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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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평등 시대. 참 오래 전부터 하던 말이고, 양성평등 교육, 학교에서도 강조하고 있고, 성평등은 이제 두 말 할 필요없는 당연한 일이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이론에서는.

 

그런데 현실을 따져보면 과연 그럴까? 미투 운동으로 대변되는 성추행 폭로들을 보면 여전히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차별을 받고 있다. 

 

성추행뿐만이 아니라 승진에서도 여전히 유리벽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이런 현실에 동성애자 여성은 더욱 힘든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겠다.

 

여성이라는 존재에 성소수자라는 존재가 덧붙여지니 이들이 서로를 보듬고 더 나은 조건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하고, 서로가 엉켜 더욱 낮은 곳으로 끌어내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절대로 그러면 안 되는데...

 

여전히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심하고, 초등학교에서 페미니즘 교육을 했다는 이유로 여러 곳에서 항의를 받은 교사가 있고, 교육방송에서는 이런 성소수자들이 참여하던 프로그램이 종료하는 일도 있었으니...

 

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우리 사회에서 정상 범주 -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일이 이미 비정상인데, 다수를 벗어난 사람들을 비정상이라고 칭하는 현실에서 그냥 이 용어를 쓰면 - 에 속한다고 여기는 사람보다 험난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을 보라. 동성애자 딸이 나온다. 그런데 주인공은 동성애자 딸이 아니다. 동성애자 딸을 바라보는 엄마가 주인공이다. 엄마가 서술자로 나와 자신과 딸, 그리고 '젠(이제희)'이라는 여성의 삶을 이야기한다.

 

우선 엄마는 교사라는 직업을 가졌었지만 딸을 키우기 위해 직장을 포기한다. 그렇다고 일을 안 할 수는 없다. 딸이 큰 다음 살아가기 위해 직장을 얻는데, 마지막에 얻은 직장이 요양보호사다.

 

아픈 사람, 이젠 죽음을 앞둔 사람을 돌보는 사람. 엄마의 역할은 이렇게 줄곧 누군가를 돌보는 일로 점철된다. 이것이 인정받아야 하지만 자본의 논리 앞에서는 절대로 인정받을 수 없다. 수치로 - 연봉 또는 월급이라는 - 표현되는 경제 논리, 자본 논리 앞에서 돌봄은 돈과 직결될 수밖에 없다.

 

요양소들이 모두 이런 모습을 지니고 있지는 않겠지만 돈을 목표로 하는 요양소들이 보호사들에게 요구하는 일은 결국 돈을 벌 수 있게 하는 일이다. 인간적인 돌봄은 없다. 엄마가 일하는 직장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돌봄을 우선 가치로 두는 사람, 그 직장에 오래 있을 수가 없다. 엄마 역시 해고 통보를 받는다. 왜냐하면 상품으로  대해야 할 사람을, 사람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이런 엄마는 '젠'이라는 과거에는 남을 돕고 좋은 일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누구도 돌보는 사람이 없고 치매까지 걸린 사람을 결국 제 집으로 데리고 오는 일은 여전히 여성과 돌봄이 관계가 있다는, 여성이 돌봄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자신보다 윗세대를 돌봄으로 대하는 엄마는 자기 딸이 이런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따르기를 바라지 않는다. 엄마는 동성애자인 딸에게 나중에 너도 이렇게 될 수 있다고 몸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엄마는 여전히 '보통-정상'이라는 범주를 포기하지 않는다. 딸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이해까지 도달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내가 너희를 이해할 수 있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까. 때로 기적은 끔찍한 모습으로 오기도 하니까.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오긴 오겠지.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시간이 필요한 일이잖니. 나한테 그만큼의 시간이 남았는지 모르겠다.' (194-195쪽)

 

이것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딸애와 함께 사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이 말에서도 어떤 희망이 읽히는데... 소설의 맨 끝은 이렇게 끝난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건 아득한 내일이 아니다. 마주 서 있는 지금이다. 나는 오늘 주어진 일들을 생각하고 오직 그 모든 일들을 무사히 마무리하겠다는 생각만 한다. 그런 식으로 길고 긴 내일들을 지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볼 뿐이다.' (197쪽)

 

'젠'의 장례식장에서 엄마가 속으로 하고 있는 다짐이다. 이 다짐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엄마는 딸이 늙었을 때, 자신이 생각하는 보통 가족을 이루지 못했을 때 겪게 될, 혹 '젠'과 같은 최후를 맺지 않을까 걱정하는 자신을 질책한다고 할 수 있다.

