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이 그림이 된다. 문자도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그와 다르다. 낱말을 가지고 그림을 만든다. 그림이 시가 된다. 글자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시가 되는 시들. 그런 시들을 모아 놓았다.


  한글을 가지고 디자인을 한 옷들과 다른 상품들도 있고, 또 시에 한글 그림을 시도하기도 했는데...


  이번엔 약간 다르다. 시집을 펼치면 두 쪽이 하나의 시를 이룬다.

  왼쪽 면에는 시인이 평소에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구절이, 오른쪽 면에는 그 구절과 통하는 그림이, 그림 밑에는 짧은 시나 제목이 있다.


타이포그래피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것과는 좀 다른 느낌을 준다. 그냥 오른쪽 면만 보면서 제목을 추측하는 재미도 있다. 그리고 제목과 그림에 쓰인 글자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생각해도 좋고.


  이 시집 제목이 된 시는 이렇다. 왼쪽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 그리고 그림에는 쌍둥이로 추정되는 사람이. 하지만 같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도 시간은 다르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시가 이런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림과 시가 하나가 된 시집이라는 것.


  왼쪽에 나온 구절들의 출처를 찾아봐도 좋고. 그것들은 우리가 곱씹을 수 있는 말들이니까.


무엇보다도 한글을 여러모로 다양하게 쓰고 있다는 점이 좋다. 한글이 그림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아름답게 표현한 시집이다.


앞으로도 이런 작품들이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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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셀 테러 - 온라인 여성혐오는 어떻게 현실의 폭력이 되었나
로라 베이츠 지음, 성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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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박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남성성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성장하는 남성이 지니게 되는 신념 체계가 내면화 되는 상태. 맨박스에 갇힌 남성들이 많이지면 그 사회는 성평등 사회와는 거리가 먼 사회가 된다.


성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에서는 다른 불평등도 심화된다. 즉 하나의 불평등만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인종, 경제, 학력, 지역, 국가, 연령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불평등이 중첩된다. 여기서 여러 불평등이 겹친 사람도 나타나고, 하나의 불평등을 겪는 사람이 다른 분야에서는 불평등을 옹호하는 일도 벌어진다.


맨박스라는 말도 이러한 불평등한 사회를 이루는 요소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게 맨박스라는 말은 들어봤는데, '매노스피어Manosphere'라는 말은 처음 들어왔다. 더불어 '인셀Incel'이란 말도 처음이고.


'인셀 테러'라는 제목을 봤을 때 이게 무슨 뜻이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백래시backlash라는 말은 들어봤는데, 이러한 백래시 중의 하나인가 했더니, 백래시를 그냥 반발 정도로 생각했다면(물론 백래시는 반발 정도를 넘어선 상태이다, 거의 폭력 수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인셀을 비롯한 매노스피어는 테러에 더 합당하다고 해야 한다.


이 책에는 이러한 '매노스피어'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읽으면 끔찍하다는 생각이 든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그 차이를 무화시켜 자신에게 종속된 존재로 만들려는 활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


'매노스피어'에 속하는 활동으로 저자는 '인셀, 픽업아티스르 ,믹타우, 남성권리 운동(두 운동 분야가 있는데, 저자가 언급하는 남성권리 운동은 여성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운동이다), 트롤(게이머게이트)' 등이 있다.

다른 활동들이지만 공통점은 여성을 적대시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인셀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인셀은 증오를 연료 삼아 타오르는 여성 혐오와 남성우월주의 교리를 의도적으로 확산하고, 무자비한 강간과 여성 살해를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최소 수만 명에 달하는 강성 회원을 보유한 급진적이고 극단주의적인 운동이다'(76쪽) 


끔찍하지 않은가. 이런 것을 운동이라고 해야 하는지 의문이고, 운동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운동을 찬성할 수 있을까? 이런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많을까 하지만, 아니다. 이 책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 활동에 참여한다. 갈수록 더 확산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서. 그러니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세상은 증오로 유지될 수 없으니까. 성에 따라서 극단적으로 한 성이 다른 성을 억압하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이 책에 든 많은 예시들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오히려 그러한 활동을 알려주는 꼴이 될 테니까. 반대로 어떻게 하면 그런 활동들을 줄이고 없앨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그들의 행동이 테러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 또 젊은이들에게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들을 양성해야 하고,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 매노스피어의 활동들은 언론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또 다름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범죄이다. 그것도 혐오범죄, 테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인식을 지니고 대응을 해야 한다고 한다.


