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코로나 19에 대한 이야기와 또다른 하나는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던 의사들의 진료거부 문제나 또는 공공의료 문제다.

 

  코로나 19는 세계를 대혼란에 빠뜨렸다. 어쩌면 이 코로나 19로 세계가 위기의식을 지니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위기는 곧 기회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여전히 성장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세계 각국, 그리고 우리나라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재난이 앞으로도 계속 발생할 가능성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삶을 바꾸지 않으면 코로나 19와 같은 재난은 반복됨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재난으로 재난 소득이나 기본 소득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이것이 중도에 멈추었다는 생각이 든다.

 

재난 소득이나 기본 소득은 우리의 생존에 필수불가결임을 생각해야 하는데, 일회성으로 그치고 말면 안 되는데, 그렇게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씁쓸하다.

 

이번 호에서 강남훈이 쓴 '재난소득 논쟁에 답한다'는 글은 꼼꼼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재난 소득을 넘어 기본 소득으로 논의가 확장되어야 한다.

 

여기에 이러한 재난 상황에서 우리는 k-방역이라고 해서 성공적으로 코로나 19에 대처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면에서 보면 과연 우리나라 공공의료가 제대로 확립되어 있나 하고 질문을 하면 그렇지 않다는 답이 나온다.

 

공공의료에 대한 지원보다는 민간의료에 대한 의존도가 훨씬 높음을, 우리나라가 k-방역에 성공했다고 하지만, 공공의료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정부 정책에 협조한 결과고, 또한 감염되지 않도록 사전에 차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전에 감염을 차단하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우리들의 정보를 순순히 넘겨주었던가. 내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기록되고, 남에게 알려지는 일을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세상이 되지 않았는가?

 

개인정보보호 운운하지만,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공개되고, 기록되는 이 세상에서 촘촘하게 짜여진 이러한 사회에서 감염은 차단되기 쉽지만, 이러한 차단의 성공으로 치료를 하는 공공의료 부분에 눈을 돌리지 못한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

 

그러니, 성공의 이면에 있는 것들. 의사들이 진료거부를 한 것이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들의 의견도 참조하면서, 개혁을 추진해야 하고, 또 공공의료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민간 의료를 더욱 확장하는 식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번 호에서 지적하고 있다. 

 

김종철 선생은 갔지만 여전히 녹색평론은 우리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준다. 지금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책.

 

읽고 읽고 읽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내 삶의 방식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게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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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슬픈 열대
폴 고갱 지음, 박찬규 옮김 / 예담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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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고흐다. 그리고 장소로는 타히티다. 또 그를 떠올리면 소설 '달과 6펜스'도 떠오른다. 읽은 것 같은데,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소설. 어쩌면 제목만 보고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해설만 읽고 넘어갔을 수도 있고. 아님, 어릴 때 읽었는데, 기억에서 사라졌는지도... (이 참에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여간 고갱이라는 사람은 요즘 컴퓨터 검색 용어로 치면 연관 검색어에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화가의 길로 들어선 사람. 파리라는 대도시의 삶을 견디지 못해 타히티라는 원시성이 강한 곳으로 가, 그곳에서 삶을 마감한 사람.

 

고흐와 공동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불화로 헤어졌지만, 고흐에 관한 그의 글을 읽어보니, 고흐를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가족과 헤어져 살았는데, 어찌보면 무책임한 가장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과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이 가족과도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글들이 많다.

 

그렇게 헤어져 살고 있으면서도 가족에 대한 생각을 그치지 않았던 고갱. 부인인 마테에게도 타히티에서 같이 살자고 말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홀로 타히티로 갈 수밖에 없었던 고갱.

 

전시회에서 호평을 받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림은 잘 안 팔리고, 그래서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고, 타히티에서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하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아 자살 시도까지 했다고 하니... 고흐 역시 자살로 삶을 마감했는데.

 

이 책에서 고갱이 쓴 편지글을 보니 자살 시도를 했지만 비소(?)를 너무 많이 먹은 바람에 다 토해서 살아났다는 것.(223쪽)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심장마비(이게 사인이라고 추정한다고 한다. 216쪽)로 급작스레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는데...

 

어쩌면 고생은 현세에서의 삶은 지지리도 궁상맞은 삶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가정 생활도 그다지 행복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자식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견뎌내야 했으니...

 

하지만 그는 역작을 남겼다. 제목도 철학적인 작품.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작품.

 

이 작품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 그림을 아무렇게나 그린 미완성 작품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네. 자기 작품을 스스로 평가한다는 게 어떨지 모르지만, 이 그림은 내가 전에 그린 어떤 작품보다도 뛰어나고 앞으로도 이보다 더 좋은 작품은 나오기 어려우리라고 믿네.

