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얼마나 욕심이 많으면 종양까지 갖고 있냐


몸에 종양이 있어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에

친구가 대뜸 한 말

내가 그렇게 욕심이 많았나

비워두어야 다른 것들이 살 수 있는데

욕심이 지나쳐 종양까지도 내게 머물러

담장을 치고 있나

불현듯

빈집 운동이 생각이 나고

비움이 이렇듯 채움이 될 수 있는 세상에

비우지 못해 안달이 나

다른 이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철책까지 두르는

아파트들을 보며

이들이 이렇게 비워두지 않고

제 욕심을 차리면

몸 속 종양과 무엇이 다를까하는 생각도 하고

몸에 깃든 세균들이

세들어 산다고 하는 어느 시인의 시를 떠올리고 (이은봉, '셋집')

비우지 못했기에

철책을 두른 종양이 몸에 자리를 잡은 것이 아닌가 하는

삶에 대한 반성


욕심을 비워야한다는, 그래야 삶이 채워진다는

그런 반성을 하게 한 몸 속 종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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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2 09: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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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2 11: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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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보르헤스 전집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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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을 펼쳤다가 조금 읽다가 다시 내려놓은 책인지 모른다.

 

도대체 무슨 소설이 이래? 하다가, 이건 소설도 아니다, 소설에 무슨 주가 더 많냐 하다가, 그만두자 하다가 그래도 보르헤스인데, 자꾸 인용이 되는 작가인데 한 권쯤은 아니 한 편쯤은 읽어야 하지 않나 하다가.

 

몇 년을 묵혀두었다가 다시 펼쳐 들고 읽어도 역시 모르겠다. 환상적 사실주의라고 하는데 마치 사실인 것처럼 진술을 하고 있지만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섞여 놓은 것이 보르헤스의 소설이라고 하는데 기본적인 지식이 없으니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 허구인지 알 수가 없다.

 

환상과 사실을 구분하기 힘드니... 참.

 

이 책에는 많은 단편들이 묶여 있는데, 이 단편집의 이름이 [픽션들]이다. 픽션이란 허구라는 뜻이니 이 소설들에서 나오는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들이 아무리 역사적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을 곧이 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에는 역사적 사실을 알아야 그것들이 어떻게 교묘하게 비틀어져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소설들이 대부분이고, 2부는 그래도 나름대로 사건이 있는 소설들이 제법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인물과 인물의 갈등이 잘 드러나 있다기보다는, 인물과 인물의 갈등이 있더라도 그것이 묘하게 표현되고 있어서 안개 속을 헤매듯 흐릿한 이미지들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그나마 그런 갈등이 잘 드러나 있는 소설이 '죽음과 나침반' 정도 또는 '칼의 형상' 정도 된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1부의 소설을 읽다가 혹시 몇백억 년이 지나서 지금의 역사가 사라지고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존재들이 이 소설을 발견한다면, 이것을 소설로 볼까 역사로 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들은 이 소설을 중심으로 역사를 재구성하려고 하지 않을까? 그렇게 재구성한 역사를 마치 정통한 역사인 양 가르치고 배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만큼 모르는 상태에서 읽으면 역사인지 허구인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1부에 실린 소설 제목 몇 개를 보자.

 

'틀뢴, 우크발,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바빌로니아의 복권', '바벨의 도서관'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 소설을 읽게 되면 무슨 고고학적 사실을 추구하는 연구서 정도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이것들이 분명 허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소설이니까. 소설이라고 알고 읽기 때문이다.

 

그다지 마음에는 와닿지 않지만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다 읽었다는 점, 읽어가다 보니 자연스레 속도가 붙고 흥미도 생긴다는 점. 무엇이라고 딱 정리를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리 못 읽을 소설도 아니라는 점.

 

특히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서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과 그것을 가지고 사고를 한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고 하는 점, 우리가 세세한 점을 기억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통찰에 이르기 위해서는 기억만으로는 안 된다는 점.

 

사실들을 꿰는 일반화, 개념화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 소설을 통해서 작가가 직접 주장하고 있고, 이는 역사를 공부할 때 역사적 사실들을 암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사실들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어떤 것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주기도 했고...