 

내일은 내일이다. 지금은 지금이다. 딸이 지금 자신의 파트너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오늘을 오늘답게 살아가면 그것으로 삶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결말이다. 하지만 엄마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 비추어 딸이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는 태도를 완전히 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노력할 것이다. 언젠가는... 그런...

 

여기에 여성과 성소수자라는 이중억압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냥 자신들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너무도 당연한 다름이 차별이 되면 안 되는, 그런 사회...

 

소설을 읽으며 엄마의 고민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소설에서 엄마는 끝까지 딸의 파트너를 '그 애'라고 한다. 자기 딸을 '그린'이라고 부르는 파트너를 못마땅해 하면서도 말이다.

 

엄마가 딸을 이해하는 순간, '그 애'는 자기 이름을 찾을 수 있을텐데... 소설에 아주 잠깐, 지나가듯이 그 애의 이름이 나온다. '레인' 

 

'이제 매일 아침 나는 주방에서 그 애와 마주쳐야 한다. 레인. 그러나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발음한 적은 없다.' (46쪽)

 

엄마가 그 애를 '레인'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 애는 엄마에게 이해받게 된다. 엄마는 그 애를 이해하게 된다.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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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잔하고 따스한 영화다. 젊은이들에 대한 이야기, 앞으로만 앞으로만 내달리지 말라고 길은 여럿임을 보여주는 영화.

 

  친구 셋이 등장한다. 도시 삶을 거부하고 농촌으로 돌아온 재하, 농촌에 살지만 그곳을 떠나고 싶어하는 은숙, 그리고 도시에서 잠시 돌아온 혜원.

 

  주인공은 혜원이다. 임용고사에 떨어지고 도시에서 살기가 힘들어져 고향으로 돌아온 혜원. 그곳에는 언제나 그를 맞이할 집이 있다.

 

  집에 돌아온 혜원을 발견한 은숙, 은숙에게 돌아온 이유가 '배가 고파서'였다고 말하는 혜원.

 

  영화는 이렇게 셋 가운데 혜원을 중심으로 전개가 되는데, 혜원이 하는 요리들이 영화 장면마다 나온다.

 

음식... 생명에서 생명으로 생명을 이어주는 존재. 그것도 마트에서 사온 재료들이 아니라 직접 기른 채소들로 하는 요리.

 

이런 요리를 통해 혜원은 자신의 마음을 점점 치유해가게 되는데...

 

도시인들은 대부분 뿌리뽑힌 사람들이다. 그들에겐 돌아갈 고향이 없다. 그냥 도시에서 그날그날을 살아갈 뿐이다. 먹을거리 역시 마찬가지다.

 

도시인들이 먹는 음식은 뿌리뽑힌 음식일 뿐이다. 그냥 스쳐지나가는 음식. 도시에서 음식을 먹을 때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을 하기 힘들다. 그냥 소비하는 음식일 뿐.

 

혜원이 도시에 있을 때 아르바이트 하는 곳이 편의점이라는 설정이 마음 아프게 와닿은다. 편의점, 그야말로 뿌리뽑힌 음식들이 순간순간 지나쳐가는 곳 아니던가.

 

편의점 음식을 먹던 혜원이 그 음식을 뱉어내는 장면. 상한 음식이겠지만, 그렇게 도시 음식은 소모될 뿐 다시 생명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만다. 그냥 버려지는 존재일 뿐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혜원에게 음식은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어주는 존재다. 자신의 마음이 담긴 소중한 존재다. 음식을 먹을 때 감사 인사를 하고, 은숙과 갈등이 있을 때도 음식으로 풀게 된다.

 

이렇게 많은 음식들이 나오는 영화에서 그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젊은이들, 자신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잡으려고 애쓰는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미 방향을 정하고 자리를 잡은 재하와, 여전히 자신이 있는 곳을 떠나려고 하는 은숙, 그 사이에 있는 혜원인데...

 

혜원은 결국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영화에서 엄마를 이해하는 장면이 바로 이것이다.

