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베트남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기억이 역사가 된다고 하는데, 기억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 주관적인 기억들이 모여 역사가 된다면, 역사도 왜곡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베트남 전쟁은 그러한 역사일지도 모른다.

 

저자가 제목 속에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이라는 말을 붙인 것이 이해가 된다. 우리는 베트남 전쟁을 잊어가고 있다. 아니,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들에게 한국군은 잊혀진 존재다. 언급이 잘 되지 않는, 실체는 있으나 그 실체를 지워나가고 있는 그런 존재.

 

무슨 일이 있었는가? 왜 우리나라는 베트남에 전투 부대를 파병했는가? 그 이유와 목적을 알고, 그것을 달성했는지를 파악해야 하는데, 그런 작업을 하는 학자들이 많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도 베트남 전쟁은 잊혀진 전쟁인 것이고, 자기 식으로 기억하는 반쪽의 기억인 것이다.

 

수많은 전투병들이 파병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여기에 민간인 학살이라는 책임도 져야 한다. 그런데 정책을 결정한 사람들 말고 그 정책에 따라 직접 전투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했던가.

 

그들이 기억하려 하지 않는 일들을 끄집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국가 정책의 희생자임을 인식하고 정당한 보상을 해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반쪽의 기억으로만 머물지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베트남 전쟁 하면 공산군의 위협에 맞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월남을 지키려는 전쟁이었다고 단순히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월남의 패망으로 우리나라도 안보 위협을 느끼고, 안보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고. 이것이 독재를 연장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 문제였지만.

 

이 책의 저자는 질문을 한다. 과연 월남이 지켜줄 만한 나라였는가? 부정부패가 판치는, 민주주의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는 그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칠 필요가 있었는가. 아니다라는 답이 나온다.

 

또 미군 철수를 막기 위해서 파병을 했다고 하는데, 주한 미군은 베트남 전쟁 중에도 감축이 되어 한 개 사단 정도가 철수를 했다고 하니, 한미동맹을 굳건히 한다는 목적에도 맞지 않았다고 하고... 경제 특수. 이 말을 많이 한다.

 

일본이 한국전쟁으로 경제 부흥을 이뤄 아시아 제일의 국가가 되었듯이 우리도 베트남 전쟁으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는 것.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면 경제가 부흥한 것은 사실이지만, 참전 군인들이나 노동자들에게 이 과실이 간 것은 아니라는 것.

 

많은 자료를 중심으로 베트남 전쟁의 본질에 접근하려고 한 책이다. 특히 미군이 월남에서 철수한 이후에도 우리나라 군대는 철수를 하지 않고 있다가 더 큰 희생을 당한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결국 미국이라는 나라는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데, 동맹이라는 이름 하에서 외교 실패를 한 것이 얼마나 우리 국민들에게 피해를 주었는지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이런 전쟁을 독재권력을 유지하는데 이용한 것도 기억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2000년대에 들어와서 파병을 한 경우가 있다. 또 파병을 요구받고 있기도 하다.

 

자국의 군인을 외국에 내보낼 때 이유와 목적이 명확하고 정당해야 한다. 정당하지 않은 파병은 성공할 수가 없다. 그러니 베트남 전쟁을 통해 파병 문제도 고민해야 한다. 이미 우리는 여러 번 이런 경험을 했으니,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것일 것이다.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 우리가 나아갈 길을 찾는 것. 참전 군인들의 수기, 신문자료, 해제된 기밀 문서, 기타 회고록 등을 통해서 베트남 전쟁 전반에 대해서 쓴 책이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역사이기도 하고. 읽어 볼 만하다. 아니 꼭 읽어야 한다. 이런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른 방식으로 보기
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201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시작하기 전에 존 버거는 한국의 독자들에게에서 일본 사람이 쓴 하이쿠를 인용하고 있다. 이 하이쿠 내용이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부자들을 위해                                  Writing shit about new snow

새 눈에대해 너절한 글을 쓰는 것은         for the rich

예술이 아니다. (5쪽)                          is not art.

 

이 말은 예술은 특정 집단을 위해서만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도 예술은 특정 집단, 부유하고 교육을 많이 많은 시간 여유가 많은 사람들에게 향유되는 경우가 많다.

