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는 깨진 것들을 사랑의 얼굴이라고 부른다'('불사조' 중에서. 16-17쪽)


  이 구절이 충격이었다. 깨진 것들이 사랑의 얼굴이라니... 그러다 생각해 보니 사랑은 깨짐 아니던가. 


  자신이 지니고 있던 것들이 깨졌을 때 비로소 상대에게 나 자신을 줄 수 있는 것. 그것이 사랑이지 않을까.


  이렇게 깨지기 위해서는 자신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버려야 한다. 이 버림이 이루어지면 자신은 작아질 수 있다. 깨짐이 무엇인가? 점점 작아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점점 작아지면 컸을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그래서 작은 것들도 사랑하게 된다. 


수많은 작은 것들이 주변에 있었음을 알게 되고, 그것을 사랑하게 되고, 그러면서 또 깨지고 깨지고, 깨지지만 죽지는 않는다. 이 시 제목인 불사조처럼.


불사조는 죽음에서 태어난 존재 아닌가. 그러니 불사조는 깨짐으로서 자신으로 다시 태어난 존재다. 이 불사조와 연결되는 것이 '시인하다'라는 시다.


시인 역시 수많은 깨짐, 죽음을 거치고서 시에 자신을 불어넣은 존재라는 생각을 하는데... 그냥 한글로 '시인하다'라고만 되어 있어 무슨 뜻인지 고민해야 하지만, 읽어보면 시를 쓰는 시인이 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시인하다


스무 살의 나는 하루에도 아홉 번씩 죽었다

서른 살의 나는 이따금 생각나면 죽었다

마흔 살의 나는 웬만해선 죽지 않는다


죽는 법을 자꾸 잊는다

무덤 속에서도 자꾸 살아난다

사는 일이 큰 이득이라는 듯,


살고

살아나면

살아버린다


서른과 마흔,

사이에 

산문이 있었다


그걸 쓰느라 죽을 시간이 없었다!


박연준,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 문학동네. 2024년 1판 5쇄. 125쪽.


이래서 시인은 불사조다. 시만 쓰지 않는다. 산문도 쓴다. 쓴다는 행위로 살아간다. 쓰기 위해서 죽어야 한다. 열정으로 넘치던 20대에는 여러 번 죽을 수 있다. 그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들어 가면서 죽음의 횟수는 줄어든다. 다른 말로 하면 열정이 그만큼 줄어든다고 할 수 있다. 열정이 줄어들었을 때 시는 멀어지기도 한다. 열정이 자신을 꽉 채웠을 때 시가 다가온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따라서 시인은 이때 산문을 쓴다. 쓰기를 버릴 수 없으므로, 더 깨지기 위해서 산문을 쓴다. 그래서 죽을 시간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하나? 시를 써야 한다. 살았으니까. 죽음에서 살아왔으니, 시를 써야 한다.


그러니 시집 제목이 된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 했더니, 아직 죽지 않았다고 한다. 이 구절이 바로 '불사조'란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불사조는 바로 시인이다. 이렇게 시인은 깨지고 깨지고 죽음에서 다시 태어나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 깨져서 작아졌기에 더욱 작은 것들을 볼 수 있는 사람. 죽음도 볼 수 있는 사람. 그러기에 '시인하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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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면의 조개껍데기
김초엽 지음 / 래빗홀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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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게 하기'란 말이 생각났다.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아니 김초엽의 소설을 읽으면서 늘 생각한 것이, 또 SF라고 평가받는 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이 바로 이 '낯설게 하기'다.


낯설다는 말은 곧 다름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름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나'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나'라는 자아가 있고, 이 자아와는 다른 '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때 낯섬이 일어난다. 즉 낯섬은 다름을 인식하는 행위다. 다름을 인식해야 변할 수 있다.