 

'리틀 포레스트' 영화 제목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신이 살아가는 장소. 그것은 클 필요가 없다. 다른 존재에게 위압감을 줄 필요도 없다.

 

영화에서 혜원 엄마가 하는 역할은 바로 그것이다. 자기 자식이 깃들 수 있는 작은 숲을 만드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식도 그런 작은 숲을 만들어가게 하는 것.

 

혜원은 여러 단계를 거쳐 자신이 '작은 숲'을 만들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이 작은 숲에는 생명이 넘칠 것이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은 한층 더 밝아지겠지.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의문이 남는다. 작은 숲을 청년들에게 만들라고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 영화 속 혜원 엄마가 혜원을 위해 작은 숲을 만들었듯이 지금 기성세대들이 청년들을 위해서 작은 숲을 먼저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

 

청년들에게 너희들이 이렇게 작은 숲을 만들어라고 하지 말고, 기성세대들이 청년들이 깃들 수 있는 작은 숲부터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것을 하지 않고 청년들에게 조금 달라도 돼, 멈춰도 돼라고 얘기하는 것은 책임방기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영화 속 혜원이 '아주심기'를 하려 하고, 작은 숲을 만들려고 하는 데는 엄마가 먼저 해놓은 일이 있었다는 것.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기성세대들의 책임이 더 막중하다는 것, 이 영화는 청년들보다는 기성세대들이 반성하면서 봐야한다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데...

 

좋았다. 때리고 부수고 꽤나 자극을 주는 장면이 많은 영화들을 보다가 생명이 넘치는 영화, 생명의 소중함을, 음식이란 단지 소모해버리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과 생명을 이어주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작은 숲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런 작은 숲을 기성세대들이 먼저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됐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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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젊은 시인들의 시를 읽다보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단 생각을 한다.

 

  이 시집 역시 마찬가지다. 계속 머리로 생각하게 하는 시집을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사실 시가 마음을 울리지 않고 머리에서 계산하게 하면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골머리 썩였던 이상의 시와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난 여전히 이상의 시에서 감동을 받지 못한다. 마음을 울리기보다는 눈을 먼저 괴롭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이나 비평가들이 좋아할 만한 시. 일반 독자들은 도대체 뭔 소리야 하면서 외면하는 시.

 

  이 시집을 읽으며 왜 자꾸 들뢰즈라는 사람이 떠올랐을까? 아니 들뢰즈 철학을 잘 모르니 들뢰즈라기보다는 그의 철학을 해설한 사람들이 들려준 '리좀(rhizome)'이라는 말이 생각났다고 해야 한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상태. 나무 줄기가 명확하게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어서 우리가 보고 판단하기가 편하다면 뿌리 줄기라 할 수 있는 리좀은 어디로 향할지 알지 모른다는 상태.

 

체계적으로 뻗어나간다기보다는 그냥 스스로도 존재하면서 어디로도 뻗어가면서도 서로 연결이 되는 상태라는 것.

 

젊은 시인들의 시는 요즘 이런 상황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성향을 지닌 사람들에겐 잘 이해가 될까? 나로서는 의문이긴 하지만...

 

유희경의 이 시집에서도 이해 못할 시들이 많았고, 마음을 울리는 시를 발견하기는 힘들었다. 다만, 뜻이 무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시... '우산의 반대말'

 

 우산의 반대말

 

고이면 좋겠어

잠든 도시의 가슴팍에

의심이란 거지 우리가

찾아볼 수 없는 흔적

 

이렇게 끝내주는 소리는

천년 전의 것

용서하라 모든 이빨을

비가 내일을 잡아 뜯고

눈썹을 파르르 떨어

써놓은 문자를 내놓는다

 

쏟아져 내리는, 입말

놀라는 눈과 감기는 물

 

비가 내리는 만큼

입을 다문 사람

그게 아니더라도

이런 날씨 앞에서는

누구나 넓고 너무 투명하다

 

떠오른다 침묵하지 않는,

하고 싶은 말 지우고,

젖어간다 모서리부터

 

유희경, 오늘 아침 단어, 문학과지성사, 2011년 초판 4쇄. 98-99쪽.

 

우산은 가리는 것. 비를 막는 것. 그러니 우산의 반대말은 가리지 말라는 것. 빗소리, 제대로 듣기가 힘든 요즘.

