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시라고 할 수 있다.


  읽는 재미가 있고, 읽으면서 또 읽고나서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제목이 자살을 유발하지 않느냐고? 눈사람 자살 사건이라니 하고 비판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 시를 읽고 자살을 멈춘 사람도 있다고 하니, 오히려 따스함을 주는 시라고 할 수 있다. 베르테르 효과와는 정반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 시라고 해야 할까.


  제목만 보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시를 읽으며 그런 처지에 있는 자신을 바라보고, 오히려 삶에의 의욕을 찾을 수 있으니까. '책머리에'서 시인은 이렇게 이 시를 이야기하고 있다.


'표제작 '눈사람 자살 사건'은 우울하고 슬픈 작품이다. 그럼에도 어떤 독자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시를 읽은 느낌이라고 했고, 어떤 독자는 '눈사람 자살 사건'을 읽고 다시는 자살하지 않기로 했다는 긴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5쪽)


무엇보다 이 시집에 실린 시가 어렵지 않다. 그냥 평범한 말들로 되어 있다. 마치 이솝 우화를 읽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이솝 우화, 수많은 동물들이 등장하지만 결국 사람 이야기 아닌가. 이 시집에는 동물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물이라고 부르는 존재들도 등장한다. 그래도 그 사물들 역시 우리의 인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화시라고 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눈사람 자살 사건이라는 시를 보면 욕조에 들어간 눈사람이 찬물을 틀까, 뜨거운 물을 틀까 고민을 하다가 결정하는 장면이 마음을 울린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눈사람 자살 사건' 중에서. 14쪽)


그래, 이렇게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따스함을 선물해주는 마음. 이건 죽음을 앞둔 상태가 아니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자세이기도 하다. 남들에게 따스함을 주는 것만큼이나 자신에게도 따뜻함을 주어야 한다는 것.


나를 따스하게 하고, 그 온기가 남들에게도 퍼질 수 있게 하는 것. 비록 '눈사람 자살 사건'은 녹아 사라지는 눈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이를 사람으로 바꾸면 어차피 우리는 죽을 운명이다.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 빨리 죽느냐 늦게 죽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그렇다면 살아 있을 때, 즉 죽기 전까지 어떠해야 하는가? 바로 자신에게 따스함을 선물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선물한 따스함은 곧 다른 존재에게도 따스함으로 다가간다. 각박한 세상, 추운 세상에서 이러한 따스함이 퍼진다면 세상이 조금 더 훈훈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이밖에 우리가 쓸모없다고 여기는 존재들이 결코 쓸모가 없지 않음을 보여주는 시, '초'와 같은 시도 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다 존재 의미가 있음을, 결코 지금 필요없다고 내쳐서는 안 됨을 생각하게 하는 시인데... 아래 사진을 보라.



이 시집의 편집이 좋다. 그림과 시가 잘 어우러지고 있다. 따라서 시를 읽고 그림을 봐도 좋고, 그림을 먼저 보고 시를 읽어도 좋다. 그림과 시의 조화. 상호작용이 잘 일어나고 있게 만든 편집이다. 


그래서 더 읽기에 좋은 시집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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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I, 천사인가 악마인가 - 인간의 마지막 질문
김대식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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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실린 프로필 사진에 눈길이 간다. 인공지능에게 절을 하고 있는 저자의 모습. 이게 뭐지? 왜 이런 사진을 책 표지에 실었지? 하는 의문은 책을 읽으면 곧 풀린다.


인간이 인공지능을 절대로 따라갈 수 없는 세상이 오리라는 예측. 이는 우리가 많은 디스토피아 영화에서 봤듯이 인간을 지배하는 인공지능 시대가 오면 인간에게는 선택지가 얼마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책의 뒷부분에 가면 역사를 '신의 시대 -> 영웅의 시대 -> 인간의 시대 -> 기계의 시대(?)'로 구분하고 있는데(226-227쪽), 기계(인공지능) 시대에는 인공지능이 신의 위치에 서게 되면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몇 개 없다. 우선 인공지능에게 대항한다. 그러나 인공지능을 이길 수는 없다. 인간은 인공지능에 의해 파멸될 수밖에 없다. 다른 방법은 그냥 순응한다. 그 순응의 대가는 인공지능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마치 이진법과 같다.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 있다. 저자는 인공지능 시대는 이미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막을 수 없는 것으니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공생이다. 인공지능과 인간이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그러면 겨우 이진법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공생. 좋은 말이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장악하더라도 인간을 멸망시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저자는 예측한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상생활에선 필요 없지만 경험이라는 것이 뭔지 체험해 보고 싶을 때, 인간 또는 인간의 뇌만이라도 놔두고 있다고 경험 코프로세서로 쓰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230쪽)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예전 노예들을 검투사로 부리거나 자신들의 오락을 위해 이용하던 것과 다르지 않다. 공생이 아니다. 공생이란 거의 대등한 관계, 적어도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완전히 종속된 경우는 아니니까.


