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지 않겠다 창비청소년문학 15
공선옥 지음 / 창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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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의 소설집이다.

 

6편의 단편 소설이 묶여 있는데, 그 중 '라면은 멋있다'와 '힘센 봉숭아' 두 편은 연작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과 사건의 전개가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머지 네 편은 각자 독립된 단편들이라고 보면 된다.

 

그럼에도 소설집이라고 하면, 그 소설들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데... 이 소설집의 공통점은 주인공이 모두 청소년들이라는 점이다.

 

작가는 말한다.

 

청소년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나가는 글을 쓰면서 나는 내가 쓰는 것이 청소년소설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소설을 썼다. 단지 그 소설의 화자들 내지는 주인공들이 청소년 시기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뿐, 여기 묶인 이 단편들이 청소년소설인지 안니지 나는 잘 모르겠다.(179쪽. 작가의 말에서)

 

청소년들. 한참 꿈이 많은 시절을 보내는 이들이다. 그러나 이런 청소년들이 행복한 삶을 살까? 어떤 이는 청소년들이 공부에 치여 자신을 잃어가는 모습을 소설로 쓰고, 어떤 이는 청소년들의 일탈을 소설로 그려내고 있지만, 공선옥은 이들 청소년 중에서도 가난을 짐으로 지고 있는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몇몇을 제외하고 우리는 가난을 자신의 업처럼 지고 살아가고 있는데... 그럼에도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가 가난하지만 가난에 굴복하지는 않는다. 가난에 허우적대기보다는 가난을 바로보면서 가난과 맞서려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절망의 나락에서도 '나는 죽지 않겠다'라고 삶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기도 하며, '일가'에서는 남의 외로움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라면은 멋있다'와 '힘센 봉숭아'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인물이 등장하고, 이러한 가난 속에서도 꽃을 피우면서 가난 속에서 자신은 황폐해지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는 인물이 등장한다.

 

'울 엄마 딸'에서는 엄마와 비슷한 길을 걸어가는 딸의 모습을 통해서 그 과정에서 모녀의 사랑을 확인하고, 청소년 임신이라는 어두운 현실을 어둡게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삶에의 의지를 일으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보리밭의 여우'를 통해서는 시대의 어둠을 은연중에 드러내나 결코 그 어둠 속에 잠기지 않는다.

 

하여 이 소설집에 나오는 배경이나 인물들은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인물이나 환경이 되는데, 소설을 읽으면서 위안을 받게 되는 점은 이들이 어둠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작가는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모든 어른들은 청소년 시기의 감성들을 야금야금 빼먹으며 늙어가는 것만 같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그 감성들의 최대치를 기억해내는특별한 즐거움을 누렸다. 그러하니, 이 글을 읽을 청소년들도 바로 지금 나중에 빼먹고 살 감성들을 최대한 비축하기를 바란다. (180쪽. 작가의 말에서)

 

청소년들이 살아갈 현실은 생각만큼 밝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칙칙함 속에 자신을 빠뜨리고 허우적대는 모습은 청소년들이 지녀서는 안된다.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듯이, 어두운 현실에서도 청소년들은 밝음을 추구한다.

 

아니, 청소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밝음일 수 있다. 그 밝음으로 청소년들은 어둠 속에 가라앉아버리려는 어른들에게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한다. 또한 그 밝음으로 청소년들은 어둠 속에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만들어가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이 소설집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작가의 말대로 청소년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좋다. 청소년들이 읽으면서 나와 비슷하네 해도 좋은 소설이고, 이미 청소년 시기를 거쳐온 어른들이 읽으며 그 때 그랬었지 해도 좋으니까. 

 

현실의 밝은 면만이 아니라 현실의 어두운 면을 고루 보여주고 있으며, 청소년들이라고 해서 늘 밝음 쪽에만 서야 한다고 표현하지도 않는다. 그냥 청소년들이 겪을 수 있는 일들을 담담히 형상화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형상화 속에서 보여주는 낙천성. 아무리 현실이 힘들고 지치게 해도 사람이 지니고 있는 희망, 즐거움. 그것이 바로 절망에 빠져들지 않고, 절망을 듣고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요소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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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버지의 친척 사계절 1318 문고 42
남상순 지음 / 사계절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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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제목이다.

