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 중에 농민이 경찰의 폭력에 희생당하는 나라,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하면서도 농민을 천하의 근본이 아닌, 천하의 종으로 아는 나라, 농사를 지어도 먹고 살기 힘들어지는 나라, 농사를 지면 지을수록 이상하게 빚만 늘어나는 나라.

 

그런 나라를 희망이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먹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까짓거, 세계 20위 안에 드는 무역 대국인 우리나라니, 식량 수입하면 그뿐이라고?

 

식량 자급율이 30%가 채 안되는 나라에서 수입으로 농산물을 충당한다는 발상은 자연스런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식량의 가격이 오른다면? 그냥 오르는 정도가 아니라, 예전에 석유 파동이 일듯이 급격하게 가격이 오른다면?

 

우리는 엄청난 식량 파동을 겪게 될 것이다. 석유 파동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재난이 될텐데... 과연 그에 대한 대비는 되어 있는가? 식량은 자급되어야 할 기본요소이고, 우리의 생명에 없어서는 안될 요소인데...

 

우리나라 농민들 노령화는 차치하더라도 점점 농사짓는 사람이 없어져 가고 있다. 농토도 줄고 있는데... 특히 논이 급격하게 줄고 있다. 벼를 재배하지 않는 논에 보조금을 주는 이상한 제도 탓도 있겠지만, 쌀값이 몇십년 동안 거의 오르지 않았다는 데도 원인이 있다.

 

물가는 엄청 상승했는데, 쌀값이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으면 실질적으로 농산물 가격은 많이 떨어진 것이다. 즉, 똑같은 양을 생산해도 농민들에게 가는 돈은 계속 줄고 있는 셈이다.

 

생활이 아닌 생계를 걱정해야 할 판이 된 농업 현실. 그러니 누가 농사를 짓겠다고 하겠는가?

 

녹색평론 147호는 이런 농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를 살리는 농업을 이제는 우리가 살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생협운동이든 한살림 운동이든 참으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상태. 특히 농민들은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있을 지경인데... 농사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이 지구에서 계속 생존해 가기 위해서도 농사는 필수적이니, 사양 직업이라는 생각 말고, 어떻게 해야 농업을 살릴지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한다.

 

이렇게 농업에 대한 화두를 이번 녹색평론 147호가 던져주고 있다. 한 달 뒤 다가올 총선, 농업을 살릴 수 있는 정책을 펼 수 있는 정당, 그런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사람을 대표로 뽑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이제는 농민이 존중받고 우대받는 사회, 그런 사회가 우리가 사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농민에게 월급을 (기본소득) 주는 방법도 생각해 볼 필요도 있고.

 

농민이 살아야 농업이 살고, 농업이 살아야 우리가 산다. 그러니 우리 이제 농민을 살릴 수 있는 방법도 고민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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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민(愚民)ngs01 2016-03-13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수산물의 유통체계를 바꾸지 않는다면 지금의 악순환은 계속 되리라 생각됩니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효율적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못하는 농협과 수협 결국 농민들과 소비자사이의
수많은 유통단계에서 그들만 배를 불려주는 구조적인 한계가 문제입니다. 농협이 과연 농민을 위한 기관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거대해진 기득권 권력층에 의해 다수의 국민들이 착취당하는 구조는 아닌지 말입니다.

kinye91 2016-03-13 13:10   좋아요 0 | URL
농업에 대한 전체적인 개혁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해요. 생산과 유통, 그리고 소비가 긴밀히 연결될 수 있는 농업개혁이 있어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농협에 관한 문제의식에 저도 동의합니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창비시선 394
송경동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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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이야기했다고 '감옥'에 갇혀야 했던 시인. '희망버스'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보여주었지만, 그는 감옥이라는 곳으로 끌려가야 했다. 그러나 그 감옥은 절망이 아니고 또다른 희망이었다.

 

이 시집,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 태어날 때 선택할 수 없었던 국적, 한국인. 그러나 이 국적은 성인이 되면 스스로 버릴 수도 있다. 망명을 통해, 또는 또다른 국적을 취득해, 한국인이라는 국적을 포기하면 되니까.

