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금니 


내 몸 깊숙이

나와 하나 되어 있다

잠시 흔들리기도 하지만

곧 다시 하나 된 깊은 뿌리

영원히 갈 줄 알았던

내 몸 한 쪽에

균열이 생기고

툭.

어느 순간

끊긴,

잠시 흔들림이 아니라

영원한 흔들림.

이제 헤어져야 해

내 곁에서 떨어져 나가

넌 너대로,

난 나대로,

고통 따른 이별을 한다.

40년!

긴 세월 함께 했던

친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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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 특집은 "부채와 인권"이다. 제목만 보고 영화 두 편이 떠올랐다.

 

"똥파리"와 "피에타"

 

주인공이 부채를 받아내는 청부업자인 영화. 이들에게 채무자란 인권이 없는, 단지 남의 돈을 갚지 않는 존재일 뿐.

 

그들의 개인사정이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안중에도 없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 어느 순간 사람이 들어온다. 사람이 들어온다는 것은 인권의 개념이 알게 모르게 생긴다는 것이다.

 

그냥 빚쟁이일 뿐이었는데... 자기랑 같은 사람이 된다. 동등하다. 이게 인권이다. 이런 인권이 청부업자의 마음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는 더이상 청부업자가 될 수 없다.

 

청부업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을 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그들은 더이상 암흑의 세계에서, 반인권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두 영화가 주인공들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이유다.

 

녹색평론에서 "부채와 인권"이라는 제목을 선택한 것은 지금 우리 시대를 너무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정부는 "노동개혁"이라고 나이 든 사람의 임금을 깎아서 젊은이들의 임금을 보전해 준다고 하는데.. 젊은이들은 정규직에 취업하지 못하고 비정규직으로 취업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이 말은 나이든 사람이든 젊은이든 모두 임금을 깎겠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고.

 

이 상태에서 취업하기까지 빌렸던 빚들은 생활을 어렵게 하는 장애로 작동하게 되고, 그 부채가 자신의 인권마저 짓밟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생태든 환경이든 우선 사람이 살고 봐야 하지 않나?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서 생태, 환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녹색평론에서 다뤄줘서 잘 읽었다.

 

지금 우리나라 부채가 얼마인지를 강수돌 교수의 '빚은 어떻게 우리 삶을 짓누르는가'에 잘 나와 있고, 그런 그들을 위해서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하게 하는 주빌리 은행을 세운 이야기(사실 주빌리 은행이 뭔지 전혀 몰랐다. 낯선 용어이기 때문에... 그런데, 뒤에 나오는 글에 구약의 '희년' 이야기 중에 요벨(영어 'jubilee'는 히브리어의 음역 - 124쪽)이라는 말에서 주빌리가 구약성경의 '희년'에 해당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를 제윤경의 글 '왜 '주빌리은행'이 태어났는가'를 읽고 두 영화를 떠올렸다.

 

이들에게도 이런 은행이 먼저 생겼다면 영화 속 채무자들이 그렇게 인격을 잃고, 인권을 잃고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마저 잃는 일이 없었을텐데 하는 생각.

 

여기에 벌금을 낼 돈이 없어 억울하게 징역 생활을 하는 사람을 막기 위해 생긴 '장발장 은행' 에 대한 이야기를 오창익의 '새로운 상상,'장발장은행''을 통해서 우리나라 법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있지 않고, 오히려 이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고.

 

그렇게 국회에 법개정 청원을 했음에도 역시 법률가 출신인 국회의원들이 들은체도 안했던 과정이 이 글 속에 나오는데... 국회의원들이 낮은 곳에 있지 않고 너무도 높은 곳에 있어, 그들에게 추상적인 문구는 존재해도 구체적인 서민들의 삶은 함께 있지 않다는 사실에 환멸감이 들었고.

 

이런 일들이 종교에서도 다루고 있음을, 김회권의 '희년과 민주주의의 회복'이라는 글에서 찾게 되었다. 함께 살아감이 중요함을, 이미 서양의 기독교에서도 갈파하고 있음을, 그것을 실천하는 일을 우리가 미루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이 모든 일들을 종합할 수 있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기본소득'을 우리에게 가져오는 일.

