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에 '사랑굿'이란 시집을 읽은 적이 있다. 어렵지 않은 시. 마음에 들어오는 시들.


  그러다 우연히 김초혜 시인의 남편이 조정래 소설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어느 글에서 조정래 소설가가 예전에는 김초혜 남편 조정래였는데, 이제는 자신의 이름으로 작가로 설 수 있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이런 사실에서 하나 더 나아가 이들의 가족문학관이 있다는 사실. 그 문학관의 이름이 좀 길다. 2017년에 개관했다고, 전라남도 고흥에.


  '조종현 조정래 김초혜 가족문학관'


  그럼, 조종현은 생소한 이름이었는데 시조시인이고 조정래 소설가의 아버지란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아버지 역시 시조시인으로 유명한 분이라고 하고... 이렇게 가족문학관이 생기는 문학 가족인데.


이 시집은 1943년생인 시인이 2017년에 발간한 시집이니 70이 넘어서 낸 시집이다. 원숙함의 경지라고 해야 하나,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뒤돌아보면서 자신의 삶을 관조하는 모습이 담겼다고 해야 하나.


읽으면서 '잠언'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니, 달관의 경지다. 이 정도면. 하여 시집에 실린 시들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추운 겨울, 또 냉혹한 사회 현실 속에서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시들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한발 물러나 보게 하는 시들도 필요하단 생각이 든다.


물론 이렇게 달관의 경지에까지 이른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마는, 달관의 경지를 엿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다 현대시를 비판하는 시를 읽고는 시인들에게도 현대시는 어렵구나, 그렇지, 현대시는 비평가들을 먹여살리는 역할을 하지.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니 비평가들이 해설해주어야 그나마 그렇구나 할 수 있으니.


하지만 비평가들마저 온갖 문학이론을, 철학을, 사회학을 들이대어 해석해내는 시들이 과연 많은 사람들에게 와 닿을까. 오히려 그런 시들이 사람들에게서 멀어지는 역할을 하지 않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애송하는 시들을 보면 어려운 시보다는 쉽게 마음에 다가오는 시들이 더 많지 않아. 거기에 그리 길지 않아서 암송할 수도 있고.


원로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김초혜 시인이 쓴 '현대시'를 보자.


    현대시


자기도 뜻을 모르고

남은 더 모르게 쓴다


시가 울고 있다


김초혜. 멀고 먼 길. 서정시학. 2017년 초판 4쇄. 79쪽.


얼마나 간단명료한가. 사람들이 어렵다고 느껴 시를 멀리하면 시도 울 수밖에 없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고 해야 하는데...


이렇게 짧은 시들. 잠언과 같은 시들이 이 시집에 실려 있으니, 각박한 세상에서 마음에 위안을 주고 싶을 때 이 시집을 읽으면 좋을 듯하다.


짧은 시 한편 더... 각박한 시대.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 하면서...


    사람


흙과 나무와 바위를

모두 품는다


그래서 산이다


그래야 사람이다


김초혜. 멀고 먼 길. 서정시학. 2017년 초판 4쇄. 21쪽.


나중에 기회가 되면 '조종현 조정래 김초혜 가족문학관'에 한번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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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의 기록
존 버거.장 모르 지음, 민지현 옮김 / 더퀘스트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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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하면 믿음이 가니, 그가 장 모르와 함께 한 작업이 실린 책이라니, 갖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세상 끝의 기록이라니... 어디가 세상 끝인가? 단지 지리적인 장소를 이야기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지리적인 장소가 아니라면 어디? 물론 사진이니 지리적인 장소가 빠질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은 장소에 사는 사람들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즉 남들이 쉽게 가지 않는 (또는 못하는) 곳에 가서 그곳의 삶을 담은 사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연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진솔한 모습이 담겨 있는 사진이라 할 수 있다.


장 모르의 작업이 대부분이다. 그가 몇 십 년 동안 찾아다니며 찍은 세상의 끝의 모습. 그 모습을 그는 '과거로의 여행'(32쪽)이라고 하고 있는데, 과거로의 여행은 곧 현재를 보기 위한 여행이다. 


'그건 어떤 세계의 끝, 지금까지 자신이 속해 왔고 현재도 속해 있는 세계, 일시적으로 등을 돌려야 하는 세계의 끝을 의미한다.'(32쪽)


그러니 그는 그곳에서 등을 돌려 나왔지만 사진을 통해서 그곳을 현재로 가져왔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 이 책은 사진을 통해 본 역사라고 해도 좋다.


