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콤플렉스 - 인간은 언제 괴물이 될까
오노 슌타로 지음, 김정례 외 옮김 / 에스파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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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를 명확히 하고 넘어가자. 프랑켄슈타인은 분명 괴물이 아니다. 그는 괴물을 창조한 인물이다. 이렇게 지적을 하면 이상하다. 왜 괴물을 창조했을까? 괴물을 창조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나? 하는 의문이 든다.

 

창조자는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이 좋은, 훌륭한, 완벽한, 쓸모있는, 아름다운 등등의 수식어가 붙기를 원한다. 창조자는 결코 괴물이라는 이름이 붙는 피조물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다.

 

성경을 보더라도 태초에 인간을 창조한 신은 만족한다. 물론 그 다음에 인간이 창조자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성경은 그래서 이런 괴물에 대한 이야기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성경을 건드리지 않는다. 성경에서 괴물에 해당하는 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기 때문이다.

 

괴물을 이상한, 무섭고, 위험하고, 힘이 세고, 말이 안 통하는 등등의 수식어가 붙은 존재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괴물이라고 하는 말을 쓰는 것은 자신이 알 수 없는 존재라는 뜻으로 이 책에서는 쓰였다고 할 수 있다. 즉, 괴물은 블랙박스와 같은 존재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행동을 하는지 우리가 쉽게 알 수 없는 존재.

 

그러므로 인간은 인간을 본래 잘 알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우리 인간이 아무리 괴물처럼 행동하더라도 괴물로 취급하지 않는다. 같은 종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다. 그러니 논의를 인간을 제외하고 시작하도록 하자. 이 책은 그렇게 인간을 제외하고, 인간이 창조한 피조물로부터 시작한다. 누구부터?

 

바로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피조물로부터 시작한다. 프랑켄슈타인은 또다른 인간을 만들어낼 욕심에 창조에 몰두한다. 인간이 신의 영역에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다. 자신이 흉측한 존재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겉모습은 분명 흉측하다. 그런데 우리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도 되나?

 

겉모습을 그렇게 흉측하다고 표현한 것은 피조물이 어떻게 행동할지 전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즉 자신이 창조했지만 피조물은 자신과는 다른 존재, 자신이 알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여기에서 공포가 나타난다.

 

공포가 나타나면 내가 알 수 없는 존재는 괴물이 된다. 이제부터는 함께 할 수 없는 퇴치해야 할 존재다. 그런 존재가 이 책에서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어낸 피조물부터 시작해서, 하이드, 투명인간, 드라큘라 등이 등장한다.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또는 인간의 욕망이 극한으로 표현된 것이든 이들은 괴물로 등장하고, 이들은 퇴치의 대상이 된다.

 

결국 이런 인간의 행위들이 올더스 헉슬리가 쓴 역설적인 '멋진 신세계'에 이르게 된다. 완벽하게 통제된다고 여기는 사회, 이 사회에서 괴물은 존재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이런 사회에서 괴물은 바로 인간이 된다. 인공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존재, 통제할 수 없는 존재, 그것이 바로 괴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괴물을 안고 산다. 우리 인간 자체가 이미 통제를 벗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는 노래 가사 또는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노래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고 산다.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불안감이 생긴다. 이 불안감을 극도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괴물에 관한 이야기다. 괴물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우리가 괴물이 아닐 수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이런 심리적인 면을 넘어서 왜 괴물 이야기가 우리에게 나타났는가, 괴물이야기가 지닌 사회적 의미는 무엇인가까지 추구하고 있다. 뒷부분에서는 스필버그의 영화까지 언급하면서 우리가 괴물에 대해 지니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괴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지가 꽤 오래 되었다. 그러나 괴물에 대한 통제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괴물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알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존재, 그것을 괴물이라고 여기고 그 존재를 없애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켄슈타인 콤플렉스' 우리는 모르는 존재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가끔은 우주인을 상상하면서 두려움에 빠지기도 한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적'들을 미지의 존재로 가정하고, 퇴치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행동하게 된다. 그들을 우리와 같은 존재로 여긴다면 절대로 그런 행동을 할 수 없는.

