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기다려지는 책이다. 이번 호에서는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나도 궁금하고, 내가 생각하고 있지 못했던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는 책이기도 하니, 오면 반갑고,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고 싶지만, 한달음에 읽고 싶기도 한 책이다.

 

너무도 근본주의적인 문제제기를 하지 않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근본주의는 우리가 기본으로 생각해야 할 것들 아니겠는가.

 

세상이 종말을 향해 가고 있는데, 그 종말이 뻔히 눈에 보이는데, 그래서 우리의 삶을 근본에서부터 바꾸지 않으면 종말이 기어코 오고 말텐데, 어찌 근본주의적 주장을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근본주의와 극단주의는 다르다는 점 명심하자)

 

어떤 사람들에게 녹색평론이 마치 '카산드라의 예언'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는 않지만, 카산드라의 예언은 비록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아서 그렇지 그 예언은 모두 맞는 예언이었다는 사실.

 

녹색평론이 주장하고 있는 문제들은 예언이 아니라 사실에 기반한 예측이라는 것, 그 예측이 빗나가게 하는 일은 바로 우리들의 몫이라는 점.

 

예측이 된다면 예측대로 가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의 자율성이고, 인간의 힘 아니던가. 그런 자율성과 힘을 찾으라고 촉구하는 책이 바로 녹색평론이다. 결코 녹색평론은 '카산드라의 예언'처럼 취급받아서는 안 된다.

 

이번 호는 "개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제목으로 달고 있다. 개헌 논의가 이루어지다가 소강상태가 되다가 대통령의 말 한 마디로 쏙 들어가 버리곤 하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지금은 개헌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라는 인식을 한다.

 

87년 헌법이 이제는 시효가 만료되었다고,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면 제왕적 대통령제는 손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도대체 수많은 사표(死票)들을 발생시키는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유지하는 이유가 뭐냐고? 기득권 세력들의 힘에 밀려, 그들의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제도로 전락해버린 것 아니냐는 말들이 나오고 있는데...

 

개헌은 필요하다. 단지 대통령제만이 아니라 여러 면에서 지금 시대적 상황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 다만, 개헌을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번 호 좌담에서 개헌을 할 수 있는 주체가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밖에 없는데, 둘 다 국민에게서 위임받은 권력 아니던가.

 

위임받은 권력이 개헌을 발의할 수 있는데, 정작 권한을 위임해준 국민들은 개헌을 발의할 수도 없다니, 이게 무슨 주권을 지닌 국민인지...

 

그래서 개헌은 국민들이 참여하는 개헌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국민들이 참여하지 않고 87년처럼 몇몇 소수만이 참여한 개헌은 하나마나한 개헌이라고,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이번 호에서 말해주고 있다.

 

전국민이 참여하는 개헌, 그것이 바로 국민이 주권을 가진 주체로 정치에 참여하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어떻게 개헌 논의가 흘러갈지 지켜봐야겠지만, 녹색평론에서 최소한 개헌은 국민이 참여하는 방향으로, 즉 국민이 주체가 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방향성은 제시했으니...

 

개헌말고도 이번 호에서 중점적으로 다룬 내용은 '사드'와 '쿠바'다.

 

'사드'는 우리가 미국의 입김하에서 추진하고 있다고 보는데, 과연 '사드'가 우리나라 안보에 도움이 되느냐, 또 우리나라 발전에 도움이 되느냐 하는 논의 자체가 거의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이 되고 있어서 사회 갈등을 일으키고 있음을, 단지 사회 갈등뿐만이 아니라 외교 갈등까지 일어나고 있음을 여러 글에서 보여주고 있다. ('사드'에 관한 글이 이번 호에 네 편이 실렸다)

 

이런 '사드'와 반대편에 있는 글이 바로 '쿠바'에 관한 글이다. 미국의 바로 아래에서 미국의 경제봉쇄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나라를 유지해 온 쿠바. 의료천국, 유긴농, 도시농으로 식량문제 해결, 쿠비에 맞는 민주주의로 자주국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나라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쿠바에 관한 글이 세 편 실렸다. 읽어볼 만한 글들이다.

