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퀘이크
커트 보니것 지음, 유정완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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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팽창한다. 계속 팽창하던 우주가 어느 순간 멈추더니 수축을 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시간이 뒤로 간다. 그런데 수축도 계속 하지 않고 딱 10년만 한다. 그리고 다시 팽창하기 시작한다.


우주가 팽창하는 것을 시간이 앞으로 가는 것으로, 수축하는 것을 시간이 뒤로 가는 것으로 상상하고, 이 수축이 빅뱅과 같이 순식간에 일어나 인간들은 인식하지 못할 순간이라고 상상한다.


[타임퀘이크]는 그러한 상상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시간이 10년 뒤로 갔다. 인간은 그 10년 동안 똑같이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과거의 삶을 재연하는 인간이 아니라 경험하지 못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자유의지가 있는 인간으로 돌아온다.


자유의지가 있는 인간으로 돌아올 때 10년 간의 관행이 몸에 박혀 오히려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뜨린다. 이 혼란 상황을 수습하는 것이 킬고어 트라우트다.


물론 그 역시 우스꽝스럽게 그 혼란을 수습하지만, 우스꽝스러우면 어떠랴? 혼란이 멈추고 인간들이 다시 자유의지로 살아가게 되면 좋은 것이지.


그럴까? 자유의지로 살아가는 인간들이라고 하지만 과연 자유의지가 제대로 작동할까? 그 자유의지에는 이미 자유라고 믿게 하는 강제가 숨어있지 않았을까?


자유의지가 있다면 인간들이 과연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타임퀘이크 때, 분명 과거이고, 자신은 과거로 돌아갔음에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재연배우처럼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있었던 것을 그대로 따라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래서 보니것은 자유의지를 지니게 되었다는 타임퀘이크 이후에도 인간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실제 인생에서 사람들은 타임퀘이크 후 재연 기간처럼 변화하지도 않고, 실수를 저지르고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며, 사과하지도 않는다.'(214쪽)


아마도 보니것이 10년이라는 타임퀘이크를 상정한 것이 현재를 비판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지금-여기를 잘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신의 과거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위해서.


타임퀘이크라는 상상을 통해서 보니것은 1990년대 또는 그 이전의 미국 사회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소설에서도 나왔던 장면들, 또 그의 또 다른 글에도 나왔던 사건들,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 있다.


보통 일상에서 겪는 일들, 또 그때 자신이 생각했던 것들, 그리고 현재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재연할 수밖에 없는 시공간을 통해서 우리가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게 하고 있다.


하여 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 속에서 보니것이 말하고 있듯이 작가를 생각하게 된다. 보니것이라는 작가가 1990년대의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 미국이라는 사회가 변해야 한다고, 그대로 가면 안 된다고 여기고 풍자를 통해서 사람들의 인식에 변화를 주려고 했던 작가를 말이다.


'어떤 예술작품이건 그건 두 사람 사이에 이뤄지는 대화의 절반을 차지해. 작품은 우리에게 말을 하는 사람에 대해 많은 걸 얘기해주거든. ... 그림이 유명해지는 건 그것의 그림다움이 아니라 인간다움 때문이야.' (222-223쪽)


소설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보니것의 소설이 유명해지는 것은 그의 소설이 지닌 소설다움이 아니라 보니것이라는 작가가 지닌 인간다움이 소설 속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라는 것. 그의 인간다움이 계속 우리에게 말을 걸고 거기에 우리도 응대를 하고 있다는 것. 


(작가와 작품을 일대일로 대응시킬 수는 없지만, 작품에는 작가가 담겨 있음을 부정할 수도 없다. 작가와 작품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논쟁 중이지만 적어도 보니것의 소설에는 보니것을 빼고는 이야기하기 힘들다. 그는 작품에 직접 등장하기도 하고, 자신의 가족, 그리고 역사적인 인물까지도 수시로 등장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니것의 소설이 읽히고, 그의 신랄한 풍자가 감탄을 자아내는지도 모른다. 그를 모르면 작품 속에 들어있는 풍자를 풍자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뭐 이런 작가가 있어 하고 작품을 접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니것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되니 그의 소설에 나타나는 말이 지닌 신랄함이라든지 통쾌함 등을 만나게 되고, 단편 단편적으로 나타나는 인물들이나 사건들에도 당황하지 않게 된다.


