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티처 - 제2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서수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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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정희 시 '그 많던 여학생은 어디로 갔는가'


이 소설을 읽으며 여러 생각이 났는데, 고학력 여성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 무엇일까? 그 많던 똑똑한 여학생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을 보아도,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학생을 보아도 여학생이 많다. 그런데 정규직의 비율을 보면 여성의 비율이 많이 떨어진다고 한다. 조금씩 비중이 높아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낮은 편이다.


이 소설에서 똑똑한 여학생들은 한국어 강사로 일한다. 비정규직 강사. 그들에게는 재계약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온갖 평가가 따라다닌다. 이들에게는 권리보다는 책임과 의무가 더 강요된다.


그나마 대학강사라고 하지만, 이들에게는 수업을 계획할 권리도, 학생들을 재량껏 평가할 권리도 없다. 오로지 주어진 매뉴얼대로만 해야 한다. 마치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이들은 거대한 기계를 이루는 한 부속품일 뿐이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데, 이 외국인들이 한국이 좋아서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서 오는 경우도 있지만, 학교에서 사업의 일환으로 많은 학생들을 데리고 오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바로 이렇게 교육 장사를 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베트남 학생들은 배움이 목적이기보다는 한국에 합법적으로 들어와 일자리를 찾으려 한다. 학교와 그들의 욕구가 맞아떨어지면서 많은 수의 베트남 학생들이 등록을 하게 되고, 그들을 가르칠 강사가 필요해서 많은 수의 강사가 채용된다.


학생 수에 따라서 다음 학기 계약이 되느냐 한 되느냐가 걸려 있는, 그 많던 여학생이 언제 계약이 만료될 지 알 수 없는 시간 강사로 살아가게 된다. 박사과정을 밟은 한희조차도 책임강사라고 하지만 계약직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교육 장사의 소모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 이 소설 [코리안 티처]다.


2. 여성을 몸으로 인식하는 문화


한국인 강사들이 이 소설에서는 대부분 여성들이다. 그 많던 여학생들이 비정규직으로 삶을 이어가는데, 이들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각은 선생님이기도 하지만 여성이기도 하다. 몸으로서의 여성.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진을 찍어서 올리고 공유한다.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이런 면에서는 동서양 학생들이 차이가 없다. 여기에는 동양과 서양이라는 문화 차이보다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 차이가 더 크게 작용한다.


학생들은 강사의 사진을 찍어서 올리고, 예쁘다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공유한다. 소설의 처음에 등장하는 선이가 그렇다. 


자신은 선의를 다해 가르치는데, 그들은 선이를 교사이기 전에 여자로 인식하고 행동한다. 꼭 외국인 학생들 이야기만은 아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교사의 사진을 찍어 올리고 공유하는 사례가 많이 문제가 되었으니.


여성을 능력보다는 몸으로 인식하는 문화, 그것이 이 소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으며, 선이뿐이 아니라 그 점에서 벗어나려는 미주에게서도 그렇게 소비되는 여성에 대한 관점이 다른 면에서 부작용으로 작동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학생들과 친하고 잘 지내던 가은 역시 몸으로 소비되는 자신을 보면서 강사직을 그만두게 된다. 


3.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선이로 시작해, 미주, 가은, 한희의 이야기로 봄학기, 여름학기, 가을학기, 겨울학기가 서술되고, 마지막에 겨울단기로 소설이 마무리 된다.


학교에서 베트남 학생들이 집단으로 도망을 가니, 징계를 받지 않기 위해 중국인 학생들을 단기로, 그것도 학교 측에서 비용을 거의 대주는 식으로 받으들여 전체 정원을 늘린다. 그러면서 다시 단기로 강사들을 채용하는데, 이때 처음에 등장했던 선이가 등장한다.


물론 결과는 행복하지 않다. 선이는 계약이 만료되었다가 단기에 다시 등장하고, 미주는 내용 증명을 받아 재계약이 안 될 처지에 있으며, 가은은 충격을 받고 강사직을 그만두었으며, 한희는 책임강사 직을 휴직하고 아이를 낳게되면서 다시 자기에게 주어졌던 가은의 자리로 갈 수 없게 된다. 단기 강사직을 다시 했던 선이가 학생들에게 알려주었던 폭죽으로 기숙사가 불타버리고 마니 선이는 다시 계약하기 힘들 것이다.