남을 인식하지 못하고, 남을 인식한다고 해도 나와 남의 차이를 알지 못하고, 그냥 나의 다른 부분으로만 여긴다면 변화는 있을 수 없다. 변화는 다름의 인식에서 오기 때문이다. 변화가 없으면 갈등도 없다. 갈등은 낯섬과 마주쳤을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즉 삶이 변화없이 잔잔하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서 앞으로 어떤 삶이 전개될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예측불가능성, 이것이 낯섬일 수도 있다. 따라서 낯섬은 불안을 동반한다. 불안을 안정으로 해소하려고 하지만, 그러한 해소를 위한 과정에서 수많은 갈등이 따르게 된다. 이 갈등이 바로 우리 삶이다.


그러므로 SF소설은 낯섬을 통해서 우리에게 삶이란 이런 것일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소설을 통해서 다름을 인식하게 되고, 이 다름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균일하고 평평했던 안정적인 삶에서 균열이 일어난다. 변화가 일어난다. 그럼에도 두려움과 불안에 휩쓸리지 않는 것은 소설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과는 다르다. 


현실과 다름을 인식하고 읽어가서 실제 삶에서는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지만,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 이렇게 다른 삶들을 보면서 자신의 삶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 소설 읽기의 즐거움이다.


김초엽 소설집을 읽으면서 낯섬, 다름, 그러면서 단순히 관광객이 아닌 내 삶에 그러한 낯섬을 끌어오고 싶어하는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누군지 기억은 안 나지만 관광과 여행을 구분한 사람이 있었다. 관광은 보고 지나침, 여행은 내 삶에 끌어오기였던가?)


적어도 같음만을, 단일함만을 추구하지는 않게 되었다고 할까? 낯섬이 작동하기 위해서 '나'를 인식해야 하듯이, 소설을 읽으면서 지금 내 삶, 내 사고방식을 생각했다고나 할까.


나를 알지 못하면 낯섬을 경험할 수 없다. 낯섬이란 바로 '나'를 인식하는 순간부터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초엽의 소설을 읽으면서 먼저 '나'를 생각한다. '나'를 생각하고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존재들을 생각한다.


이들이 나와 다르지 않음을, 아니 나와 같지 않음을 생각한다. 다르지 않다는 말은 존재한다는 뜻이고, 그들은 그들 나름의 존재 이유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래서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면, 존재들은 모두 다름을, 심지어 '나'조차도 하나가 아님을 깨닫는 데서 나와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뭐, 구구절절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작품을 읽으면 된다. 지금까지 읽어왔던 김초엽 소설들처럼 잘 읽힌다.


잘 읽히면서도 무언가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소설의 끝에 가서 더, 더 무엇을 생각해야 한다는, 끝이 아니라 시작인, 어쩌면 계속되는 과정 속에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할 수도 있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를 생각할 수도 있고, 세상 존재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고민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하나의 답이 없음을, 나 자신도 하나가 아닌데 어떻게 하나의 정답이 있을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에는 여러 삶이 있고 그러한 삶의 우열을 가려서는 안 되니, 이 삶이 옳다 그 삶은 그르다고 말할 수 없음을...


다만 관계를 통하면 자신만의 삶을 유지할 수는 없음을, 관계란 바로 낯섬에서 발동하고, 낯섬은 나와 너를 인식한 상태에서 서로가 자신의 것을 지키고 잃으면서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가는 관계의 시작임을 생각한다.


총 7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이 중에 다른 책에 수록된 작품이 네 편이다. 아마도 읽어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이 소설, 어디에서 읽었는데, 어디였더라? 찾아보기도 했으니까.


예전 습관대로 소설집 뒤를 찾아보았다. 예전에는 소설집으로 단편 소설들을 엮어서 낼 때 그 소설들이 처음 발표된 지면을 알려준 적이 많았기 때문인데... 없다. 작가의 말을 읽어도 추천의 말을 읽어도 읽은 작품이 어디에 먼저 발표되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이런...


