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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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에서 44개의 편지를 띄웠다. 그리고 그 편지는 내게 닿았다.

 

44편 모두가 마음으로 파고들면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 '고독'을 찾게 하였고, 그래서 바우만이 '수용하는 그 행위는 반항을 만들어낸다. 만약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적어도 그때 가장 그럴듯한 결과는 바로 반항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388쪽)'라고 했듯이, '고독'을 깨닫는 순간 '고독'하게 만든 사회에 대하여 반항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바우만의 44편의 편지에 이어서 한 편의 편지를 띄운다. 

 

우리 역시 유동하는 근대에 살고 있으며, 고독을 잃어버리고 있고, 그래서 반항마저도 빼앗겨버린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공위시대'라는 말이 지금에 해당하는지도 모르겠다. 낡은 것은 사라져 가는데, 새로운 것은 오지 않은 시기로 말해질 수 있는 그런 '공위시대'

 

격변하는 현대사회에서 낡은 가치들은 무시되고 있으나, 새로운 가치는 등장하지 않고 있는 상황.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일. 그것이 바로 '반항하는 인간'이 되는 일.

 

어쩌면 바우만의 이런 책은 젊은이들이 읽어야 할지 모른다. 이 책은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고, 현재를 분석하고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현재를 이야기하는 목적이 바로 미래를 만들어가는데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이념이나 가치에 사로잡혀 있는 소위 기성세대들보다는 미래를 살아갈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읽으면서 자신들의 행동을 만들어가는데 도움을 받으면 좋을 책이다.

 

그래서 45번째 편지는 이렇게 시작할 수 있다.

 

기존의 가치에 안주하지 마라. 눈은 앞을 보게 되어 있다. 앞을 보고 걸음을 걸어라.

 

대학의 죽음이 논의된 지 오래. 대학에서 학문 추구는 사라진 지 오래라는 말이 들린다. 대학은 오로지 취업의 한 관문으로서만 존재한다고... 취업과 관련이 없는 전공은 홀대당하고 있다고... 그리고 학생들도 전공과 관계없이 너도나도 영어 공부나 취직공부에만 전념하고 있다고.

 

이것은 바로 현재의 공포다. 취업 불안이 취업에 대한 공포로 나타나고 있다. 비정규직이 양산이 되고, 그나마 이러한 비정규직 일자리도 찾기 힘든 상황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현재다. 그래서 이런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을 한다.

 

소위 스펙을 쌓으려고 한다. 이것이 취업에 도움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너나없이 취업 준비 학원을 다닌다든지, 영어가 필수라고 영어 공부에 매달린다든지, 조금이라도 취업에 유리한 전공을 선택하려고 한다.

 

자신의 삶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는다. 그렇게 고민할 시간도 없다. 오로지 달릴 뿐이다. 그런데 이 달림이 이상하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자꾸 제자리 걸음을 하던지, 아니면 거꾸로 달린다는 생각이 든다.

 

취업 공포. 이것은 기존의 가치다. 그리고 현재에 매몰되어 있는 모습에 불과하다. 취업을 하려고 하는 이유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다. 거창하게 자아실현이니 뭐니 하지만, 본질은 내가 살기 위해서 취업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치열하게 자리를 정해져 있으니,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즉 의자를 차지하기 위하여 치명적인 '의자놀이'를 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문제를 개인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렇게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게 문제다.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경제학자 우석훈이 "88만원 세대"란 책에서 했던 말대로 '토플을 집어치우고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개인적인 해결책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눈을 앞으로 돌리자,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자. 그러면 이런 '의자놀이'가 우스워진다.

 

성경에서도 생계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또한 우리 말에서도 자기 먹을 것은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이만큼 생계는 사회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사회가 해결해야 할 일은 개인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유동하는 근대, 액체 근대의 문제이다.

 

젊은이들도 이런 액체 근대 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다른 가치를 보여주는 주장들이 있다.

