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할래? 사회주의 할래? - 임승수의 방구석 경제수업
임승수 지음 / 우리학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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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이런 질문을 한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무엇? 그러면 공산주의요! 하는 대답이 곧장 들려온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독재일텐데, 또는 전체주의일텐데, 쉽게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라고 말을 한다. 같은 층위에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닌데 말이다.

 

여기에 분단된 나라에서 살다보니 우리는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는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이었다. 막걸리 보안법이라는 것이 있었던 나라에서, 공안 검사들이 꽤 힘을 발휘했던 나라에서, 지금도 종북이라는 말이 상대를 옭아매는데 더없이 좋은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사회주의에 대해서 공부하고 이야기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래서는 안된다. 민주주의의 반대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상대가 되는 체제는 자본주의다. 이렇게 개념을 명확하게 해야 논쟁이 된다.

 

이념으로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어떤 체제가 더 풍요롭게 해줄 수 있나를 끊임없이 토론해야 한다. 토론을 통해서 우리들의 삶을 좀더 좋은 쪽으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 상대를 억압하고 억누르고 없애기 위해서 하는 토론이 아니라.

 

따라서 이 책은 소중하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대등한 비중으로 다루고 있으며, 이들 개념을 정리해주고 있고, 왜 이런 체제를 옹호하는지를 두 인물을 통해서 잘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소유와 오평등이라는 가상 인물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장점과 단점, 사회주의의 장점과 단점을 짚어주고 있다. 두 체제가 완벽하지 않다. 세상에 완벽한 체제는 없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자신들의 삶에 유리한 쪽으로 체제를 바꾸어나갈 뿐이다.

 

따라서 어느 고정된 체제만을 주장해서는 안된다. 두 체제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음으로써 좀더 나은 체제로 수렴되어야 한다.

 

주장은 마음껏 발산되어야 하지만 삶을 통해서 수렴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수렴된 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면 사회주의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주의에서 실현했던 제도나 또는 이념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라고 해도 모든 것이 민영화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또 모든 것을 민영화할 수도 없다. 그랬다가는 극소수에게만 부가 집중되고 소외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계도 위협받는 지경에 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라고 하더라도 사회주의적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미 자본주의 요소와 사회주의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두 체제가 갖는 장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 제목이 된 '자본주의 할래? 사회주의 할래?'는 두 체제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택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두 체제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무시할 수 없지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자유라는 개념이 흘러가는 것도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두 체제에 대해서 이해하고 우리들의 삶에 어떤 체제가 더 좋을지를 생각하게 하는 이 책은 의미가 있다.

 

적어도 레드- 콤플렉스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이 책처럼 버젓이 사회주의를 이야기할 수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책의 구성이 청소년들이 두 체제를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다. 두 체제에 대한 기본 지식으로부터 시작하여 자본주의에 대한 찬반, 사회주의에 대한 찬반, 그리고 우리가 맞이할 미래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으려고 한 것이 느껴진다.

 

꼭 어느 체제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절충도 가능하다. 세상은 이렇게 두 체제만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 이 책을 읽으며 우리들 삶이 행복하고 풍요로워지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체제는 적어도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생각하면 된다. 그 생각이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 몫이겠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책읽기에 응모해 당첨되었다. 덕분에 잘 읽었다. 우리학교 출판사, 청소년들을 위한 책을 꾸준히 내고 있다. 청소년들이 지혜로워지는데 도움이 되는 출판사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좋은 책 꾸준히 많이 내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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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우 시는 어렵지 않다. 우리가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 일상에서 겪는 일들이 시로 나타난다. 그렇다. 우리 삶이 시가 될 수 있음을 박성우는 자신의 시를 통해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읽는 재미가 있다. 읽으면서 우리들의 생활을 만난다. 이미 떠나온 농촌의 삶도 만나고, 가족도 만나고, 그리고 소소한 것들에서 큰 의미를 만나기도 한다.


  시란 너무도 어려워서,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서 그냥 자기들끼리 즐기라고 접어두는 존재가 아니라, 도처에서 시를 발견하고, 또 모든 것이 시가 될 수 있음을 박성우는 자신의 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런 시를 보자. 참 짧다. 그런데, 그렇지! 하면서 맞장구를 칠 수 있다.


   칫솔과 숟가락


내 속을 가장 잘 아는 이는 칫솔과 숟가락이다


박성우, 웃는 연습. 창비. 2020년 초판 4쇄. 11쪽.


