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보이는 창이 왔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고 있는 삶창.

 

  이들이 행복한 세상은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될 수 있을텐데...

 

  국민을 대변한다는 국회에서 하는 일들이, 일이란 표현보다는 짓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선량(選良)이라는 사람들.

 

  그들은 선량이 아니라 불량인데, 어쩌다 권력의 중심에 들어가 얼굴과 이름을 알리고, 정당이라는 권력을 등에 업고 국회라는 곳에 들어가 그냥 그렇게 시간을 때우고, 큰소리를 치다가 나오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지대한 가운데, 삶창처럼, 거대 언론이, 아니 다른 언론들도 잘 다뤄주지 않는 이러한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은 연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코로나19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고 많겠지만 언론의 관심에서 벗어난 사람들, 사회의 음지에 있는 사람들이 더욱 고통받고 있음을 이번 호를 통해 알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재난지원금도, 고용유지 지원금도, 하다못해 실업수당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 그냥 사회에서 내쳐지게 된다. 그런데도 국회에 있는 그 불량들은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거대 언론들도 마찬가지다.

 

너무도 안타까운, 그런 일이 일어나면 잠시 반짝하다가 그만이다. 그러니 사회는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다. 제자리 걸음인 것은 확실한데, 기대치가 높아져서 많이 뒤로 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앞으로 앞으로 참 많이 나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제 자리라니.그런 제자리가 아니라 후퇴다. 촛불을 통해 정권이 바뀌었는데, 무엇이 달라졌을까?

 

사회 최하층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 놈이 그 놈이다라는 말이 통용되는 현실 아니던가. 절망에 빠진 그들에게 희망을 보여줄 수는 없는 걸까?

 

삶창에서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지만, 더 많은 사람들, 좀더 힘있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어야 하지 않을까.

 

최근에 전교조의 노조 아님을 통보한 것이 잘못이라는 판결이 났다. 이번 호 표지 그림을 보면서 이게 무슨 그림일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전교조와 관련된 그림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는... 하지만 여전히 지속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는. 그래서 더욱 슬픈. 그림 밑에 있는 설명을 읽어보면 부끄러운 과거를 만나게 된다. 이런 부끄러운 과거가 반복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여기에 인하병원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 그들이 그렇게 힘들게 성남시의료원이 설립되게 했음에도 그들은 그 의료원에서 일을 하지 못하게 된 이야기. 공공병원 이야기, 공공의료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이때에, 공공의료를 한 도시에서 실현시키기 위해 그렇게 노력한 사람들이 공공의료 현장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이 현실이 과연 제대로 된 현실일까?

 

이것이 공정일까? 공평일까? 그냥 너희들은 해고된 사람들일 뿐. 전에 있던 병원에 근무했던 사람들일 뿐이라고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이들이 공공병원을 설립하기 위해 주민발의부터 시작해서 오랜 시간을 노력해 왔는데, 정작 공공의료원이 만들어지자 초대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공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박일환, 시인의 시선-초대받지 못한 사람들)

 

이런 것도 제자리 걸음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다. 이건 명백한 퇴보다. 이런 퇴보를 막아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든다. 삶이보이는창 123호를 읽으며,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사회 최하층에서, 또 바로 그 위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여야 한다는 것.

 

삶창만이 아니라 거대 언론들이 국회라는 그런 불량들에 관심을 가지는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하고 싶다면, 가장 행복과 거리가 먼 사람들에 관심을 가지고 이들이 행복하게 할 수 있도록 보도를 통해 압력을 넣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또 이렇게 이들이 관심을 가지면 그것이 연대로 나아가고, 그런 연대는 사회를 좀더 좋게 바꿀 수 있다는 것.

 

이런저런 생각이 든 이번 호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은 삶창이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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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으로 다시 쓰는 옛이야기
지현 외 지음 / 이프북스(IFBOOKS) / 2020년 7월
평점 :
품절


제목을 보면서 떠올린 작품들.

