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읽으면 앞부분은 서정적인 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마음을 주로 표현했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읽다보면 몽고와 이루크추크가 나온다. 다른 나라 같지만 분단과 전쟁으로 우리나라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 역사를 알면 이 시들에서 표현된 것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그쪽으로 갔던 사람들. 전쟁 이후에 그쪽에서 살게 된 사람들. 이념을 떠나 이국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점점 분단이라는 우리나라 현실로 접근해 간다. 이제 시집 뒷부분에서는 직접 언급한다. 남북 분계선을, 금강산 관광으로 함께 만날 수 있던 사람들을.

 

왜 그럴까 생각했더니, 시집 뒤에 시인의 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시인은 남북 분단의 비극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기 힘들었나 보다. 그가 마음을 추스리고 낸 시집이 바로 이 시집이다.

 

   '당시엔 고통을 드러내고 남북이 정서적으로 화해를 이루는 생명적인 시들을 쓰고 싶었는데 현실은 '우리들의 땅'조차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체험적인 진실과 창조적인 진실 사이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시를 버렸다. 그 뒤 고통스럽게 몰려오던 혼란과 방황, 그리고 동족으로부터의 소외, 그게 내가 감당해야 할 삶의 양식이었다. 이 시집은 오랫동안 아물지 않던 그 몸부림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비무장지대에 떠도는 젊은 영혼들에게 이 시집을 바치고 싶다.' (156쪽)

 

그렇게 금강산 관광을 하게 되면서 남북 관계가 완화되기 시작하고, 평화의 기운이 번지기 시작했을 때 시인은 시를 통해 자신이 경험했던 세계를 형상화하 한다.

 

그런데... 지금은? 시인은 다시 절망에 빠지지 않았을까? 한참 앞으로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그 자리로 다시 돌아와 있다니. 하지만 포기해서는 안 된다.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지만 그 자리는 예전의 자리와 같지 않다. 그만큼 앞으로 달려온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시집 제목이 된 시를 인용한다. 길지만, 시인의 말에 나온 말들을 가장 잘 포함하고 있는 시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그대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

 

  물안개 속에 떠오른 공제선이

  문득 남북으로 갈라선다.

 

  땅속으로 잠복호 밀어 넣고

  얼핏 눈에 감겨오는 푸른 강줄기

  목에 가슴에 두르고

  물안개에 싸여 돌아오는 새벽

 

  바람이 분다, 태극기가 펄럭인다.

  바람이 분다, 유엔기가 펄럭인다.

  나란히 펄럭이는 두 깃발 사이로

  골짝에서 능선으로 누가 올라온다. 정지! 하고 소리쳐도 서는 시늉만 한다. 손도 올리지 않고 흰 손수건도 없이 머리 숙이고 흐느적 흐느적 걸어 올라온다. 내 몸속에서 아득히 누가 소리친다.

  (기다려, 거기부터 가시철망

  기다려, 거기부터 지뢰밭

  기다려, 거기서 손바닥 보이게

  두 손 들고 머리 들고 뒤돌아서!)

 

  물총새! 따오기!

 

  간신히 한마디씩 주고받았지만 양미간에 걸친 흰 능선이 늘어진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온몸이 따가워진다. 분계선에서 번개인지 폭우인지 불안인지 공포인지 한덩어리가 되어 숨결 으스러지게 포옹하고 서로 정신없이 갈 길 간 뒤 이틀 당겨 만나는 우리

  가시철망 앞에 두고

  마주보고 말도 없이

  위험 표지판처럼 서 있는

  우리는 누구인가?

 

  물총새 따오기 물총새 따오기

  물따총따새따 물따총따새따

 

  오십 개의 스피커에선 조금씩

  암호에서 풀려나온 노랫말이 가락 잡아

  언덕 위에 '하얀 집'을 올리고 있다.