늘 내 입속을 들락거리는 존재. 그것도 보통 사람이라면 하루에 세 번은 꼭 드나드는 존재가 바로 칫솔과 숟가락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보다 적게 들락거리기도, 또 어떤 이에게는 이보다 더 많이 들락거리기도 하겠지만, 입속, 누군가의 입속을 이렇게 자주 드나들면서 구석구석 살펴보는 존재도 드물 것이다.


그러니 이런 시를 읽으면 아하!!!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그래, 이것이 시지. 이렇게 내 생활 속에있는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 시라고...


숟가락이 바깥에 있던 존재를 나에게 가져다 주고, 내 속으로 집어넣어 주는 역할을 한다면, 그래서 숟가락은 외부와 나를 하나로 연결해 주어 내게 더하기의 역할을 한다면, 칫솔은 내 안에 있던 것들을 밖으로 내보내는 빼기의 역할을 한다. 


이제는 나에게 필요없는 것들을 꺼내는 것. 덕지덕지 불필요한 것들을 지니고 있지 말라고 하는 것. 그러니 내게 필요한 것을 내 속으로 직접 날라주는 숟가락과 내 안에 있는 불필요한 것을 밖으로 직접 내보내주는 칫솔만큼 내 속을 잘 아는 존재들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하기와 빼기의 조화!


기가 막히다. 늘 손에 쥐고, 내 입 속에 넣었다 뺏다를 반복하는 이 존재들이 이렇게 시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자랑할 줄이야. 이런 시들이 제법 있다. 그렇다고 이런 시들만 있지는 않다. 박성우 시인이 만나는 사람들이 시 속에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잊을 수 없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사건들도 시에 나오고.


이런 시들 중에서 '나이'란 시. 정말 먹고 싶지 않지만 아무리 거부해도 정기적으로 꼬박꼬박 먹을 수밖에 없는 것. 먹으면 먹을수록 더 힘들어지는 것. 


한번 먹으면 뱉어낼 수 없는 불가역적인 존재. 어떤 이들은 이를 부정하기도 하지만, 겨우 숫자에 불과하다는 광고도 있었으니, 부정하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존재. 


그렇지만 이것을 현명하게 활용하면 정말로 좋은 대접을 받게 해주는 존재. 추함을 넘어 원숙함이 되게 하는 존재. 바로 나이다. 시를 보자.


   나이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중심에서 점점 멀어진다는 것


먼 기억을 중심에 두고

둥글둥글 살아간다는 것


무심히 젖는 일에 익숙해진다는 것


박성우. 웃는 연습. 창비. 2020년 초판 4쇄. 82쪽.


이렇게 나이 먹어갔으면 좋겠다. 아니다. 먹는 게 아니라 들어갔으면 좋겠다. 자연스럽게 나이에 젖는 것, 그것이 물들듯이, 나이 들어가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어가지 않고 나이 들어가는 삶을 사는 것.


그래, 나는 이제 나이 들어가야 한다. 자연스레 나이가 내게 들어와 나를 물들이게 해야 한다. 그래서 중심에서 멀어지지만 남들에게 가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둥글둥글 부드럽게 함께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이 편하게 기댈 수 있는 그런 존재. 그렇게 나이 들어가야 한다. 물들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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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와 통하는 건축으로 살펴본 한국 현대사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33
서윤영 지음 / 철수와영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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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삶과 떨어져 살 수 없다. 의식주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삶에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이다. 집이 없는 설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집은 우리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건축이 물론 집으로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집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아파트로 대변되는 주거 형태가 우리들 삶을 옥죄고 있기 때문인데.. 이 책 끝부분에 18. 도시화란 이름으로 아파트가 어떻게 우리 삶에 들어왔고, 우리들 주거 형태의 기본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에 임대아파트 문제까지 섞이면(5.세그리게이션:강남 개발) 우리 현대사에서 아파트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알게 된다.

 

이것만이 아니다. 건축은 어떻게든 우리 삶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 책 첫부분(1.건축이란 무엇인가?)에서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건축의 자리는 제3선이라는 말. 건축이 1선이나 2선에 서서는 안된다는 것. 건축은 사람들을 보조하는 자리인 3선에 서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와닿는다. 이 3선에 있어야 할 건축이 1선 역할을 해서 우리들에게 위압적인 존재로 다가오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1선은 무엇인가. 바로 사람들의 행위를 담을 만한 공간(24쪽)이라고 한다. 2선은 사람들의 행위를 받쳐주는 스트리트 퍼니쳐(street furniture-거리에 놓인 가구와 비슷한 개념)라고 한다. 그 다음이 바로 건축물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을 주눅들게 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자유롭게 행위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

 

그래서 광화문 광장이나 청계 광장, 또 서울시청앞 광장이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제 역할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건축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2. 광화문 광장).

