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과 깃발 - 노부인이 전하는 어느 도시 이야기 그들의 노동에 3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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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들의 노동에' 3부다. 1부는 땅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은 땅에서 어떻게든 생명을 얻으며 살아간다. 2부에서는 땅에서 떠나기 시작하는 사람들, 그럼에도 그들은 완전히 땅을 떠나지는 못한다. 이제 3부는 땅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온 사람들,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이야기다.

 

돌아가지 못한다는 말은 부모세대에게 어울리는 말이고, 이 소설의 주인공은 쥬자와 수쿠스는 땅과 더불어 살아본 적이 없다. 물론 쥬자는 약간 다르다. 사실인지 아닌지 명확히 이야기하지 않고 있지만, 염소 젖을 짜고 닭을 잡는 일을 하는 사람은 쥬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쥬자는 도시에서 살아가지만 땅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도시에서 살아가더라도 여성은 땅과 관련이 있는 삶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면 이 소설 인물 중 한 사람인 헥토르는 농촌에서 도시로 와서 경감으로 퇴직을 앞두고 있다.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즉 땅과 함께 살던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그곳으로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땅과 유리된 삶을 살려고 한다. 그러니 그의 아내가 알콜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고, 결국 헥토르를 죽음에 이르게 할 뿐이다. 생명력을 상실한 삶.

 

수쿠스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말을 듣고 아버지의 고향에 가고자 하지만 결국 가지 못한다. 그에게 돌아갈 고향은 없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뿌리뽑힌 삶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농촌에서 도시로 오게 된 사람들의 자식인 2세대들은 이제 돌아갈 고향조차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도시에서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든지, 부랑자나 범법자가 되든지 한다. 마치 땅과 붙어 있으면 누구도 죽일 수 없지만, 땅에서 떨어지면 목숨을 잃게 되는 안타이오스처럼, 그들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땅에서 떨어져 나온 삶들이 온전하지 못함은 남녀를 구분짓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존 버거는 이들에게 위안을 주려고 한다. 죽은 이들이 모두 배에 모여 자신들의 삶을 보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소설의 환상적인 마지막 장면... 작가는 이렇게라도 뿌리뽑힌 삶들을 위로하고 싶었나 보다란 생각이 들었다.

 

산업화, 도시화 되면서 사람들 삶이 땅과 점점 멀어지고, 그런 삶이 풍요로워지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음을 이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몇 십 년에 걸쳐 사람들이 땅에서 점점 멀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존 버거는 '그들의 노동에' 3부작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이제는 땅에서 멀어지는 삶이 우리들에게 고난을 준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있으니, 다시 땅과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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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유로파에서 그들의 노동에 2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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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소설. [그들의 노동에]3부작 중 2부다. 1부가 '끈질긴 땅'이라는 이름으로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였고, 그들이 땅에서 분리되기 시작함을 루시라는 인물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면, 2부는 땅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 도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함께 등장한다.


서서히 땅에서 멀어지며 도시의 삶으로 들어가게 되는 사람들 이야기. 우리나라 60-70년대에 농민들이 땅에서 분리되어 도시로 와서 공장 노동자가 되거나 도시빈민이 되어가는 모습을 버거의 소설을 통해서 다시 만날 수 있다.


1부가 이문구 소설을 연상시킨다면 2부는 이문구 소설에서 벗어나 조세희 소설로 가는 중간 지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2부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산골에서 살지만 도시의 삶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정도 도시와 산골의 삶에 다리를 걸치게 되는데, 곧 이들은 땅을 잃게 될 것이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 2부의 제목이 된 '한때 유로파에서'이다.


산골 마을에 공장이 들어서고, 공장에서 뿜어내는 유독가스들로 인해 숲이 죽어가고 있는 모습, 그런 모습을 사람에 비긴다면 오딜이 사랑했던 사람이 공장에서 죽어가고, 또다른 사람은 다리를 잃게 된다.