 

역시 소설을 읽을 때 명심해야 할 것들은 지엽적인 사건, 사실들 하나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고.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논고'에서는 겉으로 드러난 면만을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배신자와 영웅이 같은 인물일 수도 있다는 점, 영웅에게서 어쩌면 우리를 배신하는 배신자의 모습을 볼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도 있었다.

 

그래도 역시 보르헤스의 소설은 어렵다. 다시 읽어도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서양의 문학과 역사, 지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어느 부분이 역사적 사실을 비틀었는지를 알고 읽으면 보르헤스의 소설이 재미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비록 '기억의 천재 푸네스'처럼 모든 것을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유럽의 문화, 문학, 역사, 지리를 안다면 이 소설들 속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많은 요소들이 한 줄로 꿰어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한다.

 

아직은 그렇지 못하기에 그의 소설은 어렵다. 재미를 느끼기도 힘들다. 그러나 주를 무시하고 그냥 본문만 소설이지 하면서 읽으면 그리 못 읽을 소설도 아니다. 이해나 해석은 뒤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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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에 실린 시들이 밝지 않다. 어둡다. 낮다. 축축한 느낌을 준다. 무언가 손에 잡히지는 않으나 이상하게도 손에 닿은 듯한 느낌.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과 함께 하지 못하는 상태, 시의 해설에서는 이를 파도에 비교했는데, 밀고 당기고 결국은 밀려나거나 함께 가거나 해야 하지만, 여기에 남겨져 있는 상황에 대한 시들이 더 많다.

 

  사랑을 하기에도 힘든 세상이 되었나 보다. 사랑이 개인의 의지도 작용하지만 사회 상황도 작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꼭 개인의 일로만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 시집에 나온 시들 중에서 사랑, 만남을 이야기하는 시들도 이렇게 온전히 함께 갈 수 없는 상황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시집의 분위기는 왠지 낮은 곳에서 어두운 상태로 작고 힘없는 존재들을 노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존재들을 잊지 않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할까. '파도'란 시를 읽을 때는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광장에 모인 인파 속에서 고독을 느끼는, 그래서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밀려나는 힘없는 존재, 실명한 아내와 함께 하는 작고 여린 남자의 이야기 속에서 어떤 슬픔. 기쁨 속에서도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어둠 속에서도 빛을 전해주는 존재가 있음을, 그들이 있음에 어쩌면 빛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우리가 사회생활을 할 때 이들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되고, 이들의 존재가 우리가 나아갈 길을 알려준다는 생각을 하게 된 시, '검은 물'

 

검은 물

 

칼갈이 부부가 나타났다

남자가 한번, 여자가 한번 칼 갈라고 외치는 소리는

두어 번쯤 간절히 기다렸던 소리

칼갈이 부부를 불러 애써 갈 일도 없는 칼 하나를 내미는데

사내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이 들어서기엔 좁은 욕실 바닥에 나란히 앉아

칼을 갈다 멈추는 남편 손께로 물을 끼얹어주며

행여 손이라도 다칠세라 시선을 떼지 않는 여인

 

서걱서걱 칼 가는 소리가 커피를 끓인다

칼을 갈고 나오는 부부에게 망설이던 커피를 권하자 아내가 하는 소리

이 사람은 검은 물이라고 안 먹어요

그 소리에 커피를 물리고 꿀물을 내놓으니

이사람 검은 색밖에 몰라 그런다며,

태어나 한번도 다른 색깔을 본 적 없어 지긋지긋해한다며 남편 손에 꿀물을 쥐어준다

한번도 검다고 생각한 적 없는 그것은 검었다

그들이 돌아가고 사내의 어둠이 갈아놓은 칼에 눈을 맞추다가 눈을 베인다

집 안 가득 떠다니는 지옥들마저 베어낼 것만 같다

불을 켜지 않았다

칼갈이 부부가 집에 다녀갔다

 

이병률, 바람의 사생활, 창비. 2012년 초판 13쇄. 100-101쪽.