 

"나는 아버지의 친척"이라니. 아버지와 나는 친척이 아니라, 가족이 아니던가. 그것도 촌수를 따지면 1촌이다. 이 1촌이라는 개념도 편의상 나누는 것이지 사실, 부모와 자식간에는 촌수를 따질 수도 없다.

 

이런 관계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인데, 아버지의 친척이라고 하면 뭔가 사연이 있는 것이다. 이런 사연이 소설을 읽게 만들기도 한다.

 

이 소설은 "가족"을 다루고 있다. 진정한 가족이란 무엇일까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하는 소설이다.

 

부모가 이혼하고 엄마와 함께 살던 미용은 엄마가 암으로 죽자 외가에서 살게 된다. 그러다 평소에는 얼굴도 보지 못하던 아버지 집으로 가 살게 되는데... 이미 아버지에게는 새엄마와 또 입양한 자식이 있다. 그것도 자신과 동갑인 남자(준석)가.

 

미용은 자신을 딸이 아니라 친척이라고 소개하는 아버지에 대해 의아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아버지나 새엄마가 낳지 않은 자식인 준석이 아들이라고 하는 것에 반발을 하게 된다. 준석이 그 사실을 모를 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준석도 그걸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둘은 조금 더 가까워지는데...

 

생물학적인 가족과 사회적인 가족이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데... 혈연으로 뭉친 가족이 가족으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단지 친권자란 이유로 아동을 학대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런 경우에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담을 쌓아 아이들이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또 함께 있으되, 서로 다른 삶을 살면서, 어떻게 하면 가정에서 벗어날까만을 고민하게 하는 가족. 이런 가족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데...

 

그럼에도 생물학적인 가족은 핏줄이라는 이름으로, 천륜이라는 이름으로 굳게 맺어져 있다. 아직까지는.

 

이런 가족 개념에 균열이 생기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회학적 가족인데... 핏줄이 아니더라도 함께 살면서 가족을 이루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함께 살면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서로를 보듬어주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핏줄로는 연결이 되어 있지 않지만, 삶을 통해서 강한 유대관계를 보여주게 된다.

 

가족으로서 자신의 삶뿐만이 아니라, 함께 사는 이들의 감정도 살피고 서로의 삶이 좀더 윤택하게 될 수 있도록 서로 돕는 관계, 이런 가족의 재구성, 그것이 바로 사회학적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사회학적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본다. 진정 가족이란 무엇인가? 꼭 혈연으로 묶여 있어야 하나? 그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혈연이 아니더라도 훌륭한 가족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의 친딸인 미용이는 미용이대로, 입양 아들인 준석은 준석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새엄마는 새엄마대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서로의 감정을 보듬어 주려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그들은 가족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렇듯 이 소설은 생물학적인 가족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 우리는 어떤 가족을 원할 것인가?

 

단지 핏줄로 연결되어 있는 가족, 아니면 함께 삶을 이루어나가는 가족?

 

진정한 가족이란 어떤 것인지 이 소설은 고민해보라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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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엄마 납치사건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9
비키 그랜트 지음, 이도영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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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을 고를지 고민이 많이 된다. 잘못 골랐다가 재미라도 없으면 참 난감하다. 그래서 제목을 보고, 뒷면에 실린 책에 대한 소개글을 보게 된다. 그것도 아니면 작가가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이던가.

 

이 책을 선정한 이유는 단순하다. 오로지 제목. 

 

"불량엄마 납치사건" 무언가 제목에서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는가.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제목만으로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 청소년들에게 추천해줄 수 있을지 판단해보려는 욕구가 작동하게 만든 제목이다.

 

이 제목이 흥리로운 것도 한 가지 이유이겠지만, 사실은 남자 아이를 주인공으로 하여 가족간의 문제를 다룬 소설이 뭐 없을까 하다가 고른 작품이기도 하다.