다양성이 확보되는 사회에서는 극단이 설 자리는 없다. 그러니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러한 다양성이 꽃피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저자는 주로 영국과 미국의 사례를 들지만, 이것이 어디 그 두 나라에 국한된 일이겠는가. 우리나라 역시 N번방 사건을 겪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 책에 나오는 일들이 남일만은 아니다. 우리 역시 대비해야 한다. 


한 성이 다른 성을 또는 성적 지향이 다르다고 해서 억압하고 탄압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이 책은 그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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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밤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알베르토 모랄레스 아후벨 그림 / 열린책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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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하면 떠오르는 작가는? 파블로 네루다. 그렇다. 네루다만큼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작가가 있을까 싶다. 칠레 작가가 네루다만 있는 것은 아니고, 여성 작가로 이사벨 아옌데가 있기도 하지만, 영화 '일 포스티노'로도 네루다가 알려져 있고,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라는 소설로도 알려지고,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로도 유명한 사람이 바로 네루다다.


이 소설에서도 네루다가 나온다. 네루다가 나오니, 칠레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작가가 주인공일 거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나 역시도 소설의 주인공이 네루다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니, 당연히 그는 독재국가가 된 칠레 사회를 비판적으로 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상하다.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건만 아직도 하고픈 말이 너무도 많다. 내 자신과는 평화롭게 지냈는데. 그저 묵묵히 평화를 누렸건만,. 그런데 느닷없이 이 일 저 일 떠올랐다. 그놈의 늙다리 청년 탓이다.' (9쪽)


격동의 나라, 독재의 나라였던 칠레. 그런 엄혹한 시절을 거쳐왔는데, 그것도 작가로서, 비평가로서 명성을 얻으며 살아왔는데, '묵묵히 평화를 누렸'다고 한다. 묵묵히, 이는 사회 문제에 입을 닫았다는 말이다. 눈을 감았다고 해야 한다. 보고도 말을 하지 않으면 적어도 '평화를 누렸'다는 말을 할 수는 없을 테니.


이런 작가가 서술자로 소설을 이끌어 간다. 그래서 이 처음 문장으로 인해 서술자는 믿음을 주지 못한다. 아옌데 정권이 쿠테타로 무너졌을 때 서술자는 '참 평화롭군'(99쪽)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쿠테타가 일어나 많은 사람이 죽고 독재정권이 들어섰는데, 대통령은 대통령궁을 사수하려고 최후까지 싸우다 죽었는데, '평화롭군'이라니, '정말 조용하군'(99쪽)이라니... 이런 사람이 문학을 한다고? 이런 그가 어떻게 네루다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볼 수가 있지? 


소설의 초반부에 네루다가 등장하는 것은, 네루다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문학인을 등장시켜서 그를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당시 칠레의 모습이기도 하겠고.


이런 칠레의 모습은 서술자가 피노체트를 위시한 군부를 위해 마르크스 사상을 강의하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도대체 이 작자는 무슨 생각인 거지? 이렇게 문학과 세상이 동떨어질 수도 있나?), 문학인을 위해 파티를 여는 마리아 카날레스라는 사람에게서 절정에 이른다.


이 사람의 남편은 반체제 인사들을 고문하는 정보국 사람이고, 그는 그러한 고문을 자신의 집에서 한다. 집 한 쪽에서는 고문이, 다른 한 쪽에서는 문학을 빙자한 파티가 벌어지는 사회, 그것이 정상적인 사회인가. 그러한 것들이 우연히 알려졌음에도 사람들은 독재정권 하에서 그 파티에 계속 참여한다. 그것을 드러내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은 없다. 이런 문학인들의 모습을 볼라뇨는 이 소설에서 통렬하게 보여주고 있다.


