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기는 새
최성각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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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풀꽃상"이라고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우리나라 환경에 중요한 영향을 준 대상에게 주는 상인데, 특이하게도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게 주는 상이다.

 

아마도 1회 풀꽃상을 동강의 비오리가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풀꽃상을 만들고 환경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려고 노력한 사람이 바로 최성각이다.

 

그는 소설가라고 할 수 있는데, 예전에 그의 소설을 두 권 읽은 적이 있다. "엽편소설"이라는 이름을 단, 아주 짧은 소설을 보통은 '꽁트'라고 하는데, 그는 나뭇잎 같이 짧다고 엽편소설이라는 말을 썼다.

 

"택시 드라이버" 그리고 "사막의 우물을 파는 인부" 이렇게 두 권의 소설집을 읽고 환경에 대해서, 생태에 대해서 이렇게 집중해서 소설을 쓴 작가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우리나라 환경이 생태가 이런 사람들로 인해서 지켜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다 그가 시골에 들어가 살고,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의 소설집이 나왔다. 생태소설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기존에 발표한 소설들을 묶어서 방대한 한 권의 책으로 내었는데, 가히 생태 문학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형식은 참으로 다양하다. 어떤 작품은 이게 소설이야, 르포야 할 정도로 실명이 직접 나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소설의 형식이라고 하는 이유는 현실 자체가 이미 소설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집에 나온 환경, 생태에 관한 이야기들은 4대강, 밀양 송전탑, 후쿠시마 원전 폭발 이전의 일들을 다루고 있다. 그가 그토록 환경, 생태에 대해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한 발짝도 더 나아지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럼에도 이 작품들이 의미 있는 이유는 이 작품들을 통해 우리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는 단지 과거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는 우리의 현재를 결정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는 단지 역사 속의 한 사건으로만 존재하지 않게 된다. 과거는 끊임없이 현재로 불려나오게 된다. 현재로 불려나오는 과거, 이것은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알려준다.

 

최성각이 이번 작품집이 하는 역할도 그것이다. 우리가 지금 심각한 환경, 생태 위기에 처해있지만, 생태감수성이 지지부진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느끼고 있지만, 우리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환경, 생태 문제들을 작품을 통해 불러냄으로써 다시 우리의 생태 감수성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제목이 "쫓기는 새"다. 서양 환경운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레이첼 카슨의 책 제목이 "침묵의 봄"이듯이, 그가 자신의 생태 소설들을 묶은 책 제목은 "쫓기는 새"이다. 새들이 쫓기면, 과연 우리에게 봄이 있을까?

 

봄은 새들과 함께 맞이하는 것 아닐까? 그런 점에서 "쫓기는 새"라는 제목은 우리에게 많은 경각심을 준다. 거기다 제목을 새의 처지에서 썼다는 점도 좋다. 결국 새가 쫓긴다는 얘기는 우리가 새를 쫓아냈다는 얘기가 되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제목이 말하고 있다.

 

중편도 있고, 단편도 있고, 엽편도 있는데, 한 편 한 편의 소설이 다 깊은 생각을 필요로 한다. 또한 생태감수성을 일깨우고 있다. 우리가 과거 자연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작품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앞으로 자연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하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자연과 인간은 결코 떨어져 살아갈 수가 없다. 새가 없으면 봄이 없다. 봄이 없으면 인간도 없다. 결국 새가 없으면 인간도 없다. 이 말은 자연이 없으면 인간도 없다는 말이다.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앞으로 이렇게 생태소설집이라는 이름을 단 소설이 나오지 않도록, 우리의 삶을 되돌아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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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 넘도록 충격에 휩싸여 지내고 있는데... 그래서 무언가를 털어놓아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겠다 싶어 "털어놓기와 건강"이란 책을 집어들고 읽었는데...

 

얼마 전에는 국민을 미개하다고 한 사람이 나타나질 않나(국민들 힘으로 민주화를 이루어낸 우리나라인데, 그렇게 민주화를 이루어낸 국민이 미개하다면, 그 국민들로 하여금 민주화를 하게 한 정치인들은 도대체 어느 정도 수준인지... 미개보다 못한 수준은?),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나 참으로 한심하다.