 

성남과 서울에서 배당이라는 이름으로 실시하려고 하고 있는데, 이를 '포퓰리즘'이라는 말로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포퓰리즘'이 아니라, 이 땅에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이 누려야 할 기본 권리임을 하승수의 '기본소득이 빈곤문제 해법이다'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그렇다. 지금 우리에게는 말로만 존재하는 존재하는 '노동개혁'이 아니라, 우리 삶에 현실적으로 도움을 주는 '기본소득'이어야 한다. 이런 기본소득을 통해서 '주빌리은행'이든 '장발장은행'이 우리 사회에서 존재하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개인에게 책임을 지우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책임져야 할 일을 사회에 되돌려주는 일, 그것이 바로 기본소득일테고, 주빌리, 장발장 은행은 이런 기본소득과 더불어 논의되어야 함을 이번 녹색평론 145호를 통해서 생각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생각할 것이 많은 이번 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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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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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악스트" 2권에 실린 박민규와의 대담에 배수아인가 대담자가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고 해서 어차피 박민규의 소설을 읽을테니, 하고 구해서 읽은 소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라는 그림을 보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음악을 만든 음악가가 있다고 하는데, 박민규는 그림과 음악을 보고 소설을 창작했다고 하면 되나?

 

꼭 그렇지는 않다. 작가의 말을 보면, 박민규는 어느 날 아내가 내가 못생긴 여자였어도 사랑했을 거나는 질문에 대한 오래 된 답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하니 말이다.

 

못생긴 여자, 그것도 한 번 보면 잊을 수가 없는 여자도 사랑받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성립된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데...

 

세상 남자들은 여자를 단 두 부류로 분류를 한다고 하는데, 하나는 예쁜 여자, 또 하나는 못생긴 여자. 그리고 연령에 상관없이 남자들은 모두 예쁜 여자들을 원한다고 하는데... 오죽하면 서양말에(우리말에도 있을 법한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영어시간에 배운 구절만 머리에 떠오르니, 무의식적으로 내 머리에서 우리말의 편견을 씻어내려 하나 보다) '용감한 자가 미인을 얻는다'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이 소설은 정말로 못생긴, 너무도 못생겨서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여자는 못생겼고, 남자는 잘생겼고, 그러나 남자가 먼저 사랑에 빠지고, 둘은 서로 만나기는 하지만 곧 헤어지고, 영원한 이별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만나고...

 

이렇게 행복한 결말일 줄 알았는데... 나중에 다시 뭐야 하게 하는 결말이 나타나고, 작가의 말에서는 어떤 결론도 나올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하고.

 

20대 청춘을 이렇게 사랑으로 시작한 사람, 자신의 마음에 빛을 간직한 사람, 그 빛은 꺼지지 않는 영원한 빛이 되어 살아가는 내내 자신을 지탱시켜줄 등불이 된다고...

 

그것에는 외모고 뭐고 필요없다고, 그런 나이 때, 한창 싱그러울 나이 때 지지리도 많은 고민을 하고, 고생을 하는 청춘들이 등장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존재한다는 사실, 그 사랑으로 삶을 유지해 간다는 사실을 소설로 보여주고 있다.

 

박민규 특유의 문체, 툭 툭 끊어지는 그런 문체와 독백하듯이 서술해나가는 1인칭 화자의 등장으로 남의 속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을 받는데, 그런 점에서 읽는 사람이 소설 속의 주인공과 자신을 일치시킬 수 있긴 하지만...

 

이상하게도 갓 20세가 된 사람에게서 느낄 수 없는 성숙함 같은 것이 소설 곳곳에서 나온다. 지나치게 일찍 성숙해버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이 소설 속에서 만날 수 있는데...

 

다른 무엇보다 사랑이 사람의 삶에서 중심임을, 사랑이 없는 삶은 그냥 살아지는 것에 불과함을, 한 때 진정한 사랑을 한다면 그 사람은 평생 그 사랑으로 인해 살아갈 수 있음을, 이 소설을 통해 알 수 있느니...

 

인스턴트 사랑이 아닌, 물질이나 조건, 외모를 보고 하는 사랑이 아닌,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마음 떨리는 사랑을 해본 사람... 그런 청춘을 이 소설을 통해서 만나보는 경험을 하는 것도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사랑의 빛을 다시금 불러내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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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별 - 나를 키운 것들 문지 푸른 문학
김종광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8월
평점 :
품절


이 소설의 작가의 말을 인용한다.

 

'이 소설은 48편의 길고 짧은 이야기를 씨줄과 날줄로 삼았다. 요즘 청소년들에게는 낯설고 불편한 이야기일 수 있겠다. 1960-70년대 출생한 시골 출신 어버이 세대는 이렇게 자랐구나! 편한 마음으로 봐주시기를.'

 

소설이다. 이 말은 꾸며낸 이야기란 말이다. 꾸며낸 이야기는 완전한 공상이 아니다. 꾸며낸다는 말 자체에는 이미 사실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을 있음 직한 일을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하여 쓴 글이라고 하지 않나? 그렇다면 이 소설은 어떤가?