쿠테타로 집권한 독재 정권. 그런 사회가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없음에도 행복한 것처럼 꾸미며 사는 사람들. 겉으로 치장하는 예술가들. 그런 예술가들의 모습을 이 소설을 통해 비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칠레의 모습을 '유다의 나무'로 비유하고 있다. '유다의 나무를 흥얼거리면서 가다가 칠레 전체가 유다의 나무로 변해 버렸다는 깨달음을 얻었다'(143쪽)라고 하는데, 깨달음을 얻었다면 어떤 행동을 해야할까?


유다의 나무가 무엇을 의미할까? 예수를 배반한 유다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목을 걸고 죽은 나무가 '유다의 나무'라고 한다면, 서술자가 칠레가 유다의 나무라고 하는 것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았다는 것일까?


아니면 칠레 전체가 유다의 나무이니, 자신들의 잘못을 칠레가 나중에라도 단죄한다는 뜻인가? 그래서 늙다리 청년을 등장시켜서 자신이 살아온 삶이 잘못 산 삶이었음을 생각하게 하는 것인가?


모골이 송연하다는 표현을 하고 싶을 정도로 시대와 사회에 눈 감은 문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들이 어떻게 그러한 문학 활동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칠레에서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도 이러한 때가 있었으니, 이 소설에 등장하는 서술자와 같은 역할을 한 문학인이 우리에게도 있었으니...


진정 문학을 하는 사람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질문은 시대를 막론하고 늘 해야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우리나라는 이러한 예술가들보다 현실을 바로보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최근에도 당당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낸 작가가 있었으니, 우리나라 이런 작가들은 이 작품에 나오는 서술자와는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예술가들이 있다는 것,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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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아웃사이더 딕테 시리즈 1
오드리 로드 지음, 주해연.박미선 옮김 / 후마니타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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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쾌하다. 돌려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간결하다. 어려운 말을 하지 않는다. 똑바로 자신의 말이 다가갈 수 있게 한다. 그렇다고 가볍지 않다. 무겁다. 말에 실린 낱말들 하나하나가 무겁다. 고통과 분노. 하지만 이 고통과 분노는 사랑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분노와 고통을 똑바로 본다. 


어쩌면 바닥까지 내려가본 사람이 더이상 내려갈 곳이 없어 이제는 올라가야만 할 때, 그럴 때 올라가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그러한 모습이 그려진다. 나만 올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남겨둘 수 없다는. 또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사람들을 버릴 수 없다는.


함께하기. 이 함께하기에는 차이를 없앤다는 말은 들어설 공간이 없다. '함께'라는 말에는 '같다'는 의미보다는 '다르다'는 의미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다르기' 때문에 '함께' 한다. 함께하기 위해서 차이를 없앤다?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다. 이런 말들이 쉽게 내뱉어진다. 그런데... 그럼 언제 말을 하지?


지금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공동의 적을 물리친 다음에는 차이를 말할 수 있나? 그때 차이를 말하면 이제는 '적'이 되지 않나? '차이'는 대의를 위해서 묻어두어야만 하는 그런 것인가? 오드리 로드는 이를 거부한다. 차이는 차이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더 나아갈 수가 없다. 세상에 누군가의 다름을 묵살하고 이루어지는 진보를 진보라고 할 수 있나?


하여 '함께'라는 말이 통하기 위해서는 이 '함께' 속에는 반드시 '차이'가 있어야 한다.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은 나와 같은 동등한 존재로 남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함께 행동을 한다고 해서, 생각들까지도 똑같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공동의 행동을 하면서도 차이들을 드러내고, 그 차이들이 서로 부딪치고 부딪쳐 또다른 합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특히 발전,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오드리 로드가 말한, 쓴 글들이 실려 있는 이 책은 이러한 '차이'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차이'들이 모여 '함께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중요함을 생각한다.