 

"가난한 집 애들이 설악산이나 경주 불국사로 수학여행을 가면 될 일이지, 왜 배를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 어느 목사의 말.

 

부끄러워서 실명을 거론하기조차 싫은 그런 말이다. 이게 말이 되나? 목회자란 사람이. 도대체 이 사람이 진정 종교인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인이라면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위로해주어야 하지 않나?

 

종교인이라면 사람들의 영혼을 파 먹는 것이 아니라, 황폐화된 영혼을 사랑으로 가득차게, 기쁨으로 가득차게 해 주어야 하지 않나?

 

존 러스킨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란 책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행복한 사회를 꾸리는 모습을 상상했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가 꿈꾸던 세상이고, 모든 종교인이 꿈꾸는 세상 아니던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다니.. 그것도 종교인에게서. 이렇게 종교인이 사람들의 영혼을 파먹어도 되는 것인지... 답답하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평화와 위안과 행복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도록 사람들을 이끄는 존재가 바로 종교인 아니던가. 오강남의 역설적인 제목이 붙은 책이 생각나는 나날들이다.

 

"예수는 없다"

 

예수는 없다. 이렇게 말하는 종교인들에게는 예수는 없다. 그들은 예수가 가장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동등한 대우를 해주었다는 사실을, 예수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으로 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들에게 과연 예수가 있을까? 하여 오강남이 쓴 또 다른 책이 생각난다. "예수가 외면한 그 한 가지 질문"

 

진정한 종교인이란, 우리의 영혼을 충만하게 하는 종교란 어떤 것일지... 우리를 동등한 사람으로 대우해주는 종교 아니던가. 하느님 아래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존재. 모두가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 그것이 바로 우리 사람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는 종교인들이 많고, 종교도 많다. 이들이 굳이 언론이 드러낼 필요가 없어서 그렇지, 세상에는 훌륭한 종교인들이, 진정한 종교가 많다.

 

이제는 이들도 좀 드러났으면 좋겠다. 영혼이 맑아지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매번 이렇게 내 영혼을 갉아먹는 소리를 이제는 언론을 통해서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알고 있기로 60-70년대 그 험악했던 시절에 진정한 종교인으로 살아간 사람들이 많았으니 말이다. 강원룡 목사 같은 분도 있었고, 김재준 목사 같은 분도, 문익환 목사 같은 분도... 지학순 주교 같은 분도, 김수환 추기경 같은 분도... 함석헌, 유영모 같은 그런 종교인들... 우리의 영혼을 채워주었던 그런 종교인들이 많았으니,

 

강원룡 목사(강원용이라고 나온다. 그럼에도 나는 강원룡이라는 이름에 더 친숙하다)의 자서전인 "역사의 언덕에서1-5"를 읽고 얼마나 마음이 따뜻해졌던가. 어떻게 지내야 진정한 종교인의 자세인지를 알게 되었던가.

 

다시는 내 영혼을 파 먹는 소리를 하는 종교인, 내 귀를 씻게 만드는 종교인, 그런 사람들 소리가 안 들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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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어놓기와 건강
페니베이커 / 학지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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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말처럼 들리는 이 말이, 예전에는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입증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설마 하는 의문도 있었고, 입증되지 않은 사실은 믿을 수 없다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는 말이 인정이 되고 있고, 스트레스는 면역체계를 파괴해서 우리의 건강을 해친다는 사실이 의학적으로 증명이 되었다. 또한 스트레스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함으로써 더 심해지니, 감정을 억제하는 일은 우리의 건강에도 적신호로 작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패니베이커의 책은 이런 방면의 고전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거의 입증이 된...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유용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프로이트의 정신의학을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프로이트의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 하지 않듯이 패니베이커의 이 책도 여전히 읽어야만 하는 책이다.

