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4
카밀로 호세 셀라 지음, 정동섭 옮김 / 민음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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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악하게 하는 요인이 무엇일까? 망설이지 않고 우리는 유전 요인을 든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있듯이, 부모에게서 반반 물려받은 유전자 어디엔가 폭력 유전자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정도는 타당한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전이 모든 행위를 결정하지 않는다. 잠재적인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는 있을지라도.


모든 사람이 같은 유전자를 갖고 있어도 아마 행동은 모두 똑같이 하지 않을 것이다. 유전자 복제를 한다고 해도, 복제인간이 태어난다고 해도 똑같은 생각, 똑같은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복합적인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그렇다면 악하게 하는 요인으로 환경을 들 수 있다. 다시 한번 속담을 인용하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말이다. 이 말은 유전에도 해당하지만 환경에도 해당한다. 아버지가 한 행동을 보고 자란 아들은 아버지와 비슷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아버지를 '어머니 또는 부모, 가족'으로 바꿔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이 합쳐지면 악한 행동을 할까?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족의 유전, 환경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할까? 가족의 유전이나 환경에 책임을 묻는 것이 의당 타당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상하게 그렇다면 모든 책임을 개인이 져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폭력 행위에서 사회의 책임은? 바로 유전이야 생체 문제니 논외로 치더라도 가족 환경은 사회적인 문제와 맞물릴 수밖에 없는데... 오히려 가족 환경이 그렇게 좋지 않음에도 개선하지 못하도록 방치해둔 것은 사회의 책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사회라는 울타리가 제대로 작동을 한다면 폭력 행위는 많이 감소될 수 있다고 보는데... 이 소설에서 주인공 파스쿠알은 가족의 유전, 환경적 요인에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폭력적인 아버지, 어머니. 이들에게서 물려받은 폭력적인 유전, 환경은 그를 폭력적으로 만든다. 결혼식에서 오다가 친구들과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칼을 휘두르는 파스쿠알.


그에겐 자신의 명예가 걸린 일에 싸움을 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그에겐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다. 이런 그에게 사회가 어떤 제재, 또는 교화를 해야 하는데, 그는 이 사건으로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는다. 하긴 신혼여행을 가는데 타고 가던 말이 노파를 쳐서 노파 머리가 깨졌음에도 이들은 돈 한 푼 던져주고 갈 길을 가버린다. 그리고 노파 손자가 찾아왔지만, 그 역시 돈 한 푼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가버리고.


이렇듯 사회에서 폭력이 아무렇지도 않는 일로 치부된다. 그냥 있을 수 있는 일. 이런 사회에서 폭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사람이 나약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만약 사회가 적절히 개입하고, 환경을 조성한다면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되'는 일은 없다.


하지만 파스쿠알에게는 그런 사회가 없다. 그냥 묵인, 방조다. 그러니 그의 폭력은 살인으로까지 간다. 자신의 아내와 바람을 피운 친구를 별다른 죄책감도 없이 죽이고 만다. 또다시 폭력이다. 이번엔 처벌을 받는다. 그런데 형량은 28년인데 3년만에 나온다. 이런 세상에! 살인이 겨우 3년이라니...


집에 온 그에게 또다른 폭력이 기다리고 있다. 이번엔 어머니다. 물론 망설이는 장면이 나온다. 아무리 악인이라도 자신의 부모를 죄책감 없이 죽일 수는 없다. 그 정도다. 겨우... 그리고 다시 감옥행인데...


그에게 폭력은 일상이다. 가족에게서 늘 보아왔던 폭력이고, 사회에서 어느 정도 묵인되는 폭력이다. 이런 폭력에서 그에겐 반성이란 없다. 그러니 사회라는 가장 커다란 환경이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으면 개인의 폭력을 멈추기 힘들다.


결국 개인의 유전, 환경이라는 요소를 사회가 감싸안으면서 울타리 역할을 해줘야 한다. 사회에도 많은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파스쿠알에게는 그것이 부족했다. 여기까지 좋다. 사회가 바람직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까지는.


그런데 작가 이력을 보니, 노벨상을 받았다고 해서 어느 정도 기대는 했었는데, 세상에 프랑코 반란군에 가담하여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다고 한다. 물론 금방 부상을 당해 전선에서 이탈을 했지만. 그리고 스페인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프랑코 독재에 부역한 인물이란 얘긴데...


