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법을 배우기
시어도어 다이먼 지음, 원성완 옮김 / 민들레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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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학생들은 세계에서 가장 긴 시간을 공부한다고 한다. 학교에만 있는 시간도 어마어마한데, 학교 수업이 끝나면 학원으로 가 또다시 수업을 받는다. 여기에서 끝나면 좋겠는데, 집에 돌아와서는 숙제라든가, 복습 또는 예습이라는 이름으로 또다시 공부를 한다.

 

정말로 엄청나다. 하긴 4당5락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것도 옛말이다. 예전에 이 4당5락이라는 말은 고3에나 적용되는 말이었는데, 요즘은 중학생들에게도 이런 말이 적용이 되니, 학생들은 너무도 긴 시간을 공부에 투여하고 있다.

 

그러면 이렇게 오랜 시간 공부한 학생들이 공부를 잘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성적은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공부를 잘하지는 못한다.

 

결과 중심의 공부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 문제를, 원리를 이해했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몇 점을 받았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깨우침 없이 그냥 외우기만 하는 현실이다. 그래서 평균이 90점이 넘는 학생들도 기본적인 것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문제를 조금만 바꾸어도 이해를 하지 못해 틀리는 경우도 많고, 긴 시간을 공부한다지만 그것은 책을 붙들고 앉아 있을 뿐이고, 머리 속으로는 다른 행위를 하는 경우가 더 많기도 하다. 한 마디로 시간 때우기 공부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공부를 배움으로, 권리로 여기지 않고 노동으로, 의무로 여기기 때문이다. 마지못해 할 뿐이다. 여기에 성찰은 없다. 오로지 더 집어넣어야 할 뿐이다. 성적이 떨어지면 더 많은 시간을 더 많은 참고서와 문제집에 할애한다.

 

그냥 밀어넣는다. 오답노트? 왜 틀렸는지 고민하고 해결하기보다는 그냥 틀린 문제 적어놓는다. 다음에 또 틀린다. 또 적는다. 또 푼다. 또 틀린다. 또 푼다. 이번엔 맞는다. 왜? 원리를 이해해서? 아니, 그냥 문제 풀이까지 외워서이다.

 

그러니 비슷한 문제가 나오면 맞힐 수가 없다. 외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우리나라 교육, 학생들의 현주소다. 배움이 없는 오로지 결과만 있는 공부의 결과.

 

이 책은 그 점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물론 학생들의 성적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배우는 법을 배우기'라는 제목으로 노래 부르기, 운전하기, 테니스 치기, 피아노 연주하기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우리의 신체활동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의식적으로 잘하려고도 해도 자신의 몸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더 좋아지는 것이 불가능한 활동들이다.

 

무엇보다 맹목적으로 연습하는 것보다,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것보다, 한 발 물러서서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무언가를 더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동작을 덜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가 결과를 의식하는 순간 몸이 경직되고, 이는 나쁜 습관으로 굳어져 더이상의 발전이 없음을 여러 사례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무언가를 잘하려면 결과에 치중하기보다는 과정에 충실해야 한다. 과정을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잘게 쪼개야 한다. 즉, 광범위한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기적으로 달성가능한 목표, 그것도 어려움 없이 할 수 있는 목표들을 하나하나 순차적으로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신체를 잘 이해하고, 그 신체에 맞는 작은 과정들을 하나하나 해나가는 동안 무의식적으로 굳었던 나쁜 습관들을 하나하나 해체해 가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레 자신의 몸이 변하게 되고, 이를 통해 하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한다. 처음부터 커다란 목표를 정하고 그에 맞추려 하는 것은 오히려 일을 망친다고 하는데...

 

지금의 성적중심주의 교육에서는 학생들이 배움에 도달할 수가 없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찾기보다는 몇 점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고, 몇몇을 빼고는 목표에 도달할 수도 없다. 참 지당한 말인데... 그런데 우리나라 학생들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답답한 마음이 든다.

 

우선 자신을 경쟁의 대열에서 빼내어야 하는데, 주변에서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또 그렇게 할 시간도 별로 없다. 학생들이 배우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유가 필요하다.

 

생각해 보라. 대학생이 되어서도 학비를 대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고, 그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없어 간신히 외워서 학점을 따는 대학생들도 많은데, 이들도 자신의 배움을 스스로 되돌아보며 선택하고 노력하기가 힘든데...

 

꽉 짜여진 일정 속에서 공부를 하는 중고생들은 자신의 성찰하면서 배움에 대해 고민하기는 더 힘들다. 이들에게는 두 달에 한 번 다가오는 시험, 그리고 점수, 입시가 중요할 뿐이다.

