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살리는 순환을 멈춘 똥


똥을 보면 건강을 안다고 했는데

똥을 본 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변기에 앉아 온갖 힘을 다 주어

몸 속에서 밖으로 내보내기만 하고

밖에 나온 똥을 내 눈으로 다시 보며

이별의 말을 한 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내 몸에 들어온 목숨들이

내 목숨을 살리고

다시 다른 목숨을 살리려

변신해 밖으로 나오는데

이제는 갈 곳이 없어

오로지 버려질 뿐

새 생명을 찾아 여행을 떠나지 못하고

그냥 쓰레기가 되는 똥

순환이 멈춘 시대

이런 시대

아무 거나 막 집어넣어

버리고 마는 시대

순환이 멈춘 시대

윤회를, 천국을 믿지 못하는 시대

현재를 막 살아가는 시대

미래를 알지 못하기에

순환을 믿지 못하기게

그렇게 살아가는 시대

변기에 차 있는 똥을 보며

순환이 멈춘 우리 삶을 생각하는

더 이상 강아지똥˚은 없는 시대

순환이 멈춘 시대

 

 

˚강아지똥 : 권정생 선생의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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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촛불과 시민권력"

 

  이번호 기획 제목이다.

 

  작년에 시작된 촛불이 아직도 꺼지지 않았다. 이 말은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냥 정치권은 지지부진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렇다고 백가쟁명이 시작되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 나물에 그 밥인 형국이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언론의 역할이 크다.

 

  '기레기'라고 비판받는 언론이 정신을 차렸는가 싶었는데, 아닌가 보다. 여전히 자기들 입맛에 맞는 일들만 다루고 있으니.

 

  이런 언론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 그렇다고 언론을 무시할 수도 없는데, 그나마 언론에서 이 촛불 정국을 다뤄주는 것도 시민들의 힘이 아닌가 한다. 시민들이 더 많은 논의들을 주장한다면 '기레기' 답게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고 시민들의 논의를 다루기 시작할테니까.

 

  언론이 다뤄주길 기다리기 전에, 시민들은 이제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이미 논의를 시작했다. 그런 목소리들을 촛불 속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다만 주류 언론에서 다루지 않고 있을 뿐이다.

 

  어떤 소리들이 나오는지 궁금하다면 이번 녹색평론 152호를 보면 된다. 녹색평론은 정치적 사건을 하나하나 쫓아가기보다는, 그런 사건들 속에서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를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현장성을 살리되 현장에만 매몰되지 않고 미래를 제시하는 논의를 시작하는 것, 그것이 '녹색평론'이 보여주고 있는 자세다. 그러니 이런 촛불정국에서 '녹색평론'은 소중한 언론의 역할을 하고, 시민들의 논의를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역할을 한다.

 

  대표적으로 녹색평론의 발행인인 김종철의 글에서 이런 구절을 만날 수 있다.

 

  '선거라는 것은 조금만 깊이 생각해도 알 수 있듯이 본시 그 한계가 명확하다. 즉, 선거판에서는 거의 언제나 명망가나 재산가 혹은 그들의 비호와 지원을 받는 이른바 특권적인 '엘리트'들이 승자가 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선거란 본질적으로 기득권층이 계속해서 집권하도록 돕는 장치, 다시 말해서 기득권층끼리 돌고 돌면서 권력을 '세습'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매우 편리한 장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8쪽

 

  그러니 이번 촛불정국에서 단지 대통령 선거제도를 바꾸는 문제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람을 하나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선거제도를 바꿀 수 있도록 시민들의 논의가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정치권의 기득권들, 국회의원들을 뽑는 선거제도가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늘 그 나물에 그 밥이 되어 버린다. 지금은 절호의 기회다. 근본을 바꿀 수 있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시 김종철의 글을 보자.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즉, 시민들이 상시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적인 틀을 만들어, 기성의 정치가들이 민중의 의지를 정당하게 대변하는 정치를 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한 새로운 제도로 지금까지 나온 아이디어 중 가장 합리적인 것이 '시민의회(혹은 '시민주권회의')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시민의회는 전국의 평범한 시민들 중 (제비뽑기에 의해) 무작위로 뽑힌 대표자들이 자유로운 토론과 숙의가 가능한 규모의 회의체를 구성하여, 거기서 전문가들의 조력을 받아서 국가나 지방의 주요 현안을 의논·결정하여 국회와 정부로 하여금 이 결정을 수용하게 만드는 전형적인 '숙의민주주의'적 제도이다.' 11쪽.

