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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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 소설이 등장해 사건을 끌어나간다. 소설과 소설 속 소설이 구분이 되지 않게 전개된다. 읽는 독자는 굳이 둘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소설 속 소설은 주인공을 행동으로 이끌어가는 역할을 한다.

 

추리물이라고 해도 좋고 공포물이라고 해도 좋은 작품이다. 사건의 결말을 알려주지만, 그래서 독자는 이미 그 결말을 알고 있지만, 어떻게 해서 그 과정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작품을 끝까지 읽지 않으면.

 

이게 묘미다. 사건은 이미 벌어졌다. 그런데 결정적인 것이 빠졌다.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 그리고 어떻게에 대한 답.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나와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는 집착이요, 하나는 공포다.

 

사람을 잡아채는 집요한 감정. 한번 말려들면 빠져나오기 힘든 감정이 바로 집착과 공포다. 소설 속 인물들은 서로 다른 두 감정에 휩싸여 있고, 여기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계속 수렁으로 빠져들어간다. 그 수렁 끝에 무엇을 만날지... 생각할 수 없다.

 

생각이 작동하지 않는 감정 상태. 그것이 집착과 공포다. 그런데 집착은 있는 사람, 센 사람이 할 때 무섭다. 다른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고 상대를 무한정 괴롭히게 된다. 자신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집착을 정당화 한다.

 

잘못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집착하는 상대를 없애지 않으면 없다.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다. 이게 강자가 집착할 때 당하는 약자들의 모습이다.

 

공포는 주로 약자에게 다가온다. 겉으로 강해보일지라도 속으로 약한 사람에게 이 공포는 쉽게 자리잡는다. 그에게 자리잡은 공포는 약자를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자신도 자신의 몸을 통제하지 못하게 한다.

 

집착과 공포가 맞섰다면...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집착을 이길 수가 없다. 그런데 공포를 벗어나는 길이 있다. 유일한 길.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가 위험에 처했을 때. 그때는 공포가 작동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다.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할 틈도 없다.

 

집착은 결과까지 계산한다. 철저하다. 그리고 집요하다. 무섭다. 자신만이 존재하고, 나머지 존재들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명령대로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정해야 한다. 자신의 뜻에 맞게.

 

이렇게 집착은 사랑도 소유하려 한다. 나를 상대에 맞추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나에게만 맞추려고 한다. 이런 집착은 사랑을 죽음으로 이끈다. 파멸로 이끈다.

 

이때 누군가가 자신의 소유물을 (?짜증나는 표현이다. 사람이 사람을 소유할 수는 없는데...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데, 절대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집착에 빠진 인간들이다) 건드렸을 때 참지 못한다. 제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분노로 표출된다. 같은 방식으로 복수를 해야 한다.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공포... 이성적인 행동을 가로막는 그 무엇. 하지만 이 공포는 극복될 수 있다. 극복해야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갈 수 있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공포에서 사랑은 상대에게 나를 맞추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를 위해서 자신의 공포를 이겨낼 수 있다. 이렇게 소설은 집착과 공포, 두 축을 중심으로 네 인물이 등장하고, 사건이 전개된다.

 

긴박한 내용 전개. 추리를 필요로 하는 사건들. 결말들. 그래서 읽는 재미가 있다. 집착에는 돈의 힘을 가진 영제가 있고, 공포에는 육체적인 능력은 탁월하나 소심한 현수가 있다. 그리고 이들을 지켜보며 우리를 소설 한복판으로 이끌어 가는 승환이 있고, 사건의 핵심 연결고리가 되는 서원이 있다.

 

그리고 소설은 주인공 서원의 관점에서 시작에서 서원의 관점으로 끝난다. 나머지 사건들은 소설을 읽으며 채워나가면 된다. 집착과 공포 사이. 같은 사랑이라도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지를 소설을 읽어가면서 알게 된다.

 

사건을 풀어가는 작가의 솜씨가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한번에 주욱 읽게 되는, 흥미로운 소설이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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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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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이 쓴 에세이를 모아놓은 책이다. 우리나라에 번역이 된 지 오래되었지만 지금 읽어도 좋은 책이다.