 

여자 아이가 주인공인 소설은 "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가 있으니, 딸과 엄마의 갈등을 다룬 소설은 됐고, 이제는 아들과 엄마의 갈등을 다룬 소설을 읽으면 되겠다 싶어서, 남자 청소년들에게 추천해줄 수 있을만한 책인가 싶어서 고르게 되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다.

 

그런데... 읽다보니, 이건 내가 고른 이유하고는 좀 거리가 먼 소설이다. 아들과 엄마의 갈등을 중심에 놓고 다룬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추리력을 필요로 하는 소설이다. 일종의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아들과 엄마의 갈등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 소설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법에 관한 내용이 많다. 소설의 각 제목들이 모두 법률 용어다. 예를 들면, 자기부죄거부특권, 도청, 비공개 심리, 물적 증거, 변호인-의뢰인 특권, 피후견인, 자백, 고소 등등 법률 용어가 나오고, 그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고, 소설의 내용이 시작된다.

 

그래서 소설을 읽어가면서 자연스레 법률 용어를 익히게 된다. 멀게만 느껴지는 법이 우리 실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그리고 결코 어렵지 않음을 이 소설을 통해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법률 소설인 것은 아니다. 어느 날 사라진 엄마를 찾는 주인공(시릴)의 모습을 통해서 읽는 내내 주인공과 함께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 누가 납치했는지, 왜 납치했는지 등에 대해서 고민을 할 수 있다.

 

법과 추리를 함께 버무리고, 여기에 청소년들의 심리를 첨가하여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번역된 책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지만, 길지 않고 짧은 문체로 읽기에도 편하다.

 

각 장들도 길지 않아서, 읽으면서 지루해할 틈이 없다. 또한 주인공인 '시릴'을 살펴보면서 그의 모습에 웃음을 머금기도 하게 된다.

 

어느 날 사라진 엄마를 찾아가는 시릴. 그와 함께 도대체 어떤 일이 왜 일어났는지, 어떻게 해결되는지를 찾아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왜 불량엄마라고 했는지, 그 엄마가 겪은 일들이 나오지는 않지만,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서 엄마가 젊은시절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 일을 회피하지 않고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아들의 입장에서 엄마는 불량엄마지만, 그럼에도 자기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엄마, 그 엄마를 찾기 위한 아들 '시릴'의 추리... 그리고 법률적 의미로 인해 밝혀지는 사건의 전모... 

 

다만, 법률이라고 했지만, 그 법률은 이 소설을 쓴 저자가 살고 있는 캐나다의 법률 얘기니, 우리나라와는 조금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고...

 

주인공 시릴의 엄마인 애니의 삶은 우리네 정서와는 좀 맞지 않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 소설을 읽는데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캐나다라는 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읽을테니 말이다.

 

오히려 우리나라와 다른 상황을 통해서 우리의 현상황을, 또는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상황을 간접체험하는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어떤 삶이 바람직한지 소설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고민하게 될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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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반양장) 사계절 1318 문고 2
로버트 뉴턴 펙 지음, 김옥수 옮김 / 사계절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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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성장소설이다. 청소년소설이라고 하는데... 청소년이 어른으로 자라나는 과정을 담고 있기에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모든 청소년 소설은 성장소설일 수 있겠다. 청소년이 주인공이 되는 소설은 청소년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가는가를 작품 전개를 통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장소설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저자의 자전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소설임에도 읽다보면 이것이 허구를 바탕으로 한 소설인지, 사실을 바탕으로 한 회고록인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책의 소개에도 저자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다고 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럼에도 소설이란 이름을 달고 나왔으면 허구로 보아야 한다. 역사소설을 역사로 인정하지 않듯이.

 

이 소설은 어른이 된 저자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읽어가면서 후일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먹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내가 그렇게 지냈었지 하는...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고, 감동적이었는데... 그런데... 아이들이 이 소설을 좋아할까? 아니, 아이들에게 이 소설이 읽힐 수 있을까 하는데는 의문이 들었다.