모자이크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작품을 만들듯이 또는 퀼트 작품처럼 조각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작품을 이루고 있으니... 이 [타임케이크] 또한 그렇다.


재연배우처럼 살아가는 타임퀘이크가 일어난 10년 동안의 일이나 타임퀘이크가 끝나고 반복된 삶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때의 일들이 짤막짤막하게 실려 있어서 읽는 속도가 붙는다.


또 전에 그의 작품을 읽었다면 친숙한 구절이나 인물들을 만나게 되고, 그가 하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곳곳에 풍자가 숨어 있으니 그것을 찾는 재미도 있고.


무엇보다 보니것 소설은 재미 있게 읽으면서도 무엇을 더 생각하게 해주는 힘이 있으니... 그가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를 생각하게 되니, 이 소설에서 나온 말을 그대로 돌려주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디지털 세계(당시는 텔레비전 시대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에 대해 물성을 지닌 책에 대한 이야기인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말이 아닌가 한다.


'교묘한 타산이 아니라 그저 우연에 의해서, 그 무게와 질감으로, 그리고 통제에 대핸 멋진 상징적 저항으로, 책은 우리의 두 손과 두 눈을, 그 다음에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정신의 모험 속으로 이끈다.' (240쪽)


보니것의 소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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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보세요
커트 보니것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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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보니것이야! 읽기가 재미있다. 반전이 있으니, 섣불리 결말을 예상하지 않게 되기도 하고. 이 소설은 어떤 결말로 끝날까 궁금증을 지니고 읽어가면 어느새 놀라운 결말이 다가온다.


그렇다고 가볍지가 않다. 서술은 가벼운데, 들어있는 내용은 무겁다고 해야 한다. 무거운 내용을 가볍게 전달하는 능력, 보니것이 지닌 재주라고 해야겠다.


첫소설 '비밀돌이'를 보면 참... 지금 우리가 인공지능 개발에 몰두하고 있는데, 그러한 인공지능이 개발이 되어 인간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이 소설을 읽다가 경기도교육청인가 어디선가 개발했다는 AI영상이 뉴스에 나온 적이 있다.


교사들이 지닌 속마음을 인공지능이 풀어준다는 발상인데, 그것이 교사를 비하하는 내용으로 흘러서 문제가 되었던... 즉 말에 드러난 속뜻을 해석해주는 영상이었는데ㅡ 그것이 상대에 대한 비하로 나타난다. 이 소설에서 그런 장면이 펼쳐지는데 참, 뉴스에서 봤던 내용을 보니것이 미리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 문제없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그렇지 않고 안 좋은 면을 파헤치는 그런 기계. 그 기계로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고,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데...


그런 기계를 만들어 일확천금을 꿈꾸는 인물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사람들을 망가뜨리는지 몸소 체험한 다음에 기계를 묻어버린다. 소설에서는 묻어버릴 수 있다. 또 보니것이 살았던 시대는 인공지능이 나오기 전이니까, 상상 속에서 그러한 위험을 간파한 인간이 위험을 피하는 방식으로 결말을 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다. 인공지능이 개발되면서 그것의 위험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지만 누구도 포기하지 않는다. 소설에서처럼 묻어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로 보완할 수 있다고 믿고 더욱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그래서 이 소설이 더 소중하다.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개발한 기계가 오히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망칠 수 있음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니...


소설의 결말은 더욱 섬뜩하다. 땅에 묻어버리는 기계가 마지막으로 했다는 말.


"'다시 보자. 개자식아. 다시 보자고.'" ('비밀돌이'에서. 42쪽)


우린 이러한 비밀돌이를 다시 보고 있다. 인간에게 편리함과 빠름을 선물해준다는 이유로. 하긴, 이 비밀돌이처럼 '이야기할 사람!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사람!'('비밀돌이'에서. 25쪽)이 필요해서 만든 기계가 과연 인간을 진정으로 이해해준다고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냥 우리 자신의 고민을, 어려움을 피하게만 해주는 것이 아닌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조그마한 어려움도 견디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지... 보이는 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자세를 지니게 하는 것은 아닌지, 또 악용이 되어 안 쫗은 쪽의 말들만 계속 듣게 해서 우리의 인식을 흐리게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봐야 한다. 


