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완성하는 미술관 - 10대의 정체성, 소통법, 진로, 가치관을 찾아가는 미술 에세이 사고뭉치 6
공주형 지음 / 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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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완성하는 미술관'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왜 사는지, 도대체 이 세상에 내가 왜 왔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는데, 이런 고민들의 결과들이 모여 자신을 만들어가게 된다.

 

즉, 우리는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학교에 다니는 일도 마찬가지고. 직장을 가지는 일도, 취미생활을 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거창하게 자아실현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서 모든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나를 완성해 가는데 예술만큼 좋은 경험은 없다는 생각을 한다. 예술은 그냥 취미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내 안에 숨겨져 있는 나를 찾는 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또다른 나, 아직 발현되지 않은 나를 예술을 통해서 만나게 되고, 그런 만남을 통해서 나를 조금씩 완성시켜 나갈 수 있게 된다.

 

음악을 통해서, 소설을 통해서, 시를 통해서, 영화, 연극을 통해서 기타 다른 활동을 통해서도 나를 완성해나가는데, 이 책은 미술을 통해서 나를 완성해 가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총 4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는 자아 정체성 찾기:나를 사랑하다이고, 2부는 소통법 발견하기:너를 만나다, 3부는 함께 성장하기:우리는 어떤 사람이 될까?, 4부는 가치관 완성하기:우리는 어떤 세상을 꿈꾸어야 할까?이다.

 

최근에 자주 말하게 되는 진로와 인성이 함께 들어있는 책이라고 보면 되는데... 제목과 달리 미술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미술에 대한 이야기다.

 

화가나 그림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니, 어떤 미술관을 소개하는 책이라고 생각하고 펼쳤다가는 방향을 잘못 잡았음을 책장을 넘기자마자 알게 된다.

 

그럼에도 제목이 '나를 완성하는 미술관'인 이유는 이 책이 미술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4부로 나누어 화가와 작품을 실은 이런 편집을 미술관에서 작품을 전시하는 큐레이터 역할을 했다고 보면 된다.

 

즉, 우리는 이 책 '나를 완성하는 미술관'이라는 제목을 지닌 책 미술관에 들렀다고 할 수 있다. 천천히 둘러보면서 또다른 나를 만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친절하게 미술에 대해서 설명까지 해놓았으니, 해설자를 동반한 미술관 여행인 셈이다. 간혹 해설이 필요없다고 느낄 때는 책에 나와 있는 그림만 보아도 좋다. 또 작가가 해설한 내용과 다르게 이해해도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나와 너, 그리고 사회에 대해서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될테니 말이다. 또한 그런 생각들을 통해서 진정한 나를 만들어갈 수 있을테니...

 

이 책은 '나를 완성하는 미술관'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작품들은 다른 미술관련 책에서 보았는데... 이 책에서만 보게 된 작품도 몇몇이 있다. 그런 작품을 보게 되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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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표의 사슬
고시홍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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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현실을 반영한다. 아무리 소설이 허구라고 해도 현실을 벗어날 수는 없다. 가장 극단적으로 환타지에 속하는 소설 속 내용들도 어느 순간 현실이 되기도 한다.

 

우주 전쟁을 다룬 웰즈나 해양 탐험을 다룬 베른의 소설들이 지금은 현실에 가까운 일이 되고 있기도 하니 말이다.

 

그래서 소설을 읽으면 현실을 생각하게 된다. 아니 읽으면서 소설 속에 자신이 들어가 함께 생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어느새 등장인물들과 그 장소, 그 시간을 함께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데... 여기서 나와야만 한다. 그래야 소설을 소설로 읽게 된다. 나오지 못하면 소설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돈키호테가 되고 만다. 때론 돈키호테가 될 필요도 있지만.

 

이 소설집은 주로 4.3을 다루고 있다. 4.3을 무어라 부르는지에 따라서 이념의 좌표가 달라지기도 하는데, 그래서 그냥 4.3이라고 하자.