 

눈이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인하여 다른 세상을 보게 되는 것, 세상을 바라볼 때 강자의 눈이 아니라 가장 약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세상을 살아가도록 한다면, 그렇게 사회를 구성하도록 한다면 그 세상엔 지옥은 없다.

 

눈 먼 사람이 간 칼로 '집 안의 지옥들마저 베어낼 것만 같다'는 말,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사회라면, 그런 사회가 된다면 지옥은 없다. 그것을 베어내는 것은 높은 곳에 있는 사람, 강한 사람의 관점이 아니다.

 

이 시집에서 내게는 이 시가 가장 따뜻했다. 다른 시들이 이상하게 어긋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 이 시에서는 따스하게 품어주는 모습이 그려졌다고나 할까.

 

엄혹한 시절이다. 세상의 생명들이 인위적으로 죽어나가고 있는 세상,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자리는 높고 강한 자리가 아니라 낮고 약한 자리, 그곳에 서서 가장 작고 약한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들이 웃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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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0 14: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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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0 15: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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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 1 - 영혼과 꿈을 그린 40인의 화가들
이성희 지음 / 컬처라인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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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림을 보며 분석을 하기보다는 마음으로 느끼는 편이 더 좋다. 그림에 담긴 화가의 화풍이라든지, 색채, 표현 기법 등을 따지기보다는 그냥 눈에 들어오는 대로 마음이 받아들이도록, 그 마음을 오래 지니도록 하는 편이 더 좋다.

 

그림을 이성이 작동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감정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편이 더 좋다. 마음에 어떤 울림을 주는 그림을 만났을 때 그 감동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그 그림에서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림의 세세한 부분은 기억에서 사라졌을지라도 그림이 마음을 울렸던 그 순간에 대한 마음의 울림만은 지속적으로 남아 있다.

 

한 편의 시도 마찬가지다. 시를 온갖 표현법으로 주제로 분석하기보다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선은 마음을 울리는 시, 그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자꾸만 입에서 곱씹게 되는 시, 곱씹을수록 마음을 울리는 시, 그런 시를 한 편 이상 제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이다.

 

이 책은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라고 제목을 붙였다. 제목에서 이미 알 수 있다. 문학과 미술의 만남이라는 사실을.

 

그림에서 시를, 다른 문학작품을 쉽게 만날 수 있음을, 그 만남의 감동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최근에 읽는 미술관련 책들이 문학과의 관련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책들인데, 이 책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만큼 미술과 문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 또한 그런 관계를 느낌을 잘 살려서 전해주고 있다.

 

직접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보지 않더라도 저자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이성보다는 감성이 먼저 움직임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이 책을 읽어가면서 나는 자꾸 김춘수의 시 가운데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을 떠올렸다. 샤갈의 그림을 이 책에서 다루기도 하지만, 이 시는 다루지 않는데, 그럼에도 왜 자꾸 김춘수의 이 시가 떠올랐을까.

 

그것은 바로 문학과 미술이 일 대 일로 대응하지 않고 서로 창조와 변용의 과정을 거친다는 데 있다. 샤갈의 '나와 마을'이라는 그림에는 눈이 오지 않는다. 눈은 보이지도 않는데... 김춘수는 샤갈의 그림에서 눈을 보고 있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를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김춘수 시선집,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문학세계사, 1993년 초판. 60쪽.

 

샤갈의 그림이 포근함을 전해준다면, 무언가 환상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마음이 편해지는 그런 느낌을, 그래서 집에 걸어두고 보고 싶어지는, 마음이 우울할 때 한 번씩 들여다보면 마음이 풀리는 그런 그림인데...

 

삼월에 새롭게 시작할 때 마치 그를 축복하듯이 눈이 내린다. 이 때 내리는 눈은 소담스럽다는 표현을 할 수밖에 없다.

 

삼월에 내리는 눈이니 폭설은 아닐 것이고, 눈보라로 휘날리지도 않을 것이다. 새로운 시작을 하게 하는데, 그 시작점에서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게 하고 있다.

