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마음에 따스하게 다가오는 시를 읽고 싶었다. 너무도 더운 날씨가 계속되는 가운데, 몸도 마음도 지쳐가는데...

 

  이 더위를 이길 수 있는 따스함. 그래 얼음같이 차가운 사람들이 아니라 따스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만난다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시는 대체로 따스하다. 마음을 따스하게 해준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시들도 있으나, 그런 시들을 제외하고 우리가 시를 가까이 하는 이유는 내 맘을 어루만져 주기 때문이다.

 

  시집을 뒤척인다. 어느 시나 하나 걸려라. 내 마음이 좀 따스해지게. 이열치열(以熱治熱)은 아니지만, 마음이 따스하면 몸은 시원해진다.

 

정끝별의 시집을 읽는다.

 

제목이 '은는이가'다. 주어를 나타내는 조사들을 묶어서 시를 썼다. 시를 읽어보면 '은는이가'는 '은는'과 '이가'로 나뉜다. 그럴 듯하다. 아이 그렇다.

 

'은는'은 주격조사가 아니다. 이는 보조사라고 하는 특수조사다. 문장에 특별한 뜻을 더해주는 조사라는 말이다. 반면에 '이가'는 주격조사다. 주어임을 나타내는 조사다. 그러므로 같은 주어를 나타낸다고 해도 어느 말이 붙느냐에 따라 미묘한 의미 차이가 생긴다. 그런 의미 차이를 시로 잘 드러낸 것이 정끝별 시집이 제목이 된 '은는이가'다.

 

그런데 이 시보다는 그냥 '펭귄 연인'이라는 시가 마음에 와 닿았다. 펭귄, 더위에 시원함을 불러 일으키는 동물 아닌가. 게다가 더위 때문에 고통받는 동물이기도 하지 않은가.

 

최병수가 심각한 지구온난화를 일깨우기 위해 얼음 펭귄을 조각해 환경문제 대회장에 전시를 한 적이 있다던데... 회의를 하는 동안에도 서서히 녹아내리는 펭귄 조각.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지 않으면 이렇게 펭귄들도 죽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렸던 작품인데...

 

정끝별 시를 읽으며 최병수의 펭귄 조각도 떠올랐지만, 그것을 넘어서 이렇게 우리가 살아간다면, 사랑한다면... 그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

 

  펭귄 연인

 

팔이 없어 껴안을 수 없어

다리가 짧아 도망갈 수도 없어

 

배도 입술도 너무 불러

너에게 깃들 수도 없어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껴안고 서 있는

여름 펭귄 한 쌍

 

밀어내며 끌어안은 채

오랜 세월 그렇게

 

서로를 녹이며

서로가 녹아내리며

 

정끝별, 은는이가, 문학동네. 2014년.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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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이름으로
이인휘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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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라고 앞만 보고 달려와서 이제는 꽤 앞에 왔으리라고 생각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아뿔싸, 바로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느끼는 낭패감.

 

온몸에 힘이 죽 빠지고, 도대체 지금까지 뭔 짓을 한 것일까 하는 자괴감마저 들고, 역사는 발전한다더니 그건 책에서나 가능한 일이었구나 하는 처참함마저 들게 된다.

 

87민주화 운동이 30년이 지났고, 민주정권도 탄생시켰었는데, 도대체 민중들의 삶이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

 

민주노조가 만들어진 지도 꽤 되었고, 노동운동이 힘을 발휘하던 때도 있었는데, 과연 노동자들의 생활이 나아졌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지 50년이 되어 간다. 강산이 다섯 번 바뀌는 세월이 흐른 것. 전태일 열사의 분신에 이어 수많은 열사들이 따랐다.

 

열사들... 너무도 슬픈 이름 아닌가. 자신의 몸을 불사를 수밖에 없었던, 가진 무기라고는 자기 몸밖에 없었던, 그래서 가장 소중한 자기 생명을 내던져야 했던 이들. 그들을 가리키는 이름 열사. 그런 열사들.

 

열사들이 많았다는 것이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에서 자랑거리가 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슬픈 우리 현실을, 각박했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죽음으로밖에는 저항할 수 없었던 그런 열사들을 가진 나라. 그 열사들로 인해 지금 우리가 있게 되었는데, 열사들이 그토록 원했던 사회를 우리가 만들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지금 현실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이 소설이 의미가 있다. 평전소설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달고 있는, 사실이지만 허구인 그런 평전이자 소설이다.