 

그렇게 지내왔다. 그렇게 이야기해 왔다. 그러니 배움이 아니라 성적을 받기 위한 노력만이 있을 뿐이다. 이 점을 저자도 안타까워 하는 듯하다. 비록 성적이 아니라 신체활동과 관련된 배움을 이야기했지만, 수학이나 과학, 국어, 영어 과목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이 배움에 실패하는 경우는 학생들 책임도 있지만 가르치는 교사들 책임이 더 크다는 말. 교사들 역시 점수가 전부는 아니라고 하지만 학생들이 잘 배우지 못한 결과를 분석하고, 학생들이 배움에 다가설 수 있게 구체적인 과정을 만들지 못했다는 비판을 하고 있다.

 

옳은 비판이다. 이 비판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교육활동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몇몇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교육활동으로 실패한 많은 학생들에게 주목해야 한다는 말 절절하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결국 배움은 학생들도 노력해야 하지만 교사들도, 가르치는 사람들이 더 노력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학생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는 통찰력을 지닌 교사, 그런 교사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이런 교사들이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고, 그럼에도 노력하는 교사들이 있음을, 이런 책이 번역되어 나오는 것은 학생들의 욕구뿐만이 아니라 교사들의 욕구도 반영된 것이라 생각하니, 아직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위안으로 삼는다.

 

이제 다시 배움에 대해서, 정말로 배우는 법에 대해서 배워야 하지 않을까, 이 말을 거꾸로 하면 가르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읽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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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이야기 1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1
김명호 지음 / 한길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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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중국을 "죽의 장막"이라고 했었다. 공산화가 되고 나서 우리와 교류가 끊겼고, 중국은 적대국이었으며, 명칭도 중국이 아닌 중공이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잘 알 수 없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 바로 '죽의 장막'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중국과 교류를 하고, 우리나라 최대의 교역국 중 하나가 되었다. 우리나라에 유학 오는 학생도 많고, 중국으로 유학 가는 학생도 많다. 중국에 현지 법인을 차린 회사도 많고. 이와 더불어 서로의 나라를 오가는 관광객들도 많고.

 

서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지금의 중국이 있게 한 인물들에 대해 서술한 이 책은 중국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한다.

 

한나라때 태사공이라고 불리는 사마천이 쓴 역사서 '사기'에는 왕조의 역사들만이 아니라 왕조 속에서 살아간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열전'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이 책을 사마천의 '사기 열전'에 비긴다면 '현대사 중국인 열전'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근현대사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는데, 그 중에 이 1권에서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제합병 당했던 시절, 중국으로 피신해 독립운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 이야기이기 때문에 무척 흥미롭기도 하다.

 

게다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문화혁명기 시기의 일들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한때의 해프닝이라고 하기에는 역사적으로 너무도 많은 손실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처음 시작을 '참새 소탕전의 추억'이라고 한다. 참새 때문에 못 살겠다는 농민들의 민원을 받아들여 정부에서 참새를 소탕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중국 전역에서 참새 소탕전을 벌인 이야기.

 

지금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가능했던 이야기. 그러나 한 해 동안 참새를 소탕했다고 해도 자연을 이길 수는 없는 일. 참새를 소탕하자 참새가 먹던 해충들이 천적이 없어져 오히려 농민들을 더 괴롭히게 되는 현상.

 

잘못된 정책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국민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장면이 바로 이 책의 첫장면이다. 이 장면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유를 이렇게 생각한다. 참새 소탕전처럼 역사에는 일방적으로 나쁜 쪽은 없다는 것.

 

역사에서 승자와 패자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들을 선악의 개념으로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그들 역시 역사의 한 장면에서는 모두 자신들에게 맞는 삶을 살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것. 그 점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고, 그래서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을 없애서는 안 된다고 시작을 이해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정권 다툼에서 몰락해 사라진 인물들도 있지만 이들을 일방적으로 역사에서 제거할 수는 없는 것.

 

참새 소탕전에 이어 나오는 인물이 바로 류사오치라는 마오쩌뚱과 함께 혁명을 이끌고 한때 2인자의 자리까지 올라갔지만 문화대혁명 때 몰락한 사람이다. 비슷한 길을 걸은 린뱌오라는 사람의 이야기도 뒤를 이어 나오고.

 

이들은 혁명을 함께 했지만 권력은 함께 누리지 못하는 그런 속성을 너무도 잘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역사에서 늘상 되풀이 되고 있었던 일.