 

가난한 사람들은 예술을 감상할 시간이 없고, 예술품을 살 돈도 없으며, 모처럼 시간이 나면 피곤한 몸을 쉬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예술은 부자들에게 속하는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안 되는데... 존 버거가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것 아닐까 한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라고 번역했는데, 왜 그렇게 번역했는지를 옮긴이의 말에서 설명해주고 있다. 원래 책에 있는 WAYS라는 말, 방법들이다. 방법들이니 하나의 방법만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쪽으로 해석이 되고, 그러니 다른 방식이라는 말로도 통용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만큼 이 책은 하나의 관점을 제시하지 않는다. 주류로 자리잡은 관점을 따라하지도 않는다. 예술을 보는 방법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내가 처해 있는 자리에서 예술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도 있음을, 곧 본다는 것은 해석한다는 것임을 존 버거는 알려주고 있다.

 

어떤 장에서는 아무런 문장도 없이 그림들만 나열하고 있다. 이런 장들이 이 책에서는 세 장이나 나온다. 정말로 많은 그림들이 그냥 주욱 배열되어 있을 뿐이다. 존 버거가 어떤 설명도 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그 그림을 보는 방식은 이 책을 읽는 사람에 따라서 다양할 수밖에 없다.

 

자신도 기존 관점을 따르지 않고 있지만 이 책을 읽는 사람들도 존 버거의 관점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너만의 방식으로 그림을 보아라. 이 말은 너만의 관점을 확립해라가 될 텐데...

 

하지만 이게 참 힘들다. 특히 우리나라 교육을 충실히 받은 사람들은 더더욱 힘들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교육은 정답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있는 정답을 찾는 훈련만을 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관점은 대학 입시에 치명적이다. 특히 수능에서는 다양한 관점이란 있어서는 안 된다.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대입에서 수능의 비율이 더 확대되고 있는데 수능은 바로 다양한 관점을 말살하는 우리나라 교육의 정점이다.

 

오로지 하나의 관점만을 찾는 연습, 또 찾아야만 대학이라는 곳에 진학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자라온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관점을 잘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다른 관점은 곧 틀린 관점이 되고, 그런 관점은 통용되어서는 안 되는 관점이 되는 것이다.

 

오로지 주류의 관점만이 횡행하는 사회,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가 아니라 다양성이 언제부터인가 위험시 된 사회, 하여 질문은 없어지고 정답만 있는 그런 교육만이 존재해 왔다. 이런 과정을 거쳐 왔으니, 존 버거의 책을 읽으며 그가 한 말인 '계속 싸워 나가시기 바랍니다!'(5쪽)가 아프게 다가온다. 싸울 수 있으려면 기존 관점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술을 보는 관점이 하나의 관점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이 있을 수 있음을, 그리고 그 관점들은 모두 받아들여져야 할 관점들임을, 이것이 예술만이 아니라 우리 생활 전반으로 확대될 수 있음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마지막 장에 있는 광고에 대한 글, 또 여성의 누드화에 대한 글도 다양한 관점이 존재할 수 있음을, 그리고 강자의 관점이 아니라 약자의 관점으로 예술이나 광고를 봐야함을 생각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 호는 두 개의 주제를 축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코로나 19를 겪는 우리들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6.2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째이기에 전쟁에 관련된 것들이다.

 

  둘 다 아직 진행형이라고 해야 하니, 여전히 우리들 삶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은 확실하다.

 

  코로나 19는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잦아들고 있고, 세계 최고의 방역 성과를 거두었다고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이 정도로 바이러스의 확산을 방지한 것은 대단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녹색평론에서 주장하듯이 확산 방지에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지 퇴치를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나라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세계화가 진행된 이 시대에 바이러스는 이제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국경을 모두 폐쇄하고 살아갈 수도 없다.

 

바로 여기에서 코로나19 이후의 세계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코로나 19가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다양한 변종들이 나올 거라고 예측을 하고, 백신이 개발되는 데는 1년 넘게 기다려야 하고, 백신이 개발되더라도 또다른 바이러스들이 창궐할 수 있으니, 인간의 삶에서 바이러스는 사라질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바이러스가 없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으리라. 바이러스와 공존해 온 것이 인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공존이 무너질 때가 있다. 그것은 지나치게 인류가 자연을 침범할 때 이루어진다.