산업노동이 사람의 삶을 죽음으로 이끌거나 장애로 만들고 있는데, 자연 파괴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도 피폐하게 함을 그 소설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시대 변화는 어쩔 수가 없다. 오딜은 아버지와 자신이 자란 환경을 사랑하지만 도시로 나가게 되고 결국은 도시에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세상은 도시화를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땅에서 벗어나 도시로 간 사람들이 풍요롭게 살고 있느냐 하면 그것이 아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풍요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에게는 아직 돈이 전부는 아니다. '보리스, 말을 사다'라는 소설에 그 점이 잘 드러나 있는데, 비록 약속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보리스지만, 그는 도시라 할 수 있는 카페에서 차값을 대신 내주는 등 돈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런 그를 이용하는 사람은 도시 사람들이다. 그를 이용해 집을 얻으려는 도시 출신 부부가 나오는데, 이렇게 땅과 유리된 삶은 결국 이용당하고 만다.


결혼을 하지 못하고 혼자 살게 되거나 (아코디언 연주자), 산골에 들어와 살지만 결국 도시에서 가게를 차려 살아가게 되는 삶(우주비행사의 시간), 도시 부부에게 이용당하고 죽게 되는 삶(보리스, 말을 사다)이 2부에서 펼쳐진다.


땅과 유리되어 자신의 삶을 잃어가는 사람들. 세상은 그렇게 변해왔다. 지금은 도시가 지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땅과 유리된 삶, 흙을 밟아본 기억이 산에나 가야 있는 그런 시대가 되었으니...


이 소설에서는 아직도 풋풋한 풀냄새, 흙냄새가 나고 있지만, 그런 냄새와 더불어 매캐한 공장 냄새도 함께 나고 있다. 그 매캐한 냄새가 풋풋한 냄새들을 누르기 시작하고 있는 모습.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그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3부는 이제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겠지. 씁쓸하게도 우리는 땅을 잃어버리고 있는데, 버거의 3부작 소설은 어쩌면 우리가 땅을 잃어가고 있는 과정을 여러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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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질긴 땅 그들의 노동에 1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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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소설이다. 여러 단편이 묶여 있는데, 배경은 농촌이고, 인물들은 농민들이다. 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벗어나지 못하는 이라는 말보다는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

 

땅은 움직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땅을 통해 생명은 지속된다. 농민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땅을 떠나는 순간, 그들은 농민이 되지 않는다. 뿌리 뽑힌 삶을 살아가게 된다. 땅에서 벗어난 농민. 버거의 이 소설에서 그들은 나오지 않는다.

 

이 소설집에서 인물들은 대도시의 파리로 가더라도 다시 돌아온다. 이들이 살아야 할 장소는 땅을 일구며 사는 곳이다. 땅과 같이, 다른 동물들과 같이 이들은 살고 죽는다. 죽음도 그들은 거부하지 않는다.

 

지금 죽음을 앞두고 대부분 병원으로 가는 도회지의 삶과는 다르게 이 소설집의 인물들은 죽음을 자신에게 친숙한 곳에서 맞이하고 싶어한다. 죽음이 자신이 알고 있는 곳으로 오게 하고 싶다고. 그리고 그들은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죽음도 삶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살아간다.

 

더 많은 말이 필요없다. 땅과 함께 사는 삶은 자연의 일부인 삶이다. 돈을 앞세우는 삶이 아니라 생존을 우선하는 삶이다. 이들은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고 비도덕적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그들의 삶은 그 자체라고 봐야 한다.

 

자신이 기르는 가축을 도살하고 생명을 유지하듯이 그렇게 이들은 살아갈 뿐이다. 여기에 어떤 수사는 필요없다.

 

이런 삶이 가장 잘 드러난 소설이 '루시 카브롤의 세 가지 삶', '루시 카브롤의 두 번째 삶', '루시 카브롤의 세 번째 삶'에 잘 나타나 있다.

