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맞선 상상력, 문화운동 연대기 - 차이를 넘어 금지를 깨트린 감각의 목소리와 문화다원주의
양효실 지음 / 시대의창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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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모든 권력은 단일성을 추구한다.

 

통일, 질서, 안정, 단순함, 명료함... 이런 것들은 권력이 자신의 권력을 시행하는데 필요로 하는 요소들이다.

 

이들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려는 것들에 대해서 권력은 가차없이 응징을 한다. 그것이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권력은 자신에 반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용서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권력이 작용하더라도 어디선가 균열이 생기고, 그 틈으로 다른 물결이 몰아쳐 오게 된다. 그런 균열을 내는데 문화만큼 좋은 것은 없다.

 

문화의 기본이 바로 다양성이고, 변화이고, 단순함을 넘어서는 복잡함이며, 해석불가능성, 해석다양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를 어느 하나로 귀착되게 하지 않는다. 하여 문화가 융성한 민족은 다양성을 바탕으로, 서로를 용인하는 모습을 지니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 단일 권력이 횡행할 수는 없게 된다.

 

이 책은 닫힌 사회에 구멍을 내고, 다양성을 추구하는 문화운동에 대해 다루고 있다. 앞으로의 문화운동이 아니라, 예전에 일어났던 문화운동을 찾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다.

 

그런 문화운동에 대해 알면, 닫힌 사회에서 그냥 눈 감고 사는 것이 아니라, 분명이 할 일이 있음을 알게 된다. 굳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지 않아도, 자신을 지키면서도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68혁명부터 시작한다. 서양의 문화운동이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문화운동으로는 홍대 근처 '두리반'에서 있었던 문화운동만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문화운동에 굳이 동서양을 나눌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문화는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 그 상황에 맞는 문화운동을 해야만 하고, 지금까지는 서양에서 더 많은 문화운동이 일어났을 뿐이다.

 

이제 우리도 다양한 문화운동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고, 점점 꽉 막힌 사회로 가고 있다는 인식을 하면 할수록 그 막힘을 뚫을 수 있는 문화운동이 생길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68혁명에서부터, 힙합, 히피, 흑인차별철폐, 멕시코인들의 정체성 찾기, 에이즈에 대한 운동들, 그리고 여성미술가들에 대한 운동인 게릴라 걸스에 대한 이야기를 거쳐 우리나라 두리반 문화연대까지 나아가고 있는데...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변화가 필요한 지점에서 문화운동은 일어났다. 변화가 필요하기에 문화운동이 일어났는지, 문화운동으로 인해 변화가 일어났는지 그 순서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겠지만, 문화운동으로 인해 더 많은 변화가 일어났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날로 막혀가고 있는 사회에서는, 틈을 낼 수 있는 문화운동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어떻게? 그 어떻게에 대한 답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사회의 문화적 역량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 역시 다양한 문화운동을 통해 우리 사회를 좀더 열린 사회,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로 만들어갈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어떤 문화운동이 사회를 변화시켜 왔는지 잘 보여주고 있어서 지금 우리 사회에 어떤 문화운동이 필요할까에 대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덧글

 

소소한 오타. 그러나 정확해야 하는 오타.

49쪽.  1971년 노동자 전태일이 부당한 노동조건에 맞서 분신한 사건은...

전태일의 분신은 197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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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편안해 지는 시들이다.

 

  짧은 시행들에도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무엇보다도 정신없이 살아온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세상이 각박하다고, 세상은 본래 그러하다고 막 지내면서, 자신의 감정을 억지로 억지로 억누르며 지내온 세월이, 이 한 편의 시로 눈 녹듯이 녹아버리고 말았다.

 

 그래 눈물이 날 때는 울을 수도 있어야 해. 무언가 자신의 마음 속에 꽉 차 있던 덩어리들을 한꺼번에 쏟아낼 수도 있어야 해.

 

  선암사, 해우소... 이름을 뒷간이라고 하는... 근심을 덜어내는 장소로써의 해우소.