 

  잠복조는 군화 신은 채 '하얀 집'으로 올라간다. 돌아오면 축축한 매트리스에 깃털 빠진 침낭에 발고린내 나는 잡념만 남아도 노래 흐르는 대로 흐르다 제 곡조 찾아 들어간다. 조상병은 집 나간 아내 찾으러 다니고, 연애편지 대필하던 김병장은 담장에 호박넝쿨 걷어올리다 고향 냇가를 기웃기웃, 남쪽 끝자락에 홀어머니 두고 온 김일병은? 문안 편지 끝에 모월 모일 보리타작하고 모월 모일 일손 빌리고 텃밭엔 채소만 심으라고 추신 붙이다 잠들리.

 

  우리는 벙커 속으로 내려간다. 희미한 불빛 등지고 침상 모퉁이에 앉는 그대, 작전 포기하고 밤새 분계선을 넘어와 다시 분계선 앞에 웅크리고 있는 그대, 무슨 소리가 들리는가? 팀장인가? 키퍼인가? 살아 있는가? 오고 있는가? 구석으로 어두운 곳으로 기울어가는 그대, 딸딸이가 울릴 때마다 고쳐 앉자 줄담배 연기 속에 눈만 내놓고 딸딸이를 구석으로 밀었다 앞으로 당겼다 두 손 가득 얼굴 감싸는 그대, (나는 나의 핏줄이 아니고 그대는 그대의 핏줄이 아니고, 우리는 우리의, 민족의 핏줄이 아니고 아니고 아니고 무엇인가?)

  지지난밤 불붙은 소나기에 머리 데고 오늘은 벙커 울리는 발자국 소리에 가슴 데는 그대, 나도 불기운 스친 얼굴 무심히 감싼다. 그대 마음 쏠리는 곳, 동쪽으로 서쪽으로 가다 보면 물 한바가지 마시고 엎어버린 고향 논두렁길에 이르리, 얼음판에 살구꽃 복사꽃 피우는 얼굴들 딸려나오리.

  (그러나 살아서는 돌아갈 데가 없는가

  살아서는 혼도 지닐 수 없는가)

 

  흘러간 먹구름 하늘 덮어 번져오고

  죽은 병사의 부러진 발목

  덜렁덜렁 무릎을 치고

  돌아갈 데 없는 그대를 향해

  중천을 돌고 도는 해,

 

  통문 지나 먼지 속에

  지프차 한대 들어온다,

  캄캄해진다, 후르르륵

  등줄기에 불이 붙는다.

 

  그대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다던 그 사람은? 어머니도 애인도 아닌 그 사람은? 그대가 남긴 담배꽁초와 초조한 눈빛과 어두운 몸짓과 암호 속에 떨려오던 그대 목소릴 깊이 간직하리, 살아 있는 동안 떨리는 목소리 울려오는 곳에서 떨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꿈꾸고 피 흐르는 대로 시를 쓰리. 나를 넘어 그대를 넘어 이념을 위하여 이념을 버리고 민족을 위하여 민족을 버리고

  잘 가라, 두 깃발 사이

  우리 땅 어디에도

  있지 않았던 그대여,

  그대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

 

신대철,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 창비. 2005년.119쪽-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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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잠 (한글판) - 시극 나비잠
김경주 지음 / 호미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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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작품 자체가 몽환적이다. 이런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지만 현실에서 벗어나 마치 꿈 속을 유영하는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한양도성을 축성하는 일. 엄연한 역사적 사실인데, 이 시극은 그 사실을 바탕으로 흐릿한 안개 속에서 도성이 축성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무엇 하나 뚜렷하지 않다. 그냥 흐릿하고, 안개에 차 있는 듯한, 달빛에 취해 사람들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달은 우리를 감상에 젖게 하기도 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우리를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로 데려가 준다던데.

 

그래서 공포영화나 또는 괴기스러운 영화들에서 달은 그 분위기를 고조하는 역할을 한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햇빛의 세계가 아니라 달빛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렇게 김경주의 시극은 내게 다가왔다.