 

좋은 글은 오래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 거꾸로 해도 좋다. 오래 살아남은 글은 좋은 글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래 살아남을 수가 없다. 톨스토이가 셰익스피어를 비판하는 글을 읽고 오웰이 쓴 글에 나오는 말.

 

'궁극적으론 문학작품의 가치를 판별하는 기준은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남느냐 말고는 없다. 생존이야말로 그 자체로 다수 의견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지표인 것이다.' (352-353쪽)

 

어떤 작품을 좋다 나쁘다 판단하기 전에 그 작품이 얼마나 오래 우리 곁에 있었는지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많은 비판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살아남은 책은 무언가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찾으려 해야 한다. 아마도 그런 책들은 우리 마음을 울리는 무엇인가가 있다. 이 말에 따라서 톨스토이가 셰익스피어를 비판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오웰은 주장한다.

 

그러면 이 기준을 오웰에 적용해 보자. 그는 좋은 작품을 쓴 작가인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쓴 작품 중에 지금까지 읽히고 있는 작품으로 [동물농장], [1984], 그리고 [카탈로니아 찬가]가 있다.

 

그래서 이들 작품은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오웰을 대단한 작가라고 여긴다. 지금까지도 이 세 작품은 꾸준히 읽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들과 마찬가지로 저널리스트로서의 오웰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책 제목이 된 '나는 왜 쓰는가'라는 글도 실려 있지만 한편 한편 조지 오웰의 인생과 관련지어 읽을 수 있어서 좋다. 그가 버마에서 생활할 때 어떤 느낌으로 어떻게 지냈는지를 초기 글에서 알 수 있고, 그 다음에는 스페인 내전에 참가해 느꼈던 점들도 이 책에 실린 글들을 통해 알 수 있고, 더불어 그가 전체주의에 대해 얼마나 비판적인지를 알 수 있다.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 그것이 [동물농장, 1984] 같은 작품을 낳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는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온몸으로 겪게 된 결과일 수도 있다.

 

오웰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들은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글을 쓴다고, 또 써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정치적인 의도를 그대로 드러내는 글쓰기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팜플렛이지 예술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쓰는가'라는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던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294쪽)

 

지난 10년을 통들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을, 곧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다. 나는 앉아서 책을 쓸 때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겠다고'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쓰는 건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을 끌어내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남들이 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미학적인 경험과 무관한 글쓰기라면, 책을 쓰는 작업도 잡지에 긴 글을 쓰는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297쪽)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300쪽)

 

글은 작가의 생각을 대변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정치적이지 않다는 말, 그런 글을 쓴다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이라는 오웰의 말, 명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정치적인 글쓰기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글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가, 또 예술적으로 잘 형상화되었는가를 따져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작품들이 오래 살아남는다. 좋은 작품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수많은 작품들이 나왔다 사라졌다. 당대에는 큰 인기를 끈 작품도 있었다. 반대로 당대에 전혀 관심을 받지 못한 작품도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어떤 작품은 꾸준히 읽히고, 어떤 작품은 사람들 관심에서 멀어져 간다.

 

적어도 오웰은 지금도 읽히는 책을 썼다. 좋은 작품을 쓴 작가인 것이다. 그리고 그가 글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특히 인간 오웰을 알 수 있는 책이기에 더 좋다. '정말, 정말 좋았지'라는 글을 보면 반어적인 표현인데, 그의 학창시절을 엿볼 수 있다. 그의 학창시절을 통해서 교육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고.

 

왜 쓰는가. 무언가를 남들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쓴다. 그런데 왜 쓰는가 만큼 중요한 것이 어떻게 쓰는가일 것이다. 예술 작품에서는. 오웰은 그런 점에서 성공한 작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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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한의 계보
노윤선 지음 / 글항아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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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갈등이 심하다. 일본과 우리나라는. 단지 정치 · 경제 문제만이 아니라 문화에서도 많은 갈등이 있다. 경제나 정치만큼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이제는 일본에 오고가는 것도 힘들어지고 있는 정도니.