  그 곳에 가서 자신의 근심, 걱정, 눈물들을 모두 쏟아내고 홀가분하게 돌아올 수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눈물이 많은 이 시대에, 이 눈물을 어루만져줄 대상이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눈물이 날 때 그 눈물 속에 걷히지 말고, 눈물 속에서 허우적 거리지 말고, 눈물이 밑으로 쏙 빠지게 하는 어떤 곳... 그런 곳에 가서 눈물을 흘리고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충만으로 가득한 가을이지만, 한 편으로는 스산한 가을이기도 하다. 이 때, 정호승의 시 한 편 읽자. 그리고 마음 속에 쌓아두지 말자.

 

       선암사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창작과비평사, 1999년 초판. 47쪽.

 

이런 선암사는 도처에 있다.

 

가을, 눈물이 나면 어디론가 가자. 가서 나를 내려놓고 오자. 새로운 나로 출발하기 위해서. 나를 받아줄 대상은 어디에나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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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삼촌 브루스 리 2
천명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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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삼촌 브루스 리"의 2권이다. 1권에서 시작된 갈등이 2권에서는 더욱 증폭되고 해결이 된다.

 

이리저리 얽혀있던 인물들의 관계가 하나 둘 풀리면서 결말을 향해 빠르게 전개된다.

 

결말이야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이 소설은 제목에서부터 영화와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다.

 

'브루스 리'가 바로 이소룡 아닌가. 그리고 소설의 각 장들은 이소룡이 출연했던 영화제목에서 따왔다. 정무문, 맹룡과강, 당산대형, 사망유희, 용쟁호투... 이소룡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영화들이다.

 

작가도 후기에서 자신의 소설이 영화와 관련이 있음을 말하고 있고, 이 소설을 끝으로 영화를 소설에 끌어오는 일은 접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내가 읽은 소설은 작가가 밝히고 있는 것과 같이 영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고래"에는 극장이 나오고, "고령화 가족"에는 영화감독이 나오고, 이 소설에는 영화배우들이 나온다. 여기에 더해서 영화주인공을 연출한 이소룡을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을 등장시키고 있다.

 

영화와 현실, 소설과 현실, 소설과 영화.

 

전혀 다를 것 같지만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화나 소설이나 현실에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에서도 소설에서도 인물이 등장하고, 배경이 있고, 인물들간의 갈등이 있다.

 

바로 영화속 현실이나 소설속 현실이나 실제 현실이나 잘 구분이 안될 때도 많다. 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세 가지를 동시에 섞었는데...

 

읽어가면서 영화적 요소가 많음을 알게 된다. 우리들이 보는 영화는 통상 행복한 결말이다. 요즘은 좀 달라졌겠지만, 한없이 비극으로만 치닫는 영화를 구태여 돈 주고 보려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온갖 시련을 겪었지만 인간성을 지닌 주인공이 큰 성공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삶에서 실패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 결말을 택하고 있다. 그래야 관객들을 영화관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또한 액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소설 속에서 싸움 장면을 긴박하게 전개하고 있다. 꼭 위기 해결 상황에 다른 위기를 불러 오고, 장면 전환이 빠르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소설 역시 장면을 이리 저리 바꾸고 있다.

 

그래서 한참 읽어가다가 결말이 왠지 뻔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소설을 읽으면서 그 느낌을 확인하기 위해서 계속 읽어가게 된다.

 

그래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서자로, 무엇 하나 잘 하는 것 없는 사람으로 변변치 않게 살아온 주인공이 결말에서도 비극의 나락으로 떨어지면 도대체 이게 뭔가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영화 속 주인공에게 몰입하게 되듯 소설 속 주인공의 삶에, 그 비루함에, 그러나 인간성을 잃지 않음에 주인공을 응원하게 된다.

 

그가 잘 되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작가는 교묘하게 절충을 한다.

 

그는 재산도 한 푼 없다. 더 잘 가능성도 별로 없다. 그러나 그의 순정은 살린다. 그렇게 결말이 난다.

 

이후는 읽는 사람이 상상하면 된다.