 

손에 모래를 움켜쥐었는데 잡히는 것은 아주 조금이고 나머지는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 버린 듯한 느낌. 분명 한 편의 완결된 시극을 읽었는데 해결된 것이 하나도 없고, 마음에 구멍이 난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만큼 여운이 크다면 큰 시극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은 인간을 달랠 수 있다. 인간은 인간이 아닌 것도 달랠 수 있다. 운명이란 자신의 삶 속에서 이야기를 비워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불면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잠을 달래려면 자장가를 찾아 나서야 했다. (5쪽에서)

 

이 시극에서는 불면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잠을 자지 못한다. 잠을 잘 수가 없다. 잠을 자지 못하는 것만큼 큰 결핍이 어디 있겠는가. 잠이 시간을 빼앗아간다고 생각하겠지만 잠이 없으면 인간의 생명도 없다.

 

그러니 불면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다. 불면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달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고 밤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다. 흐릿한 안개, 무언가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세계를 살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권력을 쥐고 있는 대목수도 엄마를 잃은 결핍을 지니고 있고, 악공 역시 엄마를 떠난 결핍이, 달래는 잠을 자지 못하고, 울지 않고 웃기만 하는 그런 결핍이, 성을 지키는 병사들 역시 잠들면 안 되고, 살아 있는 여인으로 달래에게 젖을 줄 수 있는 여인으로 노파가 나와 젖이 나오지 않는 결핍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 세상은 결핍이 없는 인간이 없음을, 누구나 결핍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음을, 그런 결핍을 시극에서는 불면으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싶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인데 가질 수 없는, 당연함이 당연하지 않음이 된 세계. 이 세계가 바로 불면의 세계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는가? 결핍을 감추려고 하면 해결이 될까? 아니다. 결핍을 가리려고 한다고 해도 결코 가려질 수 없다. 결핍은 인정해야 한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 다음으로 가야 한다. 그래야만 해결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시극은 우리가 감추려고 하는 결핍을, 불면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보여주려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핍을 드러냄으로써 결핍을 채워나갈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 결국 달래의 피로 비가 내린다. 불면의 세계를 이 시극의 사람들은 가뭄으로 겪고 있었는데... 비가 내리면서 시극이 끝난다는 것. 누군가의 죽음이 다른 사람에게는 삶이 된다는 것. 그것은 바로 결핍을 가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결핍을 인정한 상태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

 

바로 모성이다. 어머니다. 달래는 그래서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된다. 어머니는 자신을 채움으로써가 아니라 비움으로써 자식들이 잘 살아갈 수 있게 한다. 메마른 땅에 비를 내려주는. 본인 스스로 결핍덩어리인 달래가 그 자신으로 다른 사람을 충족시켜 준다. 즉, 시인이 말한 것처럼 채워넣는 것이 아니라 비움으로써 다시 채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작가의 말로 돌아온다.

 

시극은 이야기에 속살이 찌는 것을 밀어낸다. 배를 밀 듯 언어를 대양까지, 문 바깥으로 내보내야 한다. (5쪽)

 

대양을 여행하는 것은 그 다음 몫이다. 이 시극, 작가는 잘 밀어냈다. 밀어낸 시극의 배를 타고 여행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그런데 이 여행은 단순명료하지 않다. 온갖 안개와 풍랑과 암초를 만나는 여행이 될 것이다. 그것 역시 결핍이다. 그런 결핍을 인정하고 떠나야만 여행의 맛, 멋을 알 수 있다.

 

아직 목적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아니 목적지가 없는지도 모른다. 내게 김경주의 시극은 그냥 바다를 떠다니는 배에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대양에 떠 있는 배에 내가 있다. 나비잠, 아직 내겐 자장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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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뒤숭숭하다. 뒤숭숭 정도가 아니라 위협을 느낄 정도다. 서양 어느 학자가 말한 위험 사회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코로나 19라는 사상 초유의 감염병으로 전세계가 환란에 처해 있고, 단순히 질병이라는 직접적인 원인 말고도 이 질병으로 인해 다른 일들도 어려움에 처해 있다.