 

전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생계를 보장해주는 제도를 만들자는 운동이 있다. 그러면 생계 걱정 때문에 창조적인 일에 도전하지 않았던 젊은이들이 생계 걱정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을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공위 시대. 새로운 가치를 주창하고 있다. 그런데 외면한다. 아직 이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꼭 '기본소득'이 아니더라도. 이들은 함께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잃었다. 바로 '고독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주범은 스마트폰, 참 스마트하게 쓰여야 하는데, 오히려 사람들에게서 고독을 뺏어가 버리고 말았다. 다른 말로 하면 생각할 시간을, 함께 하는 시간을 뺏어가버렸다는 말이다. 그래서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음에도 파편화된 경험밖에는 공유하지 못한다.

 

스마트폰을 스마트하게 사용해야 한다. 수용해야 한다. 이제 스마트폰을 제거하기란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대를 수용한 다음, 그 다음을 생각해야 한다.

 

"집으로 가는 길"이란 영화에 보면 우리나라에는 네티즌이 있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지난 대선에서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댓글, 이런 스마트폰과 관련된 일 아니던가.

 

스마트폰은 사람들을 철저하게 개별화, 파편화시켰지만, 반대로 사람들을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로 불러내는 역할도 한다.

 

즉, 스마트폰을 수용하고, 그 한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때 우리는 '반항하는 인간'이 될 수 있다.

 

이를 이용해서 '기본소득'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 공간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면 개인적으로 해결하려 했던 문제가 사회적으로 해결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때 우리는 다른 세계로 한 발 도약할 수 있다. 이게 4번째 편지이다. 바우만의 논리를 내적으로 더 밀고나간 그런 편지.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지금은 이런 방법을 택할 수도 있지 않나 하는.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책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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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 전체의 이미지는 시각이다. 제목인 "춤"부터 보아도 이미 시각적 이미지가 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에서도 빛과 색깔이 등장한다. 색깔이 빛의 형상이라면 그는 빛에 집중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시집을 여는 시의 제목도 '빛의 소묘'이다. 그만큼 시인은 빛에 관심이 많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빛 가운데서도 그는 이상하게 스러져 가는 빛이거나 갓 나타난 빛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런 시들이 많다. 전체적으로 외워야지 하는 시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도 이런 데서 오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빛에는 온기가 없다. 온기라는 말이 이상하면 '열'이 없다. 즉, 그의 시집에 나오는 빛들은 빛으로 끝난다. 빛이 '볕'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빛'이 '볕'으로 나아가지 않는 상태. 그것은 그냥 보기에만 좋을 뿐이다. 우리의 삶에서 오히려 보기에 좋아서 고통일 수밖에 없는 순간일 수도 있다.

 

사람들의 삶에는 '빛'이 '볕'으로 전환되어야 살만하다고 느낄테니 말이다.

 

그래서 이 시집을 읽으며 보기에만 좋음이 얼마나 우리를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깔끔한 모습, 단정한 모습, 단아한 목소리. 언제 보아도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이 보기에 참 좋지만, 그 모습에 사람다움이 없다면, 따스함이 없다면 거리만 느낄 뿐이다.

 

함께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할 수 없는 사람. 지향을 하지만, 결코 함께는 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것이 바로 '볕'이 되지 못한 '빛'의 한계다.

 

훌륭한 지도자는 그래서 '빛'이 되기보다는 '볕'이 되어야 한다. 사람에게 다가와 눈부시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따스하게 덥혀줄 줄 알아야 한다. 덥혀주어야 한다.

 

밝음에 따스함이 없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삶을 더 힘들게 할 뿐이다. 그런 지도자는 멀리서 바라볼 때만 좋다. 가까이에 있으면 주변에 있는 사람을 힘들게만 한다.

 

왜 이 시집을 읽으면서 '볕'이 되지 못한 '빛'의 이야기를 생각했는지는 모른다. 이상하게도 이 시집을 읽으면서 밝기는 있되, 온기는 없는 그런 '빛'만을 생각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볕'이 그리웠을 뿐이다.

 

정치는 '빛'이 아니라 '볕'임을 생각하게 되었을 뿐이다. 나는 화려하고 밝은 '빛'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을 따스하게 만들어줄 '볕'을 그리워하고 있을 뿐임을 이 시집을 통해서 느꼈을 뿐이다. 왜 그런지는 모른 채...

 

어쩌면 지금의 정치가 '빛'에만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말은 화려하다. 참으로 화려하다. 정치인들의 말을 들으면 세상이 이만큼 좋을 수가 없다.

