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류가 좋다 

  멀리 보고 오래 참고 끝까지 가는 거다'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이다. 하류... 흘러 흘러 도달하는 곳. 아니 도달하는 마지막 지점이 아니라 온갖 곳에서 온 물들이 모여 새로운 물, 더 넓은 바다로 나아가는 곳.


  그곳은 하나이지만 하나가 아니다. 다른 존재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 그곳까지 오기 위해 수많은 곳들을 거쳐야 했던 물들이, 다른 존재들이 모였다가 다시 길을 나서는 곳.


  하류에 도달하기 위해 멀리 보고, 오래 참고, 끝까지 와야 했던 존재들. 그런 소중한 존재들.


그런 존재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시를 읽으며 하류의 고요함, 풍성함, 다양함, 그리고 잠시 휴식을 생각한다. 고단한 여정에 쉼을 주는 곳이 하류라는 생각.


이 하류를 좋아하는 시인. 그런 시인이기에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짧은 시들 속에서 생각지도 못한 표현을 만나 감탄을 하곤 한다.


대나무에 관한 시 중에 '대밭일기'라는 시가 있는데, 우리가 쑥쑥 자라는 모양을 '우후죽순(雨後竹筍)'이라고 표현한다. 비가 그친 뒤에 죽순이 쑥쑥 자라난 모습을 표현하는데... 


이 시에서 시인은 '비 갠 뒤 / 대밭 속 / .../ 죽순이 올라 있다 / ... / 竹竹'(29쪽)'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죽죽 자란다를 한자어 대 죽(竹)자를 써서 죽죽(竹竹)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소리내어 읽으면 '쭉쭉'으로 읽히기도 하고, 하하 죽순이 올라오는 모양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표현이 참신한 시도 있지만, 지금 같은 겨울, 눈 내리는 겨울에 눈사람이 빠질 수야 없지. 시인은 그러한 눈사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읽으면서 빙그레 미소가 지어진다.


미소展


  아이들이 눈 오시는 날을 맞아 눈사람을 만드실 때 마침내 막대기를 모셔와 입을 붙여주시니 방긋 웃으시어 햇볕도나 좋은 날에 사그리로 녹아서 입적하시느니


서정춘, 하류, 도서출판b. 2020년. 10쪽.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시. 이런 시들을 만날 수 있는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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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다시 읽기
권진관 외 지음 / 돌베개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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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다시 읽기다. 함께 읽기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온 책. 웬만하면 신영복 선생의 책은 다 읽어보려 하고 있다. 오래 전에 녹색평론에 실린 '나의 대학시절'이란 글이 신영복 선생을 처음 만나게 했고, '청구회 추억'으로 신영복 선생의 글을 거의 다 찾아 읽게 되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그 후에 읽게 되었는데, 이어서 '나무야 나무야'를 읽으며 이토록 쉽게 자신의 생각을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는 글쓰기라니, [강의]와 [담론] 역시 감탄하면서 읽었다.


그런 선생이 더 우리 곁에 있어야 했는데, 돌아가신 지 벌써 10년이 넘었으니... 선생은 갔지만 선생이 남긴 유산은 우리에게 남아 있다. 그래서 신영복 함께 읽기, 신영복 다시 읽기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읽기, 아니 계속 읽기를 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신영복 선생의 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화이부동이라는 말. 이 말을 명심해야 한다. 선생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화이부동이지 동이불화(同而不和)가 아니라고 했다.


즉 화(和)를 추구한다는 것은 똑같지 않다는 말이다. 똑같지 않기에 '관계'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관계맺기에 신경써야 한다. 즉 관계론이다. 신영복 선생이 존재론에서 나아가 관계론을 주장한 것은 바로 이 화이부동의 정신이다.


그렇다면 동이불화는 무엇인가? 바로 관계를 지우는 것이다. 동(同)을 추구한다는 말은 차이를 없애려 한다는 말, 이는 한 쪽을 다른 한 쪽이 흡수해버린다는 말이다. 여기에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일방적인 흡수일 뿐이다. 그러니 동의 논리는 중심의 논리다. 중심이 모든 것을 흡수하는 블랙홀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런 삶, 이런 사회는 행복할 수 없는 사회다. 다른 존재들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기 때문인데, 따라서 화(和)의 논리로 나아가야 한다고 신영복 선생은 주장했다고 한다.


