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 페미니스트 크리틱 1
김은실.권김현영.김신현경 외 지음, 김은실 엮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엇이든지 한쪽으로만 치우치면 좋지 않다. 페미니즘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페미니즘은 방어 논리가 더 강했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의 절반(이 말은 성소수자를 배제하는 말이 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처음에 여성 권리를 주장할 때는 이 말을 사용했다. 남성과 동등한 존재인데, 그렇지 못하다는 인식에서 세상의 절반이라는 말을 썼다)이 여성임에도 남성들의 부속품 같은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시작하자,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이 붙기 시작했고, 페미니즘은 방어를 넘어 공격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과격한 여성주의를 표방하는 단체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남성들뿐만이 아니라 여성들 사이에서도 페미니즘에 관한 여러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논쟁은 좋다. 자꾸 논쟁해야 한다. 그래야 쟁점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 쟁점, 즉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알게 된다면 그 다음은 해결책으로 넘어가게 된다.

 

인간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 제기한다고 했던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이라는 얘기는 이미 문제가 제기되었다면 해결책이 있다는 말이다.

 

하여 많은 문제들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해결되어 가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여전히 갈 길이 멀지만.

 

이 책은 이런 페미니즘의 발달과정에서 여전히 논쟁이 되어야 할 것들을 제시하고 있다. '성폭력 이후'라는 논점으로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들이 여전히 당당한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제기하고 있으며...

 

가령 여성이 성폭력을 유발했다는 식으로 몰아간다든지, 또는 피해자화라고 하여 너는 큰 고통을 겪었으니, 그에 합당한 자세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든지, 가해자는 미래를 바라보면서 용서 담론이 형성이 되지만, 피해 여성에게는 이미 씻을 수 없는 과거 담론을 제시한다든지 하는 등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것들을 제시하고 있다.

 

피해자화라는 말... 너는 당했으니 괴로울테니, 괴롭게 지내야 한다는 말... 이 말이 지닌 폭력은 여성을 대상으로만 치부하게 된다. 무서운 말이다. 그런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찬가지로 '여성의 입대' 문제가 있다. 평등 시대에, 여자도 군대 가라는 말, 또 여자도 군대 가야한다는 여성주의 진영의 말이 있다.

 

그러나 군대가 무엇인가. 군대는 철저하게 남성성이 관철되는 집단 아닌가. 그곳에는 평등이 없고 위계와 명령, 그리고 폭력만이 있을 뿐이다.

 

오히려 여자도 군대 가야 한다가 아니라 남자도 군대 가지 않을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로 바뀌어야 한다. 이런 다양한 주제들... '성매매 여성 되기 / 10대 가출 여성 / 걸 그룹과 샤덴프로이데 / 소녀의 디지털 노동 / 저출산 담론 / 이주 여성의 이름' 이 논쟁 거리로 나와 있다.

 

하나같이 고민해야 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다. 이런 논점들임에도 이 책은 한 쪽으로 논쟁을 몰아가지 않는다.

 

세상이 단 하나만의 답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측면에서 살펴보면서 해결책을 찾아가야 한다는 점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주제는 마지막 장에서 유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요즘 다문화라고 통칭되는 이주민들, 특히 이주 여성들이 지닌 문제.

 

이들을 우리는 이방인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반대로 우리에게 동화되어야 할 타자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장에서 말하고 있는 '노동자를 불렀더니 인간이 왔다' (204쪽)는 말과 '며느리를 불렀더니 여성이 왔다' (204쪽)는 말이 바로 페미니즘이 지닌 주장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앞에 나오는 말보다 우선해야 할 것이 바로 뒤에 나오는 '인간(사람)'이라는 말. 여성이니 남성이니 또는 성소주자니를 따지기 전에 모두 사람이라는 사실. 또 동양인, 서양인 따지기 전에 인간이라는 인식이 먼저 작동되어야 한다.

 

이런 인식에서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시작한다면 사회는 다양성이 살아있는 조화로운 사회가 될 것이다.

 

그것이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사회일테고, 그런 사회를 위해서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를 우리는 지녀야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8-09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9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집을 읽으면서 황당한 경우를 많이 만나게 된다. 도대체 뭔 소리야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시집들이 많기 때문이다.