 

삼월에 내리는 눈이라면 차가운 느낌을 줄 것 같으나 이 시에서는 그런 차가운 느낌을 받기 힘들다. 오히려 출발에 앞서 잠시 쉬어가라고 사람들을 방 안으로 모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방 안에서 오손도손 모여 서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 그런 모습이 바로 샤갈의 마을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림과 시 역시 이렇게 사람들을 따스하게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고, 이렇게 시와 그림이 함께 마음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런 감상을 할 수 있는 여유, 동양의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그 여유를 이 책에서 역시 만날 수 있다.

 

이성에 호소하기보다는 우리의 감성에 호소하는 이 글의 글쓰기가 더 마음을 울리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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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를 수 있는 말이 하나 있다. 종북좌파.

 

  이 말이면 하는 사람은 우위에 서고, 듣는 사람은 밑에 서서 자기 변명을 하기에 바쁘다.

 

  상대방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데 이 말보다 좋은 말은 없다. 이 말은 우리에게 태풍을 일으킨다. 특히 정치권에서는 더더욱.

 

  그런데 왜 이 말이 이처럼 태풍의 위력을 발휘할까? 분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분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분단으로 인한 전쟁을 겪었기 때문이다. 전쟁을 겪고 평화협정을 맺지 못하고 휴전협정만 맺었기 때문이다.

 

휴전은 언제는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잠시 전쟁을 쉬고 있을 뿐이니까. 이런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어가야 전쟁이라는 태풍을 면할 수가 있다.

 

남북이 군사적으로 긴장상태에 있고, 해마다 남북 양쪽 모두 대대적인 군사훈련을 하는 상황이고, 젊은이들이 청춘을 군대에서 보내야 하는 상태이니, '종북좌파'라는 말은 상대를 옭아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말이다.

 

남북 경제협력 사업도 물 건너가고, 이제는 군사적 긴장이 점점 더 고조되어 가고 있는 상황인데, 신혜정 시집 "라면의 정치학"을 읽다가 이 시를 발견하고 시인의 표현에 감탄하고 말았다.

 

'평화의 눈'이라는 시인데, 이 시를 읽으며 자꾸만 '태풍의 눈'이라고 읽게 되었으니 말이다. 태풍의 눈, 잠시 평화로운 상태지만 곧 태풍에 휩싸이게 되는 현실...

 

태풍의 눈에 들었다고 태풍이 물러갔다고 안심하면 안 되는데... 우리나라 용산에 있는 미군기지를 이 태풍의 눈에 비유해 '평화의 눈'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태풍의 눈이 진정한 평화가 아니듯이 평화의 눈 역시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일시적인 멈춤 상태에 불과하다.

 

이 일시적인 멈춤을 영원한 평화로 만드는 일은 바로 태풍이 지나가게 해야 한다. 태풍이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영원한 평화가 온다. 그게 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태풍의 눈'에 머물뿐이다.

 

시를 보자.

 

평화의 눈 1

 

살상무기를 제조하는 자들이

평화를 이야기하는 이상한 시대

 

용산 미군기지 안을 보면 이해가 간다

 

그곳은 평화의 눈

 

모든 평화의 중심에 핀 꽃

 

이국의 개들이 사람과 산책을 즐기고

중성화 수술을 마친 고양이들이 한가롭게

창가의 볕을 즐기는 곳

 

사람들에겐 주님의 평화가 임재하는 곳

 

광장의 촛불시위를

뉴욕타임즈에서 읽으며

먼 나라 이야기하듯

하품처럼 넘기는 곳

 

그곳에,

평화가 있다

 

신혜정, 라면의 정치학, 북인, 2009년. 18-19쪽.   

 

그곳에 있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다. 마치 태풍의 눈처럼. 평화는 미군에게서 오지 않는다. 신동엽 시인의 시 '봄은'에서 말한 것처럼 평화는, 통일은 바로 우리에게서 와야 한다.

 

남과 북이 서로를 믿고 협력하고 평화를 만들어갈 때 진정한 평화가 오고, 진정한 평화가 와야 '종북좌파'란 말이 전가의 보도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역시 일시적인 평화의 눈에 머물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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