 

[흑설공주 이야기], [바다로 간 마녀]. [이갈리아의 딸들]

 

이 작품들은 서양에서 전래된 동화를 페미니즘으로 다시 썼거나, 또는 남성 중심의 사회를 여성 중심의 사회로 바꿔서 표현했다. 그래서 남성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왔다는 것을 깨닫도록 해준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작업이 이루어져 왔겠지만, 이번에 나온 작품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작품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다시 쓴 것이다.

 

대상 작품은 '콩쥐 팥쥐, 홍길동전, 구미호 이야기, 나무꾼과 선녀'다. 이 중에 홍길동전은 홍길동전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고쳐쓴 것이 아니라, 아기장수 이야기와 오누이 대결을 홍길동이라는 이름을 빌려 다시 쓴 것이다.

 

그냥 전래동화를 재미있게 읽어왔는데, 그 전래동화가 재미를 넘어 우리들이 사고를 결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교육학 용어로 말하면 잠재적 교육과정에 해당했음을 이 작품들 뒤에 실려 있는 작가의 말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작품들과 더불어 책의 맨 뒤에는 단군신화를 재해석한 글이 실려 있다. 우리는 흔히 단군할아버지라고 하고, 우리 조상이라고 하지만, 그 신화 속에 담겨 있는 가부장적인 모습, 남성성을 확대 · 유지하는 역할을 단군신화가 하고 있었음은 생각하지 않는다. 이 글은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견해가 다를지라도 이런 견해가 있다는 것은 남녀가 동등하게 지내려면 참조할 필요가 있단 생각이 든다.

 

첫째,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월성이 남성 3대의 타고난 신성으로 인정되고 정당화되었다. 둘째, 여성을 남성 3대(시아버지, 남편, 아들)의 수직적 관계 속에 위치시킴으로 인해 가부장적 혈통제에 대한 여성의 복종이 완성되었다. 셋째, 한 남자(환웅)와 두 여자(웅녀와 호랑이)를 수평적 관계로 위치시킴으로써 일부다처제의 전통이 자리 잡고 정당화되었다. (280-281쪽)

 

부록으로 실린 단군신화의 해석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고,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음을 생각하면, 페미니즘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도 여러 시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동안 남성성을 중심으로 한 가부장적인 사고체계가 지속적으로 우위를 점해 왔다는 것이다. 그것이 알게 모르게 여러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 무의식에 고착되어 있었으므로, 그런 무의식에 쌓여 있던 사고체계를 흔들어 놓을 필요는 있다.

 

흔들려야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번은 어, 정말 그런가 하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콩쥐팥쥐에서 팥쥐와 계모는 나쁘게만 나오는가? 물론 베델하임처럼 성장 이야기로 읽어서 부모로부터, 또 형제로부터 독립된 개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대타적으로 악인을 설정하고, 그 존재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하는 말도 성립하겠지만, 그렇게 계모와 계모의 자식을 악인으로 설정하는 것 자체가 이미 가부장적인 면을 수용하고 있는 이야기 방식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집에서 팥쥐는 능력있고 우애 있는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고, 계모 또한 사려 깊은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표현되고 있다. 여성들이 남성들에게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홍길동의 누나로 나오는 홍길영 역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능력, 어쩌면 더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그리고 오누이가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합치는 모습으로 표현해서 비극이 아닌 진취적인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구미호 이야기는 특히 슬프다. 왜 구미호에는 수컷이 없는가라는 생각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는데, 구미호 이야기를 서양 중세의 마녀 사냥과 비교하고, 힘없는 여성을 짓밟는 남성들의 야만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선녀와 나무꾼은 많이 언급되는 작품이고, 다르게 표현된 작품이기도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딸을 등장시킨 것이 의미가 있다. 딸에게도 크나큰 짐이 지워졌음을, 이 작품에서 알 수 있는데, 그래서 부부간의 문제가 부부간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짐을 지우지만, 그 짐을 서로가 덜어줄 수 있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 옛이야기를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다시 쓴 작품들. 읽어볼 만하다. 아니, 읽어야 한다. 페미니즘이 남성을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상이니, 이런 작품을 읽고 내 안에 있던 가부장적 요소들을 들여다 보는 눈이 필요함을 깨닫고,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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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된 시집이다. 1986년에 나온 시집이니, 지금으로부터 무려 34년 전에 나온 시집이다.