 

한 편 한 편 읽으며 지금 우리나라 현실을 읽는 눈을 키울 수 있는데...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고백한다 - 정도전 암살 미스터리
이재운 지음 / 예담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조선 건국의 공신, 그러나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혁명가. 왕보다는 신하의 권리를 더 주장한 사람, 그래서 왕권과 신권의 대립 속에서 왕권 강화를 위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던 사람.

 

조선의 기초를 다진 사람, 지금도 그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는데, 특히 경복궁에는 그가 지은 이름들이 남아 그의 사상을 드러내고 있으니, 그는 자신의 사상을 한 나라의 기본 사상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죽음과는 상관없이, 그에 대한 평가와는 상관없이.

 

어쩌면 그는 그 먼 과거에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고 할 수 있는 정치가이기도 하다. 왕 하나에 어떻게 나라를 다 맡길 수 있느냐고, 현명한 신하들이 정치를 주로 하고, 왕은 나라를 대표하면 된다는, 신하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해야 한다는 신권(臣權)을 주장한 것은 지금에서 보면 입헌군주제를 주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입헌군주제는 유럽의 여러나라에서 채택하고 있는 정치제도이기도 하고.

 

그러나 그는 시대를 너무 앞서 태어났다. 중세 시대에, 그것도 왕이 다스리지 않는 나라를 꿈꾸지 못하던 시대에 신하의 권리, 신하 중심의 정치를 주장한 그가 용납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특히 자기들이 나라를 세웠다고 생각하는 세력들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그러니 태종 이방원에게 정도전은 눈엣가시였을테고, 어떻게든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서는 제거되어야만 했을 대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제거되었다.

 

그 다음 태종이 얼마나 왕권을 강화했는지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정도전은 역적죄로 죽어야 했다. 역적죄란 무엇인가? 삼족을 멸한다는 죄이다. 직계 가족은 물론이고 방계 친족들도 피해를 입어야 하는 죄다.

 

여기서 소설은 출발한다. 정도전 아들의 관점에서. 이상하지 않는가. 역적죄로 죽었을텐데, 정도전 아들의 관점이라니... 정도전 아들이 살아있어? 어떻게? 이런 의문에서 소설이 출발한다.

 

신기하게도 정도전의 아들은 정도전이 죽은 지 16년이 지나서 복권이 된다. 그리고 그는 세종 때에는 높은 벼슬 (형조 판서- 요즘 말로 하면 법무부 장관쯤 된다)까지 하게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게 바로 역사소설의 묘미다. 재미다. 역사에서 비어 있는 한 틈을 찾아 그 틈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메우는 것. 그것도 참으로 사실적으로.

 

소설은 정도전을 명나라와 조선의 세력 다툼 사이에 낀 희생양으로 만들고 있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이 명나라에 위협이 되는 존재로 조선을 꼽고, 그 중에서도 정도전을 가장 위험한 인물로 지목하고 제거하려고 했다는 것.

 

여기에 지나치게 신권이 커지자 불안감을 느끼고, 또 조선의 건국에 아무런 공이 없는 배다른 아우 방석이 세자가 되자 불만을 가진 이방원이 주원장과 결탁하여 조선의 안정과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정도전을 제거한다는 내용.

 

정도전을 제거하되, 정도전의 사상이 나라 통치의 방향과는 맞기 때문에 그가 제시한 정책들을 따르겠다고, 자손들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겠다고 정도전에게 약속을 한다는 그런 내용.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빈 틈을 이런 상상력으로 채워나가고 있는 소설이다. 그렇다. 정도전의 자손들이 어떻게, 그것도 큰아들이 정도전이 그렇게 죽어갔음에도 중용되어 벼슬을 했는지 의문이었는데, 이 의문을 상상력으로 채워넣었으니...