이들은 이렇게 자기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희망이 있음을 한희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한희는 한국어에는 미래가 없다라고 했다가, '한국어의 미래시제 교수법'이라는 글을 쓰려고 한다. 미래는 있어야 한다. 바로 한희에게는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희는 영국으로 가자는 제이콥의 제안을 거절한다. 한국에서 자신은 버티겠다고 한다. 이제 한희에게 미래는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가는 와야만 하는 시제가 된다.


여기에 소설의 끝에 다시 가은이 등장한다. 지방의 다문화언어강사 면접 대기실에 있는 가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시작한다.


이들은 과거에 열심히 살았고, 현재에도 충실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미래는 보장되지 않았다. 미래는 불확실한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시제였다.


그렇게 끝나면 문정희 시 제목처럼 된다. '그 많던 여학생은 어디로 갔는가' 아니다. 갔는가로 끝나지 않고 여기에 있다, 여기에 있겠다로 소설을 맺고 있다.


이렇게 소설은 한국어 강사들을 통해 비정규직 여성들의 삶과 교육으로 장사를 하는 대학의 행태들을 보여주면서,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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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0-06 11: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페이퍼로 뽑혀서 많은 분들이 읽었으면....^^

kinye91 2021-10-06 12:06   좋아요 2 | URL
이 소설 읽으면서 ‘82년생 김지영‘도 생각났어요.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많은데, 그것을 조금씩 깨뜨려나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미술에게 말을 걸다 - 난해한 미술이 쉽고 친근해지는 5가지 키워드
이소영 지음 / 카시오페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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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음악은 쉽게 누구나 이야기하면서 왜 미술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할까를 생각했다고 한다. 음악은 자신의 취향이라고 당당히 밝히면서 이야기를 쉽게 하는데, 미술은 이야기를 하다가도 전문가가 아닌 자신이 이야기해도 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미술을 잘 알지 못한다고 이야기하지 말란 법은 없다. 또 전문가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법도 없다.


자기 취향에 따라 미술도 감상할 수 있고, 내 해석과 전문가의 해석이 다르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그냥 자연스럽게 미술에 관한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면 된다. 자기 검열을 할 필요가 없는데, 이상하게도 음악보다는 미술에서 자기 검열을 많이 하게 된다.


어쩌면 이는 음악과 미술을 향유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음악은 우리가 일상에서 늘 만나게 된다. 그냥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들으면 된다. 또 미술보다는 비교적 싼 가격으로 음반을 구할 수가 있다. 언제든, 어디서든 음악은 사람들 곁에 있다.


반면에 미술은 음악보다는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제한된다. 시간도 그렇고. 미술관이나 화랑, 전시회에 가야만 볼 수 있는 미술작품들이 있다. 그런 연유로 미술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만나기 힘든 예술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미술을 이렇게 특정 장소에서 시간을 내어 감상하기도 하지만, 우리 일상에서도 미술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요즘은 광고에 명화를 이용하기도 하고, 또 건물을 지을 때 미술작품을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꼭 전시회가 아니더라도, 미술작품이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수많은 책이나 잡지의 표지들에서 또 길거리에서 미술을 만날 수 있다.


그러니 미술에 대해서 전문가들만이 특정한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예술이라는 생각을 버리자. 이 책은 그 점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 모두 미술을 만나고 미술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고, 그렇게 자기만의 미술 감상을 이야기하면 여러 감상들이 모여 미술에 대한 더 많은 감상들이 나올 수 있다고. 한 면이 아닌 다양한 면들이 이야기될 수 있다고 한다.


자신의 경험을 적절히 섞어서, 미술 작품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해주고 있어서 미술에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술 감상에 대한 편견을 없애주고 있다.