화란 관계이고, 이는 거리를 인정한다는 뜻이고, 이 거리를 완전히 없애지 않고 함께하기 위해서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의 여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화는 어디서 실현되는가? 바로 변방이다. 변방은 하나로 뭉쳐진, 관계가 없는 일방이 아니라 다양한 존재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곳이다.


이런 변방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이러한 변화가 우리 사회를 조금씩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켜 왔다. 


하지만 과연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화의 논리보다는 동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배제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신영복 다시 읽기가 필요하다. 동의 논리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화의 논리가 우리 사회에 자리잡을 수 있을지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때가 지금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신영복 선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책 자체가 화의 논리를 실현하고 있다. 어느 하나로 신영복 선생을 규정하지 않고, 선생이 지녔던 다양한 모습을 각자의 분야에서 자신이 느낀 대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들이 알려주는 신영복 선생의 다양함을 인식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거기서 자신을 읽고 머리에서 가슴으로, 다시 발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신영복 다시 읽기 아니겠는가.


이 책에 실린 신영복 선생에 대한 글들을 몇 가지 말로 정리하면 '화이부동'과 '관계', 그리고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의 여행'과 '변방'이 될 것이다. 이 말들이 하나로 꿰어질 수 있음을.


이 말들을 '입장의 동일함'이라는 말로 꿰어보면, 중심으로 가려는 동의 논리를 부정하고, 다양한 관계들을 통해서 변방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실천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든다.


'입장의 동일함'은 동의 논리, 즉 같아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한다가 아니라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자신의 주장만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무언가를 함께 해나가는 더불어 손잡고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글들 속에 그간 알고 있었던 신영복 선생의 좋은 말들, 또 그의 글씨를 볼 수 있어서 좋기도 했지만, 지금 시대를 보는 눈을 갖추고 함께해야 함을 생각하게 하는 [신영복 다시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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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너머 예술 - 창을 품은 그림, 나를 비춘 풍경에 대하여
박소현 지음 / 문예춘추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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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한 단어로 창(窓)이라고 하는 것과 여기에 다른 단어인 문(門)을 붙여 창문(窓門)이라고 하는 것은 주는 느낌이 다르다. 창이라고만 하면 그냥 바라본다는, 뚜렷한 경계가 있고, 이 경계로 안과 밖이 나뉘어 있는 듯한 느낌, 드나들 수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창문이라고 하면 문이라는 말 때문에 안과 밖의 경계를 나누지만 서로 드나들 수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꼭 그렇게만 볼 필요는 없지만.


창문으로 드나드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창문으로는 많은 것들이 드나든다. 이 책에 창문의 유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 말 참 좋다는 생각을 했다.


'창의 영어 이름 'window'는 고대 스칸디나비아 말 'vindauga'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단어는 영어로 치면 'wind'와 'eye'의 합성어로, 바람의 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바람의 눈이라, 꽤 시적인 감성이다. 집의 구멍으로 바람이 들어오고, 그곳을 통해 밖을 내다볼 수 있기에 창문이 집의 눈과 같은 기능을 한다고 여긴 것 같다'(25쪽)고 하고 있는데, 바람의 눈이라 저자의 말대로 시적인 감성이 묻어나는 말이다.


이렇게 창문은 밖을 안으로 들이는 역할을 한다. 또 안에 있는 존재를 밖을 보게 만드는 역할도 한다. 문처럼 그곳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눈을 통해 세상을 보게 만든다. 


이런 역할을 하는 창을 예술에서는 어떻게 표현했을까? 저자는 예술, 특히 그림에서 창문이 그려진 그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총 3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는 '경계 위에 서서'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창은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 역할을 한다. 우리는 이러한 경계에 서서 밖을 보고, 이 경계를 통해 밖의 존재들이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빛과 그림자라고 해도 역시 창을 중심으로 구분이 된다. 그렇게 경계를 이루는 것, 그것이 창문이다.


그런데 그냥 경계를 그어 서로 오도가도 못하게 하지 않는다. 창은 안과 밖을 연결시켜 준다. 몸은 안에 있지만 마음은 밖으로 나아간다. 이곳에서 저곳을 추구하는 존재. 경계에 선 존재들이다. 