 

아들의 관점에서 내용이 전개되고 또 소설이 긴박하게 전개되고, 문장도 잘 읽혀서 읽는데 문제가 없는 소설이다. 재미도 있고, 역사의 빈 틈을 메우려는 상상도 해볼 수 있고.

 

다만, 이 소설에 나온 내용을 사실(史實, 事實)로만 믿어서는 안 된다는 점. 역사소설은 역사보다는 '소설'에 더 강조점을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읽으면 읽는 재미가 쏠쏠한 소설이다.

 

내가 읽은 소설은 옛날 판이라 절판이 되었고, 새로운 제목으로 책이 다시 나왔던데... 제목을 살펴보니 내용이 그리 대폭 수정이 된 것 같지는 않고.

 

새로운 제목은 "칼에 베인 용" (책이 있는 마을, 2015년)이다.

 

덧글

 

읽으면서 좀 거슬렸던 장면이 몇 있는데...

 

우선 하나는 아들인 정진이 복수를 다짐하면서 춘추전국시대의 오자서(오원) 예를 들면서 오자서에게는 부차와 손무가 있었다고 하는데... 오자서에게는 오왕 부차가 아니라 합려 아닌가. 부차에게서 죽음을 명령받은 게 오자서일텐데... (170쪽 등)

 

또 하나는 장량이 항우를 황제로 만들었다고, 정도전을 장량에 이성계를 항우에 비기는 대사가 나오는데, 장량은 항우가 아니라 유방을 황제로 만들었다. (181쪽)

 

개정판에서는 고쳐졌을라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몸이 안 좋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병원에 입원해서 병상에 누워 몸을 옴짝달싹도 못하고 그냥 누워만 있었다. 그것도 며칠동안이나.

 

사람이 움직이지 못하니 미칠 노릇이다. 앉지도 못하고,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음식도 남이 먹여주어야 하니 이거야 살아 있는 시체가 따로 없었다.

 

그때 내 몸을 생각했다. 내가 내 몸을 너무도 막 썼구나. 내 소중한 몸을 이리도 막 다룬 결과가 지금 이것이구나.

 

내 몸을 내가 아끼지 않으면 누가 아끼겠는가. 내가 몸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정신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닌, 몸과 정신이 함께 바로 '나'라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은 시간이었다.

 

자신의 몸을 이렇게 볼 수 있게 되기까지는 어떤 계기가 있는데... 그 계기가 없으면 우리는 우리 몸이 영원히 계속 잘 활동할 줄 알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아니다. 어떤 계기가 없어도 자신의 몸에 대해서 늘 관심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살펴야 한다. 몸이 너무 피곤하지 않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 바로 자신의 몸 아니던가. 그런 몸을 이렇게 막 굴리다니... 그런 안 되지.

 

그러다 김사인의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이 생각났다. 이 시집을 펼쳐보니, 두 번째 시 '노숙'이 눈에 들어온다.

 

병원에 입원해서 내 몸에 대해 생각했듯이 시의 화자도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생각을 한다. 그런데, 그 몸이 참, 내가 입원해 있는 것만큼 혹사당했나 보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고 있는데, 이제는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몸의 혹사는 결국 정신의 혹사로 이어지고, 그것은 바로 '나'를 힘들게 하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

 

많이들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닌데도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경우도 많다. 그렇더라도 내 몸, 내가 지켜야 함을 생각해야 겠다.

 

세상을 얻어도 건강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노숙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였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험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10년 초판 11쇄. 12쪽.

 

시에서 말하는 몸과 건강을 잃은 몸과는 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모두 제 자리를 찾지 못한 몸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리고 그 몸으로 살아왔지만 몸에 대해서 제대로 대우를 해주지 못햇음도 공통점이다. 그렇다, 노숙은 자신의 몸뚱이를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뉘인 행위이지만, 병원에 누워 있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 내 몸 사랑해야 한다. 그 몸이 지금까지 날 위해 해온 것에 대한 보상, '네 노고의 험한 삯'을 우리는 지불할 수 있어야 한다. 지불하도록 해야 한다.