읽으면서 찝찝한 마음을 버릴 수가 없었는데... 무어지? 폭력에 개인의 유전, 환경에만 책임을 묻지 않고 사회에도 물어야 한다면? 이 소설에서 배경이 되는 사회는? 바로 프랑코 독재 이전의 사회다. 이런!!! 


프랑코 독재 이전의 스페인 사회는 폭력을 제어할 어떤 사회적 규범도 없는 사회, 폭력을 양산하는 사회였다는 말이 된다. 폭력적인 개인을 들어 사회를 비판하고 있는 듯하지만, 결국 프랑코 독재를 옹호하는 그런 소설로 읽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작가의 생애와 그가 살았던 시대를 대입하면. (이 책 뒷부분에 실린 해설을 보면 이 점에 대해서 작품 내용과 관련지어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이 소설 참 문제 있는 소설이다. 그런 점을 잊지 않지는 말아야 한다.그점을 잊지 않고 현대 사회에 적용을 하자. 


폭력은 개인의 유전적 요소, 환경적 요소도 중요하지만 사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 하여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 강제에 의한 규제가 아니라 스스로 규제할 수 있는, 자율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제목이 '파스쿠알 두아르테'가 아니라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인데, 폭력은 개인에게서만 책임을 찾아서는 안된다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가족에서 그치면 안 된다. 이 가족은 사회의 일원이고, 사회는 가족들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제시할 수 있고, 또 제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회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그런 가족들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 이 소설, 프랑코 이전 사회를 비판한다는 점은 잊지 말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로 읽자. 개인-가족-사회라는 원을 그리고, 개인이나 가족이 사회라는 원 안에 있음을 명심하도록 하자. 


어떤 행동에는 개인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사회에도 그 못지 않게 큰 책임이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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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 사진에서는 함께 영화에 출연한 배우가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빅이슈 표지 모델이 되는데, 그 표지모델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실려 있어서 좋다. 이번 호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에 출연하는데, 영화 속 인물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인물이라고 한다.


  열심히 살아가는데도 생활은 별로 나아지지 않는 그런 생활.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모습들이 희망을 잃지 않게 한다.


 이번 호에서 다루는 내용 중에 마음에 와닿은 것은 뭇생명들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글이다.


  물론 코로나19로 세상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가운데서 그나마 희망을 찾고, 또 자신들이 할 일을 찾는 기사들도 좋았다. 그럼에도 빅이슈라는 잡지와 연과지어 보면 뭇생명들의 소중함을 다루는 기사야말로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현지, 그 어떤 무고한 생명도 땅에 묻을 수 없습니다)


코로나19에 가려 덜 주목을 받고 있지만, 조류인플루엔자로 인해서 살처분되는 가금류들이 한둘이 아니고, 아프리카 돼지열병으로 이동 통로를 차단당하고 사냥을 당하는 멧돼지들도 한둘이 아니다.


이들은 어떤 질병이 발견이 되면 반경 몇 킬로미터 내에 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다.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질병도 없는데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살처분이라는 끔찍한 이름으로.


이게 과연 정당한 일일까? 빅이슈가 노숙인들의 재활을 돕는 역할을 하는데, 노숙인들은 우리 사회에서도 약자에 해당하지 않는가. 그런 그들에게 살 공간이 아니라, 살 방도가 아니라 어떻게든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 정책을 편다면 그 정책이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보다도 더 약한 존재들이 바로 닭, 오리, 돼지들과 같은 동물들 아닌가. 이들 역시 특정 질병이 유행하면 살처분되는 일들이 반복되었는데, 여기에 대한 문제점들이 계속 지적되어 왔는데, 왜 아직도 그런 방식들만 실시되고 있는지...