 

아니, 현실을 돌아보면 된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나? 소설 속 삼촌보다도 더 못하게 살고 있지는 않은가. 비록 그보다 경제적으로, 지적으로 낫다고 하더라도, 실제 삶은 그가 더 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나.

 

적어도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했고, 자기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지 않은가. 그에 대한 보상을 받지 않았던가. 그것이 남들이 보기에는 소소한 것들일지라도, 그에게는 행복 그 자체였을 것이다.

 

재미있게, 때론 웃으면서, 때론 주먹을 쥐면서 읽은 소설이지만... 현실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의 현실에도 이 소설 속 '삼촌' 같은 인물이 많이 있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해지고, 그런 '삼촌'과 더불어 '유사장'과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음을 생각하면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소설 속 '삼촌'은 계산하기보다는 자기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그는 적어도 자기의 마음을 배반하지는 않았다. 그 점을 생각하면, 내 삶을 생각하고 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 이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읽어보라. 아무 생각없이 읽어도 재미있다. 그래, 재미는 소설의 제1의 요소다. 그것을 이 소설은 충분히 만족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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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삼촌 브루스 리 1
천명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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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중국영화 하면 이소룡이었다. 몇몇 개그맨들이 개그의 소재로 그의 동작과 말을 흉내내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의 무술로 영화계에 우뚝 선 인물이었다.

 

그를 따라하고자 쌍절곤을 휘두르다 제 머리통을 친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 소설은 이런 이소룡을 추종한 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보면 된다.

 

내용은 상구라는 이름을 지닌 '나'에 의해서 전개된다. 내가 삼촌의 이야기를 하는 종종 나의 이야기도 끼어넣고 있다.

 

그런데 나의 이야기는 독자적으로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삼촌의 이야기와 맞물리게 된다.

 

나중에 이런 관계들이 얽히고 설키게 되고, 이것들이 사건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집성촌인 우리 동네에 서자라고 들어온 삼촌. 그에게 특출난 것은 머리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

 

그래서 삼촌은 이소룡의 영화를 보고 난 뒤 이소룡을 자신의 우상으로 삼고, 이소룡처럼 살기를 원한다.

 

아소룡처럼 살기를 원하지만 거기에 대한 계획은 없는 사람, 바로 그가 삼촌이다. 그렇기에 그는 먼 뒷날을 생각할 수 없다. 자신 앞에 주어진 일을 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다시 다른 사건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중간중간에 신군부의 집권으로 일어난 삼청교육대가 끼어들게 되고, 우리는 엄한 사람들이 순화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가혹한 대접을 받았는지 이 소설을 통해서도 느낄 수가 있다.

 

그런데 삼촌은 그런 사회를 그저 겪어낼 뿐이다. 그에게는 사회를 바꾸겠다는 생각조차 없다. 그냥 그 사회를 견뎌내는데......

 

이 소설에서 이런 삼촌과 비슷한 인물은 나의 친구인 '종태'가 있고.

 

이 종태는 삼촌을 사부로 모시며 이소룡의 무술을 삼촌에게 배운다. 이것이 나중에 삼촌과의 대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 역시 사회의 모순이라든지, 자신이 어떻게 해서 그런 처지에 빠지게 되었는지, 그것을 극복할 방법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냥 살아내는 사람들, 자기가 있는 위치에서 자기는 그렇게밖에 살 수밖에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모습이 삼촌과 종태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삼촌은 좀 낫다. 그에게는 이소룡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소룡을 삼촌이 직접 만날 수도 없고, 그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도 없지만, 적어도 영화 속의 이소룡에 대해서, 그의 모습에 대해서 그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 새겨두었기 때문이다.

 

1권은 종태가 삼촌과의 싸움에서 이긴 뒤, 자기 조직의 우두머리를 칼로 찌른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나의 삼촌 브루스 리"는 2권에서 더 긴박하게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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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있는 교실 : 중등 편 - 미국 명문대 재학생의 30%를 차지한 유대인 공부법 하브루타 질문이 있는 교실
전성수.고현승 지음 / 경향BP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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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는 본래 말이 많다. 이론도 많다. 그리고 결과도 다 다르다. 그럼에도 계속 무언가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당연한 일이다. 교육은 정체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이론이 성공했다고 해서, 그 이론이 모든 교육활동에 적용되어서는 안된다.