 

그래서 '테러'에 대한 영화 이야기도 이 책에 나온다. 다른 존재를 어쩌면 괴물로만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프랑켄슈타인을 읽어보면 피조물은 감성이 풍부하고, 공감 능력도 있는 그런 존재다. 다만, 그 외모로 인해 다른 사람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공감에서 배제된 존재, 그 존재는 괴물이 된다.

 

로봇... 복제인간... 자, 우리는 또다른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들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이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이들을 괴물로 여기고 퇴치하려 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와 같은 존재로 받아들일 것인가?

 

이 책은 이 질문을 계속 하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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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7 10: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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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7 13: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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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세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시인의 말을 보자.

 

  나는 평생 밀핵시(密核詩)를 추구해 왔다. 밀핵시란 시에서 의미의 밀도를 최대한으로 높이려는 시도다. 이것이 우리 시의 약점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밀핵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 요소시(要素詩), 일자일행시(一字一行詩)이며, 그 궁극의 형태가 일자시(一字詩) 일명 절대시다.

 

무의미시(김춘수)에서 날이미지시(오규원)란 용어도 있었는데, 이제는 밀핵시 또는 일자시다. 단 한 글자로 시를 이루는 것. 언어를 없애고 없애 결국에는 의미만 남게 한다는 것.

 

'알'이다. 줄이고 줄여 하나의 점으로 수렴된 알. 알은 핵이다. 핵은 고도로 농축되어 있기에 터지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수다스런 말이 아니라 하나로 응축된 말.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 그런 시를 일자시, 절대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집 '서시'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를 이렇게 말한다.

 

서시

 

그 날이 그 날 같지만

오늘은 어저께가 아니다.

내일은 오늘이 아니다.

무엇이고 시간 속에서

시시각각 새롭지 않은 것은 없고

시간 속에서

색이 바래고 때묻지 않은 것도 없다.

새 것도 없고 새 것 아닌 것도 없는

기묘한 현실의 얼개 앞에서

감각과 생각은 여간 무디지 않다.

묵은 것에서

새 싹 가려내는 연습.

새 것에서

영원한 모습 찾는 연습.

동시에 우리말에 새 생기 불어넣는 연습.

그리하여 생긴 것이 이 시집이다.

 

성찬경, 논 위를 달리는 두 대의 그림자버스. 문학세계사. 2005년. 12쪽.

 

말은 어디에 배치되어 있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가령 '응'이라는 말만 해도 그렇다. 같은 '응'이지만 긍정도 될 수 있고, 부정도 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의문도 될 수 있다. 이렇게 말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작동을 한다. 그렇다면 단 한 글자, 그 한 글자가 어떻게 자리잡고 있느냐에 따라 너무나도 다양한 의미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집에는 단 하나의 글자들을 한 행으로 배열한 시가 있다. 제목은 '해'다. 그리고 '해/달/별/땅/빛/김/참/물/불/흙/넋/피/숨/몸/맘/말..../힘'으로 끝난다. 단 하나의 글자들이 '해'라는 제목으로 시를 이루고 있다.

 

이 단 한 글자들은 해라는 절대 존재와 동격이다. 그러므로 동격들인 낱말들이 행을 이뤄 시를 만들어 간다. 이렇게 한 글자들이 시를 이루다가 이제는 제목만 남는다. 제목이면 이야기를 다 한 것이다.

 

맨 끝부분에 실린 '똥'과 '흙'이라는 시가 그렇다. 똥은 그 자체로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여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냥 똥 하면 수많은 생각들이, 이미지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러기에 시인은 독자에게 시를 넘기고 있다. 당신의 상상으로 시를 채워가라고.

 

'흙' 역시 마찬가지다. 제목인 '흙'을 보강해주는 것은 두 쪽에 걸친 여백이다. 넓은 여백. 흙은 땅처럼 우리에게 어떤 장소를 제공한다. 우리 존재의 근원이다. 그러니 무슨 표현이 필요하겠는가? 그냥 백지면 된다. 이를 미술과 시의 만남이라고 해도 좋다. 단지 백지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 건져내는 것, 이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게 바로 시가 된다. 절대시다. 무슨 말을 주절주절 풀어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말이 많은 시대, 시도 수다스러워지는 시대... 노시인은 시의 말을 줄이고 줄여 나중에는 한 글자로 줄여나갔다. 일자시, 절대시의 세계로 나아갔다. 우주는 넓다. 무한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무한한 우주도 한 점에서 시작했다는 것. 시는 그렇게 우주의 빅뱅만큼이나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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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이웃
양혜영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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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내용이 어둡다. 현실에서 약한 사람들은 이렇게 어두침침한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 잠깐 희망의 빛이 비추는 듯하다가도 다시 어둠이 짙게 깔리는 그런 삶이라니...