 

바로 이 소설의 뒷부분에 실려 있는 작가의 말에 답이 있다. 시골출신 어버이 세대의 경험담이라고 한다. 여기에 작가의 고향인 보령이 구체적인 지명으로 등장한다.

 

하여 이 소설은 1970-80년대 어린시절과 청소년시절을 보낸 지금 아버지-어머니 세대의 이야기다. 어느 정도는 작가의 경험이 녹아있을 것이고, 작가가 들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지만, 지금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의 어른들이라면 그땐 그랬지 하면서 고개를 끄덕일 내용이 많다.

 

그냥 과거의 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과거를 현재에 불러온다. 현재의 청소년들에게 과거 어른들의 청소년기를 보여준다.

 

어른들도 너희들과 다르지 않은 시절을 보냈다고... 어른들도 이렇게 세상물정 모르고 사고치고, 자기들끼리 재미있게 보냈다고.

 

그 때 어른들이 자기들을 지금 어른들이 청소년들을 대하듯이 다루기도 했다고.

 

여기에 더 기막힌 것은 충청도 보령이라는 시골의 장소성이다. 산업화를 겪지 않은, 기껏해야 탄광이 있고, 농사를 짓고, 동네에서 몇몇이 소위 출세라는 것을 한 시골의 장소성.

 

이들은 삶이 힘들기 때문에 진보적일 것 같지만, 이들의 생활에서는 진보적인 이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오직 먹고 살기 힘들기 때문에 이들은 정부에서 전하는 홍보에 순응한다. 아니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한다.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빨갱이'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추방해야 할.

 

학교 역시 마찬가지다.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교사들이 얼마나 충실히 하는지, 얼마나 체벌이 일상화되어 있는지 소설의 곳곳에 나와 있다.

 

그나마도 이념의 균형을 잡아줄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소수이다. 시골에서는 이념의 중립, 또는 이념의 조화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텔레비전에서 하는 말이 진리다. 그 이외의 것은 없애야 할 것, 지금도 '종북좌파'라면 옴짝할 수도 없게 되지만, 이 시대에는 '빨갱이'라는 말 한 마디면 모든 것이 끝난다.

 

하지만, 이런 과거를 과거의 이야기로 하기 때문에, 그 시대를 살아낸 청소년의 처지에서 소설을 이끌어가기 때문에, 내용이 무겁지 않다.

 

소년의 눈으로 내용이 전개되기에 이념 갈등도 없다. 그냥 가볍게 읽으면 된다. 읽으면서 때로 킬킬거리면 된다. 그만큼 소설을 끌어가는 작가의 힘이 잘 드러나고 있는 소설이다.

 

다만, 4-50대의 어른을이 읽으면 향수에 젖으며 킬킬거릴 수도 있지만, 지금 청소년들이 읽으면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웃어야 할지를 모를 수가 있다. 그 당시 상황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소설에 나타난 내용이 '반어'에 해당한다는 것, '풍자'에 해당한다는 것을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을 읽더라도, 그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관점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는 사람에게 이 소설은 뭔 소리를 하는 거야 하고 말기 쉽다.

 

하지만... 우리나라 70=80년대 상황을 안다면 이 소설은 참 재미있다. 그 어지러운 시대, 어려운 시대를 이렇게 경쾌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감탐을 하게 되기도 한다.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그런 지식만 바탕이 된다면.... 아니어도 재미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웃어야 할 장면을 놓치기 쉽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가령, 이 책에 실린 소설 중에서 '시인'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다. 그냥 읽어도 좋지만, 보령 출신 우리나라 소설가, 이문구를 떠올리며 읽으면 이 소설이 가슴에 다가온다. 이문구의 아픔 또한 느낄 수 있고... 물론 이 소설에서는 이문구라는 이름은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문구를 연상할 수 있으면 읽는 재미가 두 배가 되니 얼마나 좋은가.

 

이런 식이다. 조금만 우리나라 사회역사적 배경을 알면, 더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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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과 영혼


어느 날, 내게서

별이 빛의 속도로 멀어져 갔다.

그날 부터

하늘을 보지 않은, 나는

늙어버렸다.


아스라이 멀어져 간 별

별과의 거리는 영혼의 나이였다.


잃어버린 젊음을 찾고 싶어

어둑한 밤, 청정 공기

해발 700미터, 평창,

잔디밭에서 하늘을 보니

아득히 멀리 있는 별.

보고 또 보니 별이,

내게서 도망치지 않는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별을 잊고 있었음을,

별이 내게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별에서 멀어진 것이었음을,

평창, 어두운 밤하늘

별을 본 그날,


별은 빛의 속도로 내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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