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맞이하는 부처님 오신 날.

 

부처님은 신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지 않고,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왔다.

 

인간의 모습으로 왔기에,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고난들을 겪었다.

 

그러한 고난을 통해 부처님은 인류의 스승이 될 수 있었다.

 

부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지 않고 신의 모습으로, 인도의 신화에서 말하는 비슈누의 환생으로

우리에게 왔다면 그는 신으로만 존재하지 인류의 스승으로는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인간의 모습으로 와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들을 겪었으며, 이를 극복해가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몸소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야할 길을 보여주신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의 고통들(苦)들이 모여서(集) 우리를 괴롭게 하지만, 그것을 없애서(滅) 진리의 경지(道)에 오르게 되리라.

 

이러한 단계에서 겪게 되는 우리의 일곱가지 마음들...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

 

이 중에서 통제를 잘못해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이 중에서 자기가 원하는 감정만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이렇게 이들에게 세상을 그렇게 살지 말라고, 세상을 이렇게 살라고 말하는 스승이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말로는 멘토, 멘토 하지만, 진정 스승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봤는지 생각해보게 하는 부처님 오신 날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우리네 삶에서 덜어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이미 부처님은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단지 부처님 오신 날만이 아니라, 평소의 생활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는가.

 

스승은 있다. 다만 우리가 찾지 않을 뿐이다.

부처님 뿐만이 아니라, 예수도 공자도 또다른 다른 성인들도 모두 우리의 스승이 아니던가.

 

그런 스승들은 모두 하나로 통하지 않던가.

 

바로 잘 삶. 어떤 삶이 잘 삶인가. 다시 스승을 찾자.

 

스승을 찾아나선 선재동자처럼. 우리도 스승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자.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더불어 그러한 스승들이 존재하는 곳, 절에 대해서도 종교를 떠나 한 번은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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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삼 시인에 대해서는 그냥 모더니즘 시인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의 시들은 짧고, 또 내용없는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내용없는 아름다움이었을까?

 

그것은 그의 시 "북치는 소년" 때문이었다.

 

북치는 소년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김종삼 시선, 스와니강이랑 요단강이랑, 미래사, 1994. 1판 4쇄. 28쪽

 

바로 이 시 때문에 내용보다는 어떤 분위기로 시를 느끼게 하는 그런 시인으로 알고만 있었다. 여기에 "묵화"란 시에서 느껴지는 한 편의 그 고요한 동양화 같은 느낌. 분위기...

 

그런데 "삶창"을 읽다가 김종삼 시를 소개하는 글을 만나게 되었다.

 

어? 김종삼 시를 이렇게 읽을 수도 있네. 이런 면이 있네.

 

시인에 대해서 시 한두 편으로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하는 반성.

 

요즘 시대와 맞물려 가슴 아프게 다가온 시도 있고.

 

또 그의 이번 시집에 등장하는 전봉래나 김관식 등과 가까이 지냈다는 사실에서 그를 단순히 모더니즘 시인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단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와 같은 다른 좋은 시들도 많지만, 지금 현재 우리의 상황과 우리의 역사와 관련지어 내 맘을 때리던 시...

 

마음에 큰 울림을 준 시. 왜 이리 서글퍼지는지...

 

민간인(民間人)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嬰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김종삼 시선, 스와니강이랑 요단강이랑, 미래사, 1994. 초판 4쇄 69쪽

 

슬프다. 지금 우리도 그 수심을 모른다. 끝도 없는 수심. 

 

세월이 흘러 이제는 이런 시가 과거의 시로만 존재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김종삼은 짧은 시 속에서 우리 민족의 현실을 담아내고 있기도 하다. 이것이 김종삼 시에 대해서 다시 보게 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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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뒤숭숭하다.

 

한 나라를 대표한다는 대변인이 성추문 사건에 휩싸이지 않나, 어느 대학에서는 국문과를 없애겠다고 하지 않나.

 

적어도 국문과는 우리나라의 학문을 연구하는 곳이고, 이는 인문학에서 대표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곳일텐데, 이익이 남지 않는다는 이유로 없애겠다고 하는 사람이 대학을 운영하는 현실.