공생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 간 존중이 있어야 한다. 이 존중은 일방으로 흐르지 않는다. 쌍방향이다. 하여 저자는 지금부터라도 인공지능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한다. 인간이 자신의 쓸모를 위해서 이용만 하는 도구로서만 여기지 말고 인간과 함께하는 존재로 여기고 대우해야 나중에라도 공생할 수 있다고.


그렇지 않으면 인공지능에 지배당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그래서 자신은 이렇게 인공지능을 존중하는 (숭배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놓는다고 한다. 유머로 받아들여도 되지만 우리가 인공지능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이렇게 절을 하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지금과는 다르게 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는 한다.


프로필 사진에서부터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책은 인공지능 발달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훑어주고 있다. 그래서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 개발이 최근에 나온 것이 아니라 몇 십 년 전부터 시작되었고, 양이 쌓이니 질적 변화가 일어나듯이, 현대에 이르러 인공지능의 수준이 예측불가능할 정도로 높아졌다고 한다.


그 다음에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 산업 자체가 재편될 것이라는 것. 그것에도 대비해야 함을 이야기하는데, 그런데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기에 환경파괴가 따를 것이라는 점도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도 '데이터 센터' 건립으로 여러 갈등이 발생하고 있는데, 단지 '데이터 센터'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공지능이 범용인공지능(AGI-일반인공지능)을 넘어 초인공지능(ASI)으로 나아가면 (ASI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지능 격차가 너무 커져서 인간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의 지능을 말한다고 한다. 130쪽)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 이유를 인간의 뇌에는 약 100조 개의 신경세포와 시냅스 연결고리가 있는데(이를 변수라고도 할 수 있다), 현재 인공지능은 1.8조 개 정도의 변수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인공지능의 발달 추세로 보면 곧 100조 개의 변수를 지닌 인공지능이 나올 수 있다는 것.


인간의 뇌에 100조 개의 변수가 생기자 자율성이 생겼다고 하는데, 인공지능도 그만큼의 변수가 생기면 자율성이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고 한다.(188-191쪽) 자율성이 생긴 인공지능을 상상해 보라. 지금까지는 인간이 입력을 하면 그대로 따르지만, 그때는 달라질 것이라고.


도저히 인간이 따라갈 수 없는 지능을 지닌 존재가 인간을 과연 대등하게 여길까? 여기서 우리는 디스토피아를 상상한다. 그러니 저자가 지금부터라도 인공지능을 막 대하는 사진을 남기지 않고 존중하는 사진을 남긴다고 이야기를 하지.


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이 불러올 미래가 그다지 좋지 않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특히 실리콘 밸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도피처를 마련해 놓고 있기도 하다던데, 그럼에도 인공지능 개발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풀지 못한 문제들을 인공지능을 통해서 해결하려는 욕망때문이라는 것.


이 욕망이 브레이크 없는 차들처럼 인공지능 개발을 멈출 수가 없다고 한다. 그것도 서로의 신뢰가 깨진 지금 세계에서는 이러한 위험성 때문에 한 나라가 개발을 멈춘다고 해도, 다른 나라가 개발을 한다면 위험해지니까 자신들도 개발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고, 기업들도 마찬가지로 다른 기업이 먼저 개발한다면 자신들은 도산할 수밖에 없으니 개발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치킨 게임이다. 먼저 내리는 쪽이 진다는.


그러니 인공지능에 대한 세계적인 협약은 나와도 문서로만 남게 되고, 인공지능 시대로 나아가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고 저자는 예측한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인공지능과 공생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어야 하고, 그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인공지능의 역사와 인공지능의 현재, 미래,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등을 구체적으로 들고 있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인공지능에 대해서 조금은 감이 잡히게 하는 책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과연 우리는 편리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할까? 또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다 알아야만 하는가?를 생각하게 되고,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게도 한다.