 

이 시집에 실린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는 한 편의 서사시다. 부끄러운 한국의 자화상. 아니 한국의 자화상이 아니라 권력과 결탁한 한국 자본의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서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저지르는 자본의 비인간성, 그 비인간성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가는 노동자들. 노동자들.

 

그래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란 말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자본은 국적이 없는데, 유독 노동자에게만은 국적을 강요하는 자본과 권력.

 

그런 자본과 권력에게 '나는 한국인이 아니'라고, 그들의 지배를 거부하는 시인. 그런 시들.

 

이건 국적 포기가 아니다. 한국인이라는 국적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나라, 그런 사회를 만들겠다는 의지다. 이렇게 노동자를 착취하고 탄압하는 한국인이 아닌, 힘든 사람들과 연대하는 한국이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한 편의 서사시다.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오지 않으면 없던 일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지 않음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자본은, 한국 자본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이끌고 있음을 직시하라고... 이 시는 말하고 있다.

 

이런 시들이 이 시집에 너무나 많다. 시인은 절망의 시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얼마나 우리 사회가 절망스러운지, 얼마나 캄캄한 어둠, 그리고 무덤들이 많은지를 알려주고 있다. (이 시집의 마지막에 실린 시 '저녁 운동장'을 보면... 아직도 우리 사회는 캄캄함을, 무덤과 같음을,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음을 시인은 말하고 있다. 152쪽)

 

이런 어둠 속에서 그냥 주저앉아야 할까? 아니다. 주저앉을 수 없기에 시인은 '희망'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시를 보자. '먼저 가는 것들은 없다'라는 시. 다른 시들에 실존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고, 실제 사건이 나온다면, 이 시는 그것들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희망'은 우리가 끝까지 놓을 수 없는 것임을. 놓아서는 안 되는 것임을.

 

먼저 가는 것들은 없다

 

몇번이나 세월에게 속아보니

요령이 생긴다 내가 너무

오래 산 계절이라 생각될 때

그때가 가장 여린 초록

바늘귀만 한 출구도 안 보인다고

포기하고 싶을 때, 매번 등 뒤에

다른 광야의 세계가 다가와 있었다

 

두번 다시는 속지 말자

그만 생을 꺾어버리고 싶을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보라는

여름의 시간 기회의 시간

사랑은 한번도 늙은 채 오지 않고

단 하루가 남았더라도

우린 다시 진실해질 수 있다

 

송경동,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창비. 2016년. 초판 2쇄. 79쪽.  

 

그렇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신영복 선생의 글이 생각났다. 비가 올 때 우산을 씌우주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사람이 되라는.

 

시인은 비를 함께 맞아주는 사람이다. 그의 시들을 통해 우리는 비를 함께 맞아줄 수 있다. 어설프게 우산을 씌워주거나, 우산을 주겠다는 거짓부렁이를 나불거리는 사람이면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집을 통해서 우산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들의 허상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된다. 함께 비를 맞을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안전하게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에 있으면서, 너희에게 우산을 주겠다고 호언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이다.

 

한 편 한 편이 마음 속에, 결코 머리 속이 아니다, 아프게 콕콕 박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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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수업 - 천재들의 빛나는 사유와 감각을 만나는 인문학자의 강의실
오종우 지음 / 어크로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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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사람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특정한 사람들의 전유물로 바뀌어 가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먹고 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예술은 무슨 이라는 생각을 하기 쉬운데, 먹고 살기가 힘들수록 예술은 우리에게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이 책은 하게 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예술은 바로 나를 만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예술이 그 자체로 독립되어 있지 않고, 결국은 나와 사회에 스며들어 잊고 있던 나, 잃고 있던 나를 찾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술은 나를 일상으로부터 분리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일상은 새로움에 대해 인식 못하고 주변에 녹아들어가 있는 상태다.

 

녹아들어 있기에 주변을 살필 수가 없고, 자신을 바라볼 수가 없다. 그냥 그렇게, 되는 대로 존재하고 살아갈 뿐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술은 동사가 아니라 명사일 뿐이다. 이 책에서 예술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한다(308쪽)고 하는데, 명사로 예술을 인식하면 예술은 그냥 사물일 뿐이다. 내 일상에 녹아 있는 또 하나의 사물.