 

여기에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장소가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용산과 이태원이다. 군대의 주둔지로 자리매김 되었던 용산과 외국인들이 주로 모이는 곳인 이태원은 예전부터 그런 역할을 하는 장소였다는 것. 그것을 '지니어스 로사이(그 장소의 본래적 성격, 다시 말하면 땅의 정령이라는 의미-40쪽)'라고 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제 현대로 들어오면서 자주 들었던 말이 젠트리피케이션이다. 한 장소가 발전하면서 임대료가 올라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떠나가는 현상을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 개념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를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4. 젠트리피케이선)

 

사실 젠트리피케이션은 공동화되는 도심이 다시 활성화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이용해서 특정 집단만이 이익을 올리는 현상으로 변질된 것이 우리 현대사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젠트리피케이션은 서로가 살 수 있는 공생의 모습이라는 것. 이런 쪽으로 우리 사회가 바뀌어가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 계층별 주거분리를 의미하는 세그리게이션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아파트가 대중화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어느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계층이 확연히 드러나기도 한다. 여기에 평수로 분류되기도 하는 계층화가 표면으로 드러나기도 하는데, 특히 임대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차별받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

 

이러한 계층별 주거 분리를 막기 위해 소셜믹스라고 계층별 주거 혼합을 하는 형태의 아파트들이 건설되고 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게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여겨야 하는데, 아직은 거기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현실이다.

 

건축에서 소외되는 사람들, 이주민들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모여 사는 곳이 생기게 되니 말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도 그런 곳들을 다루는데 (6. 모자이크 도시, 9. 철거민과 스쾃운동)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이런 현대사의 흐름과 건축을 연결지어 설명하는 가운데 우리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잘못된 건축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7.남영동 대공분실. 9. 철거민과 스쾃운동)

 

건축이 권력에 봉사한 경우. 부끄러운 건축의 역사를 빼놓지 않음으로써, 기억을 통해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더 비극적인 일. 바로 붕괴다. 건물의 붕괴(8.와우아파트와 삼풍백화점). 우리는 대형 붕괴 사고를 몇 번 겪었다. 성수대교 붕괴도 건축이 겪었던 비극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빨리빨리와 오로지 돈만을 바라보고 지었던 건물들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이 사건들을 통해서 알 수 있고,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처럼 이 책은 청소년들이 건축에 쉽게 접근하도록 쓰여졌다. 읽으면서 건축과 우리나라 현대사를 연결지을 수 있어서도 좋다. 무엇보다도 건축은 건축가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 건축은 바로 우리 생활을 담는 그릇이라는 것.

 

하여 건축은 꽉꽉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비어 있어야 한다는 것. 그 빈 공간에 사람들의 삶이 채워져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건축을 남 일이 아니라 바로 내 일이라고 여기게 하는 역할을 이 책은 충분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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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8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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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작품이다. 싯다르타.


우선 싯다르타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부처다. 고타마 싯다르타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이 소설 제목을 보고 부처의 이야기구나 하고 생각하기 쉽다. 작품을 읽지 않으면 저지를 수 있는 실수가 바로 싯다르타가 부처라고 생각하는 일이다.


소설 속 인물은 싯다르타는 부처와 다른 인물이다. 부처와 만나는 장면이 소설에 나오기는 하지만, 주인공은 부처가 진리를 말로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부처의 제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떠난다.