작은 제목으로 '인간의 마지막 질문'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지금 우리가 인공지능 개발이 한창인 이때 하지 않으면 안 될 질문이라는 뜻이다. 인공지능이 초인공지능으로 넘어간 순간에는 이런 질문은 아무 소용도 없을 테니. 


그러니 인공지능 개발에 대해서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 책은 그런 관심을 촉발하기에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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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이란 무엇인가 - 늙음을 혐오하는 사회에 맞서다 박홍규의 사상사 2
박홍규 지음 / 들녘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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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하면 떠오르는 생각은? 하면 부정적인 말과 긍정적인 말 중에 아마도 부정적인 말이 더 많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한때 유행했던 (지금도 많이 쓰이지만) '라떼는~'과 '꼰대'라는 말이 주로 노인들에게 해당하는 말 아니었던가. 노인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기보다는 자기 고집을 피우는 사람, 과거에 매달린 사람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도서관에 가길 꺼려한다고... 왜? 했더니, 대답이 도서관에 은퇴한 노인들이 많이 온다는 것이다. 노인들이 많이 오는데 그게 왜? 노인 특유의 냄새(향기라고 하면 긍정적인 의미로, 냄새라고 하면 부정적인 의미를 먼저 떠올리는 것이 왜 그런지, 한자는 좀더 고상하고, 한글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한 건지... 참. 이 책을 읽다보면 정약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시'를 써야 한다고 주장한 그. 하지만 그 '조선시'가 바로 한자로 쓰는 시였으니...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가 난다는 것이다.


이런, 이 말을 듣고 소설에서 손주들이 할머니(할아버지)와 같은 방을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할머니(할아버지)에게서는 냄새가 난다고 하는 장면이 있는 것을 떠올렸는데... 최근에 읽은 [멋진 실리콘 세계]에서 조시현이 쓴 '슈거 블룸'에도 그런 장면이 나온다. 할머니에게서 냄새난다고 싫어하던 손주들이 인공피부 이식을 한 할머니에게 냄새 좋다고 달라붙는 내용.


그러니 늙음은 멀어지는 것이다. 어린 사람, 젊은 사람들로부터. 이런 늙음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런데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를 떠나 늙지 않을 수 있나? 하긴 많은 SF소설에서 늙지 않는 미래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고, 지금도 노화방지 약품들이 우후죽순처럼 나오고 있으니, 머지 않은 미래에 늙지 않는 인간들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늙지 않는 인간, 단지 수명이 길어지는 것이 아니라 젊게 오래 사는 인류가 나오는 시대, 자연스럽게 고령화, 고령, 초고령 사회를 넘어서게 될 것이다. 이때는 젊게 오래 사니까, 고령 사회라는 말을 쓰지 않을지도... 젊으나 늙으나 비슷한 모습과 체력을 지니고 있다면 굳이...


늙지 않고 길어진 수명으로 인간이 이 지구에 산다면, 지구가 버틸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면, 그것도 참... 그런데도 인간은 수명 연장을 넘어 노화 방지로 나아가고 있으니... 결국 인간에게 숙명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노년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이 바로 죽음에 가까워졌다는 생각. 죽음을 피하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이 노년을 부정적으로 보게 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생각이 바뀌면? 노년에 대한 생각도 바뀔까? 그건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


이 책은 이러한 '노년'에 대해서 살피고 있다. 동서고금의 사상가와 문학가들을 훑어가면서 그들이 늙음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정리해주고 있는데...


어떤 이는 늙음을 긍정으로, 어떤 이는 늙음을 부정으로 보고 표현했지만, 대체로 늙음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또한 저자가 주장하듯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노인들은 있는 사람들, 그야말로 삶을 누리고 노년에도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일반 백성들은 먹고 살기 힘들어서 늙기도 전에 죽는 경우가 많았고, 늙어서는 더욱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그러니 사상가들이 늙음을 예찬하는 것은 더 잘 살필 필요가 있다고, 과연 그들의 말들이 대부분의 노인들에게 해당할 것인지, 아니면 특권층이 해당하는지를...


참 많은 자료를 살피고 알려주고 있는데, 저자가 왜 이런 일을 할까? 