 

현대자동차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분신한 양봉수 열사를 중심에 두고 몇몇 허구적인 인물이 나와 당시 현실과 노동운동, 그리고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활까지를 보여주고 있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광주'다. 이름이 기막히지 않은가. 양봉수 열사 평전소설을 쓰면서 전체적인 서술자 이름을 광주로 하다니. 광주...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이름. 여전히 진행 중인 민주화 운동을 이르는 이름으로 이보다 좋은 이름이 어디 있는가.

 

광주... 많은 탄압을 받고 힘들게 힘들게 지금까지 왔지만, 여전히 광주는 진행형이니, 그 아들 이름이 '개벽'이고, 비정규직 노동자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농성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우리나라 70년대를 전태일 열사가 열었다면, 80년대는 광주가 열었으며 87년 민주화운동 이후에 봇물 터지듯 나온 노동자 대투쟁, 민주노조 건설 운동 등은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꿈꾼 것은 노동자만의 세상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 사람으로 대우받고 사는 사회였다. 사람이 사람으로 인정받는 사회, 그런 사회는 당연히 노동자를 사람으로 인정한다. 사람으로 인정하면 그에 합당한 권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기계 취급을 받았던 노동자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을 통해 이 소설은 너무도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들이 기계가 아니라 사람임을 인정받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는지. 험난한 과정을 거쳐 겨우 인간 대접을 받았더니, 외환위기로 인해 다시 인간 이하의 처지로 전락해 가는 과정이...

 

양봉수 열사와 같은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얻었던 노동자 권리들이 하나하나 다시 사라져 가고, 정규직이 비정규직으로 전락해 가는 현실이 이 평전소설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개벽을 꿈꾸지만 그 개벽은 오지 않았다. 오히려 개벽을 꿈꾸는 사람들을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떨어뜨리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 평전소설은 노동운동을 낭만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들이 절대적으로 옳았다고도 하지 않는다. 노조집행부의 무능, 변절, 자기 이익을 위한 행동 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또한 노동조합원이라고 해서 모두 동지애로 묶여 있다고도 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볼 수 있는 노동자들, 고뇌하는 노동자들,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동료들 곁을 떠나야 하는 노동자들, 그런 노동자들을 이용해 자기 이익을 챙기는 노조 간부들, 이를 더욱 활용해 노조를 와해시키는 자본, 공권력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정형화된 인물들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 상황에서 만날 수 있는, 또 겪게 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노동운동이 이렇게 굴러왔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비정규직이 너무도 많아진 현실에 처해 있다.

 

아버지들은 그래도 정규직 노동자로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파업 투쟁을 통해 임금 인상을 얻어냈다면 아들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로 하루하루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지내고 있는 것이다.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사회 민주화를 위해 최선을 다해 달렸다고 생각했던 아버지들이 어느날 눈을 뜨고 주위를 보니 이런 제자리다. 아니 더 뒤로 가 버린 자신들, 자기 자식들을 보게 된다.

 

이게 뭔가? 도대체 어째서 이렇게 됐는가?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이 평전소설은 광주를 통해 그 점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고 양봉수 열사 평전소설이라고 하지만 과거 인물에 대해 소개만 하는 책은 아니다. 바로 우리가 처한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그리고 이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이 책 서술자가 '광주'이고 그 아들이 '개벽'이듯이 광주는 아직도 개벽을 기다리며 진행 중임을 명심하게 한다.

 

읽으면서 슬프고 화나고, 지난 몇 십 년이 머리 속에서 주마등처럼 지나가기도 했던 그런 평전소설... 과거를 떠올리며 이제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생각하게 하는 그런 평전소설이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주었다. 오래 전에 받았는데.. 이제야 읽었다. 읽으려고 책을 집었다 다시 놓았다를 반복했다. 노동 열사에 관한 책, 마음이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읽어야 한다. 마음이 불편해야 한다. 그 불편함이 사라지는 때, 그 때가 바로 열사들이 꿈꾸던 것이 실현되는 때이기 때문이다. 읽으며 아직은 마음이 불편했다. '개벽'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개벽'이 높다란 고공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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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들레가 여기까지 치고 나올 줄은 몰랐다. 교육을 말한다는 잡지들 가운데 이런 주제까지 다룰 정도라면, 그것도 이런 식으로 다룬다면 민들레는 100호가 넘는 지금까지도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고 해야 한다.