그러니 부처와 이름이 같은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한 인물의 이야기라고 하면 된다. 이 소설은. 물론 소설을 읽다보면 싯다르타가 부처가 되어 감을 알 수 있다. 부처가 무어라고 했나. 우리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부처가 되기 위해서 말에 의존해야 하는가? 글에 의존해야 하는가? 아니다. 그래서 부처는 나중에 아무 말도 없이 손가락을 들어 보이지 않았는가? 말에 의한 깨달음이 아니라 부처가 살아온 하나하나가 모두 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부처의 말을 달달 외운다고, 어느 때고 부처께서는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 해서 진리를 깨우쳤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리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깨우쳐야 한다. 주인공 싯다르타가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친구였던 고빈다로부터 부처의 모습과 같은 모습을 지녔다는 말을 듣는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이 소설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부처가 하고자 했던 말이 바로 독일의 작가에 의해 소설로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깨달음의 과정은 치열하다. 너무도 어렵다. 싯다르타는 젊은 시절에 자신의 뛰어난 능력으로 진리에 대한 욕망을 키우고, 그것을 목표로 정진한다. 하나의 목표를 세우고 자신을 나아가게 하는 것. 이것은 그 목표와 어긋나는 모든 것들을 배제한다는 부작용이 있다. 마치 경주마처럼 양 옆을 가리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싯다르타 역시 마찬가지다. 뛰어난 능력으로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집에서 나와 사문이 되고 결국 고타마 이야기를 듣고 그를 만나지만 그에게 머물지 않고 또 길을 나선다. 자신만의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이 목표를 이루는데 그가 겪는 일은 여자를 만나 사랑을 하는 일, 재산을 불리는 일에 참여하여 향락에 빠지는 일 등이다. 세속적 욕망을 거치지 않고 진리를 깨닫는 일이 얼마나 허망한 것임을, 젊은 싯다르타가 이런 일들을 겪는 과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일들의 허망함을 깨닫고 다시 길을 나서 강가에서 나름대로 해탈의 경지에 이르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자, 무슨 일을 겪어야 하나? 그것은 바로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세상 어떤 사랑보다도 끊기 힘든 것이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맹목적 사랑. 이것은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자식에 대한 사랑은 자식을 자신과는 다른 독립된 존재로 인정하기보다는, 자신의 영향 아래에 있는 존재로, 끊임없이 자신이 보살펴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를 떨쳐내지 못하면 자식을 독립된 존재로, 즉 스스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인정하지 못하게 된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싯다르타도 자식에 대한 사랑만은 어쩔 수 없어한다. 온갖 고뇌를 겪은 후에야 자식을 놓아줄 수 있게 되지만, 그 과정이 만만치 않다. 또한 다른 존재들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못난 존재를 동정할 수는 있지만 그들이 자신과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기까지는 너무도 오래 걸린다.


오죽하면 불교에서도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있겠는가. 그런데 이 책, 싯다르타에서는 개를 넘어서 돌멩이도 나라는 존재와 같다는 인식이 나와 있다. 하나의 존재는 모든 존재이고, 모든 존재는 하나의 존재로 나타난다는 것.


그러므로 하나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으니, 서로 다른 존재는 없다는 것. 여기에서 시간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바로 여기에 모든 것이 있으니까. 과거도 미래도, 그리고 다양한 모든 존재들이 바로 지금 존재하는 것에 있으니까.


이렇게 바라문의 아들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을 소설로 쓴 것이다. 무엇보다도 깨달음은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지혜의 차원이고 이것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


스스로 깨닫기 위해서는 체험해야 한다는 것을 소설에서 말해주고 있다. 싯다르타가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얻게 되는 진리는 진리 추구라는 하나의 목표를 정해 오직 그것을 향해 매진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을 살면서 그것들이 다른 것이 아님을 깨달아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앞으로 앞으로만 달리지 말고 옆도 보고 함께 존재하는 다른 존재들을 받아들이며 사랑으로 함께 어울리는 것이 진리라는 것, 그래서 싯다르타는 강가에 머물면서 강이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더 큰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간다.


강은 어느 하나의 소리만을 들려주지 않는다. 모든 소리들이 강의 소리에 들어 있다.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순간. 이미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싯다르타. 꼭 불교라는 종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마도 부처의 이름인 싯다르타라는 이름으로 불교를 연상하기도 하지만, 이 소설은 어느 특정 종교의 이야기로 국한해서는 안된다.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사람이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 소설, 또는 한 사람의 성장소설로 읽어야 한다. 그러면 적어도 삶의 자세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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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길이 되려면 -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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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어째 책읽기가 거꾸로 되었다. 같은 작가의 책을 순서대로 읽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대체로 순서 대로라기보다는 마음 내키는 대로, 아니면 먼저 읽고 그 책에 감명을 받아 다른 책을 찾아 읽는 경우가 많다.

 

김승섭의 책도 마찬가지다. [우리 몸이 세계라면]을 읽으면서 좋은 책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 우리 몸은 우리 자신의 것이라서 자신이 책임져야 하기도 하지만 우리 몸은 우주의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 몸에 대한 책임은 개인을 넘어서는 것이다.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의학에 관한 것들을 이야기해준 책이 [우리 몸이 세계라면]이었다면, 이 책은 질병에 관해서 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역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 책에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이 [우리 몸이 세계라면]에도 나오기 때문에 책을 읽는 순서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사회에서 약자라 불리는 사람들의 질병에 관해서 연구를 한다. 그리고 그 연구를 통해서 이들의 질병이 개인만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에 더 큰 책임이 있음을 밝힌다.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질병이 더 많고, 장시간 노동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질병이 많다는 것.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도 그렇겠지 하는 것들을 많은 사례들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질병은 개인의 책임도 있지만 사회의 책임이 더 크다는 그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사회적 약자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소방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관한 연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사람을 구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병으로 고생하고 있지만, 그것을 공표하지 못하는 상황이 많다는 것. 그래서 그들은 폭행을 당하거나 부상을 당해도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고, 이런 일들이 그들의 건강을 해치고 있다는 것.