아무렴 어때? 난 이 작품이 이렇게 보여. 이렇다고 생각해 하고 말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게 한다. 그래서 미술에 대해서 말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다. 미술과 친하게 만들어 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미술과 친해지는 방법 다섯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꼭 이대로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일상-작가-스토리-시선-취향


이런 방법이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 있는 존재들에 관심을 가지면 미술이 보일 수 있다. 우리 일상에는 그만큼 미술이 많고, 미술은 일상과 떨어져 있지 않으므로. 무엇보다도 미술과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은 관심이 아닐까 한다. 그 관심을 일상이든, 작가든, 스토리든, 취향이든 자신이 가지면 된다. 


관심이 있으면 찾게 되고, 보게 되고, 자주 보다 보면 알게 되고, 즐기게 된다. 즐기게 되면 미술에 대해서도 음악처럼 부담 갖지 않고 이야기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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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중이 존중을 부르고, 배려가 배려를 부른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의 마음이나 행동은 일방적이지 않다.

 

  특히 청소년들에게는 더 그렇다. 학교에서 학생을 대하는 태도를 보라. 그들을 동등한 존재로 여기기 보다는 가르치고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가.

 

  그래서 학생들은 아직 미성숙한 존재니까, 그들을 성숙하게 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훈육도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왜? 나이에 따라서 성숙, 미성숙을 따질까? 학생들이 과연 미성숙하기만 할까? 어쩌면 학생들을 미성숙한 존재로 여기는 사회의 분위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

 

이장근 청소년 시집을 읽다가 학생을 대하는 태도, 꼭 학생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대하는 태도는 이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고슴도치도 자기 자식은 함함하다고 하는데, 그것은 자신을 예뻐해주는 존재에게 가시를 들이대지는 않기 때문이다.

 

  고슴도치

 

살살 쓰다듬는 손에는

털이 되고

 

덥석 잡으려는 손에는

가시가 되고

 

이장근, 불불 뿔, 창비. 2021년. 14쪽.

 

사춘기,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하지만, 이들을 어떤 자세로 대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 살살 쓰다듬을 수 있어야 한다. 덥석 잡으려고 하지 말고.

 

어디 이런 일이 청소년들에게만 해당하겠는가. 우리 모두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고 있으니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 짧은 시를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살살 쓰다듬어 주는 그런 사회가 되는 그런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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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덫 동서 미스터리 북스 33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황종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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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을 추측하는 재미. 추리소설은 그러한 면에서 독자가 예상하는 결말을 넘어서야 한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탐정과 범인이 머리 싸움을 하게 하기도 하지만, 이를 통해서 독자와 치열한 머리 싸움을 한다.

 

작품 곳곳에 단서를 심어놓아야 하지만, 그 단서를 독자들이 너무 쉽게 알아채서는 안 된다. 또한 결말이 독자의 예상을 벗어나야 하지만, 너무 벗어나서도 안 된다. 그러면 독자의 흥미를 잃는다.

 

그래서 소설 속에 단서가 있고, 그 단서들이 결말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잘 보여주는 추리소설이 좋은 추리소설이 된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은 이 점에서 좋은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 '쥐덫'은 장편소설이 아니고 단편소설이다. 여러 소설이 한 권으로 묶여 있는데, 탐정도 세 명이 나온다. 포아로와 마플, 그리고 해리 퀸.

 

해리 퀸은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에서 어떠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탐정인지 모르겠는데, 이 책 '연애를 탐정한다'에서 처음 만났기 때문이다. 총 10편의 소설이 묶여 있는데, 해리 퀸이 나오는 소설은 이 중에 한 편이니, 그를 제외하자.

 

그렇다면 포아로와 마플이 남아 있는데, 둘의 추리 솜씨가 감탄을 자아낸다. 이런 기대를 지니고 이 책을 읽었는데, '쥐덫'에는 둘 다 나오지 않는다. 포아로도, 마플도 없다.

 

다만,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고립된 하숙집, 그곳에서 범인은 누구인가? 하숙집에 있는 사람들 중에 의심가는 사람을 추측하면서 읽어가는데... 범인은?

 

그런 재미가 있다. 의외의 인물이 범인이 되는데, 결말을 보면 납득이 된다. 이것이 좋은 추리소설의 조건이기도 하겠지만.