2부는 '창문 너머 빛이 이끄는 대로'라는 제목이다. 이제 창문 너머를 꿈꾼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한 곳에 머물게 하지 않고 움직이게 한다. 그렇게 창문이 있는 그림은 우리 자신을 보게 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생각하도록 한다.


이곳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다른 세계도 있다고. 자, 이 그림들을 보라고... 그림 속 인물들. 창문 앞에 있지만 이들은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이들이 보고 있는 세계를, 그림 속에는 비록 나타나 있지 않지만 우리는 상상을 통해서 그 세계를 본다. 그리고 그 세계를 통해 내가 살아가고자 하는 세상을 꿈꾼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나아간다.


3부는 '그렇게 활짝 열어 두었다'라고 한다. 창문은 열려 있을 때 바람을 안으로 들일 수 있다. 우리를 밖과 연결해준다. 밖을 직접 안으로 들이게 된다. 그리고 우리 역시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비록 몸이 창문을 통해서 나가지 않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영혼이 창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창은 밖과 안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밖과 안의 경계를 보여주지만, 밖과 안이 연결되어 있음을, 이 세계에서 저 세계를 언뜻 보고 더 나아갈 마음을 먹게 하는 것이 창문이다. 이렇게 창문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한 권의 책을 썼다. 


많은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이 책은 저자에게 또다른 창문 역할을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저자는 [창문 너머 예술]이라는 창문을 통해 세상과 소통을 하고, 우리 역시 이 책을 통해 저자 또 다른 예술, 그리고 세상과 연결되게 된다.


그림을 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이 나를 또다른 나와 또 다른 존재들과 연결해준다고 할까. 


낯선 작가들을 많이 만나게 해준 책이기도 한데 예술 작품 감상에 대한 저자의 이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예술을 감상하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그림에 빠져든 이유는~ 어떤 작품의 의미를 쫓아가면서 작가의 머릿속에 얽히고설킨 이야기들, 복잡한 감정들, 역사적인 맥락들, 그리고 숨겨진 비밀들을 발견하고 알아채는 그 과정이 꽤 흥분되고 보람찬 것이다.'(133쪽)


이렇게 그림은 저자에게 창문 역할을 했으니, 내게는 저자의 이 책이 그림을 보는 또 하나의 창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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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츠와프의 쥐들 : 병원 브로츠와프의 쥐들
로베르트 J. 슈미트 지음, 정보라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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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편이 카오스와 철창에 이어서 사건이 전개되는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하긴 읽지 않고 책이 출간된 순서를 생각하면, 그것도 지금까지는 세 권이 번역되었으니, 당연히 마지막 권이겠지 하고 생각할 수 있지.


한데 앞장을 넘기자 이런 말이 책에 있다. 소설 시작하기 전에... '이 책은 [브로츠와프의 쥐들:카오스] [브로츠와프의 쥐들:철창]의 세계관을 공유하지만 단독적인 서사로도 즐길 수 있습니다'라고 일러두기에 쓰여 있다.


어라, 그럼 이 편이 끝이 아니네... 첫부분을 보자마자 시간은 다시 사건 발생 당일로 돌아가 있다. 1963년 8월 9일 금요일 20시 27분부터 시작하니, 사건이 벌어진 지 약 1시간 정도 지난 뒤다. 끝은 1963년 8월 12일 월요일 19시 57분이니 [브로츠와프의 쥐들:철창]의 시간보다도 짧다. 그 소설에서 잠깐 언급한 장면이 이 편에서 펼쳐진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분명 [브로츠와프의 쥐들:철창]에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되기 시작하긴 했지만 소련군이 들어와 약탈하는 장면으로 끝나고, 그곳 시립동물원이 있는 큰 섬에서 아렌지코프스키 의사가 대책을 마련하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햐, 이거 다른 편이 있다면 번역이 되길 또 기다려야 하네 하는 아쉬움... 그렇지만 이번 편은 앞의 두 권과 달리 조금 짧다.


300쪽 조금 넘으니, 700-900쪽에 달하던 전편들과 달리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다. 물론 앞의 소설들도 속도감과 긴장감이 넘치지만 분량이 하루에 읽기에는 좀 많았는데, 이번 권은 하루 만에 읽을 수 있다.