 

여기서는 창의성이고 뭐고 나올 수가 없다. 그냥 함께 있을 뿐이니. 그러나 예술은 그렇게 하나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체험으로, 움직임으로, 변화로 존재하는 것이다.

 

즉,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나를 일상으로부터 분리시켜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분리되는 체험, 그것을 예술과 함께 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일상의 나가 아닌, 감춰져 있던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예술의 역할이다. 그런 역할에 대해 이 책은 문학과 음악과 미술을 넘나들며 설명해 주고 있다. 예술의 모든 분야들이 각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발견하기 위해 서로 스며들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읽는 행위 자체가 예술을 체험하는 행위가 되도록 해주고 있는데... 이토록 예술이 지금처럼 절실한 시대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해준 책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쩌면 일상이라는 컨베이어벨트에 올라 그냥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지루해하면서도 다른 삶은 상상하지도 못한 채, 그냥 벨트 위애 자신을 내맡기고 있는 현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이 상태를 자각하지 못하면 그냥 벨트 위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냥 주어진 대로 흘러갈 뿐이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일상에 파묻혀서.

 

그런 상태를 깨닫게 해주는 것, 그 도도한 컨베이어벨트의 흐름에서 '나'를 내려오게 하는 것, 그래서 그 벨트가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이 해주는 역할일 수 있다는 것.

 

하여 지금처럼 복잡한 세상, 너무도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예술은 '나'를 바라보고, '나'를 찾게 해줄 수 있는 대상이 바로 '예술'이라는 것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강의를 했던 내용들을 책으로 엮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강의를 들었다면 더욱 생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비록 생생한 음성으로 듣지는 못하더라도 문자를 통해서도 그 생생함을 느낄 수 있도록 이 책은 예술의 각 분야를 넘나들며 우리에게 예술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래, 지금이 바로 예술이 필요할 때다. 이런 시대일수록 예술은 더욱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 책은 그것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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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 일본군 위안부 제도란 무엇인가? 교양인을 위한 역사 강좌 1
요시미 요시아키 지음, 남상구 옮김 / 역사공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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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불가역적 합의라는 명목 하에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한일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발표가  있었다.

 

그런데 이 발표 직후 발표문에 없던 이야기들이 양국에서 떠돌고,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을 철거한다는 말이 있어서 대학생을 중심으로 시민들이 두 달여를 소녀상 앞에서 노숙을 하면서 지킨 일이 있다.

 

물론 이 일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런데, 일본은 이 합의를 바탕으로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역사적 사실은 이미 끝난 일이라는 식으로, 또 자신들의 잘못은 없다는 식으로 연일 언론에 터뜨리고 있다.

 

이것이 어떻게 합의가 되는 것인지 모를 지경인데... 정작 당사자인 우리나라 정부는 별 대응이 없는 듯하다.

 

일본의 주장이 잘못 되었음을 정부 차원에서 적극 대응하고, 일본에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 주권국가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역사전쟁"이란 책에서도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책에 바로 이 책이 소개되었다.

 

적어도 역사적 사실들에 관해서는 정확한 사실을 바탕으로 진실을 규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망발이라고 폄훼하면서 넘어가기보다는, 왜 그것이 망발인지를 구체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반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반박이 일본 학자에 의해서 나온 것이 한 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가해 국가의 국민이 진실을 외치는 장면에서, 피해 국가의 정부는 이보다 더 구체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을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주권 국가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일본이 미국의 신문에 기고한 광고를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이 반박은 사실에 기초해서, 일본 광고가 사실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일본 정부의 각료들이 내세우고 있는 일본군의 책임이 아니라는 주장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담박 알 수 있다.

 

일본 광고는 크게 '사실'이라는 이름으로 다섯 가지가 있다.

 

1. 강제는 없었다.

2. 조선총독부는 업자에 의한 유괴를 단속했다.

3. 군에 의한 강제는 예외적이었다.

4. 군 '위안부' 생존자의 증언은 신뢰할 수 없다.

5. 여성들에 대한 대우는 좋았다.

