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상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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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으로 최근 소설의 경향을 경험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젊은 작가라 함은 나이를 뜻하기보다는 (물론 나이도 어느 정도는 관계 있다) 등단한 지 오래되지 않은 작가를 의미하는데, 이 책은 뒤에 실린 심사평을 보면 등단한 지 10년이 넘지 않은 작가들의 중단편 가운데 일곱 편을 뽑은 작품집이라 하니, 그래도 최신 경향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현실에서 벗어나 현실을 생각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 작가들이 작품에서 표현하고 있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실려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박상영,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김희선, 공의 기원

백수린, 시간의 궤적

이주란, 넌 쉽게 말했지만

정영수, 우리들

김봉곤, 데이 포 나이트

이미상, 하긴

 

이렇게 일곱 편의 소설들. 각자 나름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소설인데, 하나하나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이들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폭력'을 느꼈다면 지나친 감상일까? 동성애에 관한 부정, 이건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국민을 대변한다는 국회에서, 그것도 집권여당에서 나름 주도적인 자리에 있던 국회의원이 동성애를 대놓고 반대하는, 논쟁이 되는 정당과는 손잡을 수 없다는...아예 우리나라 국회에는 성소수자를 대변하는 국회의원은 없어야 한다는 말로 들리는 그런 말을 공공연하게 했으니...이보다 더 심한 폭력이 있을까?

 

박상영과 김봉곤의 소설에서 이런 폭력을 느꼈다면, 백수린과 이주란의 소설에서는 말이 지닌 폭력, 아니 우리들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지도 생각지도 않고 무심히 뱉어버린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은 말일 수도 있다. 물질로서의 칼이 육체를 벤다면, 말은 마음을 베어버리고 쉽게 봉합하거나 아물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김희선과 정영수 소설에서는 딱히 폭력을 느꼈다고 하기는 힘든데, 김희선 소설에서 언론이 어떻게 조작될 수 있는지, 현실과 희망이 어떻게 전도될 수 있는지, 그렇다면 희망에 따라 현실을 왜곡하는 것 역시 폭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

 

정영수 소설에서 '우리들'이라고 하지만,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글쓰기를 통해서 자기 구원에 이르는 것 같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세계로만 들어가는, 남들을 배제하는 그런 상황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래서 소설 속에 '내년'이라는 미래가 나왔을 때 그 말과 더불어 남들이 자신들의 시야에 들어오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닫아버린 세계 역시 폭력이 아닐까.

 

'폭력'이란 이름으로 이 수상작품집을 꿰려는 무리한 오독을 하면, 그 정점에 있는 소설은 바로 이미상이 쓴 '하긴'이란 소설이다.

 

빛바랜 이야기 같지만, 아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를 주름잡는 사람들은 세칭 86세대들이니, 이들이 자신들의 관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강요하고 있는지 (물론 겉으로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독재다. 전체주의다. 바로 헤게모니라는 말, 자발적 동의를 얻어내는 그런 과정을 거친다.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폭력, 이것이 더 무서운 폭력이다) 소설을 읽으며 느낄 수 있다.

 

섬뜩하다. 후일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아니다. 이건 후일담이 아니다. 86세대가 지닌 모습을 풍자가 아니라 적나라하게 드러낸 소설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대학입시라는 것을 통해 기성세대의 위선을 비판하는 것 같지만, 중심은 86세대다. 그들이 얼마나 오만하게 자신들의 세상을 살아가는지를...그것도 자신들이 비판했던 모습과 비슷하게.

 

이 소설을 읽으면 당연히 86세대가 떠오르고, 여기에 김누리 교수가 했던 말이 함께 겹친다. 우리나라는 68혁명을 겪지 않았다고. 그래서 생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언어유희를 좀 하면 정치 민주주의와 생활 민주주의를 구현한 세대가 68세대라면, 뒤집힌 86세대는 정치 민주주의도 생활 민주주의도 이루지 못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김누리,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해냄. 책 참조)

 

그래서 무서워졌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는.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들 답게 한편 한편이 다양한 표현방식과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인간 사회에서 없애지 못한 것이 폭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도 하고 있다. 다른 작품들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려고 어거지로 짜 맞추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은 폭력이 발현되고 있는지 생각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다 떠나서 이 작품집을 읽으며 참 좋다고 생각한 것은 소설이 있고, 그 소설을 쓰게 된 작가의 말이 있고, 그 작품에 대한 젊은 작가에 상응하는 젊은 평론가들의 글이 있다는 것이다. 심사평이야 이런 수상작품집에는 늘상 있는 것이니 논외로 하고.