 

비는 자신의 말을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지만 우리는 우산으로 막거나 또는 건물들로, 그리고 아스팔트로 철저히 비들을 막아 하수구로 흘려보내고 만다. 비가 하는 말을 듣는 것은 먼 과거의 일.

 

이만큼 우리는 어쩌면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지도 모른다. 비가 좍좍 내릴 때 잠시 침묵하는 것. 비가 하는 소리를 듣는 것. 그러나 결국 비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우리에게 전달하지 못한다.

 

우산이 없더라도 비는 고이지 못하니까. 그가 쓴 글씨는 곧 사라지고 마니까. 그래서 그의 언어는 문자언어, 글말이 아니라 입말일 수밖에 없다. 순간성을 지닌 말.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어렵다. 그냥 이 시는 그래도 자꾸 읽고 싶어진다. 의미를 명확히 파악하지는 못하겠지만 무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리좀이다. 이 리좀에 대해서는 세대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힘든지도 모른다. 디지털 원주민과 디지털 이주민, 또 디지털에서 추방된 사람들이 서로 의사소통하기가 힘들어지는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시 읽기 어떨 땐 참 좋기도 하지만, 어떨 땐 고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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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보의 마지막 날 (문고본) 마음산 문고
이자벨 랭보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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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튀르 랭보. 그는 내게 글자의 색을 알아보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어쩌다 음운에 색깔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단 말을 들었고, 랭보의 '모음'이라는 시에서 각 모음에 색깔을 그가 입혔음을 발견했다.

 

특이하다고 해야 하나,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그리고 그가 일찍 죽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그게 다였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는 나하고는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이상 정도 되지 않을까 하는, 시도 그렇지만 행동도 기이한, 일찍 죽은 점에서 비교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의 마지막 모습을 기록한 책이 나와서 읽게 되었다. 암으로 다리를 절단하고, 그 암이 온몸으로 퍼져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야 했다는 사실을.

 

죽음의 순간, 사람들은 솔직해진다고 한다. 천재로 알려진 작가가 마지막에 보이는 솔직한 모습에 대한 궁금증도 이 책을 읽게 하는 데 한몫했다.

 

동생 이자벨 랭보가 쓴 책인데... 이자벨 랭보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와 랭보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랭보가 죽기 전에 했던 마지막 여행에 대한 짧은 글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처절한 고통 속에서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랭보를 간호하는 이자벨. 이자벨이 본 랭보. 랭보가 이자벨에게 했다는 말이 마음을 울린다.

 

"난 땅속으로 갈 테고, 넌 태양 속을 걷겠지." (50쪽)

 

너무도 젊은 나이에 유명한 시인이 되고, 곧 시를 포기하고 - 그는 프랑스에서 문학으로 성공할 가능성을 보았지만 청춘기의 작품을 계속 이어가지 않은 걸 흡족해 했다. 왜냐하면 "졸작이었으니까."(98쪽), 병에 걸려 다리를 절단하고, 온몸에 퍼진 암 때문에 고통 속에 괴로워하다 세상을 뜬다.

 

그가 살았을 때 낸 시집이 별로 많지 않고 젊은 시절에 쓴 작품 이외에는 별다른 작품도 없다. 우리나라 이상이나 나도향, 김유정 등이 20대에 삶을 마감한 것에 비하면 조금 더 오래 살았다고 할 수 있지만, 작품 활동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너무도 조숙한 천재였던가. 그러므로 세상과 화합할 수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여기저기 방랑생활을 했다는데, 나중에는 무기 판매상까지 했다니, 그런 삶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지만 그가 세상에 정착하기는 힘들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 실려 있는 '랭보의 마지막 여행'은 그가 치료를 받으러 로슈에서 마르세유로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글이다.

 

통증으로 옴짝달싹 못하는 랭보가 어찌어찌 마르세유로 가는 과정, 그것이 바로 랭보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평생을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사람이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기차를 타고 통증과 함께 하는 여행. 그 과정을 함께 하는 동생 이자벨의 마음이 잘 전달되고 있는 글이다.

 

어쩌면 랭보의 삶은 그 자신의 시집 제목처럼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일지도 모른다.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바로 지옥 자체였을 터이니. 꼭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아니더라도 그에게 삶은 지옥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기때문에 여기저기 방랑생활을 했을 테고.