 

그 지불, 몸의 주인인 내 몫이기도 하지만, 내 몸이 살아가는 사회, 내 몸으로 살아가는 사회도 역시 '노고의 험한 삯'을 지불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몸도 안락한 곳에 뉘일 수가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읽은 시다.

 

작고 힘없는 존재들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시다. 이런 애정이 우리를 좀더 건강하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풀꽃도 꽃이다 - 전2권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이름만으로도 자신의 작품을 다른 사람이 읽게 만들 수 있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조정래일 것이다.

 

어떤 프로그램에 나와 그는 말했다. 자신은 아직도 원고지에 손으로 글을 써서 넘긴다고. 이름 없는 작가들이 이렇게 했다간 원고를 퇴짜 맞을 가능성이 아주 많지만, 자신에게는 어쩔 수 없다고. 작가로서의 자부심과 조정래라는 작가가 우리나라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잘 알 수 있는 말이었다.

 

대형작가,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이름보다는 우리나라 현실을 소설 속에서 재현해내고, 그것을 통해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한 작가, 어쩌면 그는 예전의 작품인 "태백산맥"의 작가로 단번에 그 자리를 차지했고, 그 이후의 소설들을 통해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그가, 일제시대, 6.25, 독재시절 개발시대 등을 소설에 담아 내었다면, 다음 소설은 자연스레 교육 문제일 수밖에 없다.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교육 문제에 관심을 지니지 않을 수 없을테고, 교육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지금 경제 문제와 더불어 너무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교육망국론이 나온 지 오래고, 그렇지만 변하려는 몸부림이 도처에서 있었지만 변한 것이 잘 보이지 않는 교육. 교육의 효과가 당장 나타나지 않고 참으로 더디게 나타난다고 해도, 대안학교 붐이 일었던 것이 1997년 정도부터이니 대안 교육도 이미 20여년이 되어 가는데, 그 때 대안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이제는 사회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일할 때가 되었음에도 어떤 변화가 보이지 않으니...

 

교육은 이렇게 20년이 되어도 그 변화를 잘 포착하지 못하는데, 해방 이후 공고화된 교육 문제가 어떻게 몇 년 내로 싹 해결되겠는가,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해결이 아니라 더 안 좋은 쪽으로 심화되었다는 것이 조정래의 생각이 아니던가.

 

이 소설을 읽어보면 참, 암담하다. 도대체 희망이 없다. 이것이 우리나라 교육 현실이라면 이 나라 도대체 가능성이 있는 나란지 참담한 마음만 들 뿐이다.

 

이게 소설 속 상상의 세계에서나 그렇다면 괜찮겠는데, 소설을 읽으면서 지금의 현실이 그대로 느껴지니 더 문제다. 그러니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불편해진다.

 

현실은 그대로인데,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결말이 없다. 그냥 진행형이다. 가장 암담한 순간을 제시해 놓고 소설은 끝나버린다. 이게 현실이라고, 똑바로 보라고, 지금 대치동에 가 보라고? 이렇게 하고 있다고 외치고 있는 듯하다.

 

소설 속에 긍정적인 인물들도 나온다. 모두 전교조 교사들이라는 짐작이 가게 만드는 그런 교사들인데, 이들에 공감하기가 참 힘들다. 특히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강교민". (그는 말했다. 이 이름은 자기가 포기할 수 없는 이름이라고. 자기의 의도가 담긴 이름이라고. 교육민주화의 줄임말) 이토록 완벽한 교사가 있을까?

 

교장에게서도 무시당하지 않고, 동료교사들에게도 인정을 받으며 학생들에게는 짱이라는 소리를 듣고 수업도 잘하고 생각도 바른데, 여기에 자기 자식 교육까지 완벽하게 잘 시킨 사람... 이상적이어도 너무 이상적이다. 이런 사람이...