 

그래서 좋다. 소설도 읽고, 작가의 육성도 들을 수 있고, 이 소설에 대한 비평도 읽을 수 있으니. 각 소설의 내용이 궁금하면 읽어보면 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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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좀 별나긴 합니다만... - 아스퍼거 증후군 이야기
쥘리 다셰.마드무아젤 카롤린 지음, 양혜진 옮김 / 이숲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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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퍼거 증후군에 속한 사람으로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림으로 생각한다는 템플 그랜딘이 있다. 그랜딘의 책을 읽으며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 자신이 지닌 능력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음을, 그 다름을 같음으로 묶으려고 하면 안 됨을 알게 되었는데...

 

이번엔 만화로 표현한 아스퍼거 증후군 사람의 이야기다. 템플 그랜딘도 여성이지만, 이 만화 속 주인공은 마그리트라는 20대 후반의 여성이며, 그때까지 자신이 아스퍼거 증후군에 해당하는 사람이라는 진단을 받지 않았다. 않았다라기보다는 못했다라고 하는 편이 옳겠다.

 

아스퍼거 증후군은 약 4대1의 비율로 남성이 여성보다 많다고 한다. 남성이 많은 이유가 어쩌면 여성은 아스퍼거 증후군 진단을 받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남성보다는 여성이 더 사교적이라고 하고, 여성이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잘 맞춰준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보면 그래왔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때문에 여성 아스퍼거 증후군 사람들은 사회 생활을 하면서도 별로 티가 나지 않고, 또 그 이유로 진단을 받기 힘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책의 주인공 마그리트도 마찬가지다. 여러 병원, 여러 의사, 여러 상담사를 만나봤지만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지 못한다. 단지 다른 사람보다 더 예민할 뿐. 그렇기에 충분히 남들과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때문에 마그리트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장소에 원하지 않는 사람들과 있게 되는 경우도 많고 직장에서도 자신의 다름을 인정받지 못한다. 특히 소음에 민감한 마그리트에게 여러 사람이 모이는 사교장이나 또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함께 모여 이야기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남들보다 훨씬 민감한 피부를 지닌 마그리트는 옷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 아무 옷이나 입을 수 없기 때문인데, 이 역시 직장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 결국 마그리트는 별난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런 마그리트가 정확히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기뻐하는 모습이란... 자신이 왜 이렇게 지내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냥 별난 것이 아니라 마그리트는 본래 그랬던 것이다.

 

물론 이런 진단을 받았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지닌 편견이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그리트에게는 명확한 진단이 있다. 자신은 아스퍼거 증후군에 걸린 사람인 것이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냥 마그리트는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는 사람일 뿐이다.

 

진단이 나왔다. 다음엔 그 진단에 맞게 살아가면 된다. 말처럼 쉽게 되지는 않지만, 마그리트는 문제를 발견했기에 해답을 찾아간다. 아스퍼거 증후군 진단을 받은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위로도 받고, 또 자신을 이해해 줬던 친구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이 하기 싫어하는 끔찍히도 괴로워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한다. 자신에 맞는 생활을 찾고 공부를 하고, 그에 걸맞는 일도 한다.

 

사람과 직접 대면하기보다는 간접적으로 대면하는 것이 더 편한 마그리트에게 세상과 소통하는 길이 블로그, 유튜브 등과 같은 매체를 이용한 소통이다. 그런 방식으로 마그리트는 자신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그 다름을 인정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그러나 때로는 함께 살아간다.

 

그런 이야기를 만화로 그린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책 초반엔 칸트가 떠올랐다. 어쩌면 칸트도 아스퍼거 증후군 진단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고장을 한번도 떠나지 않았다고 하고, 늘 정확한 시간에 산책을 하곤 했다고 하니.

 

만화 주인공인 마그리트 역시 정확히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간다. 그런 반복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급작스럽게 일이 생기면 불안해 진다. 물론 다른 사람의 농담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이런 모습이 변하지는 않는다. 다만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런 모습으로 사회에 자신을 드러내 놓는 것이다.