 

랭보에 관심이 있는 사람, 랭보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한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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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백서 - 1980년 광주에서 기록된 최초의 항쟁백서
소준섭 외 지음 / 어젠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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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에 공식 출판이 아닌 지하 출판으로 사람들에게 배포되었다고 한다. 이 책의 대표저자로 알려진 소준섭의 기록으로,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널리 알리게 되었다고.

 

이 책으로 인해서 광주에서 일어난 일은 지역을 넘어 전국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 책을 토대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 우리에겐 '넘어 넘어'로 잘 알려진 책이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뭐, 또 광주냐, 아직도 할 이야기가 남았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작년에 개봉한 영화 '택시운전사'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듯이 여전히 광주는 진행형이다.

 

이 책에서도 말한다. 광주는 진행형이라고. 이는 완전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인들이 총을 쏘았는데, 발포 명령자가 밝혀지지 않았고 분명 책임 있는 자리에 있던 자들은 모두들 책임을 회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광주민주화운동을 폄훼하는 자들까지 있으니 여전히 할 일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뒤늦게 공식 출판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수많은 기록들이 나오고 있지만 당시의 현장감을 살린 기록을 보존하여 우리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는 것.

 

최근에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도 개정판이 나왔고, 황석영의 '수인'에서 그 책을 만들기까지의 과정도 나오는데, 이 광주백서에서도 그 과정이 잘 서술되어 있다.

 

서로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이들을 비교하면 광주에 대한 기록들이 어떻게 정리되어 갔는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이 책은 최초의 기록으로 의미가 있다. 이 책을 토대로 다른 책들이 나왔다고 보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은 광주의 참상을, 광주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을 전국적으로 알렸다는 데도 의의가 있으니.

 

어디선가 본 듯한 역사는 기억의 싸움이라는 말이 있다. 기억은 기록을 통해서 더 오랫동안 보존된다. 우리가 기록을 중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광주백서가 있었기에 광주에 대한 다른 기록들이 더 잘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록을 통해 기억을 하면 역사의 왜곡을 막을 수 있다. 이 책에서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혹 이 책이 북한의 책을 베낀 것이 아니냐고... 기록자는 이 광주백서는 1982년에 나왔고, 북한에서 발간된 책은 1985년이니 베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한다.

 

'...명백한 팩트는 '광주백서'가 1981년 초 광주에서 기록하여 1982년에 팸플렛으로 제작 배포되었고, '광주'와 관련된 북한의 책들은 1985년에 비로소 출판되었다는 것이다.' (192쪽)

 

여기에 기록자인 소준섭은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중국에 유학할 때도 북한과의 관계가 될 만한 만남이나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6년에 걸쳐 중국 상하이에 있는 푸단(復旦)대학교에서 유학을 했다. 하지만 북한과 가까이 위치한 중국의 동북지방에는 아예 가지도 않았고 북한 사람들과 한 번 조우한 적도 대화 한 마디 나눈 적도 없다. 나의 이러한 일종의 '비정상적인' 행동 또한 이 땅에서 수십 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종북몰이'의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유신 시절부터 체득화된 비극이기도 하였다.' (194쪽)

 

그러니 이젠 북한의 책동이니 간첩이 와서 일으킨 폭동이니 하는 소리들을 하지 말자. 이미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는데, 사실조차도 왜곡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니까 말이다.

 

이 책에는 기존에 나온 '광주백서'에 부록으로 자료를 덧붙여서 좀더 두꺼운 책으로 내었다. 그 중에 읽어보고 생각해 볼 만한 내용이 바로 '5.18민주화운동의 왜곡과 '기억의 형법' (박학모)이라는 글이다.

 

유럽에서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법을 '부인 금지법'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종차별이나 학살을 옹호하는 발언들은 표현의 자유를 넘어 사회적 범죄라는 인식에서 피해자의 고소가 없어도 처벌할 수 있다고 규정한 법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법에 대해서 논의가 되고 있는 모양인데, 찬반이 갈리고 있는가 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이런 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법보다는 먼저 아예 그런 생각, 그런 표현을 하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하고, 그런 발언을 하는 사람이 경원당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겠지만.

 

이런 문제가 해결되어야 '광주'는 과거형이 된다. 그 전까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 책은 그 점을 다시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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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2 09: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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