아니, 하루 만에 읽어야 한다. 그래야 이 비극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철창]에서 교도소로 가는 도중에 병원을 지나가면서 그들은 문 앞에 붙어 있는 글을 읽게 된다. 


"들어오지 마시오. 

모두 죽었음." 


자, 이제 우리는 왜 이들이 이런 글을 붙였는지를 소설을 읽어가면서 알게 된다. 정신병원. 이곳 역시 격리 된다. 그리고 여기서 감염자가 발생한다. 최선을 다해 막으려 하지만 사소한 실수, 무관심 등이 겹쳐 좀비는 확산된다.


게다가 식량도 떨어져 가고, 간호사들과 위생사들 또 조리사들도 한 명 한 명 죽어나간다. 남은 사람은 수십 명의 환자들과 책임자인 니엠추크 과장뿐.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환자들을 살릴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의사로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환자들을 위하는 일이 될까?


이는 존엄사 문제와도 겹친다. 어떤 것이 환자를 위한 길일까? 니엠추크 과장은 '모든 의사가 지켜야 할 첫 번째 원칙은 '우선 해를 끼치지 말라'이다'(313쪽)는 철칙을 깨기로 한다.


그동안 그는 이 원칙을 지키려 애썼고, 비록 의식이 없는 환자,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환자라 하더라도 그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 쪽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의사도 간호사도 게다가 조리사와 식량도 없는 상태에서, 감염병은 확산되고 구조될 가망이 없는 상황에서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고통의 시간을 줄여주는 것뿐이었다'(313쪽)는 표현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는 환자들의 최후를 보지 못한다. 자신도 죽임을 당하기 때문인데... 죽임을 당하기까지 그와 병원관계자들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이 편에 담겨있다.


여기서 재앙이 닥쳤을 때 대응하는 사람들의 유형이 나타나는데, 겁을 먹고 무조건 도망치려는 사람과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끝까지 하는 사람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것도 자신들이 돌보아야 할 사람이 있을 때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특히 의사나 간호사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이 소설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 니엠추크 과장이 비록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지만 그가 지닌 책임의식, 재앙에서 도피하지 않고 끝까지 환자들을 돌보려는 마음은 진정한 의사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선의가 꼭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지는 않는다는 것, 재앙의 순간에서는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다는 것. 그런 일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간호사들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분노했던 것은 이러한 전세계적인 재난 상황에서 권력자들은 제 목숨 하나 건지려고 안전한 곳으로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피신했다는 점. 그 이후에 그들은 재앙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


지금까지 읽었던 세 권에서 재앙에 대응하는 사람들은 모두 '대리'였다. 책임자는 도망치고, 그 책임을 떠맡은 '대리'들이 문제를 헤쳐나가는 모습을 펼쳐보이고 있는데, 이는 작가가 당시 권력자들에 대하여 지니고 있는 의식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국민을 위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실질적인 위험의 순간에는 제 자신의 안위만을 먼저 생각하는 권력자들... 전쟁 통에 먼저 도망가버린 대통령을 만났던 적이 있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러한 권력자들의 모습은 비판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권력자들이 국민들을 내팽개치고 도망쳤지만 책임감 있는 사람들은 국민을 위해 남는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한다. 이런 사람들로 인해 재난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소설은 폴란드 좀비들을 통해 재난 상황에서 인간들이 대처하는 여러 모습들, 권력자들의 비겁함, 그리고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도 희망을 잃지 않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 다음 편이 있다면 빨리 번역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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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츠와프의 쥐들 : 철창 브로츠와프의 쥐들
로베르트 J. 슈미트 지음, 정보라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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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이 하루 동안 벌어진 일들이라면, 그런 혼란 속에서 당황하며 좌절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좀비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생존하려는 모습이 펼쳐진다.


소설의 속도가 1권에 비하면 빠른 편인데, 세 군데서 사건이 진행된다. 한 곳은 교도소, 또 다른 한 곳은 1권에서 지휘권을 잡고 군인들을 지휘하기 시작하는 비에드지츠키 소령이 들어간 시립동물원이 있는 큰 섬, 또 한 곳은 교도소에서 내보내져 소련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도록 의도됐으나 탈출에 성공한 잔인한 사형수들이 은거하게 되는 광장의 은신처다.