 

쉽게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고 말을 하지만 막상 다른 점을 발견하면 불편해 하지는 않았는지 이 만화를 통해 생각하게 된다. 자신에게는 아주 사소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마그리트의 경우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너무도 쉽게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기준에 맞추려고 하지 않았는지, 기준을 지니고 다른 존재를 보면 안 된다는 것을, 그냥 모두가 자신만의 기준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그리고 그런 기준을 없애고 그냥 그 존재 자체로 다른 존재를 인정해 주는 태도를 지녀야 함을, 함부로 남을 재단하면 안 됨을 생각하게 됐다.

 

이 책 152쪽에 있는 이 장면...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장면이다.

 

다름을 병으로, 치료해야만 하는 질병으로 너무도 쉽게 인식하는 그런 태도를 지니지 않았는지 반성하게 하는 장면.

 

좋은 만화다. 내용을 따라가도 또 그림을 음미하면서 읽어도 좋은 책. 자신이 정상이라고, 주류에 속한다고 여기는 사람들, 또 자신은 편견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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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부 시인 서정홍이 쓴 동시집이다. 아이들 처지가 되어 아이들의 심정을 시로 표현한 것.

 

  제목이 재미있다. 잔소리라고 하면 지겨운 것, 듣기 싫은 것, 그러니 맛으로 따지면 '맛없는'이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맛있는 잔소리'다.

 

  어떤 잔소리가 맛있을까? 그건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하라고 하는 말들일 것이다. 아이들은 어떤 것을 하고 싶을까?

 

  우선 노는 것. 아이들이 놀지 못하면 힘들어 한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아이 때 충분히 놀아야 한다. 잠도 잘 자야 하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하고.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오죽하면 초등학생이 자신들이 어른들보다 더 오래 공부한다고 하겠는가. 공부란 아이들에게 어떤 인간이 되라고 어른들이 시키는 것인데, 여기서 시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시킴은 강제와 같기 때문에 자발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공부가 자발적이 되기 위해서는 충분히 놀아야 한다. 무언가를 그리워할 수 있어야 한다. 결핍을 겪어야 한다. 그래야 결핍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하게 된다.

 

공자야 도덕적으로 선을 행한 다음에 그래도 힘이 남으면 공부를 하라고 했지만, 지금은 반대로 공부를 하고 또 공부를 하고 그 다음에 힘이 남으면 다른 것을 하라고 하는데... 이래서는 안 된다.

 

서정홍 시를 읽으며 다시 요즘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이런 시가 쓰인다는 것, 그렇지 못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맛있는 잔소리

 

아들아, 놀 시간도 없는데

공부할 시간이 어디 있냐?

아이들은 놀려고 세상에 태어났어.

공부하려고 태어난 게 아니란 말이야.

빨랑빨랑 책 덮고 나와.

엄마랑 아빠랑 썰매도 타고

언덕에 올라 연도 날리고

숲속에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바람소리 새소리 들어보고

바닷가에서 게도 잡고

싱싱한 가재도 먹고

별이 쏟아지는 해수욕장을 걸어 보고

아들아, 그만 자고 얼른 일어나!

일어나 보니 한밤중이다.

꿈속이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다.

맛있는 잔소리다.

 

서정홍, 맛있는 잔소리. 보리. 2017년. 58-59쪽

 

이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은 공부 잘했다고 칭찬을 받아도 기쁘기보다는 두려움을 지닌다.

 

 불안한 칭찬

 

오늘, 처음으로

수학 점수를 백 점 받았는데

반응은 여러 가지다.

 

"우리 아들, 천재다 천재!"

"그래, 뿌린 만큼 거두는 것이라니까."

"야, 부럽다 부러워."

 

이런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질 줄 알았는데

괜스레 불안하다.

 

다음 시험 때, 점수가 떨어지면

무슨 말을 듣게 될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두근.

 

서정홍, 맛있는 잔소리. 보리. 2017년. 49쪽

 

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할 수 없다고 했는데, 성적이 좋아도 기쁘기보다는 다음 성적을 생각해야 하는 아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교육을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행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은 부정적이다. 서정홍이 쓴 이들 시처럼, 이렇게 우리 아이들은 공부란 이름으로 찌들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성적 중심의 교육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세상 모든 것에 경이로움을 느끼고, 우주 만물과 함께 함을, 이웃들과 함께 하는 삶을 누릴 수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을 서정홍의 동시로 대신하는데...