세계 각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특히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래서 사진을 보면 위안을 얻기도 한다. 


그의 말대로 끝이 바로 시작이 되는, 지금 우리를 지탱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니까. 


책은 연대순으로 편집되어 있다. 그의 젊은 시절부터 나이 들어서까지 세계 각지를 찾아가 찍은 사진들이 실려 있고, 그 사진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글로 표현되어 있다.


때로는 필름을 모두 압수당해 자신이 찍은 사진을 거의 다 잃은 적도 있고, 출입을 금지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인식을 하기도 하는 등 여러 경험들을 했는데, 그런 경험들이 책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져 이 [세상 끝의 기록]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 책에 북한에 가서 사진을 찍는 과정을 서술한 내용이 있는데, 사진은 몇 장 실리지 않았다. 북한에서 많은 사진을 찍었으나 출국할 때 몇몇 사진을 제외하고는 모두 압수당했다고. 장 모르는 주최측이 보여주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보이는 것, 또는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을 사진으로 찍었으니, 그때 필름을 압수당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책에서 북한 사람들이 진솔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또는 북한의 정경을 더 잘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북한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이렇게 필름을 압수당한 적이 있으니, 늘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만 보여주려 하고, 장 모르와 같이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 또는 보여주려 하지 않는 것까지 우리에게 보여주려 한다. 이런 작가들이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존 버거의 글은 처음에 거의 서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만 실려 있다는 것인데, 뒤에 존 버거의 글이 하나 더 실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좋다. 사진을 보면서 우리가 지나온 역사를 생각하기도 하고, 이 지구 상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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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내 탓일까? 물론 내 탓일 수도 있지. 그렇지만 정작 내 탓이라고 해야 할 사람들은 남 탓을 하고, 자기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양 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래, 그건 내 탓이야 하면 세상이 바뀔까?


 오히려 남 탓만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는 꼴이 아닐까? 그것도 권력을 쥔 자들, 조금이라도 있는 자들이 남 탓을 주로 하고, 억울하다고 하는 판에, 자신을 돌아보며 부끄러움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더욱 힘들어지고 있는 세상 아닐까.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참... 막무가내로 큰소리를 치는 인간이 떵떵거리는 세상이 아닐까 싶다. 


  단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큰소리치고 위협하는 인간들이 더욱 권력을 쥐고 있는 현실 아닌가. 이럴 때 과연 내 탓만 하면 되겠는가.


물론 내 탓을 하긴 해야 한다. 그러나 남 탓을 할 필요도 있다. 너희들이 이렇게 만들었어. 너희 때문에 세상이 힘들어지고 있어. 이제 너희들 말 대로는 하지 않을 거야 하고 잘못을 명확히 인식하고, 책임을 묻는 자세.


그런 자세를 과연 남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책임을 묻지 못하는 자세가 바로 남 탓 아닌가. 어쩔 수 없어. 해도 안 돼. 체념하는 순간 내 탓이 굳어져 더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러니 우리 제대로 된 남 탓을 해야 한다. 이우성 시집 제목인'내가 이유인 것 같아서'를 보면서 든 생각인데...


이 시집을 읽으면서 하, 시 참 어렵군. 어려운 말은 없는데 시의 내용이 마음으로 들어오지 않으니, 여전히 시는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내 탓인가, 하다가 자꾸 내 탓만 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엉뚱한 생각도 했다.


내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시를 쓴 시인 탓도 있다고. 시인이 자기만족만을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면 읽는 사람 마음에 어느 정도는 들어올 시를 써야 하지 않나 하고... 시를 잘 이해하지 못 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아쉬운 마음을 토로하면서 이 시집을 읽었는데. 


그러다 '새'라는 시를 읽고 이 시 재미있네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 새가 과연 좌우의 날개로 날까? 좌우 중심을 잡아줄 몸통이 없으면 날지 못한다. 몸통이 크냐 작냐가 중요하지 않다. 두 날개를 이어줄, 또는 붙잡아줄 몸통이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


좌우 대칭이 완전히 똑같다는 말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러한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새는 추락할 수밖에 없다. 이를 정치에 빗대면 좌우 균형이 맞춰진 상태라면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정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적이 없다면 정치는 제대로 된 적이 없지 않을까. 시에 나온 '이놈의 새 / 너 / 날아본 적 있냐'(97쪽)는 구절은 우리 정치를 비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는데...