 

청소년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청소년들이 읽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는데... 아이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감정이입을 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지금 아이들의 삶과 이 소설은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농장에서 어렸을 때부터 한 명의 노동력으로 인정받았으며, 자신의 일을 해야만 하는 주인공과 어린시절부터 청년시절까지 온전한 노동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로지 해야할 일이란 공부밖에 없다는 식의 생활을 해온 요즘 아이들의 삶은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설은 나와는 다른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현실 속에서 주인공이 살아가는 모습에 관심을 가지고 읽는다면 나름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을테니...

 

요즘 청소년들이 이 소설을 읽을 때는 우선 소설 속의 상황을 파악하고, 그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지켜보면 좋을 듯하다.

 

제목이 읽지 않으면 이해가 가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이 제목과 연결지으면 죽음과 삶이 드러나게 된다.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은 바로 아버지가 죽은 날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죽을 때, 다른 존재는 산다는 삶의 경험.

 

주인공이 키운 핑키라는 돼지를 통해서 죽음은 곧 삶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해준다.

 

주인공은 핑키의 죽음을 통해서 어른에 한 발짝 다가섰고, 곧이어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어른이 된다.

 

겨우 열세 살에.

 

열세 살. 한 창 어리광부릴 나이라고 생각하는데, 두 죽음을 통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삶과 죽음이 그렇게 공존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주인공. 결국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잃어간다는 것, 잃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 잃음 위에서 얻음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마음에 와닿았던 구절이 있다. 죽음을 예감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말.

 

"봄이 오면 너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야. 어른이라구. 열세 살짜리 어른. 어른이 되기에 충분한 나이지. 이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네가 책임지고 처리해야 해. 로버트, 너말고는 책임질 사람이 없어. 바로 너 말고는." (149쪽)

 

아버지의 장례식에 온 이웃인 태너 아저씨 부부와 나눈 말.

 

"이렇게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태너 아저씨."

"로버트, 내 이름은 벤저민 프랭클린 태너야. 이웃들은 모두 나를 벤이라 부르지. 친한 친구끼리는 서로 이름을 부르며 지내는 게 좋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이제부턴 나를 베스라고 불러. 로버트." (177쪽)

 

열두 살에 겪은 일들을 통하여 열세 살에 어른이 된 아이의 이야기. 그런 성장을 담은 소설. 도대체 아이란 무엇일까?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나 고민하는 어른들이 읽으면 더 좋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세상은 자기와는 상관없다고 여기고 있는 청소년들이 읽어도 좋을 소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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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계절이다.

 

정치의 계절이란 말보다는 사실 선거의 계절이라는 말이 더 맞는 듯하다.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이미 예비후보 등록이 시작되었으니, 선거의 계절이 시작되었음에는 틀림없다.

 

지방자치 선거에 교육감 선거까지... 우리의 실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선거가 6월에 치러진다. 이 선거를 통해서 4년이 결정이 되는데...

 

정치의 계절이라는 말이 어폐가 있는 것이 정치는 우리의 삶 내내 붙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정치에서 절대로 자유로와 질 수 없기 때문에 정치는 따로 계절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정치를 우리가 실감하게 되는 때가 바로 선거가 치러지는 때이니 만큼, 지금을 강조하기 위해서 정치의 계절이라는 말을 써도 무방하리라는 생각은 든다.

 

그래도 언어가 삶을 좌우할 수 있으니, 정치의 계절이라는 말보다는 선거의 계절이라는 말을 쓰는 편이 좋을 듯하고, 직접민주주의 대신 간접민주주의를 택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선거는 유일하게 시민들이 정치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런 기회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리다는 이유로... 나이나 성별, 신체장애의 유무 등에 의해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고 헌법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년의 나이를 한 살 낮추는 것에 대해서는 심한 반발이 있는데...

 

아직도 한창 배우고 있는 고등학생에게 무슨 선거권이냐부터, 학생이 제대로 된 판단을 하겠느냐는 말까지...

 

그래서 18세로 투표권을 낮추자는 말은 어림없는 소리로 치부되고, 아직도 실행이 되고 있지 않다. 대학입시에 매진해도 시원찮을 고3이 무슨 투표냐고? 그런 시간이 있으면 공부나 하라고?