 

어느 정도 경계를 지니고 공존해 왔던 존재들이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서로에게 치명적인 존재로 등장하게 된다. 코로나19 바이러스도 이런 생태계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나타났다는 것이 중론 아닌가.

 

야생박쥐나 그밖의 동물들이 인간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서식지를 파괴하자 인간이 살고 있는 곳으로 올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인간이 식용해왔던 동물들에게 바이러스를 전파하고, 그 바이러스가 인간에게까지 옮아오게 된다는 것.

 

그렇다면 코로나 19 바이러스와 같은 바이러스들을 퇴치하는 길은 백신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인류가 다른 존재들과 공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택해야 한다. 그래야만 바이러스가 지금처럼 치명적으로 전세계에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이후는 바로 우리 인류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점검하고 고민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녹색평론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바이러스의 위협을 늘 느끼며 사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바이러스의 창궐로 어떤 사람들이 가장 피해를 입는지 살펴보는 것, 그들의 삶은 지금도 윤택하지 않기에 면역력도 많이 떨어져 있다는 것. 인류 전체의 면역력을 높이는 방법은 60%의 사람들이 감염돼 면역항체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건강하게 바꾸고 자연과 공존하면서 살아가는 방식을 익히는 데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172호다.

 

6.25전쟁, 한국전쟁, 다양한 이름이 있겠지만, 여전히 우리들 삶을 속박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전쟁이다. 벌써70년이 된다. 그런데도 정전, 휴전에서 평화 협정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단지 남북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한국전쟁과 미국(박인규)'이라는 글에서 알 수 있다.

 

전쟁으로 인한 분단도 한반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4자 회담이라든가 6자 회담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여러나라들이 얽혀 있다. 세계적인 문제인 것이다. 여기에 가장 깊이 연관되어 있는 나라는 지금 미국이고.

 

미국이라는 나라가 분단에 깊이 관여되어 있기에 미국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평화를 이루어 나갈까 하는 데 중요한 지점이다.

 

이런 미국과 관련하여 한경직의 기독교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하는데, '한경직의 종교, 그 적폐의 기원 (김진호)'은 읽어볼 만하다. 한경직이라는 목사가 어떻게 우리나라 기독교계를 좌지우지할 정도가 되었는지, 또 한경직과 미국이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글이다.

 

바이러스든 전쟁이든 이제는 한 나라에서 끝나지 않는다. 세계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이런 초연결 사회에서 어떻게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게 하는 녹색평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증언들 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녀 이야기'를 읽었으면 꼭 읽어야 할 소설이다. 시녀 이야기에서 나온 그 뒷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 못했던 반전이 있고, 또 결말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긴박감을 유지한다.

 

길리어드가 배경이다. 전체주의 국가. 전체주의 국가는 외부의 힘으로부터 붕괴하기도 하지만, 내부로부터 붕괴하는 경우가 더 많다. 왜냐하면 전체주의 자체에 이미 권력 분쟁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은 정보를 독점함으로써 또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사람들을 제거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권력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는 사람들은 늘 나온다. 항상 남의 권력 밑에서 눈치를 보며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하든 상대의 약점을 잡으려 노력하고, 약점을 잡는 순간 상대를 끌어내리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을 하게 된다.

 

이런 사회가 지속되기는 힘들다. 시녀들에서는 시녀의 증언을 중심으로 소설이 펼쳐졌다면 이 '증언들'은 그 이후 세대와 길리어드에서 중심을 이루는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시녀 이야기에 나오는 시녀의 딸들이라고 추정되는 두 자매를 주인공으로, 아주머니들의 정점에 있는 리디아를 중심으로 아주머니들 사이에서도 권력을 잡기 위해 벌이는 암투. 이런 암투들 속에서 길리어드를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는 힘들이 나타난다.