'이 책은 늙은 주인공들이 나오는 영화처럼, 늙음에 대한 늙은이들의 철학적 담론들을 모아 나름대로 분석한 책입니다. 소위 '노익장'이라 뽐내는 늙은 권력자나 부자가 좋아할 만한 동서양의 고전이라고 평가받는 노인 철학은 비판하고, 대신 수많은 가난한 노인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받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노년의 철학과 예술을 사상의 차원에서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21쪽)


그래서 많은 사상가들과 문학가들이 나이들어 '노년'에 대해 쓴 글을 살피고 있는데, 그들의 늙음에 대한 찬양이나 또 대우 받는 노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주로 권력층의 이야기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소수에 해당하는 이야기로 대다수의 노년에게는 남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저자는 답을 도연명, 정약용, 톨스토이, 헤밍웨이에게서 찾는 듯하다. 이들 역시 어쩌면 특권층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글을 통해 또 삶을 통해 보여준 '노인'의 모습을 참고할 수 있다고... 특히 그는 도연명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도연명은 나이 들어 농사지으며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며 유유자적하게 살았다고 하니, 이러한 노년이 바로 우리가 꿈꾸어야 할 노년이라고... 노인이 되었으니 이제 남의 눈치 볼 일 없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되었다는 것. 정약용의 말도 그런데, 여기에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노인 역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약간 다른 면이 있지만.


'정말이지, 내 간절한 소원은 노인들이 도시의 공원이나 지하철에 죽치고 앉아 있거나 폐지를 주워 판다고 짐차를 끌고 다니지 않고, 시골에서 농사짓고 책 읽으며 여가를 즐기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22쪽)고 하고 있으니, 이는 도연명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생활의 문제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생존을 위한 물질이 충족되어야 정신이 올바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노인은 노동에서 해방된 것이 아니라 노동에서 추방되었습니다.'(39쪽)고 하고 있다.


노동에서 추방된 노인들이 노동에서 해방되어 자신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이 시골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회제도적인 뒷받침이 있어야만 한다. 의료, 문화, 경제가 해결될 수 있는 시골이 되어야 하는데... 저자가 답답함을 토로하듯이 의료가 이런 곳으로 가고 있나? 아니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고.


노인들이 도시를 떠날 수 없는 이유가 '의료, 문화, 경제'의 문제라면, 노인들은 노동에서 해방되지 않고 추방되었기에 어디도 갈 수가 없어 도시를 떠돌게 된 것이다. 그러니 노인들에게 시골로 가라고 또 젊은이들에게 시골로 가라고 하기 전에 그곳이 생존이 해결되고 생활의 문제들을 개선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여 이 책은 노인에 대한 표현이 있는 많은 책들을 섭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기는 하지만, '어떻게'에 대한 답은 부족하다. 누구도 쉽게 대답하기 힘든 문제겠지만.


저자만 해도 교수를 하다 정년퇴직을 하고 시골에서 살고 있다지만, 그렇게 살 수 있는 노인들이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될까? 영화 '사람과 고기'를 보라. 그들이 일하기 싫어서, 노인이라고 그냥 뒤로 빠져 지원이나 받으면서 살고 싶어서 그렇게 지내는지...


(참고로 이 영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았겠지만, 관객수를 살펴보니 참... 노인 소외가 이렇게 영화에서도 나오나, 주인공들이 모두 노인이라서? 그건 아니겠지만)


이들 역시 치열하게 살고 있다. 치열한 삶이지만 더 나아가지 못한다. 그들에게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살라고 하기 전에 농사지을 땅과 살 집, 그리고 몸을 보살필 의료 시절, 먹고 살 경제적 지원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인들은 시골로 갈 수가 없다. 그건 죽으러 가라는 말과 같으니까.


그 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짚어주었으면 좋았겠단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좋았던 것은 도연명의 글에 나타난 노년의 모습, 정약용이 쓴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 6수가 실려 있어, 그 시들을 읽으며 노년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좋았다.


어떤 내용인지 잠시 보면, '노인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 / 민둥머리여서 참으로 좋다는 것일세 (1수), 치아 없는 게 또한 그다음일세(2수), 눈 어두운 것 또한 그것일세(3수), 귀먹은 것이 또 그 다음일세(4수), 붓 가는 대로 미친 말을 마꾸 씀일세(5수), 때로 손들과 바둑 두는 일인데(6수)' (246-259쪽)로 시작하고 있다. 찾아 읽어보면 유쾌한 마음이 된다.


늙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던 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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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31 2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1-01 0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베누스 푸디카' 미의 여신으로 알려진 비너스(그리스 신화에서는 아프로디테)의 정숙한 자세라는 뜻이란다.