과연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고 기계를 만들어 곁에 두는 것이 바람직한지, 지금 우리는 기계와 대화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시간-공간에 대한 고민,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러한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할지 이 소설을 통해 한번 더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다.


'개미 화석'이라는 소설을 보면 헛웃음이 나온다. 스탈린 시대의 소련을 비꼬고 있는 소설인데... 독재가 일어나고 있는 나라에서 예술을 하거나 또는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 또는 비판적인 의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입을 틀어막히고, 행동에 제약을 받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개미학자를 주인공으로, 개미들의 화석을 통해 어떻게 독재가 성립하게 되는지, 또한 같은 사건(화석에 나타난 모습)을 보고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지, 정권의 구미에 맞게 해석을 할 수 있음을, 그것에 반하는 증거 또는 추론을 하는 사람의 입을 어떻게 막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때는 소련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지금은 미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소련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이 꼭 소련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소설들, 많은 소설들이 실려 있는데, 짧고 경쾌하게 진행되지만 내용은 깊고 무겁다. 하여 소설을 읽으며 현대 우리의 생활을 살필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이 소설들과 더불어 두려움이 인간이 지니는 감정이고, 이 두려움을 통해 성장할 수 있음을, 즉 두렵다고 마냥 피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맞서 극복하려는 모습을 지녀야 함을 보여주는 소설도 있다.


'신문 배달 소년의 명예''우주의 왕과 여왕'이라는 소설이 그런데, 두려움에 갇힌 사람은 결국 자신을 망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두렵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명예와 또 한 단계 성장하는 자신을 선물한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이 두 소설의 결정판이 바로 '에드 루비 키 클럽'이란 소설이 아닐까 하는데, 두려움을 이겨내고 진실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 결국 승리하는 내용의 소설. 아무리 권력을 지니고 있어도, 사람들을 매수해도 결국 진실은 가릴 수 없음을 이 소설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집 좋다. 재미있다. 그냥 읽어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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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의 기록
존 버거.장 모르 지음, 민지현 옮김 / 더퀘스트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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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로 떠나는 과거로의 여행, 그곳에서 우리는 사람과 자연, 그리고 역사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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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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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3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지구에 감염병이 급속도로 퍼져 사람들이 좀비가 되고, 이 좀비들이 사람들을 죽이는(감염시키는) 상황. 힘 있는 자들은 우주선을 타고 제2의 지구로 탈출을 하지만... 지구에 남은 사람들은 좀비가 되거나 또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


감염되어 좀비가 된 사람들에게는 기억이 없다. 그래서 좀비는 무섭다. 자신도 자신과 함께했던 사람도 모두 알지 못한다. 좀비도 먹어야 산다고 하면, 먹기 위한 본능만 남아 있는 존재다. 이래서 좀비는 무섭다. 무섭기도 하지만 슬프다.


자신의 기억을 잃은 존재는 더이상 자신일 수 없다.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좀비는 슬프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그것을 삶이라고 할 수 있다면)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선란의 이 좀비 연작에서 좀비는 다르다. 사랑을 잃지 않는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좀비가 되어서 비록 말을 하지 못하더라도 잊지 않는다. 보호하려 한다. 그래서 더욱 슬프고 아름답다.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려는 모습. 그러한 좀비를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 이들의 관계에서 좀비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상대의 상태가 변했어도 그냥 사랑하는 사람일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함께하고 싶을 뿐이고, 그렇기에 서로를 해치지 못하게 다른 좀비나 인간들로부터 보호하려 한다. 그런 과정이 세 편의 연작소설에 실려 있는데.... 세 소설에서 공통점을 찾으라고 하면 이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소수자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첫 번째 소설인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에서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옥주와 묵호가 등장하고, 두 번째 소설인 '제 숨소리를 기억하십니까'에서는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둔 딸과 자폐인을 딸로 둔 엄마가, 세 번째 소설인 '우리를 아십니까'에서는 동성 부부가 나온다.


소수자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래서 더욱 서로에게 애틋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이들은 세상이 재난에 빠진 상태에서도 서로를 챙긴다. 인간일 때도 그렇고,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좀비가 되었을 때고 그렇고. 이렇게 세 편의 소설은 좀비가 되기 전에 그들이 살아온 모습을 보여주고, 둘 중 하나 또는 둘 다 좀비가 되었을 때의 모습을 보여준다.