 

[혐한의 계보]를 읽으면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혐한이 최근에 발생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혐한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 1990년대라고 하는데, 벌써 30년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한류라는 이름으로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대해서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고, 혐한이라고 해봤자 극우에 해당하는 소수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어보니 그것이 아니다. 일본 사회에 깊숙히 혐한 감정이 숨어 있다는 것을. 그것이 자신들이 살기 힘들어질 때 노골적으로 드러날 뿐이지, 일본 사람들 내면에는 혐한 감정이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혐한이라는 단어가 없었을 뿐이지, 조선인들에 대한 악감정, 또 탄압들이 있었음을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으니.

 

그러니 요즘 혐한 시위에서 말하는 '좋은 한국인, 나쁜 한국인 모두 몰아내자'는 구호가 나오는 것이겠지. 한국이라는 범주만이 중요하지 개인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다양한 활동들을 통해 혐한 감정이 내면화되지 않았나 싶다.

 

특히 영화와 문학 작품을 통해서. 이 책에서 분석하는 문학 작품이나 영화를 보면 이들의 혐한 감정이 쉽게 해소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혐한을 표방하는 작품들이 몇백 만부씩 팔리고 있다고 하는데... 문학은 알게 모르게 의식 속에 스며들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이성으로 제어하기 보다는 감정이 먼저 움직이게 하는 것이 문학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문학을 다루고 있는 것은 그래서 더 타당하고, 혐한 감정에 대해서 우리가 직시하는데 도움을 준다. 단지 미워하는 것이 혐한은 아니다. 우리도 일본을 미워하지만 일본사람들 죽이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반일과 혐일을 구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데...

 

살기 힘들어지면 비이성적인 면이 부각되고, 상대적으로 적대할 존재를 만들려고 하는데, 일본에게는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인 우리나라가 아닌가 싶다. 두 가지 면에서 사사건건 부딪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니...

 

하나는 영토 문제다. 독도. 그리고 위안부나 징용공들에 대한 보상.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이제는 교과서에까지 명시를 한다고 한다. 한국이 불법 점유하고 있다고. 교과서가 어떤 책인가.

 

전국민이 한번씩은 거의 암기하다시피 읽어야 하는 책 아닌가. 그런 책에 버젓이 독도를 일본영토라고 하고, 한국이 불법 점유하고 있다고 명시하면 대다수 일본 청소년들은 한국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된다. 이런 반감들이 쌓이고 쌓이면 혐한으로 흐르게 된다.

 

여기에 위안부나 징용공 문제, 자신들은 충분히 사과했다고, 그런데도 한국이 계속 떼쓴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왔다고 한다. 정치인들부터 시작해서 몇몇 언론, 일본인들이 많이 보는 만화에서까지. 자연스레 사람들 의식 속으로 한국은 떼장이, 일본은 그에 시달리는 나라라는 생각이 스며든다고 한다.

 

반성 없는 역사 속에서 일본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역사를 정당한 역사로 받아들이고 주변 국가들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잃어가게 된다. 게다가 먹고 살기 힘들어지니 자연스레 원망은 밖으로 향하게 된다. 정치권이 바라는 방향이기도 하고.

 

혐오는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정말 무서운 일이지만 실제로 간토대지진(관동대지진) 때는 5단계까지 갔었고,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에도 거의 4단계까지 가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레빈의 증오의 피라미드라고 한다는데...

 

이 증오의 피라미드는 첫 번째 단계를 선입견에 의한 행위 prejudiced attitudes(농담, 적대감 표명, 배려 없는 발언, 배제적 언어), 두 번째 단계는 편견에 의한 행위 acts of prejudice  (비인간화, 비웃음, 사회적 회피, 비방 중상, 의도적 차별 표현), 세 번째 단계는 차별행위 discrimination (주거·교육·취업 차별, 사회적 배제, 괴롭힘), 네 번째 단계는 폭력 행위 violence (폭행, 협박, 방화, 테러, 기물파손, 모독죄, 강간, 살인), 마지막 단계는 제노사이드 genocide (의도적 · 제도적 민족 말살)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인 선입견과 편견에 의한 행위는 비형사적 행위이며, 세 번째 단계인 차별행위는 민사적 행위로,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단계인 폭력과 제노사이드 행위는 형사적 행위로 분류하고 있다. (117쪽)

 

지금 혐한은 네 번째 단계까지 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최근에만 일어난 일은 아니다. 끊임없이 재일한국인들에 대한 차별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인데...