 

이 소설집에서 미소를 짓게 하는 추리는 마플의 추리다.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것을 단서로 삼아 범인을 찾아내는 솜씨. 그런 과정을 읽어가면서 주의력, 집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게 된다. 물론 포아로 역시 아주 작은 단서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추리소설을 읽으면 추리 과정을 따라가는 재미도 있지만, 우리가 삶에서 놓치고 있는 소소한 것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함을 생각하게 해서 좋다.

 

여기에 인과응보라는 말과 돈에 현혹되어 살인을 저지르지만, 결과는 돈도 자신의 명예도, 또 생명까지도 잃을 수 있음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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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집 제목은 '학교에는 고래가 산다'다. 학교에는 고래가 살까? 살지 않는다. 고래는 멀리 멀리 떠나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학교에서 고래를 찾을 수 있다고, 아이들은 고래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들이 멀리 쫓아버린 고래를 아이들에게 찾으라고 한다.


  고래, 바다 생물을 넘어 우리가 꿈꾸는 그 어떤 모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데...


  시인이 교사였던 만큼 학교에 관한 시들이 이 시집을 차지하고 있다.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교사들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교육에 관한 이야기 등을 시로 썼다. 마지막 5부에는 너무도 슬픈 아직도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세월호' 이야기가 나온다.


그 중에 두 편의 시를 보면서, '이런 농담'은 이런 상황에서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손에 흙 안 묻히고 깔끔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을 심어주는 학교. 그런 학교에서 우등생이란 결점 없는 학생일 터.


  장래 희망


아이들의 꿈에는

도무지 땀 흘리는 게 없다.

땡볕에서 얼굴이 시꺼멓게 타는 건

도무지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손에 물을 묻히거나 기름밥 먹는 건

작업복 걸치고 먼지 뒤집어쓰는 건

도무지 격에 맞지 않는다고

농부가 되고 어부가 되고 화부가 되는 꿈

석공이 되고 목수가 되고 잡역부가 되는 꿈

도무지 돈이 되지 않는다고

그래도

의사가 되거나 법관이 되거나

책상에 앉아서 펜대를 굴리거나

아이들의 꿈에는

도무지 흙을 묻히는 게 없다

밑바닥이 되는 꿈

다리가 되고 허리가 되는 꿈

세상을 눈물로 색칠하는

노동자는 보이지 않는다


최기종, 학교에는 고래가 산다, 삶창. 2015년. 66-67쪽.


  이런 농담


이런 아이가 있었다

너무 착실하다고나 할까

정도가 지나치다고나 할까

1년 내내 결석 지각 조퇴 한 번 안 하고

교칙도 칼같이 지키고

지시 한 번 어긴 적도 없는

이런 아이가 있었다

어느 날 그 아이보고

내일은 10분만 지각하라고 하니까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 번쯤 결석해도 좋다고 하니까

그 아이 하는 말이

"선생님! 선생 맞아요?"


최기종, 학교에는 고래가 산다, 삶창. 2015년. 71쪽.


'이런 농담'에 나오는 아이는 흙을 묻히는 꿈을 꾸지 않을 것이다. 그는 펜대를 굴리거나, 의사가 되거나 판, 검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잘살 것이다. 다만, 그는 도무지 흙을 묻히고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 그렇게 사는지...


그래서 '이런 농담'은 '장래 희망'을 비튼 시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에게 어떤 장래 희망을 갖게 해야 할까? 아니, 아이들이 어떤 삶을 살도록 해야 할까? 장래 희망을 직업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좋은 쪽으로 만들어가는 일. 큰일이 아니라 작은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 그렇다면 '이런 농담'에 나온 학생은 학교라는 틀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칭찬을 받아도 마땅한데, 씁쓸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무언가 인간적인, 실수를 하면서 또 실수를 하는 사람을 보면서 그들과 함께 지내는 인간적인 면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다고 선생이 지각하라고 하면 되나 싶은 생각도 들지만, 지각하라고ㅡ, 결석해도 된다고 하는 말은 사람은 빈틈이 있어야 다른 사람과 더 잘 연결된다는 말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래야 흙을 묻히는 사람이 되지 않더라도 흙을 묻히고 사는 사람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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