 

이렇게 소설은 세 명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 인물들이 나오는 장 표지에 그림으로 그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중 한명인 아주머니들의 정점에 서 있는 리디아 아주머니의 증언 장에는 펜이, 길리어드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령관집 딸로 나오는 아그네스가 나올 때는 두건을 쓴 소녀의 그림이, 그리고 길리어드 밖에서 자란 니콜(데이지)이 나오는 장에서는 머리를 묶은 소녀의 그림이 나온다.

 

이렇게 세 사람의 증언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꿰어 맞춰지는데... 길리어드의 치부를 알고 있는 사람이 정보를 외부로 내보내는 일.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 왜 길리어드 초창기에 아주머니라는 여성에게는 특권 계급이라 할 수 있는 계급이 생겼는지를 리디아 아주머니를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어느 쪽을 억압하려 하지만 이미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 인격이 형성된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살아남아 어떻게든 길리어드의 붕괴를 보고자 하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남들을 속이고 권력의 정점에 올라가 수많은 정보를 다룰 수 있게 되는 인물. 그런 인물은 정권의 붕괴를 이끌어낼 수 있다.

 

여기에 이런 사람에게 동조할 수 있는 인물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런 인물들은 나름대로 개연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남자들의 추악한 모습을 겪은, 소녀들이 등장하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어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과정이 나타나게 된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지만, 길리어드의 붕괴를 보는 것은 젊은 세대에 한정된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세대들이 이끌어가야 하는 것이다. '시녀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 미국에서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증언들'은 이런 작품들이 나온 다음에 쓴 소설이다.

 

그러니 작가는 더 많은 제약이 있었을 것이다. 전편이 있고, 드라마가 이미 나왔기 때문에 이 작품들과 상충되는 내용으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시녀 이야기'와 드라마에 직접 나타나지 않은 공간을 메워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단지 빈 부분을 채워주는 것만이 아니라 길리어드라는 전체주의 국가가 어떻게 붕괴되어 가는지를 세 명의 여성을 중심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권력자들인 남성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저열한 존재라고 여겨지던 여성에 의해 붕괴되는 길리어드를 보여줌으로써 어느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억압하는 사회는 존재할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한다.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시녀 이야기를 읽고 이어 읽으면 재미가 배가 되는 그런 작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녀 이야기 (리커버 일반판, 무선) 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설정 자체가 끔찍하다. 인간을 이렇게 통제할 수가 있다니.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를 이 소설에서는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빅브라더라는 전제 권력만이 아니라 주변 모든 사람들이 감시자가 될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자유란 무엇일까? 자유란 결국 복종하는 것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체제를 벗어나거나 거부하려는 행동들은, 또 생각들은 처절하게 처벌을 받는다. 그것도 법에 의해서이기도 하지만, 속박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시녀들... 빨간옷을 입은 다른 사람의 아이를 낳아주어야만 하는 여자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출산이다. 출산을 하지 못하면 이들은 쫓겨난다. 쫓겨남. 그것은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일을 하는 곳 (소설에서는 콜로니라고 나온다)으로 보내지거나 또는 죽음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이되 비여성이 되는 것.

 

소설은 이렇게 남성중심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철저히 통제되는 사회. 남성중심이라고 하지만 남성들에게도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자유로운 것은 최고 지배층에 속하는 일부에게만 해당할 뿐이다. 장벽에 자주 걸리는 시체들. 그들은 체제를 부정하거나 다른 종교를 믿거나 다른 신념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죽음은 홍보를 위해서도 늘 전시된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사회에서 시녀가 된 여성이 나온다. 오브프레드. 세상에 모든 시녀들 이름은 오브로 시작한다. 오브(of). 소유격이다. 여성은 자신의 이름을 빼앗긴다. 누구의 것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자기 이름을 잃는다. 아니 빼앗긴다.