그래도 포기할 수 없지. 분명 읽었는데... 찾아볼 순 있다. 조금만 수고하면. 그 결과 종이책으로만 이야기하면, 먼저 출판된 책들은 다음과 같다.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자이언트북스. 2023년)

'양면의 조개껍데기' (팔꿈치를 주세요]-큐큐. 2021년)

'달고 미지근한 슬픔' ([다시, 몸으로]-래빗홀. 2025년)

'비구름을 따라서' ([토막난 우주를 안고서]-허블. 2025년)


여기에 '진동새와 손편지'란 소설은 '한국타이포그라피 학회'의 의뢰를 받아 쓴 작품이고 이 소설의 한 문장 한 문장을 타이포그라피로 써서 전시도 했다고 한다. 이 전시 영상이 있는데... 이것도 보면 좋을 듯하다.


한국타이포그라피 학회 (http://www.k-s-t.org/vibrating-birds-and-handwritten-letter/about.html)


여기에 덧붙이면 이 책을 산 이유 중 하나가 비정기 무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출간될 때는 있었는데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출간되자마자 사놓고, 이제서야 읽었으니...


한편 한편에 대한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겠다. 소설집을 관통하는 것이 낯섬이고, 이 낯섬을 통한 관계 맺기는 결국 우리 삶은 과정에 있고, 늘 변화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한마디 더 덧붙이면 개인적으로 이 소설집에서 가장 편하게, 그러면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소설은 '소금물 주파수'였다.


작가의 고향인 울산과 고래에 대한 이야기라서 그런 것은 아니고, 이렇게 존재들이 존중하고 존중받는 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낯섬이 불안과 두려움이 아니라 나와 남의 관계 맺기의 시작임을 또 그것이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화하고 있음을 생각하게 하고 있어서.


판매되지 않는 이 무크지에 실린 김초엽 자신이 이번 소설집에 대해 한 말을 끝으로 인용한다. 이보다 더 이 소설집을 잘 정리할 수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니.


'편협한 한 개인의 몸에 갇혀 살아가고, 서로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고, 오해하고 충돌하고, 그러면서도 각자의 경계 밖을 이해하고자 갈망하고, 마음을 잘 전달하고 싶어서 고군분투하는 한계가 우리가 지닌 희미한 빛이자 가능성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여기 담긴 소설들은 그 한계와 가능성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려고 애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초엽 소설집, 양면의 조개껍데기 출간 기념 무크지.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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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공화국 선언 - 강력한 기술, 흔들리는 가치, 인류의 미래는 어디로 가는가
알렉스 C. 카프 외 지음, 빅데이터닥터 옮김 / 지식노마드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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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반감이 들기도 한다. 뭐야, 미국의 패권을 주장하는 책이잖아. 이거야 원.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기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과학기술이 복무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이 국가가 어디냐면 미국이다.


실리콘밸리로 대표되는 과학기술의 첨단 기업들이 국가와 연결되지 않고 개인의 만족을 위한 사업, 기술 개발에 몰두했기 때문에 지금 미국이라는 나라가 힘들어졌다는 판단을 하고, 과학기술은 국가와 결합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치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옳음보다는 좋음을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이니, 세계화 시대에는 맞지 않는 주장이다. 그럼에도 이 주장이 통하는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지금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패권국에서 밀려나려는 조짐이 보이고 있다.


트럼프가 관세를 통해 다른 나라들을 겁박하는 것이나 도처에서 전쟁을 벌이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다른 나라를 침공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것, 여기에 과학기술을 활용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이니...


트럼프는 각종 협약도 폐기하고 있으니, 유엔이라는 단체가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즉 세계화 시대는 저물고 각 국가의 각자도생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해도 되겠다.