 

무서운 것은 일본인들이 보는 신문에서, 잡지에서 이런 혐한이 걸러지지 않고 나온다는 것. 특히 대중매체를 통해서 알게 모르게 일본인들 의식에 침투하고 있다는 것. 여기에 특정 정치인들이 불을 지펴서 혐한 감정이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혐오표현 방지법을 만들기도 했다지만 처벌 조항이 미미해서 별 실효성이 없으며, 카운터스라고 해서 혐오표현 반대 시위자들도 있기는 하지만, 이들 역시 대세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일본과 교류가 끊어지고 서로 장벽을 쌓고 있으니 더욱 혐한 감정이 심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 책은 혐한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을, 꽤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그리고 이러한 혐한 감정을 이용하는 정치인들이 있음을, 또 이것을 이용해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러한 혐한의 계보를 추적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 나아갔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긴 일본이 해야 할 일이지 우리가 혐한 감정까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역사 자료만이 아니라 문학 작품을 통해서도 일본인들이 지금 지닌 혐한 감정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알게 해 준 것만으로도 이 책은 가치 있다고 할 수 있다.

 

원인을 알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고,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은 해결책을 찾겠다는 것이니, 혐한을 우리가 인식하고 그 심각성을 느끼는 것은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이야기니까.

 

그 혐한 감정이 하루이틀에 쌓인 것이 아님을 이 책이 잘 보여주고 있으니, 해결과정은 더 지난하겠지만 그래도 그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임을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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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 19 사태를 겪으니 알겠다. 지구는 이제 하나의 제국(諸國)이 되었음을. 제국(帝國)이 아니라 제국(諸國)이다. 어느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지배할 수 있는 지구가 이젠 아니라는 것을. 

 

  감염병에 국경이 없듯이, 한 나라에 감염병이 퍼지면 대책을 모든 나라들이 함께 세워야 한다. 그런데 어느 한 나라가 제국(帝國)처럼 군림해서 모든 국경을 폐쇄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런 일이 가능하기는 할까? 가능할지도 모른다. 자신들만 살겠다고 국경을 폐쇄하는 일들이, 그런 제국(帝國)의 행태를 보이는 나라도 있기는 하니..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자기들만 폐쇄된 공간에서 안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영화 '월드 워 Z'를 보면 좀비들이 계속 나타나고 번지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장벽을 설치한다. 자신들은 안전할 거라고 믿고. 결과는? 장벽은 여지없이 돌파되고 만다. 이것이 바로 제국(帝國)이 아닌 제국(諸國)으로 변한 현 시대다.

 

그런데도 여전히 제국(帝國)의 모습을 지니기도 한다. 자신들이 이익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그런 행위들을 하기도 한다.

 

하종오 시집 [제국]에서 시인은 '제국(諸國)은 공존해야 하고 제국(帝國)은 부재해야 한다' ('자서'에서)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나라 간의 문제가 아니라 국적을 지닌 사람들의 문제다.

 

사람들도 출신 나라를 기준으로 국경이 있는지, 위계가 생기고 어느 한쪽이 어느 한쪽을 지배하는 제국(帝國)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 열광했지만, 그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이주민들일 것이다. 또다른 기생충들. 우리 눈에 보여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지를 이 시집은 생각해 보게 한다.

 

어쩌면 우리 안에 제국(帝國)에 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게 한... 시집에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해서 이주민 노동자들에 대한 '만인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런 현실을 인식하고 개선하려는 모습을 보여야만 제국(帝國)이 아닌 제국(諸國)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어떤 시를 인용해도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는데... 시집 처음에 나오는 시를 보자. 우리는 정말 이런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지... 도대체 제국(帝國)이 아닌 제국(諸國)의 시대에 어떻게 해야 공존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하는 시.