교도소에서도 역시 소장은 피신을 하고 교도소장 대리를 맡은 사람이 나온다. 권력을 쥔 자들이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대리를 맡은 대위 역시 이와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선택을 한다. 


즉 죄수들을 내보내고 교도관들의 가족들을 교도소로 데려오는 것이다. 그곳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어느 정도 안전하다고 여겼기 때문. 하지만 밀폐된 공간에서 좀비가 발생하면 사태는 급속도로 나빠질 수밖에 없다.


교도소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여러 사건을 겪은 끝에 간신히 좀비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물론 많은 희생을 치르고서다. 


공공기관이 재난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하는데, 자신들과 관련 있는 사람들만을 보호하는 기관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보호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많은 사람을 위험에서 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당장 내 가족의 안위를 확보하겠다는 생각이 아니고. 그것이 공공기관이 해야 할 일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교도소 대리 소장이 하는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다. 게다가 그는 범죄자들을 풀어주고, 사형수들은 가둬서 내보냈다고 하지만, 다른 시민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행위였다. 


이런 행동을 공공기관이 한다면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은 누구를 믿어야 하겠는가? 각자도생이라고 하지만 위기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각자도생이 아니라 협동이고, 책임을 지는 기관의 대처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소령은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령이 있는 큰 섬에서는 전열을 정비하고 좀비들에 대처하기 시작한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대피 방법을 알려준다. 그리고 서서히 좀비들로부터 사람들을 구해와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는 일을 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좀비로 변한 원인이나 대책을 세우려는 노력도 하게 되는데...


반면에 좀비보다도 더 지독한 지옥이 펼쳐지는 곳이 사형수들이 탈출한 도심이다. 이들은 생존자들을 붙잡아 좀비를 유인하는데 쓰거나 자신들의 노리개로 삼는다. 이들은 이러한 재앙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인간성을 잃은 자들이 더욱 기승을 부릴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하는데...


좀비의 지옥에 이들의 지옥이 더해져 그곳 사람들은 그야말로 인간이 겪을 수 없는 참담한 고통을 겪게 된다. 재난 상황에서 재난을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과 욕망을 채우려는 존재가 있기 마련인데, 공공 기관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을 때 인간성을 상실한 작자들이 판치게 된다는 것을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잔혹하게 행동하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에 협조하는 사람도 나오게 되고,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목숨을 내어놓게 하는 자들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이들의 잔학함에 치를 떨면서 읽게 되고, 언제 어떻게 이들이 파멸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살아남아 다른 사람들을 지옥에 빠뜨릴 것인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이렇게 떨어져 있던 세 곳이 서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소령이 지휘하는 군인들이 교도소와 연락이 되고, 간신히 살인자들에게서 탈출한 소녀가 범죄자들의 음모를 알려 그들을 소탕하게 된다. 그리고 이전에 죽은 사람들도 좀비가 되는지 실험을 하는데...이때 윤리적인 문제가 대두한다. 그 살인자들, 사형수들을 좀비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데 이용하는데, 과연 그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비에드지츠키 소령은 내켜하지 않는다. 아무리 범죄자라도 그런 비인도적 행위에 동원할 수는 없다는 쪽이고, 의사인 아렌지코프스키는 어차피 사형수들이고, 이들의 죽음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면 그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쪽이다. 이런 논의는 정의와 공리의 문제로 다룰 수 있지만 쉽지 않은 문제다.


다만, 요즘 우리나라에서 사적인 복수극이 인기를 끌고 있는데,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수준의 처벌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그러한 드라마를 보고 통쾌하게 여기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서 범죄자들이 저지른 짓은 죽어 마땅한 짓들이다. 그 장면을 읽으면 이들이 그냥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총살이나 교수형은 이들에게 너무도 자비로운 형벌이라는 생각. 이들이 사람들에게 저지른 짓은 좀비들에게 먹히기 전에 온갖 공포를 겪는 것으로도 대체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2권의 마지막엔 소련군이 들어온다. 그런데 해방군이 아니라 약탈자로서... 이제 좀비에 더해 또다른 위기가 시작된다. 아직 좀비가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시간은 2주가 지나 있다. 3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끔찍한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두려움에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그 위기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해 가는 사람도 있고. 


3권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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