--- http://www.ianfu.net/facts/facts.html  참조

 

그러나 이 책에 의하면 이것들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이들이 주장한 논리대로 따라가도 사실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아주 작은 책자이기 때문에 빨리 읽을 수 있는데... 이 다섯 가지 '사실'이라고 하는 주장이 '사실'이 아니고, 단순한 '주장'임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일본 학자도 이렇게 이미 구체적인 '사실'들을 중심으로 일본 정부의 주장을 반박했는데, 국민을 책임져야 할 국가는 이보다 더 나아가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한다.

 

결국 일본군 위안부는 '강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조선총독부는 업자에 의한 유괴가 있더라도 군의 명령을 수행하는 업자는 단속하지 않았으며, 군에 의한 강제는 예외적이 아니라 일반적이었고, 군 '위안부'들은 일관된 진술을 하고 있어서 신뢰성이 높으며, 이들에 대한 대우는 명목상 화폐의 액수가 아니라 물가상승과 비교를 하면, 너무도 형편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국가(의 군대)에 의한 폭력이며, 인권유린이고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범죄이기 때문에 철저히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지며, 피해자에 대해서는 적절한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일본의 '고노 담화'는 이런 길로 가는 징검다리였다고 할 수 있는데, 지금 일본 정부는 이런 징검다리를 치우고 있으니, 이것은 인간으로서도, 세계의 구성원인 한 국가로서도 해서는 안될 일이다.

 

이 책, 읽자. 그리고 '사실'에 기반에 비판을 하자. 국민들이, 시민들이 이렇게 한다면 주권국가로서도 더 책임있는 교섭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귀향'. 그러한 씻김굿, 살풀이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진실이 규명되고 책임질 대상이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 다음에 용서가 따르고, 해원이 된다. 그 길로 가는데 이 책, 좋은 디딤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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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나들이 4

                  - 질서

  

  아주 오래 전 우리나라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질서를 다룬 이경규가 사회를 보던 예능 프로그램, 우리나라와 일본의 교통질서를 비교하는 프로, 정지선을 지킵시다였던가, 정지선이 있음에도 차머리를 들이미는 우리나라, 밤중이 되면 신호를 신경 쓰지 않는 우리나라, 횡단보도를 막고 서 있는 자동차들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우리나라, 반대로 정지선 앞에 칼같이 서던 일본인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신호를 철저히 지키던 일본인들, 도저히 교통 신호를 무시한다는 생각을 못하던 일본인들의 모습은 충격이었는데...그래도, 설마,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차가 적지 않은 교토 시내인데

신호 한 번에 웬만하면 다 통과.

사람들이 완전히 내릴 때까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버스.

이러니 정지선은 기본.

도처에 보행자를 배려해

보행자가 직접 누르게 하는 신호등들.

과연 질서의 왕국.

여기에 더하여

거리는 너무도 깨끗.

어디 보자 하고 눈을 씻고 찾아도

거리에서 쓰레기를 찾기가 힘들고.

이틀 거리를 걸었는데,

담배 꽁초 하나, 둘 정도를 본 것이 전부.

너무도 깨끗한 거리에

소름이 돋을 정도.

이들 몸에 따뜻한 피가 흐를까 하는 생각에

가끔 무단횡단 하는 사람을 보면

쾌감이 인다.

이들도 사람이구나.

이들에게도 따뜻한 피가 있구나.

사흘째 골목에 들어서니

소변금지라는 글자도 보이고,

이들도 실수를 하는군.

역시 사람은 똑같군.

다만 더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선

함께 살아야 함을 지키려

노력할 뿐.


   겨우 세 걸음 거리의 길에 신호등이 있다. 차도 별로 없는데, 굳이 신호등을 설치한 이유는, 그래도 여기가 네거리라서? 하지만 이런 신호를 지킨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기계다. 신호등을 무시하고 건넌다. 난 외국인이니까. 그러다 생각한다. 여기에 신호등이 있는 이유는 어쩌면 차보다 사람이 먼저라고, 사람의 안전을 생각해서라고, 차는 신호를 꼭 지켜야 하지만, 사람은 알아서 건너가라고, 그런 의미에서 설치하지 않았을까, 이게 바로 함께 삶 아닐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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