 

반면에 이름을 지닌다는 것, 독립된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먼 미래 소설들을 보면 이름이 없다. 그냥 몇 호 몇 호라고 하든지 아니면 다른 명칭이 주어진다. 이름이 있으면 자아의식이 생기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하여 예전부터 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에게서 이름을 빼앗으려고 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이름을 몇 개나 가지고 있으면서도 (족보에 올라가는 이름과 친구들 사이에서 불리는 이름 또 자신의 작품에 저자를 명기할 때 쓰는 이름 등, 본명에 호니 자니 해서 자신을 잘 드러내는 이름을 붙이며 살았다) 평민이나 천민들이 제대로 된 이름을 갖게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냥 돌쇠, 개똥이 등이었을 뿐이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시녀들은 모두 오브로 시작되는 이름을 갖는다. 자신이 어떤 사람집에 사느냐에 따라 그 이름을 자연스레 갖게 된다. 그러니 다른 곳으로 가거나 죽임을 당하면 다른 사람이 그 이름을 그대로 쓴다.

 

끔찍한 환경이다. 가정을 이루고 살던 사람이 한 순간에 가정을 잃고 자기 딸도 빼앗기고, 시녀가 된다. 아이 낳는 기계가 되는 것이다. 아이를 낳지 못하면 쓸모 없어진 기계 취급을 받아 폐기처분되듯이 사라져야 한다.

 

이런 과정을 시녀의 독백체로 담담히 풀어나간다. 그렇지만 상황은 비참하다. 철저한 디스토피아다. 자신들은 유토피아를 건설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주장일 뿐이다. 다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유토피아는 없다. 그것은 디스토피아 또는 지옥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세계일수록 다른 생각이나 행동은 용납하지 않는다. 체제 유지를 위해서 무력과 비밀경찰들에 의지한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한다. 그리고 철저하게 계급을 나눈다. 도처에 감시자, 밀고자가 있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 끔찍한 일이다.

 

특히 여성을 아이 낳는 기계 취급하는 사회, 이 길리어드 사회에서 여성은 지배층의 아내를 제외하고는 하녀나 시녀가 된다. 경제 활동부터 정치 활동까지 어떤 활동도 할 수 없다. 오로지 재생산을 위해서만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여성들을 감시하고 교육하는 존재로 여성을 불러낸다.

 

하지만 이런 사회에도 틈은 있다. 사람들을 아무리 옥죄어도 숨쉴 틈을 발견해 내는 것이 사람이다. 저항한다. 어떤 세상에도 저항하지 않는 사람만으로 구성된 사회는 없다. 오웰의 '1984'에서도 저항하는 사람이 나오고,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도 소위 야만인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저항하는 집단이 있다. 이들의 암호는 '메이데이'. 주인공은 저항단체에 의해 구출된다. 그렇게 소설은 끝난다. 아니 소설은 후일담으로 아주 오랜 후일에 주인공이 녹음한 소리를 정리하고 분석한 학자의 발표로 끝난다.

 

그런 사회가 있었음을. 시녀의 이름은 끝내 밝히지 않는다. 프레드 역시 누군지 밝히지 못한다. 다만 추정되는 두 명의 인물이 있음을 학자의 발표가 말해주고 있다. 지배층 역시 숙청을 당하고 기록이 말살되는 것이다.

 

여성이 가장 심하게 억압당하고 있는 사회에서 남성들 역시 자유롭지 않고 또 지배층 역시 자유롭지 않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그러면 억압받는 존재가 있는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고, 언제든 억압받는 존재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지배하는 권력자도 지배받는 사람들도 자유롭지 않은 사회, 그런 사회를 좋은 사회라고 강변하는 언론들, 그 가치를 스스로 내면화 한 사람들. 이 소설은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시녀인 화자를 통해 들려줌으로써 그런 사회가 얼마나 끔찍한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지금 사회는 이 소설에 나오는 길리어드보다는 많이 세련되어 있지만 감시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코로나19로 우리들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쉽게 남들에게 공개되는지를 몸소 체험하지 않았던가.

 

내 행위들이 모두 기록으로 남는 시대, 또 그것을 남들이 알아낼 수 있는 사회, 정보가 집적됨으로써 정보를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넘겨지는지를 생각하는 요즘인데, 이 소설을 읽으며 지금 우리 사회가 소설 속 길리어드처럼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 속 길리어드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많이 다르지만, 그런 직접적인 폭력은 나타나기 힘들지만 더 세련된 체계가 작동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우(杞憂)... 그래, 이런 생각은 기우여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