 

경제적 대우, 근무 여건의 개선뿐만이 아니라 부상을 당했을 때는 당연히 공상처리가 되어야 하고, 또 폭행을 당했을 때는 그에 상응하는 조치가 취해져야 그것이 근무 여건의 개선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여기에 정리해고된 노동자들, 세월호 유가족뿐만이 아니라 생존자와 생존자 가족들. 그리고 이 책의 앞부분에 실린 낙태에 관한 문제.

 

지금 국회에서 낙태금지법이 다시 제정이 되었고, 여성단체에서는 그 법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는데, 김승섭은 낙태에 관한 다른 나라의 사례를 들어 낙태금지가 과연 누구에게 더 해로운지를 보여주고 있다.

 

입법하는 사람들이 이 책의 앞부분만을 읽었어도 그 법안을 그렇게 내지는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낙태에 대해서는 찬반이 팽팽한 것이 우리나라 현실인데, 여성의 권리와 태아의 생명권의 대립으로만 보지 말고, 여성의 건강권 관점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 성소수자들이 얼마나 건강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도 사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이 받은 유전적인 건강을 떠나 사회적인 질병으로 나타날 수 있다.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 다른 사람에게는 건강의 악화로 나타날 수 있음을.. 그래서 사회적 관계가 잘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사람들도 건강하게 지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건강은 개인의 책임에 사회의 책임이 더해진다고 할 수 있다. 개인에게만 책임을 묻는 사회는 어쩌면 의사들 배만 불리는 사회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의사들은(다는 아니겠지만) 개인의 건강만을 본다. 개인의 식습관이나 운동습관을 이야기하고 약을 처방하고 수술을 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온전히 개인에게만 속해 있다.

 

역학을 공부하고 연구한 저자의 말에 따르면 사회가 중요한 역할을 하니, 그들의 식습관이나 운동습관이 그렇게 된 것은 사회 환경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이들이 건강한 식생활을 하고, 운동을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지 않으면 이들 건강이 좋아지기는 매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들의 치료와 사회 환경의 개선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 이것이 꼭 필요한 일임을 이 책에서 김승섭은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덧붙이면 이 책에 나오는 전공의들의 건강상태 부분을 보면 기가 막힌다. 내가 행복해야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데, 내가 건강해야 다른 사람 건강을 돌볼 수 있는데, 전공의들의 건강상태는 아주 나쁨 상태에 있다는 것.

 

장시간 노동, 부족한 수면, 쌓이는 스트레스, 과중한 업무 등등으로 그들은 자신의 건강을 돌볼 여유가 전혀 없다고 하는데... 그런데도 의사 집단의 특수성 때문에 전공의들이 자신들의 근무 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하기가 힘들다는 현실.

 

이들이 국가를 상대로 진료거부를 하는 것은 의사 집단의 동질성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면, 전공의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선배 의사들에게 대항하는 것으로 비춰진다는 것.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장시간 노동을 줄이는 방법은 인원수를 늘리는 것 아닐까? 같은 일을 한 사람이 할 때보다 두 사람, 세 사람이 하면 시간을 줄일 수 있지 않나. 그들도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 사색을 하면서 환자들을 만나는 수련을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무슨 법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이것도 전공의들 개인에게 맡겨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건강하게 수련을 해서 건강한 의사가 되도록 하는 것도 사회의 책임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 법의 일부를 보자. 과연 이 법대로만 한다면 건강한 전공의가 될 수 있을지 판단해 보라. 다른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과 비교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전공의의 수련환경 개선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 ( 약칭: 전공의법 )

[시행 2017. 12. 23.] [법률 제13600호, 2015. 12. 22., 제정]   

 ① 수련병원등의 장은 전공의에게 4주의 기간을 평균하여 1주일에 80시간을 초과하여 수련하게 하여서는 아니 된다. 다만, 교육적 목적을 위하여 1주일에 8시간 연장이 가능하다.

 

② 수련병원등의 장은 전공의에게 연속하여 36시간을 초과하여 수련하게 하여서는 아니 된다. 다만, 응급상황이 발생한 경우에는 연속하여 40시간까지 수련하도록 할 수 있다.

 

③ 수련병원등의 장은 전공의에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연속수련 후 최소 10시간의 휴식시간을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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