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딜런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5
마이크 마퀴스 지음, 김백리 옮김 / 실천문학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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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광화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함께 하는 가수들이 있었다. 그들은 공연을 통해 시민들과 함께 했고, 시민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1987년 민주화 투쟁,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을 때 노래도 함께 뛰쳐 나왔다. 많은 노래들이 불렸고, 그 노래들을 저항가요라 불렀다.

 

노래는 민중들과 함께함께 하고, 민중들과 함께 한 가수들은 민중들의 가슴에 살아남았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가수와 노래의 경향은 변해갔지만, 다시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였을 때 사람들은 또다시 노래를 불렀고, 가수들과 어울렸다.

 

그렇게 세상은 다시 가수를, 노래를 광장으로 불러내었다. 그런 가수들 중에 유명한 사람, 어쩌면 연말에 발표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더 유명해진 사람 밥 딜런.

 

그의 노래도 일종의 저항가요로 우리가 많이 불렀다. 지금 젊은이들은 그를 잘 모르겠지만 김광석이 부른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의 원곡자가 바로 그라는 것을 이야기하면 '아하' 하곤 한다.

 

특히 그의 노래 중에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노래는 '바람만이 아는 대답'인데... 이 노래는 예전에 많이 불려지기도 했다.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후 그에 대한 책이 많이 쏟아져 나와 그 전에 나온 이 책은 그를 더 높게 평가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읽다보면 비판적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만큼 이 책은 평전이라는 특성에 걸맞게 밥 딜런의 생애 중에서 저항가수로서의 그를 다루고, 어느 순간 그의 음악적 변모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저항가수로 알려진 밥 딜런이 정작 자신은 저항가수로 자리매김 당하고 싶지 않았다는 사실, 그는 시대에 맞는 음악을 한 자유인이었다는 사실, 한 사람의 삶을 일관되게 설명하기 힘든 아주 복잡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는데...

 

이 책은 밥 딜런의 생애 중에서 1960년대에 주목한다. 혜성처럼 등장해 저항가수의 기수가 되고, 그런 그가 어느날 저항성을 포기한 음악을 하게 되고 잠적하는 과정까지,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 함께 한 음악가들, 그를 이어서 저항가수라는 이름에 걸맞게 활동한 가수들을 다뤄주고 있다.

 

뒷부분에 가서야 최근의 밥 딜런을 이야기하는데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자서전과 출연한 영화까지 언급하지만 이제 밥 딜런은 1960년대의 저항의 상징이 아니라 그냥 가수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또한 자서전에서도 명확하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그만큼 밥 딜런 자신조차도 자신의 삶을 정리하기 힘들어한다는 얘기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의 음악적 변모가 아무렴 어쩌랴? 1960년대, 그는 분명 시대 흐름의 한복판에 있었고, 그 한복판에서 시대정신을 노래로 불렀고, 시민들과 함께 했음은 분명하다.

 

다만, 시대 흐름에 갇히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가고자 했을 뿐이다. 자유인으로 살기를 원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을 거부하고, 자신이 이름을 붙이고자 했다고 보면 된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광장에서 노래 불렀던 가수들에게 딱 한 가지의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된다. 그들은 '저항'가수 이전에 '가수'다. 자신의 마음을 노래로 표현하는 자유인. 그렇게 인정해 주면 된다.

 

시대가 격류처럼 흐를 때 그 흐름을 무시할 수 없어 함께 하는 가수들이 있고, 그 가수들의 대표로 밥 딜런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저항성만 난무하는 노래를 했느냐 하면 아니다. 그에겐 서정성 넘치는 노래들이 많다.

 

시대에는 저항도 있지만, 사랑도 있고, 평화도 있고, 온갖 것들이 다 있다. 이들이 함께 공존한다. 가수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 모순된 것들을 온몸에 지니고 살아온 존재가 바로 밥 딜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평전이다.

 

그의 개인적인 생활은 이 책에서 다루지 않는다. 대신에 그와 동시대의 음악인들, 특히 저항가수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다뤄주고 있어서, 1960년대와 그 이후 미국의 저항음악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가수를 한 방향으로 규정짓지 않고 복잡한 모순된 존재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한 방향으로 가수를 가두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책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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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되어 밥벌이의 소중함을


치익~

밥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김 빠지는 소리

치익~

밥벌이 장소로 가라고

밥벌이 장소에 도착했다고

문 열리는 소리

치익~

밥통이 열리면

완성된 밥이 온기를 내뿜으며

먹고 힘내라고 우리를 부르지만

치익~치익~

문이 열리면

이러저리 부대껴 열에 들뜬

발그레한 얼굴들이 밥벌이를 위해

종종 발걸음을 옮긴다


밥을 벌기 위해 밥이 되어야 하는

밥솥에서 부대끼는 곡식처럼

대중교통 속에서 부대끼는

밥이 되었기에 밥의 소중함을 아는

날마다 밥이 되는

밥의 뜨거움이 삶을 이어주듯

밥벌이의 괴로움이 삶을 이어줌을

밥이 되어 밥의 소중함을 아는

그런 사람들.