 

그런데... 그런데... 왜 공부를 하지? 대부분의 학교 교육목표가 민주시민 양성 아니던가. 민주시민은 어떤 사람들이지? 자신들에게 관계된 일에 자신들의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 않은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은 노예에 불과하지 않는가. 아니면 판단불능의 사유가 있는 어떤 특정한 집단이거나.

 

교육감 선거를 예로 들어보면 문제가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교육감은 4년동안 그 교육청의 교육행정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교육부 장관보다도 교육감에 의해서 일선 교육현장은 극심한 변화를 겪는다.

 

그 단적인 예가 서울시교육감 아니던가. 전임 교육감은 혁신학교에 중점을 두고 교육정책을 펼쳤다면, 후임 교육감은 혁신학교를 지우려는 교육정책을 펼치고 있으니, 교육감에 따라 학교 현장은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학교 현장의 중심축 중의 하나가 바로 학생들이다. 학생으로만 국한시키지 않으면 바로 그 나이 또래의 청소년들이다. 청소년들의 대다수를 학생들이 차지하고 있지만, 제도권 밖에 있어도 교육정책의 영향은 제도권 안이나 제도권 밖이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자신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교육감 선거에 학생들은 참여할 수가 없다. 교육감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학교교육의 범위는 청소년이라고 할 수 있는 유,초,중,고등학교 교육에 해당이 된다.

 

하지만 그들은 어리다는 이유로, 판단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도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지, 청소년들이 판단능력이 떨어진다고? 과연 그런가? 그럼 판단능력이 떨어지는 어른들은? 왜 그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을 문제삼지 않는가. 투표권을 주느냐 마느냐는 판단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로 투표를 할 수 없는 상태에 처해 있다.

 

문제는 단지 투표만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정치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민주시민교육"이 목표인 사회과가 교과목으로 버젓이 자리잡고 있지만, 그것은 말 뿐이다. 그리고 시험용일 뿐이다. 오로지 시험을 위한 교과로 존재하는 사회과. 이런 상태에서 청소년들의 정치의식은 발달할 수가 없다.

 

제대로 된 정치교육 한 번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어른이 되었다고 정치의식이 성숙한 시민이 되는가? 그런 경우가 있는가?

 

정치의 후진성, 그것은 정치교육의 부재를 이르는 말이다. 젊은이들에게 왜 너희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느냐고 질책을 많이들 한다. 그것도 다른 때에는 잠잠하다가 선거때가 되면 각 당의 당리당략에 따라 이런 말이 나온다.

 

왜 정치에 관심이 없냐고? 당연하지 않은가. 언제 제대로 정치에 대해서 민주시민의 역할에 대해서 가르친 적이 있는가?

 

학생들이 "안녕하십니까"란 대자보를 붙이자 그것은 학생이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교육당국이 앞장서서 떼어버리는 현실에서, 무슨. 

 

그래서 이번 "민들레 91호"에서는 특집으로 '정치가 꽃피는 교육'을 들었다. 시의적절하게 잘 다룬 기획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정으로 민주시민을 양성하고 싶다면 학생들(청소년들) 너희들은 어리니까, 공부해야 할 나이니까 정치에 관심두지 말라고 할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학생들(청소년들)이니까 제대로 정치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라고 해야 한다.

 

정치에 직접 참여하게도 해야 한다. 물론 집행권을 주지 않더라도, 그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결정을 하게도 해봐야 한다. 그리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옛날에는(지금보다도 더 후진적이라는) 15세가 넘으면 이미 어른 대접을 받았다. 춘향이의 나이를 생각해 보라. 그리도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펼치던 춘향이의 나이는 그 때 16세였다. 또한 옛날에 소년 진사들... 뭐... 이런 과거에 나이 제한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라.

 

민들레 이번 호를 중심으로 학생(청소년)의 정치교육에 대해서, 정치 참여에 대해서 논의를 해야 한다. 마냥 어리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또 하나의 주체로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민주시민이 양성될 수 있다.

 

학생(청소년)들에게 제대로 된 정치 교육을 할 때에만, 선거 때만 반짝하는 정치계절이 아니라, 늘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정치라는 사실을 우리가 체험할 수 있다. 그 사실을 민들레 이번 호가 상기시켜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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