 

  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들에게 고정희란 시인은 낯선 시인이 아니라 친숙한 시인이었을텐데, 지금은 낯선 시인이 되었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시인이기도 해서, 지금은 만나볼 수 없는 시인이기도 하지만, 고정희가 살던 시대와 지금 시대는 달라져도 너무 달라지기도 했다. 그런데 가끔 정말 그렇게 많이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고 어디 시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던가. 좋은 시란 세월의 힘을 이겨내는 시 아니던가. 그러니 비록 오래 된 시집이지만 분명 지금을 생각하게 하는 시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읽었따.

 

이 시집은  헌책방에서 우연히 만났다. 고정희란 이름만으로도 시집을 사는데 전혀 망설이지 않았으니. 거기다 요즘은 구하기 힘든 시집임에야.

 

80년대 우리나라 상황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 있다면 이 시집의 2부에 실린 시들을 묶고 있는 제목 '프라하의 봄'에서 체코를 생각하지는 않으리라.

 

체코에서 일어났던 프라하의 봄처럼 우리에게도 서울의 봄이 있었으니까. 서울의 봄이라고 말하기에는 시대가 너무도 암울해서 다른 나라를 끌어와 표현을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여 고정희의 이 시집에는 당시 우리 사회를 고민하면서 살아가는 한 시인을 만날 수 있다. '프라하의 봄'이라는 연작시들과 더불어 이 시집에 실려 있는 또다른 연작시는 '현대사연구'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것에서 느낀 점들을 시로 쓴 것인데... '현대사연구 · 10'이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삼신할머니와 만난 바리새 율법은 / 성령만능주의 광신교를 만들고 / 중국 유교와 만난 바리새 율법은 / 가부장제 복종주의 종파를 만들고 / 단군할아버지와 만난 바리새 율법은 / 국가제일주의 종파를 만들었읍니다 / 이들은 각기 분파가 다르나 / 따져보면 두 가지는 하나로 닮았는데 / 교주를 하나님쯤으로 믿으며 / 부조리한 일일수록 외면하는 것입니다 / 그름과 옮음에는 대답이 없는 신전 / 거기에 황금제단을 쌓고 / 일곱삼년 안태굿에 일월성신 키우니

(고정희, 눈물꽃. 실천문학사. 1986년. '현대사연구·10' 부분. 117쪽.)

 

세월이 한참이나 지났는데, 어찌 이리도 변하지 않았는지... 그런 생각이 들게 한 시다. 오래 된 고정희 시집을 읽으며 우리가 지나온 날들을 생각한다.

 

과연 우리는 과거로부터 얼마나 더 앞으로 나아왔는지...어쩌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고 힘껏 내달렸지만, 원 위에서 뛴 격으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만 것은 아닌지.

 

달리고 달려 제자리에 오는 일을 막기 위해서도 우리는 우리를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단지 나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를 볼 수 있는 눈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맹목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되겠기에. 고정희 시집 '눈물꽃'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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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 김영하와 함께하는 여섯 날의 문학 탐사, 개정판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문자라고 한다면, 읽기와 쓰기는 그러한 활동의 완성일 것이다. 문자로 쓰고, 그 문자를 읽는 행위. 그것을 인간은 자신의 삶을 더욱 깊고 넓게 만든다.

 

이 책은 소설가 김영하가 읽기에 대해서 쓴 것이다. 그가 읽어온 책들을 여섯 분야로 정리해서 쓰고, 우리에게 그것을 읽게 하고 있다.

 

즉, 김영하는 읽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고, 우리는 읽다라는 제목에 맞게 그 글을 읽는다. 읽기를 통해 김영하가 생각하고 깨우치고, 자신의 삶을 풍부하게 했던 것들을 통해서 우리 삶에 또 하나의 결을 보태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내가 그동안 읽어온 책들, 특히 나를 작가로 만든 문학작품들에 바치는 사랑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206쪽)

 

그는 자신이 읽어 온 책들에게 사랑 고백을 한다. 우리는 그 사랑 고백을 다시 읽으며 나는 도대체 어떤 책들에게 사랑 고백을 할 것인지 생각한다.