 

  감염병만이 문제가 되면 어떻게든 모든 지혜를 그쪽으로 집중해 해결하려고 할텐데, 우리는 분단이라는 특수상황으로 인해 더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나마 화해 분위기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올해 들어 예전으로 돌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시 긴장의 시대로 들어서면 우리들 삶은 더욱 피폐해질 것이다.

 

이럴 때 그나마 시를 읽으며 마음의 위안을 받는다. 박준의 시를 읽으면 세상의 잡다한 갈등들을 잠시 잊고 따스한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그렇게 시를 통해 위안을 얻는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마음을 위로해주는 시가 필요하다는 생각. 박준의 시를 읽으며 생각한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 대부분이 따스하다. 작은 일에도 마음이 움직이고 그 움직임이 공감을 동반하고 있다. 시집 제목을 보라. '함께'라는 말이 나온다.

 

홀로 외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외로운 상태에서도 함께 할 수 있는 것.

 

'가을의 말'(58-59쪽)이라는 시에서 이런 구절이 나온다.

 

외롭지? 그런데 그건 외로운 게 아니야 가만 보면 너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도 외로운 거야 혼자가 둘이지 그러면 외로운 게 아니다, (박준, 가을의 말 부분)

 

이렇게 박준 시집에는 함께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홀로 있더라도 먼 과거에 떠난 존재도 그 자리에 불러온다. 그렇게 함께 지낸다. 이 함께라는 말 얼마나 좋은가. 인간은 홀로 설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하지만, 그렇기에 함께 있으면 더욱 좋은 것이 인간이다. 자신과 함께 있을 사람을 갈구하는 것.

 

이 시집 첫시는 '선잡'이다. 함께할 때 서투를 수 있다. 선잠은 깊게 든 잠이 아니지 않은가. 다른 사람이 만나 함께 할 때 우리는 서투를 수밖에 없다. 이 서투름을 인정하고 함께 가는 것. 그게 인간의 길이다. 우리를 따스하게 하는 인간의 길.

 

코로나 19를 이겨내는 것도 바로 이런 서투름들을 받아들이는 함께일 테고, 남북관계를 평화로 이끌어가는 것도 서로의 서투름을 인정하고 거기에서 출발하는 것 아닐까 한다. 마치 이 시집에 나오는 시 '선잠'처럼.

 

  선잠

 

그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남들이 하고 사는 일들은

우리도 다 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발을 툭툭 건드리는 발이었다가

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다가

 

고개를 돌려 마르지 않은

새 녘을 바라보는 기대였다가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잠이었습니다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사. 2018년. 초판 2쇄.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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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방.악마와 선한 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5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지영래 옮김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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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폴 사르트르.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이름이다. 문학자로서라기보다는 철학자로서. 실존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고.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통해 지식인이 지녀야 할 책무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사람이다. 또 시몬느 드 보부아르와의 계약결혼(?)으로도 알려진 사람이기도 한데. 그가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쓴 소설도 실존주의 소설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번에 사르트르가 쓴 희곡을 읽었다.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고른 책이기도 하고.

 

우선 '닫힌 방'이라고 하면 폐쇄된 세계를 연상한다. 출구가 없는 곳에 갇힌 세 사람.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볼 수밖에 없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 그들과 서로 어울리지 못할 때 그때 닫힌 공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 처할까. 그 점을 볼 수 있게 하는 희곡이다.