빅이슈를 통해 다시 더 열악한 처지에 놓인 동물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지구는 인간만이 살아가는 장소가 아니다. 인간을 비롯된 수많은 종들이, 생물, 무생물 할 것 없이 모두가 이 지구라는 장소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존재들도 소중하다는 인식을 해야 한다. 뭇생명들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가 소중하다는 것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 점에서 기후위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조천호 대기과학자와의 인터뷰도 참으로 소중하다.(대안적 시스템, 지금은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때)


빅이슈를 읽으면 뭇생명들의 소중함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 우리는 이 지구에서 함께 존재해야 하는 모두 소중한 존재니까. 그 중에 내 주변에 있는 약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지내는 생활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게 바로 빅이슈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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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를 읽으며 에셔를 생각했다. 이것과 저것이 함께 존재하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른 존재를 발견하는, 그러나 둘은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는 그런 그림.


  에셔 그림을 검색해 보면 참 다양한 그림들이 나오지만, 논리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그림들이 많다. 그만큼 우리 세상은 논리로만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이거다라고 딱 잘라 말하기 힘든 것들이 많음을 깨닫게 된다.


  마찬가지다. 이창기 시 중에 '도처에 죽음이 너무 많구나'를 읽으면 그러한 에셔의 그림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살아있음에서 죽음을 발견하게 되는 시. 이 시는 처음에 살아있음으로 시작하여 죽음으로 끝난다. 마치 에셔 그림에서 천사와 악마가 함께 있어서 어느 부분을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듯이.


도처에 죽음이 너무 많구나


개울물에 발을 씻다

흘러내린 바짓가랑이로

물을 빨아올린다

새순 돋듯

나 갑자기 눈이 부셔

실눈을 뜨니

도처에 살아 있는 것투성이구나!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코카콜라처럼

날뛰고 있다


배고프겠구나

세상의 물줄기란 줄기를 죄다 뜯어먹으렴

그 잔뿌리 잘라 지붕에 말려

두고두고 국 끓여먹으렴


개울물에 발을 씻다

흘러내린 바짓가랑이로

물을 빨라올린다

도처에 죽음이 너무 많구나!


이창기, 이생(生)이 담 안을 엿보다. 문학과지성사. 1997년. 20쪽.


시를 따라가다 보면 살아 있는 것들의 환희에서 죽음으로 넘어가게 된다. 아주 자연스럽게 같은 행동에서 다른 결과를 이끌어내게 된다. 왜 아니겠는가?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죽음들에 빚지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이 없으면 삶도 없다. 그러니 삶이면 다른 존재들의 죽음에 바탕하고 있는 것. 즉, 도처에 '살아 있는 것투성이'라는 감탄은 '도처에 죽음이 너무 많구나'라는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삶을 허투루 살 수 있을까? 아니다. 수많은 죽음에 기대고 있는 삶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고 더 잘 살아야 한다. 그래서 삶과 죽음, 죽음과 삶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함께해야만 하는 존재다.


더 확장하면 한쪽 면만 보지 말고 반대 면도 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세상은 단 하나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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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물리학자 - 명화에서 찾은 물리학의 발견 미술관에 간 지식인
서민아 지음 / 어바웃어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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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물리학.


거리가 먼,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두 분야가 만났다.


사실, 인간이 하는 일 중에 관련이 없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예술이 과학과 관련이 없다고 여기는 것은, 여러 분야들이 전문화되어, 전문가들만이 존재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전문가들이 하는 역할이 있고, 세상은 전문가들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으니.


각 분야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일.


미술과 물리학은 전혀 관계가 없지 않고,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책을 보면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단지 우리가 그 관계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았을 뿐.


많은 그림들과 여러 물리학 이론들이 나오지만, 어렵게 설명하지 않는다. 핵심이 그림에 있기 때문이다. 


그 그림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물리학을 설명하는 것이지, 물리학을 설명하기 위해 그림을 예로 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리학자로서, 또 시간이 나면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서 저자는 우리를 그림의 깊고도 넒은 세계로 안내하고 있다.


그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편으로 물리학을 설명하기 때문에, 그 그림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다. 또 화가들의 노력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되고.


특히 뒷부분에 가면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그림에 숨어 있는, 드러나 있지 않은 것들을 빛을 통해 알 수 있게 되는 부분.


빛의 파장을 이용해 우리는 그림에 가려진 부분을 찾아내고, 화가의 노력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그림 유파의 다양성을 여러 물리학 이론과 연결지어 설명하는 부분도 좋지만 많은 작품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더 좋다.