 

화려한 말들. 국민을 걱정하는 말들. 그리고 너무도 깔끔하게 보이는 외모들. 그 수사들 속에는 이상하게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은 '빛'으로만 보인다. 나는 그들에게 '볕'을 바라는데 말이다.

 

사실, 이 시집에는 따스한 시선을 담은 시들도 많다. 그럼에도 이렇게 느낀 것은 내가 읽고 싶은 대로 읽고 느끼고 싶은 대로 느낀 시집을 제멋대로 해석한 '오독'의 대표적인 예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모든 글은 오독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이 시집을 통해 '볕'을 그리워하는 나를 발견한 것에 위안을 삼는다.

 

마음에 드는 시는 '얼음 계곡'(83-85쪽)이라는 시인데, 프로스트의 '두 갈래 길'을 연상시키는 시다. 하지만 이 시보다도 더 마음에 남아 있는 시... '지평(地平)'

 

地平

 

석유를 먹고 온몸에 수포가 잡혔다. / 옴팍집에 살 때였다.

아버지 등에 업혀 캄캄한 / 빈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읍내의 병원은 멀어, / 겨울바람이 수수깡 속처럼 울었다.

들판의 어디쯤에서였을까, / 아버지는 나를 둥근 돌 위에 얹어놓고

목의 땀을 씻어내리고 있었다.

 

서른이 넘어서까지 그 풍경을 / 실제라고 믿고 살았다.

삶이 어렵다고 느낄 때마다 / 들판에 솟아 있는 흰 돌을

빈 터처럼 간직하며 견뎠다. / 마흔을 앞에 두고 나는 이제 그것이,

내 환각이 만들어낸 도피처라는 것을 안다.

 

달빛에 바쳐진 아이라고, / 끝없는 들판에서 나는

아버지를 이야기 속에 가둬 / 내 설화를 창조하였다.

호롱불에 위험하게 흔들리던 / 옴팍집 흙벽에는 석유처럼 가계(家系)가

속절없이 타올랐다. / 지평을 향한 생(生)이 만든

겨울밤의 환각.

 

박형준, 춤. 창비. 2005년 초판. 26-27쪽

 

지평, 늘 가까이에 있는 것 같지만, 다가가고 다가가도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늘 보인다. 이것이 바로 삶이다. 볕이 없는 삶. 그런 삶은 환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

 

내 삶의 지평은 어디인가. 나는 그 지평의 어디쯤에선가 하나의 바위를 만들어놓고, 가끔은 쉬고 있지 않은가. 그 바위는 내 스스로도 만들지만, 누군가가 만들어줄 수도 있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내 삶을 '빛'에서 '볕'으로 비춰주고 있는 사람 아니겠는가.

 

내 삶이 유지되는 일이 내 곁에 있는 그런 '볕'같은 사람 덕분이듯이,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그런 '볕'같은 정치가는 어디에 있을지... 우리는 저 지평의 끝에 그런 정치가를 우리가 쉴 수 있는 바위처럼 창조해야 하지 않을까...

 

이 시집을 읽으며 한 공상...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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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성과 홀로코스트 - 유럽 최고의 아말피 상 수상작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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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읽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은 책이다. 홀로코스트 하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량학살, 절멸 등으로 쓰이는 이 용어는 우리 현대사이 암울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마음이 편치 않았던 이유는 과연 홀로코스트는 과거의 일일까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한 순간으로 홀로코스트가 머물렀다면 읽으면서 그렇게 맘이 불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과거의 것은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그것은 현재를 지탱하게 하는 하나의 축으로서 기능을 할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세계를 보라. 과연 홀로코스트는 끝났는가? 곳곳에서 지뢰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그 지뢰가 단지 발목만을 날리지 않고 공동체의 삶을 끝장내고 있지는 않은가.

 

홀로코스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사건이지 않은가. 아니면 현대라는 벌판에 숨어 있는 지뢰이지 않은가. 언제든지 밟으면 터질 수 있는. 늘 우리 주변에는 있지만, 쉽게 보이지 않는. 그래서 평소에는 의식하고 있지 않는. 그렇다고 없지도 않은. 그런 존재.