이 나라 정치에서 과연 좌우 균형이 잡힌 적이 있었던가. 아니 좌우가 뒤집힌 적이 더 많지 않았는가. 어쩌면 좌우 개념조차도 흐릿해진 정치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날아본 적이 없는 정치가 과연 내 탓일까? 이거 정치인이라는 남 탓을 좀 해도 되지 않을까. 그들이 제대로 할 수 있게 우리가 몸통 역할을 하려고 해도, 무슨 날개들이 몸통을 무시하고 저들만 키우고,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제 크기만 불리려 해서 도저히 균형이 잡히지 않으니, 남 탓을 하자.


남 탓을 하다가 이들이 균형을 잡을 수 있게 압력을 넣어야 하는 내 탓도 가끔은 하자. 그래야 좌우 날개에 몸통을 갖춘 새가 되어 날 수 있을 테니까. 그때서야 비로소 새가 제대로 날 수 있게 될 테니. 이 시, 재미 있다. 


      새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왼쪽 첫번째 집은 [조선일보]를 보고

오른쪽 첫번째 집은 [한겨레]를 본다

아침마다 밖에 나오면 내 편과 네 편이 등지고 있다

나는 오른쪽 첫번째 집에 혼자 산다

왼쪽 첫번째 집 방향으로 가본 적은 없다

함정 같은 거에 발이 빠질까 봐

그렇다고 내가 이쪽 신문을 읽는 것도 아니다

한 번만 구독해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정말 한 번이야 하는 마음이었는데

몇 년째 오기로 구독한다

기울어지는 게 싫어서

그런데 왜 내가 오른쪽인가

쟤들이 왜 왼쪽이고

문제될 건 없지만 가끔 어색하게 느껴진다

뭐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돌아서면 오른쪽도 왼쪽도 뒤집혀버리긴 해

아 그렇게 쉬운 일이구나

그래도 실수로라도 몸을 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저쪽으론

작가가 이렇게 편협해도 되나

새는 양쪽의 날개로 난다며

그나저나 참 오래도 산다

이놈의 새

너 

날아본 적은 있냐


이우성, 내가 이유인 것 같아서. 문학과지성사. 2023년 초판 2쇄. 96-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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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퀘이크
커트 보니것 지음, 유정완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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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팽창한다. 계속 팽창하던 우주가 어느 순간 멈추더니 수축을 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시간이 뒤로 간다. 그런데 수축도 계속 하지 않고 딱 10년만 한다. 그리고 다시 팽창하기 시작한다.


우주가 팽창하는 것을 시간이 앞으로 가는 것으로, 수축하는 것을 시간이 뒤로 가는 것으로 상상하고, 이 수축이 빅뱅과 같이 순식간에 일어나 인간들은 인식하지 못할 순간이라고 상상한다.


[타임퀘이크]는 그러한 상상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시간이 10년 뒤로 갔다. 인간은 그 10년 동안 똑같이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과거의 삶을 재연하는 인간이 아니라 경험하지 못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자유의지가 있는 인간으로 돌아온다.


자유의지가 있는 인간으로 돌아올 때 10년 간의 관행이 몸에 박혀 오히려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뜨린다. 이 혼란 상황을 수습하는 것이 킬고어 트라우트다.


물론 그 역시 우스꽝스럽게 그 혼란을 수습하지만, 우스꽝스러우면 어떠랴? 혼란이 멈추고 인간들이 다시 자유의지로 살아가게 되면 좋은 것이지.


그럴까? 자유의지로 살아가는 인간들이라고 하지만 과연 자유의지가 제대로 작동할까? 그 자유의지에는 이미 자유라고 믿게 하는 강제가 숨어있지 않았을까?


자유의지가 있다면 인간들이 과연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타임퀘이크 때, 분명 과거이고, 자신은 과거로 돌아갔음에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재연배우처럼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있었던 것을 그대로 따라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래서 보니것은 자유의지를 지니게 되었다는 타임퀘이크 이후에도 인간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실제 인생에서 사람들은 타임퀘이크 후 재연 기간처럼 변화하지도 않고, 실수를 저지르고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며, 사과하지도 않는다.'(214쪽)


아마도 보니것이 10년이라는 타임퀘이크를 상정한 것이 현재를 비판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지금-여기를 잘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신의 과거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위해서.