 

  자, 이제는 이런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언론들도 이런 논의를 다루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힘이 더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기레기'들이 움직인다. 그들은 권력의 냄새를 너무도 잘 맡으므로. (올바른 언론 생활을 하려는 기자들에게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까지 그들의 모습은 그렇게 많이 바뀌지 않았다. 주류 언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민의회와 더불어 국회의원 선거법을 고칠 수 있어야 한다. 헌법 개정을 비롯한 선거법 개정이 바로 국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시민의회'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함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런 논의에 자료를 제공해주는 것이 하승수의 글 '미완의 시민혁명은 이제 그만'과 김상준의 글 '시민의회, 왜 필요한가'이다.

 

  여기에 우리는 '헌법'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아니 헌법이 우리 생활에서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는 글, 김제동과 이진순의 대담 '우리에게 헌법은 무엇인가' 역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더 많은 글들이 있지만, 지금 정국에서 시급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정치개혁에 관한 것들... 그것에 관한 논의들이 백가쟁명 식으로 나와야 하고, 그것들이 공유되고 토론되고 토의되면서 합의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

 

  언론들이 다루지 않고 있는 그것을 이번 녹색평론에서는 잘 다뤄주고 있다. 물론 우리 생활을 바꿀 수 있는 일상적인 실천도 물론 이야기하고.

 

촛불이 횃불이 되기 위해서는 녹색평론에서 제시한 내용들, 시민들의 입에서 시민들의 행동으로, 시민들의 행동에서 하나의 제도가 되어야 한다. 그 점을 생각하게 해준 녹색평론 152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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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에로스
신철하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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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참... '노자와 에로스'라니. 하긴 이 저자의 이전 책 제목이 '사랑의 파문'이었지. 그것도 역시 노자에 관한 책이었는데.

 

'노자'하면 늙은 사람이 생각난다. 그리고 '에로스'하면 젊은 사람이 생각나고. 세상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과 이제 갓 세상에 진출한 산전수전을 겪어야 하는 존재를 하나로 묶어 놓았다.

 

그렇다면 이 책은 '노자'를 읽는데 '에로스'를 중심으로 읽으라는 말이렷다. '사랑의 파문'에서도 그런 주장을 했는데,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주석을 달았다.

 

'도덕경' 짧막한 글에 얼마나 많은 해석이 달렸는지... 어떤 사람은 노자를 굉장한 보수주의자로, 어떤 사람은 개혁주의자로 볼 정도로 노자 해석에는 상당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는데, 이 책은 다시 노자의 '도덕경'을 에로스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고 '에로스'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도덕경'의 밑바탕이 '에로스'를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이고, 이 책에서 주석을 달고 해설을 할 때 주로 나오는 것은 바로 '정치'다.

 

이 정치를 이야기하는데 '에로스'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 '에로스'라면 이상하게 야한 쪽으로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에로스'를 '사랑'이라고 하자. 그리고 '사랑'은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가는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다.

 

'사랑'이 없는 사회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우리가 기계 사회를 두려워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사랑'이 거세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만 해도 그 사회에서는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매뉴얼화된 프로그램만 존재할 뿐이다. '사랑'은 원시시대에 존재했던 대상일 뿐이다. 그런 '사랑'이 거세된 사회, 그것을 헉슬리는 '디스토피아'라고 생각했던 것 아닌가.

 

우리가 정치에서 '사랑'을 빠뜨리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란 사람들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데 필요한 어떤 관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 맺기에 당연히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왜 '에로스'인가? 흔히 노자하면 무위자연을 주장한 사람이라고 하니, 그의 사랑은 육체적인 관점에서 더 많이 언급되는 '에로스'가 아니라 정신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아가페'가 아니라 '에로스'다. 분명 '노자와 에로스'다. 육체적인 사랑에서 시작을 한다. 아니 육체를 떠난 사랑은 너무도 추상적이다. 그런 사랑에 대해서 일반인들에게 이야기를 한다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도덕경'을 일반인들이 잘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노자 역시 춘추전국시대를 살았던 사람, 그리고 그 어지러운 세상에서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던 사람. 그 사람이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는데 어려운 말로만 하면 과연 누가 알아들을 수 있었겠는가.

 

이미 한문에서 많이 멀어진 우리에게야 '도덕경'의 말들이 추상적인 말들에 불과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살아있는 말들의 경연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최근 신약성서를 말할 때 예수의 말들은 당시 민중의 말들이었다고, 민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을 했다고, 그래서 성서에 나오는 비유들은 당시 민중들에겐 매우 친숙한 표현들이었을 거라고.