 

마음을 털어놓을 때는 말로 할 때도 있고, 글로 할 때도 있는데, 이 둘은 거의 비슷한 효과를 나타내는데, 그는 이를 맹신하지는 않는다. 적당한 정도가 좋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어려운 얘기를 듣는 사람의 감정이 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감 능력, 이것이 인간이 지닌 능력인데, 계속 안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그 듣는 사람의 감정 상태 역시 깨지기 쉽다는 것이다. 그럴 때는 끊어야 한다고...

 

서로 감정이 상하지 않을 상태에서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이것이 상담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우리는 서로 듣고 말하는 관계가 얼마나 우리의 감정을 풀어주고, 더불어 우리의 건강까지 챙기게 되는지를 알게 된다.

 

말하기가 힘들다면 쓰기를 하면 된다. 조용한 공간에서 자신의 힘듦과 대면하고 이를 글로 옮긴다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되고, 성찰을 하게 된다고.. 그런 성찰을 통해서 자기치유를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다만 글쓰기를 할 때 주의할 점도 이야기해주고 있는데, 글쓰기를 현학적으로 한다든지, 분노만 표출한다든지 하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도 하고 있어서, 여러모로 참조할 사항이 많다.

 

또 큰사건을 겪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직면한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데, 어째 이것이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에 딱 맞게 나왔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큰 사건을 겪은 사람들은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는 이 사건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한다.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함으로써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데, 문제는 4주가 지난 다음부터다. 이 때부터는 너무도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기에 다른 사람들은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건 당사자들에게는 그 사건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그들은 누구에겐가 털어놓고 싶어하는데, 털어놓을 사람이 없다. 그런 상태... 마음이 억압을 받는다. 스트레스가 쌓인다. 건강이 상한다. 이게 문제라고 한다.

 

사건이 일어나고 4주 동안은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전문가들도 가서 이야기를 듣고 치유에 힘을 쏟는데, 4주가 지나면 전문가들도 사람들도 잊고 만다는 사실... 정작 그들에게는 4주 뒤에 더 필요한 일인데 하지 않아서 문제가 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 그렇구나. 지금 우리나라도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구나. 지금부터가 전문가들이, 또는 다른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많은 시기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래, 지금부터 시작이다. 그 점을 명심하자.

 

또 이런 구절이 있는데.. 정말 마음에 와 닿았다.

 

학습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라면 객관식 시험은 법으로 금지되어야 한다. 적극적으로 정보를 통합하는 것을 증진시키는 주관식 시험이 치러져야 한다. 263쪽

 

전국민의 지능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시험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이 있어야 한다는 것. 점차 쓰기 능력을 잃어가는데, 이는 자신을 성찰하는 능력을 잃어가는 것. 그래서 우리는 쓰기에 대한 생각을 다시 정립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라는 것. 명심하자.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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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품이란 무엇일까? - 공동체에 대한 고민 길담서원 청소년인문학교실 6
윤구병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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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은 공동체다. 함께 살아가는 곳. 사람이 혼자서는 살 수 없기에 품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존재다.

 

나에게 품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이고, 함께 산다는 일은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

 

이런 질문은 모든 사람들이 해야하지만, 특히 청소년들이 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갈 가능성이 많고, 또 만들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품에 대한 질문을 하는 청소년들에게 6명의 어른들이 대답을 하고 논의를 했다. 그 결과를 모아놓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질문을 하는 청소년이 있다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질문을 하지 못하는 청소년은 시키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질문을 한다는 것, 답을 찾는다는 것, 그것은 바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첫걸음이다. 이 첫걸음에 함께 하는 어른들.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자신이 겪은 품, 자신이 함께 하고 있는 품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품이란 사람 각자가 찾아가야 할 것이고, 자신만의 품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윤구병은 변산공동체를 중심으로, 이현주는 종교를 중심으로, 이남희는 가정을 중심으로, 이계삼은 교육을 중심으로, 유창복은 성미산마을을 중심으로, 그리고 박성준은 길담서원을 중심으로 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 뒤에 청소년들이 질문을 하고 답을 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런 과정이 없다면 이 책은 어른들의 일방적인 강의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는 삶에서 품을 벗어날 수 없다. 오죽했으면 품이 넉넉해야 한다는 말까지 있겠는가. 이 품은 나를 받아주기도 하지만, 나를 힘들게 하기도 하는데... 도대체 나는 어떤 품에서 살아가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해야만 한다.