학문간 융합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일어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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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발견 -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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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전반부를 읽을 때만 해도, 교육의 힘에 대해서 말하겠지 하는 기대를 했다. 이런 구절에서 그런 기대를 했는지도 모른다.


'...나를 버리고 떠난 오빠를 흉내 내면서 모르몬 사상의 한 분과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보낸 그 긴긴 시간들 말이다.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참고 읽어 내는 그 끈기야말로 내가 익힌 기술의 핵심이었다.'(109쪽)


그런데 아니었다. 교육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교육에 의해서 관점이 뒤틀린 사람이 제 관점을 찾아가는 얘기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교육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교육은?


사실 이 책을 거의 다 읽어가면서 이건 '배움의 발견'이 아니라 '교육의 해악'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군 하는 생각을 했다.


배움이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고 실천하는 일이라면 교육은 위에서 주어진다는 생각. 사실 교육이 내면에 아직 드러나 있지 않은 능력들을 끄집어내는 행위라고 하는데, 이 책은 끝나갈 때까지 광신적인(?다른 종교에 대해서 이런 표현을 하기는 그런데, 이 책에서 저자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얼마나 힘든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버지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아버지 관점에서 벗어나 살아가려는 모습은 '배움의 발견' 아니라 '교육에서의 탈출'이라고 해야 맞다.


차라리 소설이었으면,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지닌 소설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좀더 거리를 두고 읽을 수 있으려나?


학교, 정부를 사탄으로 보는 모르몬교도 아버지와 그를 추종하는 엄마에게서, 이들에게는 병원 진료조차도 사탄에게 몸을 맡기는 행위가 되니 참 먼 과거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저자인 타라 웨스트오버는 1986년생이다. 1986년 미국에서 태어난 여자 아이가 겪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참...


하지만 아무리 가리고 막으려고 해도 그럴 수 없을 때가 있다. 자식은 품 안의 자식이어야 한다. 자식이 제 삶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놓아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바로 저자의 아버지인 존 웨스트오버다. 그는 자신의 가정을 계시를 받은 곳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선지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서 벗어나는 생활을 하는 자식을 견딜 다른 관점이 없다. 그에게는 오직 하나의 관점, 자신이 믿는 종교, 거기에서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계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이제 독립해 나아가려는 타라는 회개시켜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타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눈 앞에는 스스로 생각할 줄 알고, 스스로 기도할 줄 아는 성인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버지의 발 앞에 어린아이처럼 앉아 있지 않았다. (213쪽)

어떤 운명도 아버지와 그 여성을 함께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영원히, 항상 어린아이로 남아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를 잃을 것이다. (214쪽) 


이 말이 핵심이다. 자, 나에게는 어른과 아이가 동시에 있다. 둘 다 있다.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나에게 있는 아이와 어른이 함께 존재할 수 없다면,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이로 남아 가족들,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의 울타리 속에서 편안함을 누리며 살 것인가, 아니면 어른이 되어 아버지를 떠나 내 삶을 살아갈 것인가.


타라는 타일어 오빠의 말을 듣고 대학에 간다. 대학에 가서 새로운 문화를 만나게 되지만 아버지로부터 받은 교육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대학생이 되었지만 아직 아이와 헤어지지 않았다. 자신 속에 있는 아이 말을 듣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다 역사에 흥미를 지니고, 다른 관점을 알기 시작한다. 배움의 발견이다.


'내가 자각의 길에 들어섰고, 오빠, 아버지, 나 자신에 관해 아주 기초적인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건넨 전통에 의해 만들어져 왔지만, 고의적으로 혹은 실수로 그것이 어떤 전통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오직 다른 사람들의 인간성을 빼앗고,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담론에 목소리를 보태 왔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담론을 확대하고 그편에 서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힘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앞으로 전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287쪽)


이 부분은 가족들, 특히 엄마와 언니인 오드리에게서 잘 나타난다. 이들은 가부장제인 가족 형태를 바꿀 수가 없다. 바꾸려고도 하지 않는다. 조금 저항을 했던 오드리는 가족에게서 배제되는 것이 두려워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 아니,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신념이 되었다. 나중에 타라에게 하는 말을 보면 섬뜩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변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자신의 신념을 완전히 바꾼 사람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오드리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다. 엄마 역시 마찬가지다. 엄마는 가부장제를 내면화한 대표적인 사례다. 숀이라는 오빠가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폭력을 알고도 모른 척하고, 나중에 문제제기하는 것을 막는다. 엄마에게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일은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일이다. 그래서 엄마는 아빠와 함께가 아니라면 타라를 만나지 않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킨다.