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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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의 미학 - 20주년 개정판
승효상 지음 / 느린걸음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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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으로 기억되는 건축가는 거의 없다. 건축가는 건축으로 기억이 된다. 그가 아무리 건축에 관한 책을 썼더라도 책보다는 건축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승효상이라는 건축가는 건축으로서보다는 책으로, 그것도 선언으로 더 기억된다. 그는 그 선언으로 우리들 뇌리에 남아 그의 건축 하면 '빈자의 미학'을 떠올리게 된다.

 

아주 오래 전에 그가 썼다는 작은 책자의 제목, 그 제목에서 그는 '빈자의 미학'을 주장한다. 그의 건축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선언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끝난다. 

 

'나는 이를 '빈자의 미학'이라 부르기로 한다. 빈자의 미학, 여기에선 가짐보다 쓰임이 더 중요하고, 더함보다는 나눔이 더 중요하며, 채움보다는 비움이 더욱 중요하다' (59쪽)

 

여기서 그는 '빈자의 미학'을 추구하는 건축가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 이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이 이름 속에서 자유로워졌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후기에 보면 이런 식의 해석이 타당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빈자의 미학은 무조건 단순함을 추구하는 것인가? 아니다. 빈자의 미학은 건축의 합목적성과 장소성, 시대성을 추구한다.

 

건축은 그 자체로도 존재해야 하지만 자신이 서 있는 장소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장소를 벗어난 건축은 투시도의, 설계면의 건축에 불과하다. 건축은 반드시 장소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것은 장소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 속에 안온하게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건축은 시대적 요구에 따르기도 해야겠지만, 시대를 이끌어 가기도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건축이 지닌 시대성이다. 이 책의 맨 앞에 나와 있는 글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런 건축을 투시도와 조감도에 비유해 설명하고 있다.

 

'투시도의 방식이 전근대적이고 전체주의적이며 독선적이라면, 조감도의 방식은 민주적이며 타협적이다. 투시도는 구호적이고 선동적이나, 조감도는 설명적이고 연역적이다.' (75쪽)

 

지금까지 우리나라 건축이 투시도의 방식을 따랐다면 빈자의 미학에서는 다르다. 조감도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이런 조감도의 방식을 따를 때 빈자의 미학의 마지막에서 주장했던, 가짐보다는 쓰임이, 더함보다는 나눔이, 채움보다는 비움이 이루어질 수 있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빈자의 미학을 설명하는 책인데, 길게 쓸 필요도 없다. 책의 분량도 적다. 이러면 됐다. 다만, 이 선언이 현대에 더욱 필요해졌다는 사실, 그것을 기억하면 된다.

 

빈자의 미학은 건축에서만 해당하지 않는다. 우리 삶에도 해당한다.

우리는 지금 채우기보다는 비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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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무 시집을 읽다. 마음이 따스해지다. 시를 통해 마음의 위안을 받다.

 

"시간의 그물"이라는 그의 시집을 읽었을 때도 좋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 시집 역시 좋았다.

 

  자연과 사람이 분리되지 않고 시인이 생활에서 떨어져 있지 않아서 더 좋았다고나 할까.  머리를 쓰기보다는 마음이 먼저 작동하는 시들이 많았으니.

 

  게다가 시집을 읽으면 마치 오래 전 아름다운 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을 받게 된다. 그렇다고 시집에서 아름답고 좋은 것들만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시집의 분위기가 대체로 그렇다.

 

  제목이 된 '위대한 식사'만 보아도 공동체의 모습, 사람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진 공동체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모습이 이 시에 드러나 있다면, 반대로 공동체가 파괴된 사회의 모습이 '오후의 식사'라는 시에 나타나 있다. 같은 가난이지만 그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은 천양지차다.

 

마음이 짠해지는 시다. 자연과 사람이 함께 어우러진 공동체의 식사와 자연과 멀어지고 사람들과도 떨어져 혼자 먹어야 하는 현대인의 비애가 잘 드러나 있다.

 

이런 변화를 알 수 있는 시가 바로 이 시집의 처음에 실린 시다. 예전에는 마을마다 하나씩은 있었던 마을나무.

 

그러나 지금은 거의 다 사라진, 자연스레 고사되어 사라진 나무와 사람들이 베어버린 나무들, 이제는 사람들과 함께 살지 못하고 있는 나무, 자연과 멀어진 사람들.

 

시인은 '내 생애의 한 토막이 그렇게 부러졌다'고 했는데, 이것은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라는 공동체에 해당하는 것이다. 시를 보자. 

 

  팽나무가 쓰러, 지셨다

 

우리 마을의 제일 오래된 어른 쓰러지셨다

고집스럽게 생가 지켜주던 이 입적하셨다

단 한 장의 수의, 만장, 서러운 곡도 없이

불로 가시고 흙으로 돌아, 가시었다

잘 늙는 일이 결국 비우는 일이라는 것을

내부의 텅 빈 몸으로 보여주시던 당신

당신의 그늘 안에서 나는 하모니카를 불었고

이웃마을 숙이를 기다렸다

당신의 그늘 속으로 아이스께끼장수가 다녀갔고

박물장수가 다녀갔다 당신의 그늘 속으로

부은 발등이 들어와 오래 머물다 갔다

우리 마을의 제일 두꺼운 그늘이 사라졌다

내 생애 한 토막이 그렇게 부러졌다

 

이재무, 위대한 식사, 세계사, 2002년 초판. 15쪽.