 

약한 존재끼리 서로 도우며 서로 기대며 살면 좋으련만, 약한 존재들을 착취하는 사람들이 있고, 같이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상대를 더 깊은 어둠으로 몰아가는 존재들이 있다.

 

이 소설집에는 다수의 약한 존재들이 등장한다. 소수자라고 해도 좋다. 소수자지만 이 세상에서는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소수자다. 이들은 힘이 없어서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로부터 억압당하거나 배척당하는 삶을 산다.

 

그들에게 희망이 있을까? 희망을 보여주는 소설을 원하지만 소설은 결코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우리 사회의 모습을,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약한 사람들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어둡다. 무언가 희망이 보여야 하는데, 자꾸 이래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 내용이 이리도 어두운데, 작가는 희망을 이야기하려고 한다고 한다. 그래, 현실을 보여주고 그 현실에서도 살아가려 하는 사람들, 몇몇 소설에서 약자들이 자신을 가해한 사람에게 돌려주는 폭력이 그것을 의미한다면, 결코 이들은 약하지만 그대로 당하고만 살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면 소설집 뒤에 실려 있는 작가의 말이 소설에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집에 실려 있는 소설 중에 '오버 더 레인보우, 구두, 고요한 이웃, 요나'가 그렇다. 소수자에 해당하는 삶을 살지만 이들은 그냥 당하기만 하는 피해자는 아니다. 물론 폭력이 해결책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삶을 지탱하려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몸부림도 없다면 그것은 더한 절망의 나락 속으로 떨어지는 일이다.

 

작가의 말이 그래서 마음에 다가온다.

 

내가 쓰는 소설은 오색찬란한 드레스를 걸치고 화려하게 치장한 예쁜 인형이 아니다. 지극히 평범해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인형이 겹겹이 들어 있는 '마트료시카'에 가깝다. 그 사람들은 조금도 요란하지 않다. 너무 작은 그들의 목소리는 몸을 굽히고 귀를 바짝 대야만 들을 수 있다. 힘센 사람들은 어디서든 할 말 다 하고 하지 않은 일을 부풀려 표현하기도 하지만 내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겪은 일마저 말 못 하고 소리 내 울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그 사람들은 자신보다 작은 사람을 품으려 애쓴다. 온몸으로 사람이 사람을 품고 안는 세상. 나는 그것이 '소설'이고, 우리가 나누는 '사랑'이라 생각한다.  (262-263쪽)

 

그래서 어둠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소수자를 그리고 있지만 소설에서는 그들이 그냥 죽어지내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신과 같은 소수자임에도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존재를 응징하거나(오버 더 레인보우, 구두), 자신을 괴롭히는 존재에게 반항하게 된다.(고요한 이웃, 요나)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그런 존재들에 대한 연민이 묻어나는 소설도 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살려고 애쓰는 존재에 대한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붉은 머리 리카온에 대한 그 감정은 결국 우리 사회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존재들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세상은 결코 녹록치 않다. 세상 살아가기에 보통사람들은 힘겹게 살아간다. 아무리 힘들게 돈을 벌어도 빚이 줄지 않는 상황이거나, 간신히 자신의 삶을 유지해나가는 상황이기 쉽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세상이 잔혹하지만, 환대가 멀어진 세상이라지만 그럼에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환대가 있어야 한다. 환대가 불가능한 세상은 서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렇게 환대가 사라진 세상이지만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반항, 그들이 폭력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도 자신에 대한 포기가 아님을 생각하게 된다. 이들이 폭력으로 나갈 수밖에 없을지라도, 그 폭력은 살기 위한 어쩔 수 없음이다.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이렇게 폭력으로 치닫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사회를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소설에서 보여주는 음울한 세계는 우리가 현실에서 맞이하는 세상이면 안 된다. 그런 세상, 어둠 속, 약한 존재, 소수자들에 대한 따스한 시선,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삶을 생각하도록 소설은 만들고 있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고맙게 잘 읽었다. 어두운 삶 속에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소설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들을 환대하는 사회, 그런 사회가 우리가 꿈꾸는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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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이 시집 뒷편에 쓴 후기를 인용한다. 이 후기에 박영근 시인이 시를 대하는 태도가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민중, 혹은 문학은 여전히 하나의 가능성이며, 가야할 미래로서의 새로움이다.
  이 시집의 끝에 나의 스승 한분이 당신의 첫시집에 쓰신 말씀 한구절을 적어놓는다.
  나 자신이나 남을 속이지 말자
  분수를 알자.
  어둠과 절망을 제대로 살아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새삼스럽게 가슴이 뜨거워온다. 
 