 

이것을 노자에게도 적용시켜 보면 당시 사람들이, - 그래 민중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공부를 좀 한 사람이라고 하자, 당시에는 사람들을 몇 부류로 나누었고, 공부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했을테니 - 알아들을 수 있는,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뼉을 칠 수 있는 표현들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도덕경'에 나오는 사랑이 '아가페'가 아니고 '에로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에게 친숙한 사랑, 무언가 마음에 딱 와닿는 사랑, 그것은 바로 '에로스'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정치나 국가를 설명하는데 사랑하는 두 사람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얼마나 적절한 비유가 되겠는가. 서로 사랑하는 사람, 이 사람들은 상대를 위해 무엇을 할까를 고민한다. 그리고 실행한다. 결코 자랑하지 않고 드러내려 하지 않고.

 

또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여도 바로 내치거나 싸우지 않는다. 무언가 한 번 더 생각하고 돌려서 말하려고 한다. 상대방을 내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함께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내 맘대로만 하지 않고 늘 상대방을 고려하면서 행동하는 것.

 

절대로 티내지 않는것, 생색내지 않는 것. 앞에서보다는 뒤에서 상대를 위해 행하는 것, 상대를 위해 자신의 마음을 활짝 여는 것, 즉 내 맘에 상대를 채우기 위해 비워 놓는 것.

 

그런 사랑으로 예를 들어 정치를, 국가를 이야기한다고 보면, 쉽게 와 닿는다. 정치란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는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

 

'도덕경'에 여성성이 많이 나오는데, 당연하다. 궁극의 사랑으로 어머니의 사랑만큼 크고 넓고 깊은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낳고 기르고 보호하는 것, 여성성. 그것이 사랑이고, 그런 사랑을 '에로스'라는 실체하는 두 육체간의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나라 정치는?

 

천박하다고 '에로스'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슨 고상한 체하면서 '아가페'를 이야기한다. 결코 그 단계에까지 가지 않았으면서. 뒤에서보다는 앞에서 이야기하길 즐긴다. 자신이 행한 것들이 꼭 드러나야 한다.

 

부드러움보다는 강함을 내세워야 한다. 그래야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 있으니까. 지금 대의민주주의, 즉 선거제도에서는 이래야만 공천을 받고 당선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지금 우리나라 정치판은 '노자와 에로스'와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결국 무위의 정치가 아니라 인위의 정치, 부드러움의 정치가 아니라 강함의 정치, 여성성의 정치가 아니라 남성성의 정치가 판치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저자는 다시 노자를 우리에게 불러온다. 그것도 '에로스'라는 말과 함께. '도덕경' 주석이라고 하지만 도덕경의 내용을 한문 원문 그대로 번역을 하지 않았다. 저자가 '도덕경'의 내용을 하나로 꿰고 거기에 맞게 해석을 했다. 그래서 한문 원문을 애써 번역하며 읽으려 하지 않아도 된다. 저자의 해석을 읽으며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단지 노자에게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노자를 현실 정치로 끌어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는 어떤 정치가를 선택해야 하는지, 더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면서 읽으면 된다.

 

이것이 이 책을 읽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지금 우리나라 정치판과 맞물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너무도 고맙다. 이런 좋은 책을 보내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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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쓴웃음이 나오는 날들이다. 세상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도 정도껏 가려야지, 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늘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 말들이 날아다니고 있다.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라는 것이 어째 이리도 못났을까. 배움이 남들을 위하고 사회를 위해 이루어지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루어졌으니...

 

  그들로 인해 세상엔 즐거운 웃음이 아닌 쓴웃음들만이 판치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런 쓴웃음만 짓고 있을 수는 없다. 이런 상황을 반전시키는 웃음이 필요하다.

 

웃음으로 무시해버리는 것, 너희는 그렇게 사니, 난 이렇게 산다고 가볍게 웃음으로 치워버리는 것. 그래 이렇게 어둡고 무거운 세상에서 또 무겁고 어둡게 대응할 필요는 없지. 가볍게 웃음으로 탁, 치워버릴 수도 있어야지.

 

이환천의 문학살롱을 읽은 이유도 그렇다. 가볍게 웃고 치워버릴 수 있기 위해서. 책 표지에 '시가 아니라고 한다면 순순히 인정하겠다'고 되어 있다.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고 여러 사람이 본 내용을 책으로 펴낸 것이니. 아마도 시인들이 본다면 이건 시가 아니야라고 할 수도 있겠다. 시인이 아닌 사람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거고.

 

이런 글은 나도 쓰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그렇다면 성공이다.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을 써서 사람들을 미소짓게 하고 있으니.

 

단지 미소만 짓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웃음 속에서는 촌철살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웃음으로 사회가 지닌 무거움을 가볍게 하는 것. 웃음으로 사회가 지닌 어두움을 밝게 하는 것.

 

가령 이런 글... 시라고 해도 좋고.

 

직장인

 

지금처럼

일할 거면

 

어렸을 때

존나 놀걸  60쪽

 

일에 허덕거리는 직장인들의 애환. 그러나 웃음으로 가볍게 치기. 이런 시들이 많이 있다. 그냥 웃으며 넘어가도 좋을 시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 사회의 뒷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는 시들.

