민들이 받아야할 당연한 권리라는 사실을, 기본소득은 우리가 함께 사용해야 할 공유재를 사용한 결과를 함께 나누는 것이라는, 마치 주식을 가지고 있는 주주들이 한 해를 결산하고 배당을 받듯이 기본소득 역시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사회가 유지, 발전된 결과에 배당을 받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국민 모두가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인 것이고,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주주니까, 주주로서 대한민국 활동의 결과를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본소득을 권리의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그 권리를 실현시킬 방법에 대해서 고민해야지, 주느냐 마느냐는 논란거리가 되지 않게 된다.

 

다만, 문제는 할 수 있는 일, 해야만 하는 일이 눈 앞에 있음에도 하지 않는 집단이 기득권을 쥐고 있다는 것, 그런 기득권을 없애고, 새로운 정치세력이 정책을 펼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기본소득에 대한 이해가 확산되고,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들, 단체들이 늘어나면 이를 정책에 반영하는 정치세력들이 나올 것이라는 점에서, 우선은 기본소득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이런 팜플렛이 우리의 삶을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아니, 하게 해야 한다. 이 책의 작은 제목처럼 '생태적 전환과 해방'을 위해서는 기본소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될 그 날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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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만개했다. 한껏 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렇게 우리에게도 봄이 왔으면.

 

지금 우리는 경제에 목매고 있다. 문제는 경제다. 답도 경제다. 오로지 경제뿐이다. 그런데 경제만 이야기하면서, 경제를 이루는 사람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경제가 우리를 옭죄고 있지만, 경제의 정체는 모른다. 경제가 좋아지고 있다는 말은 많은데, 내 삶은 경제와 상관없는지 경제와 삶이 따로 놀고 있다.

 

봄은 분명하게 우리 눈에 보이는데, 경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다. 경제가 좋아지만 살림살이가 나아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실업률은 점점 올라가고, 문 닫는 가게들이 많으며, 정규직들이 비정규직으로 전환이 되고, 비정규직들은 재계약에 실패를 하는 걸까?

 

왜 어른들의 지갑은 점점 얇아지는데, 경제는 회복되고 있다고 할까?

 

자신의 한 몸 쉴 집을 얻기는 더욱 힘들어지고, 전세마저도 얻기 힘들어져 아이들이 커갈수록 집이 넓어져야 하는데 오히려 집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으니, 이 놈의 경제야, 너는 달팽이의 집처럼 사람들의 몸에 떡 붙어 있지 않고 어디 갔느냐.

 

너는 달팽이가 아닌 민달팽이처럼 사람들의 몸에서 떠나갔느냐. 그냥 그렇게 약한 몸을 내보이게, 그 몸 하나 들어 쉴 수 없게...그렇게...

 

공공요금이 오르고, 세금도 실질적으로 오르고, 그렇다고 연금 혜택은 상대적으로 줄고,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수치상 경제는 좋아지고 있다고 하니...

 

경제는 도깨빈가 보다. 사람들과 상관없이, 또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제 멋대로 행동하는, 그런.

 

박성우의 "거미"라는 시집을 읽다. 역시 헌책방에 구한 시집. 첫시인 '거미'가 너무 우울하다. 세상에 허공에 발을 딛고 집을 짓는 거미라도 되면 좋겠는데, 오히려 거미줄에 걸린 곧 목숨을 잃을 작은 존재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그런 생애. 그래서 이 시는 슬프다. 지금도 이렇게 거미줄에 걸린 사람들이 많으므로.

 

이 시집에는 이런 작고 약한 존재들이 많이 나온다. 경제와는 상관없이 제 한 몸 돌보기 힘든 존재들. 그러나 생은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것. 비록 집도 없고, 길이 없는 허공 중에 몸을 맡기고 있을지라도, 길을 만들어가야 함을.

 

박성우의 '민달팽이'라는 시. 이 땅에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시라는 생각이 든다. 민달팽이의 없는 집,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경제. 우리는 이런 민달팽이같은 존재들인지...

 

아니다, 비록 작더라도 제 몸을 쉴 수 있게 하는 달팽이처럼, 그런 작은 집을 우리 모두 가질 수 있게... 그렇게 해야겠다. 슬프지만 '민달팽이' 시 보자. 그리고 이런 일이 없게, 정말로 경제가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날들이 오기를 바라며...

 

 

민달팽이

 

그가 귀가를 한다

저 민달팽이의 등은

지나치게 가벼워서 무거워 보인다

 

걷는다는 표현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바닥까지 처진 어깨가

천천히 길을 밀고 나간다

언제부터인가 그에게는

늘어진 양어깨가 다리였으므로

빨래처럼 처진 몸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어깨에 신는 신발은 없으니, 당장

닳아질 희망의 뒤축이 없어서 좋겠다 그에게도

한때는 감미로운 집이 있었다

아이스크림 같은 집,

 

너무나 달콤하게 흘러내린

똥 같은 집

똥집도 안 파는 포장마차 같은 집

잠시 멈춘 그가 집을 지나친다

어쩌다가

아이들만 누수시켜놓은 집

 

한사코 그의 목에 감겨 있는

저 실없는 실업,

그의 목을 한껏 조이고 있다

 

박성우, 거미, 창작과비평사, 2002년 초판. 46-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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