 

격동의 와중에는 함께 해도 안정이 된 다음에는 누군가가 떨려나야 하는 상황. 그런 상황을 너무도 잘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이런 정치사적인 인물들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그래서 읽는 재미가 있다.

 

이들의 활동뿐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어서 역사책 속에 죽어 있는 글자로만 남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내 곁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듯한 생생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일방적으로 한 편을 몰아세우지 않고 멀리 떨어져서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전달해주려는 듯한 저자의 태도가 어느 한 편에 감정을 몰입하지 않도록 해서 읽기에 좋다.

 

여기에 정치적인 인물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현대 중국을 이끈 문화예술인들도 많이 나온다. 그들이 격동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이 책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마치 장강의 흐름처럼 중국이라는 나라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을, 그들이 중국 역사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잘 모르고 있었던 수많은 중국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서 좋은 책이다. 특히 우리나라에도 주둔했던 위안스카이(한자어로 읽으면 원세개)의 부인 중에 세 명이 조선인이었다는 사실. 그들의 자손들 중에 잘된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

 

다만 아쉬운 점은 '사기 열전' 처럼 분야가 같거나 또는 삶의 행태가 비슷한 인물들끼리 묶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여기에 작은 제목을 하나씩 붙였으면 훨씬 좋았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된다.

 

2권에는 어떤 인물들이 나올지 궁금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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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5-15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사두기만 하고 미처 못 읽은 책이네요. 리뷰 읽고 나니 찾아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kinye91 2017-05-15 09:03   좋아요 0 | URL
저는 5권 중에 먼저 1권만 구입해서 읽었는데요, 계속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인은 표절자다. 세상의 모든 것을 표절한다. 이미 있는 것을 표절하고, 아직 있지 않은 것을 표절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표절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도 표절한다.

 

다른 생명들의 존재도 표절하고, 우주 모든 것을 표절한다. 그것을 시인은 '불멸의 표절(10-11쪽)'이라고 했다.

 

그렇다, 시인의 표절은 사라지지 않는다. 멈추지도 않는다. 시인이 표절을 멈추는 순간, 시는 사라진다.

 

하여, 시는 모두 표절이다. 세상 모든 것의 표절이다. 우리는 그런 표절을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이 시집에서 한 모든 표절 가운데, 마음에 다가오는 표절들이 있다. '죽음의 완성'이란 시에서는 만약 우리들이 너무도 오랫동안 산다면 어떨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드러나있고, '죽음의 방식'에서는 감나무와 소나무가 죽어갈 때 보여주는 모습을 대비시키고 있다.

 

사람들의 삶도 마찬가지리라. 어떻게 죽어가느냐는 각자의 삶에 따라 다를테니, 시인은 감나무와 소나무를 통해 사람들이 죽어가는 방식을 표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열심히 살아왔지만, 자신의 존재를 점점 더 잃어가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희미해지는 병에 걸린 남자'가 있다.

 

한때 빛나는 존재였지만, 이제는 희미해져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 그것이 꼭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우리 이야기고, 모든 생명체의 이야기다.

 

그런 생명체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는 길, 그것은 바로 '대준다는 것'에 있다. 대주지 않으면 자신 역시 설 수 없다. 자신이 서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우리는 대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어떤 말보다도 행동을 전제로 한다.

 

대준다는 것은 달콤한 말이 아니라 처연한 행동이다. 이런 행동을 통해 나는 남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세상의 등뼈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대준다는 것,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

배를 대고 내려앉아 너를 기다려준다는 것

 

논에 물을 대주듯

상처에 눈물을 대주듯

끝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한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준다는 것,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정끝별, 와락, 창비, 2008년. 26-27쪽.

 

나만 대주는가? 아니다. 남도 나를 위해 대준다. 이렇게 서로 대주는 관계,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이다. 생명체들의 삶만이 아닌,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의 삶이다.

 

시인은 이런 삶을 표절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대주어야 한다는 것, 한사코 대주는 것을 거부할 수는 없다는 것. 말이 아닌 행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대주는 행위에는 말이 필요없다. 행동이 있을 뿐이다. 이런 행동을 통해 세상은 삶을 유지해가게 된다.

 

정끝별의 시 '세상의 등뼈'를 통해 대준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됐고... 우리가 서로 대주어야 세상이 유지되는, 그런 등뼈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됐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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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4 1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14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대를 수락하는 순간, 시인과 독자는 같은 세계에 거주하게 된다. 반면 그 느낌의 세계에 입장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녀의 시는 열리지 않는다. (신형철의 해설 중에서, 150쪽)

 

  모든 시는 초대장이다. 시인이 느꼈던 세계, 시인이 만든 세계에 함께 하자는 초대장.