 

이 사람의 아내는 교사였는데, 아이가 혼자 밥 먹는 것을 견딜 수 없다고 해서 학교를 그만두고 전업주부 생활을 한다. 그리고 아이가 알아서 공부할 수 있게 분위기를 조성하고 함께 공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전혀 강요는 없다. 아이는 알아서 자기주도 학습을 한다.

 

그런데 좋아보이지 않는다. 이 완벽한 가정의 모습, 가정과 학교의 생활을 일치시킨 강교민 선생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심보인지 반발감이 막 생긴다. 도대체 뭐야, 이 사람? 하는 마음이 든다.

 

그가 해결 못 할 일은 없다. 아니 있다. 그것은 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편법, 개인의 힘이 작동할 수 없는 함법을 가장한 편법은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 이것 빼면 나머지는 모두 '수퍼맨'이다. 그는 교육계의 '수퍼맨'이다.

 

하지만 그런 교사는 없다. 그리고 그의 가정이 그리 좋아보이진 않는다. 그의 아내는 아이가 혼자 밥 먹는 것 못 보겠다고 학교 그만두었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다른 맞벌이 가정들은? 자신의 인생은? 그녀 역시 자신의 인생을 가정 또는 자식에 건 것 아니겠는가?

 

이런 점에서 주인공이 우선 감정이입을 하는데 거리를 두게 만든다. 문제적 시대에 문제적 개인이 등장하는 것이 소설이라고 하는데, 이건 너무도 완벽한 중세의 영웅이 소설이 나와 버린 것이다.

 

그런 그 앞에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범속한 사람들일 뿐이다. 영웅 앞에서 쪼그라들 수밖에 없는 인물들. 이것이 소설에 마음을 주기 힘들게 한다.

 

게다가 이 땅의 어머니들은 다들 왜 이리 못됐는지... 자신의 인생을 오로지 아들의 인생에 건다. 아들이 무슨 자신의 아바타라도 되는 줄 아는지. 그러나 특정 엄마들은 이럴지 몰라도, 대부분의 엄마들은 그렇지 않다.

 

아들과 자신의 인생을 구분할 줄 아는 엄마들이 더 많다. 그리고 그런 엄마들 때문에 이런 지옥같은 교육현실에서도 살아남는 아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이 점이 아쉽다. 소설에서는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지만 자식과 자신의 삶을 구분할 수 있는 엄마들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전혀 나오지 않기에 이건 너무 과장이 심한 것 아냐, 그냥 다른 나라 이야기로 치부하기가 쉬어진다. 감정이 이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소설을 읽으며 아이들의 불행에 두 손을 꽉 쥔다든지, 눈물을 머금는다든지, 화가 나 두 손이 부르르 떨린다든지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소설은 내 마음 바깥에서 그냥 사건을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어떤 등장인물에게도 마음이 다가가지 않는다. 도대체 왜 다들 이렇게 나쁜 쪽 인물들과 성공한 인물들만 나오는지...

 

작가가 너무 위에서 교육 현실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 현실은 위에서 그리고 바깥에서 보면 진실을 알 수 없다. 그 복잡함을 알 수 없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얽히고 설켜 있는 그 복잡함을 무슨 알렉산더라고 단 칼에 잘라버릴 수는 없다.

 

단 칼에 잘라버리면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냥 통쾌할 뿐이지, 그 어려움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래서 소설 속 주인공은 강교민이나 다른 인물들처럼 '영웅'이 되어서는 안 된다. 현실에 처절하게 실패해 가는 보통 사람이 나와야 한다.

 

교사라면 학부모와 학생 그리고 학교 권력자인 교장과 교감, 교육 당국에 끼어서 고뇌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해야 한다. 그런 사람, 결코 이 소설의 주인공인 강교민처럼 학생들에게까지 짱으로 불리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실패를 학교에서 하겠는가. 얼마나 많은 실패를 수업에서 하겠는가.