 

9편의 단편과 1편의 중편 소설이 실려 있는데, 단편 중에 두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4.3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4.3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주고 있는데...

 

우리에게는 숫자로 다가오는 역사적 사건들이 많은데, 앞에서부터 나열하면 3.1, 4.3. 4.19, 5.18. 6.10. 6.25, 8.15, 10.26, 12.12 등이 먼저 떠오른다. 이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양한데...

 

이 소설집에서는 제주도 사람으로 4.3에 대한 신원을 시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등장인물들이 4.3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 자신의 운명이 달라진 사람들이니 말이다.

 

아직도 4.3에 대해서는 제대로 규명이 되었다고 볼 수 없는데... 이런 4.3을 다룬 소설 중에 많이 읽혔던 현기영의 "지상의 숟가락 하나"가 있다. 이 소설은 어린아이의 눈으로 본 4.3이라고 한다면, 고시홍의 소설집에 실린 4.3들은 어른의 눈으로 본 4.3이다.

 

물론 소설 속에서는 4.3 당시에는 어린이나 또는 젊은이였겠지만, 한참이 지난 다음에 4.3을 평가, 정리하는 입장에서 소설이 전개되기에 어른의 눈이라고 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제는 갈등이 아닌, 화해로 가야 한다는, 4.3을 품어안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소설집에 실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4.3이 끝났을까?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 '물음표이 사슬'을 보면 4.3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때는 이념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면(과연 이념 대립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이미 좌익이 사라진 이 나라에서 제주도는 또다른 갈등에 휩싸여 있다.

 

바로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다른 말로 하면 아름다운 구럼비 바위를 파괴하는 행위를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갈려 일어나는 갈등.

 

어떻게 이렇게 또다시 갈등이 반복되는지, 그런 갈등은 힘있는 자들이 아니라, 힘없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지,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강정에서도 한 가족처럼 지내던 사람들이 찬성파와 반대파로 갈려 서로 얼굴도 보지 않고 지내는 장면이 이 책 제목이 된 단편소설 '물음표의 사슬'에 나오는데... 이 소설에서는 더 극단으로 장모가 사위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까지 한다.

 

이렇게 가족파괴, 공동체 파괴의 현장이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나는 장면인데... 그렇게 보면 4.3은 우리나라 곳곳에서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주도 강정뿐만이 아니라, 핵발전소 건설을 두고 삼척에서도, 송전탑 때문에 밀양에서도 일어났었고, 이제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전국에서 다시 사람들이 갈라져 싸우고 있지 않은가.

 

작가는 소설을 통해 4.3을 신원하려고 했는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이 갈등들은 무엇으로 풀어야 하는가?

 

결자해지(結者解之)라고 문제를 일으킨 자들이 해결했으면 좋겠지만, 그들이 해결하는 경우는 못 봤다. 4.3의 경우만 봐도 그러니...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민중, 시민의 몫이 된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들도 바로 우리 몫이다. 문제를 일으킨 자들의 몫이 아니라. 그렇다면 우리는 이 소설집에서 4.3을 어떻게 풀어내고 있는지,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지를 생각하면서 읽어야 한다.

 

그래야 소설을 소설로서만 읽지 않고, 현실에서 제대로 살 수 있게 소설을 다시 현실에 가져올 수 있다. 그게 지금 우리가 할 일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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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금니 


내 몸 깊숙이

나와 하나 되어 있다

잠시 흔들리기도 하지만

곧 다시 하나 된 깊은 뿌리

영원히 갈 줄 알았던

내 몸 한 쪽에

균열이 생기고

툭.

어느 순간

끊긴,

잠시 흔들림이 아니라

영원한 흔들림.

이제 헤어져야 해

내 곁에서 떨어져 나가

넌 너대로,

난 나대로,

고통 따른 이별을 한다.

40년!

긴 세월 함께 했던

친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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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 특집은 "부채와 인권"이다. 제목만 보고 영화 두 편이 떠올랐다.