 

결국 대학이란 학문을 하는 곳이 아니라, 이익을 추구하는 곳임을 만천하에 알리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국문과가 '굶는과'라고 굳이 대학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

 

이제는 학문도 경제의 영역에 편입되고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처럼 잘 보여준 사례가 있을까 싶다.

 

사람들이 반대를 엄청하고 있고, 비판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에는 눈이 없고, 귀가 없다. 오직 돈맛을 아는 촉수만이 있을 뿐이니.

 

마찬가지다. 한 나라를 대표한다는 대변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는 일반 국민들도 상식처럼 알고 있지 않은가.

 

쓸데없이 오해받을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 어떤 상황에서도 냉철한 이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 그 점을 다들 알고 있는데 당사자만은 모르고 있다고 해야 하나.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이번 녹색평론 130호를 읽으면서, 우연인지, 아니면 이미 앞을 내다보고 있었는지, 이번 호의 주된 기사가 지식인에 대하여였기 때문이다.

 

지식인,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성찰할 뿐만이 아니라, 사회를 성찰하고,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끔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지식인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들에게 나름의 존경하는 마음을 보내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주로 대학에서 길러진다고 믿어지고 있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대학에서는 지식인이 아니라, 지식노동자, 또는 어용학자들을 양산하기 쉽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외국에까지 나아가서 한 일을 보면 역시 지식인이 길러지기는 참으로 힘들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고.

 

경어인(鏡於人)이라고 자신을 거울이나 물이 비추어보지 말고, 사람에 비추어보라는 말. 나를 알고 싶다면, 나를 제대로 판단하고 싶다면 내 주위의 사람을 살펴보면 된다는 말이 새삼 떠오르는 요즘이다.

 

녹색평론을 읽으면서 소위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자신 주변의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지를 한 번 살펴봤으면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고.

 

적어도 삶을, 사회를 성찰하는 지식인들이 우리나라에 많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진정한 지식인이 존재하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도대체 대학은 어떠해야 할지, 그리고 공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어찌해야 할지, 또 학자라는 사람들은 어떤 태도로 학문에 임해야 하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그런 성찰을 바탕으로 사회는 좋은 쪽으로 흘러가게 된다.

 

성찰할 수 있는 주제 참 많다.

 

하지만 그 많은 것 중에서 녹색평론에서 끊임없이 성찰의 주제로 삼은 것은, "핵, 민주주의, 농업, 환경, 생태 등"

 

하여 녹색평론은 내 주변의 사람들과 더불어 나를 살펴보게 되는 거울이 된다. 끊임없이 나를 성찰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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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온갖 것들이 깨어나고 있는 이 때, 이들을 축복하기라도 하듯이 봄비가 내리고 있다.

 

촉촉하게.

 

이 촉촉함이 모든 사람들 마음에 젖어들었으면...

 

아직도 봄이 오지 않은 사람들, 봄을 만끽할 수 없는 사람들...

 

진정, 봄이 필요한데, 그들에겐 아직도 겨울인 그런 사람들.

 

그 사람들의 가슴에 봄을 잊지 않게...

 

봄이 오고 말리라고...

 

봄비가 내리고 있다.

 

삶창 92호를 읽다.

 

봄비만큼 마음을 촉촉하게 적신다.

 

이 작은 책에 봄이 들어 있다.

 

우리네 삶의 봄이.

 

연초록의 싱그러운 잎들이 제 자태를 뽐내지 않고 드러내듯, 삶창도 그렇게 연초록의 밝음으로 세상에 나오고 있다.

 

새순들 자체가 세상을 밝게 하듯이, 삶창도 존재 자체로 세상을 밝게 하고 있다.

 

그래서 봄비만큼이나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 따뜻함.

 

힘든 시기를 견디고 있는 사람들이 견디어낼 수 있는 힘으로 바뀌리라.

 

봄비가 땅에 스며들어 새싹들의 영양분이 되듯이, 삶창도 사람들에게 영양분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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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엑스 -상 - 제3세계총서 1
알렉스 헤일리 지음 / 창비 / 1978년 7월
평점 :
절판


"검은 것이 아름답다."

 

이 말은 흑인들이 백인들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로서 만들어진 말이다. 흑인들을 비하하는 세상에서 흑인들 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이 말처럼 좋은 말이 있을까.