 

삶 자체로 살아가는 사람, 루시 카브롤, 소설에서는 별명으로 더 불리는데, 코카드리유라고 한다. 그녀의 삶을 보면 동생들에 의해 쫓겨나 살지만 자연 속에서 자신의 삶을 계속 유지해 간다. 그러고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간다.

 

루시는 태어나면서부터 남들보다 작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작은 키를 지니고 있다. 이는 땅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 농민(통칭 농민이라고 한다)들의 삶이 점점 어려워지고 사회에서 비중이 더 작아지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루시는 일을 잘하고 열심히 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한다. 그리고 동생들에 의해 쫓겨난다. 쫓겨나지만 땅과 더불어 계속 살아간다. 땅에서 나는 것들이 루시를 계속 살아가게 한다. 하지만 루시가 땅을 떠나려 할 때, 결혼을 해서 다른 삶을 살려고 할 때 더이상 루시의 삶은 없다.

 

그런 삶을 위해서 루시는 돈을 모아놓지만, 돈은 도시의 속성, 자본의 속성이고, 땅과 유리된 삶을 의미한다. 그러니 더이상 루시는 살아갈 수 없다. 다른 사람에 의해 살해당하는데, 이는 농민들이 도시화, 산업화로 인해 더이상 전통적인 삶을 살아가기 힘든 상황을 의미한다.

 

하지만 소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루시의 세 번째 삶에서 환상적인, 귀신이 된 사람들이 등장해 집을 짓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은 이제 현실에서 살아갈 수는 없지만, 이들의 전통적인 삶은 환상 속에서 계속된다.

 

이렇게 존 버거의 '끈질긴 땅'은 땅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잘 드러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만큼 존 버거의 소설은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모습을 소설 속에서 발견할 수 있고, 그 모습이 지금은 많이 낯설지만 원초적인 우리들 삶이었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들의 노동에]라는 제목으로 3부작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라고 하는데, 이제 2,3부가 남았다. 2,3부 역시 땅과 함께 살아가는 땅과 떨어질 수 없는 사람들 이야기를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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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판 인터뷰 기사가 마음에 들어와 박혔다. 이 박힌 돌, 쉽게 빠지지 못할 듯하다.

 

  "...추석 전에 역무원이 단속을 나왔어요. 민원이 들어왔다고 나가라는 거예요. 책을 빼서 진열하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지만, 다시 집어넣으려면 시간이 엄청 걸리거든요. 전동차에 앉아 있으니까 어쩔 수가 없어요. 그래서 책 집어넣는 것 좀 도와주면 안 되느냐고 하니까 한마디로 기분 나쁘게 "우리가 도와줘야 할 의무는 없잖아요.' 하는 거예요." (87쪽)

 

  "빅이슈 판매원의 자립활동을 위해 서울특별시, 서울교통공사, 한국철도공사와의 협조 공문이 있어요." (코디의 말. 87쪽)

 

"예전에 인천에서 판매할 때는 상황이 굉장히 안 좋았죠. 한번은 구청에 책을 전부 뺏긴 적도 있어요." (88쪽)

 

빅판을 인터뷰한 내용에서 발췌했는데... 이들이 자립하기 위해서 잡지를 판매하는데, 그 잡지를 판매하기조차도 힘든 상황이다. 물론 역사 내에서 장사를 금지한 규정이 있다고는 하지만, 살기 위해서 애면글면 애쓰는 사람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쫓아내거나 물건을 빼앗은 경우가 있다니...

 

역무원들이 형편을 봐주는 경우가 있고, 협조 공문도 있다고 하는데 민원이 들어오면 어쩔 수가 없다고 한다. 민원... 내 불편을 감수하지 않기로 하고, 고치라고 요구하는 일. 그런데 내 편안함이 다른 사람의 생계를 위험에 빠뜨린다면... 조금 내가 불편해도 되지 않을까? 내게는 그들로 인한 불편이 생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테니까.