오드리 로드는 '차이는 우리의 창의성이 불꽃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극성polarities과도 같은 것으로 봐야 합니다(176쪽)'고 말하고 있으며, '차이는 우리가 각자의 힘을 벼려낼 수 있는 강력한 연결점이자 원료입니다(177쪽)'라고 '주인의 도구로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에서 말하고 있다.


왜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할까? '아웃사이더인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경계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 지지하고 소통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로를 온전히 알아야 합니다(99쪽)'는 말에 그 답이 나와 있다.


경계 위에서 살기 때문이다. 이쪽 저쪽 확실한 영역이 아니라 이쪽과 저쪽에 속하지 못한(현재로서는) 경계에 있기 때문에 경계는 이런저런 차이들이 함께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온전히 알아야 한다고 하는데,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결코 어떤 이념이나 행동으로 뭉뚱그려져서는 안 된다.


다양함, 세상에 어떤 사람이 하나로 정의될 수 있단 말인가? 이 다양함을 인정하고 거기서 함께할 수 있는 부분들, 함께해야만 하는 부분들을 찾아나가야 한다. 경계 위의 삶이란 고정된 삶이 아니라 늘 변하는 삶이다. 유동적인 삶은 자신의 것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열고 상대를 받아들이는 삶이다. 그것은 '차이'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받아들여 다양함이 풍부하게 발현되는 삶을 살아가려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른 존재로부터 강요된 삶을 던져버려야 한다. 자신을 바로 보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고통이 따른다. 그리고 고통에서 분노가 발생한다. 이 분노가 자신을,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된다.


왜냐하면 '정확한 대상에 초점을 맞춘 분노는 진보와 변화를 추진하는 강력한 에너지원이 될 수 있(217쪽)'고, '분노를 우리의 발전과 미래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표출하고 행동으로 전환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해방시키고 우리의 힘을 강화하는 정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 분노에는 정보와 에너지가 장전되어 있(218쪽)'고 '분노란 우리들 사이의 왜곡된 관계를 슬퍼하는 감정이고,그 목적은 변화(221쪽)'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분노는 자신의 고통을 직시하는 데서 온다. 자신의 고통만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을 보는 데서, 분노는 힘으로 전환된다. 그런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들 가운데 누구 하나 배제되지 않는 미래를 만들어 가는 데 헌신하는 것이며, 그런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의 독특한 정체성에서 나오는 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우리의 동일성은 인식하는 동시에 서로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251쪽)'고 로드는 말하고 있다.


다시금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말이다. 흑인이자, 여성이고, 성소수자이자 페미니스트인 오드리 로드. 이런 그이기에 '차이'을 인정하고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을 더 깨달았을 수 있다.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차이들이 있나, 그런데 우리는 그 차이들을 차별로 뒤바꾼 경우가 있지 않나? 기득권에 사로잡혀 차이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거나, 그것이 어째서? 라고 말하고 있는 경우가 있지 않나 하는 반성을 한다.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해주는 오드리 로드의 글들이었다고, 이 책을 곁에 두고 계속 읽으면서 곱씹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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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을 비난하려는 의도로 쓰는 말들이 있다. 그 말들이 혐오 표현인지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쓴다. 그런 말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반대로 그 표현을 자신들이 먼저 쓴다. 그래, 이 말, 나는 이렇게 쓴다 하면서.


  그런 말 중에 '퀴어queer'란 말이 있다. 이상하다고, 정상이 아니라고 쓰던 말들을, 그것이 어때서? 우린 너희와 달라. 그 다른 점이 바로 우리 특징이야 라는 듯, 당당하게 쓰고 있는 말.


  요즘은 퀴어란 말을 혐오 표현이라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언어의 사용을 뒤바꾼 것이다. 혐오 표현에서 당당한 표현으로. 그 표현 속에 주눅들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을 더 드러내는 쪽으로. 퀴어 축제가 있으니.