 

과학이 발전하면서 우생학을 잘못 도용하여 인종간에 우열을 나누는 경우도 꽤 있었고, 그러한 우생학을 바탕으로 유색인종은(세상에, 그렇다면 백인은 유색인이 아닌지...) 열등하다는 주장을 했고, 또 그렇게 대우를 했다.

 

그런 차별 대우가 언어에도 녹아 있어, 흑인들은 니그로라는 말로, 또는 혼혈임을 나타내는 말로 쉽게 지칭이 되었으며,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도, 살고 있는 지역도 모두 차별을 받았다.

 

아주 오래 전, 중세 시대의 이야기? 아니다. 이것은 현대의 이야기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민주주의가 발전했다는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러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일어선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에게 알려진 사람으로는 미국인으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말콤 엑스가 있다.

 

킹 목사는 평화주의자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람으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연설로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져 있고, 세계적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이지만, 말콤 엑스는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진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만큼 그의 전기를 구해서 읽기도 쉽지는 않다. 킹 목사가 계속 간디와 더불어 조명을 받는 것에 비하면 말콤 엑스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한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그에 대한 오해와 그의 종교.

 

그는 이슬람교도다. 젊은 시절 온갖 방황을 거쳐(이런 방황이 사실은 그가 흑인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사실. 이것을 인식해야만 사회는 변할 수가 있다. 그는 학창시절 뛰어난 성적을 거둔 학생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장래 희망에 대한 무시를 견딜 수 없어 자신의 피부색에 맞는 동포들을 찾아 할렘으로 간다. 이 할렘에 거주하는 동안, 그는 밑바닥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경험했다고 해야 한다.) 감옥에서 맞이하게 되는 이슬람.

 

그것은 그에게 구원의 빛이었다. 그 빛을 향해 그는 앞으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아갔으며, 그러한 그를 언론들은 과격하다, 증오를 빚는 사람이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언론을 누가 장악하고 있었는가? 그것은 바로 백인이다. 하여 말콤 엑스는 증오는 바로 백인들이 만들어낸 것이며, 자신은 그러한 증오를 없애기 위해서 노력한다고 주장을 한다. 그 증오를 없애는 방법, 그것은 흑인의 권리를 되찾는, 흑인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 것이라는 주장, 이 주장이 백인게에는 또다른 증오의 모습이었으리라.

 

게다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미국이지만, 미국인들 대부분이 기독교인인 나라에서 이슬람을 믿는 말콤 엑스는 이미 이단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의 목사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킹 목사와 그가 다른 점이다. 요즘 이슬람에 대한 인식을 보라. 아마 그 때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도 그를 이슬람으로 이끌었던 종교지도자와의 갈등으로 그 단체에서 정권(권리를 중지당함)을 당한다. 그 후 그는 다른 단체를 이끌게 되는데, 이것이 흑인과 흑인의 갈등으로 보이게 되는 소지를 남기게 된다.

 

백인에 대한 증오가 있었던 말콤은 성지 순례를 통해 인종간의 갈등을 어느 정도 극복한다. 그는 이제 흑인만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즉 사람에게는 피부색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한 단계 나아간 말콤의 의식이 사회운동으로 정립되기에는 활동 시기가 너무 짧았다. 곧 그는 암살을 당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인종을 넘어선 더욱 폭넓은, 인종을 초월한 평화주의자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두 권으로 되어 있는 오래 된 책.

 

다시 읽으니 참으로 흥미롭다.

 

사회의 바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헤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말콤 엑스의 이야기는 희망을, 가능성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가 사람을 나락으로 내쳤더라도, 깨어있는 사람은, 그 사회의 모순을 파악하고,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 그러한 깨어있는 사람이 결국 사회를 바꾸어 간다는 사실. 이를 말콤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게 된다.

 

그의 삶은 정말로 바닥에서 시작했으니 말이다.

 

진흙에서 핀 연꽃. 그 연꽃은 사회 변화의 상징이다.

 

많은 책 중에 창비 판으로 읽었는데, 다시 활자를 현재에 맞게 고쳐서 재출간하면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어려운 시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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