 

아름다운 마을을 지켜주던 나무가 쓰러지는 장면,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 그 시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사람이 쓰러뜨리지 않았더라도 이미 자연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기에는 너무도 산업화된 사회. 그런 사회의 시작, 바로 우리 곁에 있던 마을 나무가 쓰러지는 일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시 팽나무를 심는 일, 그 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꼭 우리 때만이 아니라도, 먼 미래를 위해서도.

 

마치 흑백사진에 나와 있는 예전 모습을 보는 것처럼 시집을 읽으며 마음이 과거로 과거로 흘러갔다. 그렇게.

 

제4차산업혁명 운운하는 시대에, 정말로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은 기계도시가 아니라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이런 팽나무 그늘 속에서 함께 쉴 수 있는, 그래서 밥을 먹을 때도 온갖 자연이 함께 하는 그런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시집.

 

오래된 미래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이 시집에서 다시 오래된 미래를 보고 느꼈다고 해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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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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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었다. 그러나 뒷맛이 매우 맵다. 소설이 현실을 반영한다고 하는 말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사실과 진실이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실이 꼭 사실이지는 않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준 소설이다. 흔히 진실은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고 하는데, 기반으로 한다는 말은 사실과 꼭 일치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조선시대 진경산수화가 실경산수화와 어떻게 다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 소설을 읽다가 진경과 실경의 차이,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사실을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해 보여주는 것, 그것이 진실이라면 세상에 진실은 너무도 많다. 또한 진실은 밝혀진다는 말은 사실을 밝힌다는 말보다 더 어려운 말이 된다.

 

진실이라는 말에는 사실에 자신의 관점이 더해졌기 때문인데, 이런 진실게임들, 그것을 댓글을 통해서 진실이 어떻게 사실을 왜곡해 우리들에게 다가오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그런 사실이 있었다. 그러나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여론조작을 시도한 국정원이 생각하고 있는 진실과 그것을 바라보는 언론의 진실, 보도를 접하고 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는 진실이 서로 어긋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어긋남, 소설에 너무나 잘 표현되어 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세력이 등장해 여론을 바꾸려고 한다. 그들은 단순하게 말한다. 우리나라가 좋은 쪽으로 가게 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 지금은 잘못되었다. 이 흐름을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고용한다. 컴퓨터에 능한 조직을. 젊은이 셋으로 구성된 조직, 이들을 통해 진보사이트를 공격해 엉망으로 만들고, 진보적인 인사들을 깔아뭉개게 되며,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조작하려고 한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라는 말을 한 때 모토로 삼았던 어떤 조직을 연상시키는 비밀스러운 집단이 댓글만이 아니라 언론을 속이는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작업을 더 확대해가는 모습, 소름끼치도록 살벌한 그런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지나치게 많은 정보들 속에 바른 정보를 골라내는 일, 그리고 그런 사실들에 기초해 진실을 만들어가는 일이 필요한 때, 진실이 얼마나 쉽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이 소설을 통해 알 수 있으니.

 

여기에 공신력 있는 언론을 어떻게 유도하여 신뢰를 떨어뜨리는지도 잘 나와 있다. 댓글을 통해 또 언론에 대한 사실 왜곡 조작을 통해 진실은 각자의 진실로 남게 된다.

 

결국 진실 만들기에 참여한 팀원 중 한 명은 제거되는데, 이 한 명만 제거되고 말 것인가. 아니다 소설에서는 이들 모두가 곧 제거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권력자들에게는 음지에서 일한 사람이 양지에 나타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양지에 나서기 전에 제거해야 한다. 영원히 음지 속에 가둬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권력이 얼마나 음성적으로 우리 삶에 관여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면서, 동시에 권력에 종사한 사람들이 온전한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소모품으로 취급되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더하여 올바른 사회를 주장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올바르지 못하게 살아가는지도 잘 보여주고 있으니, 4.3문학상을 받았다는 이 책, 4.3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도 나오지 않지만, 권력에 의해 우리 삶이 얼마나 왜곡되는지를 보여주었기에 4.3문학상을 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댓글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 중에 설마 이런 '댓글부대'가 있지는 않겠지. 이 소설에 나오는 기법들이 작동하고 있지는 않겠지? 이런 '댓글부대'의 작업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사실과 진실이, 즉 사실에 자신의 관점을 왜곡해서 반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필요한 때다. 재미있게 때론 모골이 송연해지면서 읽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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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17-04-23 1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읽고 후덜덜한 소설 중 하나였어요. 실제로 댓글을 전문적으로 달아주는 회사가 많다고 하니, 후기 등도 믿을게 못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kinye91 2017-04-23 15:55   좋아요 0 | URL
정말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보가 쉽게 공유되는 것만큼 위험부담도 높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