 

이 동시에 표현된 세상이, 그런 삶들이 현실에서도 이루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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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꽃
보들레에르 지음 / 자유교양사 / 199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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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우울'을 읽은 다음 '악의 꽃'을 읽다. 아주 오래 전 그것도 프랑스 시인의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으로 읽으니 시를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이해라기 보다는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다른 시대, 다른 나라, 다른 상황에 처해 있는 것과 또 다른 언어를 쓴다는 것에서 차이가 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시는 보편적인 인간 감성을 노래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극복해 내기도 하지만.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어렴풋이 인식할 수 있는 것에 만족하고, 보들레르가 시인을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시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시집의 첫 부분 제목이 '우울과 이상'인데, 우울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 거리를 느낄 때 찾아오는 것, 현실에 완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이상을 추구하지만 이상 세계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그 간격이 자신에게 다가왔을 때 그 틈을 파고드는 것이 우울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우울은 민감한 감성의 소유자가 느끼는 감정이다. 자신에게서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사람, 어느 한 쪽에도 완전히 빠져들 수가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우울을 느낄 수밖에 없다.

 

세상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며, 또한 자기 뜻대로 되는 세상이 좋은 세상도 아닐 테니, 우울은 시인들에게는 천형과도 같은 감정이지 않을까 싶다. 시인들 대다수가 이러한 우울을 기본 감성으로 지니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런 그가 시인을 사로잡힌 알바트로스에 비유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알바트로스를 신천옹(信天翁)이라고 번역하기도 했는데... 이 시집에서도 알바트로스를 신천옹이라고 번역했다. 그리고 알바트로스는 바로 시인이기도 하다.

 

  신천옹(信天翁)

 

흔히 재미삼아 뱃사람들은

커다른 바닷새, 신천옹을 잡는다.

태평스런 여행의 이 동반자는

깊은 바다 위로 미끄러지는 배를 따른다.

 

일단 갑판 위에 내려놓으면

이 창공의 왕들은 어색하고 수줍어

가련하게도 크고 흰 그 날개를

노처럼 그들 옆구리에 끌리게 둔다.

 

이 날개 달린 나그네

얼마나 어설퍼 기가 죽었는가!

전엔 그처럼 아름답던 그가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추한가!

어떤 친구는 파이프로 부리를 건드려 약을 올리고

다른 친구들은, 창공을 날던 이 병신을 절름대며 흉내낸다.

 

시인도 구름의 왕자와 같아서

폭풍우를 다스리고 사수(射手)를 비웃지만

야유 소리 들끓는 지상으로 추방되니

거대한 그 날개는

오히려 걷기에 거추장스러울 뿐.

 

보들레르, 악의 꽃, 김인환 역,자유교양사. 1993년 중판. 24쪽.

 

현실에서 시인이 처한 위치, 다른 사람들이 시인을 대하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뱃사람에게 잡혀 날지 못하고 있는 새.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날기를 꿈꾼다. 비록 몸은 지상에 묶여 있지만 언젠가는 창공을 훨훨 날아 이 지상을 내려다 보기를 바란다.

 

그러니 우울할 수밖에. 지상의 추함에, 그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음에... 하여 그는 거리의 여인들, 거리의 사람들을 시로 표현한다. 그들을 두고서는 홀로 날아갈 수가 없기에. 그러니 우울은 그의 시를 관통할 수밖에 없다.

 

'악의 꽃'

 

프랑스에서 필화 사건을 겪은 유명한 시집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표현의 강도가 그리 심하다고 할 수 없겠지만, 그 시대에는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다. 시대에 굴복하지 않고, 시대를 넘어서려고 하는 존재, 시인.

 

지금도 수많은 시인들이 있고, 그들 역시 이렇게 현실과 이상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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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우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8
샤를 보들레르 지음, 윤영애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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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산문시'라고 한다. 우리가 시라고 하면 대체로 운문이라고 하고 짧은 시를 떠올리는데, 산문시는 행과 연이 구분이 없는 좀 긴 시를 떠올린다. 여기에 서사기라고 하면 사건이 있는 소설과 비슷한 시라고 생각하고. 그런데 여기에 '소'자가 붙으면 작은 산문시, 또는 짧은 산문시라는 뜻이 될텐데... 그런 시 장르가 무엇인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이야기시' 또는 '담시' 아니면 '단편서사시'라는 개념이 있었다. 시에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이고, 그런 시를 통해서 소설에서 느꼈던 삶들을 시에서도 찾고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시들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읽어보면 짧은 산문시도 있지만, 4쪽 정도에 걸치는 산문시도 있는데, 그것도 짧다고 해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시인이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을 형식으로 선택한 것이니, '소산문시'란 개념도 통할 수 있다고 인정하고 읽는다.