1997년 10월, 인천에서 박 영 근
 
이 시집이 나온 것이 우리나라가 외환위기에 막 처했을 때일 것이다. 한창 성장을 구가하던 나라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던 때.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비정규직 시대로, 불안정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박영근 시인은 노동현장의 치열함을 시로 쓰기도 했다. 본인이 노동현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노동현장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노동시라고 하는 것이 꼭 노동현장을 표현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왔다. 1958년생이면 전쟁 직후에 태어나 우리나라가 발전할 때, 경제적으로는 농촌이 파괴되면서 도시로 사람들이 몰리고, 저임금 저곡가 정책으로 일반 민중들은 살기 힘들어지던 때. 정치적으로는 독재가 판치던 시대.
 
이 시대에 노동운동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 수밖에 없는 일이었을 터. 시인은 이런 시대에 시를 통해 진실되게 살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나 자신이나 남을 속이지 않는 일, 분수를 아는 일. 우리 모두가 이렇게만 살면 어찌 차별이 있고, 억압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특히 점점 더 위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는 남이 아니라 자신마저도 속이는 그런 특기가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시인 약력을 찾아보니 2006년에 돌아가셨다. 채 50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뜬 것. 이 세상이 그리도 살기 힘들었던가. 아니면 시인처럼 자신도 남도 속이지 못하고 분수를 알며 살아가려 하는 사람들에겐 견디기 힘든 세상이었던가.
 
시인이 저 세상에서 내려다보는 지금 이 세상이 그때보다는 더 좋아졌어야 하는데... 
 
시집 제목이 된 시를 인용한다.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낡은 흑백 필름 속 같은 곳에서
쓸쓸히 늙어가는 내가 보인다
 
한편의 시를 쓰려면
몇밤을 불면으로 때우는 나를
바겐세일도 하지 못해
백화점 문턱도 넘지 못하는 나의 상품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
베스띠 벨리 막 화장을 끝낸 마네킹의 얼굴도 보인다
 
TV 뉴스 속에선 한총련 아이들 최루탄처럼 구호를 터트리고
내 귀엔 환청처럼 들리고
대낮 뜨겁게 타오르던 해가
페퍼포그 연기 속에서 복면을 한다
 
꽃들이 일제히 모가지를 꺾고 파업을 했는가
 
부러진 뼈와 두개골 사이로 새파란
억새를 키우고 있는 공장 위로
기억이 모가지를 부러뜨린 채
하늘을 향해 굴뚝을 세우고
나를 부르는 소리도 들린다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그래 가자
가자
저 유월의 싱싱한 은행나무들이
시뻘겋게 녹슨 고철덩어리로 보일 때까지
 
박영근,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창작과비평사. 1997년. 92-93쪽. 
 
어둡다. 이상하게 과거 속에 자신을 가두어버린 듯한 느낌. 미래로 가려 하는데, 그 미래가 결코 밝지 않다. 세상에 은행나무들이 녹슨 고철덩어리로 보일 때까지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노동의 시대, 노동으로 세상을 바꾸려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는 뜻인가? 그럼에도 노동은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기 때문에,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말인가. 
 