 

  이번 호 기획은 '아이돌'이다. 사실 아이돌에 대해서는 상반된 입장이 있다. 아이돌을 열렬히 옹호하는 청소년 집단과 아이돌에 대해서 상업화된 상품에 불과하다고 폄훼하는 몇몇 어른 집단, 그리고 아이돌이 뭔데? 하며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집단.

 

  민들레가 표방하고 있는 이념이 무엇인가.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 아니던가. 스스로 서는데, 과연 아이돌은 스스로 섰는가라는 질문을 하면 예전에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아이돌 초창기에는 기획사를 통한 만들어짐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 아무리 학생들을 틀에 맞춰 만들어내려고 해도 어디 그런가. 학생들은 그런 학교에서 탈주를 감행하지 않았던가. 자기들만의 삶을 찾아서.

 

탈주를 감행한 학생들로 인해 공고했던 학교의 틀도 어느덧 유연해지고 있지 않았나. 그렇다면 기획사가 만들어냈다고 하는 아이돌들은 어떤가. 이들이 내내 기획사 의도대로만 움직이는가. 아니다. 이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기획사의 음악을 넘어 자신들의 음악을 하는 존재로.

 

이런 성공사례로 방탄소년단을 들고 있다. 단지 방탄소년단만이 아니다. 요즘 아이돌은 스스로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선 다음 이제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서로를 살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요즘 아이돌이다.

 

그런 아이돌을 기존 잣대로만 평가한다든지, 자기가 지니고 있는 선입견의 틀에만 집어넣고 본다면 문제가 된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학생-학부모-교사가 교육의 주체라고 하면서 학생을 소외시켜왔던 것이 현실 아닌가. 그런 현실에서 학생들은 자기 목소리를 스스로 내기 시작했고, 학교에서 더이상 할일이 없다고 생각한 학생들은 학교 밖으로 나가 생활하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아이돌들 역시 자기들 음악을 하게 되었고, 그런 아이돌들을 편견을 지니고 보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데... 여전히 아이돌을 아이돌이라고, 그들을 하나의 음악인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번 호를 읽으면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갈 것이다.

 

함께 사는 사회에서 어느 특정 집단을 특정 집단으로만 규정짓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학생이라고 말하기 전에 사람임을 먼저 인식하고 행동해야 하듯이, 아이돌이기 이전에 음악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들을 만나게 된다면 우리가 지닌 편견을 많이 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편견을 씻어내도록 하는데 민들레 118호가 도움을 주었다. 단지 아이돌만을 다룬 것은 아니다.

 

대안학교가 20년이 지났는데, 그런 대안학교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방향 모색에 대해서 고민을 한 글(양희규, 대안학교의 진화는 가능할까)과 학교 밖 아이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글(양영희, 학교 밖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등등이 있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지금 우리 사회는 수능 개편안 때문에 시끌시끌하다. 어떤 개편안이 나와도 아마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하리라. 지금과 같은 교육제도가 지속된다면... 지금과 같은 사회가 지속된다면 말이다.

 

그래서 수능 개편안은 사회와 교육제도의 변화와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교육 변화, 사회 변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하는 잡지가 바로 '민들레'이기도 하고.

 

민들레 읽기 모임이 꽤 있나 보다. 책에 보면 많은 지역에서 읽기 모임을 하고 있으니... 이런 읽기 모임이 더 번져 나간다면, 교육 개혁이 단지 수능개편으로만 치우치지 않는 그런 정책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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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그라피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2
비톨트 곰브로비치 지음, 임미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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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책을 함부로 들고 다닐 수 없게 만든다. '포르노그라피아'라니... '유토피아'가 우리가 갈망하는 세상이라면, 포르노그라피아는 그렇다면 포르노를 갈망하는 사회라는 뜻 아닌가. 선뜻 집어 읽기 민망한 제목이다.

 

하지만 우리가 '포르노'를 거부한다고 해도 '포르노'는 이미 우리 일상에 너무 깊게 들어와 있다. 스마트폰 시대에 나이를 가리지 않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는 세계가 바로 포르노 세계다.