맹목이지만, 그들에게는 그 틀을 깨고 자신들을 바라볼 거리가 없다. 그들은 그 안에 있다. 자신들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그들에게는 교육만 있다. 아버지가 제시한 교육. 즉 아버지가 원하는 방향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배움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잡지 않는다. 


그러나 집을 뛰쳐나온 자식들은 볼 수가 있다.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잘못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잘못된 삶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아버지의 교육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배움을 발견한다. 배움의 발견은 다른 관점을 지니게 하고,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그 과정이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누군가가 과거에 대해 아는 바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부터 제한받게 될 거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을 바로 잡히는 일이 어떤 느낌인지 안다. 잘못 알고 있던 규모가 너무도 커서 그것을 바로잡으면 세상 전체가 변할 정도였다. 이제 역사를 이해하는 길로 통하는 문을 ㅈ키는 위대한 문지기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무지와 편견을 해결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373쪽)


그렇다. 배움의 발견은 기쁨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엄청난 고통을 유발하기도 한다. 두려움, 고통, 그리고 인내, 그것으로 인한 자신의 분열. 하지만 무지와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자신을 가두고 있는 틀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내가 그때까지 해온 모든 노력, 몇 년 동안 해온 모든 공부는 바로 이 특권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내게 준 것 이상의 진실을 보고 경험하고, 그 진실들을 사용해 내 정신을 구축할 수 있는 특권. 나는 수많은 생각과 수많은 역사와 수많은 시각들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스스로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믿게 됐다. 지금 굴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언쟁에 한번 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내 정신의 소유권을 잃는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내게 요구되는 대가였다.' (471쪽)


 '그 소녀는 거울 속에 머물렀다. 그 이후에 내가 내린 결정들은 그 소녀는 내리지 않을 결정들   이었다. 그것들은 변화한 사람, 새로운 자아가 내린 결정들이었다.

  이 자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507쪽)


교육이라는 자아를 지니기 위해서 거쳐왔던 지난한 세월을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타라는 너무도 힘든 과정을 거친다. 그럼에도 이겨낸다. 그렇다. 이미 타라는 배움을 통해 다른 세상을 만났기 때문이다. 다른 관점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 속에 있던 아이와 이제는 헤어지게 된 것이다. 그 아이를 떠나보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책 저자의 말에서 '집에 돌아올 시간이라는 신호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아버지는 한 번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14쪽)고 했다. 그렇디. 아버지는 자신의 집에서 볼 수 있는 거리까지만 자식들을 허용했다. 그 경계를 벗어나는 삶을 자식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것이 아버지의 관점이고, 아버지의 교육이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라는 신호는 타라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 아니, 찾는 것이 아니라 타라가 결정해야 한다. 아버지의 교육과는 다른 배움의 길을 찾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왕국에서 독립한 자신의 삶을 찾았기 때문에... 그 과정을 쓴 이 책은 한 편의 소설이다. 아마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분노로, 뭐 이따위 가족이 있어 하면서 책을 던져버릴 수도 있다. 아니면 저자가 지나치게 과장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하지만 사실일 것이다. 종교 강요, 가정 폭력. 홈스쿨링을 빙자한 교육의 부재. 그리고 조금이라고 그 틀에서 벗어난 자식들을 배제하는 모습. 심해도 너무 심한 폭력이다. 아이들 머리를 쥐어박아도 경찰서에 갇히는 그런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이런 일이 최근에 벌어지고 있었다니... 


자신의 관점만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교육이 과연 진정한 교육인지, 그러한 교육을 지금도 행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게 하는 책인데... 


정말 소설 같다. 그래서 한번 손에 잡으면 놓을 수가 없다. 결론이 궁금해져서. 이 글을 썼으니 적어도 저자가 죽지는 않았음에 안도하면서 읽는 그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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