 

  언어의 마술사라고 할 수 있는 시인들이 자기들 언어를 갈고 닦아, 저만 알 수 있는 언어를, 그야말로 언어 연금술사처럼, 다른 사람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언어를 만들어 내고, 그 언어들을 자기 맘대로 배열해 놓은 시집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이를 어떤 해설에서는 무궁(無窮)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끝을 알 수 없게 만드는 언어 배치... 그래서 무궁(無宮)이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잉태를 할 수 없는 자궁이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 실린 시를 해설하는 강계숙은 제목을 이렇게 달았다.

 

'무궁(無宮/無窮)의 꿈, 카산드라 콘체르토'라고.  

 

워낙 해설자들이 현란한 언어로, 또 전문가다운 지식으로 시를 해설해 놓아, 해설이 더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무언가를 잉태하지 못하고(無宮), 또한 언어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無窮) 것만은 맞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카산드라 콘체르토'라니... 카산드라가 누군가. 예언을 하지만 그 예언을 누구도 믿지 않는 예언자 아니던가. 카산드라는 옳은 예언을 한다. 그러나 누구도 카산드라가 한 말을 믿지 않는다.

 

믿지 않기에 따르지 않는다. 트로이가 멸망할 것을 알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카산드라지만 트로이가 멸망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콘체르토라니... 이게 이해가 안 된다.

 

콘체르토를 찾아보니, 협주곡이다. 협주라는 것은 서로 어울림이다. 어울림... 시는 바로 우리들 삶과 어울리기에 지금까지 존재해 오지 않았던가.

 

잉태도 하지 못하고, 끝도 모르는, 그러나 누구도 믿지 않는 말들이 우리와 함께 있다니... 협주하다 하고는 웬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는데... 콘체르토라는 말을 찾아봤더니, 라틴어로는 경쟁하다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경쟁이 무엇인가. 그냥 상대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함께 공존하는 것이 바로 경쟁 아닌가. 상대가 없으면 경쟁도 없다. 그렇다면 경쟁은 바로 협주다. 삶의 협주.

 

시가 난해해 질수록 시는 우리에게 카산드라의 말로 다가온다. 무언가가 있기는 있는 듯한데, 현실에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런 말... 그럼에도 그 말은 우리와 함께 한다.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해설을 읽으며 이 시집에 나온 시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기묘한 협주다. 해설의 현란함은 그렇다 해도, 해설 마지막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무엇보다 무궁(無宮/無窮)의 실존성을 정시(正視)하는 자기 성찰적 시선이 이러한 언어적 자의식과 결합할 때, 그의 시는 아름답게 빛난다. 만일 그중 가장 아름다운 한 편을 고르라면, 주저 않고 「콘체르토」를 꾭으리라.' (127쪽)  

 

나 역시 이 시집에서 이 시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무엇이라 설명하지 않아도 그냥 마음 속으로 파고든 시...

 

특히 이 시에 쓰인 구둣점을 보라. 마침표가 하나도 없다. 보통 마침표를 쓸 만한 곳에도 시인은 쉼표를 쓰고 있다.

 

시는 끝나지 않았다. 끝이 없다. 잠시 숨을 고를 뿐이다.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언제나 과정에 있는 것, 시는 마침이 아니라 출발이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는 쉼터, 그것이 바로 시다.

 

콘체르토

 

  섬이 있다네, 섬과 교회가 있다네, 섬에는 우체국이 있고 좁은 길이 있고, 어둠 속에 숨은 달이 길의 끝을 자꾸만 늘이고 있다네, 바다는 끝내 수평선에 목을 매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네,

 

  뒤돌아보면 하나 이상의 하나가 자꾸만 따라온다네, 앞서 가지도 않으면서 기다리지도 않으면서, 섬의 하루는 달빛을 따라 바다로 나간다네,

 

  오늘은 만선이었고, 만선 직전의 어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네, 얼마나 더 가야, 그 섬에 닿을지, 얼마나 더 가야, 나는 섬 밖에서 섬을 바라볼 수 있는지, 누군가 모든 길들을 처음으로 되돌리고 있는데,

 

  교회의 종탑은 순간 반짝인다네,

 