'이반'이라는 말도 있다. 혐오 표현이 아닌 말인데, 이 말은 '일반'이라는 말을 비틀어 쓰던 말이었다. 우리가 흔히 일반인, 일반인 하는데, 이 일반인에는 정상성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었다. 그러니 그들의 기준과 다른 사람들은 정상성이 결여된 사람들이고, 이들은 일반인의 범주에 들기 힘들었는데...


이 말을 뒤집는다. 그래? 너희가 일반이라고? 그럼 우린 이반이다. 하여 이반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퀴어와 비슷하게 그 말이 지닌 의미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당당하게 자신들을 표현하는 말로 바꾸어 버린 것.


피하고 감추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고 맞서는 것이다. 언어의 자기 것으로 만듦으로써, 자신이 그 의미를 재창조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기존의 사고방식을 넘어서게 된다. 사고방식을 넘어서면 태도가 달라진다. 당당해진다. 그래,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홍어'라는 말이 그렇다. 바다에 사는 생물 이름으로만 쓰이지 않았다. 특정 지역을 비난할 때 쓰였다. 비하하는 말, 혐오 표현이었다. 지금도 그렇게 쓰는 사람이 있겠지만.


지금은 홍어가 특정한 지역만의 생물이 아니다. 홍어는 전국에서 요리에 쓰이는 생물이다. 생물? 아니 죽어서 발효되어 더 인기를 끈다. 회로도 먹지만 삭혀서 먹는 것이 더 잘 알려진 요리다.


독특한 냄새, 톡 쏘는 맛. 홍어를 어찌 비하할 수 있단 말인가. 그토록 즐기는 사람이 많은 음식을.


그러다 홍어를 '퀴어'나 '이반'처럼 쓴 시를 만났다. 시집 전체가 홍어 예찬이다. 당당하다. 우리 곁을 떠날 수 없다. 하긴 이름도 홍어(洪魚)다. 생김새가 넓적해서 홍어라고 하겠지만, 어느 곳에서나 삭혀서도 먹을 수 있어서 널리 쓰이는 물고기라고 홍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두루두루 우리와 함께 하는 홍어. 그런 홍어를 문순태 시인시를 통해 우리 곁으로 가져온다. 언어의 의미 역시 긍정적으로... 홍어는 이제 당당한 우리의 음식이고, 자기를 드러내는 개성적인 존재가 된다. 누구도 무시해서는 안 될. 


'홍어, 전라도의 힘이여'라는 시에서 전라도의 힘이라고 하지만, 이때 전라도는 특정 지역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민주화를 이루어낸, 독재를 용납하지 않는 우리들을 의미한다. 그러한 우리들이 바로 홍어다.


홍어, 전라도의 힘이여


너는 아무나 먹을 수 있는 

비린내 나는 물고기가 아니다

짓밟힌 민초들의 울부짖음이고

애원성(哀怨聲) 판소리 가락이자

동학농민군의 죽창이거나

임을 위한 행진곡이며

눈물 머금고 핏빛으로 피어난

오월의 무등산 철쭉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를

음식으로 먹는 것이 아니다

불꽃같은 맛의 기억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다

입에 넣고 씹기도 전에

폭발하듯 툭 쏘는 저항과

숨막히는 최루탄 냄새

홍어를 먹는다는 것은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자는 것

함께 홍어를 먹는다는 것은

더불어 홍어가 되자는 것

오래 삭힐수록 더 날카롭게

되살아나는 전라도 기질

아, 온몸 떨리게 하는

전라도의 힘이여


문순태, 홍어, 문학들. 2023년 초판 2쇄.  14쪽.


어디 전라도만이겠는가? 독재에 저항하는 우리 민중들은 전국 도처에 있었으니, 홍어가 전국의 모든 사람이 먹는 음식이 되었듯, 이렇게 홍어는 우리에게도 불의에 저항하는 힘의 상징이 된다.


이렇게 홍어는 이제 저항하는, 세상을 바꾸는 힘의 상징이 된다. 함께함,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들을 대표하게 된다. 그렇게 홍어는 시인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2025년 4월 4일 11시 22분. 홍어의 톡 쏘는 맛을 톡톡히 보여준 시간이다. 홍어가 먹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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