 

제국(諸國 또는 帝國)의 공장

                - 소액주주들 

 

대주주인 미국 모회사(母會社)가

한국인 노동자들 농성하고 있는

자회사(子會社) 전자제품 조립공장을 폐쇄하고

중국에 이전한다는 보도 나오자

비로소 주가가 올라가기 시작했고, 폭설이 내렸다

먼 친척들이 그 공장에 근무하여서

안심하고 주식 샀다가 돈 날릴 뻔한

한국인 개미투자자들은 가슴 쓸어내렸고

생산라인 멈추고 제품 만들지 않으면

임금 인상 요구조건 들어주리라 기대했던

한국인 노동자들은 가슴 무너졌고, 폭설이 내렸다

농성하고 있는 한국인 노동자들 중에서

자사주(自社株) 가진 소액주주들은

대주주인 미국 모회사가

자회사 전자제품 조립공장 폐쇄한다는데도

주가가 마침내 상한가로 올라가서

개인 자신이 증가하니 어리둥절했고, 폭설이 내렸다

 

하종오, 제국. 문학동네. 2011년.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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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 역사학자의 토론과 해석
오수창 지음 / 그물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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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이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졌으니. 적어도 춘향과 몽룡이라는 이름은 국민 거의가 알고 있다고 해야 할 듯. 아니 몽룡은 몰라도 변사또는 잘 알고 있을 듯.

 

고전소설이라고, 판소리계소설이라고 하는 작품 중에서 '심청전, 흥부전, 별주부전'과 함께 너무도 잘 알려진 소설이다. 그래서 고전문학자들이 춘향전을 가지고 다양한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또 춘향전이란 작품이 구전되어 오면서 다양한 판본들을 남기기도 했고.

 

또 춘향전을 이어서 계속 소설을 쓰기도 했으니, 신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해조의 '옥중화', 그리고 일제시대에 이광수가 쓴 '일설 춘향전'. 내가 알고 있는 최인훈의 작품 '춘향전', 김주영의 작품 '외설 춘향전' 등 너무도 다양한 춘향전 작품들이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오수창은 책 뒷부분에서 이광수가 쓴 '일설 춘향전'을 분석하는 데 한 장을 할애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상반된 의견도 나오고 하나로 정리가 되지 않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역사학자인 오수창이 춘향전에 대한 책을 냈다. 역사학자의 토론과 해석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역사학자가 본 춘향전이다.

 

몇 가지 쟁점에 대해서 역사학자답게 역사 자료를 통해 분석을 해가고 있는데, 우선 춘향은 기생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오수창은 기생이라고 주장한다. 어느 판본을 읽어도 내용을 보면 기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특히 몽룡과 만나 대화하는 장면에서 기생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으며, 신관사또와 대결할 때도 기생임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작품이다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춘향전은 기존 사회를 전복하려는 내용이 전혀 없다고, 기생이 수청을 거부한 것이 불법이 아니라는 전거를 들고 있다. 오히려 수령이 기생들에게 수청을 들라고 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 그런 행위를 해서 처벌 받은 수령도 있다는 것. 다만, 명문화된 법과 실제 행해지는 법은 달라서 대다수의 수령들은 기생들의 수청을 요구하고 받았다는 것.

 

하지만 명백히 법전에 의하면 관기로 하여금 수청을 들게 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것을 오수창은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불법을 저지른 것은 춘향이 아니라 신관사또라는 것. 결국 춘향은 기존 제도를 통해 저항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역사 자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든다. 대다수 백성들은 법전의 내용을 몰랐을 거고, 그들에게는 법보다는 주먹이 더 가까웠을 터이니, 수령들이 기생 수청을 받는 것이 다반사였던 상황에서 그것이 합법적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가정이지만. 그러니 수청 거부를 하는 춘향에게 관리에게 저항하는 민중의 모습을 읽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특히 이 책에서 저자가 여러 판본 중에 가장 나은 작품이라고 하는 '춘향전 완판 84장본'에 신관사또의 탐학이 표현되지 않았다고 하면 관기에게 무작정 수청을 들라고 하는 것 자체도 민중들에게는 거부감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 요즘 말로 하면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라 할 수 있는 그런 생각을 당시 민중들이 해서 춘향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러니 서민의식의 성장으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을 제시했다는 해석은 좀 무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암행어사가 봉고파직을 하는 장면은 조선의 법에 맞지 않는다는 것. 암행어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봉고'에 그친다는 것.