최하연, 피아노, 문학과지성사, 2007년. 31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8-08 0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8 15: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의 퀴어 - 근대의 틈새에 숨은 변태들의 초상
박차민정 지음 / 현실문화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근대의 틈새에 숨은 변태들의 초상'이라고 작은 제목을 붙였다. 제목만 보면 자극적인 어휘를 써서 사람들의 흥미를 끌려고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선 '퀴어'라고 하면 '이상한'이라는 의미가 있으니,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보통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의 퀴어라고 했으니, 지금 이야기가 아니니, 사람들이 어떤 도덕적 잣대를 지니고 읽어나가지 않아도 된다.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가 무엇인가. 바로 현재를 이루고 있는 바탕 아닌가. 과거는 그냥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라 지금을 이루는 구성 요소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퀴어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떻게 지냈고,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를 알면 지금 성소수자들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지녀야 할지를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조선시대... 이 책을 읽다보면 조선시대가 아니라 조선 말기부터 일제시대까지 신문기사나 다른 기록을 통해본 소수자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소수자들이 많았다는 사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성을 꼭 양성으로만 판단하지 않았다는 것.

 

남성으로 태어났지만 여성의 말투와 여성의 복장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인정해주었다는 것, 오히려 성소수자에 대한 박해는 일제시대를 통해서, 우리가 근대화 되는 시기에 더욱 강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이 전해주는 장점은 단순하다. 성소수자들. 오늘날 갑자기 뚝 떨어져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 아니라는 것.

 

성소수자들은 어느 시대에도 있었다는 것, 그리고 사회는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고민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는 것.

 

일각에서 성소수자들을 사탄이라고 몰아부치는 경우가 있는데, 이들이 이 책을 읽으면 어떤 생각을 할까.

 

그들이 미개했다고 생각하는 조선시대에서조차도 이런 성소수자들을 비롯한 소수자들을 포용하는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 어떤 것이 발전한 사회일지 이 책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8-07 1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7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젊은 시절 읽으면서 왜 이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하는지 이해를 못 했다. 그냥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 아닌가 하는 생각만 했다.

 

체코를 침공한 소련군에 의해 생활이 깨뜨려진 사람, 토마시. 그는 능력있는 외과의사이지만 소련의 침공으로 스위스로 간다. 그러나 자기 곁을 떠나는 테레자를 따라 다시 체코로 오게 되고, 외디푸스에 대한 글을 썼다는 이유로 의사 자리에서 쫓겨나 유리 닦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나중에 테레자와 농촌으로 가서 살다가 트럭 사고로 죽었다고 나오고, 여섯 번의 우연으로 토마시와 살게 된 테레자 역시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켜주는 사람으로 토마시를 생각하고, 그와 함께 살지만, 그녀 역시 망가진 삶을 살게 된다.

 

여기에 화가인 사비나가 나오는데, 이 사비나만이 끝까지 살아남는다. 그리고 사비나가 사귀던 남자 토마시가 아닌 프란츠 역시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소설은 이 네 사람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 중에서 특히 중요한 주인공은 토마시와 테레자이다. 이들의 삶은 어떻게 보면 무겁다. 정치적인 격동기에 자기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를 결정해야 하는 때, 어떻게 삶이 가벼울 수가 있는가.

 

여기에 영원회귀와 일회성이 나온다. 우리 삶이 영원회귀하는가, 아니면 일회로 그치고 마는가. 작가는 우리 삶은 일회적이라고 한다. 그것도 우연으로 점철된 삶이라고.

 

그러므로 우리 삶은 무거울 수가 없다. 삶이 반복된다면 가벼울 수가 없다. 내가 살았던 삶을 또 살게 되는데, 어떻게 가벼울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종교를 가진 사람들, 삶이 무거울 수밖에 없다. 그들 삶은 무겁다. 그들은 내세를 생각하고 지금 삶 건너 편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 삶이 그럴까.

 

삶은 순간의 연속이고, 그 순간은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우연들일 뿐이다. 혹 반복되더라도 그것은 우연이지 필연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삶은 가벼워야 한다.

 

하여 소설 제목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삶은 우연이다. 우연의 반복일 뿐이다. 그렇게 가볍다. 그 가벼움이 우리를 참을 수 없게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는 삶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왔다가 사라지는 인간이 자신이 존재했다는 의미를 찾지 못하면 그것은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토마시나 테레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 토마시가 테레자와 살면서도 여러 여자들을 만나고, 그들과 사랑을 나누는 것은 바로 자신의 존재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기 위한 몸부림, 이는 삶은 순간이라는 것을 의식하게 해준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 보자.