 

마찬가지다. 엄마들도... 엄마들을 이렇게 모두 악마로 만들어 버리면 엄마들의 모습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 아이를 위해서 무조선 좋은 대학, 좋은 성적, 이것은 엄마들이 아이에게 바라는 모습 중 일부일 뿐이다.

 

그들의 고뇌는 나오지 않고 오로지 결과만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고전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감정처럼 악인은 그냥 그냥 악인일 뿐이다. 변화가 없는. 다만, 힘에 의해 자신의 감정이나 행동을 누를 뿐인.

 

성적지상주의, 학교폭력, 왕따 문제, 영어만능주의 등 많은 것들을 이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데, 어느 하나도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있지 않다. 그 점은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교육 문제가 어떻게 해결이 되갰는가. 그것은 지난한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 소설의 장점을 이 점에서 찾는다. 조정래라는 문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가 교육 문제를 소설로 다뤘다는 것. 교육 문제를 소설을 통해 우리 사회에 화두로 던졌다는 것.

 

이제 이 화두를 풀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이다. 누가 대신 풀어주지 않는다. 누가 대신 풀어주길 기대해선 안 된다. 자, 화두는 나왔다.

 

그 화두를 중심으로 궁리하고 고민하자. 짧은 시간에 깨달으려고 하지 말자. 돈오점수(頓悟漸修)가 아니라, 점수돈오(漸修頓悟)다. 천천히 천천히 고민하고 실천하고 하는 과정에서 해결책은 하나하나 나오기 마련이니.  

 

덧글

 

여성주의자들 입장에서 이 소설을 읽으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다. 이 나라 교육 문제는 사회 구조에서 비롯됐는데, 마치 여성들이, 특히 엄마들이 일으킨 것처럼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엄마들의 극성스런 교육열은 사실 교육 문제의 일각에 불과하다. 더한 것은 제대로 살기 힘든 우리나라 사회 구조 아니겠는가. 그 점이 이 소설에서는 잘 표현되지 않았으니, 여성들, 특히 자녀를 둔 여성들에서 이 소설은 많이 거슬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적지와 왕국 알베르 카뮈 전집 8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의 제목을 단 작품을 찾으면 없다. 이 제목은 이 소설집의 전체적인 주제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니까 각각 다른 제목을 달고 독립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단편을 하나의 주제로 꿰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제목이다. 그러니 제목에 해당하는 소설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말 것.

 

또다시 카뮈다. 무언가 몽롱한 환상상태로 나를 빠뜨린다. 무어라 딱 정리할 수 없는, 그러나 자꾸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게 만드는 소설들. 이야기들. 카뮈의 이번 소설을 읽으며 자꾸만 카프카의 소설들이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도대체 이 몽환적인 분위기는 뭐지. 하나로 정리할 수 없는 이런 분위기로 소설이 전개되고 있는데, 카프카 소설에서 느끼는 그런, 어두움 속에서 헤매게 하는 그런 분위기를 또 느끼고 있으니...

 

그래도 이 작품집에는 내용이 명확한 것도 있다. 그냥 어둠 속에서 꿈속을 헤매듯 두손을 허우적 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도 되는 소설, 그러나 읽고 난 뒤 뭔가 생각하려면 또다시 헤매야 하는 그런 소설들.

 

제목에서 이 점을 너무도 잘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적지와 왕국" 번역자가 지금으로부터는 조금 먼 과거에 활약했던 분이라서 제목이 한자어로 되어 있는데, '적지'는 적의 영토가 아니라 유배지, 추방지 정도라고 하면 될 듯하다.

 

즉, 자신이 살고는 있지만 자신이 원하는 장소는 아닌 곳, 그곳이 바로 '적지'다. 그렇다면 '왕국'은? 바로 '적지'의 상대어다. 자신이 살고 있지는 않지만 살고 싶은 곳, 이상향, 유토피아 정도가 되는 곳, 그곳이 바로 '왕국'이다.