 

  그러나 그 초대장은 쉬운 언어로 쓰여 있지 않다. 오히려 암호로 쓰여 있다고 해야 한다.

 

  암호문. 이를 해독해 내지 않으면 초대에 응할 수가 없다. 무어라 쓰여 있지만, 그것은 그냥 글자에 불과할 뿐이다.

 

  느낌의 세계, 그것을 여는 열쇠, 열쇠가 동봉되지 않은 초대장은 소용이 없다. 그냥 종이에 불과하다. 사라질.

 

김행숙의 시도 마찬가지다. 해설자는 김행숙의 시에서 사랑도 느끼고 느낌의 공동체도 발견했는데, 나는 열쇠를 찾지 못했다.

 

초대장을 받았는데 초대장을 읽지 못해 잔치집에 가지 못하는 상황, 그런 상황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 잔치집에 가지 못해도 좋다. 나만의 조촐한 잔치를 하면 되니까.

 

시집의 처음 시를 가지고 잔치를 한다. 내가 나만의 느낌을 가지고 자족하는 잔치. 그것은 곧 시인의 초대장을 내 식으로 고치는 일이다.

 

제목은 '발'이다. 우리 몸에서 가장 밑에 있는 신체 부위. 땅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신체 부위. 온몸의 무게를 지탱해 주는 신체 부위. 가만히 있을 때도 있지만 주로 어디론가 가는 신체 부위. 그것이 바로 발이다.

 

그런 발이 "고울' 수가 없다. 발은 '미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발이 밉다고 사람들이 미운가, 아니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은 밉다. 그러나 그의 몸짓은 아름답다. 마찬가지다. 발이 미울수록 삶은 아름다울 수 있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발이 자신의 몸을 통해 삶을 아름답게 유지하는 것이다. 낮은 것들에 축복이 있으라. 반면 손은 높은 곳에 있다. 손을 위로 치켜들 때 손과 발은 가장 멀리 있게 된다. 손으로는 땅이 아닌 공중에 하늘에 떠 있다.

 

발이 고정되어 있다면 손은 자유롭게 움직인다. 시인은 바로 손이다.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는 발이다. 그런 발의 세계, 추악한 세계, 비루한 세계일 수 있지만, 아니다. 그런 세계는 아름답다. 전체적으로 삶은 아름답다.

 

시인은 그것을 안다. 발과 손의 거리를.

 

 

  발이 미운 남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나의 무용수들, 나의 자랑.

 

  발끝에 에너지를 모으고 있었다. 나는 기도할 때 그들의 힘줄을 떠올린다.

 

  그들은 길다. 쓰러질 때 손은 발에서 가장 멀리 있었다.

 

김행숙, 이별의 능력, 문학과지성사. 2007년. 11쪽.

 

그래서 기도할 때, 흔히 기도할 때는 두 손을 모으게 된다. 발이 아니라 손에 집중하게 된다. 시인의 세계로 들어설 때 시인은 발을 떠올린다. '기도할 때 그들의 힘줄을 떠올린다'고 한다.

 

시인과 삶은 멀리도 있지만 '쓰러질 때 손은 발에서 가장 멀리 있었다'고 하지만 쓰러질 때 땅을 짚는 것은 손이다. 손은 결코 발에서 떨어질 수 없다. 그들은 같은 땅을 짚고 있다. 단지, 멀리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삶에서 떨어질 수 없다. 낮은 곳의 사람들을 가릴 수가 없다. 어떻게든 자신의 시로 불러들인다. 시에서 그들을 살아가게 한다. 아름답게.

 

하지만 시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멀다. 시를 통해 그들의 삶을 떠올리기는 힘들다. 그들의 삶을 이해하도록 하는, 함께 느끼고 사는 공동체로 불러들이는 초대장이기는 하지만 열쇠말을 풀지 못하면 갈 수가 없다.

 

멀리 있는 것이다. 이 멂. 하지만 끝은 아니다. 끝이 아니기에 손이 땅을 짚을 때 다시 발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하여 우리는 쓰러져봐야 한다. 시인의 초대장을 읽을 수 있기 위해서는. 땅에 손을 짚어봐야 한다. 발과 같은 위치에 놓아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똑같을 수는 없다. 손과 발이 똑같은 땅을 짚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비슷한 위치에 놓일 수는 있다. 그것이 바로 시의 세계에 들어가는 길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한다.