분명 상황이나 상태는 달라졌음에도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 서로를 챙겨주는 모습은 변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장면을 두 번째 소설인 '제 숨소리를 기억하십니까'에서 식물인간이 된 엄마와 행방불명이 된, 그래서 결국은 좀비가 된 아빠가 만나는 장면은 마음이 찡해진다. 이들은 서로를 잊지 않고 있음을 소설을 읽으면 그렇게 짐작할 수밖에 없게 한다.


(은미는 그것이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본다. 어둠 속의 두 실루엣은 마치 서로를 끌어안는 것만 같다.-221쪽)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 어려운 환경을 함께 헤쳐나왔던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겪는 재난 상황은 이미 자신들이 겪었던 일에 불과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존재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좀비든 아니든, 그냥 사랑하는 사람일 뿐이다. 자신이 곁에 있어 주어야 하는, 또는 자신의 곁에 있어주어야만 하는 그런 사람.


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를 보호하려 하고 함께하려 하는데,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다. 순탄치 않지만 이들은 헤쳐나간다. 이겨나간다. 이미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니까. 서로의 사랑으로 그 어려움들을 견뎌내고 이겨내 왔으니까.


하여 좀비 3부작이라고 하지만 사랑 3부작이라고 해도 좋겠다. 이 소설집은 사랑을 다루고 있으니까. 어떤 어려움에도 서로를 간직하는 사랑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그래서 슬프고도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이토록 아픈 사랑이, 아름다운 사랑이 마음에 콕콕 박히는 소설. 천선란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따스함을 다시 느낄 수 있었던 소설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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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향하여
안톤 허 지음, 정보라 옮김 / 반타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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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멸의 존재이기에 불멸을 꿈꾸는 인간. 그러나 불멸의 존재가 되면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과 같은 생물학적 몸을 지니고 있으면 불멸할 수가 없다. 세포는 죽음으로 향해 가니까. 불멸하기 위해서는 세포를 바꾸어야 한다. 무엇으로? 죽지 않는 존재로... 그런 존재가 있을까? 


지금까지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이 기껏 할 수 있는 일이 노화를 늦추거나 또는 죽음에 이르기 직전에 냉동해서 다음 시기로 치료를 넘기는 방법 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불가능했다고 앞으로도 불가능하다는 법은 없다. 인간이 추구하는 과학기술이 어디까지 발달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뇌만 남기고 또는 뇌에 기억되어 있는 기억들만 다른 저장장치로 옮기고, 육체는 언제든 개조하거나 바꿀 수 있게 한다면, 또 기억도 이 장치에서 저 장치로 계속 옮겨 저장해서 영원이 보존되도록 한다면, 그때는 인간이 불멸의 존재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인간을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안톤 허가 쓴 이 소설을 읽으며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불멸이 영원이라면, 이 소설 제목이 '영원을 향하여'니까 인간이 불멸의 존재를 꿈꾸는 내용일까 추측을 했지만, 아니다. 소설에서 인간들은 불멸을 꿈꾸지 않는다. 그들은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것이 인간이니까. 


그렇다면 '영원을 향하여'는 무엇일까? 죽음을 향하여 간다는 말일까?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죽음에 이르니까. 하지만 죽음이라고 하면, 그 이후 세계를 알 수 없기에 영원이라는 말을 쓰기엔 뭔가 좀 미진하다.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영원이 무엇일까? 소설에서는 나노봇으로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연장한다. 또한 나노봇으로 자신들의 기억도 보존된다. 그런데 그렇게 다시 나노봇으로 돌아온 인간이 과연 그 전에 몸을 지닌 인간과 같을까?


기억이 같더라도 전의 존재와 후의 존재가 같은 존재일 수는 없다. 분명 다르다. 소설 속 인물도 그 점을 느낀다. 따라서 그들은 불멸을 추구하지 않고 죽음을 받아들이려 한다. 다만 이들은 무언가를 계속 남기려 한다. 


이 남는 것이 바로 기록이다. 이들은 돌아가면서 기록을 한다.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무엇을 느꼈는지를 기록하고 그것을 다른 존재에게 넘겨 계속 기록하게 한다.


기록, 언어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언어로 이루어진 것 중에 인간다움의 한 요소로 시를 꼽는다면, 이 소설에 시가 그토록 많이 인용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의식적이든 의식적이지 않든 인물에게 문득 시 구절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시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생각한다. 시 못지 않게 음악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록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 첼로연주자인 것이 이를 대변한다.