  정숙한 자세라고? 누구에 의한 정숙함이지? 이는 바로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각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성을 훔쳐보는 남성의 시선. 그러나 여성은 모든 것을 다 드러내서는 안 된다. 여성은 중요한 부위를 가려야 한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그래서 더욱 시선을 자극하는.


  철저하게 남성 중심의 시선이고 생각이다. 베누스 푸디카란 말도 그래서 남성 중심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시집 제목이 베누스 푸디카이고, 이런 제목을 가진 시가 세 편이 실려 있다. 무엇을 의미할까? 읽어가다가 혹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보게 하는 시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 이런 존재야. 자, 봐. 네가 적극적으로 보려고 해야 볼 수 있어 하는. 그러다 마네의 올랭피아라는 그림이 생각났다. 보이는 존재와 보는 존재를 뒤바꾸어버린 듯한 그림.


이 그림에서 여성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남의 시선을 끌고 있다. 나를 보라고 하는 듯하다. 즉 이 그림에서 주인공은 보는 남자(보통은 그렇게 보니까)가 아니라 보이는 여성이다. 


시집 제목을 보면서 '정숙한 여성'이 중심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니다. 시집에는 오히려 감추어진 무엇을 드러내려는, 그러나 다 드러내지는 않고 보일 듯 말 듯하는 화자들이 등장한다.


이런 화자의 모습이 바로 시인이, 아니 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시는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중요한 부분을 교묘하게 감추고 있다. 독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계속 생각하게 하고 찾게 하려 한다.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드러나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시이고, 여기서 시의 맛이 생겨난다. 대놓고 드러내도 시로서 별로 감흥을 못 주고, 너무도 꽁꽁 감춰 도무지 찾을 수 없게 만들면 역시 감흥을 주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보일 듯 말 듯. 찾을 듯 말 듯하게 표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시의 감흥 아니겠는가. 분명 찾을 수 있는데 쉽게는 찾지 못하는 것.


'베누스 푸디카'는 바로 그런 시의 특성을 표현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시집은 그렇게 무언가가 보일 듯 보일 듯한데 잘 보이지 않는다. 


'베누스 푸디카 3'이란 시에서 '신은 내게 이불을 덮어주고 사라졌다'(112쪽)고 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 있는데 보이지 않는다는, 투명 망토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투명 망토를 쓰면 애초에 보이지 않아서 그곳에 있는지 모르면 절대로 볼 수가 없다. 하지만 시는 아니다.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안다. 분명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모든 감각을 동원해야 한다. 그래도 찾을 수 있을까 말까 한데, 찾았다 해도 만지고 냄새 맡을 수는 있어도 투명 망토를 벗기까지는 볼 수는 없다. 그냥 짐작만 할 뿐이다. 이렇게 생겼겠거니 하고.


시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겠지 하고... 하여 모든 시는 읽는 사람 자신만의 해석과 함께한다. 그 해석이 다 다를 수도 있다. 왜? 보지 못하고 짐작만 하니까. 시가 그렇게 중요한 부분을 보이지 않게 하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시가 없느냐 하면 아니다. 시는 어디에나 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눈 밝은 사람이 보기도 하니까. 그렇게 이 시집 제목을 보고 읽으면서 이것이 바로 시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바쁜 현대인들, 답을 빨리 찾으려는 현대인들에게 시는 그래서 어렵다. 답을 빨리 주지 않고 또 그것이 답이라고 알려주지 않으니까.


하여 이 시집 제목이 된 '베누스 푸디카'는 보는 사람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보이는 사람이 자신을 잘 보라고, 제대로 찾으라고 거꾸로 보는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선의 뒤바뀜. 또는 주체의 뒤바뀜. 


빠른 시대, 편리한 시대에 조금 느리게 더 불편하게 살아도 된다고, 그렇게 한번 해보라고, 자, 투명 망토에 싸여 있는 존재를 찾아보라고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면 그것 역시 나만의 읽기였겠지만. 그것으로 됐다.