 

"똥파리"와 "피에타"

 

주인공이 부채를 받아내는 청부업자인 영화. 이들에게 채무자란 인권이 없는, 단지 남의 돈을 갚지 않는 존재일 뿐.

 

그들의 개인사정이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안중에도 없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 어느 순간 사람이 들어온다. 사람이 들어온다는 것은 인권의 개념이 알게 모르게 생긴다는 것이다.

 

그냥 빚쟁이일 뿐이었는데... 자기랑 같은 사람이 된다. 동등하다. 이게 인권이다. 이런 인권이 청부업자의 마음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는 더이상 청부업자가 될 수 없다.

 

청부업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을 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그들은 더이상 암흑의 세계에서, 반인권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두 영화가 주인공들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이유다.

 

녹색평론에서 "부채와 인권"이라는 제목을 선택한 것은 지금 우리 시대를 너무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정부는 "노동개혁"이라고 나이 든 사람의 임금을 깎아서 젊은이들의 임금을 보전해 준다고 하는데.. 젊은이들은 정규직에 취업하지 못하고 비정규직으로 취업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이 말은 나이든 사람이든 젊은이든 모두 임금을 깎겠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고.

 

이 상태에서 취업하기까지 빌렸던 빚들은 생활을 어렵게 하는 장애로 작동하게 되고, 그 부채가 자신의 인권마저 짓밟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생태든 환경이든 우선 사람이 살고 봐야 하지 않나?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서 생태, 환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녹색평론에서 다뤄줘서 잘 읽었다.

 

지금 우리나라 부채가 얼마인지를 강수돌 교수의 '빚은 어떻게 우리 삶을 짓누르는가'에 잘 나와 있고, 그런 그들을 위해서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하게 하는 주빌리 은행을 세운 이야기(사실 주빌리 은행이 뭔지 전혀 몰랐다. 낯선 용어이기 때문에... 그런데, 뒤에 나오는 글에 구약의 '희년' 이야기 중에 요벨(영어 'jubilee'는 히브리어의 음역 - 124쪽)이라는 말에서 주빌리가 구약성경의 '희년'에 해당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를 제윤경의 글 '왜 '주빌리은행'이 태어났는가'를 읽고 두 영화를 떠올렸다.

 

이들에게도 이런 은행이 먼저 생겼다면 영화 속 채무자들이 그렇게 인격을 잃고, 인권을 잃고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마저 잃는 일이 없었을텐데 하는 생각.

 

여기에 벌금을 낼 돈이 없어 억울하게 징역 생활을 하는 사람을 막기 위해 생긴 '장발장 은행' 에 대한 이야기를 오창익의 '새로운 상상,'장발장은행''을 통해서 우리나라 법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있지 않고, 오히려 이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고.

 

그렇게 국회에 법개정 청원을 했음에도 역시 법률가 출신인 국회의원들이 들은체도 안했던 과정이 이 글 속에 나오는데... 국회의원들이 낮은 곳에 있지 않고 너무도 높은 곳에 있어, 그들에게 추상적인 문구는 존재해도 구체적인 서민들의 삶은 함께 있지 않다는 사실에 환멸감이 들었고.

 

이런 일들이 종교에서도 다루고 있음을, 김회권의 '희년과 민주주의의 회복'이라는 글에서 찾게 되었다. 함께 살아감이 중요함을, 이미 서양의 기독교에서도 갈파하고 있음을, 그것을 실천하는 일을 우리가 미루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이 모든 일들을 종합할 수 있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기본소득'을 우리에게 가져오는 일.