타임퀘이크라는 상상을 통해서 보니것은 1990년대 또는 그 이전의 미국 사회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소설에서도 나왔던 장면들, 또 그의 또 다른 글에도 나왔던 사건들,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 있다.


보통 일상에서 겪는 일들, 또 그때 자신이 생각했던 것들, 그리고 현재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재연할 수밖에 없는 시공간을 통해서 우리가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게 하고 있다.


하여 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 속에서 보니것이 말하고 있듯이 작가를 생각하게 된다. 보니것이라는 작가가 1990년대의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 미국이라는 사회가 변해야 한다고, 그대로 가면 안 된다고 여기고 풍자를 통해서 사람들의 인식에 변화를 주려고 했던 작가를 말이다.


'어떤 예술작품이건 그건 두 사람 사이에 이뤄지는 대화의 절반을 차지해. 작품은 우리에게 말을 하는 사람에 대해 많은 걸 얘기해주거든. ... 그림이 유명해지는 건 그것의 그림다움이 아니라 인간다움 때문이야.' (222-223쪽)


소설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보니것의 소설이 유명해지는 것은 그의 소설이 지닌 소설다움이 아니라 보니것이라는 작가가 지닌 인간다움이 소설 속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라는 것. 그의 인간다움이 계속 우리에게 말을 걸고 거기에 우리도 응대를 하고 있다는 것. 


(작가와 작품을 일대일로 대응시킬 수는 없지만, 작품에는 작가가 담겨 있음을 부정할 수도 없다. 작가와 작품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논쟁 중이지만 적어도 보니것의 소설에는 보니것을 빼고는 이야기하기 힘들다. 그는 작품에 직접 등장하기도 하고, 자신의 가족, 그리고 역사적인 인물까지도 수시로 등장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니것의 소설이 읽히고, 그의 신랄한 풍자가 감탄을 자아내는지도 모른다. 그를 모르면 작품 속에 들어있는 풍자를 풍자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뭐 이런 작가가 있어 하고 작품을 접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니것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되니 그의 소설에 나타나는 말이 지닌 신랄함이라든지 통쾌함 등을 만나게 되고, 단편 단편적으로 나타나는 인물들이나 사건들에도 당황하지 않게 된다.


모자이크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작품을 만들듯이 또는 퀼트 작품처럼 조각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작품을 이루고 있으니... 이 [타임케이크] 또한 그렇다.


재연배우처럼 살아가는 타임퀘이크가 일어난 10년 동안의 일이나 타임퀘이크가 끝나고 반복된 삶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때의 일들이 짤막짤막하게 실려 있어서 읽는 속도가 붙는다.


또 전에 그의 작품을 읽었다면 친숙한 구절이나 인물들을 만나게 되고, 그가 하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곳곳에 풍자가 숨어 있으니 그것을 찾는 재미도 있고.


무엇보다 보니것 소설은 재미 있게 읽으면서도 무엇을 더 생각하게 해주는 힘이 있으니... 그가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를 생각하게 되니, 이 소설에서 나온 말을 그대로 돌려주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디지털 세계(당시는 텔레비전 시대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에 대해 물성을 지닌 책에 대한 이야기인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말이 아닌가 한다.


'교묘한 타산이 아니라 그저 우연에 의해서, 그 무게와 질감으로, 그리고 통제에 대핸 멋진 상징적 저항으로, 책은 우리의 두 손과 두 눈을, 그 다음에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정신의 모험 속으로 이끈다.' (240쪽)


보니것의 소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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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보세요
커트 보니것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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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보니것이야! 읽기가 재미있다. 반전이 있으니, 섣불리 결말을 예상하지 않게 되기도 하고. 이 소설은 어떤 결말로 끝날까 궁금증을 지니고 읽어가면 어느새 놀라운 결말이 다가온다.


그렇다고 가볍지가 않다. 서술은 가벼운데, 들어있는 내용은 무겁다고 해야 한다. 무거운 내용을 가볍게 전달하는 능력, 보니것이 지닌 재주라고 해야겠다.