 

삶은 순간의 연속이고, 우연의 연속이다. 그렇게 가볍다. 가볍기 때문에 그 순간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다음은 없다. 다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 순간에 충실하기 위해서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토마시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살지 못하고, 또 순간의 사랑으로 테레자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데... 그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다만, 최선을 다해도 비극에 빠질 수 있다. 이를 소설에서는 외디푸스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토마시가 외디푸스를 예로 들어 모르고 행동했다고 잘못이 없다고, 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듯이, 우리 삶도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우연의 연속이지만, 결과는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

 

그러므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그렇게 삶은 가볍지만 참을 수 없을 만큼 무겁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사, 삶에서 나를 만나다 -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고 서로 위로하는 수업 성찰
김태현 지음 / 에듀니티 / 201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선생 노릇하기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이리라. 어떤 사람은 그만큼 선생들은 쪼잔해서, 먹을 똥도 없다는 뜻이라고 하기도 하고, 선생들은 꽉 막혀서 배출을 하지 않기 때문에 너무 냄새가 심해 먹을 수가 없다는 뜻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 말들이 뜻하고 있는 것은 한 가지다. 선생 노릇 쉽지 않다는 것. 쪼잔하다는 얘기는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해 그만큼 구체적으로, 세심하게 계획하고 실행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고, 꽉 막혔다는 얘기는 자기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원칙을 지키며 타협하지 않는다는 얘기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다른 쪽으로 해석을 하면 그래서 선생들은 인정을 받을 수가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쪼잔하든 구체적이고 자세하든 다른 사람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올 수가 있고, 꽉 막혔든, 원칙에 충실하든 역시 상대에게는 구속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생으로서 인정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최근에 교사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고 있고, 교사들에 대하여 방학을 없애야 한다는 국민청원도 추진되고 있는 상황에, 교사들이 성추행을 했다는 #미투 운동도 일어나고 있으니... 교사들은 사면초가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솔직히 누가 교사를 인정하나? 우선 교사들을 지원해야 할, 이름도 참 교육지원청이라고 바꿨음에도 불구하고 장학사(관)들이 있는 교육청은 여전히 교사 위에 군림하고 무엇을 하라고 지시를 내리고만 있고, 교육청 위에 있는 교육부가 과연 교사들을 믿고 있는지, 그들이 교육제도를 바꾸기 위해 현장 교사들이 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적이 있는지 생각해보면 없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고.

 

교육과 관련있는 이런 조직이 이미 교사를 무슨 종 취급하거나 죄인 취급하고 있는 현실에서 교사들의 자존감은 한참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교사들을 더 끌어내리는 집단이 있으니 바로 학부모(부모가 아니라 학부모다. 학부모가 되지 말고 부모가 되라는 광고가 있을 정도니, 우리나라에서 학부모란 말은 긍정보다는 부정의 의미가 더 강하다)들이다. 가장 교사들을 믿지 못하는 집단, 자기 자식들을 맡겼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나게 교사들을 불신하는 집단이 학부모들이다.

 

이들은 학교를 시장으로 판단한다. 상품이 학교에 들어왔다. 자식들이 상품이라면 교사는 판매자다. 소비자자 원하는 상품을 내어놓아야 한다. 그러니 소비자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교사들은 무능한 교사일 뿐이다.

 

소비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성, 전인? 아니다. 오로지 좋은 성적, 좋은 대학일 뿐이다. 이것을 교사들이 만족시키지 못하면 무능한 교사일 뿐이다.

 

상품으로 교육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교사를 대하면, 그리고 교사를 존중하면 교육은 좀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사람은 없고 상품만 넘치는 곳, 그곳이 바로 학교다. 학부모는 학교를 시장으로 만들고 있다.

 

한 집단을 더하자. 교사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학생들이다. 학생들, 교사의 존재이유기도 하지만 교사를 포기하게 만드는 존재이기도 하다.

 

학생들에게만큼은 인정받고 싶어하는 교사들이지만 학생들에게 유독 인정을 받지 못한다. 그 모습이 바로 수업시간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어떤 수업을 해도 듣지 않는 학생들이 있다. 있다가 아니라 많다.

 

최근에 교사들에게 온갖 수업 방법에 대한 연수, 그리고 수업방법론이 나온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수업 붕괴라는 현실에서 교사들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각종 방법론을 들고 나온 것 아닌가.

 

이 책을 쓴 김태현 교사도 그런 방법론을 전파한 사람 중에 하나다. 교사들에게 수업 붕괴를 막을 방패를, 수업 혁신을 이끌 창을 줄 수 있다고 믿고 나름 열심히 활동한 교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교사를 위로하는 글을 썼다. 수업 혁신, 아니 교육이 사는 길은 방법론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말하고 있다.