이런 때에 실리콘밸리로 대표되는 첨단 과학기술의 회사들이 어떻게 해야할까를 주장하는 책인데, 저자가 공동체, 공동체 주장하지만 이 공동체는 미국이고, 미국이라는 나라가 다시 세계를 주도하려면 개인의 만족을 위한 사업과 기술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와 연결이 된 사업과 기술이 주도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니 읽으면서 반감이 들 수밖에... 그럼 우리는 뭔가? 미국이 우리나라에 대미투자를 몇천 억원 하라고 주장하는 것도, 과학기술과 첨단무기를 결합하는 것도 모두 이러한 추세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공동체를 인류로 확장하지 않고 한 국가로 축소시키고 있는 이 주장이 왜 지금 나오고 있을까? 과학기술이 인류를 하나로 연결해주는 이 시대에 오히려 그러한 기술들로 인해 힘을 잃어가는 나라가 있고, 그 나라가 힘을 잃어가니 나라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졌다는 것, 그러니 다시 힘을 되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과학기술과 국가가 결합이 되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도 마찬가지다. 철저하게 인류의 관점에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미 이 책의 저자에게는 세계화는 없다. 각 국가만이 있을 뿐이다. 국가만이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미국만 있을 뿐이다. 


미국이 다른 나라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미국이 다시 강해져 패권국가로 군림하고, 거기에 과학기술이 기여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이 어쩌면 기술로 사람들을 통제하는 사회로 가는 발판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국가와 결합한 과학기술의 예로 핵추진 잠수함 이야기가 나오는데,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관철시킨 해군 장교를 영웅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핵추진 잠수함으로 미국은 바다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고, 그것이 지금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저자가 있는 회사는 미국이라는 나라와 결합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인권, 이런 것은 없다. 오로지 국가의 이익과 자신들의 이익을 일치시키고 있다. 따라서 온갖 무기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 만들려고 하고 있다. 무기가 아니라 무기를 무력화 시키는 기술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면서 그들은 이러한 기술이 무기로부터 죽어가는 사람들을 좀더 저렴한 가격에 효율적으로 구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것도 미국이라는 나라의 패권을 잃지 않으면서...


참...이렇게 미국의 패권을 이야기하지만, 역시 미국 사람답게 세계 시민임을 포기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책의 끝부분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과 세계 곳곳에서 기술 공화국을 재건하려면 집단적 경험, 공유된 목적의 정체성, 결속시킬 시민적 의례를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277쪽)고.


이 말만 보면 다른 나라들도 이렇게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지니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과학기술을 지녀야 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각국은 각자도생의 세계로 접어들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 더욱 과학기술을 국가와 결합시킬 수밖에 없는데, 국가와 결합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가 군수 아닐까 한다. 이는 과거의 '군산복합체'를 부활하자는 말과도 같지 않을까 하는데... 설마, 그것은 아니겠지.


이래서 읽기 불편하다. 하지만 미국이 이렇게 나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가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이제 세계화는 국가 간의 경쟁, 각자도생의 세계로 변하고 있으니,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을 '어이 없음'이라고 내치기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각자도생의 세계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길을 모색해야 하는데, 그러면서도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잃지 않는 방법도 고민해야 하니, 이래저래 힘든 세상에 직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경고의 의미로 이 책을 읽는 것도 좋겠다. 손 놓고 구경만 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으니까.


과학기술을 중시하는 저자도 이런 말을 한다. 이 말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모든 과학기술이 국가와 또는 기업과 연관될 때 적어도 우리는 이 점을 먼저 살펴야 한다. 저자의 주장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를 떠나서 이 책엔 새겨둘 만한 말들이 제법 있다. 그 중 둘을 여기에 적어둔다.


'만일 우리가 만드는 소프트웨어가 단 한 번이라도 오남용될 가능성이 있다면 반드시 그 사실을 전제로 해서 설계와 활용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221쪽)


그리고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 지녀야 할 자세, 이것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문제가 왜 발생했는지 묻고, 그 답에 대해 다시 '왜?'라는 질문을 4번 더 반복하는 것이다. 이를 '5Whys'라고 부른다.' (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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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림 시인의 유고 시집이다. 그분이 돌아가시고 남긴 시들을 모아 낸 시집.


  나이듦을 느낄 수 있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내용의 시들이 꽤 있다.


  그렇게 살아오면서 시인은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고 말한다. 이 말을 조금 바꾸어서 읽는다.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로.


  하지만 살아갈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아름답다고 여기기 힘들다. 그때 그때의 삶이 힘겨울 때가 많기 때문인데...