 

바우만이 이 책은 홀로코스트를 분석한 책이다. 그가 역사학자가 아니라 사회학자이기 때문에, 홀로코스트의 사회학적 의미를 추구한 책이라고 해야 한다.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는 일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한 일이고, 그렇다면 바우만이 하고자 한 일은 홀로코스트가 우연히 일어난,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말한다. 내면적으로 폭력성을 지닌 사람이 그 폭력성을 표출한 것이 홀로코스트가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일로, 현대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며, 홀로코스트는 현대가 되었기에 가능했다고.

 

홀로코스트는 현대와 떨어져서는 얘기할 수 없는 개념이라는 뜻인데...

 

현대의 관료제는 홀로코스트의 기반

 

체계적이고도 대규모의 살상이 가능한 기반은 바로 관료제라고 한다. 관료제는 다른 말로 하면 합리성과 체계성에 기반한 조직이다. 여기서는 도덕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오로지 합리성만이 추구된다.

 

즉, 일을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도덕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문제는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주어진 일을 어떻게 하면 빠르게 문제없이 처리할 것인가를 관료들이 고민하지, 왜 이 일을 해야 하나는 고민거리도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렇게 관료제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로 일이 분리될 필요가 있다. 즉, 자신이 일의 전부를 알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일의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하면 된다. 이것은 현대의 분업이 야기한 결과이기도 하다.

 

현대에 들어 관료제가 확립된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철저한 분업화에 기인한 것도 있으리라. 그리고 이러한 분업화는 사람들에게도 일의 전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았으며, 덕분에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만 신경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말은 자기의 일만 하면 되지, 일의 전체 과정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얘기고, 이는 법대로, 원칙대로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낳게 된다. 어차피 책임은 다른 사람이 진다.

 

이게 홀로코스트가 가능해지게 되는 이유다. 이런 관료제 사회에서는 서로가 대면할 기회가 사라진다. 대면할 기회가 사라짐. 이는 자연스레 거리를 두게 된다는 얘기다.

 

즉 구체적인 개인을 만나지 못하고 추상화되고 일반화된 사람들만 만난다는 얘기다. 홀로코스트는 그렇게 사람들을 구획해버린다. 이런 구획을 통해 개인이 지니는 책임은 사라진다.

 

개별적으로는 인간적이라는 나치 당원들이 그렇게 잔학한 행위들을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거의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현대성이 그렇게 구조를 만들어갔기 때문이다.

 

이 점이 무섭다. 우리도 가장 고도화된 관료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엄정한 법 집행. 참 많이도 들은 말이지 않은가. 그래서 이러한 법 집행을 위해 많은 공권력이 동원되고, 공권력은 자신들의 힘을 정당하게 행사하고 있다고 하지 않은가. 오히려 공권력을 막은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고, 이들은 사회를 불안정하게 하는 불온세력이기 때문에 격리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자연스레 우리는 그들과 우리를 구별하고, 그들에게 가해지는 공권력의 행사를 거리를 두고 지켜보기만 하지 않는가. 우리에게 책임은 없다! 아니, 책임이라는 말조차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를 읽으면서 마음이 불편한 이유였다.

 

디지털 시대, 일명 스마트 시대, 유비쿼터스 시대가 되면서 우리는 서로 얼굴을 대면할 기회를 잃어 왔다. 가까운 사람 사이에서도 그런데, 모르는 사람은 진짜로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그와 나의 거리는 너무도 멀어서 그에게 벌어지는 일은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나에게는 전혀 책임이 없는 일이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다!

 

그러므로 사회 곳곳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나도, 세계 곳곳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나도, 그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일 뿐이다!

 

그냥 그렇게 홀로코스트는 반복된다. 나치가 자행한 만큼의 대량 학살은 아닐지라도,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목숨은 하나든 열이든 백이든 천이든 다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으니...

 

하여 세계 곳곳에서 홀로코스트라는 지뢰가 터지고 있는데... 이 지뢰를 우리는 우리 곁에도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남의 일이려니 하고 넘어가고 있다. 바우만이 우려한 일이 이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럼에도 이 사회학자의 책에는 여전히 대안은 없다. 없는 것이 정상일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은 답답하다. 그래도 제대로 안다면... 그 다음엔... 어떤 고민이... 어떤 행동이... 따르지 않을까...이게 바우만의 책을 계속 읽게 만들고 있다.