'시뻘겋게 녹슨 고철덩어리'는 가동이 멈춘 공장이 아니던가. 그런데 '유월의 싱싱한 은행나무'는 또 무엇인가. 87년 유월 항쟁을 이야기하는가? 유월 항쟁으로 인해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는 이루었지만 노동자들의 현실, 민중의 현실은 나아지지 않았다는 뜻인가. 
 
그래서 한총련은 여전히 시위를 하고 있으며, 노동자이자 시인인 나는 백화점 문턱을 넘을 수 없고, 공장에선 여전히 나를 부르고 있는데...
 
공장을 멈춰 세상을 바꿀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히려 노동자들의 삶만 피폐해졌지 않은가. 그런 시대를 겪어 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런지 이상하게 시의 마지막 구절이 맘에 걸린다. 탁 걸려서 넘어가지 않는다. 시인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시뻘겋게 녹슨 고철덩어리로 보일 때까지'라는 말은 결국 그 녹슨 고철덩어리들을 노동의 힘으로 다시 가공해 내야 한다는 것 아닐까?
 
노동자들의 삶이 유월 항쟁으로 이룬 것처럼 이렇게 녹슨 고철들을 새로운 결과물로 만들어내는 것,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노동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노동자들이 계속 해야할 일이라는 말 아닌가 하는 생각.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말을 시인은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내 멋대로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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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4 12: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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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4 1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풍화와 기억 - 일제 말 친일 협력 문학의 재해석
김재용 지음 / 소명출판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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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 그렇게 우리나라는 일제에 대항하여 비폭력 만세 운동을 벌였다. 무장투쟁이든 비무장투쟁이든 일제에 반대한다는 데에서 공통점을 지닐 수 있는데, 3.1운동은 전국민적, 전국적인 운동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3.1운동으로 인해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그 적통을 이어받아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으니... 우리나라 헌법에는 3.1운동과 임시정부가 전문(前文)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친일문학 또는 반민족친일행위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논란이 많아진다. 도대체 친일이 무엇이냐? 당시에 친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일제시대에 살았다는 것, 총을 들고 무장투쟁을 하거나 또는 눈에 띠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 모두 친일을 한 것 아니냐는 반론이 늘 뒤따른다.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서 친일을 한 것까지 응징해야 하느냐는 반론도 있고... 그렇게 많은 논란이 벌어지는 이유는 해방이 되고 나서 바로 친일청산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위 친일파들을 안고 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 사회를 주도하게 하지 않았던가 반성하게 된다.
 
친일파들을 안고 가기 위해서는 먼저 친일파들의 통렬한 자기 반성이 있어야 한다. 자기 반성을 한 뒤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 때 그 다음에야 그들을 안고 가는데, 이런 과정 없이 반민특위는 해체되고 친일파들은 별다른 처벌 없이 우리 사회에서 주도적인 자리를 잡고 만다.
 
그 다음부터 친일에 관한 논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각 학교 도서관에 친일인명사전을 비치하도록 하는 것도 좌파들의 책동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으니, 도대체 이 나라에서 친일을 했다는 것은 그것도 주도적으로 친일을 했다는 것은 힘있는 자리에 계속 머무르면서 자손들에게 그 지위를 물려주었다는 얘기와 통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친일문학에 대해서 정리한 책이다.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다고? 아니다. 이 책을 보면 이들은 자연스레 친일로 흘러들어간다. 자기 신념을 가지고. 이들에게 친일은 신념이다. 살기 위해서 한 어쩔 수 없는 행위가 아니다. 그냥 그 시대에 자기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간 결과가 친일이다. 친일이라는 말로 부족하다. 이 책에서는 그 단어를 '내선일체'로 본다. 
 
일본과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신념. 그 신념을 도처에 표시한 인물들. 네 사람을 든다. 이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이광수다. 그러나 이광수 못지 않게 중요한 사람은 유진오이고. 나머지 두 사람은 해방 후 우리 사회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니... 장혁주와 최재서.
 
이광수야 조선 3대 천재로 인정받으면서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선생님으로 통했던 사람이니... 근대문학을 확립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2.8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사람이기도 하고, 상해임시정부에서 독립신문 발간에도 참여한 사람. 안창호를 따르던 그런 사람. 그러나 나중에 창씨개명을 하고,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전쟁에 참여하라고 독려한 사람. 해방이 되고 나서도 본인은 조선을 위해서, 조선인을 위해서 친일을 했다고 강변했다는 사람.
 