 

그것이 자신의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질문이 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가정이라는 품에서, 조금 나이들어서는 학교라는 품에서, 그 다음에는 직장이라는 품에서 살아가게 되는데, 그 많은 품들 중에서 내가 살아갈 품은 도대체 무엇일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는 없다.

 

사실, 지금 우리나라는 가정이 해체되는 위기를 겪기는 가정도 많고, 학교 교육은 이미 무너져내려 더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소리가 나온 지 오래되었으며, 직장에서는 노조 조직율을 30%도 안되는 상태에서 자신의 고용보장조차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고... 기타 자연이라는 품도 우리 스스로 파괴하여 우리를 받아들이기에 버거워하고 있으니...

 

이런 우리 사회에서 품이란 무엇일까? 어떤 품을 만들어야 할까? 나름대로 품을 만들고 그 품에서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참조해볼 수 있게 해준 것이 바로 이 책인데...

 

그렇다. 우리는 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그것이 품을 더욱 넉넉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청소년... 미래를 이끌어갈 주역. 그들이 이렇게 품에 대해 고민한다면 우리 사회는 아직도 희망은 있다. 그런 희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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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궁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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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교사가 가르칠 수 있다? 참 충격이다. 그런데 이를 실천한 교사가 있다고 한다. 교사라고 하기 그렇다면 사람이라고 해도 좋다. 그는 프랑스어를 모르는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네덜란드어를 모르는 프랑스 사람이 교육을 했다. 그리고 학생들은 거의 완벽하게 프랑스어를 할 줄 알게 되었다. 이것이 무지한 스승의 첫 출발이다.

 

도대체 어떻게 모르는 사람이 알게 가르칠 수 있을까? 의문은 여기서 생긴다. 그런데 꼭 알아야 가르칠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은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 함께 성장한다는 말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 말은 어쩌면 우리가 잊고 있었던 교육 방식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세상에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없으나 모든 것을 배우지 못할 사람도 없으니... 이 말이 잘못된 말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교사가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교사가 알고 군림하기 시작하면 여기서부터 불평등이 생긴다는 말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교사와 학생의 거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학생은 점점 바보가 되고, 이 바보는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교사와 학생의 거리를 없애는 것. 여기서 교육이 출발해야 하는데, 교사는 학생의 의지를 자극하여 실천에 나서도록 해야 하며, 지능의 면에서는 교사나 학생이나 거리가 있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즉 학생은 교사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책을 통해서 배워야 하고, 책을 통해서 배울 때 교사의 설명을 통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 스스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점차 다른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암기와 반복을 이야기한다. 암기와 반복, 이는 태어나서 아이들이 처음 배울 때 자연스레 지니는 태도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쓰라고 이해하라고 하지 않는다. 오직 반복을 통해서 자연스레 외워지게 한다. 그것이 바로 부모가 아이를 교육하는 방법이다.

 

그러니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깨우쳐갈 수 있는 의지를 자극해주기만 하면 교사의 역할은 끝이다. 교사의 설명은 필요없는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 예전 교육에서 말하는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읽고 읽고 또 읽어라. 이 때 교사는 학생이 제대로 읽었는지만 확인해주면 된다. 학생은 스스로 깨닫는다. 어떤가? 이것이 바로 요즘 말하는 배움의 공동체 아니던가.

 

여기에 어떤 교수법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최고의 교사라고 하여 엄청난 기술을 자랑하는 교수법이 이런 데서 어떤 소용이 있단 말인가?