 

대안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그래도 그가 제시하는 대안이라고 한다면, 홀로코스트가 가능한 정원사의 세계, 원예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다원성을 회복하는 일. 자신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는 일이라고... 그러면 홀로코스트를 벗어날 수도 있을 거라고 하는데...

 

이런 다원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지금 우리 사회는 "안녕들 하십니까?"로 몸부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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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과 시집이라. 참 뜬금없는 제목이다. 그런데 이 시집을 읽다가 정치인이 떠올랐으니, 그리 뜬금없는 제목도 아니다.

 

시집과 정치인은 공통점이 많다.

 

우선 시집과 정치인은 처음에 잘 모른다. 이들과 친숙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시집을 사기 위해서는 제목을 먼저 본다. 제목이 마음에 들면 시집을 산다. 마찬가지로 정치인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공약을 먼저 본다. 그 공약이 마음에 들면 정치인은 뽑는다.

 

정치인의 공약과 시집의 제목은 이렇듯 비슷한데...

 

가끔 공약이 잘 드러나지 않는 정치인이 있다. 제목이 시의 제목으로 나와 있지 않아 시집을 모두 읽게 만드는 시집처럼, 공약이 선명하지 않은 정치인은 그 공약을 제대로 실천하는지를 살피기 위해서는 정치 인생 전반을 살펴야 한다. 참 힘든 일이다. 그리고 이런 정치인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 시집의 제목이 된 "나는 조국으로 가야겠다" 역시 시의 제목이 아니다. 시의 한 구절이 제목이 되었다. 이 구절은 이 시집의  '마장동 참새'(96-97쪽)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이 시는 처음이 '나는 조국으로 가기 위하여'로 시작하여 끝이 '나는 조국으로 가야겠다'이다.

 

그래서 제목을 찾기 위해서는 시집을 모두 읽어야 한다. 찾아야 한다.

 

두 번째는 그 사람을 잘 모를 때는 추천하는 사람을 본다. 추천하는 사람이 평소에 괜찮다고 여겨졌던 사람이면 그 사람이 추천한 정치인도 선택을 하게 된다. 이게 사람의 심리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시집도 마찬가지다. 뒤에 해설을 한 사람을 본다. 시 해설을 한 사람이 평소에도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 사람이면 그 시집을 망설이지 않고 산다. 왜냐 이미 검증되었다고 믿으니까. 적어도 이 시집에 해설을 쓴 정과리라면 문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다고 믿을 만한 사람이니, 이 시집은 시로써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었다고 믿을 만하다.

 

이도저도 아니면 정치인은 당을 본다. 내가 지지하는 정당의 정치인이라면 최소한 이 정도는 하겠지 하는 믿음이 있으니까. 시집도 그렇다. 출판사를 본다. 평소에 좋아하던 출판사에서 낸 시집이면 어느 정도는 믿음이 간다. 최소한 실패는 하지 않겠지 하는 생각으로 시집을 골라들게 된다.

 

'문학과지성사'. 한 때 '창작과비평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문학계를 양분했던 문학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출판사 아니던가. 출판사의 명예를 걸고 시집을 편찬할테니... 믿을 조건은 갖춘 셈이다. '창비시선'이나 '문지시선'은 그 자체만으로도 힘을 갖고 있다. 믿음을 주고 있으니.

 

그 다음에 이러한 믿음들이 별로였을 때 다음을 기약하게 된다. 정치인의 다음 공약을 기대하고 그가 새롭게 실천하기를 기대한다. 시집은 신작시집을 기대한다. 그런데... 신작시집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 정치인이 기대에 또 어긋났을 때 이 때는 영영 이별이다. 다시는 돌아보지 않는다. 돌아보고 싶지 않다. 정치인은 믿음 속에서 사라져 표를 얻을 수가 없고, 시인은 더이상 시집을 팔 수 없게 된다.  

 

백학기의 신작시집은 사지 못했다. 그동안 시에서 멀어져 온 삶도 있겠고, 그의 시집을 억지로 다시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딱히 마음에 들지 않은 것도 아닌데... 마음을 그리 움직이지도 않으니...

 

공통점이라는 것이 이렇듯 많이도 있는데... 이 시집을 읽으며 마음이 별로 편하지는 않았다. 우선 제목이 '나는 조국으로 가야겠다'는 것에서부터...