 

그렇다면 제목인 '적지와 왕국'은 비루한 현실에서 살아가고는 있지만 이상 세계를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삶이라는 뜻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서문에 이런 뜻이 잘 나와 있다. 서문을 직접 보자.

 

  이 단편집은 다음과 같은 6편의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간부>, <배교자>, <말없는 사람들>, <손님>, <요나>, <자라나는 돌>이 그것이다. 그러나 단 하나의 주제, 즉 '적지'의 문제가 내적독백에서부터 사실주의적인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여섯 가지의 서로 다른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사실 이 여섯 개의 이야기들은 비록 나중에 따로따로 다시 손질하고 다듬긴 했지만 원래는 단숨에 연이어 쓴 것들이다.

  이 책의 제목에서 또한 문제시되고 있는 '왕국'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들이 마침내 새로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되찾아야 할 자유롭고 벌거벗은 삶 같은 것과 일치한다. '적지'는 그것 나름대로 우리들에게 그런 삶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르쳐준다. 물론 우리가 그 '적지'에서 예속과 동시에 소유를 거부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지만.

(서문에서. 9-10쪽)    

 

'적지'에 대해서 절절히 느낄 수 있는 소설로는 아마도 첫번째 소설인 <간부>가 될 것 같고, 간부라고 해서 불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결혼해서 평범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 과연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래서 자신의 평범한 결혼생활이 '왕국'이 아니고 '적지'임을 생각하게 하는, 사막 한 복판에서 깨닫게 되는 그런 내용... 물론 명확이 내용이 잡히지는 않지만.

 

여기에 비하면 적지와 왕국이 함께 나오지만 결국 적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모습을 표현한 소설이 <손님>이 아닐까 싶은데...

 

인종차별을 거부하는 모습에서, 또 권력에 종속되어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모습에서 '적지'에서 '왕국'을 추구하는 모습을 찾을 수 있지만, 그가 놓아준 사람이 결국 사람들이 정한 길로 가는 것을 보고서는 '적지'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깨닫게 하는 그런 소설. 마찬가지로 <요나>도 그렇다. 세속적인 성공? 이것이 바로 '적지' 아닐까 하게 하는, 카뮈 소설치고는 참 쉽게 읽히는 그런 소설.

 

이 중에서 내 마음에 가장 아프게 들어온 소설은 <말없는 사람들>이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생각 차이, 입장 차이가 얼마나 큰지, 그들에게 과연 소통이 있는지... 왜 노동자들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 생각하게 하는. 우리의 지금 현실과 비교해도 결코 달라지지 않은, 그런 노동자들의 현실. 그러나 여기서 노동자들은 말없이 자본가에게 대항이라도 했지, 지금은 그도 불가능한 상태 아닌가 하는, 그런.

 

이런저런 이유로 여섯 편의 단편이 '지금-여기'의 삶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리라'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카뮈의 말처럼 그냥 현실에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 무언가 "찍"소리라도 내야 한다.

 

밟았는데 꿈틀거리지도 않는 지렁이는 너무 세게 밟혀 이미 죽었거나 아니면 그 고통을 당연스레 받아들이는 자기 의지가 없는 지렁이일 뿐이다. 꿈틀거려야 한다. 그래야 '적지'에서 '왕국'을 꿈꿀 수가 있고, '왕국'을 '적지'로 가져올 수가 있다.

 

그 점을 생각하게 한 소설들이다. 카뮈, 읽을수록 잘 모르겠지만, 읽을수록 왠지 매력있게 다가온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장소] 2016-09-08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책 저도 처음이네요! 저장해둬야겠어요~^^

kinye91 2016-09-08 08:27   좋아요 1 | URL
저도 요즘 책세상에서 나온 김화영 번역의 카뮈 전집을 읽고 있어서 읽게 됐어요. 카뮈 작품으로는 우리나라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품인데, 저는 좋게 읽었어요.

[그장소] 2016-09-08 09:08   좋아요 0 | URL
책세상 에서 나온 카뮈는 대부분 다 본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