 

참 멋진 구절들이 많다. 이 구절들이 김영하가 새롭게 쓴 구절이 아니라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 뽑아온 구절들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이 책에서는 김영하의 것이다.

 

읽기는 바로 이런 것이다. 다른 사람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문자라는 대상으로 표현된 그 무엇을 읽기를 통해 내것으로 만드는 행위가 바로 읽기인 것이다.

 

다양한 작품들이 나오지만, 첫부분에서 이 책은 이미 성공하고 있다. 고전에 대해서 한 말로, 사람들로 하여금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고전을 읽으면서 그냥 '읽는다'른 말 대신에 '다시 읽는다'라는 말을 한다고.

 

고전은 당시를 넘어서는 무엇이 있는 것. 그래서 안 읽었어서 읽은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여러번 읽어도 늘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는 것. 그러므로 고전은 '다시'읽는 것이 된다. 이는 자신이 읽어서 알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되고 오만한 생각이었는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김영하는 독서의 가치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독서는 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휴브리스)과의 투쟁일 것이다." (28쪽)

 

자신이 부족함을 깨닫게 하는 것, 그래서 겸손해지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읽기다. 이런 글들이 계속되면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악당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왜 소설에서는 악당이 선한 사람보다 더 자세하게 표현되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악함을 돌아보게 함이라는 것, 악당이 그냥 악당이 아니라 매우 복잡한 악함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음을, 사람은 단순하게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이루어지고 있음을, 그래서 사람을 복합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문학, 특히 소설이라는 것을 자신의 읽기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읽는 인간이라는 말이 통할 정도로, 사람들은 늘 읽는다. 읽는다고 의식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늘 읽고 있다. 그것이 문자가 아닐지라도 우리는 모든 것을 읽는다.

 

읽는 행위는 바로 사람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런 읽는 행위에 문자로 된 책을 읽는 행위는 한 차원 더 나아간 행위가 된다. 어떻게 읽기가 우리 삶을 넓고 깊게 만들 수 있는지를 이 책을 읽으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또 읽으면서 많은 작품을 만나게 된다. 이미 읽었다고 알고 있는 작품을 만나게 된다. 그가 언급한 작품들은 많이 언급되는 작품들이고, 어렸을 때 명작이라고 꼭 읽어야 할 필독도서에 든 책들이니.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김영하가 고전에 대해서 느꼈던 감정을 김영하 글을 읽으며 그 책들에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된다.

 

다시 읽고 싶어지게 한다. 내가 읽으면서 발견하지 못했던 점을 다른 사람이 발견하고 이야기해주고 있으므로, 다시 읽으면서 과연 그런가 찾고 싶고, 또 다른 면도 찾을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책에 흥미가 떨어진 사람, 이 책을 읽으면 좋다. 다시 흥미가 생길 것이다. 도대체 왜 책을 읽어야 할까 생각하는 사람, 책을 읽어야 할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읽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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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살 때, 사실 시집에서 몇 편의 시를 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느 한 시라도 마음에 꽂히면 좋고, 그런 시가 없더라고 어느 한 구절이라도 마음에 꽂히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언어는 언어끼리 모여 형태를 이루고, 그 형태가 온전하게 내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언어 자체만으로도 다가올 때가 있다. 시란 그런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시를 읽는 데 정답이 있을 리가 없고, 시집을 사는 데도 정답이 있을 수가 없다. 그냥 자신의 마음이 끌리는 대로 사면 되고, 읽으면 된다. 비록 머리 속에 남아 았지 않더라도 읽는 순간, 자신의 마음이 변하게 되었을 테니까.


  이 시집은 제목을 보고 샀다. 제목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다' 착한 사람이 잘사는 사회였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텐데... 어쩌면 옛말에 욕을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는 말이 어울리는 시대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이 제목은 더욱 마음에 와닿는다.