 

물론 포르노 세계는 현실세계가 아니다. 가상으로 연출된 세계다. 인간이 지닌 가장 적나라한 몸만을 욕망하는 세계를 화면을 통해서 교묘하게 잘 보여주는 세계다. 이런 세계에서 우리는 자신이 지닌 욕망을 배출하고자 한다.

 

화면을 통한 배출, 그러나 많은 세계에서 포르노는 금지 구역이다. 여기에 접근하면 도덕적인 비난을 받는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육체적인 향락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릴지라도 현실 세계에서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포르노 세계다.

 

금지되니 더 욕망하게 된다. 은밀하게 유통되던 포르노가 이제는 대놓고 버젓이 유통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유통이 성적 일탈을 더 많이 만들었을까? 과연 우리 인간은 그 정도밖에 되지 않을까.

 

포르노에 대해 논란이 일어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포르노가 미성년들에게 또는 유약한 정신을 지닌 - 그럼 포르노다 아니다 판단하거나 유통해도 된다 안 된다를 판단하는 법조인들과 윤리학자들은 강하고도 높은 정신력을 지니고 있다는 건지, 원... 그들이 벌이는 비도덕적인 모습을 너무도 많이 봐왔는데... -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쪽과 아니다 오히려 이런 매체를 통해서 해소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쪽으로 나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제목을 지닌 책을 들고 다니기엔 좀 그렇다. 아직 정리가 안 된 분야기이 때문이다. 제목이 민망하긴 하지만 읽어보면 '포르노'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인간이 지닌 욕망에 대해서, 그 파멸적인 모습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는 소설일 뿐이다. 물론 포르노가 인간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 역시 인간이 지닌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바로 젊음, 그래서 젊음이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보고자 하는 욕구다. 작가의 말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인간에게는 절대를 향한 갈망이 있습니다. 완전함, 충만함에 대한 갈망. 말하자면 진실, , 총체적 성숙 등에 대한 갈망이지요. 이 경우 인간에게 요청되는 건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완전히 실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포르노그라피아』에서는 인간의 또 다른 갈망 하나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더욱 은밀한, 어떤 의미로는 법에 배치되기도 하는 것으로, 미완성, 불완전, 열등함, 젊음 등에 대한 욕구입니다. (299쪽)

 

독일군에 점령당한 폴란드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하는데, 이야기가 참 이상하게 전개된다.

 

성적인 욕망을 실현하는 장면이 하나도 나오지 않음에도 자꾸만 포르노를 연상하게 만든다. 이유는 바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욕망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오던 관계인 헤니아와 카롤을 어른인 나와 프레데릭은 이들을 자신의 욕망에 맞게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즉 이들은 젊음의 욕정을 거리낌없이 발산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약혼을 했든, 안 했든 그들 젊음은 이미 육체의 욕망을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들 기대와 다르게 행동하는 헤니아와 카롤은 그들 각본에, 그들 시각에 맞지 않는 것이다.

 

이건 어른들 욕망에 맞지 않는 그런 행동이다. 이 행동은 잘못된 것이다. 이들은 욕망에 따라, 즉 젊음이라는 불완전한, 완성되지 않은, 그래서 어른에 비해 열등한 욕망을 발산해야 한다. 거리낌없이. 그래서 프레데릭은 세세한 각본을 짜서 이들을 자기 구미에 맞게 움직이게 한다.

 

이에 대한 희생양으로 알베르트를 삼는데... 헤니아의 약혼자인 알베르트가 희생양이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이미 어른이기 때문이다. 어른이기 때문에 같은 어른인 나와 프레데릭의 관심을 끌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가 헤니아와 카롤에 의해 몰락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또다른 어른들을 만족시켜 줄 수 있다.

 

여기에 이런 욕망은 조국이니 민족이니 하는 것을 뛰어넘는다. 독일군에 대항하던 사람, 시에미안을 죽이는 일에 이들을 가담시키는 것에서 어른들이 지닌 욕망을 극한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알베르트, 도덕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그는 자신이 시에미안을 죽이고 카롤의 칼에 죽는다. 이것으로 소설이 끝나는데...