벌을 받기 위해 강변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신념이 그러했다는 것을 이 책에서 알 수 있다. 그는 곳곳에서 이런 자신의 신념을 내비친다. 
 
저자는 친일 행위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고, 다시 두 가지로 세분한다. 즉 친일의 양상이 네 가지가 있는 셈이다.
 
동화형 친일과 혼재형 친일... 동화형은 다시 문화와 혈통으로, 혼재형은 종족이냐 지역이냐로 나뉘는데... 문화적 동화형은 이광수, 혈통형 동화형은 장혁주, 종족형 혼재형은 유진오, 지역형 혼재형은 최재서로 대표된다고 한다. 
 
동화형이야 일본에 동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니 말할 것도 없고, 혼재형은 조선의 특성은 지키되 일본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니, 조금 다르다고 해도 일본에 종속된다는 점에서는 친일에 해당할 수밖에 없다.
 
동화형 중에서도 문화적 동화를 주장하는 이광수는 일본문화에 조선문화를 동화시킬 것을 주장한다. 일본이 동양정신의 정수를 계승 발전시켜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일본문화로 동화됨으로써 우리나라는 동양정신을 구현하고 서양에 맞설 수 있다는 주장이다. 혈통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련다.
 
혼재형 친일 중에서 유진오는 종족을 앞세운다. 내선일체를 주장하더라도 완전히 같아질 수는 없다는 것. 그래서 각자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융합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 이 논리는 어쩌면 유럽통합의 논리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독립국들이 연합하는 것과 식민지가 식민본국과 융합한다는 논리는 완전히 다르다.
 
식민지는 어쩔 수 없이 식민본국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탄압을 받으니. 이런 상태에서 자신들의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하면서 식민본국과 하나가 되는 길은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장기적으로 보면 식민본국 문화에 동화될 수밖에 없고, 식민정책은 강압이든 비강압이든 그런 쪽으로 정책이 흘러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어떤 말을 해도 친일을 한 것은 변명이 될 수 없다.
 
그것도 자신들의 내재적인 논리에 의해서 친일로 나아갔으니... 앞에서 왜 유진오가 중요하다고 언급했냐면 유진오는 우리나라 제헌헌법을 기초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가 문학에서 손을 떼고 법에 전념했다고 하지만, 친일을 그렇게 주장했던 사람이 해방이 되고 나서 우리나라 헌법을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 친일청산이 멀어진 큰 이유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네 가지 유형의 친일이 나오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내선일체' 그리고 '황국신민화'에 이은 '대동아공영'이라는 말로 압축이 된다고 한다.
 
다 일본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조선의 독자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일본에 동화되는 것이다. 일본적인 것, 천황으로 귀일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들 주장이 닿는 끝지점이다. 그러니 친일이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 친일은 서서히 풍화되어 우리들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사라져서는 안 된다. 친일은 기억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책은 일제시대 문인들의 친일행위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행위가 아니라 자신들의 논리를 따라서 적극적으로 행한 행위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친일행위를, 친일행위자를 기억해야만 한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이기 때문이다.
 
덧글
 
읽다가 소소한 오타가 눈에 들어왔는데... 그거야 문장에서 그냥 넘어갈 수 있다고 해도, 이 문장에 나오는 인물 이름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둘 다 실제 인물이고 우리 문학사에서 언급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235쪽. 혼재형 친일 협력의 대표적인 문인인 유진오와 최서해는... 이라고 되어 있는데... 최서해가 아니라 최재서다. 이건 꼭 고쳐야 한다. 
 
최서해 : 본명 최학송. '탈출기, 홍염,기아와 살육' 등으로 유명한 소설가. 1932년 사망. 이 책은 1938년 이후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최서해가 나오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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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2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4 1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19-01-12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실, 학자이자 교수가 쓴 최근 인문서에서 그 저자가 인용한 학자 성명이 잘못된 걸 보고 눈을 의심했어요. 그럼 인용할 수도 없죠....꽤 많은 페이지를 할애했는데 정작 이름을 잘못알고 언급하다니

2019-01-14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