 

성남과 서울에서 배당이라는 이름으로 실시하려고 하고 있는데, 이를 '포퓰리즘'이라는 말로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포퓰리즘'이 아니라, 이 땅에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이 누려야 할 기본 권리임을 하승수의 '기본소득이 빈곤문제 해법이다'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그렇다. 지금 우리에게는 말로만 존재하는 존재하는 '노동개혁'이 아니라, 우리 삶에 현실적으로 도움을 주는 '기본소득'이어야 한다. 이런 기본소득을 통해서 '주빌리은행'이든 '장발장은행'이 우리 사회에서 존재하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개인에게 책임을 지우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책임져야 할 일을 사회에 되돌려주는 일, 그것이 바로 기본소득일테고, 주빌리, 장발장 은행은 이런 기본소득과 더불어 논의되어야 함을 이번 녹색평론 145호를 통해서 생각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생각할 것이 많은 이번 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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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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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트" 2권에 실린 박민규와의 대담에 배수아인가 대담자가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고 해서 어차피 박민규의 소설을 읽을테니, 하고 구해서 읽은 소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라는 그림을 보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음악을 만든 음악가가 있다고 하는데, 박민규는 그림과 음악을 보고 소설을 창작했다고 하면 되나?

 

꼭 그렇지는 않다. 작가의 말을 보면, 박민규는 어느 날 아내가 내가 못생긴 여자였어도 사랑했을 거나는 질문에 대한 오래 된 답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하니 말이다.

 

못생긴 여자, 그것도 한 번 보면 잊을 수가 없는 여자도 사랑받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성립된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데...

 

세상 남자들은 여자를 단 두 부류로 분류를 한다고 하는데, 하나는 예쁜 여자, 또 하나는 못생긴 여자. 그리고 연령에 상관없이 남자들은 모두 예쁜 여자들을 원한다고 하는데... 오죽하면 서양말에(우리말에도 있을 법한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영어시간에 배운 구절만 머리에 떠오르니, 무의식적으로 내 머리에서 우리말의 편견을 씻어내려 하나 보다) '용감한 자가 미인을 얻는다'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이 소설은 정말로 못생긴, 너무도 못생겨서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여자는 못생겼고, 남자는 잘생겼고, 그러나 남자가 먼저 사랑에 빠지고, 둘은 서로 만나기는 하지만 곧 헤어지고, 영원한 이별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만나고...

 

이렇게 행복한 결말일 줄 알았는데... 나중에 다시 뭐야 하게 하는 결말이 나타나고, 작가의 말에서는 어떤 결론도 나올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하고.

 

20대 청춘을 이렇게 사랑으로 시작한 사람, 자신의 마음에 빛을 간직한 사람, 그 빛은 꺼지지 않는 영원한 빛이 되어 살아가는 내내 자신을 지탱시켜줄 등불이 된다고...

 

그것에는 외모고 뭐고 필요없다고, 그런 나이 때, 한창 싱그러울 나이 때 지지리도 많은 고민을 하고, 고생을 하는 청춘들이 등장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존재한다는 사실, 그 사랑으로 삶을 유지해 간다는 사실을 소설로 보여주고 있다.

 

박민규 특유의 문체, 툭 툭 끊어지는 그런 문체와 독백하듯이 서술해나가는 1인칭 화자의 등장으로 남의 속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을 받는데, 그런 점에서 읽는 사람이 소설 속의 주인공과 자신을 일치시킬 수 있긴 하지만...

 

이상하게도 갓 20세가 된 사람에게서 느낄 수 없는 성숙함 같은 것이 소설 곳곳에서 나온다. 지나치게 일찍 성숙해버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이 소설 속에서 만날 수 있는데...

 

다른 무엇보다 사랑이 사람의 삶에서 중심임을, 사랑이 없는 삶은 그냥 살아지는 것에 불과함을, 한 때 진정한 사랑을 한다면 그 사람은 평생 그 사랑으로 인해 살아갈 수 있음을, 이 소설을 통해 알 수 있느니...

 

인스턴트 사랑이 아닌, 물질이나 조건, 외모를 보고 하는 사랑이 아닌,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마음 떨리는 사랑을 해본 사람... 그런 청춘을 이 소설을 통해서 만나보는 경험을 하는 것도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사랑의 빛을 다시금 불러내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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