 

조국으로 간다는 말은 내가 조국을 떠나 있단 말인데... 이 시집의 내용은 모두 조국에서 살고 있는 화자들이 전개해가고 있다. 그럼에도 조국으로 가야겠다는 다짐은 내가 원하는 조국이 아니라는 뜻이다.

 

즉, 내가 원하는 조국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뜻이고, 그러므로 이 시에 나오는 조국은 상처받은 조국, 아직도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는 조국이다. 이미 30년 전 시집인데... 그 때는 그래도 되었겠지... 해방이 되고 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고(해방이 된 지 30-40년 뒤를 이렇게 얘기해도 된다면), 조국은 막 건설되기 시작했을 때일테니...

 

마음이 편하지 않은 이유는 이 시가 쓰여지고 난 시점에서 또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엄청난 공약(空約-공수표들)들에 휩싸여 살았음을 이 시집을 읽으며 계속 깨달아야 했기 때문이다.

 

당하고 당하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집을 바꾸는 것보다도 더 힘들게 정치인을 바꾸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에고...하여 시인은 '시란 언제나 가난한 아버지 곁에 함께 하며/고스란히 물려받은 귀한 아버지의 무명옷처럼/질기고 확실한 유산이어야 함을/... /아버지의 눈꺼풀 위에 내려앉는 잠만큼이나/달콤해야 함을/(백학기 '불꺼진 용서의 간이역에서 떨고 있는 나의 시는'의 부분: 101쪽)'이라고 노래하고 있는데...

 

이 시를 읽으며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런 세상이 와야하겠는데... 그것이 바로 시인이 바라는 조국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조국으로 나도 가고 싶다.

 

짧은시... 오늘 한겨레 신문에서 본 어느 주장이 떠오르는 시.

 

밥을 위하여

 

내 밥에 눈물꽃 피네

목에 걸려 또한 타흐르는 밥알들이여

정든 산하 정든 이들이 기운 밥덩어리

 

백학기, 나는 조국으로 가야겠다, 문학과지성사. 1989년 초판 2쇄. 108쪽

 

그 주장은 "농민들에게 월급을 주자"였다. 밥없이는 살 수 없는 우리들. 그 밥을 위하여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 그러나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빚만 늘어나는 사람들. 그들에게 우리는 생계를 빚지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생계를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지...

 

기본소득과 연계하여, 우리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그들에게 우리 "월급"을 주는 방안. 이 시를 보자. 그들이 생산한 밥에는 이러한 것들이 들어있는데... 그 밥이 그냥 편하게 넘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시집. 정치인. 그리고 아직도 진행형인 "조국". 그러한 조국으로 가야겠다는 시인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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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 A Life - 고요한 밤의 빛이 된 여인
도로시 허먼 지음, 이수영 옮김 / 미다스북스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헬렌 켈러 하면 장애를 딛고 성공한 사람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사실 어렸을 때 읽었던 헬렌 켈러의 이야기에는 그 정도가 다이기 때문이다. 설리번이라는 훌륭한 선생님으로 인하여 글을 알게 되고, 그 때부터 자신의 장애를 딛고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성공이야기.

 

장애는 극복될 수 없는 무엇이 아니다라는 살아 있는 예. 그게 다였다.

 

사실 설리번 선생에 대해서도 그냥 어렸을 때 헬렌에게 글을 가르쳐준 선생님 정도로밖에는 알지 못했다. 헬렌에 대한 지식은 여기에서 멈춰 있었던 듯하다. 짐승같던 헬렌이 사람이 되는 순간. 딱 거기까지.

 

커가면서 헬렌이 사회참여를 했다는 얘기까지는 알았다. 그가 사회주의에 공감했다는 사실도. 이것도 딱 여기까지. 장애를 가진 사람이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일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기에 헬렌이 사회주의에 공감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랬겠지가 끝이었다.

 

그만큼 헬렌의 삶은 내게는 피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더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러다 읽게 된 이 책. 헬렌의 전 생애를 다룬 이 책은 헬렌에 대해서, 장애에 대해서, 그리고 교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준다.