 

또 민원이 들어왔다고 해도, 의무가 아니라고 해도, 몸이 불편한 사람을 도와줄 수는 있지 않은가. 휠체어를 타고 있는 모습을 뻔히 보면서도 '의무'가 아니라니... 법적인 의무는 없지만 윤리적인 면에서 보면 일종의 의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법으로만 사람이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법보다는 윤리, 도덕이 먼저 작동하는 사회가, 인간에 대한 공감이 먼저 작동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 아닐까.

 

이렇게 우리 함께 살아갈 방법을 생각하면 안 될까? 내 눈에 조금 거슬리더라도 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해줄 수는 없을까? 내가 조금 불편하면 남이 조금 더 편해진다고 생각하면 안될까? 이런 생각을 했다.

 

갈수록 정이 없어져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참지 못하는 모습. 자기 일이 아니라면 상관없다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모습.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어떻게 규정대로만 살 수 있는가? 어떻게 보기 좋은 대로만 살 수 있을까? 내 불편을, 내가 보기싫어함을 잠시 참으면 누군가의 삶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이번 호다. 마음이 좋지 않은데, 이번 호에서 앞부분 글, 식물에 관한 글을 통해 마음이 좀 편해졌었는데... 그렇게 식물처럼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나서지 않지만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도 많은데..

 

내가 가진 것이 많으면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을 위해 조금은 양보할 수도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사회이면 좋겠다는 생각.

 

유튜브 채널에 <하이머스타드>가 있다고 이번 호에서 소개하고 있는데, 이 유튜브 채널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보여주고 있단 생각이 든다.

 

식물들처럼, 우리에게 위안을 주고, 나서지 않아도 우리 삶에 도움이 되듯이 이러한 사람들은 유튜브를 통해 우리 사회를 좀더 밝은 쪽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빅판 인터뷰를 통해 마음에 박힌 못들이 이런 사람들, 이런 활동들(특히 빅이슈 텍스트란에는 이런 글들이 많다)로 인해 조금씩 빠져나오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립하려 애쓰는 빅판들에 대한 일들이 많이 알려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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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 대한 연민 -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임현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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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이라는 말이 책 표지에 적혀 있다. 혐오의 시대. 상대가 매우 잘못했고, 그 잘못을 비판했음에도 고치지 않았을 때 미움이라는 감정이 싹튼다. 미움이라는 감정은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이 결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


혐오는 원인을 명확히 찾아내기가 힘들다. 어떤 식으로 감정에 자리잡아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그냥 나온다. 근거없는 미움. 아니 사랑 없는 미움이라고 해야겠다.


비판과 비난이라고 하면 혐오는 비난이다. 그냥 비난할 뿐. 특히 상대를 깎아내리거나 상대가 몰락했으면 하는 감정으로 하는 말이나 행동이 혐오다.


혐오의 말, 혐오 행동이 앞설 때 이성은 마비된다. 이성이 잠들 때 괴물이 눈뜬다고 했던가. 이 비슷한 말이 고야 그림에 있다고 기억하는데, 혐오 앞에 이성은 자리잡을 수가 없다. 그만큼 혐오는 이성으로도 논리로도 이야기가 되지 않기 때문에 고치기 더 힘들다.


왜냐하면 자신이 혐오 발언이나 혐오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혐오는 타인의 관점으로 다른 대상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주로 지니게 된다.


자신을 다른 사람의 눈으로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남들을 자신만의 눈으로 재단하지 않는다. 그런 재단이 얼마나 위험한지 안다. 그래서 그들은 혐오 발언이나 행동을 잘 하지 않는다.


혐오가 판치는 사회는 이렇게 성찰이 없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찰 없는 사회가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두려움' 때문이다. 어떤 두려움? 자신이 잘살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을 다른 존재들이 빼앗아 갈 거라는 두려움. 그런 두려움이 자신을 더욱 꽁꽁 닫아걸게 만들고, 남들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막아버린다.