 

이 웃음으로 그치지 않고 사회의 어둡고 무거운 면을 인식할 것. 그리고 그것에 빠지지 않고 웃음으로 그것을 물리칠 것.

 

좀더 밝은 세상을 웃음으로 만들어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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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7-01-08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inye91 님 덕분에 좋은 책 하나 더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kinye91 2017-01-08 11:58   좋아요 0 | URL
같은 책을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도 제겐 행복입니다. 감사합니다.
 
레미제라블 5 - 완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5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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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도 긴 소설의 끝이다. 5부는 장발장이다. 드디어 우리의 주인공이 제목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이제 자신이 원하던 일을 이룬다.

 

양심을 지키는 일, 자신에게 거짓이 없는 삶. 다른 사람을 속이며 살기는 쉽지만 자신을 속이며 살기는 힘들다.

 

장발장 역시 마찬가지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을 코제트를 위해서 고백을 한다. 자신의 양심을 속일 수 없었다는 것.

 

여기에 마리우스의 태도는 장발장을 배척한다. 젊은 시절 단 한 번의 실수가 영원히 죄수라는 낙인을 찍는 것. 얼마나 잔인한 일이냐.

 

사람은 실수를 한다. 신이 아니기에. 그러나 그 실수를 바로잡는 것도 바로 인간이다. 실수가 영원히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용서를 받지 못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용서는 신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의 영역이다. 그런데도 장발장은 그렇게 고귀한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받는데까지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용서의 모습이 바로 인간의 영역으로 내려와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자베르의 자살이다. 그는 자신의 원칙이 무너지는 모습을 본다. 인간이 만든 법률과 신의 영역인 사랑이 충돌을 하고, 결국 인간의 법률이 완전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 그가 자신의 삶을 끝낼 수밖에.

 

용서가 마지막까지 신의 영역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용서는 바로 인간의 삶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것. 그런 용서받을 수 있는 행위를 한 사람을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는 것. 소설은 그 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장발장은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에서야 진실을 알게 된 마리우스와 코제트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 사실 코제트는 장발장을 늘 인정하고 사랑하고 있었다. 다만, 마리우스에 대한 사랑에 장발장이 뒤로 밀려가고 있었을 뿐. 그것은 자연의 이치이자, 사람살이의 기본이다 - 자신에게서 비로소 용서를 받게 된다.

 

행복한 미소를 띠고 죽는 것, 공자가 말한 오복 중에 고종명(考終命)이라는 것이 있는데, 장발장은 이런 죽음을 맞이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제 미리엘 주교의 곁에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5부에서는 마리우스를 구출하고, 자베르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자살을 하게 되고, 악한인 테나르디에는 여전히 악한으로 살아가게 되고,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행복한 결혼, 그리고 장발장에 대한 진실의 밝혀짐과 그의 죽음으로 끝난다.

 

사회의 맨 밑바닥으로 추락한 인간이 영혼의 맨 위 단계로 상승하는 과정으로 소설이 전개되었다고 보면 된다. 작가는 이 5부에서 자신이 이 소설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직접 드러내고 있다.

 

독자가 지금 눈 아래에 펴 놓고 있는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적으로나 국부적으로나, 중단이나 예외 또는 결점들이 무엇이든 간에, 악에서 선으로, 불의에서 정의로, 거짓에서 진실로, 밤에서 낮으로, 욕망에서 양심으로, 부패에서 생명으로, 동물적인 것에서 의무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허무에서 신으로의 행진이다. 출발점은 물질, 도착점은 영혼. 시초에는 칠두사, 종국에는 천사. 128쪽.

 

이렇게 장발장이라는 한 사람의 삶과 그가 만나는 사람들과 그 사회를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한 영혼이 고귀해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삶을 산 사람은 결국 '용서'를 받게 된다. 그는 이 소설의 첫부분에 나오는 미리엘 주교처럼 고귀한 영혼을 지닌, 고귀한 삶을 산 사람이 된다.  

 

5부 장발장 : 1. 시가전 - 2. 거대한 해수의 내장 - 3. 진창, 그러나 넋 - 4. 탈선한 자베르 - 5. 손자와 할아버지 - 6. 뜬눈으로 새운 밤 - 7. 고배의 마지막 한 모금 - 8. 황혼의 쇠락 - 9. 마지막 어둠, 마지막 새벽

 

조금 아쉽게도 5권에 이르는 동안 차례에는 각 부의 이름만 나오지 작은 장들의 제목이 나오지 않는다. 차례에는 이런 작은 제목들을 보여주는 친절이 있었으면 하는데... 차례가 없으니 답답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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