첫소설 '비밀돌이'를 보면 참... 지금 우리가 인공지능 개발에 몰두하고 있는데, 그러한 인공지능이 개발이 되어 인간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이 소설을 읽다가 경기도교육청인가 어디선가 개발했다는 AI영상이 뉴스에 나온 적이 있다.


교사들이 지닌 속마음을 인공지능이 풀어준다는 발상인데, 그것이 교사를 비하하는 내용으로 흘러서 문제가 되었던... 즉 말에 드러난 속뜻을 해석해주는 영상이었는데ㅡ 그것이 상대에 대한 비하로 나타난다. 이 소설에서 그런 장면이 펼쳐지는데 참, 뉴스에서 봤던 내용을 보니것이 미리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 문제없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그렇지 않고 안 좋은 면을 파헤치는 그런 기계. 그 기계로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고,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데...


그런 기계를 만들어 일확천금을 꿈꾸는 인물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사람들을 망가뜨리는지 몸소 체험한 다음에 기계를 묻어버린다. 소설에서는 묻어버릴 수 있다. 또 보니것이 살았던 시대는 인공지능이 나오기 전이니까, 상상 속에서 그러한 위험을 간파한 인간이 위험을 피하는 방식으로 결말을 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다. 인공지능이 개발되면서 그것의 위험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지만 누구도 포기하지 않는다. 소설에서처럼 묻어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로 보완할 수 있다고 믿고 더욱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그래서 이 소설이 더 소중하다.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개발한 기계가 오히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망칠 수 있음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니...


소설의 결말은 더욱 섬뜩하다. 땅에 묻어버리는 기계가 마지막으로 했다는 말.


"'다시 보자. 개자식아. 다시 보자고.'" ('비밀돌이'에서. 42쪽)


우린 이러한 비밀돌이를 다시 보고 있다. 인간에게 편리함과 빠름을 선물해준다는 이유로. 하긴, 이 비밀돌이처럼 '이야기할 사람!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사람!'('비밀돌이'에서. 25쪽)이 필요해서 만든 기계가 과연 인간을 진정으로 이해해준다고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냥 우리 자신의 고민을, 어려움을 피하게만 해주는 것이 아닌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조그마한 어려움도 견디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지... 보이는 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자세를 지니게 하는 것은 아닌지, 또 악용이 되어 안 쫗은 쪽의 말들만 계속 듣게 해서 우리의 인식을 흐리게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봐야 한다. 


과연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고 기계를 만들어 곁에 두는 것이 바람직한지, 지금 우리는 기계와 대화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시간-공간에 대한 고민,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러한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할지 이 소설을 통해 한번 더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다.


'개미 화석'이라는 소설을 보면 헛웃음이 나온다. 스탈린 시대의 소련을 비꼬고 있는 소설인데... 독재가 일어나고 있는 나라에서 예술을 하거나 또는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 또는 비판적인 의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입을 틀어막히고, 행동에 제약을 받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개미학자를 주인공으로, 개미들의 화석을 통해 어떻게 독재가 성립하게 되는지, 또한 같은 사건(화석에 나타난 모습)을 보고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지, 정권의 구미에 맞게 해석을 할 수 있음을, 그것에 반하는 증거 또는 추론을 하는 사람의 입을 어떻게 막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때는 소련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지금은 미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소련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이 꼭 소련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소설들, 많은 소설들이 실려 있는데, 짧고 경쾌하게 진행되지만 내용은 깊고 무겁다. 하여 소설을 읽으며 현대 우리의 생활을 살필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이 소설들과 더불어 두려움이 인간이 지니는 감정이고, 이 두려움을 통해 성장할 수 있음을, 즉 두렵다고 마냥 피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맞서 극복하려는 모습을 지녀야 함을 보여주는 소설도 있다.


'신문 배달 소년의 명예''우주의 왕과 여왕'이라는 소설이 그런데, 두려움에 갇힌 사람은 결국 자신을 망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두렵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명예와 또 한 단계 성장하는 자신을 선물한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이 두 소설의 결정판이 바로 '에드 루비 키 클럽'이란 소설이 아닐까 하는데, 두려움을 이겨내고 진실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 결국 승리하는 내용의 소설. 아무리 권력을 지니고 있어도, 사람들을 매수해도 결국 진실은 가릴 수 없음을 이 소설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집 좋다. 재미있다. 그냥 읽어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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