그래서 두려움은 혐오를 부추기고,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여 사회 통합을 가로막는다. 이런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이 책의 저자인 마사 누스바움은 여러 근거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 책 원래 제목은 '두려움의 군주제:우리의 정치 위기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라고 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두려움은 자유로운 사고를 가로막는다. 자신이 결정하기보다는 다른 존재가 결정한 것에 따르게 된다. 그래서 군주제다. 이런 사회는 닫힌 사회다. 서로가 서로에게 장벽을 쌓고 교류를 하지 않는. 그러면서 근거도 없는 비방, 혐오, 폭력을 행사하는 사회.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어디 미국 사회뿐만이겠는가? 이 책에 나온 수많은 혐오들은 우리 사회에서도 일어나고 있으니... 남 나라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일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런 혐오가 왜 일어나고 있으며,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는 대다수의 학자들이 분석하고 알려주고 있다는 데 있다. 이미 우리는 혐오가 만연한 사회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도 혐오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왜? 바로 어떻게 혐오 없는 사회를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마사 누스바움이 제시하는 방향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한다. 분석은 이제 됐다. 실천해야 한다.


가정에서, 친구들과의 우정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사회가 불안하면 혐오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회의 불안은 개인 삶의 불안정으로, 좋은 삶을 살기 힘들다는 두려움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이성을 마비시킨다고 했으니, 두려움을 벗어나는 가장 쉬운 길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방식을 택하기 쉽다.


그러므로 사회가 두려움을 없애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누스바움은 '역량 접근법'을 제시하고 있다. '최소한의 정의가 존재하는 사회라면 모든 시민이 최소한의 기본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보장받아야 한다'(286쪽)고 한다. 그 열가지 역량은 다음과 같다. 자세한 내용은 이 책 286쪽-288쪽을 참조하면 된다.


1. 생명, 2. 신체 건강, 3. 신체 보전, 4. 감각, 상상, 사고, 5. 감정, 6. 실천 이성, 7. 관계, 8. 인간 이외의 종, 9. 놀이, 10. 환경 통제


이것들이 보장되는 사회라면 두려움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두려움에서 벗어난 사회라면 상호 존중, 이해, 협력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미국에서 이런 일들이 성공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의무적으로 어느 기간 동안은 공공 복무를 하게 해야 한다고 한다. 군대조차도 의무가 아닌 미국에서 누스바움은 공공업무에 모든 사람이 종사해 봄으로써 공동체에 대한 생각, 공공선에 대한 관점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좀 실현불가능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지만, 공공업무에 모두가 종사하지 않더라도 누스바움이 말한 교육이나 예술을 통해서, 또 지역 사회의 활동을 통해서 어느 정도는 공공선에 대한 인식과 자세를 지니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녀야 할 희망적 자세 아닌가 한다. 지금 우리는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후보자 선출을 위한 여러 활동들을 만나고 있다. 이때 우리가 어떤 후보를 선택해야 할지 그것은 개인의 판단이겠지만, 적어도 나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후보가 아니라 '희망'을 주는 후보, 혐오 없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가자고 하는 후보를 선택하고자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타인을 혐오하는 사회가 아니라 타인에게 연민을 지닌,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으므로.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우리에게 어떻게 그들과 지내야 하는지, 어떤 생각이나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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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0-26 09: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혐오의 근원에 두려움이 있다는 말 ! 공감합니다.

kinye91 2021-10-26 10:26   좋아요 1 | URL
두려움으로 인해 이성이 마비되고, 합리적인 판단보다는 다른 사람의 판단에 따르기 쉬우니, 혐오를 통해 자신들의 유대감을 형성한다는 누스바움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가 어떤 두려움을 지니고 있는지 파악한다면, 혐오 사회로 가지는 않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