 

교수법을 자랑하는 교사들은 무지한 스승이 아니라, 유식한 스승이다. 그들은 그들의 유식함으로 학생들을 점점 더 무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적어도 이 책의 논리를 따라가면 그렇다. 이 책의 논리가 아니더라도 곰곰 생각해보면 스승이 유식할수록 제자들은 더욱 무식해진다. 스승과 제자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불교에서 참선 중에 화두 하나만 주는 방법이 있다. 그 화두를 잡고 제자가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 깨우친 다음에는 스승과 제자의 거리는 없다. 함께 온전한 인간이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모든 사람은 평등한 지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단지 의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못 배울 사람, 덜 배울 사람은 없다. 누구나 배울 수 있다. 이 배울 수 있음을 깨닫게 하고, 배울 의지를 실현시키는 존재가 바로 교사이어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런 교육에서 지금의 공교육은 바보 만들기 교육이다. 바보 만들기... 지금 우리나라 공교육을 보면 정확한 지적이기도 하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학력 수준은 높다고 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삶에 필요한 지식은 지니고 있지 않은... 자기 스스로 깨우친 지식이 아니라 주어진 지식을 받아먹게만 이루어진 그런 교육.

 

공교육에 대한 비판은 통렬하다. 보자. 

 

  식자들이 무지한 자들을 지도하고, 헌신하는 인간들이 이기주의적인 물질적 고민에 처박힌 인간들을 지도하고, 공적인 이성과 역량을 갖춘 보편자가 특수주의에 갇힌 개인들을 지도할 것, 이것이 공교육이라고 부르는 것, 다시 말해 인민 주권 개념을 대표하는 자들이 계획한 경험적 인민에 대한 지도이다.

  공교육은 이렇게 진보의 세속적 권력이자, 불평등을 차츰차츰 평등하게 만드는 수단, 다시 말해 평등을 무한정 불평등하게 만드는 수단이다. 모든 것은 늘 하나의 유일한 원리인 지능의 불평등 위에서 작동한다. 이 원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아무리 좋은 논리에서라 하더라도 그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단 한가지밖에 없다. 똑똑한 카스트가 어리석은 다중을 지도해야 한다는 것. (247쪽-248족)

 

정말... 인정하지 않고 싶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무시무시한 지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공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회의 변화라고 하기보다는 이미 바보 만들기 교육이 고착되었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모두가 바보인 세상에서 바보가 아닌 사람은 그가 바보 취급을 받는다. 지금이 그렇지 않은가. 여기서 조금이라고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대안교육이었고, 탈학교 운동이었는데... 여전히 공교육은 강대하다. 아니 이미 무너져버렸어야 하는데, 간신히 외양을 지탱하고 있다.

 

무지한 스승... 이 책을 읽으면 우리나라 공교육 뿐만이 아니라 교육 전반에 대한 회의가 인다. 그렇다고 회의에만 빠져있어서는 안된다. 이 책의 내용을 우리 상황에 맞게 적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교육도 변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으니... 이제 공교육에서도 배움의 공동체다 자기주도학습이다하여 교육의 주체가 교사에서 학생으로 많이 변하고 있다.

 

또한 주어진 정답을 찾는 교육에서 자신이 정답을 만들어가는 교육으로 바뀌려고도 하고 있다. 정답 찾기는 지식의 위계를 전제한다. 그러나 정답 만들기는 지식의 평등을 전제하고 있다. 이런 지식, 아니 지능의 평등에서 우리는 배우려는 의지를 작동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의지를 자극하는 교사, 그런 교사들이 공교육에서도 많이 나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 책 "무지한 스승"을 제대로 계승한 것이리라. '조제프 자코토'라는 사람 이야기로, 그가 한 교육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그를 중심으로 저자가 교육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을 했다고 본다. 그가 한 말도 자코토의 교육을 번역한 것이라면, 이 책을 읽은 우리는 다시 이 책을 우리 나름대로 번역을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맞게 적용을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자유고,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의지를 작동시켜야 해방이 된 인간이 된다는 생각을 한다. 여러가지로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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