 

어떤 형식을 택하든 시인이 자신의 감정을 언어에 실어 표현하고 있는 것이 '시'고, 다른 글에 비하면 짧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보들레르의 시도 마찬가지다. 파리의 우울. 근대화된 도시 파리에서 시인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한 시다. 총 50편의 시가 모자이크 식으로 나열되어 있는데, 아르센 우세에게라는 프롤로그 격인 글이 있고, 마지막에는 에필로그가 있다.

 

시작과 끝 속에서 시들이 50편, 각자 제목을 달고 배치되어 있는데, 시인의 생각과 시인이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밝은 분위기와 어두운 분위기, 칭찬과 비난, 화려함과 비속함이 교묘하게 대비를 이루고 있는 시들이 많은데... 이 책은 시 한 편 한 편마다 주석을 달아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보들레르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고, 자연스레 보들레르의 다른 작품들도 만나게 된다.

 

군중 속에서도 개인을 발견하는 존재.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존재. 자연스러움에 맞서 싸울 줄 아는 존재. 그래서 시인은 발전하는 도시 파리에서 우아하고 화려한 사람들을 보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소외된 사람들을 보게 되고, 자신과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에 절망하기도 한다.

 

이런 시인의 모습을 드러내는 구절들이 몇 있는데...

 

당신도 깨지는 듯한 유리 장수의 소리를 샹송으로 번역해 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았소? 이 소리가 거리의 가장 높은 안개를 가로질러 다락방까지 보내는 모든 서글픈 암시들을 서정적 산문으로 표현해 보고 싶은 유혹을 말이오. (18쪽)

 

무자비한 마술사. 늘 이기는 자신만만한 라이벌, 자연이여, 나를 놓아주오! 나의 갈망과 나의 자부심을 시험하는 일을 그쳐주오! 아름다움의 탐구는 일종의 결투, 예술가는 두려움으로 비명을 지르며 패하고 마는. (31쪽)

 

시인은 거의 초자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혼의 예외적 순간, 자연의 모든 사물로부터 '사물의 말 없는 언어'를 들을 수 있다. (주석에서. 42쪽)

 

시인은 제멋대로 자기 자신일 수도 있고, 동시에 타인이 될 수도 있는 비길 데 없이 훌륭한 특권을 누린다. 육체를 찾아 방황하는 넋처럼 그는 자신이 원할 때 다른 사람 속에 들어간다. 그에게만은 모든 것이 비어 있는 것과 같다. (75쪽)

 

인간이 악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약간의 가치가 있다. 가장 돌이킬 수 없는 악덕이란 어리석음에서 악을 저지르는 것이다. (174쪽)

 

열린 창문을 통해 밖에서 들여다보는 사람은 결코 닫힌 창문을 바라보는 사람이 발견하는 것만큼 많은 것을 보지 못한다. 촛불로 밝혀진 창문보다 더 깊고, 더 신비하고, 더 풍요하며, 더 어둡고, 동시에 더 눈부신 것은 없다. (214쪽)

 

이렇게 '파리의 우울'을 읽으며 보들레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 사실 보들레르의 작품은 읽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은 많이 들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를 퇴폐, 세기말과 연결지어 생각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작품을 직접 읽어보니 그를 퇴폐와 세기말과 연결시키기보다는 세상을 좀더 깊이 있게 보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을 지닌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열린 창문을 통해서 세상을 본 것이 아니라 닫힌 창문을 통해서 본 것이리라. 또한 한낮의 뜨겁고 밝고 강한 태양 아래서 세상을 본 것이 아니라 어둡고 은은한 달빛을 통해 세상을 본 것이리라. 그렇게 느껴졌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서는 세상의 밝은 면을 이야기하더라도 꼭 어두운 면이 함께 나온다. 그런 존재들에 대한 애정이 시에서 묻어난다. 이렇게 세상은 어느 하나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밝음 속에 가려진 어둠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듯이.

 

이 '파리의 우울'을 읽어 보니 '악의 꽃'을 읽고 싶어졌다. 두 작품이면 보들레르를 만났다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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