 

관료의 죄상을 적어 관찰사나 중앙정부에 보고하면 파직이나 그에 준하는 처벌은 왕을 통해 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럼에도 소설에서 '봉고파직' 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은 문학적 표현을 위한 장치임에 불과하다는 것.

 

여기에 낭청이라고 나오든, 회계나리로 나오는 사또들을 보조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 이 인물들은 그냥 넘어갔었는데, 역사학자의 눈에는 조선 현실을 너무도 잘 표현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지방관료로 갈 때 관료들이 자신을 보조해줄 사람을 데리고 갔는데, 이는 엄연히 불법임에도 대부분 용인되고 있었다는 것. 그들은 그 관료를 보좌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니 청렴한 관료를 보좌하는 낭청은 떨어질 떡고물이 별로 없었을 터이고, 탐관오리를 보좌하는 낭청은 부정을 저지르기 쉬웠을 터. 낭청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회계나리라고도 표현하는데, 회계나리라는 표현은 지방 관료가 회계를 그에게 맡겼다는 것이니 부정을 저지를 수 있는 소지가 많고, 당연히 관료의 비위를 맞추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표현하는 것은 당시 관료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하는 장치라는 것이다. 이 점은 새로 알게 된 내용인데...

 

이몽룡의 아버지는 나름 괜찮은 관료였기에 낭청이 힘없이 표현되기는 했지만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 인물로 나오고, 신관사또의 낭청은 신관사또가 춘향과 대립하고 있기에 그 역시 부정적인 인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것. 춘향이 강하게 저항하는데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이 낭청이라는 인물임을 저자는 논거를 들어 주장하고 있다.

 

또 하나 역사학자가 알아낼 수 있는 춘향전에 숨겨진 다른 요소는 천자문에 관한 것. 조선시대에도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교육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주장이 많이 나왔다는 것. 그래서 이몽룡과 방자의 대화에서 천자문을 희화화 하는 것은 그런 의식들을 작품 속에 끌어들여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조선시대에는 한문교육을 받으면 당연히 천자문부터 시작하는 줄 알았는데, 천자문을 교육하는 것이 문제임을 지속적으로 지적해 왔다는 것을, 그래서 춘향전에서 방자와 몽룡이 천자문을 가지고 희롱하는 장면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그것도 이런 주장을 정약용이 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것을 춘향전이 체제를 전복하는 사상을 지닌 작품은 아니지만 대중들에게 지속적으로 읽힌 이유는 바로 인간성의 발견이고, 그 인간성을 짓밟으려는 강한 자에게 맞서 결국 승리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저자는 춘향과 몽룡이 비록 신분은 다르지만 서로를 온전한 인간으로, 개인으로 인정했고 사랑했다고, 그런 쪽으로 시대가 흐르면서 춘향전의 다른 판본들이 발전해 왔다고 한다.

 

이미 온전한 개인으로 인정받고 사랑을 한 춘향이 신관사또로부터 기생이라는 신분의 사람, 즉 기생으로만 대우받는 것에 저항했다고 할 수 있다. 춘향전은 개인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겠고, 개인을 어떤 집단의 일원으로만 여기는 풍토는 이제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는 게 이 책을 읽은 내 느낌이다.

 

한번 자유를 맛본 사람은 부자유를 견딜 수 없듯이, 개인의 온전함을 인정받고 그렇게 지내왔던 춘향 역시 기생이라는 신분으로만 자신을 판단하고 대우하려는 신관사또의 처사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그래서 신분여하를 떠나 온전한 인간, 개성을 지닌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인정한 사랑을 이룬 사람이 그 사랑을 지켜나가려 저항하는 춘향이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학자들이 해석하는 춘향에서 그리 많이 벗어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작품 내에서 표현된 내용들과 역사적 자료들을 통해서 춘향전에 나타난 춘향과 다른 인물들을 잘 설명해주고 있어서 춘향전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책이다.

 

무엇보다도 작품 내용 속에서 해석의 요소를 찾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중요함을 깨닫게 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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