왜 욕을 먹으면 오래 살까?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다. 욕을 먹는 사람은 자신만을 생각하지 남을 생각하지 않는다. 남의 감정을 헤아리는 섬세한 감성을 지니지 못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편의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사는 것이다.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들은 오래 살 수밖에 없다. 오로지 자신만을, 특히 남이 욕을 하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으니 말이다.


이런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순간 순간마다 마음 쓰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마음을 쓴다는 것, 자신의 마음을 다른 존재에게 내어준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 화수분이면 좋겠는데, 이게 어느 순간 고갈되고 만다. 고갈되었을 때, 더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그러니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다'는 이 시집의 제목이 마음에 와닿을 수밖에. 아직 착한 사람이 되지 못했기에. 그렇지만 착한 사람이고 싶기에.


어떤 시에서 이 구절이 나왔을까 시집을 첫시부터 주욱 읽어가다. 이번 목표는 이 구절이 나온 시를 찾는 것이다. 읽다읽다 드디어 찾았다. '보리밭 놀이방'이라는 시다.


보리밭 놀이방


  보리밭에는 종달새가 살고, 종달새의 영혼은 나에게 날아왔다. 내가 갖고 놀다가 깨트려버린 알에서는 노란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영혼은 그 흐느낌처럼 남아서 나를 둘러싼다. 점막의 세월 속에 바람이 분다. 가끔은 내 장난감이 되어준 돌멩이와 달팽이와 지렁이 들이 아직 꿈틀댄다. 나는 변하지 않았나. 착한 벌레에서 착한 사람으로


  거인들이 밭에 씨를 뿌릴 때, 나는 보리밭에서 자랐다. 해 질 녘 거인들은 기도를 하고 어린 나를 들어 올려 집으로 데려갔다. 거인과 헤어지게 된 건 보리가 자라서 익고 베어낸 후의 쓸쓸한 들판을 본 후였다. 텅 빈 속을 드러낸 채 굴러다니던 새의 알, 달팽이의 집, 말라비트러진 지렁이들. 그들의 영혼을 채워 목이 붓도록 펑펑 울 수 있게 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그때 내 손에서 예쁘게 잠자고 있던 종달새의 알, 긴 촉수를 뻗어 나를 핥던 달팽이의 혀, 기어간 자리마다 흘려놓은 지렁이의 눈물. 나는 사라져버린 파문을 움켜쥐고 생각에 빠졌다. 내 머리에 그렁그렁 울 것 같은 구름모자를 누가 씌워주었다.


  나는 아직 변하지 않았나.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다. 힘없는 사람이 되는 건 더 두렵다. 어린 시절처럼 보리밭에 쭈그리고 앉아 생각한다. 보리밭에서 쭈그리고 앉아 놀던 시절. 뜻밖에도 내 눈동자에서 부화한 새가 날아가기도 한다. 아직 깨지지 않았나. 구름과 새. 아직 헤어지지 않았나.


박서영,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다. 걷는사람. 2019년. 70-71쪽.


어쩌면 나이 들어가면서 잃은 것. 그것은 조화로운 삶일지도 모른다.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세상. 물론 이 세상에서도 약육강식은 존재한다. 한 생명은 다른 생명으로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내 생명이 다른 생명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다른 생명들을 타자로 취급하기 시작한다. 그들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지기 시작하면 파괴가 일어난다. 이제는 옛것들과 이별한다. 옛것들과 이별하지 못하면 자신의 마음에 구멍이 난다.


여기서 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힘없는 사람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것은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착한 사람, 힘없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기에, 이들이 있기에 아직은 세상은 살 만하다.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지만, 그렇다고 악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이 시에 나와 있는 말 중에 '뜻밖에도'란 말처럼, 그렇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세상은 아직도 더 많은 착한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직 다른 생명들과 헤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시인이 '뜻밖에도'라고 한 말에서 가능성을 본다. 착한 사람이 되는 건 무섭지만, 그렇다고 착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이다. 


이러니 누가 뭐래 해도 아직 이 세상에서 '뜻밖에도' 우리는 이런 착한 사람을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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