 

출구가 없는 곳에 갇혀 있어야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지내야 할까? 다른 사람으로 인해 내가 힘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인해 내가 행복해질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때는 공간은 닫히더라도 사람들 마음을 열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공간만이 아니라 관계도 닫히게 된다. 이 희곡 '닫힌 방'은 공간의 닫힘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닫힘'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서로가 끊임없이 말을 하지만 그 말은 상대에게 가 닿지 않는다. 공간만큼이나 관계 역시 닫혀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이런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희곡이다.

 

'악마와 선한 신'은 인간의 길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악마와 선한 신이라는 제목에서 모순을 느낀다. 그냥 '악마와 신'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신에게 수식어를 붙일 수가 있지. 신은 이미 선악의 개념을 넘어선 존재 아닌가.

 

그런데도 제목에 '선한(bon)'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신을 보는 것이다. 즉, 인간의 길은 신의 길과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군대를 이끌고 사람을 학살하는 앞부분의 괴츠가 악마에 해당한다면, 중간부분의 괴츠는 선한 신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는 신의 위치에 오르지 못하고 신의 뜻을 확인하는 인간에 불과하다. 자신이 악마에서 신으로 전환하려는 모습을 보이지만, 사람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니 '선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다. 완전한 신에게는 그런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다. 수식어가 붙었다는 것 자체가 괴츠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그는 땅의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제목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 점을 보여주는 장면이 그가 사랑을 베풀려던 농민들은 이길 수 없는 반란을 일으키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전쟁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농민군들에 의해 학살당하다는 장면이다.

 

자신이 사랑을 베풀려던 사람들에게 거부당하는 괴츠. 그는 결국 인간의 길로 돌아온다. 인간은 악마도 신도 될 수 없다. 그 중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완전한 사랑도, 완전한 증오도 인간의 길에 속하지 않는다.

 

인간의 길은 바로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증오 사이에 있다. 균형이다.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치우친 것은 인간이 갈 길이 아니다. 악마 쪽이든 신 쪽이든 완전한 인간은 인간 사이에 존재할 수가 없다. 인간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가 없다.

 

괴츠는 악마와 신의 길을 좇다가 결국 인간의 길로 온다. 이제 그는 완전함을 포기한다. 그에게는 인간으로서 피를 흘리며 분노하고 사랑하고 절망하고 기뻐하는 그런 일이 기다리고 있다.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 소위 칠정(七情)이라고 하는 것을 지니고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거기에만 매몰되지 않는다. 그것을 극복하려고 한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다른 인간들과 어울릴 수 있는 한계까지... 이것이 바로 중용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악마와 신 사이에서 인간의 길을 찾는 것은 결국 자신이 인간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다음에 인간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 고고한 모습으로 홀로 지낼 수는 없다. 괴츠가 다양한 과정을 통해서 다시 농민들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 신부였던 하인리히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 어쩌면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인간의 길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는가.

 

까딱하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 수도 있지만, 선한 신을 추구하면서 그에게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맡기는 것도 문제라는 것, 인간에게는 인간의 길이 있음을 생각해보라는 것이 이 희곡이 말하고자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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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서 만난 세계사 라임 틴틴 스쿨 13
손주현 지음 / 라임 / 2019년 1월
평점 :
절판


'동물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 있다. 동물원이 필요할까라는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인물 '하겐베크'

 

그는 지금 우리가 보는 동물원의 원형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데, 물론 동물의 생태를 보장하는 동물원이 아니라 인간의 눈에 그럴 듯하게 보이는 동물원이었지만, 기존 동물원의 모습을 바꾸는데 일조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이 하겐베크라는 독일인 참 여러가지 모습을 지니고 있다. 동물을 사랑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즉 동물에 대한 사랑과 돈을 적절히 조화시키려 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반대로 돈을 위해서 동물을 이용만 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 이 책에 많이 나온다.

 

하겐베크가 했다는 말... 아마도 이 시대에 이런 말을 했다가는 동물보호협회를 통해 고발당하고 감옥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 동물 학대죄로. 그런데 근대에는 이런 일도 비일비재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동물원에서 보는 세계사일지도 모른다.