 

헬렌의 평전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세 명이다. 한 명은 헬렌 켈러. 또 한 명은 앤 설리번 메이시. 그리고 마지막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인 폴리 톰슨.

 

헬렌을 중심으로 둘을 좌우에 놓을 수가 있을까? 아니 어쩌면 이들은 헬렌의 삶에 좌우로 있지 않고 헬렌의 삶에 함께 있었던, 헬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앤 설리번으로만 알려져 있던 설리번 선생은 뒤에 메이시라는 성이 붙는다. 그가 유일하게 결혼하여 만든('얻은'이라는 말이 거슬린다) 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늘 헬렌 켈러의 삶에서 뒤에만 존재했던 이 사람이 헬렌의 삶 내내 함께 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

 

평생을 헬렌과 함께 살고 죽으면서도 헬렌의 삶을 걱정했던 사람. 그는 강인한 정신과 냉철한 지성으로 헬렌의 삶을 지배했다. 지배했다는 표현이 어색하다면 헬렌의 삶을 이끌었다고 해야 한다.

 

헬렌이 평생을 남들에게 드러내고 남들에게 인정받게 해주었던 사람. 그러나 자신은 헬렌의 뒤로 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 헬렌과 떨어진 삶을 생각도 하지 못했던 사람. 그는 헬렌과 함께 한 평생이 행복했을까? 때로는 그에게도 엄청난 갈등이 있었을테고, 헬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구도 있었을텐데...

 

헬렌의 내면까지도 다루어서 헬렌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인간적인 모습까지도 우리에게 알려주겠다는 이 평전에서도 설리번의 이러한 내면적 갈등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짐작은 할 수 있을 뿐이다. 그에게도 인간적인 고되,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욕구 등이 왜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헬렌의 삶과 자신의 삶을 하나로 묶을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고(다른 말로 하면 헬렌이 자신의 도움이 없으면 살기 힘들 거라는 점을 알고) 헬렌과 평생을 함께 살아가야 했으니...

 

이 점은 폴리 톰슨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앤 설리번이 죽은 뒤 폴리가 죽을 때까지 헬렌에게 앤 설리번의 역할을 했던 사람은 바로 폴리 톰슨이다. 죽어서도 헬렌과 앤과 함께 나란히 있는 그는 대부분의 헬렌 전기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헬렌의 말년에 앤 설리번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다.

 

이 책의 장점은 바로 이것이다. 그 당시 장애를 가진 여성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길은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 헬렌의 성공에는 헬렌과 함께 한 사람들의 희생(?아마도 사랑이라고 해야 하겠지)이 있었다는 사실.

 

헬렌도 우리가 성녀로 알고 있지만, 그에게도 사람의 욕구가 충만했다는 사실. 그런 욕구를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기에 남에게 의존해서 많이 억눌러야만 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 장애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하게 하고... 우리가 장애 문제를 시혜의 관점에서만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사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욕구를 지닌 사람이라는 사실. 우리와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통합교육. 함께 하는 삶. 요즘 장애 운동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들 아니던가. 이를 헬렌 켈러의 삶에서 찾아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헬렌의 삶에서 신비주의를 걷어내고 있는 이 책은 오히려 그래서 헬렌의 삶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그 노력이. 그 시대에 남에게 의존해서 삶을 살 수밖에 없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한 헬렌의 삶이 더 감동으로 다가온다.

 

헬렌의 자신의 처지에서 힘든 사람들의 처지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사회 전면에 나서기도 했다. 비록 남들은 헬렌에게서 그런 모습을 지우려고 했지만 말이다.

 

헬렌이 믿었다는 스베덴보리의 영성. 그것은 아마도 헬렌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극복하게 했을 것이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도 알려주었을 것이다.

 

적어도 영성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믿음을 가진다면 막 살 수는 없을테니 말이다. 그것은 장애를 가진 사람이든, 아닌 사람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책은 나에게 인간 헬렌 켈러를 알게 해주었다. 그리고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주었고, 지금은 많이 나아진 듯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먼 장애 정책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주었다.

 

좋은 책이다. 이런 평전이 필요하다. 한 사람을 성인으로 만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약점만 나열하지도 않고, 그럼에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자신을 처지를 둘러 보라.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무엇을 해야 행복할지 생각해 보라. 이 책은 그 점에서 시작하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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