 

길고 멀리 있지만 만날 수 있는 거리, 시와 현실, 시인과 독자, 시인과 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 시를 통해서 하게 됐다.

 

김행숙의 초대장을 받고 제대로 읽어내지 못해 잔치집에 가지는 못했지만, 나만의 잔치, 내 스스로 자족하는 잔치, 이 '발'이라는 시로 한다.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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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연가 - 그때 그 시절... 노래와 함께 걷는 서울의 추억 서울의 풍경들
이영미 지음 / 예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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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이 쓴 "서울은 깊다"라는 책이 자꾸 생각났다. 서울이 얼마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도시인지를 역사학자의 눈으로 보여준 책이 "서울은 깊다"라면, 이 책은 대중예술을 연구하는 사람답게 노래로 서울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서울이라는 공간에 켜켜이 쌓여 있는 역사, 문화, 삶을 노래를 통해서 다시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고 있으니, 한 장소를 이루고 있는 것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장소에는 사람과 시간과 온갖 유형, 무형의 것들이 모두 함께 하고 있다. 그것들이 동시에 존재하든 시간 순서를 두고 존재하든 한 장소에 존재함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이런 시간성과 다양성을 발견하는 것 그것은 그 장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은 서울토박이들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이 책의 저자가 강북에서 태어났고 자랐지만, 지금은 지방에 살고 있듯이, 강남에서 태어나 강남에서 자라고 강남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물론 존재하겠지만, 이들에게는 왠지 '토박이'란 말을 붙이기가 꺼려진다.

 

토박이란 말에는 그 말에 따르는 어떤 역사, 깊이, 문화, 사람들이 함께 하기 때문인데... 어쩌면 '토박이'란 말에는 촌스러움이 느껴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들에게도 서울은 고향이다. 빌딩 숲과 자동차 흐름과 콘크리트만이 이 주된 기억으로 남을지라도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에게는 이곳은 고향이다. 비록 '토박이'란 말을 잘 쓰지 않게 되더라도.

 

'토박이'들이 사라져가면 장소의 깊이도 더 깊어지지 않는다. 그 깊이에 머물다가 자꾸 채워져 깊이가 사라지게 된다. 그런 생각이 드는 강남이다.

 

이런 반면에 강북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도 같은 서울임에도 '토박이'란 말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저자인 이영미 역시 비슷하리라 생각하고.

 

1950-60년대쯤에 강북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아파트나 빌딩숲은 친숙한 공간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골목, 흙, 개울, 한옥이 친숙한 공간이었다. 이 공간들이 지금의 강남처럼 변해가는 과정을 겪은 세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서울토박이란 말을 붙일 수 있는지도 모른다. '

 

강남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골스러움, 촌스러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과거의 일에 불과하고.

 

이 책에는 일제강점기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서울을 노래를 통해 살펴보고 있다. 서울이 어떻게 노래에 등장했고, 어떻게 변모해갔는지를 대중가요를 중심으로 살피고 있다.

 

놀라움의 대상이었던 서울이, 외국 취향의 욕구를 대변했던 서울이, 반대로 그것을 성취하자 이제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전원생활을 꿈꾸는 서울생활로 바뀌어가더니, 어쩔 수 없는 서울의 모습, 서울 생활의 환희를 보여주는 노래들이 나오다가, 서울의 복잡한, 살기 어려운 모습까지도 보여주는 그런 노래의 변천사.

 

대중가요(민중가요도 가끔은 나오지만 대중가요에서 다룰 수 없었던 내용을 이야기할 때만 나온다)를 통해 사람들의 의식과 욕망이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일종의 미시사라고 할 수 있는데, 대중가요를 중심으로 서울의 깊이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흥미롭게 읽을 수가 있다.

 

여기에 시대순으로 서울을 노래하는 노래들을 소개하고 있기에 서울의 변화와 사람들의 생활양식의 변화, 그리고 노래에 나타나는 의식의 변화를 함께 살펴볼 수 있어서 좋다.

 

역시 서울은 깊다. 건축적으로 서울을 살펴도 그렇고, 역사적으로 살펴도 그렇고, 이렇게 노래로 서울을 살펴도 그렇다. 이 깊이가 서울을 좀더 살기 좋은 장소로 만들었으면 더 좋겠는데... 서울의 깊이를 알면 함부로 깊이를 없애는 정책을 펴지는 않을테니, 그런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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