 

그 이론으로 모든 교육활동을 하려고 해서도 안된다. 상황에 맞게 교육에 관한 이론은 계속 나와야 한다.

 

그럼에도 교육에는 이론보다는 늘 실천이 앞선다. 그런 실천을 보편화하는 작업이 바로 교육이론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전부터 이루어져왔던 여러 교육이론을 들어보면, 실용주의, 구성주의, 열린교육, 몬테소리 교육, 발도르프 교육, 프레네 교육, 섬머힐과 같은 대안교육, 일본에서 일어났던 배움의 공동체, 요즈음은 거꾸로 교실이라고 하는 운동 등등 참으로 다양하다.

 

이런 다양한 이론들이 있음에도 공통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어떤 교육이론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교육을 학교와 동일시 하지 말고 또 교육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배움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르침보다는 배움을, 이는 교사 중심이 아닌 학생 중심의 교육이(이것을 우리는 배움이라고 한다)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생 중심의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학생 중심이라는 것은 배움을 중심에 놓는다는 말인데, 배움을 중심에 놓으면 당연히 질문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

 

질문이란 알고자 하는데 아직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알려고 하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즉,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는 이미 배움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다.

 

이를 이 책에서처럼 유대인 교육법, 또는 '하브루타 교육법'이라고 굳이 명명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중심에 두는 생활은 유대인들이 해왔고, 그들의 그런 교육방식을 '하브루타 교육법'이라고 했으니, 그 말을 써도 별 문제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 나온 '하브루타 교육법'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학생들이 질문과 대답, 그리고 또다른 질문을 통하여 배움을 이루어나가는 교육법이라고 할 수 있다.

 

거창하게 유대인 교육법을 따르지 않더라도 질문이 없는 교실은 죽은 교실이고, 질문이 없는 배움은 배움이 일어나지 않은 배움이라고 할 수 있으니, 어떻게 하면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는 수업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그 고민의 결과를 정리해 놓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론이 앞부분에 있다면 뒷부분에는 실제로 학교 수업에서 적용한 '하브루타 교육법'의 실제가 실려 있다.

 

아이들이 수업에서뿐만이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이러한 질문법을 생활화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도 빼먹지 않고 있는 이 책은, 질문이 사라진 교실은 배움이 없는 교실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고 있다.

 

둘이 또 모둠이, 반 전체가 서로 질문하고 대답하고 또 질문하고 대답하고 또 질문하는 과정을 통해서 배움을 이끌어가는 수업... 그런 수업에는 진도는 중요하지 않다.

 

배움에는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깊게, 자세하게, 정확하게 알았느냐하는 질적 관점이 중요하기 때문에, 또 사람의 기억은 혼자서 읽고 쓰고, 듣는 활동의 기억보다는, 서로 이야기하고, 자신의 말로 바꿔서 설명하는 동안 더 오래동안 우리의 뇌 속에 남아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학습효과면에서도 이런 질문 교육법이 더 유용하다는 것을 이 책에서 거듭 강조하고 있다.

 

또한 창의적이고 융합적인 사람을 필요로 하는 시대 변화에도 질문교육법은 유용하다. 질문은 내 말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질문하기 위해서는 내용을 알아야 함은 기본이고, 상대방의 말, 상대방의 태도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 상대의 의견과 자신의 의견을 조율할 수도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질문교육법은 창의적인 인재, 융합하는 인재를 기르는데도 도움이 됨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 창의성이든, 융합이든 이런 말을 떠나서 질문을 하면서 수업에 참여한다는 것은 수업에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재이닜게 참여한다는 얘기가 된다. 그것만으로도 됐다.

 

수업에 재미를 느낀다면 그 다음은 저절로 이루어질테니 말이다.

 

질문이 있는 교실... 이건 꿈의 교실이 아니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이 시기에 우리가 이뤄야할 교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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