  이런 힘겨운 삶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또 사랑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 아름다운 삶이 된다. 나중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그것이 아름다움이었구나 느낄 수 있다. 이 시를 보자.


  고추잠자리


흙먼지에 쌓여 지나온 마을

멀리 와 돌아보니 그곳이 복사꽃밭이었다


어둑어둑 서쪽 하늘로 달도 기울고

꽃잎 하나 내 어깨에 고추잠자리처럼 붙어 있다


신경림,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창비. 2025년. 10쪽.


나이 들어 바라보는 자신의 삶. 복사꽃밭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삶 아니겠는가.


이런 삶을 산 사람은 남이 보지 못하는 것,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여 시인은 '노래가 들린다, 큰 노래에 묻혀 들리지 않던. / 사람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사람이 보인다'('해질녘'에서.. 11쪽)고 하고 있다.


큰소리만 내는 사람, 커보이려고만 하는 존재들에게서 가려져 있던 것들, 제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존재들. 그런 존재들을 볼 수 있는 눈. 그런 존재들이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 그런 존재들에게 다가가는 발. 그런 존재들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손. 


무엇보다 그들에게 가는 마음... 그런 마음을 지닌 존재. 시인은 그런 존재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리고 우리에겐 그런 사람들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큰소리들이 난무하고 있는 요즘, 신경림 시인의 이 시들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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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표지 사진을 보라. 지금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회사 이름이 나오지 않는가.


  우리나라에서 큰 이익을 얻으면서 정작 회사의 주인은 미국 시민권자라고 하는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면서도 미국 의회에 로비를 해서 미국이 우리나라 정부에 압력을 넣는다고 언론에 보도되는 회사.


  피해 보상을 해주겠다고 하는데, 그 보상이라는 것이 우리들의 상식에는 맞지 않는다고 비판받는 회사. 


  그럼에도 잘나가는 회사. 이들이 얻는 이익이 과연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내려갈까?


  낙수효과라고 하는데, 그런 것이 있기는 있을까? 오히려 돈이 돈을 불리는 현상이 더 심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표지 사진에 보면 신호등이 있다. 신호등에 노란불이 들어왔다. 경고등이다. 조심하라고... 아니 노란불이면 우선 멈춤 아닌가. 진입하지 않고 멈춰야 한다고. 아직 빨간불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더 나아가면 위험하다고. 


사진이 기가 막히다. 빨간불이 되기 전에 적절한 순간에 멈출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삶창이라는 잡지도 그런 역할을 하지 않나 싶다. 노란불. 경고를 해주고 있는 것이지. 우리 삶이 어떤 방향으로 어떤 속도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그래서 우리가 흔히 서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삶이 행복해질 수 있는 사회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는 잡지가 바로 삶창이다. 


이번 호도 역시 그렇다. 노동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기대한 것처럼 되어가고 있지 않다면, 지켜만 보지 말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대로 국민이 주권자이니까, 당당하게 주권을 주장해야 한다고. 적어도 국민의 주권을 지킬 수 있는 정부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이런 글과 더불어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들도 실려 있고, 다름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글도 있고, 소설과 시도 실려 있다.


그렇게 우리의 삶을 살펴보게 하는 잡지인데, 이제 일 년에 네 번 나오던 계간지에서 일 년에 두 번 발행하는 반(半)연간지가 되었다고 한다. 


[샘터]의 휴간에 이어 많은 잡지들의 발행이 어려워지고 있음을 또 한번 느끼게 되었다. 에고...왜 갈수록 삶이 퍽퍽해질까.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발전해가는 과학기술(의료기술)에 의하면 우리네 삶이 더 안락해지고 행복해져야 하지 않을까. 기술이 인간을 보조하기 위해 개발되어야 하는데, 기술이 이윤을 위해서 개발이 되고 있으면, 그런 사회는 '삶이 보이는 창'이 될 수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한다.


이번 호를 읽으면서 이윤이 사람을 누르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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