 

젊음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관음... 그들이 불완전하게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싶은 갈망, 그 갈망을 이루기 위해 젊은이들의 행동을 유도하는 치밀함. 그리고 그것을 은근히 즐기는 어른들의 모습.

 

성적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포르노가 아니라, 불완전함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어른들의 욕망을 가감없이 그러냈다는 점에서 이 책 제목이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숨겨져 있는 어른들의 욕망, 함부로 드러내면 안 되는 그런 욕망을, 전쟁 중에서도 버리지 못하는 인간 본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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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2 0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12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최하연 시집을 읽으면 자꾸 '명사들'이 생각난다. 나이 들어 가면서 이상하게 명사부터 까먹게 되는데.

 

  그 단어가 무엇이었지, 그 사람 이름이 무엇이었지 하는 등, 자꾸 명사가 내 곁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데... 그래서 명사는 내게 또렷한, 너무도 명료한 무엇이어야 하는데...

 

  최하연 시집에는 참 많은 명사들이 나온다. 그런데 그 명사들이 이상하게 정렬되어 있지 않다.

 

  마치 내 기억 속에 무언가가 있지만 명료한 이름을 갖고 있지 못해 내 애를 태우듯이, 최하연 시들에 나오는 명사는 이상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저게 뭐지 하는 생각을 자꾸 불러일으킨다.

 

  익숙함을 낯설게 하기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에 무언가를 남긴다. 명료하게 이거다 하고 남기지는 않는데, 자꾸 시를 들춰보게 만든다. 이해하지 못해도 손이 가게 하는 시들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만으로도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가령 '봄비'라는 시를 보자. 이 시에 등장하는 명사는 비, 배꼽, 탯줄, 허공, 테러, 송홧가루다.

 

배꼽과 탯줄, 비와 허공은 연결이 되는데, 또 비와 송홧가루도 연결이 되는데... 다른 것들과는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연결이 잘 되지 않는 명사들이 제 자리를 차지하면서 어떤 의미를 만들어 낸다.

 

명사 자체도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다른 명사들과 관계를 맺으며 또다른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 시는 이렇게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보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준다.

 

   봄비

 

비의 배꼽은

쑥 들어간,

움푹 패인,

탯줄 끊고 떨어지는 허공,

속에 있다

 

테러에 가까운

송홧가루가 몽땅

젖는다

 

최하연, 디스코팡팡 위의 해시계. 문학실험실. 2018년. 119쪽.

 

이런 낯설게 하기의 정점이 바로 '끝난 것은 죽음'이라는 시가 아닐까 싶다. 아파트 화단을 보면서 무덤을 생각하다니... 전혀 낯선 비유인데, 읽다보면 그러네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끝난 것은 죽음

 

아파트의 화단은 무덤이어서

어느 날은 모자가 모종삽을 들고 찾아와

죽은 고양이를 묻고

어느 날은 노부부가 막삽을 들고 찾아와

아들 손주 며느리를 묻는다

그리하여 나무 아래 도둑고양이는

혼자 몰래 삼년상을 치르고

무덤 밑으로 상수도 오수관 소화전이라도 지나갈라치면

어느 쫑, 메리, 삼순이의 집안엔 액이 끼어

가세가 기우는 것

그리하여 한진택배 파란 차가

무덤가게 잠시 설 때마다

상주의 고구마나 나주의 배라도

명부에 잠깐 올렸다가

층층마다 나누어 먹고

봄날의 꽃들은 그토록

한꺼번에 피었다가 지는 것

아파트의 화단은 부의함도

리무진도 없는 것들의 선산이어서

구름이 발로 밟고

잡풀은 해마다 질기게 자라는 것

그리하여 누군가 화단 앞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거나

전화기를 들고 빙글빙글 돌고 있을 때

메리 쫑 삼순이의 후손은

뒷다리 한 개씩 고이 들고 화단에

저리도 장엄하게 쉬를 하시는 것

 

최하연, 디스코팡팡 위의 해시계. 문학실험실. 2018년. 110-111쪽. 

 

이렇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너무도 익숙해서 다르게 보지 못했던 것, 마치 명사가 한 개의 뜻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다른 의미는 생각하지 않는 것에 대해 시인은 아니라고, 잘 보라고, 더 생각하라고 하는 듯이 낯섬을 우리에게 선물해주고 있다.

 

익술함과의 결별.. 이것은 인생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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