 

"이토록 귀여운 새끼 바다코끼리 다섯 마리를 잡기 위해 어미 예순여덟 마리를 죽였습니다." (185쪽)

 

인간이 자신들의 호기심이나 흥미 또는 이익을 위해서 새끼를 필요로 하는데, 이 새끼를 잡기 위해서는 새끼를 보호하려는 어미들을 죽여야 하는 것이다. 특히 코끼리같은 동물들은 집단 생활을 하고, 또한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인간과 같은 정서도 지니고 있다고 하니, 새끼를 포획하기 위해서는 어미들을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예를 보면 동물들에게 감정이 있을까 없을까에 대한 논쟁은 이제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한 코끼리 떼에서는 다리가 불구인 동료를 위해 모두가 걷는 속도를 맞춰 주는 모습이 발견되기도 한다. 또 코끼리는 동료를 만나면 행복에 겨워 커다란 귀를 펄럭이며 괴성을 지른다. 사람과 다를 바 없는 감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215쪽)

 

여기까지 오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동물이 인간에게 다가온 역사를 시간 순서대로 살핀 것이 이 책이다. 동물원을 통해서 세계사를 배운다기 보다는 동물이 인간에게 어떤 존재로 다가왔는지를 살펴보는 책이다. (왠지 세계사 하면 인간 중심의 역사를 떠올리게 된다)

 

인간은 처음에 동물을 경외했다. 두려운 눈으로 동물을 보기도 했고, 그 힘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것이 고대에 동물이 인간에게 다가온 것이다. 그런데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동물을 부리기 시작했다. 가축은 말할 것도 없고, 힘센 동물들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다음에는 동물들을 모아 남들에게 과시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 과시의 과정에서 자신의 경제력이나 권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절대군주들은 지금 동물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만들고 감상하고 자랑했다고 한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특정한 집단에서 대다수 사람들에게로 동물이 다가오게 되는데, 이때 동물사냥꾼이 등장한다. 동물을 잡아들여 막대한 부를 챙기려는 사람들. 이들에게 동물의 권리는 안중에도 없다. 근대적 의미의 동물원도 이때 나타난다.

 

현대에 들어서는 외교의 수단으로 동물이, 특히 판다 외교라는 말을 듣는 중국의 외교, 중세 시대에도 동물들을 선물로 주는 외교가 있었지만, 그때와는 다른 차원에서 동물을 이용하는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 중심으로 동물을 대하다 보니, 인간 중에서도 정복당한 인간들이 전시되는 일도 있게 되었으니... 어느 한 종이 다른 종들을 정복하고 이용하는 것이 인간들 사이에서도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런 일들은 이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데... 여전히 인종 간에 차별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동물원은 동물을 인간의 취향대로 이용하는 장소가 아니다. 동물들의 생태를 연구하고, 멸종위기 동물들을 어떻게 하면  이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도록 할까를 연구하는 장소로 바뀌어 가고 있다고 한다.

 

동물권리와 동물복지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동물에게도 일정한 권리가 있음은 인정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렇게 이 책은 동물원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동물이 인간에게 다가온 역사를 살피고 있다. 이는 단지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역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다른 존재를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를 살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동물을 대한 역사는 결국 우리 인간이 이 지구에서 어떻게 다른 존재들과 생활해 왔느냐를 살피는 것이니까. 수많은 생명체들이 왔다가 사라져갔는데, 그것이 인간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 그래서 요즘 동물원은 사라질 종들을 유지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는 것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이 냉동 동물원이라고 한다는데...

 

이런 냉동 동물원보다는 다른 생물들이 살아갈 장소를 더이상 파괴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이게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가야 할 세상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도 역시 냉동 동물원(?)에 자신의 유전자를 보관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동물원에서 만나는 세계사는 동물이 인간에게 다가온 역사이기도 하지만 우리 인간의 역사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떻게 다른 존재들과 어울려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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