 

수업을 살리는 길은 기술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고, 온갖 교수법에 있지 않고 바로 교사의 삶에 있다고 하고 있다.

 

우선 교사가 행복해야 한다고. 교사들은 누구나 어려운 길에 있다고. 밤하늘에 별이 있는데 별을 볼 수 있는 학생들이 거의 없듯이, 학생들 가슴에 별을 심어주고 싶은데,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고 있다고...

 

학생들 가슴에 별을 심어주는 일은 기술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우선 교사들 자신이 별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별을 가슴에 심고 있어야 한다고.

 

그래 내가 마음이 편해야 다른 사람을 편하게 대할 수 있는데, 교사는 학생을 보기만 하고 자신을 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고. 이제는 교사들 자신을 보아야 한다고.

 

어떻게? 바로 이 책에서 그림과 시, 글을 통해서 교사들 마음을 위로해주고 있다. 딱히 어떤 방법론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지금 교사들에게는 방법론으로 대변되는 기술이 중요하지 않고 교사들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교사들이 자신들 삶을 보고 힘듦을 인정하고 서로를 위로하면서 교육활동을 하는 것. 그렇다. 이 책은 교사들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이다.

 

사방에서 교사를 비난하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이 책에서는 그것은 교사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고 있다. 그냥 따스하게 교사를 감싸주고 있다. 바로 여기서 시작하자고. 나만 힘든 게 아니라고. 우리 교사들은 모두 힘들다고. 서로 손을 잡아주자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 교사들이 처한 상황, 고민을 알 수 있게 된다. 남 앞에 선다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아니, 교사들은 남 앞에 서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결코 앞에 서지 않는다. 교사들 앞에 서 있는 존재는 바로 학생들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나도 이 책을 쓴 교사처럼 그림과 시 하나를 더하고 싶어졌다. 바로 이것이 학교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림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시는 서정춘의 '죽편1'

 

 

학생은 이 그림에서 마르가리타 공주와 시녀들 처럼 전면에 나와 있어야 한다. 이들이 바로 학교의 주인공이다. 그들은 정중앙을 차지하며 많은 부분을 차지해야 한다. 학교가 학생을 주인공으로 만들지 않으면 힘들어진다.

 

교사는 화가다. 벨라스케스 자신을 그림에 등장시켰다고 하는데, 뒷편에 그것도 가운데가 아니라 한쪽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학생들을 지켜봐야 하고, 그들의 마음에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 벨라스케스가 그림을 남겼듯이.

 

왕으로 대변되는 학부모, 교육청, 교육부 관료들은 멀찌감치 있어야 한다. 그림 속에서 거울 속에 있듯이... 이들은 나서서는 안 된다. 그냥 지켜봐주고, 지원해줘야 한다. 그래야만 학교가 제대로 운영된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이 명작으로 남듯이.

 

서정춘의 시를 보자. 그럼에도 교육은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학생이 학교에 다닐 때 완성되지 않는다. 서정춘 시는 짧다. 그런데 시 속에는 긴, 긴 시간이 담겨 있다.

 

  죽편1

     - 여행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서정춘, 죽편, 동학사. 2002년 2판 1쇄. 18쪽.

 

교육은 그만큼 멀다. 수업 하나하나는 밤이 깊을 수도 있다. 그리고 학생들이 가슴에 별을 심고 꽃을 피울 때까지 멀고 먼 시간, 긴 시간이 걸린다.

 

그 머언, 긴 시간을 보고 수업을 하는 교사, 그들이 삶을 보고, 삶을 사는 교사들이겠다. 이런 교사들에게 왜 지금 애들이 꽃을 피우지 않냐고 하는 사람, 이들은 교육을 모르는 사람이다.

 

교사에 대한 비난이 지금만큼 많을 때가 있었나 싶다. 하지만 이렇게 교사들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힘들어 하는 교사들 곁에 가만히 앉아 있어주는 이런 책, 이런 책을 쓴 교사가 있다는 것. 어쩌면 우리나라 교육이 여전히 좋아지고 있다는 얘기가 되는지도 모른다.

 

지치고 힘들고 우울함에 좌절에 빠진 교사들, 이 책은 이런 말을 해주고 있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ㅡ 우리 함께 하자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8-04 1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4 16: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