  죽기 전에 내게 남은 모든 힘과 극한상황에서 나오는 고통스런 열정을 모두 쏟아붓고 순수하고 티없는 이상을 불어넣었네. 그래서 작품의 미숙함은 사라지고 삶이 솟아올라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지.

  이 그림은 모델과 기교를 배제하고, 그림이 내세우는 규범들을 무시해버렸네. 망설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전부터 이런 것들을 뛰어넘고 싶었네. (223쪽- 226쪽) 

 

이렇게 그는 우리에게 작품을 남겼다. 그가 살던 곳을 과연 슬픈 열대라고 할 수 있을까? 그가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자신이 만족할 만한 작품을 남긴 곳인데... 슬픈 열대라고 하기보다는 작품의 안식처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슬픈 열대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고갱이 살아가던 그곳이 다른 식민주의자들에게는 그저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곳에 불과했다는 것. 동등한 인간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고갱이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그는 말년에 탄압받는 원주민들을 위해 일을 하려 했다고 한다. 탄원서도 내고. 그에겐 그곳이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억압받고 무시 당하는 그런 곳이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비록 그가 일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자신의 예술을 지속하게 해준 그곳을 그는 적어도 동등하게 대했음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고갱 자신이 직접 쓴 글을 통해서 그가 어떤 고민을 했는지, 어떤 삶을 살려고 했는지를 엿볼 수 있게 된다. 고갱의 글을 읽음으로써 고갱의 작품에 더 많은 의미가 있음을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글만큼 고갱의 그림이 많이 수록되어 있으니, 여러모로 고갱을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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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 읽으며 제목이 정말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제목을 붙일 수 있을까? 시 제목이 '제목을 붙일 수 없는 슬픔'이다. 차마 제목을 붙이지 못하는.

 

  이육사 시 '청포도'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러지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라는 말.

 

  청포도에 전설과 하늘이 함께 들어와 있다는 것인데, 이는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함께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게 현재는 과거와 미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과거와 미래를 부정하는 현재는 제대로 된 현재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를 부정하면서 살아오지 않았던가. 우리나라가 이루었던 근대화라는 것은 과거와의 단절 아니던가. 

 

과거를 받아들여 미래로 나아가는 디딤돌로 삼은 것이 아니라 과거는 그냥 엎어버려야 할 유물로만 취급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지내온 우리는 뿌리뽑힌 삶을 살아가게 되지 않았던가. 그런 생각을 한다. 청포도 시와 전혀 상반되는 세상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 않나 하는 슬픈 생각.

 

제목을 붙일 수 없는 슬픔

 

할아버지가 돌아가지자

국민학교 출신 아버지는 무덤을 만들어주고

중학교 출신 그의 아들은 10년 후

어느새 아예 그 무덤을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 밭을 일구어 고구마를 심고

20년 후, 또 그의 손자는 그 밭마저

아파트업자들에게 미련없이 팔아버리고

아 그리하여 옛사람의 그림자도 사라졌다네

 

김준태, 꽃이 이제 지상과 하늘을. 창작과비평사. 1994년. 77쪽. 

 

이게 시적 표현에 불과할까. 아니다. 이렇게 지내온 것이 우리 현실이다. 하지만 옛것이 무조건 좋다는 것을 떠나서 옛것은 모두 사라져야만 할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그냥 엎어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옛사람의 그림자도 사라졌다네'라는 말이 들린다면,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이토록 달려왔던가. 이렇게 과거를 지운 사회가 행복한 사회일까? 아닐 것이다.

 

오에 겐자부로가 쓴 글 중에 '아이들이 왜 학교에 가야 하는가'에서 학교는 과거와 현재를, 과거의 사람과 나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나를 다시 미래로 연결지어 주기 때문에 가야한다는 의미의 글이 있었다.

 

학교가 존재하는 이유가 그것이라면, 우리가 지금을 살아가는 이유도 이것이다. 과거와 미래를 현재에 이어 함께 살아가는 것. 그래서 과거를 잊고, 과거를 밀어버리고 살아가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시인은 그 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현실에 어떻게 제목을 붙일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게 해야 하지 않을까. 시를 읽으며, 하루하루 급변하는 이때, 다시 과거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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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잎사귀처럼 - <사이보그 선언문>의 저자 다나 J. 해러웨이의 지적 탐험, 다알로고스총서 2
사이어자 니콜스 구디브.다나 J. 해러웨이 지음, 민경숙 옮김 / 갈무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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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 해러웨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자신의 삶과 저서에 대한 대담임에도 불구하고 머리 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배경지식의 부족.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겠다. 세상을 단순화해서 보지 말라는 것. 세상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은 단순화했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

 

아주 작은 존재조차도 엄청난 복잡성을 지니고 있으며, 아주 크고 복잡한 존재라도 단순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모두 있고, 모두 없을 수 있음을. 경계를 지니고 있고,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경계임을 생각하게 된다.