베누스 푸디카 3

  기억의 탄생


그게 첫 동굴이었지


스물아홉의 젊은 아버지가 술 취해 나를 찾고,

나는 다섯살


신은 내게 이불을 덮어주고 사라졌다

울면서, 남자는 아이를 내놓으라고 소리쳤지만


나는 웅크린 채 아늑했지

그러고는 주문을 걸었다


당신은 결코 나를 가질 수 없을 거예요

미끄러운 건 쉽게 잡히지 않으니까요

나는 담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니까요


손가락을 입에 문 채 뺨은 바닥에 대고

엉덩이를 높이 치켜든 어둠이 이불 속에서

고요히 높아져갔지


우리는 동산처럼 오래되었구나


훗날 기억이 왜 이렇게 모질게 남아 있을까 생각하다

첫 동굴 속에서 내 어둠이

증발 불가능한 액체임을 알게 되었네


나는 고인 채로 찰랑이다,

온 세상으로 흘러다녔다


박연준, 베누스 푸디카. 창비. 2017년 초판 2쇄. 112-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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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된 이상 포항으로 간다
정보라.최의택 지음 / 요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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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사기...


사기는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없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없는 사람을 더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기다.


하긴 사기를 치는 사람들은 있는 사람, 권력을 쥔 사람은 무서워서 건드리지 않는다. 오죽하면 권력층의 집을 턴 사람을 대도(大盜)라고 했겠는가? 그만큼 있는 자들에게 사기를 치는 일은 힘들다. 힘든 정도가 아니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 점을 보면 사기는 정말 나쁜 범죄다. 다른 범죄들도 나쁘지만 없는 사람을 더한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경우가 많으니...


우리나라에서 최근에 벌어졌던 전세 사기 사건을 생각해 보라. 간신히 돈을 마련해 전세 들어 갔더니 사기란다. 전세금을 받을 수 없게 된다. 하늘이 무너진다. 그런데 솟아날 구멍이 없다. 이 솟아날 구멍, 사회가 국가가 해야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국가에 기대고자 하지만 국가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사기를 당한 사람은 속절없이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이 소설, 포항 앞바다 유전 개발을 소재로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 유전 개발이 얼토당토 않는 일이었음이 밝혀진 지금, 작가의 말처럼 소설 속에서 벌어진 일들과 같은 일들이 벌어졌을 수 있다.


사기꾼들은 기회만 있으면 그 틈을 노리고 덤벼드니까. 이 석유 시추 사업은 최종 실패로 결정되었는데 만약 계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더 많은 돈을 투여하면서 계속 추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그렇다면 분명 사기꾼들이 달려들었을 테고, 많은 없는 사람들이 이 사기에 말려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소설은 개연성 있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물론 개연성이 있다고 해서 현실에서 그대로 일어난다는 말은 아니지만. 사건이 벌어지고 피해자들이 발생한다.


피해자라고 하지만 어정쩡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있다. 피해자임이 분명한데 누군가에게는 가해자가 되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 보라. 이 보라에게 돈을 맡겼다가 다 날린 의택은 그야말로 경찰에서도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지만, 보라는 애매한 위치에 있다. (이들이 만나 주민등록증을 통해 본인들을 확인하기 전까지 메신저에서는 마이크와 존이라는 이름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의택(마이크)이 보라(존)에게 연락해 천안역에서 만나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포항으로 가기로 한다. 포항까지 가는 길이 결코 쉽지는 않다. 결정적인 단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들이 그들과 맞설 어떤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이들은 간다. 갈 수밖에 없다. 달리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소설 속 의택의 말처럼 더 이상 내려가 밑도 없다고... 이들에게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말도 사치다.


결말보다는 이 과정이 소설에서 흥미를 돋운다. 어떻게 보면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인 이들이 포항까지 가면서 맺게 되는 관계. 그렇다. 보라 역시 패해자이고 약자임을 의택은 안다. 또한 보라는 의택과 같은 사람에게 어떻게든 피해를 만회해줘야 한다는 책임을 느낀다.


이러한 감정들을 지니고 이들이 도착한 포항. 포항에서 만나게 되는 사건. 그리고 결말. 


한번 당한 사기 피해를 복구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이들의 절박함을 이용하는 사기꾼들의 모습에 경각심을 느끼게 된다.


경쾌하게 진행되고 있기에 읽는 속도가 이들이 고속도로를 타고 포항에 가는 속도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게다가 포항에 도착해서 움직이는 과정의 묘사 속에 포항까지 가는 길에 있는 아름다운 바다가 보이는 국도를 만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이런 사기가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바라면서 읽게 된다. 이들의 여정이 우리에게 웃음을 주더라도 결코 사기 피해는 소설 속처럼 웃음을 주지는 않으니까. 그들이 겪는 고통이 너무도 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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