뭉뚱그려 이야기하면 예술이다. 예술이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해주고 있음을 이야기하는데, 이러한 예술 역시 기록되지 않으면 전승이 되지 않는다. 하여 기록함, 기록됨이 소설에서 이어지게 되는데, 이는 몇 백 년이 흘러도 지속된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삶은 영원히 기억이 되는데, 인간이 지구에 존재하기 시작한 이래 우리는 기록으로 우리들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지 않나 하니, 이런 기록을 담당한 언어는 인간의 과거-현재-미래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언어'는 인간이 영원을 향해 갈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이 왜 기록을 하면서 기억하려 할까 하면 바로 그것이 사랑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않겠다는 마음, 행동이 기록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런 절실한 마음이 기록이 멈추지 않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록은 영원을 향해 가는 길이다.


영원을 향해 가기 위해서 작동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에 이르게 하는 것이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언어와 사랑이 함께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수 백 년에 걸친 시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각 인물을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되고 있는데, 이들을 목차에 따라 정리하면 '말리 -> 용훈 -> 엘렌 -> 파닛 -> 로아 -> 델타 -> 크리스티나' 


여기까지가 지구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사람(? 사람의 형체를 지닌 나노봇? 이들을 엄밀히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인간의 몸이 아닌 나노봇으로 바뀌었기 때문)들이라면 그 이후의 기록은 지구를 떠나 우주에서 이어지게 된다. 아피나라는 존재가 그 책임을 지게 될 텐데... 그 이후는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하여 지구에서 기록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말리에게는 자신의 엄마에 대한 사랑, 한용훈은 남편인 쁘라섯에 대한 사랑, 엘렌은 음악에 대한 사랑, 그리고 파닛은 한용훈과 또 시에 대한 사랑, 로아는 그의 두 엄마에 대한 사랑이 있고, 델타와 크리스티나는 파닛의 나노봇으로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사랑을 이어주고 기억되게 하는 것이 언어로 기록된 공책이기에, 이 공책에 쓰인 내용들이 이어지면서 영원을 향하여 가게 된다.


지구에서 마지막 기록자라 할 수 있는 크리스티나에게 아피아가 하는 행동은 지구가 사라지더라도, 아니 지구 상에서 인간이 사라지더라도 이들이 남긴 기록은 계속 살아남아 영원히 기억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아피아)가 방주에 돌아가야만 한다고 설득했다. 그녀는 동의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델타가 남긴 공책에 내(크리스티나) 생각을 써 넣으면 아피아가 나의 일부를 방주로 가지고 돌아가 방주가 언젠가 지구의 궤도를 떠나 여러 세대에 걸친 피할 수 없는 여행을 떠날 때 나의 일부가 별들 사이에서 살아가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거절하려 애썼지만 아피아를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고 명백히 이것이 공책에 들어가야 할 이야기의 다음 부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하얀 밤 내내 잠들지 않고 내 이야기를 썼다.' (227-328쪽)


이렇게 기록은 영원히 남게 되고, 이들이 살아오면서 지녔던 사랑도 영원히 남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사랑으로 영원을 향해 가게 된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말리가 엄마를 만나는 장면, 그리고 한용훈이 누군가를(분명 쁘라섯이다) 보고 달려가는, 영혼이라도, 그 장면으로 소설은 끝난다. 바로 이들은 이렇게 영원을 향하여 간다. 그건 바로 사랑이다.


'그는 이제 달린다. 빛을 향하여. 그리고 곧 그는 자기 자신의 서사에서 달려나가, 시의 손길에서 달려나간다. 영원을 향하여.'(352쪽)


서술자의 변주가 소설에서 엘렌이 말하는 '모차르트의 주사위 게임' 같은 느낌을 주지만, 그 전개가 짜임새 있게 진행되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기에 '모차르트의 주사위 게임'과는 좀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왜 그가 기록자가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그것이 어울리기도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변주를 통한 조화. 재이 있게 읽은 소설이다.  특이하다고 생각한 점은 한국에 사는 한국인이 영어로 소설을 썼고, 이를 소설가인 정보라가 번역했다는 점. 읽기 전에는 작가인 안톤 허가 미국에 살고 있을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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