 

어렴풋이 이 사람이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짐작할 수는 있지만, 헤러웨이의 사상을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 이 책을 통해서 뭔가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한 생각은 착가이었다.

 

다만, 해러웨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고, 그가 주장한 것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단순하지 않음을 짐작하게 되었다는 데 의미를 둔 읽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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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데부 - 이미지와의 만남 동문선 현대신서 184
존 버거 지음, 이은경 옮김 / 동문선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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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결코 가볍게 읽을 사람이 아니다. 그가 쓴 책들은 단순하지 않다. 하나의 이미지로부터 그가 생각해 내는 것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 읽다 보면 놀랄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어떤 사물을 바라보거나 사건을 바라보는 것, 또는 인물을 바라보는 것은 존 버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어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단순화 해서 보았는지를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됐다.


하나의 존재는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하나의 존재는 수많은 다른 존재들로 얽혀 있고, 이런 존재들이 지닌 의미를 자신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하나를 제대로 읽는다는 것, 하나를 제대로 본다는 것은 모든 것을 본다는 것과 통할 수 있다.


이 책 첫 장면은 '광부들' 사진이 나온다. 광부들 하면 우리나라에서 독일로 파견한 광부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소위 막장이라고 하는 말과 더불어 태백에 있는 광산, 광부들, 그리고 임길택 시인의 시들도 떠오르는데, 존 버거의 이 사진을 보면 영국 광부들이 떠오른다.


영국 대처 수상의 정책으로 일자리를 잃게 되는 사람들.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 가던 사람들. 그리고 영화 '빌리 엘리어트'도 떠오른다. 


사진 하나를 보면서 우리나라와 영국이라는 나라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또한 광부를 다룬 문학과 영화도 떠오른다. 왜? 이 사진이 의미가 있을까? 이 이미지는 어떤 역할을 할까?


많은 생각을 하지만, 이 책에 나온 존 버거의 글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나는 예술이 종종 재판관을 재판해 왔으며, 무고한 자들에게 복수하라고 탄원했으며, 과거의 고통을 미래에 보여 줌으로써 그런 고통이 결코 잊혀질 수 없었다는 점을 보여 준다고 믿는다. 나는 또한 권력을 쥔 자들이 무슨 형태의 예술이든 예술을 두려워한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 예술이 그런 일을 수행할 때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예술은 종종 루머와 전설처럼 떠돈다. 왜냐하면 예술은 인생의 야만성이 정당화할 수 없는 것, 다시 말해 우리의 단결을 합당한 것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궁극적으로 정의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이와 같은 기능을 할 때, 예술은 비가시적이고 환원 불가능하며 지속적인 배짱과 명예가 만나는 장소가 된다. (13쪽)


그렇다. 이미지들은 예술이다. 그리고 이런 예술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지 않을 것들을 보이게 만든다. 과거를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 결코 잊을 수 없게. 그래서 과거의 권력을 단죄할 수 있게 하고, 현재의 권력에게 경고할 수 있게 한다.


미래가 단순히 권력자들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와 비슷한 말이 또 있다. '분노의 곶에서 실종되다'라는 제목에 있는 글이다.


작가는 그가 쓰고 있는 것에 관해 최대의 정보를 갖고 있어야만 한다. 현대 세계에서는 매시간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잘못된) 정치의 결과로 죽어 나가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정치적인 인식과 원칙에 대한 정보가 없는 한 어떤 글쓰기도 신빙성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작가들은 유토피아적인 쓰레기를 생산해서는 결코 안 된다. (241쪽) 


단지 작가에게만 해당할까? 아니다. 존 버거의 말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한다. 우리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서 최대의 정보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잘못된 정치의 결과에 희생당하지 않을 수 있다.


경제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경제를 좌우하는 것은 정치다. 결국 우리 삶은 정치에 달려 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정치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눈 앞에 보이는 것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지녀야 한다. 단 하나로 정리될 수 있는 일들은 없다는 생각으로, 다각적으로, 더 깊고 더 넓게 보는 눈을 가지려 노력해야 한다.


그런 연습, 존 버거의 책을 통해서 할 수 있다. 그는 하나의 이미지에서 정치, 경제, 예술을 비롯한 우리 삶을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을 이야기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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